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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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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400> 원종 사친 | 경종 사친 | 영조 사친 | 진종 사친 | |
저경궁 경혜인빈 김씨 |
대빈궁 옥산부대빈 장씨 |
육상궁 화경숙빈 최씨 |
연호궁 온희정빈 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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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사친 | 순조 사친 | 의민황태자 사친 | 폐지 | ||
선희궁 소유영빈 이씨 |
경우궁 현목수비 박씨 |
덕안궁 순헌황귀비 엄씨 |
의빈궁 의빈 성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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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 宜嬪 成氏 |
|||
의빈 성씨 묘 전경 | |||
출생 | 1753년 7월 26일 | ||
사망 | 1786년 10월 24일 (향년 33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중희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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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의빈창녕성씨지묘 (宜嬪昌寧成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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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 조선 상의 | ||
1782년 이전 ~ 1782년 10월 13일 | |||
조선 소용 | |||
1782년 10월 13일 ~ 1783년 3월 21일 | |||
조선 의빈 | |||
1783년 3월 21일 ~ 1786년 10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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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창녕 성씨 | |
휘 | 덕임(德任) | ||
부모 |
부친 - 증 찬성
성윤우 (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모친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 (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
||
형제자매 | |||
배우자 | 정조 선황제 | ||
자녀 | |||
봉작 | 상의(尙儀) → 소용(昭容) → 의빈(宜嬪) | ||
사당 |
의빈궁(宜嬪宮)[3] 안현궁(安峴宮) - 이칭[4]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의 후궁.[5] 본관은 창녕 성씨(昌寧成氏)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10세 무렵에 궁녀로 입궐했다. 21세에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 곽장양문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6] 정조의 《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성품이 단정하고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재능·기술·예술까지 두루 갖춘 팔방미인이다.
정조가 내린 승은을 15년간 두 차례 거절하는 등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정조가 의빈의 하인에게 벌을 내리자 비로소 후궁 첩지를 받았다.[7]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으나 옹주는 경기(驚氣)[8],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조졸했다. 뒤이어 회임 중이던 의빈도 당시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의빈의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現 효창공원) 왼쪽 언덕에 마련되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과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연간에 제사궁(祭祀宮)을 의빈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七宮)에 제향 되었다. 순종(純宗) 재위 기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제외됐다.
1920년 대부터 묘역이 일제에 의해 골프장과 유원지화되었고 1944년에는 전쟁 희생자를 위한 충혼탑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의빈과 문효세자의 무덤은 각각 서삼릉 후궁 묘역과 효창원으로 이장됐다.
2. 생애
2.1. 가계
의빈의 본관은 창녕 성씨(昌寧成氏)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1753년( 영조 29)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증 찬성 성윤우(成胤祐)이고 모친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이다. 외조부는 통덕랑 임종주(林宗胄)이다.[9]용재총화, 악학궤범 등의 저자 성현(成俔)[10]의 11대손이지만 중간에 가계가 영락했다. 부친 성윤우[11]는 본래 홍봉한( 혜경궁 홍씨의 부친,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12]였다. 신분은 낮고[13] 집안이 가난하고 변변하지 못해서[14] 늦은 나이에 무관의 반열에 올라 1753년(영조 29)에 교련관, 1754년(영조 31)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 1761년(영조 37)에 유원 첨사(첨절제사)에 올랐다.[15]
부친 성윤우는 정실 장흥 마씨, 부안 임씨, 단양 지씨 사이에서 슬하에 5남 3녀를 뒀다. 성담(成湛), 성협(成浹), 성완(成浣)[16], 성흡(成洽)은 무과에 급제했다. 성담은 무관직을 제수 받기 전에 사망했다. 성완은 문효세자가 태어나고 정조에 의해 어영청 군교에서 파면되었으나 성협과 동궁의 내례(內隷: 하인)가 되었다. 이후 성협은 절충장군[17], 성완은 부사용, 성흡은 만호까지 올랐다.
족보에 오르지 못한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소실, 고모는 정방(鄭枋)의 소실이 되어 인척 관계가 되었다. 영조 때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홍낙성은 1783년(정조 7)에 좌의정이 되었다. 정방은 1784년(정조 8)부터 부총관, 한성 좌윤, 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786년(정조 10)에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18]
2.2. 입궁
1762년(영조 38) 이후에 궁녀로 입궁했다.[19]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부친 성윤우가 홍봉한( 혜경궁 홍씨의 부친)의 청지기였던 인연으로 입궁했고[20] 혜경궁이 의빈을 거두어 친히 길렀다.[21]
다른 일화로 부친 성윤우는 전포 아문의 관리와 7,000냥을 범포(犯逋: 나라에 바칠 돈이나 곡식을 써 버림) 해서 죽을 고비를 겪었다.[22] 그러나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등에 이 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부친 성윤우는 평소 담벽증을 앓고 있었고 1761년(영조 37)에 무관직을 그만뒀다. 이 영향으로 의빈이 입궁하기 전에 가세가 기울었을 것으로 보인다. [23]
2.3. 《 곽장양문록》필사
《 곽장양문록》 필사 당시 의빈 성씨의 친필 글씨 |
2.4. 승은 거절 및 승낙
자세한 내용은 의빈 성씨/승은 거절 및 승낙 문서 참고하십시오.1766년(영조 42) 무렵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궁녀 신분이었던 의빈은 울면서 “ 왕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한 이후 정조가 다시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자 15년 전처럼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 방자, 무수리)을 꾸짖고 벌을 내리게 되자 승은을 받아들이고 상의(尙儀)[24]가 되었다.[25]
2.5. 자녀
황윤석의 《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이 1780년(정조 4) ~ 1781년(정조 5) 사이에 두 번 유산했다. [26][27] 반면 정조는 《 어제의빈묘지명》에서 합궁한 달에 의빈이 문효세자를 임신했다고 했다. 황윤석의 기록이 거짓일 경우 당시 호사가들 사이에서 의빈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던 것으로 보인다.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 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28]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14권, 1782년(정조 6) 9월 7일 신축 1번째 기사
1782년(정조 6) 음력 9월 7일 인시(새벽 3시 ~ 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29] 이때
혜경궁 홍씨는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30]와 유모 아지[31]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에
중희당을 건립했다.[32]“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 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28]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14권, 1782년(정조 6) 9월 7일 신축 1번째 기사
의빈은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정 5품 상의(尙儀)에서 정 3품 소용(昭容)으로 올랐고[33] 1783년(정조 7)에 정 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빈호 '의(宜)' 자는 정조가 직접 정했다.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34]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35]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35]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례를 그린 <문효세자책례계병> |
1784년(정조 8) 윤 3월 20일 묘시(오전 5시 ~ 7시)에 옹주를 낳았다.[36] 정조는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라고 했다.[37] 그러나 옹주는 병을 얻어 5월에 피접을 나갔지만[38] 5월 8일 밤부터 경기가 심해져 위중하더니[39] 5월 12일 신시(오후 3시 ~ 5시)에 경풍으로 요절했다.[40] 뒤이어 문효세자도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2.6. 사망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41]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42]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43][44]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45]
의빈은 칠정(七情: 마음의 병)으로 마음이 여리고 약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병에 걸려서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몸이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46] 그러나 정신이 어지럽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증상을 겪었다.[47]
정조가 의빈이 매일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지만[48] 병이 악화되어 1786년(정조 10)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49]의 몸으로 사망했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41]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42]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43][44]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45]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50]
3. 독살 의혹
독살 의혹이 있다.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
1786년(정조 10) 12월 1일에 정순왕후 김씨가 “ 은언군이 장남 상계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 했으니 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는데, 당시 상계군은 이미 의문사 한 뒤였다.[51] 이로 인해 구선복이 상계군을 추대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나자[52]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다.[53]…(중략) 기해년(1779년)에 이르러 홍국영(洪國榮)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또 나와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상의 나이 30이 채 차지도 않았는데 감히 왕자를 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삼아 가동궁(假東宮)이라고 일컬으면서 흉악한 의논을 마음대로 퍼뜨렸다. 주상이 그의 죄악을 통촉하고 그 즉시 쫓아내자, 흉악한 모의가 더욱 급해져서 밤마다 그의 집에 상계군을 맞이하여 놓고 널리 재화를 풀어 무식한 무리들과 체결하였으므로 잠깐 사이에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중략)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중략) 이때에 상계군이 불의에 죽었으므로 비록 그에게 무슨 아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방안에서 죽어 걱정이 조금 풀린 것 같지만 대의가 펴지지 못하고 윤강이 없어진 것은 진실로 그의 생사에 차이가 없다. 이러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중략) [54]
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
내관 이윤묵이 의빈에게 먹일 약을 자기 멋대로 달여 올렸다는 의혹이 일자 정조가 직접 심문한 적도 있었다. 결국 이윤묵은 1786년(정조 10) 11월 10일에 고향으로 방축(放逐: 자리에서 쫓아냄)[55] 되었으나 차후 유배되었고 1791년(정조 15)에 유배지 파주목에서 풀려났다.[56] 손용득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는데 1790년(정조 14)에 대사면(大赦免: 대규모로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으로 풀려났다.[57]대제학 김종수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어떤 인사가 찾아와서 이 종이 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종이쪽지에 ‘동네에 있는 손가(孫哥)란 놈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9월에 병환을 앓을 때에 내관 이지사(李知事)가 약물을 살펴보았는데, 약국의 약을 쓰지 않고 그의 약을 달여서 올렸으므로 그것을 먹고 그 즉시 죽었다. 비록 이런 일이 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하니 왕대비께서 이를 상감(上監)에게 고하자, 상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바로 성빈(成嬪: 의빈 성씨)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붙잡아다 그 즉시 내보내 목을 베려고 하였다.[58]
그런데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서 멀리 귀양을 보냈다가 11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대체로 이 내시는 일찍이 홍국영과 마음을 통해 체결하였는데 지극히 요악스러워서 옛날 조고(趙高)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임금의 총애를 받아 품계가 높았는데, 그의 생부가 처벌을 받았을 때 그의 품계를 삭탈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한 일에 있어서, 약을 조제하고 약을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니, 이는 궁중 안팎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으니,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중관(中官)이 궁방을 주관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시기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있었다. 그 단서의 유무를 기다려 문안(文案)을 내보여 주겠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친히 손용득(孫龍得)을 신문하였다.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내관은 바로 이윤묵(李允默)인데, 이윤묵이 귀양 갔을 때 그 집 늙은 여종이 신의 형수인 여복가(女卜家)에 와서 점을 쳤습니다. 그 여종이 말하기를 ‘우리 집 대감이 본궁을 주관하였는데, 혹 약을 쓸 때에 잘 살펴보지 않아 죄를 저질렀을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친하게 지낸 양반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여복 김아지(金阿只)에게 신문하니, 김아지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말하기를 ‘큰 상전이 갑자기 귀양을 갔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약물을 살필 때에 잘 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기에 와서 물어본 것이다.’고 하였는데, 손용득의 처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내관의 여종 악연(岳蓮), 악이(惡伊)와 대질시켰다. 손용득의 처 최아지(崔阿只)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점을 친 것을 보았는데, 여복이 그 여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신수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이런 죄를 지은 것이다. 이번 상사(喪事)는 혹시 약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닌가?’ 하니, 그 여종이 대답하기를 ‘우리 상전이 본궁을 주관하여 매사를 살피고 있었으니, 약을 쓸 때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악연이 공초하기를,
"사실입니다."
하였다. 다시 손용득을 문초하니,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말뜻의 줄거리를 모르고 갑자기 듣고 나니 놀랍고 분개하여 친한 사람에게 우연히 말한 것이지, 퍼뜨리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손용득을 형조로 넘겨 귀양 보내고, 악연은 형추하고 나서 먼 섬으로 귀양 보내 여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59] #
"어떤 인사가 찾아와서 이 종이 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종이쪽지에 ‘동네에 있는 손가(孫哥)란 놈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9월에 병환을 앓을 때에 내관 이지사(李知事)가 약물을 살펴보았는데, 약국의 약을 쓰지 않고 그의 약을 달여서 올렸으므로 그것을 먹고 그 즉시 죽었다. 비록 이런 일이 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하니 왕대비께서 이를 상감(上監)에게 고하자, 상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바로 성빈(成嬪: 의빈 성씨)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붙잡아다 그 즉시 내보내 목을 베려고 하였다.[58]
그런데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서 멀리 귀양을 보냈다가 11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대체로 이 내시는 일찍이 홍국영과 마음을 통해 체결하였는데 지극히 요악스러워서 옛날 조고(趙高)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임금의 총애를 받아 품계가 높았는데, 그의 생부가 처벌을 받았을 때 그의 품계를 삭탈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한 일에 있어서, 약을 조제하고 약을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니, 이는 궁중 안팎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으니,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중관(中官)이 궁방을 주관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시기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있었다. 그 단서의 유무를 기다려 문안(文案)을 내보여 주겠다."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친히 손용득(孫龍得)을 신문하였다.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내관은 바로 이윤묵(李允默)인데, 이윤묵이 귀양 갔을 때 그 집 늙은 여종이 신의 형수인 여복가(女卜家)에 와서 점을 쳤습니다. 그 여종이 말하기를 ‘우리 집 대감이 본궁을 주관하였는데, 혹 약을 쓸 때에 잘 살펴보지 않아 죄를 저질렀을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친하게 지낸 양반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여복 김아지(金阿只)에게 신문하니, 김아지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말하기를 ‘큰 상전이 갑자기 귀양을 갔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약물을 살필 때에 잘 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기에 와서 물어본 것이다.’고 하였는데, 손용득의 처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내관의 여종 악연(岳蓮), 악이(惡伊)와 대질시켰다. 손용득의 처 최아지(崔阿只)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점을 친 것을 보았는데, 여복이 그 여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신수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이런 죄를 지은 것이다. 이번 상사(喪事)는 혹시 약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닌가?’ 하니, 그 여종이 대답하기를 ‘우리 상전이 본궁을 주관하여 매사를 살피고 있었으니, 약을 쓸 때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악연이 공초하기를,
"사실입니다."
하였다. 다시 손용득을 문초하니,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말뜻의 줄거리를 모르고 갑자기 듣고 나니 놀랍고 분개하여 친한 사람에게 우연히 말한 것이지, 퍼뜨리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손용득을 형조로 넘겨 귀양 보내고, 악연은 형추하고 나서 먼 섬으로 귀양 보내 여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59] #
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
황윤석은《 이재난고》에 “의빈은 자현[60]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죽었다. 화빈 윤씨의 처소에서 은밀히 독을 써서 해친 까닭에 화빈에게 중한 죄를 물어 내쳤다.”라고 기록했다.[61] 그러나《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등에서 화빈 윤씨가 출궁했다는 기록은 없다.다만 화빈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62]가 1780년(정조 4) 이후부터 외척을 자칭하며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한 일,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호칭 정하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고 했던 일로 인하여[63] 1787년(정조 11)에 귀양을 갔다.[64]
4. 사망 이후
4.1. 의빈묘
서삼릉 빈·귀인 분묘 집장지 의빈 성씨 묘 전면 # | 의빈 성씨의 묘비 # |
본래 의빈묘와 효창묘는 한곳에 있고 두 묘의 거리가 백 걸음 떨어져 있는데, 정조가 의빈의 생전 소망을 따랐다.[73] 숙종이 숙빈 최씨의 장지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74]의 산으로 정한 내관 장후재를 파직 한 전례와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75] 의빈묘에는 곡장,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 공원으로 격하되었고 1944년에 문효세자는 서삼릉 내 효창원, 의빈 성씨는 후궁 묘역으로 이장됐다.
4.2. 사당
1787년(정조 11)부터 의빈궁(宜嬪宮)과 의빈묘(宜嬪廟)를 혼용했다.[76] 1793년(정조 17)에 안현궁(安峴宮)이라 하기도 했는데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차렸기 때문이다.[77] 비슷한 예로 인조의 잠저가 한성부 회현방 송현(松峴)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다.[78]《황해도장토문적》은 1787년(정조 11)에 의빈궁(宜嬪宮)이라고 기록했지만[79], 《문희묘영건청등록》을 토대로 1790년(정조 14)까지 사당 명칭은 의빈묘(宜嬪廟)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795년(정조 19) 《내수사각방상하책》, 1797년(정조 21) 이후에 쓰인 《제물등록》[80], 1799년(정조 23) 《사전사례편고》[81]에 의빈궁(宜嬪宮)이 기재되어 있는데, 특히 《제물등록》은 국가에서 거행하는 제사에 필요한 제수(祭需)를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1795년(정조 19)에 의빈궁(宜嬪宮)이 명문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3. 칠궁
자세한 내용은 칠궁 문서 참고하십시오.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에서 ‘궁(宮)’은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을 일컬었다.[82] 이후 1898년(광무 2)에 《향수조사책》에서 이 궁들을 칠궁(七宮)이라고 했다.[83]
1908년(융희 2)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면서 의빈궁은 매안[84] 되고 제사는 원소[85]의 예법으로 지내게 되었다.[86] 다만 1909년(융희 3)《향비규정(享費規定)》에서 의빈궁의 제사 때 쓰인 금액에 대해 나온 점으로 보아 명칭까지 폐지되지는 않았다.[87] 훗날 1929년에 덕안궁( 순헌황귀비 엄씨)이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칠궁이 되었다.
4.4. 어제문
어제문이란, 왕이 직접 쓴 글을 말한다.4.4.1. 《 어제의빈묘지명》
자세한 내용은 어제의빈묘지명 문서 참고하십시오.《어제의빈묘지명》 이미지
정조는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손수 《어제의빈묘표》와 《 어제의빈묘지명》의 문장을 지었다.[88] 《묘지》에서 죽은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두 글에서 의빈 성씨의 생애를 돌아보며 세계(世系)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묘지》는 간략하게 피장자의 이력과 세계를 밝히지만, 정조의 어제는 다소 긴 문장으로 비문을 꾸몄다.
조선에서 배우자를 위해 묘표나 《묘지》의 문장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을 위한 비문은 어머니나 일족의 여성 어른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왕실에서도 역시 드문 일로 해창위 오태주(海昌尉 吳泰周)가 부인 명안공주를 위해 비석을 세웠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위해 어필로 비석을 세웠고, 영빈 이씨를 위해 어제영빈이씨백자묘지명을 지었다. 그리고 정조가 의빈 성씨를 위해 묘표와 《묘지명》을 지은 것을 꼽을 수 있다. 정조의 여인들 가운데 어제비를 받은 것은 의빈 성씨가 유일하다. #
특히 의빈 성씨의 《묘지명》은 국왕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로 이름 높던 이들이 글씨를 쓴 것으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경우이다. #
4.4.2.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묘표지명(御製宜嬪墓表誌銘)》 1책은 《어제의빈묘표(御製宜嬪墓表)》와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誌銘)》 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조가 1786년(정조 10)에 썼다.[89]내가 즉위한 지 10년이 되는 병오년(1786년) 9월 갑신(14일)에 의빈 성씨가 죽었다. 당해 5월에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 빈은 임신 중이었는데 해산할 달이 가까워지자 빈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빈이) 죽기 전날 저녁에 옷깃을 여미고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왕손을 번성하는 소망이 정전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신(천한 신하)에게 있는데 천신의 병이 깊어져 곧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걸맞지 않은 재앙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자주 정전에 나아가서 부지런히 후사를 구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체로 내전(
효의왕후)이 일찍이 자식을 낳고 기르지 못하였음을 평상시에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승은을 처음 내렸을 때 (빈은) 간절히 사양하며 감히 시중들지 아니하려고 틈을 타서 정성스럽게 아주 간절히 간하는 바가 한결같았다. 그런데 숨을 겨우 이어 가고 있을 때 오히려 기운을 내고 온 힘을 다하여 완연히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을 하였으니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하였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얼굴빛을 고치고 그러겠노라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부귀영화를 누리면 정위(정실)를 받들어 모시도록 핍박받는 것을 싫어하고 계속해서 첩이 정실을 능멸하고 본분을 멸시하였으며, 죽음에 임하면 염려하며 생가(生家)에 의탁하려 하였고 죽고 난 뒤에는 영광을 받는 요행에 연연하지 않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빈은 영화롭다 하여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고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는 스스로 서글퍼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고심하며 내전(효의왕후)이 뜻을 펼치고 소원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그만 둘 따름이었으니 그 어짊이 어찌 얻기 쉬울 수 있겠는가?
문효(세자)는 빈의 아들이다. 빈은 저군(왕세자)의 어머니가 되고 나서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삼가며 거처하는 집을 수리하지 않고 옷과 음식을 검약하고자 힘쓰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이 있기를 감히 바란 적 없거니와 다시 조금이라도 지난날에 비해 사치한다면, 내 몸에 재앙이 드는 것은 논할 겨를이 없을 것이며 어찌 동궁(왕세자)을 위해 복을 소중히 아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엄격하게 단단히 잡아 단속하는지라 일찍이 은총을 내린 적이 없었다. 이따금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빈은) 조금도 어려운 기색 없이 삼가 칙령을 지켰고 혹여 실수를 할까 두려워하며 시종일관 해이하지 않았다. (빈은) 궁궐에 거처 한 지 20여 년 동안 다른 사람을 흘겨보는 일이 없었고 특별히 내전(효의왕후)의 친애를 받았다. 내전은 그 죽음에 곡하며 형제간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몹시 슬퍼하였으니 그러한 어짊이 남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1753년) 7월 8일에 태어났고 향년은 34세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고려 중윤 인보가 시조이다. 중윤의 아들은 문하시중을 지냈던 송국이고 그의 증손은 검교정승을 지냈던 문정공 여완인데 비로소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을 이어나가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으나 그 후로 중간에 쇠하였다. 제릉( 신의왕후의 능) 참봉을 지냈던 만종이 비로소 막혀있던 벼슬길을 열었고 다시 3대가 지나서 군자감정을 지냈던 경은 곧 빈의 7세조와 고조가 된다. 증 찬성 윤우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빈의 부모이고 문효(세자)의 외가 사친(생외조부모)이기에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대저 여항의 비천한 곳에서 이처럼 빼어나게 어진 성품으로 태어나 원량(왕세자)이 탄생하자 빈의 지위에 오르는 은총을 입었으니 자못 우연이 아닐 듯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빈과 또한 배 속의 아이도 갑작스럽게 그 목숨을 잃었는데, 내가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은 단지 빈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닐 따름이다. (빈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서 경인(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정남향에서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고 문효(세자)의 묘와 백 보 떨어져 있는데 빈의 소원이었다. 죽은 자도 본디 앎이 있다고 하니 위로가 될 것이고 (서로의 무덤이) 매우 가까이 있으니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내가 빈의 언행과 본말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고 또한 묘석에 대략적으로 글로 새겼으니 후대로 하여금 빈의 어진 모습을 애석해하고 그 운명의 불행함을 슬퍼할 따름이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부귀영화를 누리면 정위(정실)를 받들어 모시도록 핍박받는 것을 싫어하고 계속해서 첩이 정실을 능멸하고 본분을 멸시하였으며, 죽음에 임하면 염려하며 생가(生家)에 의탁하려 하였고 죽고 난 뒤에는 영광을 받는 요행에 연연하지 않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빈은 영화롭다 하여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고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는 스스로 서글퍼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고심하며 내전(효의왕후)이 뜻을 펼치고 소원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그만 둘 따름이었으니 그 어짊이 어찌 얻기 쉬울 수 있겠는가?
문효(세자)는 빈의 아들이다. 빈은 저군(왕세자)의 어머니가 되고 나서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삼가며 거처하는 집을 수리하지 않고 옷과 음식을 검약하고자 힘쓰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이 있기를 감히 바란 적 없거니와 다시 조금이라도 지난날에 비해 사치한다면, 내 몸에 재앙이 드는 것은 논할 겨를이 없을 것이며 어찌 동궁(왕세자)을 위해 복을 소중히 아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엄격하게 단단히 잡아 단속하는지라 일찍이 은총을 내린 적이 없었다. 이따금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빈은) 조금도 어려운 기색 없이 삼가 칙령을 지켰고 혹여 실수를 할까 두려워하며 시종일관 해이하지 않았다. (빈은) 궁궐에 거처 한 지 20여 년 동안 다른 사람을 흘겨보는 일이 없었고 특별히 내전(효의왕후)의 친애를 받았다. 내전은 그 죽음에 곡하며 형제간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몹시 슬퍼하였으니 그러한 어짊이 남보다 훨씬 더 뛰어나지 않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1753년) 7월 8일에 태어났고 향년은 34세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고려 중윤 인보가 시조이다. 중윤의 아들은 문하시중을 지냈던 송국이고 그의 증손은 검교정승을 지냈던 문정공 여완인데 비로소 조선에 들어와서 벼슬을 이어나가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으나 그 후로 중간에 쇠하였다. 제릉( 신의왕후의 능) 참봉을 지냈던 만종이 비로소 막혀있던 벼슬길을 열었고 다시 3대가 지나서 군자감정을 지냈던 경은 곧 빈의 7세조와 고조가 된다. 증 찬성 윤우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빈의 부모이고 문효(세자)의 외가 사친(생외조부모)이기에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대저 여항의 비천한 곳에서 이처럼 빼어나게 어진 성품으로 태어나 원량(왕세자)이 탄생하자 빈의 지위에 오르는 은총을 입었으니 자못 우연이 아닐 듯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빈과 또한 배 속의 아이도 갑작스럽게 그 목숨을 잃었는데, 내가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은 단지 빈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닐 따름이다. (빈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서 경인(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정남향에서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진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고 문효(세자)의 묘와 백 보 떨어져 있는데 빈의 소원이었다. 죽은 자도 본디 앎이 있다고 하니 위로가 될 것이고 (서로의 무덤이) 매우 가까이 있으니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내가 빈의 언행과 본말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고 또한 묘석에 대략적으로 글로 새겼으니 후대로 하여금 빈의 어진 모습을 애석해하고 그 운명의 불행함을 슬퍼할 따름이다.
4.4.3. 《어제의빈치제제문》
《어제의빈치제제문》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 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고인이 된 아랫사람에게 음식과 슬픈 뜻을 표한 글을 내리고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건륭 51년 병오(1786년, 정조 10) 11월 신미 초하루 7일 정축. 국왕이 의빈 창녕 성씨의 영령에 유제하노라.
오호, 나는 오히려 빈의 죽음에 이처럼 슬프도다. 죽음의 변고는 참혹하고 인정이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은 문효(세자)를 잃고 곡하던 때보다 지극히 심한 일이 없었으나 오로지 이치대로 슬픈 마음을 풀어나갔다. 세월이 흐르고 추위와 더위가 바뀌는 동안 보통 때처럼 같이 웃고 말하며 슬픈 얼굴을 하지 아니하여 서로 담담하게 잊은 줄 알았다. 그러나 빈의 죽음으로 오히려 이와 같이 슬프도다.
오호라,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빈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문효(세자)의 형제이다. 문효(세자)는 볼 수 없어도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애하고 사모하기를 구했을 것이고 그 흡사하게 닮은 형제를 필히 기다렸을 것이다. 찢어지도록 참혹하여도 슬픈 마음을 풀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이치로 달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이제 빈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배 속의 아이 역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으니 문효(세자)의 자취와 남은 향기는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장차 어찌 구할 것이며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찢어지도록 아프고 참혹한 마음 역시 무엇을 말미암아 위로할 것이고 무슨 연유로 슬픔을 다스리겠는가.
나는 빈이 죽고 난 후에 비로소 문효(세자)의 흔적이 나날이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 슬프도다. 이에 지금의 슬픈 마음이 이전의 슬픔보다 아주 심한 까닭이 어찌 빈의 죽음만을 슬퍼하는 것이겠는가?
아, 후궁에 있어서 도리를 알던 그 어짊은 영예롭고 귀한 자리에서도 말과 행동을 삼갔으니 마땅히 복록을 받아야 마땅하건만, 문효(세자)를 잃고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다시금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저승 길에 이르렀으니 빈의 운명 또한 심히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보내 문효(세자)의 곁에 장사지내니 이는 진실로 빈의 소원이다. 현수(무덤 속으로 통하는 길)와 매우 가까워 영혼이 서로 통할 것이니 영원토록 슬프게 이별하는 한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위로할 것이다. 또한 슬픈 일은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아니한가?
아, 슬프도다.
부디 흠향 하라.
오호, 나는 오히려 빈의 죽음에 이처럼 슬프도다. 죽음의 변고는 참혹하고 인정이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은 문효(세자)를 잃고 곡하던 때보다 지극히 심한 일이 없었으나 오로지 이치대로 슬픈 마음을 풀어나갔다. 세월이 흐르고 추위와 더위가 바뀌는 동안 보통 때처럼 같이 웃고 말하며 슬픈 얼굴을 하지 아니하여 서로 담담하게 잊은 줄 알았다. 그러나 빈의 죽음으로 오히려 이와 같이 슬프도다.
오호라,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빈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문효(세자)의 형제이다. 문효(세자)는 볼 수 없어도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애하고 사모하기를 구했을 것이고 그 흡사하게 닮은 형제를 필히 기다렸을 것이다. 찢어지도록 참혹하여도 슬픈 마음을 풀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이치로 달랜 이유 역시 여기에 있었다.
이제 빈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배 속의 아이 역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으니 문효(세자)의 자취와 남은 향기는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장차 어찌 구할 것이며 무엇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찢어지도록 아프고 참혹한 마음 역시 무엇을 말미암아 위로할 것이고 무슨 연유로 슬픔을 다스리겠는가.
나는 빈이 죽고 난 후에 비로소 문효(세자)의 흔적이 나날이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 슬프도다. 이에 지금의 슬픈 마음이 이전의 슬픔보다 아주 심한 까닭이 어찌 빈의 죽음만을 슬퍼하는 것이겠는가?
아, 후궁에 있어서 도리를 알던 그 어짊은 영예롭고 귀한 자리에서도 말과 행동을 삼갔으니 마땅히 복록을 받아야 마땅하건만, 문효(세자)를 잃고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다시금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저승 길에 이르렀으니 빈의 운명 또한 심히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보내 문효(세자)의 곁에 장사지내니 이는 진실로 빈의 소원이다. 현수(무덤 속으로 통하는 길)와 매우 가까워 영혼이 서로 통할 것이니 영원토록 슬프게 이별하는 한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위로할 것이다. 또한 슬픈 일은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아니한가?
아, 슬프도다.
부디 흠향 하라.
4.4.4.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어제 제축문》을 지었다.[90]
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세월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동안 속세의 머뭇거림이 있었는데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상여를 따라가니 기약을 져버림에 이르렀구나. 아! 장자 이 길을 어찌 가겠는가?"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노제.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관머리 앞에 만시(挽詩)를 세우고 길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밤 동안 한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뒤섞여서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새벽닭이 울 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 흘러가는 모양으로 봤는데 아침에 혁옥을 타고 흐른 물은 저 어둠이 내린 산으로 떠나 가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따른 촉룡(계절, 기후 같이 대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너를 저승으로 환하게 인도 할 것이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땅의 신이여. 지금 의빈 성씨가 여기 고양군 율목동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비어 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하여 감출 것이 없으니 이에 현숙한 여인의 한 골육이 있는 언덕은 신 역시 위해줄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어 재앙이 있다고 꾸짖어도 작은 힘으로 뒤의 어려움을 아주 명백하게 물리칠 것입니다. 천 가지를 삼가고 깨끗한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신에게 공경히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여 주십시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형체는 이미 넋이 되어 모두 돌아 가버렸다. 만일 여기로 와서 무탈하게 편안히 단장 하고 저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저 어두운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령이 되어버렸는가. 임금이 완연히 기댔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또한 그 어머니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초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반우(反虞)를 지낸다. 이로써 이 길을 따라 무사히 사당에 이르기를 청한다.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재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재우(再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삼우(三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졸곡.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졸곡(哭萬)을 지낸다. 빈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정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초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덧없이 가버리는구나. 이미 캄캄해지고 나니 또한 초하루가 되었다. 빈이 한 번 떠나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아 속죄 할 길이 없어 한탄스럽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망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하늘의 때는 이처럼 갑자기 그 달 동안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빈이 남긴 행적에 대한 마음을 어찌 다하겠는가?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정조 한식 삼일 단오 추석 동지 제사 제문은 동일하다
중춘.
건륭 치세 모갑 2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중하 중추는 내용이 동일하다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이미 예를 마치고 대상(大祥)을 치르고 나서 또 담제(禫祭)를 지냈다. 길이 그리워하는데 나를 더욱 감응하게 하는 훌륭한 잠언(箴言)을 누가 말하겠는가? 세월이 흘러가면 역시 잊을 수 있도다.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백세 뒤에도 더욱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세월이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동안 속세의 머뭇거림이 있었는데 좋은 화살로 하여금 궁독(아들을 낳았을 때 천지 사방을 향해 활을 쏘아 축하하는 뜻을 취함)을 완연히 드러냈다."
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19일 기축,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상여를 따라가니 기약을 져버림에 이르렀구나. 아! 장자 이 길을 어찌 가겠는가?"
견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나는 글로서 너를 보내며 예장(禮葬)을 맡은 관원들이 도와서 상여가 무사히 무덤에 이르기를 바란다. 살아 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노제.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경을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관머리 앞에 만시(挽詩)를 세우고 길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밤 동안 한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마라."
묘소성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상자를 열어 비단옷을 일렬로 늘어놓으니 흰 휘장이 소용돌이치는구나. 우수수 하고 부는 바람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바라여도 볼 수 없구나. 혼령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흠향하길 바란다. 아, 너는 뒤섞여서 너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을 두려워했었다."
묘소계빈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부승지 홍명호를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새벽닭이 울 때 망건을 꿰매달라고 재촉하면 물이 그득 흘러가는 모양으로 봤는데 아침에 혁옥을 타고 흐른 물은 저 어둠이 내린 산으로 떠나 가버렸다. 아주 오랜 세월을 따른 촉룡(계절, 기후 같이 대자연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너를 저승으로 환하게 인도 할 것이다."
사후토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총융사 김사목을 보내서 글월로 타이르기를 "땅의 신이여. 지금 의빈 성씨가 여기 고양군 율목동 효창묘의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비어 있는 무덤으로 갑니다. 빈의 행동은 얌전하고 정숙하여 감출 것이 없으니 이에 현숙한 여인의 한 골육이 있는 언덕은 신 역시 위해줄 것입니다.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어 재앙이 있다고 꾸짖어도 작은 힘으로 뒤의 어려움을 아주 명백하게 물리칠 것입니다. 천 가지를 삼가고 깨끗한 술과 제물을 차려놓고 신에게 공경히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여 주십시오."
임광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서정수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 있지 않은 것 같다."
제주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우승지 홍인호를 보내서 글월로 하여금 타이르기를 "형체는 이미 넋이 되어 모두 돌아 가버렸다. 만일 여기로 와서 무탈하게 편안히 단장 하고 저 집에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저 어두운 언덕 구석으로 가서 혼령이 되어버렸는가. 임금이 완연히 기댔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또한 그 어머니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초우전.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0일 경인,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반우(反虞)를 지낸다. 이로써 이 길을 따라 무사히 사당에 이르기를 청한다.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재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1일 신묘, 국왕은 금성위 박명원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재우(再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삼우.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임진, 국왕은 행부사직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삼우(三虞)를 지낸다. 가는 세월에 빈의 자취가 있던 곳에서 모두 함께 울었다.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졸곡.
건륭 51년(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22일 갑오, 국왕은 금수어사 서유녕을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아 빈을 위로하며 졸곡(哭萬)을 지낸다. 빈은 온갖 일을 겪고 뱃속의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정을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초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은 덧없이 가버리는구나. 이미 캄캄해지고 나니 또한 초하루가 되었다. 빈이 한 번 떠나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아 속죄 할 길이 없어 한탄스럽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망전.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하늘의 때는 이처럼 갑자기 그 달 동안 위태로워졌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빈이 남긴 행적에 대한 마음을 어찌 다하겠는가?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생신차례.
건륭 치세 모갑 모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어떠한 생각도 못했는데 홀연히 또 빈의 생일이 왔다. 어찌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일에 제사상을 받는가. 빈과 즐겁게 노닐었는데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생각하건대 빈은 난초와 혜초처럼 향기로운 풀로서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고단하여 몹시 기운이 없는 채로 지난날을 생각하니 내가 무료 할 때 빈을 보고 이야기 하면 서로 더욱 뜻이 맞고 정다웠었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정조.
건륭 치세 모갑 정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세월이 이리저리 흘러 오늘 정조(正朝)에 제사를 지낼 때 되니 돌이켜 옛날을 생각하면 근심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이에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정조 한식 삼일 단오 추석 동지 제사 제문은 동일하다
중춘.
건륭 치세 모갑 2월 모삭일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음력 2월에 빈을 사려(思慮)하며 제사를 올린다. 궁궐 기상(禨祥)이 굽어 들어 신리(伸理)하는데 마땅히 감통(感通)한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이후 중하 중추는 내용이 동일하다
건륭 모년 세차 모갑 모월삭 모갑, 국왕은 어느 신하를 보내서 의빈 성씨를 유제한다. “이미 예를 마치고 대상(大祥)을 치르고 나서 또 담제(禫祭)를 지냈다. 길이 그리워하는데 나를 더욱 감응하게 하는 훌륭한 잠언(箴言)을 누가 말하겠는가? 세월이 흘러가면 역시 잊을 수 있도다. 빈이 죽은 뒤의 명예는 백세 뒤에도 더욱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에 깨끗한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니 부디 흠향하라.”
4.4.5.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정조가 의빈 성씨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간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어제 제축문》을 썼다.[91]
삭제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2월 무자 초 1일 무자. 국왕이 신하 성식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세월이 흘러가서 다시 또 초하루가 되었네. 돌아보면 아름다운 위의가 있었으니, 애통함과 상심함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朔祭[92]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二月 戊子 朔初一日 戊子 國王遣臣 成湜 諭祭于宜嬪成氏 日居月諸 亦旣云朔 緬言令儀 曷任愴䀌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3]
망제
건륭 54년 세차 기유년(1789, 정조 13) 1월 무오 초 15일 임신. 국왕이 신하 도총관 최동악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차고 기울기가 저처럼 하여 해와 달이 서로 마주하네. 아득한 나의 마음은 허전한 듯 길이 슬퍼하노라.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望祭 [94]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正月 戊午 朔十五日 壬申 國王遣臣 都捴管 崔東岳 諭祭于宜嬪成氏 盈虛如彼 烏兎相望 悠悠我思 惄焉永傷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5]
생진다례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년 을유 삭초 8일 임진. 국왕이 도총관 최동악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해마다 이날이 오면 어김없이 기약이 있는 듯 하여라. 떠난 자는 도도하더니 어찌 여기 오지 않는가. 너의 애처로움 뿐만 아니라 문효(세자)도 그리워 하나니, 애오라지 진정으로 토로함을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生辰茶禮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七月 乙酉 朔初八日 壬辰 國王遣臣 都捴管 崔東岳 諭祭于宜嬪成氏 毎歲此日 至必如期 逝者滔滔 胡不來斯 匪直爾哀 文孝之思 聊以瀝情 知也未知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6]
正朝
維乾隆某年嵗次 某甲正月朔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難淹者辰 聿回令節 感玆推兊+欠 擷彼芬苾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한식(寒食), 삼일(三日), 단오(端午), 추석(秋夕), 구일(九日), 동지(冬至)는 날짜를 제외하고 정조(正朝)와 내용이 같다.
중춘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2월 무자 초 24일 신해. 국왕이 신하 광은부위 김기성( 청연공주의 남편)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지금 중춘의 시절을 맞아 상례의 제사 지내는 예가 있네. 계절의 경물이 누차 일어나니 정서 더욱 새로워라.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仲春[97]
維乾隆五十四年歲次 己酉 二月 戊子 朔二十四日 辛亥 國王遣臣 光恩副尉金箕性 諭祭于宜嬪成氏 時維仲春 禮有常禋 節物屢嬗 情緖逾新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8]
중하(仲夏), 중추(仲秋), 중동(仲冬), 납일(臘日)은 날짜를 제외하고 중춘(仲春)과 내용이 같다.
기일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9월 갑신 초 14일 정유. 국왕이 신하 행부사직 김노영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해가 바뀌어 기신이 다시 돌아왔네. 천리를 좇아 도탑게 행하여 대의는 빛나는 해와 같네. 동관(여인들의 선행이 기록된 글)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어라. 종묘에 길이 힘입었던 날을 어찌 잊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忌日
維乾隆 五十四年歲次己酉 九月 甲申 朔十四日 丁酉 國王遣臣 行副司直 金魯永 諭祭于宜嬪成氏 嵗序遷易 忌辰復至 循天敦行 炳日大義 紀在彤管 非我私言 宗祊永賴 俾也可諼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9]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2월 무자 초 1일 무자. 국왕이 신하 성식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세월이 흘러가서 다시 또 초하루가 되었네. 돌아보면 아름다운 위의가 있었으니, 애통함과 상심함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朔祭[92]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二月 戊子 朔初一日 戊子 國王遣臣 成湜 諭祭于宜嬪成氏 日居月諸 亦旣云朔 緬言令儀 曷任愴䀌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3]
망제
건륭 54년 세차 기유년(1789, 정조 13) 1월 무오 초 15일 임신. 국왕이 신하 도총관 최동악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차고 기울기가 저처럼 하여 해와 달이 서로 마주하네. 아득한 나의 마음은 허전한 듯 길이 슬퍼하노라.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望祭 [94]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正月 戊午 朔十五日 壬申 國王遣臣 都捴管 崔東岳 諭祭于宜嬪成氏 盈虛如彼 烏兎相望 悠悠我思 惄焉永傷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5]
생진다례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년 을유 삭초 8일 임진. 국왕이 도총관 최동악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해마다 이날이 오면 어김없이 기약이 있는 듯 하여라. 떠난 자는 도도하더니 어찌 여기 오지 않는가. 너의 애처로움 뿐만 아니라 문효(세자)도 그리워 하나니, 애오라지 진정으로 토로함을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生辰茶禮
維乾隆五十四年歲次己酉 七月 乙酉 朔初八日 壬辰 國王遣臣 都捴管 崔東岳 諭祭于宜嬪成氏 毎歲此日 至必如期 逝者滔滔 胡不來斯 匪直爾哀 文孝之思 聊以瀝情 知也未知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6]
正朝
維乾隆某年嵗次 某甲正月朔某甲 國王遣臣 某官某 諭祭于宜嬪成氏 難淹者辰 聿回令節 感玆推兊+欠 擷彼芬苾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
한식(寒食), 삼일(三日), 단오(端午), 추석(秋夕), 구일(九日), 동지(冬至)는 날짜를 제외하고 정조(正朝)와 내용이 같다.
중춘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2월 무자 초 24일 신해. 국왕이 신하 광은부위 김기성( 청연공주의 남편)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지금 중춘의 시절을 맞아 상례의 제사 지내는 예가 있네. 계절의 경물이 누차 일어나니 정서 더욱 새로워라.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仲春[97]
維乾隆五十四年歲次 己酉 二月 戊子 朔二十四日 辛亥 國王遣臣 光恩副尉金箕性 諭祭于宜嬪成氏 時維仲春 禮有常禋 節物屢嬗 情緖逾新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8]
중하(仲夏), 중추(仲秋), 중동(仲冬), 납일(臘日)은 날짜를 제외하고 중춘(仲春)과 내용이 같다.
기일
건륭 54년 기유년(1789, 정조 13) 9월 갑신 초 14일 정유. 국왕이 신하 행부사직 김노영을 보내어 의빈 성씨를 유제하노라. 해가 바뀌어 기신이 다시 돌아왔네. 천리를 좇아 도탑게 행하여 대의는 빛나는 해와 같네. 동관(여인들의 선행이 기록된 글)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어라. 종묘에 길이 힘입었던 날을 어찌 잊겠는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제수를 삼가 진설하여 제향하니 흠향 하라.
忌日
維乾隆 五十四年歲次己酉 九月 甲申 朔十四日 丁酉 國王遣臣 行副司直 金魯永 諭祭于宜嬪成氏 嵗序遷易 忌辰復至 循天敦行 炳日大義 紀在彤管 非我私言 宗祊永賴 俾也可諼 玆用 淸酌庶羞 式陳禋事 尙饗[99]
5. 관련 장소
5.1. 거둥고개
자세한 내용은 거둥고개 문서 참고하십시오.정조는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해서 오늘날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서울 지명 사전
5.2. 승가사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6. 가족 관계
6.1. 조상( 창녕 성씨)
- 6대 조부 : 성운(成䉙)
-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
-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 ~ 1705)
6.2. 본가( 창녕 성씨)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
-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전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105]
- 친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새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108]
- 올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 오빠 : 성숙(成淑)[109]
- 올케 : 미상
- 조카 : 성흥민(成興民)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강덕순(康德淳) 신천 강씨(信川 康氏) 동지중추부사 문도(文道)의 아들[110]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윤귀영(尹貴永) 파평 윤씨(坡平 尹氏)
- 동생 : 성흡(成洽) - 무과 합격
-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조카 : 성준민(成俊民)
- 숙부 : 성연지(成淵祉)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연일 정씨(延日 鄭氏)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임천 임씨(林川 林氏)
족보 미등록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 ~ 1789)의 첩[111]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 ~ 1798)[112]의 첩[113]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의 첩[114]
6.3. 왕가( 전주 이씨)
7. 여담
- 정조와 의빈 성씨의 일화와 의빈에 관한 인적사항은 정조의 어제문, 황윤석의《 이재난고》가 비교적 뒤늦게 번역돼서 알려지게 됐다. 정조는 《 어제의빈묘지명》에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 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2020년대에도 의빈 성씨에 관련된 자료가 번역이 덜 된 게 있다고 하니 추가적인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
구한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119]이 조선에서 활동하며 기록한 알렌 문서인
《서울의 어떤 실화》에서 의빈 성씨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중 주목해볼만 한 점은 그녀가 기존의 기록과는 달리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러 관료들의 미움을 사고 다른 궁궐 여인들의 질투도 받았다.‘ 라고 기록되어있다는 점이다.[120] 그리고 매장지가 두번 바뀌었다고 언급되고[121] 첫 매장지가 영국총영사관과 해관 본부 옆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60년간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한 80세 노인을 보고 그동안의 노력을 칭찬하기 위하여 그녀의 묘지기로 임명하였고 매일 묘를 찾아가 애도하였다고 기록되었다.
150여 년 전[122] 조선 국왕 에게 아름다운 후궁이 있었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총명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러 관료들의 미움을 사고 다른 궁궐 여인들의 질투도 받았다.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슬픔에 빠진 왕은 궁이 잘 보이는 도성 안 높은 곳에 그녀를 장사지냈다. 왕이 죽은 후 그녀의 묘는 도성 밖으로 옮겨졌으나, 첫 매장지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지금까지 잘 관리되고 있다.[123] 그곳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로 모든 외국인들에게 친숙하며, 그 옆에는 영국총영사관과 해관 본부가 있다.[124] 한편 이 후궁이 죽었을 때 60년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한 80세 노인이 있었다. 왕은 그동안의 공부와 노력을 칭찬하기 위하여 그 노인을 묘지기로 임명하고, 매일 묘를 찾아가 그녀를 위하여 애도하였다. 이는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이야기이다.- 《서울의 어떤 실화》
8. 대중 매체에서
임금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번역되지 않아 21세기 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 관계 등이 적힌 《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었다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127]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128] 정도로 그려지긴 했다. 2005년 로맨스 소설에 처음 등장했고,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 속 성송연 캐릭터 였다가 이후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세영이 연기한 성덕임 캐릭터로 바뀌었다. 이후 정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 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8.1. 드라마
- 1989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500년 - 파문》
- 배역: 의빈 성씨 역
- 배우: 정은숙
《 조선왕조 500년 - 파문》의 의빈 성씨 |
여기서는 이름은 따로 안나오고 그냥 의빈으로 불린다. 자신이 낳은 어린 원자가 홍역을 앓자 직접 간병하겠다며 정순왕후(김용선 분)와 정조( 김용건 분)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중전인 효의왕후( 이휘향 분)가 원자를 아끼고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며 친어미로써 씁쓸해한다. 원자의 세자 책봉이 부당하단 상소가 올라오자 상소의 내용을 베낀 뒤 바로 정순왕후에게 가서 상소를 올린 김하재를 처벌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효의왕후에게 내명부 사람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며 상소가 올라오면 어명을 기다리면 될 것을 왜 굳이 들고 와서 고하냐고 꾸중을 듣는다. 수빈 박씨가 첫 출산할 때 효의왕후와 함께 도왔는데 옹주를 낳자 좋아한다.(...)[129] 문효세자가 중병에 걸리자 누군가가 독극물을 먹였을 것으로 여기고 정순왕후에게 범인을 찾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결국 문효세자는 죽고 의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7개월인 상태에서 사망한다. 죽기 직전에 몸을 크게 떨고 울면서 무언가 말하려 하나 결국 말을 못하고[130] 세상을 떠난다. 이후 정순왕후는 은언군과 상계군이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독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 여겨 그들을 잡아들여 문초하려 하지만, 정조가 반대하자 이에 화가 나 (일종의 시위 형식으로) 궁을 나가 사가로 갔다. 결국 은언군과 상계군은 의금부로 잡혀간다.
- 2007년 ~ 2008년 MBC 드라마 《 이산》
도화서 다모 시절 | 의빈 시절 |
성송연 문서 참고 바람. 역사대로 이산(정조( 이서진 분))의 첫사랑으로 그려졌다. 임오년에 궁녀로 입궁했다는 것까지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임오화변이 있던 이 해에 당시 세손이었던 이산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후에 도화서 다모가 됐다는 것은 모두 제작진의 허구적 상상력에 의한 설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의 승은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자를 출산했고, 그 원자가 세자(문효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급했다. 그러나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죽는 걸 봐야 했다. 이때 둘째[133]를 임신 중이었는데 장결병(간경화) 진단을 받게 된다. 이산은 그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의원을 불러오려 한다. 그러면서 송연에게 나는 아이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 아이를 포기하고 치료를 받으라며 낙태약까지 건네나 송연은 아이를 더 잃을 수 없다며 일체의 치료를 거부하고 버틴다.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정조의 어진을 직접 그렸으나 결국 산달까지 살지 못하고 임신 중에 끝내 병사한다.
- 2021년 11월 MBC 금토드라마 《 옷소매 붉은 끝동》
지밀나인 시절 | 의빈 시절 |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의빈 성씨에 대한 추가 사료가 나온 후에 방영하는 첫번째 드라마이다. 다른 드라마와는 달리 정조가 아닌 의빈 성씨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의빈 성씨의 인생과 정조와의 사랑을 그린다.
8.2. 예능
- 2017년 MBC 예능 《 신비한TV 서프라이즈》 746회
- 배역 : '성덕임' 역
- 배우 : 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2017년 1월 1일 방송된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왕이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 2019년 채널A 《 천일야사》 118회-성덕임, 정조의 첫사랑 : 2019년 3월 25일 방송,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빈 성씨)의 사랑이야기 #
- 배역 : '성덕임' 역
- 배우 : 송도원
8.3. 창작 뮤지컬
- 2016년 수원 시립 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134]
- 배역 : '성선우' 역
- 배우 : 홍민아
정조와 장터에서 처음 만나 '물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8.4. 창작 판소리
8.5.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 콘티 작가 '강건희' 역
- 2007년 ~ 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 도화서 다모 '성송연' 역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 전 5권. 성송연의 생애는 드라마와 거의 유사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극중에서 병사한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정순왕후 김씨에게 자결을 강요당해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위해 음독 자살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일부는 드라마와 다소 차이가 있다. 성송연에게 독약을 주던 정순왕후의 명분은 중인 출신 승은후궁인 성송연보다는 반가 출신 간택후궁으로부터 적법한 후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미 간택해 놓은 처자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용히 자결하지 않으면 정조가 위험해진다고 협박하고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성송연의 처소의 궁인들까지 다 정순왕후에게 매수된 상태였기에 자신이 처한 상태를 알릴 수조차 없이 감금되어버린 성송연은 원치 않았어도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독약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약을 삼킨 뒤에 몹시 후회했고 토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가 고통스럽게 숨진다. 성송연의 시신을 발견한 그녀의 유년 시절 친구이자 호위무사인 박대수는 몹시 분개하며 진상을 밝히고자 하나 정조는 정치적인 이유로 성송연의 석연찮은 죽음을 묻어 두어야 했다.[135]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의빈 성씨' 역
현대의 의사 오세아가 정조 시대 한세로 태어나서 정조를 돕는 내용. 극중 오세아(한세)와 의빈은 별개의 인물이다. 의빈은 정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되는 궁녀로 등장한다.
- 2017년 로맨스 소설 《 옷소매 붉은 끝동》
- '성덕임' 역
작가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며 집필한 첫 소설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의빈 성씨는 궁녀였습니다. 경희, 영희, 복연이라는 궁녀들과 소설을 필사하고 임금의 사랑에마저 순순히 응하지 않는, 정조의 완고한 가치관과 맞지 않을 법한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던 걸까요?'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밝혔다. 작가는 후기에서 집필 완료(2015년) 이후에 새로 국역된 사료를 메인 스토리에 반영시키지 못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 2023년 대체역사물 소설 《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 역사의 흐름이 크게 뒤틀린 작중 상황 상, 원역사와 달리 궁녀가 아니라 중전(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가문에 속한 양인 청지기의 딸로 등장한다. 영조의 왕세손이 아니라 이훤(사도세자)의 차남일 뿐인 용두대군 이산의 계속된 플러팅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원 역사와 달리 이산이 효의왕후와 먼저 혼인한 상태가 아니므로 이산을 거부하지 않고 내심 서로 연모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인공 김운행이 자기 장남 김이환으로 하여금 성덕임을 NTR시켜 이산의 마음을 꺾고 이훤이 둘째 며느리로 탐내는 김설애[136]를 대신 짝지어 줌으로써 자기 영의정 자리를 빨리 따내려 하는 흉계를 꾸몄으나, 김설애를 먼저 보고 한눈에 반한 김이환이 도리어 성덕임을 이산과 엮어주고 본인은 김설애와 밀애를 나눔으로써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되어 버렸다. 당연히 김운행은 노발대발 했지만 자식의 죄[137]가 곧 부모의 죄인 조선시대의 상황과 명문 무가 청풍 김씨 집안을 또 다른 외척집안으로 올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던 중전 홍씨의 의중[138]에 의해 이훤도 성덕임을 이산의 짝으로 인정한다.
- 2024년 대체역사물 소설 《 사도세자는 편하게 살고 싶다》
- 중궁전 나인 ’성덕임‘. 여기서는 21세기에서 15년 동안 살다 와 머리가 트인 국왕 이훤의 뜻에, 본인의 지혜로운 대답으로 경쟁자인 김연희를 누르고, 후궁도 아닌 정식 세자빈이 되어 이산과 맺어진다.
9. 관련 문서
[1]
성식(成湜)에서 개명
[2]
《창녕성씨상곡공파보 》미등록
[3]
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 연구원, 《내수사각방상하책(內需司各房上下冊)》 제1책 1795년(정조 19) 4b면, 제2책 1796년(정조 20) 4a면, 제3책 1799년(정조 23) 3a면, 제4책 ~ 제36책. 2) 디지털 장서각, 《능안(陵案)》"私墓 宜嬪墓 文孝世子 私親 內廟 宜嬪宮"
[4]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황해도장토문적(黃海道庄土文績)》제25책 황해도 장련군 은율군 소재 장토 경우궁 제출 도서 문적류(黃海道長連郡殷栗郡所在庄土景祐宮提出圖書文績類) 1문서: 1. 건륭58년(1793년) 11월일 황해도 은율현 전임내복재(乾隆五十八年十一月日黃海道殷栗縣前林內伏在)
[5]
《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정조가 "빈(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라고 했으니 정조는 처음 고백했던 15세 때부터 성덕임을 후궁으로 여겼다. 성덕임은 정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6]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 덕임(의빈 성씨)이 참여했다.
[7]
조선의
궁녀는 왕족을 보필하는 지밀은 상급 부서에 속한다. 따라서 방자, 무수리 등 하인을 두었다. 자세한 내용은
내명부 문서 참조.
[8]
어린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병의 총칭
[9]
《어제의빈묘지명》이 쓰인 1786년(정조 10) 11월 이후에 종 6품 인의(引儀)에서 정 5품 통덕랑(通德郞)으로 증직 되었다.
[10]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정2품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1]
《
승정원일기》, 《
이재난고》, 《무보》, 《갑진왕세자책봉경용호방》, 《창녕성씨상곡공파보》 속의 성윤우는 동일 인물이다. 아들 성담(成湛), 성완(成浣),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고 부친은 성수산(成壽山), 조부는 성근립(成謹立), 증조부는 성경(成景)이라는 점이 모두 일치한다.
[12]
“元子私親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황윤석 《이재난고》 35권, 1783년(정조 7) 2월 30일(신묘)
[13]
“閭巷卑微” 《어제의빈묘표》
[14]
“嬪者出自寒微” 《어제의빈묘지명》
[15]
《승정원일기》1095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 6월 3일 정해 14/14 기사, 1095책 (탈초본 60책) 영조 29년 6월 9일 계사 31/44 기사, 1103책 (탈초본 61책) 영조 30년 2월 1일 신사 20/25 기사, 1120책 (탈초본 62책) 영조 31년 6월 9일 신해 15/37 기사, 1194책 (탈초본 66책) 영조 37년 6월 24일 신묘 29/30 기사
[16]
개명 전 이름은 성식(成湜)
[17]
계고직비(階高職卑, 품계는 높고 관직은 낮음)에 따라 품계는 정 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이고 관직은 종 4품 용양위 부호군(龍驤衛 副護軍)이었다.
[18]
정방의 조카 정복환(鄭福煥)은 1786년(정조 10)에 부안 현감, 1787년(정조 11)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당대 사람들은 정방, 정복환을 두고 의빈과 인척 관계여서 관직을 제수받았다고 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19]
"踰十歲選入掖庭",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0]
“昭容成氏 名德任 其爺故洪鳳漢廳直 而因得入惠慶宮”, 황윤석 《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2월 30일(신묘)
[21]
“則惠慶宮 爲收昭容于侍側 親鞠育” 황윤석《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6월 11일(신미)
[22]
“而爲一錢布衙門該吏 犯逋七千兩 幾死而敗”, 황윤석《
이재난고》35권, 1783년(정조 7) 6월 11일(신미).
[23]
《승정원일기》 영조 30년(1754) 5월 6일 갑신 20/35 기사
[24]
상의(尙儀)는 정 5품 하계 궁관직, 상계 궁관직은 상궁(尙宮)이다
[25]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26]
"尹嬪當於正月 就舘設産室 則二月分娩之期明矣 或言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 황윤석 《이재난고》 권33, 정조 4년(1780) 12월 8일(임자)
[27]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 황윤석 《이재난고》 권35, 정조 8년(1784) 10월 21일(갑진)
[28]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난 해. 사도세자의 경우 당일에 바로 원자정호를 했지만 문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29]
김종수 《문효세자지문》 "壬寅九月七日寅時誕世子于昌德宮之讌華堂"
[30]
"복례는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 몸과 마음을 다한 공이 있어 주상께서 공을 갚으셔서 시녀 직위를 주시니, 제 영광이 지극하더라." 《한중록》
[31]
"아지는 내 유모로 (중략) 1782년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산실에 들어와 수고하니, 앞뒤로 거의 스무 차례가 넘는지라. 그 공이 적지 아니하니, 주상이 공을 표창하여 제 자손을 관청에서 일하게 하여 후한 녹봉을 받게 하시고, 저를 후히 대하셔 천한 몸에 당치 못할 은혜와 영광을 많이 주시니라." 《한중록》
[32]
《궁궐지》 권 2, "重熙堂在觀物軒東 正宗六年壬寅建 東曰重陽門西曰資始門○堂額正廟御筆"
[33]
《일성록》 정조 6년(1782) 9월 7일(신축)
[34]
의빈 사망 이후 간택된 후궁
수빈 박씨가 이 빈호를 받았다.
[35]
#
[36]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 윤 3월 20일(을해) 3번째 기사
[37]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 윤 3월 20일(을해) 2번째 기사
[38]
五月成昭容所生女 以避寓出處闕外卽夭 命武寵臣任嵂主治喪葬(5월에 의빈 성씨가 낳은 딸이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 신임하는 무관 임률에게 명을 내려 옹주의 상장례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재난고》
[39]
《일성록》 정조 8년 갑진(1784) 5월 9일(계해) 1번째 기사
[40]
"新生翁主阿只氏, 以驚風奄忽普慟"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41]
1764년, 영빈 이씨가 사망한 해
[42]
문효세자가 죽은 후
[43]
소망은 의빈이 죽기 전 배 속에 있던 아이를 말한다.
[44]
《노상추일기》에서 해산달이 되자 모든 신료들과 백성들이 원자가 탄생하기를 바랬지만, 의빈이 (해산 전에) 사망하여 비통해했다는 내용이 있다.
[45]
《정조실록》22권, 1786년(정조 10) 9월 14일 갑신 2번째 기사
[46]
“上曰, 婦人心弱, 全是七情症也。自五月以後得重病, 其間避接於本宮, 少有差勝之意, 故還爲入來, 竟至於此矣。” 《승정원일기》 1610책(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5일(을유) 15번째 기사
[47]
症形非醫藥所治 彌月沈頓 而日必盥頮 爲予之臨視也 雖在精神迷亂 四體不運動之,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48]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7일 병인 5번째 기사
[49]
“成嬪 又方有娠四朔 則十月 乃産期也”, 황윤석 《이재난고》 39권, 1786년(정조 10) 9월 21일(신묘)
[50]
일각에서는 단기간에 수차례 임신, 출산, 유산을 반복했다는 것을 근거로 의빈의 증세를
임신중독증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위의 승정원일기에서 '마음의 병'을 언급한 것을 보면, 어린 자식들을 잇따라 앞세운 슬픔과 스트레스가 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데 한몫한 듯하다.
[51]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1월 20일 경인 3번째 기사
[52]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9일 무신 4번째 기사
[53]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8일 정묘 2번째 기사
[54]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1일 경자 2번째 기사
[55]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10일(경진) 2번째 기사
[56]
《일성록》 정조 15년 신해(1791) 5월 3일(정축) 6번째 기사
[57]
《일성록》 정조 14년 경술(1790) 6월 24일(계유) 3번째 기사
[58]
정조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59]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12월 27일 병인 5번째 기사
[60]
임신 중에 태기가 불화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신경에 가해지는 어떤 자극으로 인해 몸이 쑤시고 아픔
[61]
“又聞 九月十四日 成嬪 子懸之證 暴發而逝 盖和嬪尹氏所密毒也 故尹亟罪黜” 《이재난고》 39권, 정조 10년(1786) 10월 24일(갑자)
[62]
한국학자료센터 인물관계정보 - 만가보: 7책 45면 (좌측) 7단 8행
[63]
정조 대왕 행장, 《정조실록》
[64]
《정조실록》 23권, 1787년(정조 11) 1월 11일 신사 2번째 기사
[65]
《정조실록》22권, 1786년(정조 10) 9월 14일 갑신 2번째 기사
[66]
"上曰, 夏禮葬時經費多入, 勅行纔過而今又遭意外喪變, 以今國用, 萬無措手之道, 戶曹財力蕩盡, 此實可悶。今番則旣不設都監, 汝須料量, 凡百所入, 務從省減, 其外應入之物, 皆以儲置給價爲之。以汝所見, 經費當爲幾許耶?” 《승정원일기》 1611책 (탈초본 86책) 정조 10년(1786) 9월 16일 병술 14/14기사
[67]
《일성록》 정조 10년(1786) 9월 17일 정해 2번째 기사
[68]
“禮葬戶曹典醫監別設擧行” 《탁지오례고(度支五禮考)》 제 2책
[69]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1786) 11월 18일(무자) 4번째 기사
[70]
《정조실록》 22권, 1786년(정조 10) 9월 16일 병술 1번째 기사
[71]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된다.
[72]
《승정원일기 》1611책 (탈초본 86책) 정조 10년 9월 20일 경인 18/20 기사
[73]
“高陽郡之栗木洞壬坐原距文孝墓百步而近以從嬪之願也” 《어제의빈묘표》
[74]
숙종의 누나와 동생
[75]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1718) 4월 20일(무술) 1번째 기사
[76]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 1월 10일(기묘) 2번째 기사
[77]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9월 16일 병술 1번째 기사
[78]
서울 중구 문화 관광 역사 문화자원 - 저경궁(송현궁) 터
[7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황해도장토문적(黃海道庄土文績)》제58책 황해도 장련군 은율군 소재 장토 경우궁 제출 도서 문적(黃海道-長連郡殷栗郡-所在庄土景祐宮提出圖書文績) 71문서 : 71. 건륭 52년(1787년) 정미 9월 초 1일 의빈궁 고직 유우량 전명문(乾隆五十二年-丁未-九月初一日宜嬪宮庫直劉佑良前明文)
[80]
디지털 장서각, 《제물등록(祭物謄錄)》 1책 38면 - 毓祥宮 宣禧宮 宜嬪宮 名日 祭三宮告 祭
[81]
디지털 장서각, 《사전사례편고(祀典事例便考)》 023 一年各處元 祭享上末元準折今封進都數 附私宮進排
[82]
“宜嬪宮 宜嬪成氏 文孝私親” 《태상지(太常志)》 권지 3, 〈궁(宮)〉
[83]
《향수조사책(享需調査冊)》 8책, 칠궁이묘(七宮二廟)
[84]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
[85]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 등의 산소
[86]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7월 23일 양력 3번째 기사
[87]
《향비규정(享費規定)》 1909년(융희 3) 4책
[88]
묘표는 곧 묘비로 돌로 만든 비석을 일컫는다. 묘지는 고인의 신상에 대한 내용을 적어 무덤 내부나 근처에 묻은 것을 말한다. 묘지명은 산문으로 쓴 '묘지'에 대응하는 운문인 '명'까지 함께 있는 경우를 일컫는다.
[89]
서울대 규장각, 《내각일력(內閣日曆)》80책, 1786년(정조 10) 11월 7일 丁丑
[90]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內各祭祝文)
[91]
장서각 >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御製宜嬪三年後各祭祝文)
[92]
기유년(1789, 정조 13) 2월 무자(戊子) 초 1일 무자(戊子), 3월 무오(戊午) 초 1일 무오(戊午), 4월 정해(丁亥) 초 1일 정해(丁亥), 5월 병술(丙戌) 초 1일 병술(丙戌), 윤 5월 병술(丙戌) 초 1일 병술(丙戌), 6월 을묘(乙卯) 초 1일 을묘(乙卯), 7월 을유(乙酉) 초 1일 을유(乙酉), 8월 갑인(甲寅) 초 1일 갑인(甲寅), 10월 계축(癸丑) 초 1일 계축(癸丑), 11월 계미(癸未) 초 1일 계미(癸未), 12월 임자(壬子) 초 1일 임자(壬子)에 정조는 성식(成湜)을 보내 유제문을 내렸다.
[93]
장서각 기록유산DB 왕실고문서 기사 - 의빈성씨일거월제역(宜嬪成氏日居月諸亦旣云)
[94]
기유년(1789, 정조 13) 1월 무오(戊午) 초 15일 임신(壬申), 二月戊子朔十五日壬寅 , 3월 무오(戊午) 초 15일 임신(壬申), 4월 정해(丁亥) 초 15일 신축(辛丑), 5월 정사(丁巳) 초 15일 신미(辛未), 윤 5월 병술(丙戌) 초 15일 경자(庚子), 7월 을유(乙酉) 초 15일 기해(己亥), 9월 갑신(甲申) 초 15일 무술(戊戌), 十月癸丑朔十五日丁卯, 11월 계미(癸未) 초 15일 정유(丁酉), 12월 임자(壬子) 초 15일 병인(丙寅)에 정조는 성식, 최동악, 창성위 황인점(
화유옹주의 남편)을 보내 유제문을 내렸다.
[95]
장서각 기록유산DB, 왕실고문서 기사 - 의빈성씨유제축문(宜嬪成氏諭祭祝文)
[96]
장서각 기록유산DB, 왕실고문서 기사 - 의빈성씨매세차일지필여기(宜嬪成氏每歲此日至必如期···)
[97]
정조는 가평(嘉平)에는 창성위 황인점, 중하(仲夏)에는 김노영, 중추(仲秋)와 중동(仲冬)에는 김사목을 보내서 제사 지냈다.
[98]
장서각 기록유산DB 왕실고문서 기사 - 의빈성씨시유중춘례유상(宜嬪成氏時維仲春禮有常···)
[99]
장서각 기록유산DB, 왕실고문서 기사 - 의빈성씨세서천역기진부···(宜嬪成氏歲序遷易忌辰復···)
[100]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49쪽
[101]
8대 조부 성자심(成子深)의 양자, 자(字) 만종(萬種)
[102]
"七代祖萬種齊陵參奉", 《어제의빈묘지명》
[103]
"高祖景軍資監正", 《어제의빈묘지명》
[104]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3쪽
[105]
성윤우가 사망했을 때 성윤우, 장흥 마씨, 부안 임씨가 함께 합장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윤우의 맏이인 성담(成湛)이 마씨의 소생인지 임씨의 소생인지는 모르나 성담이 태어났던 1741년에 임씨의 나이가 20살이었던 것으로 보면 성담부터 의빈 성씨까지는 임씨의 소생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혼인 적령기를 생각해 보면 전란으로 인한 상황 등이 아닌 이상 혼인을 20살까지 늦추는 경우는 없으니 임씨는 늦어도 1740년에는 성윤우와 혼인을 하였고 3년 상을 생각하면 마씨 역시 173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106]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3쪽
[107]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4쪽
[108]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6쪽
[109]
창녕성씨상곡공파보 권1, 187쪽
[110]
신천강씨대종회, 인터넷족보,
#
[111]
“鄭枋妾成生者與成嬪爲姑姪”, 황윤석 《이재난고》
[112]
혜경궁 홍씨의 6촌 형제
[113]
“成昭容之父 本洪鳳漢廳直 亦卽洪樂性妾父”, 황윤석 《이재난고》
[114]
“成哥之女 今東宮私親成貴人也 貴人之再從姊 卽鄭得煥之妾也”, 황윤석 《이재난고》
[115]
"內人中又有受胎者 亦已多月云(궁녀도 임신한지 여러달이 되었다.)" 황윤석, 《이재난고》
[116]
"自辛丑七月聞 成氏有娠(내가 신축년(1781년) 7월에 듣기를 성씨가 임신했다.)" 황윤석, 《이재난고》
[117]
"시임·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새로 출생한 옹주(翁主)가 졸하여 여러 신하들이 문안하기 위해 와 기다리고 있어서 드디어 소접(召接)한 것이었다.", 정조 실록 1784년 5월 12일
[118]
이재난고에서 옹주가 궁궐 밖으로 피접을 나갔는데 곧 죽었다는 내용,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서 옹주가 경풍(驚風: 갑자기 몹시 놀라서 정신을 잃고 넘어지며 몸이 싸늘해짐)으로 매우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내용이 있다.
[119]
(Horace N. Allen, 1858~1932), 1884년 9월~1905년 6월까지 조선에 체류함.
한국학중앙연구원 블로그
[120]
물론 당시 기준으로 약 백여년전 인물이기에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121]
사망 후 도성 안 높은 곳에 장사지냄->정조 사망 후 묘가 도성 밖으로 옮겨짐
[122]
생산일자가 미상이므로 그가 사망할 당시인 1932년 기준으로 하면 얼추 시기가 맞지만 그가 1905년까지 조선에 머물렀기에 이 때를 기준으로 하면 120~130년으로 계산된다.
[123]
다만 이상한 점은 정조가 그녀를 1786년 11월 20일에 효창묘에 장사지내고 1944년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 당하였을때는 알렌 사망 시점 이후이다.
[124]
주한영국공사관이 한번도 정동을 벗어난적이 없기에 지목한 장소는 그 인근으로 추정됨
[125]
위의 인물과 동일인물
[126]
17p, 《서울의 어떤 실화》는 생산일자가 미상이기에 동일한지는 미상일것으로 보인다.
[127]
작품에 따라 병사, 자살, 살해 등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병사했으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128]
정조가 의빈 성씨를 10대 초반에 처음 만났을 걸로 추측되고 15살 때 고백했을 정도니 실제로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129]
수빈이
왕자를 낳지 않아야 자신의 아들이 대통을 잇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문효세자는 5살에 요절했고 거의 곧바로 의빈 성씨도 세상을 떠났다. 정조의 뒤는
수빈 박씨가 의빈 사후에 낳은
순조가 이었다.
[130]
정조가 의빈의 처소로 가는 장면에 의빈의 목소리로 깔리는
내레이션을 들으면, '(의빈의 생각에)
문효세자를 독살한
범인을 잡아 세자의 원혼을 풀어달라'는 말을 하려했던 것 같다.
[131]
한지민은 드라마 이산 종영 이후 의빈 성씨의 묘를 실제로 다녀왔다고 말했다.
#
[132]
배우 한지민은 영화 역린에서 정순왕후 역도 맡았다.
[133]
실제 역사상으로는 다섯째 임신 중에 졸하지만 극 전개상 일찍 죽은 옹주는 등장하지 않았다. 연출자인 이병훈 PD는 정조가 사랑하는 영조, 홍국영, 문효세자, 의빈 성씨의 연이은 죽음에 시청자들이 피로를 느낄까 우려했다고 한다.
[134]
2016년 초연, 2017년에는 수원 연극 축제 개막작으로 재공연되었다.
[135]
참고로 성송연이 강요된 자결을 하는 바람에 태어나지 못한 둘째는 왕실의 기대와는 달리 딸이었던 것으로 암시된다. 정조 서거 후에 박대수의 환상에서 정조, 성송연, 문효세자, 그리고 어린 소녀가 함께 나타났다는 부분이 있다.
[136]
원역사의 효의왕후 김씨. 설애라는 이름은 작가의 창작이다.
[137]
김시묵의 집 담을 넘어 침입하여 딸과 여러 차례 동침하고 그 과정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당시에는 중범죄였던 여장까지 하였다.
[138]
성덕임은 자기 친정의 청지기 성씨의 딸이다. 즉, 홍씨 입장에서는 성은 달라도 같은 집안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