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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01:32:24

안티고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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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안티고노스 왕조 3대 국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Ἀντίγονος Γονατᾶς | Antigonus II Gonatas
파일:안티고노스 2세.jpg
안티고노스
Ἀντίγονος
별명 고나타스
Γονατᾶς
출생 기원전 320년
미상
사망 기원전 239년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재위 기간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기원전 277년 ~ 기원전 274년,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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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왕조 3대 국왕. 할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 아버지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가 잇따라 전사 또는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켈트족의 침략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간섭, 에페이로스 왕국 명장 피로스 1세의 위협, 아카이아 동맹의 도전 등 수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이 모든 걸 극복하고 무너져가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강대국으로 육성시키고 안티고노스 왕조를 반석 위에 올린 명군이다.

2. 생애

기원전 320년경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안티파트로스의 딸 필라 사이에서 출생했다. 별명은 고나타스(Γονατᾶς)인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 알렉산드로스 3세의 뛰어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로스가 머나먼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을 때 프리기아의 사트라프로서 보급로를 끝까지 사수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디아도코이간의 세력 분쟁에 적극 참여하였고, 에우메네스를 꺾은 뒤 헬레니즘 제국 최강의 세력을 구축하여 기원전 306년에 왕을 칭했다. 그러나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으며, 그가 이전에 지배했던 영토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에게 분할되었다.

입소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데메트리오스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우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 셀레우코스에게 자신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후처로 주고, 그 대가로 킬리키아를 받아냈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힘을 기르면서 때를 노리다 기원전 296년 아테네 참주 라카레스가 폭정을 일삼자 아테네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세를 개시해 2년간의 전투 끝에 기원전 294년 아테네를 공략했다. 이후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4세의 공격을 물리치고 스파르타를 압박했다. 그러던 중 마케도니아에서 공동 왕이던 형 안티파트로스 1세에게 추방당한 알렉산드로스 5세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부 해안과 암브리아, 아카르나니아, 암필로키아 속주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행로를 스파르타에서 마케도니아로 돌려서 안티파트로스를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이후 돌아가는 척하다가 테살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 5세를 연회에 초대해 암살한 후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하고 왕을 칭했다.

기원전 292년, 데메트리오스는 보이오티아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정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원수 중 한 명인 리시마코스가 게타이 부족의 군주 드로미케테스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들 안티고노스에게 보이오티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기고, 자신은 트라키아로 쳐들어갔다. 안티고노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테베에 몰아넣었다. 이후 트라키아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테베 공방전을 벌였다. 도시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데메트리오스는 부하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자, 그는 괴로워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는 이 아까운 생명들을 그렇게 불필요하게 버려야 합니까?"

데메트리오스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위해 식량을 구할 필요가 없느니라."

기원전 291년 테베를 마침내 공략한 데메트리오스는 500척의 대함대를 건조해 소아시아를 공략할 준비에 들어갔다. 데메트리오스의 이같은 움직임에 놀란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그리고 에페이로스 왕국 피로스 1세는 데메트리오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기원전 288년 봄,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가 에게 해를 돌며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선동했다. 여기에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가 동쪽에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했고, 피로스는 서쪽에서 공격했다. 결국 기원전 287년, 데메트리오스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마케도니아에서 테살리아로 퇴각했고, 데메트리오스의 아내이자 안티고노스의 어머니 필라는 병사들이 앞다퉈 투항하는 광경을 보고 심히 절망하여 독약을 삼키고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테네가 반란을 일으키자,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것만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들에게 아테네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모든 배를 모아 11,000명의 보병과 모든 기병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건너가 리시마코스의 카리아 속주와 리디아를 공격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에게 그리스에서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뒤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가 아테네로 진입하는 걸 저지했으며, 아테네는 곧 항복했다. 그러나 소아시아로 건너간 데메트리오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다. 초반에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가토클레스에게 패배한 뒤 갑작스런 기근과 역병으로 많은 전력을 손실하였다. 그나마 남은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하지도 못해 병사들의 불만을 샀다.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군대가 급료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다는 걸 눈치채고, 사람을 몰래 보내 거액의 돈을 줄 테니 자기 편에 서라고 꼬드겼다. 이후 킬리키아에 도착한 그는 데메트리오스의 군대 앞에 투구를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고, 장병들은 곧바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에게 포획된 뒤 아파메이아에 수감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 셀레우코스에게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영토를 넘겨주고 자기가 인질이 될 테니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셀레우코스는 묵살했다.

기원전 283년, 데메트리오스는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에페메이아에서 사망했다. 셀레우코스는 유해를 안티고노스에게 돌려보냈다. 안티고노스는 즉시 전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 키클라데스 인근에서 셀레우코스의 함대와 접견하고, 아버지의 유해가 담긴 관을 건네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테살리아에 세운 도시, 데메트리아스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그 후 아크로 코린토스, 칼키스, 데메트리아다에서 통치를 행사하던 그는 기원전 281년 마케도니아 왕이 될 기회를 포착했다. 그해 셀레우코스 1세가 소아시아로 쳐들어가 리시마코스를 전사시켰다. 이후 헬레스폰트를 건너서 트라키아를 장악하려 했으나, 그해 9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안티고노스는 함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입하려 했지만, 해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의 함대에게 역공당해 소아시아로 패퇴했다.

기원전 279년 초, 켈트족이 마케도니아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를 전사시켰다. 그들은 마케도니아를 철저히 약탈한 후 계속 남하하여 그리스의 여러 지역을 침공했다. 그는 켈트족에 맞서 그리스 방어에 협력해, 기원전 278년 아이톨리아 동맹과 함께 테르모필레와 델포이에서 켈트군을 견제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어 후퇴를 강요하였다. 이후 재차 마케도니아 왕이 되려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했으나, 소스테네스에게 격파되어 아시아로 퇴각했다. 기원전 277년 재차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리시마케이아 근처에 상륙했다. 그는 배를 해변으로 끌어낸 뒤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얼마 후 켈트족들이 배를 약탈하러 접근했을 때 습격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이 당시엔 소스테네스가 모종의 이유로 사망하였고, 리시마케이아 전투에서 켈트족을 물리친 그의 명성이 드높았기에, 마케도니아 백성과 군인들의 추대를 받아 비로소 마케도니아 왕이 될 수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왕이 된 뒤 켈트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였고, 셀레우코스와의 동맹을 강화해야 했다. 다만 켈트족이 세운 틸리스 왕국이 트라키아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트라키아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기원전 276년에는 카산드레이아에서 폭정을 일삼던 아폴로도리스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워줬다. 그러나 기원전 275년 베네벤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피로스 전쟁을 그만두고 에페이로스로 돌아온 피로스가 이듬해(기원전 274년) 병사들에게 줄 급료를 마련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면서, 그의 입지는 몹시 불안해졌다. 피로스는 아우스 강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하였고, 안티고노스는 신분을 감춘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결국 피로스는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왕을 칭했고,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동부 해안 도시들만 차지하였다.

하지만 피로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 수도 베르기나의 왕실 묘지를 도굴하여 금을 찾으려 드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해안 도시에 내몰린 안티고노스를 그대로 내버려뒀다. 그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안티고노스는 피로스에게 반감을 품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재건했다.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한 클레오니모스 왕이 피로스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그의 동맹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피로스는 이에 혹하여 2만 5천 보병대와 2천 기병대, 그리고 24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가 아르카디아 메갈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안티고노스는 이 때를 틈타 마케도니아의 일부 영역을 탈환한 뒤,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떠났다. 한편 피로스는 스파르타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아르고스에서 내전 중이던 아리스테아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에 아리스테아스와 싸우고 있던 아리스티푸스는 안티고노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리하여 양군이 아르고스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아르고스에서는 자신들의 땅이 폐허가 될 것을 우려해 다른 곳에서 전투하라고 요구했고, 고나타스는 요구에 따라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피로스는 그 틈을 타 아르고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성문이 작아 코끼리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르고스인들이 저항하면서 고나타스에게 도움을 요청해 고나타스, 크레타에서 귀국한 스파르타의 왕 아레우스 1세의 협공을 받았다. 이들의 군사가 많은 것을 본 피로스는 성벽을 부수고 퇴각하려 했지만 전령이 아들 헬레누스에게 말을 잘못 전달해서 헬레누스의 군대는 성 안으로 진격하고 피로스의 군대는 성 밖으로 나가려다 뒤엉켜 부대에 혼란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피로스는 전사하였고, 참수당한 그의 머리는 안티고노스에게 바쳐졌다. 안티고노스는 전투 도중 전사한 할아버지와 포로 신세로 전락한 아버지를 떠올리고, 피로스의 허망한 최후에 외려 비통함을 느겼다고 한다. 그는 피로스의 장례를 정중히 치러주게 했다.

피로스가 전사한 뒤, 그가 이끌던 병력 대부분은 안티고노스에게 항복했다. 이때 안티고노스의 아들 알키오네오스는 항복한 장병들을 살펴보던 중 피로스의 아들 헬레누스가 허름한 옷으로 변장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헬레누스를 친절하게 대접한 후 아버지에게 데려갔다. 안티고노스는 이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아들아, 네가 지금 한 일은 그 전에 한 어떤 것보다 낫구나. 그렇지만 우리가 승리자가 된 지금 우리에게 불명예스러운 이 옷을 입게 놔두는 이유는 무엇이냐?"

안티고노스는 곧 귀한 의복을 가져와서 헬레누스에게 갈아입히게 한 뒤, 영예로운 손님으로 대접하고 에페이로스로 돌려보냈다. 그 후 마케도니아 영토를 전부 탈환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인사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로 세우게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통제받는 걸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간접 통치를 하면서 그들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는 성정이 온화하고 관대했기에, "따르고 싶은 군주의 표상"으로서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토록 신중을 기해 배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강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걸 두려워했다. 안티고노스가 서쪽의 일리리아, 동쪽의 트라키아와 친선관계를 구축하고 코린트, 에우보이아, 테살리아에 군대를 주둔시켜 그리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자, 그들은 이대로 가면 자신들도 속국이 되리라 여겼다.

여기에 이집트도 경계심을 품었다. 그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가 서로 친밀한 관계[1]를 맺는 것에 위협을 느꼈고, 동부 지중해와 에게 해, 심지어 흑해까지 진출할 정도로 방대했던 자신들의 세력이 위협받는다고 여겼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테네, 스파르타를 지원하였다. 기원전 267년, 클레모니데스라는 이름의 아테네 지도자가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싸우자고 주장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에 동의하여 공동으로 마케도니아에 대항했고, 이집트가 이를 후원했다. 안티고노스는 군대를 파견해 아테네 영토를 유린하고 바다를 해군으로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아티카 입구에 서 있던 포세이돈의 숲과 신전도 파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테네를 돕기 위해 에게 해로 항해해 케이오스 섬에 기지를 세우고 기원전 266년 아티카로 항해했다. 그는 스파르타군과 합세한 뒤 아테네를 견제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군이 적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아티카로 오지 못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기원전 265년 스파르타 왕 아레우스 1세는 코린토스 지협을 건너 마케도니아군에게 포위당한 아테네를 도우려 했지만, 안티고노스 2세가 그들을 격파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해군 역시 적 해군에게 가로막혀 아테네에 물자를 공급해주지 못했다.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육군을 보내달라고 청원했지만,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261년 초, 아테네는 안티고노스에게 항복했다. 안티고노스는 아테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그들이 반감을 품지 않게 하고자 심한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2세는 안티고노스와 연합하여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실시했다.(제2차 시리아 전쟁) 안티고노스 함대는 코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격파하고 코스 섬을 공략했으며, 안티오코스는 팜필리아와 이오니아, 밀레투스, 에페소스를 공략한 뒤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기원전 25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시리아 일부를 공략하였다. 여기에 코린토스와 칼키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로 철수했다.

기원전 255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화해하고, 안티고노스가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그대로 갖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2년 후인 기원전 253년, 마케도니아의 코린토스 총독이자 안티고노스의 조카인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의 지원에 힘입어 반란을 일으켜 코린토스에서 독립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기원전 247년 자객을 보내 알렉산드로스를 독살하였고, 기원전 244년 알렉산드로스의 미망인 니케아와 자신의 후계자인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코린토스를 다시 마케도니아의 영역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카이아 동맹이 결성되어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를 훼방놓았다. 그는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자인 시콘의 아라투스를 회유하기 위해 25달란트를 선물로 보냈지만, 아라투스는 이 돈을 다른 도시 국가들에 골고루 나눠줘서 동맹을 굳건히 하였다.

안티고노스는 아라투스를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책략을 사용했다. 그는 코린토스에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고기 일부를 시콘에 있는 아라투스에게 보냈고, 손님들 앞에서 아라투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시콘의 청년을 자유와 동포의 애호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제는 그가 왕의 예절과 행동을 잘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그는 이전에 우리를 경멸했고, 코끼리, 함대, 궁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집트인들을 존경했소. 하지만 더 가까운 거리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이 단지 무대의 도구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 이제 우리에게 다가왔소. 나는 기꺼이 그를 맞이하고, 그를 중용하기로 마음먹었소. 다들 그를 내 친구라고 생각해주길 바라오."

그는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아라투스가 안티고노스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렇다고 여기게 되길 바랬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의 말을 믿었고, 이집트에서도 아라투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라투스는 오히려 강경하게 나왔다. 기원전 243년, 그는 안티고노스의 코린토스 지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아크로코린토스 요새를 기습 점령했다. 이 소식이 코린토스 전역에 전해지자, 코린토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티고노스 지지파를 몰아내고 아카이아 동맹에 가담했다. 아라투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레카움 항구를 점령하고 안티고노스의 함선 25척을 나포했다. 아라투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추가로 끌어모은 뒤 아테네를 침공하여 살라미스를 약탈하였고, 붙잡은 아테네의 모든 자유민을 몸값을 받지 않고 아테네에 돌려보냈다. 이는 아테네 역시 반란에 가담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안티고노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라이벌인 아이톨리아 동맹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과거 켈트족의 침략 때 안티고노스의 도움을 받아 켈트족을 격퇴한 적이 있었기에,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안티고노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고 아카이아 동맹에 대적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이 굳건히 버틴데다 이집트가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기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도 안티고노스는 아테네를 비롯하여 아카이아 동맹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을 번번이 훼방놓는 이집트에 보복하고자 마케도니아 해군을 파견해 안드레스 해전에서 프콜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고 키를라데스 제도를 공략했다.

기원전 239년,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에서 사망했다.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 안티오코스 1세의 아내 스트라토니케는 안티고노스의 여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