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초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1세 Amenemhat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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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에 새겨진 아메넴헤트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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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아메넴헤트(Amenemhat) | |
부친 | 세누스레트(Senusert) | |
선대 | 멘투호테프 4세 | |
후대 | 세누스레트 1세 | |
묘지 |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 | |
왕비 | 네페리타체넨(Neferitatjenen) | |
자녀 |
세누스레트 1세(Mentuhotep IV)♂ 네페루 3세(Neferu III)♀ 네페루셰리트(Neferusherit) 카예트(Kay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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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991년 ~ 기원전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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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 제12왕조의 창시자.제11왕조의 파라오이자 전임인 멘투호테프 4세를 몰아낸 찬탈자라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한 기록이 없기에 찬탈자 여부는 불명이다. 다만 아메넴헤트 1세는 제11왕조 출신이 아닌데다가 멘투호테프 4세의 미라와 왕묘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제11왕조 파라오의 왕명표에서 멘투호테프 4세는 빠져있다는 점 등 미심쩍은 부분이 여럿 있다.
2. 상세
왕실 출신이 아닌 아메넴헤트는[1] 정통성 부분이 취약하다는 점을 인지하여 귀족과 총독을 억제하고, 지방행정구분 재편성 및 국경방비체제 확립에 힘썼다.왕권 강화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집트 제7왕조때부터 시작된 제1중간기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제1중간기는 제11왕조때 멘투호테프 2세가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제10왕조를 복속시키면서 상•하이집트의 결속으로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남아있었기에 30년을 소비하여 수습할 수 있었다.
또한 수도를 테베에서 이티타위(Itjtawy)[2]로 천도한 시기가 아메넴헤트 1세의 치세였으며, 통치 말기엔 아들 세누스레트 1세를 공동 파라오로 지명하여 시리아, 누비아, 리비아의 군통수권을 위임했다.
기원전 1962년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당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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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로부터 너를 보호하여라 -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들의 마음을 항상 공포심으로 가지는 사람들 누구나
그들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말거라
너의 형제를 믿지 마라
동료를 만들지 마라, 아무 이익이 없다
아들 세누스레트 1세에게 자신의 암살 경위을 알리고, 후대를 당부하는 내용의《아메넴헤트의 교훈》이라는 글이 남아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암살 경위를 쓸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세누스레트 1세가 지어낸 프로파간다라는 것이 정설이다.tmmt rdi ib m-sA H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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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로부터 너를 보호하여라 -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들의 마음을 항상 공포심으로 가지는 사람들 누구나
그들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말거라
너의 형제를 믿지 마라
동료를 만들지 마라, 아무 이익이 없다
3.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
이름 | 수트 카우 아메넴헤트(Sut-khau Amenemhat) |
뜻 | 아메넴헤트가 부활하는 신성한 장소 |
높이 | 59m |
경사 | 54°27'44" |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는 이전 시대인 제1중간기때의 초라한 피라미드 형식에서 다시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형식으로 어느정도 돌아갔다. 또한 피라미드에 고유한 이름을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아메넴헤트 1세는 처음에는 테베에서 해당 피라미드를 지었으나 수도가 테베에서 이티타위로 바뀌게 되면서 이 피라미드도 이티타위 근처에 있는 리슈트(Lisht)로 옮겨졌다. 이후 피라미드는 순조롭게 지어졌으나 고왕국 시절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상태가 매우 나빴고, 현재는 거의 무너져내렸다. 피라미드 주변에는 아메넴헤트 1세를 섬겼던 고위 관료들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는 1882년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가스통 마스페로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으며, 1894년에는 J.E. 고티에가, 1895년에는 구스타브 제키에 의해 다시 발굴되었다. 이 발굴과정에서 상태가 안좋았던 피라미드는 더욱 상태가 나빠졌고, 주변에 있었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피라미드 내부는 물이 차있어서 아직까지 발굴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3]
4. 참고 항목
[1]
엘레판틴 지역의 유력한 귀족의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2]
현대의 파이윰(Faiyum) 지역
[3]
이미 수천년 동안 물에 잠겨있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보존상태는 매우 안좋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