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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 성의 주인"이며 그렇게 쓰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주로 요새화한 시설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통치하는 지위나 관직을 가리켰다.중앙집권제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서 흔히 보인다. 대표적으로 봉건제였던 중세 유럽이나, 폐번치현 이전의 일본에서 대영주인 다이묘(大名) 아래에 속했던 존재인 성주가 있다. 이들 성주는 현지에 기반을 둔 유력자 출신으로서 자기 권역 내에서는 (반)독립적 권력을 보유하였으며, 자의적으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하면서 통치 및 경영하였다.
반면에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확립된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성을 관리하는 책임자의 별칭처럼 쓰였고, 다른 문화권의 관직을 번역할 때 주로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분권적 질서를 겪어온 중세 유럽이나 일본 역사에 관한 서적에서는 자주 보이는 표현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어휘로 느껴지는 것이다.
2. 한국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성(城)을 후대의 현(縣)에 상응하는 행정구역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해당 행정구역의 지방관은 고유 관직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종종 한자어인 '성주(城主)'로 불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안시성 전투의 주역인 안시성주가 있다.[1]신라는 ' 삼한일통'을 전후하여 종래의 행정구역 단위인 성(城)·촌(村)을 현(縣)으로 전환했고, 관직 또한 '소수(少守)'와 ' 현령'으로 교체했다. '성주'라는 칭호는 이렇게 사라졌으나, 후삼국시대에는 호족들이 할거하면서, '장군'이나 '성주'를 자칭하여 다시 등장했다.[2] 또한 신라 말에는 각 주(州)의 도독과 태수를 '성주'로 통칭한 용례 또한 발견된다.
3. 유럽
중세 유럽에서 성주(Castellan; Châtelain)는 영주의 일종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협소하게는 중소 영주로서 성을 근거로 통치하는 통치 직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들 성주는 본래 프랑크 왕국시대에서 여러 관직에서 기원한 것으로, 각지에 파견된 장관( Comes)의 일종으로서 성채 방어를 위하여 임명되었다. 이후 제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중앙권력이 미약해지자 독립적 세력으로 발전하였으나, 애초에 그 권한이 한정적이었던 까닭에 유력 제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이들의 임지는 성채 및 그에 딸린 소규모 토지였는데, 성채가 위치한 곳은 많은 경우 성벽을 두른 도시이거나 나중에 도시로 발전한 곳인 까닭에 전통적인 도시영주인 주교 및 주교후의 봉신이 되거나 인근 백작(Comes)의 봉신이 되었다. 이들 주군들이 세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그 자리를 성장한 왕권과 결탁하여 자치권을 얻은 도시공동체가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계속해서 소규모 영주로 남게 되었다.
확장된 개념으로는 9세기 무렵부터 축성기술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자생적인 신흥 영주를 포괄하는 학술용어를 가리킨다. 이들은 프랑크 왕국 시절의 변경주장관( Marchio), 지방행정장관(Comes) 등 원래는 관직에 해당되는 지위였으나 프랑크 왕국 이후로 점차 독립영주로 발전한 영역제후(Princeps)와 대조적인 계층인데, 원래 영역제후의 봉신이었거나 토착 유력자 출신으로 성관(castle)을 거점으로 삼아서 본래의 영주를 무시하며 독자세력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에 지주의 대리인으로 등장한 마름처럼 일정한 영역의 관리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가신인 부백작(Vicecomes), 장원관리인(Steward), 종사(Serviens), 기사(Miles) 등이 좀 더 쉽게 기회를 얻었다. 또한 영역제후가 보유한 성관에 파견된 성주(Castellan)가 그대로 자기 임지를 가산화하거나,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 Baro) 출신 토호가 독자적으로 축성하여 성주나 다른 관직을 자칭하기도 했다.
10~12세기에는 이런 현상이 만연해지면서, 신흥 영주들의 할거로 인해 종래 영역제후의 세력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특히 11~12세기 남프랑스에서 아키텐 공작이나 툴루즈 백작 같은 유력 영주들이 통제력을 상실해버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이른 시기부터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가 발달한 서유럽 지역에서는 지방 유력자들로 대두한 성주들이 국왕 직속의 봉신이 되어 정식 작위를 하사받거나 아니면 국왕 직할의 지방관으로 신분을 전환했다. 따라서 성주(Castellan)는 작위가 아니라, 당시에 사용되었던 직책명이나 중세 전반기의 군소 유력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3]
반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의 수립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중부나 동부 유럽에서는 이들이 오랜 기간 토착세력으로 할거했고, 나중에 국왕이나 유력 제후에게 종속되면서 백작(Graf) 계열의 정식 관직인 'Burggraf'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들의 영지는 보통 하나 이상의 주(Gau)를 다스리는 일반적인 백작에 비해서 그 관할 지역이 좁고 세력도 영세했기에, 백작(Graf) 계급 안에서는 하급 서열로 통했다. 이들의 영지는 작지만 자신의 영지에서는 다른 백작과 동등한 권한이 주어졌기에, 한자문화권에서는 그 어원을 살려 Burggraf를 '성백(城伯)'으로 번역하고 있다. 참고로 후일 서유럽 지역에서 공식 작위로 도입된 자작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Burggraf와 동격으로 취급했다.
[1]
안시성주의 경우
연개소문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해당 사례를 근거로 고구려가 지방 토착세력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고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5세기 무렵에 지방통치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안시성은 고구려의 성들 가운데에도 당나라의 주(州)에 상응하는 단위인 '중성(中城)'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 처려근지(處閭近支)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토착 유력자가 아니라 고구려 5부 출신인 중앙귀족이 파견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안시성주는 연개소문 정권이 고구려 내부에서 널리 승인되지 않았다는 사례로 거론되는 편이다.
[2]
나말여초 지방세력가들을 호족으로 부르는게 옳지 않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은 호족 대신 당대인들이 사용한 성주나 장군이란 표현을 쓴다. 하지만 당시의 소위 '호족' 중에는 성주나 장군 칭호를 쓰지 않은 세력가도 있어서, 완전히 대체 가능한 용어가 아닌 문제는 있다.
[3]
이는 근대 귀족계급체계에서 성주가 작위로 포함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동격으로 취급되었던 서유럽의 자작이나 중·동유럽의 성백 같은 경우 성채 근방에만 영향을 미치던 것과 달리 그보다는 좀 더 넓은 영역을 책임진 까닭에 근대에도 작위체계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