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6:34:20

살리 베리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0000, #ff0000 20%, #ff0000 80%, #cc0000);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라미즈 알리아 살리 베리샤 레제프 메이다니 알프레드 모이시우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바미르 토피 부야르 니샤니 일리르 메타 바이람 베가이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0000, #ff0000 20%, #ff0000 80%, #cc0000);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알바니아 임시정부|
임시정부
]]
초대 제2대
이스마일 체말리 페이지 알리조티
[[알바니아 공국|
공국
]]
제3대 제4대 (제3대) 제5대
투르한 파샤 퍼르메티 에사드 파샤 톱타니 투르한 파샤 퍼르메티 술레이만 델비나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일리아즈 브리오니 판델리 에방겔리 하산 프리슈티나 오메르 파샤 브리오니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6대)
자페르 이피 아흐메트 조구 셰프케트 버를라치 일리아즈 브리오니
제13대 (제6대) (제11대)
판 놀리 일리아즈 브리오니 아흐메트 조구
[[알바니아 제1공화국|
제1공화국
]]
(제11대)
아흐메트 조구
[[알바니아 왕국|
왕국
]]
제14대 (제7대) 제15대 (제14대)
코스타크 코타 판델리 에방겔리 메흐디 프라셔리 코스타크 코타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이탈리아령
]]
(제12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셰프케트 버를라치 무스타파 메를리카크루야 에크렘 리보호바 말리크 부샤티
(제17대)
에크렘 리보호바
[[알바니아 왕국(1943~1944)|
독일령
]]
제19대 (제15대) 제20대 제21대
이브라힘 비차크치우 메흐디 프라셔리 레제프 미트로비차 피크리 디네
(제19대)
이브라힘 비차크치우
[[알바니아 민주정부|
민주정부
]]
제22대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제2·3공화국
]]
(제22대) 제23대 제24대
엔베르 호자 메흐메트 셰후 아딜 차르차니
[[알바니아|
제4공화국
]]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파토스 나노 일리 부피 빌손 아흐메티 알렉산더르 메크시
제29대 (제25대) 제30대 제31대
바시킴 피노 파토스 나노 판델리 마이코 일리르 메타
(제30대) (제25대) 제32대 제33대
판델리 마이코 파토스 나노 살리 베리샤 에디 라마 }}}}}}}}}


<colbgcolor=#ff0000><colcolor=#000>
파일:Sali_Berisha_2008.jpg
출생 1944년 10월 15일 ([age(1944-10-15)]세)
알바니아 왕국 비시돌
재임기간 제2대 알바니아 제4공화국 대통령
1992년 4월 9일 ~ 1997년 7월 24일
제32대 알바니아 총리
2005년 9월 11일 ~ 2013년 9월 15일
서명
파일:살리 베리샤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0000><colcolor=#000> 부모 父: 라마 베리샤
母: 셰케라 베리샤
배우자 리리 라마즈
자녀 2명
학력 티라나 대학교 ( 의학 / 박사)
종교 미상
소속 정당 }}}}}}}}}

1. 개요2. 생애
2.1. 젊었을 적2.2. 민주화 운동2.3. 대통령 집권 후
2.3.1. 1996년의 부정선거
2.4. 불명예스러운 대통령 퇴임2.5. 대통령 퇴임 후2.6. 근황
3. 기타

[clearfix]

1. 개요

알바니아 제4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 '알바니아를 공산주의 체제에서 해방시킨 알바니아 제4공화국의 국부'이자 ' 희대의 경제 정책으로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타락한 독재자'라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젊었을 적

1944년 10월 15일 알바니아 북부의 비시돌[1]이라는 마을에서 무슬림[2]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 후 양을 치면서 살았다. 14살에 고향을 떠나 티라나로 갔고,[3] 티라나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 1967년 국비장학금으로 프랑스 파리 유학을 가 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1978년 UNESCO의 지원으로 다시 파리로 유학을 가고 비슷한 시기에 호자의 주치의가 되었다. # 1980~1990년 심장학 교수로도 활동했고, 티라나 종합병원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근무했으며, 그의 혈역학 연구는 유럽 기준으로도 발군의 수준이라 해외에서도 베리샤가 쓴 심장학 관련 서적과 논문이 출판될 정도였다.[4] 그리고 베리샤는 의학부의 당 비서이자 당시 알바니아의 독재자였던 엔베르 호자와 공산당 고위층들의 심장병 주치의이기도 했으며, 1986년에는 유럽 의학 연구 위원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89년에는 티라나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5]

그리고 베리샤의 젊은 시절,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노동당의 1당 독재 체제였고, 베리샤도 노동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969년 노동당에 가입했으며,[6], 노동당의 변화를 위한 토론 포럼에서 활동하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승리의 대명사이자[7] 그저 정치에 몸 담은 적이 있는 엘리트 의사로만 보였다.

한편 사생활에 있어서는 소아과 의사인 리리 베리샤(Liri Berisha, 1949~)[8]와 결혼하여 딸 아르기타(Argita Malltezi)[9]와 아들 슈켈젠(Shkëlzen Berisha)을 두었다.

2.2. 민주화 운동

하지만 호자의 사후 알바니아도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베리샤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노동당과 틀어지게 된다.[10] 베리샤는 당시 알바니아 작가 연맹 신문에다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남은 장벽을 없애고, 알바니아인이 국내와 해외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알바니아가 고립주의적 외교 정책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으며[11], 1990년 8월 라미즈 알리아 서기장이 소집한 국가 지식인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알바니아 노동당에 노동당이 권력의 패권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 공산주의 헌법의 제3조를 폐지하고, 인권 헌장을 인정하고,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초안하고, 국가 내의 모든 스탈린 기념물을 철거할 것을 촉구했고, 신문에다가 알리아의 개혁이 국가 내부의 불안을 악화시키는 데만 기여한 '화장품 개혁'이라고 주장하며 정치적 다원주의 없이는 알바니아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베리샤는 1990년 12월 티라나의 학생 시위 당시 학생들의 앞에 나서서 정부군의 탱크에 저항하면서 자생적인 학생시위를 전면적인 반정부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1990년 12월 12일 알바니아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중도우파, 민주화 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1년 2월 민주당의 첫 번째 전국 대회에서 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91년 3월 첫 민주적 총선[12]에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13] 1992년 총선[14]에서 민주화 열풍에 힘업어 140석 중 92석을 차지하는[15]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낸다. 베리샤는 이 때 페인트칠도 안 된 시멘트 벽돌집의 단칸에 세들어 사는 청렴함과 의대 교수 출신에 6개 언어[16]를 구사할 줄 아는 지성, 키가 크고 번듯한 외양, 뛰어난 선동력과 카리스마로 알바니아인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런 인기 속에서 베리샤는 1991년/1992년 총선에서 자기가 출마한 지역구인 티라나주 카바여[17]에서 무려 90%/97.5%의 득표로 재선되었고 몇 곡의 대중가요 가사가 베리샤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개사되기까지 했다. 비록 민주당 내에서도 베리샤가 너무 위압적, 직설적이라는 염려가 있긴 했지만 집권 초 알바니아 국민들에게 이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 여담으로 베리샤가 대통령이 됐을 당시 나이는 만 47세로 매우 젊은 편이었다.[18]

2.3. 대통령 집권 후

민주화 이후 의원내각제로 개헌되었지만, 베리샤 본인은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의 대표로서 총리직을 차지하는 게 정석임에도 불구하고, 총리직 대신 실권이 없는 대통령직을 가져갔다. 알바니아에서 대통령은 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따라서 단독 과반을 얻은 민주당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베리샤는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베리샤는 국정 운영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19] 베리샤 시기 알바니아는 사실상 대통령중심제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한편 이 당시 알바니아의 경제 환경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체제 전환 과정에서 경제가 완전히 박살나 알바니아/경제 문서에도 나오듯 1992년 세계은행 통계 기준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200.85달러[20][21]로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 기준으로도 극빈국이었다. 어느 정도었냐면 세계은행 통계 기준 당시 알바니아보다 가난한 나라는 단 10개국밖에 없었으며, 명색이 유럽 국가인데도 1인당 GDP가 무려 부룬디(!!!)[22]와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렇듯 너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던 나머지 한 여성이 흑백 TV(?!)를 구매하기 위해 자신의 아기를 헐값에 파는 엽기 사건까지 발생했다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 # 1992년 총선 직후 알바니아의 모습[23]만 봐도 수도 티라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고, 시골로 갈수록 더 열악해져 특히 산골 오지에 있는 외딴 시골의 경우 당시 1인당 GDP 수치가 납득이 갈 수준으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암담한 상황을 해결하고 알바니아의 경제를 자본주의 체제에 맞추기 위해 살리 베리샤는 가격, 환율 자유화와 민영화,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친EU, 친미를 표방하고 알바니아의 법 체계를 유럽 표준에 맞게 고쳤으며 알바니아의 재이슬람화를 외치며 종교 박해를 전면 폐지하며 경제, 외교, 정치적으로 전면 개혁에 나선 것은 물론, 다단계 피라미드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쳐 경기부양에 나섰으며, 그 결과 알바니아의 경제는 단박에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고, 1993~1996년 알바니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를 기록하여 1995년 공산정권 시절 1인당 GDP를 추월하고[24] 1996년 1인당 GDP는 1010달러[25]를 기록하며 최빈국을 벗어나는 듯했다. 때문에 당시 알바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체제 이행이 순조로운 국가로 평가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갈수록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저질렀는데, 집권 초부터 당내에서 온건파들을 몰아낸 것을 시작으로 지방선거 과정에서도 야당이 이긴 도시에는 식량 원조를 거부하면서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식량 원조와 뇌물을 살포했고, 공영 TV 방송국(TVSH)을 선전 도구로 쓰거나[26] 정부에 밉보인 기자들이 기소를 넘어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 등 언론 자유가 철저히 침해받았으며,[27] 정치적 이유로 판사와 검사, 심지어 대법원장[28]이 해고되는 등 행정부가 사법부를 장악하며 삼권분립을 침해했고, 정보기관을 동원해 정권을 비판한 야당 의원과 활동가들을 체포, 고문하기도 했다.

실제로 1993년에는 당시 사회당 대표였던 파토스 나노[29]가 부패와 권력 남용 혐의로 체포된 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바가 있다.[30] 당연히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호자의 미망인 네지미예 호자와 호자의 후임인 라미즈 알리아를 포함한 10명의 전직 노동당 고위 관리들이 부패 및 공적 자금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징역 3~9년을 선고받았으나 5년 이상 감옥살이를 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호자의 아들인 디르 호자도 1995년 "공공의 평화를 위협하여 국민적 증오를 조장했다"는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1996년 2월까지 32명의 전직 지도자가 공산주의 정권의 범죄로 투옥되었다. 또 대통령이나 알바니아 국가와 그 상징을 모욕한 혐의로 3개월에서 5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장관과 대사를 임명하기도 했고, 공산정권 시절부터 일해왔던 수많은 군 장교들과 관료들이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쫓겨났으며[31], 자신이 출생한 북부 지역 출신을 요직에 앉히면서 남부 지역 출신을 홀대했고, 그리스계 알바니아인들을 차별했으며[32], 동성애를 징역형이 가능한 범죄로 규정한 공산정권 시절 법이 잔존한 환경 속에서 게이 알바니아 협회의 두 지도자들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경찰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고,( #) 급격한 시장경제화와 함께 실업률도 올랐다.[33] # 이런 상황 속에서 지지율이 떨어져가고 야당 알바니아 사회당[34]의 공세도 거세지면서 베리샤의 국정 운영도 힘들어지자 1994년에는 개혁 노선을 계속하기 위해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는 헌법 개정을 묻는 국민투표를 열었지만 헌법 개정이 새로운 독재 정치의 재래로 받아들여졌기에[35] 43.6% 찬성, 56.4% 반대로 부결되었다. 이에 베리샤는 반발하며 1995년 3월에 베리샤는 행정부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지지한 민주당 의장 에두아르트 셀라미를 축출했다. 호자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민주화를 기대했던 알바니아인들은 또 다른 독재에 접어들게 되었으니 알바니아인들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36]

2.3.1. 1996년의 부정선거

1996년 총선을 앞둔 베리샤는 야당 세력 약화 공작에 들어갔다. 1995년에는 9월에 "공산주의 대량 학살 금지법"을 채택해 전 정치국과 중앙 위원회 위원, 그리고 1991년 5월 이전의 의원들의 정치 활동을 2002년까지 금지했는데, 이 법에 따라 사회당 사무총장 Gramoz Ruci와 12명의 사회당 의원들을 포함한 35명의 사회당원과 여러 다른 주요 야당 인사가 대량 학살법을 시행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 임명 "검증" 위원회에 의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7][38] 또 선거 전 선거관리위원회를 정부에 유리하게 개편하고, 대통령에게 선거구 변경을 승인할 수 있는 전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1996년 1월에는 당시 알바니아 최대 일간지였던 Koha Jonë(우리의 시간)가 세르비아 비밀 경찰과 협력했다는 근거 없는 혐의로 모든 직원들이 구금되었다.[39]

이 뒷공작을 바탕으로 1996년 총선에서 부정선거를 치렀는데, 민주당은 5월 26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115석 중 95석을 차지했으며, 6월 2일 25개 의석에 대한 2차 투표에서도, 6월 16일 부정선거를 너무 티나게 한 17개 의석에 대한 재선거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투표 후 야당들은 선거 결과를 보이콧했고, 특히 알바니아 사회당은 1차 투표 후 국회에서 의석을 차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야당의 보이콧으로 민주당은 140석 중 단 18석을 제외한 모든 의석을 가져가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국내외적으로 1996년 선거는 부정선거로 인식되었으며, 1996년 선거 이후 정부의 입지는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안정해졌다.[40]

실제로 선거 전에 야당 후보가 구타를 당하거나 위협을 받은 사례가 200건 이상 보고될 정도였고, 그 외에도 참관인 감소, 동일인의 반복투표, 여당을 찍으라는 협박도 있었으며, 당시 투표에 참여한 사람 중 16% 가량이 무효표를 찍었다. 게다가 민주당은 55.5% 득표율로 122석을 얻었는데 사회당은 20.4% 득표율로 10석을 얻은 등 게리맨더링 정황이 노골적으로 보였다. 이에 야당 지지자들은 1996년 5월 28일 티라나에서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었으나 경찰한테 폭력적으로 진압당했고, 이후 모든 집회는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 결국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요구에 따라 너무 티나게 부정선거를 한 17개 구역은 재선거를 하게 되었다.(...)[41] 그런데 정작 웃기게도 사회당도 민주당만큼은 아니었어도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한다.(...)

1996년 9월에 4명의 알바니아인이 공산당을 창당하고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 혐의로 12~18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42], 같은 달에 공산당 시대의 고위 관리 9명이 (5명은 궐석재판) "대량 학살법"에 따라 반체제 인사에 대한 정치적 박해 혐의로 최대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10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52.5% 지지율로 시장 63명 중 58명, 지자체장 297명 중 267명을 차지했는데 사회당은 31.2% 지지율에도 각각 4명/15명만 얻는(...)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정황상 1996년 총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던 북부 지역은 선거구를 잘게 쪼개놓은 것과 정반대로 사회당을 지지하던 남부 지역은 선거구를 뭉뚱그려 합해놓는 식으로 게리맨더링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4. 불명예스러운 대통령 퇴임

그 와중에 전술한 피라미드식 경제로 인해 터진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의 여파로 알바니아의 경제는 박살났다. 이 사태의 여파로 알바니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으며[43][44][45], 이 과정에서 사기꾼 몇몇이 정부와 유착 관계를 맺고[46] 1996년 국가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을 후원한 게 알려지며 베리샤의 이미지도 추락하여[47] 결국 조기총선에서 대패하였고 베리샤는 사임을 선언했다.[48][49][50] 대통령직은 노동당의 후신인 알바니아 사회당 소속의 레제프 메이다니가 가져갔다.[51] 심지어 베리샤는 내전 중 베리샤 시기 알바니아 총리였던 알렉산데르 멕시(Aleksandër Meksi, 1939~)[52]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3월 1일 사임했지만 베리샤는 야당의 사임 요구를 거부했고[53], 결국 총선 패배 한 달 후인 7월 23일에야 물러나게 되었다.

2.5. 대통령 퇴임 후

하지만, 최소 민주화를 이끈 영웅 이미지 덕에 국민들 사이에서 향수가 남아 있었고, 베리샤는 1997년과 2001년 텃밭인 카바여에서 의회에 입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민주당 대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2005년 총선 이후 총리에 취임하는 방식으로 8년 만에 권력에 복귀한다.[54] 다만, 민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실패하여, 군소 중도 정당들과의 연정으로 집권했고, 이 덕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에는 사회당 탈당파가 꾸린 통합사회운동과의 연정으로 집권하여, 일부 진보 노선을 포용하기도 했다. 나라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다면 다른 정치인이었으면 정치 인생이 끝장났겠지만 베리샤는 내전 후에도 알바니아 우파 진영의 대부 지위를 유지하고 이를 넘어 총리직을 2번이나 역임했는데, 이는 베리샤의 정치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베리샤는 정권을 교체당한 것과 정권을 탈환한 것 모두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기록을 세운 셈이다.[55][56]

2013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패하면서 사회당으로서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베리샤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총리직에서 물러났을 뿐 민주당 계열 정치인들의 대부로서 정계에서의 영향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2.6. 근황

하지만 이후 2022년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패[57][58] 및 테러리즘 지원 혐의로 미국 영국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된 이후, 룰짐 바샤[59]가 이끄는 민주당에 의해 제명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민주당 중앙당사를 습격하고 반미 음모론과 부정선거 음모론[60]을 펴면서 비공식 당대회를 열어 바샤와 그 일파들을 역으로 제명한 후[61] 자신을 지지하는 당원들과 같이 '자유의 집(Shtëpia e Lirisë)'이란 당을 따로 만든 채 탈당하면서 자신이 세운 당을 쪼개버리고, 이 정도면 알바니아 TV에서 개그 프로가 다 종영되었을 듯 2023년 12월 30일에는 알바니아 법원으로부터 의원 면책권을 박탈당한 채 가택연금을 선고받았으며, # 2024년 9월 11일에는 기꺼이 부패 혐의로 기소까지 되는 등( #), 여러모로 나라를 공산정권에서 해방시킨 영웅이라 하기엔 굉장히 추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2022년 12월 6일 시위 중 정신질환자에게 폭행을 당해 눈에 멍이 든 적이 있다. 베리샤는 가해자를 용서했지만 폭행 가해자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

2024년 11월 15일 기준 베리샤의 지지율은 30.1%다. 가택연금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지지자들이 베리샤를 정치탄압의 희생자라고 여기며 베리샤에 대한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보이며, 응답자의 65.4%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베리샤의 페르소나 논 그라타 지위가 풀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

2024년 11월 27일 법원 판결에 따라 베리샤의 가택연금이 해제되었다. 석방 후 베리샤는 알바니아의 다가올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했으며, '기술적인' 내각 구성을 촉구했다. #

3. 기타



[1] 비시돌은 알바니아 북동부 쿠케시 주의 코소보 국경에 접해 있고 1989년 기준으로도 인구가 1000명 미만에 불과한 자그마한 시골마을이다. 그리고 쿠케시 주는 고산지대인 만큼 오늘날에도 알바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체 유럽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덜 개발된 지역 중 하나일 정도로 빈곤한 지역인데, 실제로 쿠케시 주는 2018년 기준으로도 1인당 소득이 고작 3344.5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인 만큼 발칸반도 내에서도 북마케도니아 북서부, 코소보 비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가난한 지역이지만 트란스니스트리아, 북캅카스 연방관구(이들은 1인당 GDP가 2020년대에도 2000달러대일 정도로 매우 빈곤하다), 우크라이나 서부, 돈바스(이들은 유럽 지역임에도 1인당 GDP가 1000달러대다)보다는 잘 사는 편이다.(...) 게다가 베리샤가 집권한 90년대에는 체제전환의 후유증을 직격탄으로 맞아 1인당 GDP가 100~150달러로 추산되는 당시 기준으로도 세계 꼴찌급이 된 것은 애교에 화폐경제가 사라지고 그 빈 자리를 물물교환이 대체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4월 1일 뉴욕타임즈 기사 날짜가 묘하게 적절하다. 심지어 뉴욕 타임즈 성향상 만우절 농담으로 조작했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 더 무섭다. [2] 사실 알바니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은 민족이 사는) 코소보와 함께 유럽의 몇 안 되는 이슬람 국가다. [3] 이후 고향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었다. [4]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라 연구 자료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정도 연구 성과를 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베리샤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였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서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했더라면 더 좋은 연구 환경 속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어 혈역학 관련 서적에 반드시 그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5]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베리샤를 종종 '베리샤 박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이승만을 '이승만 박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 [6] 다만 당원 자리만 있었을 뿐이지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7] 알바니아 내에서도 가장 고립되고 가난한 고산지대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집안 환경도 불우하기 그지없었던 가난한 양치기 소년이 의대에 진학하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에서 살았음에도 2번이나 파리 유학을 갔다온 후 고작 30대 중반에 의대 교수이자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주치의가 된 만큼 유럽 전체 기준으로도 상위권의 실력파 의사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베리샤의 재능과 노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한반도로 치환하면 자강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가난한 북한 소년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국비유학을 다녀온 후 30대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된 것을 넘어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상위권의 연구자가 된 격이다. [8] 알바니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의 혼혈이다. 바니아 아동 재단의 회장이자 유네스코 친선대사이기도 하다. [9] 아버지의 두뇌를 물려받았는지 본인도 티라나 대학교 법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2024년에는 아버지와 남편의 비리 혐의를 조사하는 검찰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 [10] 사실 베리샤는 해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해외의 자유상에 감명을 받았고, 이는 베리샤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1] 당시 알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였던지라 나라에 제대로 된 항공사도 없고 올림픽에도 거의 참가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해외 정보는 철저히 차단되어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도 알리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알바니아인들은 알바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착각할 정도였다. [12] 이는 1923년 이후 68년 만에 치러진 알바니아의 민주적 총선이었다. [13] 당시 인민회의 의석 250석 중 사회당은 169석(기존에는 의석 전체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2/3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75석을 얻었다. 때문에 민주화된 알바니아의 첫 대통령에 오른 사람은 라미즈 알리아 서기장이었다. 사회당은 모든 주요 도시에서 민주당에 졌지만, 농촌에서 이겼기에(농촌에서 의원을 선출하는 데 필요한 표가 도시에서 선출하는 데 필요한 표보다 훨씬 적었으며, 농촌 주민들은 사회당 정부의 흑색선전을 진심으로 믿은 것에 더해 그동안 사회당만 찍어왔던 경로의존성까지 겹치며 대다수가 사회당에 표를 던졌다) 총선에서 이길 수 있었고, 선거 과정에서 부정과 사기가 보고되었다고 한다. [14] 이 총선에서는 부정과 사기와 관련된 보고가 거의 없었다. [15] 사회당은 38석을 얻었다. [16] 알바니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17] 알바니아에서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곳으로, 알바니아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8] 이는 빌 클린턴보다 1살 많고 버락 오바마보다 1살 어리다. [19] 반면 하술하듯 총리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20]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452달러도 되지 않는데,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한국의 실질 1인당 GDP가 2024년 가치로 환산한 게 605달러다. [21] 러시아 모라토리움으로 경제가 작살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몰도바조차 당시 알바니아보다 양반이었다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 [22] 당시 1인당 GDP가 188.6달러였다. [23] 0:00~0:24에 베리샤의 총선 승리 축하 연설과 환호하는 지지자들이 나온다. 뜬금없이 성조기가 나오는 것에 의아할 수 있는데, 미국-알바니아 관계 문서에 나오듯 당시 알바니아인들이 생각하는 미국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진'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50년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미국 이상의 포지션이었다고 한다. [24] 화폐가치 변동을 감안하면 공산정권 말기 수준을 회복했다. [25]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2030달러다. [26] 1996년 총선 당시 여당에 야당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선거 후 항의 시위에서 경찰이 가한 폭력 진압을 보여주지 않았다. [27] 언론인보호위원회가 1997년 언론 자유의 10적 중 10위로 살리 베리샤를 선정했을 정도였다. # 프리덤 하우스가 산정한 언론자유지수에서도 1994년 지표에서는 총 53점(18+16+9+10)으로 '부분 자유'였지만 1997년에는 총 75점(26+23+20+6)의 '부자유'가 되었다.(사실 1995년부터 '부자유'로 강등되었다) 당시 알바니아의 언론자유지수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집권하는 벨라루스(85점)을 제외하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집권 중이던 유고슬라비아와 동점의 유럽 최하위였고, 시에라리온 내전에 시달리던 시에라리온, 하페즈 알 아사드가 집권하던 시리아와 동점이었다. 당시 최하위는 100점 만점을 기록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북한이었고, 최상위는 5점을 기록한 노르웨이였으며, 한국은 25점이으로 '자유' 등급이었다. 여담으로 알바니아의 언론자유지수는 1998년에는 총 56점(18+22+10+6)으로 다시 '부분 자유'로 돌아왔고, 2017년 마지막 통계를 냈을 때 점수는 총 51점(15+19+17). [28] 제프 브로지. 1995년 사법부의 독립성 침해에 의문을 표하다가 해고되었다. [29] Fatos Nano, 1952~. 1991년 4개월 동안 총리를 역임한 적이 있다. [30] 이후 나노는 1997~1998(다름 아닌 베리샤를 패배시킨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2~2005년 총리를 역임하며 설움을 풀었다. [31] 물론 국민들은 이에 대해 공산잔재 청산이라며 환호했다. 그러나 이런 군 정책은 후술할 1997년 사태 때 정부군의 진압 능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으며, 상술한 폰지사기도 공산정권 시절 훗날을 대비해 키워놓은 경제 관료들을 쫓아내면서 경제 전문가를 찾다가 검증도 안 된 사기꾼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32] 그리스 정교회 성직자가 추방된 것 외에도 그리스어 학교가 폐쇄되고, 그리스인이 군에서 추방되고, 사유화 경매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다. [33] 사실 후자는 다른 체제전환국들도 다 겪은 일이긴 하다. [34] 알바니아 노동당의 후신 [35] 전하는 말에 따르면 헌법 개정안에서는 입법, 사법 및 행정 권한의 구분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에게 총리, 장관, 판사를 임명하고 해임하고 대법원을 주재할 권한이 주어졌다고 한다. [36] 다만 베리샤에게도 할 말은 있는데, 베리샤가 집권 전에 보고 배운 정치 체제가 공산권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 북한을 제외하면 가장 억압적이고 가혹했던 알바니아의 체제였기에 그러한 모습에 익숙해져서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된 후에도 독재정권에서 봐온 모습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사실 배리샤의 통치 모습 체제도 정확히는 제3공화국 시절 대한민국, 오늘날의 헝가리, 튀르키예와 같은 비자유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봐도 무방하다. 물론 재선 후에는 러시아 비슷하게 바뀌었지만.(...) [37] 이 법은 베리샤의 사임 후 폐지되었다. [38] 이에 알바니아 사회당 측은 민주당이 '정치적 복수를 제도화'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며 그렇게 따지자면 베리샤도 과거 호자의 주치의가 아니었냐고 비난했다. [39] 이후 이 신문사 사무실은 하술할 내전 시기 화재로 파괴되었고 발행인은 구타당했다. [40] 외국에서는 아예 1996년 총선을 후술할 금융사기 사건과 함께 베리샤 정권의 붕괴 요인으로 꼽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 부정선거가 정권 붕괴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3.15 부정선거와도 비슷하며, 공교롭게도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도 베리샤와 함께 독재자 중에서도 최상위권 엘리트에 속한다. 물론 이승만은 지금보다 인종차별이 더 극심했던 20세기 초반(그것도 경술국치 직전에!)에 박사 학위를 땄다는 것과 순수 학력에 있어서도 ' 하버드 대학교 석사 +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 + 우드로 윌슨의 수제자'라는 그랜드슬램을 이루었기에 오늘날 선진국 지도자들과 비교해도 어마어마한 엘리트이다. [41] 당시 알바니아를 방문한 독일인은 1996년 총선 이전에는 "이번 봄에는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는 알바니아인이 거의 없었다"고 밝히며 여론조사와 선거 결과가 다른 결과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사회당이 여전히 공산주의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출마한 13개 정당 중 실질적인 대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나름대로 진심이 담긴 결과물이라 보았다. 참고자료 사실 베리샤의 권력을 강화하는 투표에 40%대 찬성으로 부결되었다는 것을 보면 투표 결과에 조작을 가했을 리는 없는 데다가 베리샤가 독재를 할 것 같다고 해도 지지하는(...) 매우 탄탄한 지지층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부정선거를 안 했어도 가까스로나마 과반 의석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긴 하다. [42] 다만 내란음모 혐의에도 고작 이 정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걸 보면 뭔가 수상한 감이 없지는 않다. [43] 사실 당시 경제성장도 폰지사기로 인한 거품경제였다. [44] 심지어 베리샤는 이번 사태는 사회당이 배후 조종한 것이라고 우긴 것은 물론 시위대를 "무장한 공산주의 반군"으로 부르며 시위대에 폭격을 명령했다. 공산정권 시절 군 장교들을 부역자 취급하며 쫓아냈다가 군의 진압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 실제로 민간인 무장시위대가 남부 사란도시의 해군항을 점령하고 함정 6척도 탈취하자 정부군은 이 시위대에게 진짜로 2차례 폭격을 가했다. # 하지만 다른 알바니아 공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을 거부하며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났다. [45] 심지어 베리샤는 반군에 대한 자위권을 명분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무기고를 개방했다. # [46] 아예 정부가 공영 TV 방송국을 통해 3개월 안에 돈을 3배로 늘려주겠다고 광고하기도(...) 했다. [47] 아예 대통령 관저가 폭도들에 의해 불타기도 하고 어린이들이 '살리 베리샤 물러나라!'라고 외치는 영상도 남아 있다. [48] 1992년 140석 중 92석, 1996년 140석 중 122석을 얻었던 민주당이 1997년에는 155석 중 단 27석만 얻었다. 베리샤와 알바니아 민주당이 얼마나 처참히 몰락했는지 제대로 보여준 셈. 쉽게 말해 의석 90% 가까이 독점하던 정당이 하루아침에 의석의 20%도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거 과정에서 어떠한 부정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다 베리샤가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게다가 과거 알바니아 노동당의 폭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고려하면 과장 안 보태고 리즈 트러스보다 더 한심하다고 욕먹어도 싸긴 하다. [49] 덤으로 199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52.75%, 민주당은 25.7%를 얻었는데, 달리 말하자면 내전을 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었다는 말. 공산당 정권에 너무 한이 맺힌 나머지 '그래도 알바니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온 사람들이잖아'라며 지지했다고 하면 납득이 가는 편이긴 하다.(...) 공산당 쫓아내줬잖아 자유와 빵을 줬잖아 짐바브웨 사람들이 한때 짐바브웨를 해방한 독립영웅이었던 로버트 무가베의 폭정과 경제 파탄에도 불구하고 국민 21%가 무가베를 짐바브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여긴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 물론 전해 선거에서 55.5% 득표율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상의 지지층을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50] 사실 민주화 후 공산당의 후예가 다시 정권을 잡은 동구권 국가는 알바니아 외에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도 있었다. 참고로 불가리아는 공산당이 재집권 후 오히려 민주정부보다 더 경제를 개판으로 만들어놔서(1997년 물가상승률이 무려 1058%였다) 다시 민주화세력이 집권했다. [51] 그나마 이쪽은 베리샤만큼의 권위주의적 행각은 저지르지 않았을뿐더러 1998~2001년에는 1993~1996년의 베리샤보다 약간 낮은 수준에 불과한 연평균 9.2%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1999년 1996년의 1인당 GDP를 회복할 정도로 내전 피해를 빠르게 수습했다. 물론 실질적인 국가 통치는 총리들이 했다. [52] 여담으로 민주당 소속이었는데도 "너무 온건하다"는 이유로 당시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알바니아의 정보기관은 멕시를 감시하거나 베리샤에게만 보고하는 등 일국의 총리(그것도 자기 진영의!)를 마치 적처럼 대할 정도였다. [53] 다만 이는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추태가 아니라 비상시국에 대통령직에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베리샤가 물러났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이 어찌어찌 상황을 수습했겠지만... [54] 알바니아 역사상 총리와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지도자는 살리 베리샤와 일리르 메타(이쪽은 국회의장도 역임했다.)가 유이하다. 다만 블라디미르 푸틴 우르호 케코넨, 최규하처럼 총리와 대통령을 모두 역임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55] 이는 과장 안 보태고 북한과 동급의 억압적인 학정을 펼친 호자의 후계자들을 이긴 민주화영웅 이미지 덕이 컸겠지만, 비슷하게 '성공한 민주화운동가이자 실패한 정치인이던' 레흐 바웬사와 비교하면 베리샤의 정치력이 탁월했다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다. 참고로 바웬사는 동구권 민주화의 희망이 된 민주화운동가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년 지지율이 5%(...)였고 2000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어도 12명 중 7위를 기록하며 처참히 낙선했는데, 물론 바웬사는 순수 정치력이 형편없었을 뿐이지 베리샤처럼 폴란드를 내전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56] 유사 사례로는 반군과 경제 파탄에 시달리던 페루의 상황을 개혁할 존재로 인식되며 집권 초 지지율 96%(!!!)를 기록했으나 집권 후에는 기존부터 열악했던 상황을 도리어 이전보다 더 망가뜨려놔 임기 말에는 지지율 9%로 떨어지며 다른 당 소속의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정권을 물려줬으나(게다가 후지모리도 가르시아의 지원에 힘입어 대선에서 당선된 거다) 퇴임 16년 만에 페루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알란 가르시아가 있다. [57] 2005~2009년에 총리 지위를 이용해 티라나에 아파트 건물 17개를 짓게 할 목적으로 토지 사유화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사위와 함께 (정식 기소도 없는 상황에서) 검찰 수사를 받았는데,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징역 12년(공교롭게도 과거 자신이 수감한 파토스 나노 사회당 대표가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베리샤는 검찰 수사에 대해 에디 라마 총리가 기획한 정치적 탄압이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여담으로 그의 순자산은 100만 달러로 추산된다. [58] 참고로 베리샤와 그의 자식들은 티라나의 가장 비싼 건물과 넓은 아파트 외에도 다른 두 지역에도 빌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관광 마을의 빌라를 무단 철거 후 멋대로 건물을 짓기도 했다. # [59] Lulzim Basha, 1974~. 나이가 나이인지라 알바니아의 민주화 운동에는 크게 참여하지 않았고, 베리샤 집권기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009~2011년에는 내무부 장관, 2011~2015년에는 티라나 시장, 2013~2022/2023~2024년에는 민주당 대표를 역임했다. [60] 베리샤는 자신의 부패 혐의가 에디 라마 조지 소로스 토니 블링컨을 불법 로비해서 말하게 한 허위 정보이며, 선거 패배 역시 사회당이 부정선거를 했기 때문이라고 우겼다.(...) 이 정도면 과거에 의대 교수가 맞았는지 그 지능이 의심이 갈 지경. [61] 물론 바샤는 베리샤의 의결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022년 3월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참고로 2022년 3월부터 2023년 7월까지 민주당 당대표는 법무부 장관 출신의 엔켈레즈드 알리베이(Enkelejd Alibeaj, 1973~)이었고, 바샤는 2023년 7월 다시 민주당 당대표로 복귀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2023년 11월 21일 에디 라마 사회당 정권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면서 의회 책상 위에 불을 지르고 의회에 3색 연막탄을 던졌다가(...) 한국에서도 보도되었다. [62] Essad Pasha Toptani, 1863/1875~1920, 오스만 제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청년 튀르크당에도 가입했던 인물로, 제1차 발칸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알바니아 총리를 역임하며 일신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알바니아 영토 일부를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넘겨줬다. 1913년에야 독립을 인정받은 나라의 일부를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떼어줬다고 하니 극악무도한 매국노인 셈이다. 알바니아의 교사 아브니 루스테미(Avni Rustemi, 1895~1924. 굴뚝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1918년 기준 문율이 5% 안팎일 정도로 교육 수준이 낮던 나라에서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유학까지 다녀온 S급 엘리트였다)에게 1920년 암살당했는데, 루스테미는 무죄 판결을 받고 민주주의 성향 야당의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1924년 아흐메드 조구가 보낸 요원에게 암살되었다. 당연히 루스테미는 사후 알바니아 국민들에게 한국으로 치환하면 거의 안중근급 위인으로 대접받고 있다. [63] 실제로 학시아는 1998년 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알바니아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 대표였던 아젬 하이다리(Azem Hajdari, 1963~1998)를 살해한 혐의로(이 사건은 민주당 측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일 정도로 파장이 컸다) 2018년 튀르키예에서 송환된 후(이때 튀르키예 정찰에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2023년 징역 2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 #2 베리샤가 1998년 시위를 주도하여 당시 사회당 정부로부터 체포까지 거론되었다는 것을 보면 블레즈 콩파오레와 같은 배신자라 봐도 할 말이 없는 셈. [64] 이르게 잡아도 1998년까지 쓰인 방송 시작 영상 후 여성 아나운서의 방송 개시 멘트가 나오고(공산권 시절 방송의 흔적이다). 간추린 뉴스 후 알바니아 민요풍 노래가 2개 나오고 정규 뉴스가 진행된 후(해당 인트로는 1992~1996년 쓰였으나 뉴스 제목의 TV 글씨는 1990~1993년 쓰인 로고 글씨체다) 방송 종료 화면(여기서 쓰인 음악은 90년대 초 바이에른 방송 ID에서 쓰인 음악이다)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