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3대 파라오
베레니케 4세 Berenice IV Epiphane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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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베레니케 4세 Βερενίκη | Beren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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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77년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사망 | 기원전 55년 (향년 22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58년 ~ 기원전 55년[1] (약 3년)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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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셀레우코스 아르켈라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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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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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13대 파라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몰아내고 파라오에 등극했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했다.2. 생애
기원전 77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와 클레오파트라 5세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 자매로 클레오파트라 6세[2], 클레오파트라 7세, 아르시노에 4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있었다. 이중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까지는 동복형제이고, 아르시노에 4세부터 프톨레마이오스 14세까지는 이복형제이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전임 파라오 베레니케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잇따라 피살된 덕분에 파라오가 될 수 있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입지가 항상 불안했다. 그는 지중해 세계의 최강국인 로마 공화국에게 인정받고자 로마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찔렀다. 그러다보니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 되자, 그는 세금 인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고, 민중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기원전 5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뇌물을 받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그를 로마인의 친구로 추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는 법안을 원로원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이보다 앞서, 풀케르는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붙들렸을 때 키프로스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풀케르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그는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는 것으로 복수했다. 로마군이 키프로스에 상륙했을 때, 키프로스의 프톨레마이오스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자결했다. 형제가 비참하게 죽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가 두려워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막대한 세금을 강제 징수해서 로마에 그대로 바치고, 로마가 키프로스를 독단적으로 빼앗아갔는데도 되찾으려 하지도 않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결국 그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 베레니케 4세와 클레오파트라 6세를 공동 파라오로 추대했다. 클레오파트라 6세는 1년만에 사망했고, 베레니케 4세가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베레니케 4세는 아버지가 로마에서 자신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탁한다는 걸 알게 되자 100명의 사절을 보내 아버지의 무능을 성토하고 자신의 집권이 정당함을 알리려 했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사절단 대표 디오를 암살하고 다른 사절들에게 뇌물을 줬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 정계에 큰 소동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을 조사하려는 이들에게 뇌물을 찔러줘서 무마시키려 했다가 오히려 민중의 분노를 사자 이오니아의 에페소스로 피신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숨어지냈다.
한편, 베레니케 4세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남편감을 고르려 했다. 그녀는 처음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손인 셀레우코스[3]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알렉산드리아 시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그의 저속한 외모와 천박한 행동에 충격받아 생선장수라 부르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며칠 후 대중의 반감을 산 자와 같이 살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죽여버렸다. 베레니케 4세는 뒤이어 폼페이우스에 의해 폰토스 신전의 제사장으로 부임했으며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던 아르켈라오스[4]를 신랑감으로 고려했다. 기원전 56년 겨울, 아르켈라오스는 이집트에 와서 베레니케 4세와 결혼하고 왕으로 선포되었다.[5]
그러나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의 부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유대 지방에 주둔 중이던 2,000명의 로마 군단병과 500명의 속주 보조병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로 호송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했고, 이집트 수비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그는 권력을 되찾은 뒤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아르켈라오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펠루시움에서 요새를 지키다가 죽었다는 기록과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병립하고 있다.
베레니케 4세는 생전에 사치를 심하게 부려서 국고를 파탄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 때문에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하여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렸다. 이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를 디오케테스(dioiketes: 재무장관)로 임명해서 민중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게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가 지나친 착취를 일삼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고, 파라오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포스투무스를 일단 가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풀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