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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8:13:09

제2차 노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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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노예 전쟁
영어: Second Servile War
시기 기원전 104년 ~ 기원전 101년
장소 시칠리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노예 반란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살비우스☠
아테니온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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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104~101년, 시칠리아 섬에서 두 번째로 발발한 노예 전쟁이다.

2. 상세

기원전 2세기 말, 로마 공화국은 북방의 게르만족을 상대로 한 킴브리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손실을 치러야 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시민들은 탁월한 군략을 갖춘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집정관에 연이어 선임하며 킴브리족의 침략에 대처하도록 했다. 마리우스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는 대대적인 군사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소아시아 북부 비티니아 왕국 니코메데스 3세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니코메데스 3세는 노예 약탈자들이 자국의 주민들을 마구 잡아다가 노예로 삼아버렸기에 병력을 보낼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동맹국의 자유 시민을 노예로 삼는 걸 금지하고, 시칠리아 법무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네르바에게 노예가 된 동맹국 자유 시민을 해방시키라고 지시했다. 네르바는 재판소를 설립하여 800명 가량의 동맹국 출신 노예들을 해방시켰지만, 노예 소요주들이 집단 항의하고 뇌물을 건네자 재판소를 폐쇄하고 더 이상 노예를 풀어주지 않기로 했다. 이에 노예들이 집단 항의하자, 그는 당장 주인들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500명의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기원전 104년 엘라스를 기습 점령한 후, 약탈을 벌여 무기와 갑옷을 확보하고 이곳을 요새화했다. 이에 네르바는 즉각 병사들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지만 실패하자 가이우스 티티니우스라는 인물을 회유했다. 이 인물은 사형선고를 받자 도망친 뒤 도적질에 전념하던 자로, 네르바의 회유에 넘어가 노예 반란군에 귀순하는 척했다가 몰래 성문을 열어줬다. 네르바는 즉각 엘라스 요새로 진입하여 많은 이를 살육했고, 일부는 잔혹한 고문을 피하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반란은 멈추지 않았다. 헤라클레아 미노아에서 또다른 반란군이 봉기한 것이다. 이에 네르바는 부관 마르쿠스 티티니우스에게 600명의 병력을 맡겨 이들을 진압하게 했지만, 마르쿠스 티티니우스의 진압군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궤멸되었다. 이 소식에 기세가 한껏 오른 반란군은 사방에서 도망노예와 빈민들을 끌어모이면서 6,000명을 확보했다. 그들은 지도자로 점술에 능했던 살비우스를 세웠다. 살비우스는 자신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디오도토스 트리폰을 따서 '트리폰 왕'이라 칭하고, 시칠리아 섬 전역에서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노예군이 모르간티나 시를 포위 공격하자, 네르바는 정규군을 이끌고 도시 구원에 나섰다. 그는 반란군이 모르간티나 시를 포위 공격하느라 비어있는 진영을 공략하고 여러 여성들과 제물을 탈취했다. 이에 살비우스는 포위를 풀고 네르바와 맞붙었다. 전투 결과 네르바의 군대가 반란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밀려 패배했다. 이때 살비우스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난다면 살려주겠다고 외치자, 수많은 군단병이 무기를 내던지고 달아났다. 이를 통해 무장을 강화한 반란군이 몰아치자, 다급해진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반란군과 싸운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르간티아 내 노예들은 이에 호응하여 반란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그러나 네르바가 노예 주인들의 약속을 거부하자, 그들은 더 싸울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모르간티아를 살비우스에게 넘겨줬다.

한편, 시칠리아 남부에서는 안테니온이 이끄는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도시와 농촌을 초토화시켰다. 그들은 기세를 이어가 릴리바이움을 공격했지만, 요새화가 잘 되고 해상 보급을 원활하게 받는 그곳을 공략하는데 실패했다. 그 후 살비우스가 소환령을 내리자, 안테니온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즉시 가담한 뒤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반란군의 규모는 60,000명에 달했다고 하며, 살비우스는 트리오칼라를 수도로 삼고 왕을 상징하는 보라색 의복을 입었다. 이제 법무관 네르바의 힘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원로원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1]에게 20,000명의 병력을 맡기고 노예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루쿨루스가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가가자, 살비우스는 농성전에 착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안테니온이 제1차 노예 전쟁 때 타우로메눔에서 농성했다가 로마군에게 무너져버린 일을 거론하며 과감한 승부가 필요하다고 진언하자, 그는 이를 수락하여 6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루쿨루스와 맞붙었다. 초기엔 안테니온이 로마군의 좌측면을 뚫고 들어가면서 노예군이 승기를 잡는듯 했지만, 안테니온이 도중에 낙마하자 전의를 상실한 노예군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루쿨루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20,000명 가량의 적군을 참수한 뒤 즉시 추격하지 않았고, 반란군은 이 틈을 타 트리오칼라에 입성했다. 그 후 루쿨루스가 트리오칼라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벌였지만 쉽게 함락되지 않자 포위하여 굶겨죽이려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루쿨루스가 적을 즉시 쫓지 않고 지체하다가 뒤늦게야 공세에 나선 점, 트리오칼라를 얼른 함락하지 않고 포위만 한 점에 불만을 품고 기원전 102년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루쿨루스는 격분하여 극단적인 조치를 내렸다. 모든 막사와 공성 무기, 물자 등을 전부 파괴해 새 지휘관이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세르빌리우스는 이로 인해 반란군을 상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반란군은 사방에서 세력을 끌어모으면서 시칠리아 섬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원로원은 루쿨루스와 세르빌리우스를 소환하여 전쟁을 끝내지 못한 죄를 물어 추방했다.

시칠리아의 노예 반란이 장기화되면서, 시칠리아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이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1년, 동료 집정관이자 부관인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당시 반란군 지도자였던 살비우스는 병사했고, 아테니온이 새 지도자로 선임되어 있었다. 그는 마니우스와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벌어진 회전은 불과 1시간 만에 로마군의 압승으로 끝났고, 아테니온은 아퀼리우스와 일기토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그 후 아퀼리우스는 반란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응징하면서 마지막까지 남은 반란군 1,000명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의 경기장에서 야수들과 싸울 기회를 주겠다고 전했다. 이에 노예들은 검으로 서로를 찔러 죽이는 방식으로 집단 자살했다.

이리하여 제2차 노예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로마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노예 반란이 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후, 검투사 노예 출신의 스파르타쿠스가 이전의 두 반란을 능가하는 제3차 노예 전쟁을 일으키면서, 로마는 다시 한 번 시련을 겪게 되었다.


[1]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최측근이자 당대 최고의 전술가였던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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