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5대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 Senusret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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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누스레트 3세의 동상, 대영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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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세누스레트(Senusert) | |
부왕 | 세누스레트 2세 | |
선대 | 세누스레트 2세 | |
후대 | 아메넴헤트 3세 | |
묘지 |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 혹은 와흐-수트(Wah-Sut) 어딘가 | |
왕비 |
네페르테누트(Neferthenut) 케네메트네페르헤제트 2세(Khnemetneferhedjet II) 이타카이트(Itakayr) 메레트세게르(Meretseger)[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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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 케네메트(Khnemet) 메네트(Menet)♀ 메레레트(Mereret)♀ 세네트세네브티시(Senetsenebtysy)♀ 시타토르(Sithathor)♀[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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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878년~ 기원전 1839년, 재위기간 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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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중왕국 12왕조의 5대 파라오이다.2. 통치
고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나일강 이곳 저곳에 요새를 세웠다.[3] 또한 남방의 누비아 유목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선제적인 공격을 퍼붓는 등 상당히 호전적인 왕이었다. 파라오는 남자는 죽이고 여자, 어린아이들은 모조리 노예로 끌고 들어오는 가혹하기 없는 4번의 군사 원정으로 누비아 반란의 싹을 잘라버렸고, 누비아가 평정되자 시리아, 팔레스타인 유역을 정벌해 아시아 쪽의 위협을 차단했다. 하지만 마지막 누비아 원정에서 나일강의 수위가 많이 낮았었기 때문에 배가 누비아에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도에 퇴각했다고 전해진다.내적으로는 지방 총독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파라오에게 힘을 집중시켰으며, 제대로 된 군주제를 지향하며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이렇게 철권통치를 통해 국가를 다스린 정복군주였기에 훗날 역사학자 마네토나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등이 적은 전설적인 파라오 세소스트리스[4]의 모델이 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활발한 군사 활동으로 이집트의 변경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한 뒤, 재위 20년 되는 해에 아들인 아메넴헤트 3세를 공동 파라오로 임명하고 슬슬 실질적인 권력을 아메넴헤트 3세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 세헬 섬에 운하를 파는 과정을 기록한 비문을 세웠고, 아비도스와 메다무드에 사원과 마을을 세웠다. 또한 메다무드 지역에도 또다른 사원을 지었다.
3.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
이름 | |
뜻 | |
높이 | 78m |
경사 | 56° 18' 35" |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는 스네프루의 붉은 피라미드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세누스레트 3세의 특이점은 동쪽에 위치한 사원이 매우 작아졌다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인 장례 문화의 쇠퇴를 나타낸다. 하지만 남쪽에는 대형 사원이 위치해 있다. 피라미드의 입구는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왕의 묘실은 첫 발굴후 발견까지 몇 달동안 못찾았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같은 특징들로 인해 세누스레트 3세는 이 피라미드에 묻히지 않았고 아비도스의 와흐-수트(Wah-Sut) 어딘가에 묻혔을 수도 있다는 학자들도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