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관
호모 에렉투스 베이징 원인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지역이었다. 서주시대와 춘추시대에는 서주의 제후국인 계(薊)나라가 있었으나 춘추시대 중반 전국 7웅인 연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정복당한 계 땅에 도읍을 두면서 '계(薊)' 혹은 '계성(薊城)'[1], 또는 '연나라의 수도'라는 뜻에서 연도(燕 都) 내지는 ' 연경(燕 京)'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북경 대신 연경이라 지칭한 것과 현재까지 베이징 대표 맥주의 이름이 바로 연경에서 따온 옌징맥주(燕京啤酒)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명나라 황제에 오르기 전 영락제의 작위였던 '연왕' 역시 고대의 연나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장비가 삼국지연의 소설 속에서 외쳐대는 말이 "나는 연인(燕人) 익덕 장비다!"인데, 이처럼 스스로를 연나라, 즉 연 지방 사람으로 지칭했다는 점이다. 여담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사형으로 유명한 공손찬의 근거지가 북평, 정확히는 우북평이지만, 이 우북평군은 지금의 탕산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으로 근세 베이징의 별명인 북평과는 가깝긴 해도 별개의 지역으로 간주된다.역사적으로도 중국 왕조들의 북방 요충지였으며, 전연, 후연, 북연 또한 베이징이 소속한 허베이성 일대를 근거지로 했다.[2]
거란이 세운 요나라 때에는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당시 유주로 불리던 베이징을 남경 석진부로 삼았다. 요의 수도는 내몽골의 상경 임황부였으며 남경은 5대 수도의 하나로서 경제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요나라의 중원공략 전초기지 역할도 겸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수도로서의 역사는 중흥대흥부(중도)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진족 완안부 금나라 시대부터인데 이때를 시작으로 베이징은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항상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다.
해당 지역은 선비족이 정복한 이후 지속적으로 북방민족 정복왕조가 등장하며 중요도가 올라갔고 금나라가 아예 이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지금도 몽골어에서 유래한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후에 만주족 또한 베이징을 정복하는 등 역사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도시로 난징과 같이 송나라 이후 시대의 발자취를 논하거나, 동아시아사 시험에 있어서 자주 문제로 출제되는 지역이다.
이름답게 중국 기준에서는 북쪽, 특히 북동쪽에 있다. 이전 고대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뤄양이나 시안과 비교해도 정말 눈에 띄는데, 이는 중국의 농경상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3], 사실 이러한 이유를 차치하고서도 상당히 전략적인 요충지인 탓에 만주나 몽골계 왕조의 공격을 더욱 자주 받은 곳이기도 하다.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에 들어선 키아트부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이 근처에 수도를 정하고 '칸발리크' (대도, 大都)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고타이 칸이 금을 멸망시킨 후 이 곳의 이름을 '중도'에서 위대한 도읍이라는 뜻의 '대도(大都)'로 개칭한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이민족 왕조에 의해 베이징은 처음으로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고 대륙의 최중심지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 쿠빌라이 칸의 정복 국가의 국호를 중국인들이 원(元)으로 부른 시점에 대도를 수도로 삼고 피정복지를 다스리게 된다.[4]
그러다가 이후 홍건적을 비롯한 한족들의 대규모 반란, 특히 주원장의 명나라에 밀려 원은 점점 후퇴하고 도시의 이름은 북평부가 되어 연왕부가 설치된다. 참고로 자금성 중 우리가 흔히 자금성으로 아는 명대 자금성이 아닌 원대 자금성은 현재 북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티베트 불교 식 백탑이 떡하니 서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5] 애석하게 한국에서 출발하는 패키지 상품에선 잘 안 간다.
그렇게 최초로 이곳에 도읍한 한족 통일 왕조는 명나라인데, 앞서 설명된 내용처럼 이민족 왕조인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가 수도로 삼았다.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가 연왕 시절에 정치적 기반을 삼았던 곳이었고, 명은 수도를 난징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자금성도 이때 짓게 된다. 그리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진족 계통의 직계 후신이라 봐도 무방한 만주족 청나라가 도읍을 선양시에서 옮겨와 다시 한번 이민족의 수도가 되었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중화민국, 중화제국, 북양정부도 여기에 자리잡았다.
2. 변천사
2.1. 화베이의 주요 도시
계성은 서기 295년의 대홍수 후 기존의 전기 계성에서 후기 계성으로 이전되며 현재의 도심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통적으로 계라 불린 베이징은 허베이 지방 북부의 거점이었다. 고대 시기의 계성은 노구교와 완평성이 위치한, 현 베이징 도심의 서남쪽 외곽인 펑타이구와 시청구에 걸쳐 있었다. 8세기 이상 이어지던 연나라는 기원전 226년, 10개월 간의 공방전 끝에 진나라에 계를 빼앗긴 후 곧 멸망했다. 진시황의 군현제에 있어 베이징 일대는 광양군(廣陽郡)에 편성되었고, 계성은 계현(薊縣)으로 개칭되어 그 치소가 되었다. 다만 20년도 안되어 진승·오광의 난과 함께 한광이 연왕으로 추대되며 연나라는 부활했고, 이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시에 (한광의 부장이던) 장도가 연왕으로 책봉되며 공식화되었다.
이어진 초한쟁패기 당시 장도는 항우를 배반, 유방의 천하 통일을 도왔기에 재건된 연나라는 한나라의 몇 안되는 이성 제후국인 연국(燕國)으로 남을 수 있었다. 기원전 202년, 장도가 이번에는 유방을 배반하며 반기를 들자 유방은 친정하여 그를 주살하고 개국공신 중 하나인 노관을 연왕에 봉했다. 노관 역시 기원전 195년, 여후를 두려워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명하자 유방의 아들 유건이 연왕에 봉해져 연국은 동성 제후국이 되었다. 기원전 180년 유건이 사망하자 여후는 친족인 여통을 연왕에 봉했으나, 곧 그녀가 사망하고 여씨 일족은 숙청되었다. 이후로 연국은 광양국(廣陽國)으로 개칭되어 제후국이 아닌 유주 산하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계현은 광양국의 치소이자 유주 자사부가 위치한 북방의 중심 도시로 유지되었다.
후한 건국 직후인 서기 26년, 건국 공신이던 팽총은 반란을 일으켜 긴 공방전 후 이듬해 계성 (계현)을 점령하고 연왕을 칭했다. 광무제는 직접 토벌하지 않았으나, 29년 팽총은 내부 배신으로 제거되었다. 이후 군현제가 강화되며 광양군이 재차 설치되었고, 이는 3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다만 천 년간 국호이던 연(燕)은 지역명으로 확연히 정착한 상태였고, 계현이 종종 ' 연경(燕京)'이라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외치는 말도 "나는 연인(燕人) 장비다!"인데,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군 탁현[6] 역시 광양군 계현과 함께 연나라의 옛 영토인 유주 관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비 역시 스스로 연나라의 후예인 '연인', 즉 연 지방 사람으로 지칭했던 것이다.
18로 제후 중 처음으로 허베이 지방의 패권을 잡을뻔 한 공손찬도 근거지는 베이징 동쪽의 우북평[7] (현 탕산시)였지만 정식 칭호는 '계후'였다. 공손찬은 유주자사 유우와 계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후자를 죽이고 유주를 장악했으나, 기주의 원소에 패하여 역경루 (현 베이징 남쪽 슝안신구)에서 농성하다 죽었다. 원소는 아들 원희를 유주목에 봉했으나, 허베이를 평정한 조조가 북상해오자 관민들이 투항했다. (205년) 조위 건국 후 225년 조비는 동생 조우를 연왕에 봉했고, 조예의 치세인 232년 광양군은 재차 제후국인 연국으로 개편되었다. 조우는 조예 사후 섭정이 될 기회를 놓쳤고, 260년 아들 조환이 황제가 되었으나 266년 그가 폐위되며 조위는 멸망했다. 조우 역시 연왕에서 연공(燕公)으로 격하되었고, 278년 사망한다.
조위를 멸하고 서진을 세운 사마염은 동생 사마기를 연왕에 봉했다.[8] 297년 사마기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조카인 제왕 사마경의 아들 사마기가 연왕이 되었으나, 팔왕의 난 중 사마경이 몰락한 후 연국은 폐지되었다. (302년) 그 무렵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외는 영가의 난을 틈타 유주를 장악했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337년 전연을 세웠다. 전연은 본래 요서의 용성을 수도로 삼았으나, 349년 2대 황제 모용준이 계성으로 천도하여 357년 다시 업으로 천도할 때까지 그 수도였다. 전연은 370년 전진에게 멸망했으나, 비수대전 후 모용준의 동생 모용수가 후연을 세우며 재건되었다. 다만 후연은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북위에 대패하여 쇠퇴했고, 베이징 일대는 북위의 영토가 되었다.
점차 중요도가 오르던 베이징은 비록 북위 ~ 북주 시기에 소외를 겪긴 했으나, 당나라 말엽 허베이 지역 절도사 정권들의 혼란기를 거쳐 등장한 북방 정복왕조들이 지속적으로 도읍으로 정하면서 위상이 올라갔다. 우선 요나라의 5경 중 남경이 되었고, 뒤이은 금나라와 원나라는 아예 수도로 삼았다. 중세 이후 허베이를 통치한 유일한 한족 왕조인 명나라도 처음에는 난징이 수도였지만, 황자 시절 베이징 (당시 북평)에 주둔하던 '연왕' 영락제가 천도했고 만주족의 청나라 역시 입관 즉시 수도로 삼았다. 금나라의 중도, 원나라의 대도, 명·청 대의 북평 / 북경까지 명칭 변천이 다양했으나 '연'이란 옛 지명도 유지되었다.[9]
2.2. 북방 왕조들의 수도
금나라 대에 중도의 서쪽, 영정하(永定河)에 놓인 노구교[10])
역사적으로도 중국 왕조들의 북방 요충지였던 계현은 전연과 후연의 수도를 지냈다.[11] 수나라 건국 후에는 범양(范陽)으로도 불린 남쪽의 탁군( 줘저우)가 더욱 중시되었으나, 당나라 대에는 다시 계현이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허베이 지역은 종종 기존 지명들을 합한 연계(燕薊)라 불렸다. 수-당대에도 몇차례 연왕이 봉해지기는 했으나, 이미 주현제가 정착한 후였기에 -국이 붙지 않고 허베이도(河北道) 유주(幽州)로 이어졌다. 8세기 전반 계현은 당현종이 창설한 천보 10 절도사 중 범양(혹은 유주) 절도사의 치소가 되었고, 744년 평로( 차오양시) 절도사 안록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하동( 타이위안) 절도사까지 차지한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키며 대연 황제를 칭했다.
안사의 난(755 ~ 763년) 이후 평로 절도사는 산둥으로 이전되었고, 범양 절도사는 노룡 절도사로 개칭되었다. 9세기 들어 절도사들의 독립성이 강화되자 노룡 절도사는 연국공(燕國公)을 제수받고 직위를 세습하는 등 군벌화되었다. 오대십국기인 911년에는 노룡절도사 유수광이 칭제하여(마지막) 연나라를 세웠으나, 911년 후당에게 멸망했다.[12] 그 무렵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936년(후당 멸망의 대가로) 후진의 석경당에게서 연운 16주를 할양받았고, 그중 당시 연주로 불리던 베이징을 5경 중 남경 석진부로 삼았다. 요의 수도는 내몽골의 상경 임황부였지만, 남경은 경제 중심지로써 중시되었다. 한편 송나라 대에도 몇 차례 연왕이 봉해지긴 했으나, 이미 그 중심지인 연운 지역이 거란의 영토였기에 유명무실 했다.[13]
1121년 금나라의 공격에 상경과 중경을 상실한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서쪽 변경의 응주로 도주하자, 야율대석 등 요나라 잔존 세력은 남경 석진부를 중심으로 연운 16주 일대에 북요 정권을 수립했다. 북요는 북송의 환관 동관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격파했으나, 내분으로 야율대석이 떠난 후 금나라에 정복되었다. 따라서 1120년 해상 맹약과 달리 연운 16주 일대는 북송이 아닌 완안부 여진의 금나라가 차지하게 된다. 금나라는 맹약에 따라 베이징을 송나라에 반환했으나 백성들은 모두 끌고 간 채 빈 땅을 송에 할양했고, [14] 이듬해 송나라의 배신으로 금과 송의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은 다시 금나라에 정벌되었다. 금나라가 북중국 일대를 장악한 이후 금나라는 요나라의 남경이 있던 베이징에 역시 5경 중 하나인 중경 대흥부(中京大興府)를 설치했다. 본래 만주의 상경 회녕부를 수도로 삼고 있던 금나라는 해릉양왕이 한화 정책 및 화북 지배 공고화[15]를 위해(1151년부터 공사한 후) 1153년 중경으로 천도, 중도(中都)라 명명했다.
2.3. 중국의 수도
'천년의 왕성'이라 불리는 베이징성의 모습. 점선이 바로 명-청대의 이른바 '모자성'이다.
정주 문화인 화베이와 유목 문화인 만주 사이에 입지한 덕에 베이징은 이민족 왕조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대국의 수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금나라의 도읍 중도를 시작으로 베이징은 일부 기간(금원 / 원명 교체기 및 국공 내전기)을 제외하고 거의 항상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다. 금나라 시기 중도는 크게 번영했다. 하지만 몽골-금 전쟁 개전 후 3차 침입 당시 몽골군은 1213-14년에 걸쳐 중도를 포위했고, 강화 체결 후 금선종은 중도를 포기하며 남경인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뒤이은 4차 침입에서 중도의 군민들은 1214-15년에 걸쳐 인육을 먹을 정도 처절히 저항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지휘한 몽골군에 함락되었다. 이후 도시는 약탈, 학살, 방화로 크게 파괴되었다. 중도성의 흔적은 성벽의 일부와 노구교 정도만이 남아있다.
남천한 금나라와 서하를 끝내 멸망시키며 북중국을 통일한 오고타이 칸은 중도를 위대한 도읍이라는 뜻의 '칸발리크' 혹은 대도(大都)라 명명했다. 이후 남송까지 멸하며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 쿠빌라이 칸은 왕자 시절 자신의 거점이던 대도를 원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베이징은 대륙의 최중심지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또한 세계 제국인 몽골 울루스의 중심지로서 대도는 크게 번영했고, 이때 미래의 자금성의 모태와 성벽의 구획 등 베이징의 도시 구조가 대략적으로 정해졌다. 또한 원나라의 지배 계급은 몽골족이었기에, 지금도 몽골어에서 유래한 지명들(대표적으로 옛 골목가인 후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은 후계자인 칭김을 연왕으로 봉했으나 그는 1286년 요절했고, 칭김의 아들이 대신 황태자가 되어 원성종으로 즉위하게 된다. 번영하던 대도는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으로 쇠퇴하던 끝에 1368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접근해오자 내몽골의 상도 개평부로 천도하며 수도 지위를 잃었다. 원대 자금성의 흔적은 베이하이공원 일대에 주로 남아있으며, 티베트 불교식 백탑이 떡하니 서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16] 그 입구에는 작은 성채인 단성도 있다. 후일 1406-20년에 걸쳐 세워진 자금성 역시 원대의 궁성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대도를 무혈 접수한 주원장은 '북방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담은 베이핑부라는 이름을 지었고, 여전히 초원 지역에 남아있던 북원의 견제를 위해 연왕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아들들 중 주체를 연왕으로 봉했다.
정난의 변을 거쳐 남경의 건문제 정권을 찬탈한 주체( 영락제)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베이핑을 베이징으로 고쳐(1403년) 천도했다. (1421년) 따라서 명나라는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처음이자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가 되었고, 당시에 세워진 자금성은 청대의 증축을 거쳐 현재까지 중국의 대표 관광지로 남아있다. 중국의 또다른 상징인 만리장성 역시 영락제의 베이징 천도 후 수도의 방위를 위해 대대적으로 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으로, 특히 베이징의 바로 위인 팔달령 장성의 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토목의 변 이후 만력제 연간까지, 만리장성 축조에 천문학적인 공을 들인 명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장성 내의 같은 한족 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 이자성의 난) 이후 명과 대립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 신사층의 지지를 받으며 입관했고, 동시에 순치제는 도읍을 성경 ( 선양시)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17]
명대 성벽의 잔존부 (내성의 동남각루)
명의 제도를 답습한 청나라는 행정구역 역시 그대로 유지하여 명-청대 베이징은 4대 천부 중 하나인 순천부(顺天府)의 경사(京師)에 편성되었다. 다만 이미 수도였기에 상위 행정 구역인 허베이성(직예성)의 성도는 베이징이 아닌 다밍부, 바오딩부, 톈진부 등지를 전전했다. 청나라 때 베이징의 인구는 70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중화민국 북양정부도 여기에 자리잡았다. 1914년에 순천부는 경조지방(京兆地方)으로 개편되어 즈리성에서 분리되었고, 이때 기존 순천부가 관할하던 24개 현 중 바오안(保安), 원안(文安), 다청(大城), 닝하(寧河)의 4개 현을 즈리성으로 넘겼다.[18] 처음에 위안스카이가 이곳에서 대총통에 취임했으며 이어 안휘군벌의 수령 돤치루이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 안직전쟁 이후 차오쿤, 우페이푸 등 직예군벌이 집권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관내진출을 단행한 봉천군벌 장쭤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19]
그런데 1926년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북양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북양정부는 베이징에서 철수했고 국민정부가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후 경조지이 폐지되고 중심시가지 지역을 제외한 산하 현들은 모두 허베이성으로 이관되었으며, 남은 시가지 지역은 북방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베이핑(北平)으로 다시 격하되었다.[20] 북양정부는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당한 후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정함에 따라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중국의 수도는 난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로도 북중국의 중심지로 남던 베이핑은 1931년 만주 사변과 1933년 열하사변으로 졸지에 최전방이 되었고, 국민혁명군은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어떻게든 옛 수도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이미 3면으로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던 베이핑은 불과 한달 만인 8월 8일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다만 국민혁명군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기에 시가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베이핑은 다시 중화민국령이 되었지만, 이듬해 국공내전이 재개된 이후 1948년 가을부터 베이핑은 공산군 측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러한 평진 전역의 결과, 1949년 1월 21일 화북토비총사령관 푸쭤이가 투항하면서 베이핑은 인민해방군에 무혈점령되었다. 이로써 같은해 설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베이징으로 이름이 돌아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21] 1989년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던 천안문 광장이 이곳에 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그 후 올림픽을 계기로 건설붐이 일어 도시가 대규모로 정비되고 있다.
[1]
삼국지 관련 게임 같은데에서 보면 나오는 명칭으로, 오환과 맞딱드리는 곳, 바로 해당 지역이 지금의 베이징이다.
[2]
전연, 후연, 북연은 모두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모용선비가 중심이 되어서 세운 나라들이다.
[3]
황하강의 문제로 시안과 뤄양에 농경 문제가 대두되고, 동시에 서부의
사막화가 아주 심해지다보니, 오랜 기간동안 비옥한 땅이었던 동부(하북 지역)로 수도를 옮겨 온 것이다. 대신 이쪽도 서부보다 아주 조금 나을 뿐 건조하고 황하 강의 영향을 받는 것은 똑같다.
[4]
특히나 대도는 속칭
계획도시,
신도시에 가까운 국제도시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동방견문록에서의 언급이라던가, 이후 현대 학자들의 연구부터 해서 이러한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다.
[5]
이는
몽골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
주원장의 노력이며, 또한 애초부터 유목하던
몽골인들이 상도와 대도를 번갈아가면서 지냈기에 사실
원나라 시절의 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도라기보다는 전시용 세트장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6]
현
바오딩시
줘저우시
[7]
이 우북평군은 지금의 탕산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으로 근세 베이징의 별명인 북평과는 가깝긴 해도 별개의 지역이다.
[8]
그 무렵 홍수로 인해 계성과 시가지는 조금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9]
중세 중국에서도 요동-요서-허베이 일대를 상징하는 한자는 연 (燕)으로 유지되었고,
수양제의 장손
양담이 연왕에 봉해졌다. 뒤이은
당나라 대에도
수당교체기의 개국 공신
나예가 619년 이씨 성을 하사받고 연군왕에 봉해졌다. 다만 그는 627년
당태종에 맞서다 죽었고, 후자의 동생 이영기와 아우 이우가 차례로 연왕에 봉해졌다. 다만 수나라 때부터 군현제가 완전히 정착했기에 더이상 행정구역에 -국이 붙지 않았고, 허베이도(河北道) 유주(幽州) 계현으로 유지되었다. 한편 유주는 후일 연주(燕州)로 개칭되는데, 당나라 대의 연주는 요서의 지명이었기에 헷갈리면 안된다.
[10]
노구교 사건(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난 그 노구교 맞다.
[11]
전연, 후연, 북연은 모두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모용선비가 중심이 되어서 세운 나라들이다.
[12]
이 연나라(유연)는 존속 기간이 너무 짧아 오대십국에 들지 못한다
[13]
송태조의 아들
조덕소,
송태종의 아들
조원엄이 연왕에 추봉되었고
송신종의 아들 조우가 연왕에 봉해졌다
[14]
금의 입장에서는 송나라가 전쟁에서 기여한 것이 없다시피 해서 온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무찔렀으니 백성은 빼고 땅만을 송나라에 준 것도 대승적인 양보였지만 송나라에서는 이에 관해 불만이 컸다.
[15]
정확히 말하면 기존 여진족 귀족들의 텃세가 강한 만주에서 화북으로 중심지를 옮기는 것
[16]
이는
몽골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
주원장의 노력이며, 또한 애초부터 유목하던
몽골인들이 상도와 대도를 번갈아가면서 지냈기 때문에 사실
원나라 시절의 대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도라기보다는 전시용 세트장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애석하게 한국에서 출발하는 패키지 상품에선 잘 안 간다.
[17]
이후 성경은 봉천부로 남는다
[18]
마치 현대의
도쿄도와도 유사한 형태의 행정구역이 된 것인데, 설치된 시기는 경조지방이 더 이르다. 현대의 베이징시는 이때 경조지방이 관할하던 20개 현 중 10개 현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19]
신해혁명 이후에도
자금성은
청나라
황제의 거처로써 인정받았으나, 이러한 복잡한 과정 속에서
쫓겨났다.
[20]
명나라 초와 같이 남방 세력이 베이징을 제압했다.
[21]
중일전쟁 초반에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은 상태로 함락되어 충칭이나 난징 같은 이전 수도에 비해 입은 피해가 적었던 것도 전후 수도로의 재선정의 원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