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이완덕(李完德)으로 유복한 중인계급 출생이며 13세에 고모의 소개로 경복궁 지밀에 세수간 나인으로 입궁했다.[1] 덕수궁의 궁인이었던 1914년 고종의 승은을 입고 왕자를 낳아 광화당(光華堂)이라는 당호를 받았다.[2] 그러나 왕자 이육은 1916년에 죽었다. 이육 외에 어려서 죽은 딸이 하나 더 있었다고도 한다.[3] 귀인 이씨는 고종이 죽고 난 후 같은 고종의 후궁이었던
삼축당 김씨와 함께 사간동 집에서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의 구황족 범위에 포함되어 매달 10만환을 지급받았다.[4] 죽은 뒤에도 삼축당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1]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p.307
[2]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 5권, 7년(1914) 7월 3일
[3]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p.227
[4]
““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한겨레21. 2006년 8월 24일. 2014년 1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5월 2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