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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3대 파라오
베레니케 2세 Berenice II Euerget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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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베레니케 2세 Βερενίκη | Beren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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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267/266년 | |
키레나이카 | ||
사망 | 기원전 221년 (향년 45-46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재위 기간 | 키레나이카 여왕 | |
기원전 258년 ~ 기원전 246년 (약 12년) |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1년 (약 25년) | ||
부모 |
아버지:
마가스 어머니: 아파마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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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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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프톨레마이오스 4세 아르시노에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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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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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레나이카의 여왕 및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3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의 결혼으로 키레나이카를 이집트에 재합병시키고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2. 생애
기원전 267년 또는 기원전 266년, 리비아의 그리스 도시 키레네의 집권자 마가스와 셀레우코스 1세의 딸 아파마 2세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네번째 부인 베레니케 1세의 아들인 마가스를 키레나이카(리비아 북부 해안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마가스는 기원전 276년 왕을 칭하고 이집트로부터 독립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제2차 시리아 전쟁을 치른 뒤 마가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그들 각자의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베레니케 2세의 약혼이 성사되었다.기원전 258년 부왕 마가스와 공동 왕으로서 키레네 여왕이 되었고, 기원전 250년 마가스가 사망한 뒤, 아파마 2세는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마케도니아 왕자 데메트리오스와 베레니케를 결혼시켜 데메트리오스가 키레네 공동 왕이 되었다. 그런데 데메트리오스는 도시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진위가 의심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와 아파마 2세가 연인이 되어 성관계를 줄곧 했는데, 베레니케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이성을 잃어 데메트리오스를 죽였지만 아파마 2세는 겨우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키레네의 지배는 공화 정부에 맡겨졌고, 기원전 246년 베레니케는 파라오로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면서 키레네는 이집트에 재합병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에클루스와 데모파네스라는 이름의 두 키레네인이 이끄는 키레네의 공화 정부를 전복하고 두 개의 항구 도시를 주변에 새로 세우게 하였다. 이 도시들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프톨레마이스'(오늘날 톨메이타), '베레니케'(오늘날 벵가지)라고 명명되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그의 여동생 베레니케가 셀레우코스 2세의 어머니 라오디케 1세의 음모로 아들 안티오코스와 함께 살해된 소식을 전해듣고 진노해, 셀레우코스 왕조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했다. 이때 베레니케 2세는 이집트에 남아 남편의 공동 파라오 지위까지 섭정하면서 홀로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245년 나일 강의 범람이 예전만 하지 않아서 기근이 들자, 그녀는 수입 곡물을 자유롭게 분배해 기근의 위협을 완화하였다. 또한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일 강 카노픽 지류 입구 근처 해안에 있는 곷인 케이프 제피리움까지 행차하여 아르시노에 2세가 아프로디테로 숭배되던 사원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때 남편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긴 머리를 희생하겠다고 맹세하고 머리를 삭발했다. 이 머리카락은 신전 안에 보관되었는데, 다음날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사제들은 하늘로 날아갔다고 여겼고, 궁정 천문학자 코논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별자리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를 넘어 로마 시대에도 인기가 많아 <베레니케 여왕의 머리카락> 전설로 전승되었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도 연극이나 시각 예술에서 그녀를 주제로 다뤘다.
기원전 244년 또는 243년, 베레니케 2세와 남편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국가 숭배에 통합되었고, 알렉산드로스 3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함께 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때 베레니케 2세는 독자적으로 '테아 에우에르게테스(Thea Euergetis: 은혜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녀는 종종 아프로디테 및 이시스와 동일시되었으며 특히 난파선에 대한 보호와 관련되었다. 베레니케 2세가 여성 파라오로서 어떠한 활약을 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시어머니 아르시노에 2세처럼 남편과 동격의 위치에서 대접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200년경 헬레니즘 예술가 소필로스가 이집트 멘데스에서 제작한 모자이크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뚱뚱한 얼굴에 눈을 크게 뜬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갑옷을 입었으며, 갑옷 아래에는 튜닉 목걸이를 하였고, 오른쪽 어깨에는 브로치가 달린 맨틀을 착용했다. 또한 등에 방패를 달고 있으며, 왼쪽 어깨 뒤에는 돛의 활대가 있다. 그리고 돌고래와 바다뱀, 헤랄드의 지팡이, 그리고 풍부한 뿔로 장식된 배의 뱃머리 문양이 새겨진 왕관을 쓰고 있다. 학자들은 이 모자이크의 베레니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력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22년 11월 또는 12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붕어했다. 그 후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베레니케 2세와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베레니케 2세는 얼마 더 살지 못하고 기원전 221년 초에 사망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왕의 섭정을 맡은 소시비오스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베레니케 2세를 독살했다고 한다. 이후 소시비오스가 국정을 전횡하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그늘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