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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00:56:55

혜빈 정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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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인종의 후궁
혜빈 정씨 | 惠嬪 鄭氏
출생 미상
사망 1595년 6월 23일( 음력 5월 26일) 이후
본관 경주 정씨
부모 부친 - 정온(鄭溫)[1][2]
모친 - 남원 양씨 양숙(梁淑)의 딸[3][4]
형제자매
2남 2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남매 - 정충정(鄭忠貞), 정충신(鄭忠藎)
언니 - 구팽수(具彭壽)의 처
부군 인종
자녀 없음
봉작 혜빈(惠嬪)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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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인종의 후궁. 아버지는 정온(鄭溫)이며, 어머니는 정주 목사 등을 지낸 양숙(梁淑)[5]의 딸이다. 그녀의 고모는 성종 숙용 심씨의 아들 영산군 이전의 부인 교성군부인(交城郡夫人)으로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었다.

2. 생애

혜빈 정씨가 언제 어떻게 인종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일찍이 정씨의 집안은 좋지 않은 일로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전적이 있다.
정온(鄭溫)의 처 양씨(梁氏), 정양(鄭良)의 처 이씨(李氏), 정의 누이들인 유용근(柳庸謹)의 처 정씨, 영산군(寧山君)의 부인 정씨(鄭氏) 등 4남매는 죽은 어미의 초상에 재물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슬픔도 잊어버리고 서로 송사하고 구타까지 하였습니다.
중종실록》 중종 29년 9월 5일

이때 정온의 아들 정충정(鄭忠貞)은 영산군의 첩 망종(亡終)을 살해하였다는 의혹을 받았고, 부인들은 서로 자신이 구타 당했다며 말싸움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영산군의 첩은 노비 귀년(龜年)이 정충정을 보호하려다 벌어진 일로 사형은 면하였다.[6] 하지만 1540년(중종 35) 혜빈 정씨의 숙부 정양(鄭良)이 탄핵당해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아 판결과 상관없이 집안의 평판이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시직(侍直)[7] 정양(鄭良)은 인물이 간사하고 형제간에도 패려스러운 일이 많았으니 동궁(東宮)의 시위(侍衛)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개정하소서.
《중종실록》 중종 35년 6월 24일

1595년(선조 28) 광주(廣州)에 있는 혜빈 정씨에게 식량을 지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8]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중에도 생존해 있었다.

3. 여담


[1]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의 외5대손. [2] 정순공주 이계린의 처 이씨 → 이숙 → 노공필의 처 이씨 → 정홍선의 처 노씨 → 정온 [3] 정현옹주의 외증손녀이자 한명회의 외증손녀. [4] 정현옹주 → 윤사로 → 양숙의 처 윤씨 → 정온의 처 양씨 [5] 양숙의 조부가 《눌재집》을 쓴 양성지(梁誠之)이다. [6] 중종실록 78권, 중종 29년 11월 5일 정묘 2번째기사. # [7] 세자익위사 정8품 관직으로 좌시직(左侍直) 1인과 우시직(右侍直) 1인을 둔다. [8] 선조실록 63권, 선조 28년 5월 26일 무술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