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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8:47:12

번역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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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구별 방법4. 주의사항
4.1. 번역체와 문어체의 관계4.2. 번역체와 문장 부호4.3. 문화 또는 정서의 차이4.4. 번역체로 오해하는 경우
4.4.1. 맡긴 고객의 문제점
5. 목록6. 다른 언어에서 발생하는 번역체7. 기타8. 관련 문서

1. 개요

translationese[1]

외국어 번역할 때 저절로 생기기 쉬운 이질적인 문장.[2] '번역'은 문장 뿐만 아니라 의미를 옮기는 일(의역)이므로, \'어떻게 하면 원문의 본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옮길 수 있을까?'는 모든 번역가들의 공통된 고민거리이다. 특히 창작물의 대사는 아무리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해도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끼면 분위기가 다소 딱딱해지고 캐릭터 개성이 살기 어려우니 직역 의역을 모두 고려해서 의미가 가장 잘 전달되도록 번역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어의 사회성을 거스르는 오역이 되거나 전와어가 생길 위험성이 있다. '번역투'라고도 하며, 번역의 관점마다 '번역투'보다는 '외국어투'가 더 적절하다는 견해도 있다. 조사 시제에서도 나타난다.

2. 원인

어색한 번역은 아마추어 번역가들 사이에서 특히 자주 나타난다. 직역하면 괴리감이 아주 커지는 관용어 정도를 제외하면 전체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번역을 추구하기보다 특정 단어나 특정 구절 낱개의 사전적인 뜻에만 집착하는 국내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굉장히 많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원인으로는 가장 먼저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주입식 교육'을 지적할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아마추어 번역가들의 심리를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 거짓짝', ' 언어간 동형이의 한자어' 등 문서에 적힌 한국어 뜻풀이와 외국어 뜻풀이의 수준을 비교하면 알 수 있듯이 각종 언어 교과서, 사전에서는 'A의 발음은 ㅏ/ㅓ/ㅔㅣ'라는 식으로만 대응하고 있다.[3] 그리고 원문을 최대한은 살려서 번역하려는 자세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해당 표현을 세세한 분석, 상황·언어 습관· 이음동의어 고려 없이 그냥 주입식으로 통째로 외우기만 해서 '원문 그대로 표현을 전달하려는 심리'와 '전체 문장의 뜻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사전적인 뜻에서 벗어나는데 찝찝하다고 느끼는 강박 관념'이 지나치게 작용하다 보니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어의 직역으로 이어져 사전적인 뜻이 문법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좀 다른 예로는 ' 되다'의 활용 '되어'를 들 수 있다. ''로 줄일 수도 있지만 간혹 맞춤법을 무시하고 ''로 잘못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피동 접미사 '-되다'의 활용 '-되어' 뒤에 '-지다'를 붙이면 이중 피동 '-되어지다'가 되지만, 맞춤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조차 '-되지다'나 '-돼지다'로는 쓰지 않는다. 다른 맞춤법은 무시하면서도 이처럼 굳어진 표현은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규범주의 논란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선술된 내용을 요약하면 번역체란 외국어의 영향 없이 원래부터 대응 외국어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든, ' 도전', ' 주소'처럼 뜻이 혼동돼서 달라지거나 추가된 말이든( 오역으로 볼 수도 있다), ' 남자친구', ' 여자친구'처럼 외국어의 영향으로 생긴 말이든[4] 해당 표현이 번역어로서 굳어진 채로 쓰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5]

그러나 사전에 해당 표현을 상술된 세세한 분석, 언어 습관 고려 없이 그냥 쓰다 보니 언어 습관의 변화를 잘 못 반영해서 부자연스러운 번역을 낳기도 한다. 20세기 초반에는 폭넓게 쓰였으나 21세기에는 번역체에서 말고 더 이상은 잘 안 쓰이는 표현이 이에 해당하는데, 일본어의 '優しい'를 ' 상냥하다'로, 영어의 'idiot'을 ' 얼간이'로 번역하는 등이 이 예이다. 곧 그때 만들어진 사전이나 단어장이 잘 갱신되지 않은 채로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 계속 사용되며 나온 말투인 셈이다.[6] 이런 반영 문제는 자전(사전)의 낡은 훈풀이와 비슷하며, 일상생활에서는 ' 싱크대'를 쓰면서 영어 'sink'를 번역할 때는 '개수대'로 번역하는 등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7]

한편으로 언어 사대주의를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보다 낮게 인식하는 국가의 언어를 번역할 때는 위와 같은 심리가 옅어지고 전체 의미를 고려하여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지향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중국어는 많은 번역이 이루어졌음에도 중국어 번역체와 관련해서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고, 비유럽권 언어를 번역할 땐 고유명사 말고는 거의 의역하여 알아듣기 쉽게 번역한다. 영미권 번역가들이 동아시아권 언어를 번역할 때도 대개 의역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전체 문장의 뜻을 고려해 매끄럽게 번역한다.(다만, 이는 단순히 서양권 언어와 동양권 언어 간 차이가 많은 문법 때문일 수 있다.) 이처럼 언어 사대주의의 원인으로 나오는 어색한 번역체들은 서양 언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시대의 영국인들이 자기네 언어보다 프랑스어를 더 높은 언어로 인식해서 영어답지 않은 영어 표현들[8]이 잔뜩 나왔는데, 'other than(~밖에)'이 대표 격이다.

언어 변화 경로의존성 군중심리와도 유관한데, 이것("4. 영어 단어 100개 외울 시간에 2-3개 단어만 집중적으로 파자") 참고.

3. 구별 방법

번역체 사이에도 유달리 어색한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the tree is dead.'를 '그 나무는 사망했다.'로 번역할 때이다. 한국어는 유정명사와 무정명사의 문법적인 구별이 꽤나 까다롭고 '사망'은 유정명사 사이에서도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동적명사이다. 그래서 'dead'를 '사망한'/'사망했다'로만 직역하면 어색해지는 것이다.

영어 문장 "I love you." 역시 한국어로 번역할 때 다양한 표현으로 의역할 수 있다. 유독 한국어의 인칭대명사와 종결어미가 다양한 데다가, 아무때나 똑같은 표현을 쓰는 영어를 그대로 반영하기보다는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이 따로 있을 수 있어서이다(예: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한다, 사랑합니다, 사랑하오, 사랑하네). 의미는 모두 같지만 어감이 제각각이며 말하는 대상이 누군가에 따라 적절해 보이거나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인칭대명사와 동사변화가 다양하지 않은 영어에서는 뭔 짓을 해도 판별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이 다양한 문장들을 전부 다 똑같은 문장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체를 구별하는 빠르고 간단한 방법은 바로 문장을 직접 화자가 입으로 소리 내면서 말하는 것이다. 입말, 특히 일상어는 번역체가 스며들기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글로 쓸 때는 문제가 없어 보여도 정작 말해보면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간단한 방법이라 정확성이 낮고, 본인의 어휘력에서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맹신하면 멀쩡한 문장을 자기자신이 써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번역체로 오인할 수 있으며,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되뇌면 갑자기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고, 번역가는 어떠한 자격이나 전공이 필수가 아닌 데다 정확성보다는 속도가 중요한 일이 많아 본인의 느낌에 따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입으로 말해보고 번역하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며, 문어체는 바른 표현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입으로 말할 때 어색한 말도 많다.

번역체 문장은 일상적인 한국어 사용에서도 나타나며, 이미 번역체를 많이 접한 사람은 일상에서 번역체를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 때 멀쩡히 한국어로 읽던 용어들을 대학교에서 원서, 번역서를 보다 보면 영어로 말하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20세기 이후 한국어는 외국어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아 상당한 표현들이 번역체래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는데( 관련 글 1, 2, 3), 신문, 뉴스 등 언론에서 '~(으)로/~게 알려졌다/알려져 있다' 역시 쓰지만 언어의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이)라고/~다고 밝혀졌다/밝혀져 있다/알려졌다/알려져 있다' 같은 번역체 문장을 쓰는 것이 이미 관행으로 굳어졌다. 비슷하게 '~(으)로 부르다/불리다/로도 쓰이지만 '~(이)라고 부르다/불리다'로 훨씬 많이 쓰인다.[9] 이는 한국의 역사와도 유관하며, 타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서양 철학자들은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을 읽으면서 문법을 다듬었다. #

원래 언어 낱말뿐더러 문법도 전래되기 때문에 현재 언어에서 어느 것이 원래 문장이고 어느 것이 번역체 문장인지 구별하기 어려우며, 일반적으로 모국어 사용자의 일상어는 비문 비속어 등에 상당히 오염되어 있다.[10] 더구나 번역체에 민감한 교열자의 문장이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어색할 때가 더 많은데, 이는 교열자 중에 국립국어원의 기준조차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기준을 설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곧 학교 문법과도 괴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흔히 국문 전공자의 의견만 들으면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만, 전공자 간에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문제인 데다가, 이런 사람들 중에도 세부적인 지식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문서에도 그러한 사례들이 설명되어 있다. 게다가 일단 오역인지 아닌지부터 알아야 번역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데, 글에서 다루는 분야 자체를 모르면 이를 가려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전문 용어를 쓴 것일 뿐인데 번역체로 오인할 수도 있고 자연 현상을 설명했을 뿐인데 습관적인 수동형 표현으로 오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가보다는 그 글에서 다루는 내용을 전공한 사람의 의견과 국어학자의 의견을 두루 들어보거나 국립국어원, 사전, 논문 등을 찾아 보아야 번역체인지 아닌지 보다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4. 주의사항

글을 쓸 때 흔히 강조하는 '우리말답게 쓴다'는 것은 곧 '말하는 듯이 자연스럽게 쓴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과'를 단순히 일본어투라서 쓰지 말자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사과 하나'라고 말하는 게 우리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즉 '우리말다운' 어법이기 때문에 기왕이면 우리말투를 살리자는 것이다. 다소 어려운 한자어이든 낯선 외래어이든 그것이 우리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은 우리말다운 고유의 틀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 우리 언어 체계에 녹아들어 올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 홍성호, <짧고 쉬운 문장이 최고?> 중
번역체는 특정한 형식이나 표현 자체로 정의되지 않고 그 양식이 쓰인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이 맥락은 시대가 지나면서 계속 바뀌고, 표현의 의미가 바뀌지만, 옳은 표현이었던 것들이 번역체나 오역으로 바뀌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번역체를 오역으로 인식하고, 서브컬처계에서 번역체 논란이 상당히 자주 나타나, 번역체는 무작정 배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만,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는 번역체 문장들이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과학의 많은 용어들이 영어 일본어에서 유래된 번역체이고, 이런 표현들이 언어에 수용되면 거짓짝이나 불규칙을 지나치게 일으키지 않는 한 언어의 표현력이 더욱 풍부해지고 표현하기 사물과 개념들을 새로운 비유와 관용어들로 표현하게 된다.

번역체 표현들이 자주 쓰이지 않지만, 틀에 박힌 교육 방법처럼 그런 표현들의 유래와 무관하게 외국어를 번역하며 흔히 나타내는 표현을 지칭하는 것 자체로, 언어들의 문화적인 교류 과정에서 시대를 따르는 변화이다. 그러므로 번역체는 오역으로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과 문법/용법에 위배되지 않지만 자주 쓰이지 않아 낯선 표현과 문법 모두 속한다. 전자는 반드시 수정해야 하지만 후자는 배척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문학계에서 이 문체를 잘 쓰면 말의 맛을 잘 살리므로 무조건 배척하면 안 된다는 ( 견해)도 있고, 번역체의 독특한 어감을 활용하는 사람들도 있다.[11] 단순히 번역체가 어색하해서 배척하는 것은 사어에 가까운 표현들이 주는 독특한 느낌들을 이용하고자 문학계에서 쓰는 행위도 그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런 표현 중 '~에 대하여'와 같은 표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예문 세 가지를 살펴보자. '강력 사건에 대한 대책',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하여 묻다'와 같은 예문 중, '강력 사건에 대한 대책'은 이미 '대(對)' 자가 들어가 있기에 '강력 사건 대책'으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하여 묻다'와 같은 예문에서 '대하여', '대한'을 선뜻 빼기엔 쉽지 않다. 굳이 뺀다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전통문화에 관심 주기'로 바꿀 수 있겠으나, 그 표현 앞뒤로 '대하여'가 수없이 등장해서 지루함을 유발하는 게 아닌 한, 저런 표현을 굳이 말살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표현을 제약받아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대하다'의 예문으로 나오는 표현이다.

'건강에 대하여 묻다' 등은 '~를 묻다'라는 식으로 교열하거나 수정하기도 하지만, 우리말에서 '안부를 묻다'는 있어도 '건강을 묻다' 식의 표현은 없다. 이는 맥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를 묻다' 같은 말을 쓰는 경우는 주로 수다와 잡담 같은 가벼운 주제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 대하여'라는 표현은 그런 단순한 상황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건강에 대하여 묻다'라고 했을 경우, 이는 의사에게 건강을 주제로 폭넓은 질문을 하는 상황이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학술 논문과 같은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는 글에서 '대하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문화적 맥락에 따른 표현의 쓰임새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수정은 현실에서 아무도 쓰지 않는 표현을 낳아 오히려 언어문화를 망치는 꼴이다. 정 교정하고 싶으면 '건강이 어떤지를 묻다'처럼 교정하는 게 낫다.

또 다른 대표적 예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있다. 요즈음에는 '불구하고' 같은 한문투 표현을 잘 안 쓰기 때문에 '불구(不拘)하고'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는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한문투 표현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라면서 배척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런 표현은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 예문에도 버젓이 실려 있어 그른 표현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희박하다. 링크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면 "「…에,-음에」('-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 '-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라고 나와 있다. 이러한 문장이 쓰인 예시를 보면 이문열 같은 대가의 문장도 있다. 이 표현이 번역체라는 근거로는 'despite' 같은 표현을 문맥, 문법, 상황 고려 없이, 유래와 상관없이 무턱대고 '~에도 불구하고'로 옮기는 것을 들 수 있으며, 그래서 이런 표현들은 신조어보다는 전와어에 가까울 것이나, 어느 나라 말에서 유래했는지에 집중하다 보니 그런 경향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검색해 봐도 이러한 표현이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설명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글자 수가 제한된 기사문을 쓸 때에는 쓸데없이 글자 수만 늘려 버리기 때문에 '그럼에도'만 쓰는 게 좋다고 권유하는 기사가 있다. 링크 이 견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중역 과정에서 나타난 표현이었던 것을 영어 번역투로 소개한 것이고(이때 '일본어 번역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앞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처럼 과거에 자주 쓰이던 한국어 관용 표현들이 21세기 현대 한국어 화자의 관점에서 낯설어서 괜히 영어나 일본어에 원인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사실 글은 무조건 짧다고 잘 읽히는 것이 아니며 운율감도 있어야 하므로, 기능으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단어일지라도 의미를 강조하고 운율감을 더하고자 쓰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사문일지라도 일간지와 월간지는 또 다르다. 월간지에는 지면이 너무 허술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단어를 추가하기도 한다.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 많은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기자의 관점과 특유의 말맛을 살리면서 문장의 운율을 만들어야 하는 작가의 관점이 다르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위 문서에 적힌 사례들 중 일부는 과도 교정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없잖아 있다.

한 예시로 '~에의'와 관련해 예전에는 영어 번역투나 일본어 번역투로 취급하면서 한국어에는 마치 합성 조사가 없었다는 듯이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합성 조사는 중세 한국어 시절부터 있었고, 현대 한국어에 들어서는 때에 따라 3중 합성 조사(-에서만은, -으로서도는), 드물게는 4중 합성 조사까지(-에까지만은) 나타나며, '~에의' 역시 중세 한국어 시절에 '~엣(에+ㅅ)'과 같이 정확히 똑같은 의미의 합성 조사가 있었다. 이 '합성 조사 일본어 번역투설'이 사실이면 본래 한국어의 조사 자체가 고유한 게 아니고 오래전에 일본어에서 그 문법적 개념을 빌려와 생긴 것일 가능성을 대폭 열어 준다.

심지어 번역투를 문제 삼는 교열자 중에서 어떤 부류는 \'~에의' 합성 조사만 문제 삼는 걸 넘어 조사 \'의' 자체가 우리말에 아예 없었던 일본 수입품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사 \'의'만 보면 삭제하려고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언론사 교열 기자인 엄민용은 자신의 저서 <나도 건방진 우리말 달인: 완결편>에서 \'의'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잘못된 주장을 퍼트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12]

또한 \'~적(的)' 도 중국어 번역투 취급하며 눈에 띄는 족족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공식적인 답변' 등의 '-적'에는 아닐 수도 조금은 있다는 느낌이 있기도 하니 공식인 게 확실하면 '공식 답변'처럼 쓰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쓴 글을 읽어보면 정작 순우리말의 맛은 느껴지지 않는 글이 허다하며, 그러한 주장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쓴 일반인들의 글과 비교해 보아도 뚜렷한 차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흔히 순우리말 어휘를 잘 살린 글로 이오덕의 글을 꼽으나 번역투 말살에 집착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오덕의 글맛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애초에 순우리말, 한자어를 많이 알고 적절히 활용해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데, 조사 접사 같은 지엽적 부분에만 집착하니 저런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에 대하는 국수주의적 태도가 우리말 보존에도 별 도움이 안 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13]

번역투 사례들을 유심히 본 사람들은 어렴풋이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이처럼 근본적 번역투로 볼 이유가 합리하지 않은 것들의 상당수는 영어 번역투 일본어 번역투에 똑같이 소개된 적이 있다. 이중 피동 표현처럼 국립국어원에서조차 딱히 번역투라고 하지 않는 표현에까지 '번역투' 딱지를 붙이면서 이게 영어 번역투인지 일본어 번역투인지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정작 번역투라고 설파하고 다니는 강사들조차 그 표현이 정확히 어째서 번역투인지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무조건 맹신하지 말고, 글의 목적에 따라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현명하다.

이 문서와 하위 문서에서 본래 다룰 번역체 문장은 외국어의 번역체라는 이유만으로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사용되는 한국어와 억지로 호환하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도록 방해하거나 의미 자체를 왜곡하기 때문에 문서 따로 분류한 것이다. 위에 언어의 표현력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위 문단에 특히 한국어는 같은 문장도 어미에 따라 문장의 느낌이 확 달라진다고 서술했지만, '~에 대하여(서)' 등 번역체 부분의 어순이 딱 정해져 있고 종결형으로 '○한다'도 '○하였다'도 '○하기'도 아닌 연결형 '○하여(서)'가 쓰이거나 비과거 관형사형 '○하는'/'○할'의 자리에 과거 관형사형 '○한'이 쓰이듯이 정작 번역체에는 풍부하게 활용되지 않아 사실상 불규칙으로 활용되는 말들이 많다( #). 번역체를 수용하긴 하는데 그 어떤 표현 자체를 문법화해서는 특정 활용 밖의 나머지 활용들은 모조리 배척하고 번역체 등이 자연스레 언어에 수용되는 것은 거부하는 암묵적 규범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문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대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올바른 비문'과 '잘못된 정문'도 있다. 이때는 동의어나 유의어로 바꿔 보면 느낄 수 있다.

상술되기도 한 '대하다2「2」', '불구하다2' 관련 진짜 문제는 \'그에 대하기', \'이럼에 불구하며' 같은 다채로운 활용을 할 수 있는데도 사전에 "【…에】 ((‘대한’, ‘대하여’ 꼴로 쓰여)) 대상이나 상대로 삼다.", "「…에,-음에」('-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로 굳어져 '~에 대하여(서)', '~에 대한', '~에도 불구하고' 꼴로만 쓰는 것과 ' 비문(문법)' 문서의 '올바른 비문' 문단 내용처럼 호응하지 않는 문장도 있는 것. 무턱대고 배척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이런 다채로운 표현들은 배척한다. 규범주의와 기술주의로 따질 때, 문법 문제/활용 문제 상관없이 자주 쓰이는 표현에는 기술주의를, 그다지 안 쓰이는 표현에는 규범주의를 적용하는 셈이다. '~에 대하여(서)', '~에도 불구하고' 자체를 문법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와 달리 '대하다2「1」'는 '~를/을 대하는'처럼도 쓰이는 완전 동사이지만 '~에 대하여(서)', '~에 대한'이 특히나 굳어져서인지 '~를 대하여(서)', '~를/을 대한'으로는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으로 삼곤 한다는 현재형 의미로 쓰인 '언어에 대하는 태도' 등을 '언어를 대하는 태도' 등으로 무턱대고 바꾸는 사람도 있고, 이 밖에도 비슷하게 '선생에게만 의해서 배운다', '가족을 위하러', '이에는 경찰이 대해 설명했다' 따위의 활용을 잘못된 활용으로 판단하기도 한다.[14]

또한, 동의어 관계이기도 하면 하나는 널리 쓰이고 다른 하나 또는 나머지는 사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표현력이 도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이음동의어> 문서 참고). '~에게서'와 '~한테서'는 아직 사어는 아니지만 '~에게'와 '~한테', '~(으)로부터'에서 밀려 사어가 될 수도 있는 사례이다.

따라서 한국어가 잔뜩 수정되지 않는 한은 문장에 맞지 않는 번역체를 오남용해 문장의 가독성을 파괴하거나 뜻을 왜곡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번역체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배척하거나 '오염'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번역체를 새로운 표현으로서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그 시대 언어 사용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지, 배척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체를 오남용하는 쪽과 번역체를 지나치게 배척하는 쪽의 갈등은 규범주의 대 규범주의로 볼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은 상술된 '원문 그대로 표현을 전달하려는 심리'와 '전체 문장의 뜻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사전적인 뜻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찝찝하다고 느끼는 강박 관념'의 안티테제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이곳 나무위키에서 번역체 관련으로 일부 편집자들이 과도하게 교정하려고 든 나머지 비문을 만들어 내는 일이 종종 있다. 특정 형식 자체를 번역투로 보면 안 된다. 해당 형식이 해당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면 번역투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순화를 권장하기도 하지만 위아래에서 언급한 예문처럼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내용에도 해당 번역체가 있으며, 전문가들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을 피하라고 권유하지, 무조건 없애라고 하지는 않는다. 링크. 예를 들면 '학생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는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또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처럼 '~에게'로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 대해서'와 같은 표현들이 맥락상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도 억지로 없애는 것은 바람직한 언어 문화가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번역투는 특정 형식이나 표현 그 자체로 정의되는 건 아니라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한국어 자체가 고맥락 언어이기에 맥락에 맞는 표현을 쓰는 일이 더욱 중요한데 이 같은 과잉 수정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며, 이것이야말로 국어파괴이다. 물론, 여기서 잘못된 교정 결과로 예로 든 '~을/를 대하며' 같은 표현 자체가 그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을/를 대하며'는 '나는 그를 대하며(=그와 마주해 있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와 같은 맥락에서는 당연히 자연스러운 표현이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를 '나는 이 사건을 대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따위로 바꾸면 대단히 어색한 문장이 튀어나온다.[15] 한국어는 과장 좀 보태서 맥락으로 시작해 맥락으로 끝나며, 맥락에 죽고 맥락에 사는, 맥락 그 자체가 문법성의 척도가 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늘 문맥을 최우선 고려 요소로 둬야 한다( 심지어 문법보다도). 안타깝게도 한국어의 맥락 의존성을 비롯해 한국어의 전반적인 특성 자체를 국내 교육계에서 시간이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고, 이로 인해 번역투 수정을 비롯한 고쳐쓰기의 준거를 피상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번역투인 걸 알면서도 일부러 쓰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지만 대표적인 번역투 문장으로 지적되는 ' 가장 ~한 것 중에 하나'도, 가장의 개념을 넓게 잡는 영어권 언어의 사고방식이 좋아서 알면서도 그렇게 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요즈음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시대이므로 최고의 범주에 드는 것이 여럿이어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객관적 비교 수치가 있는 스포츠 스타도 수상 실적이나 기록이 엇비슷하면 한 명만 최고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특히 문화 예술 분야에서 \'Most of' 운운하는 경우는 거론된 모든 작품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순위가 있더라도 형식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물론 한국에서는 ' 가장'을 ' 제일'의 동의어로 1등일 때만 쓰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를 어색하게 받아들이는 언중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가치관이 다양해지면서 최고가 꼭 하나여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 수우미양가'도 단어 자체로만 보면 논리적 문제가 있지만, 관습으로 굳어져서 문제하는 사람이 없다. 최우수상 위에 있는 대상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가장 ~한 것 중에 하나'도 관점별로는 번역투로 보기보다는 관용적 표현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번역투의 증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시대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번역체에 집착해서 후술된 것처럼 '~ 가운데 한 명' 등 동의어/유의어를 의역 내지 오역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다. 시상식으로 비유하면 대상을 한 번에 여럿에게 수여하거나 가장 높은 상이 최우수상인 경우인 셈이다.

나아가 번역체를 위 내용처럼 다채롭게 활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번역체에서 어휘력을 늘리기도 한다. 위 각주에도 있는 ' 그남'은 'he'에 대응하고자 쓰는 것이다. 여성을 지칭하는 'she'의 대응인 '그녀'만 있어서이기도 하다.

4.1. 번역체와 문어체의 관계

문어체는 번역체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위에도 나오듯이 입으로 말해 봐서 어색하면 번역체라는 번역체 감별법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면 문어체를 아예 쓰지 말고 입말로만 써야 한다. 한마디로 교각살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문어체는 상당 부분이 한문에서 비롯된 것이며, 중국과 일본 또한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이를 일제의 잔재로 보아야 할지도 애매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과거에 영어를 번역할 때 한자어를 많이 활용했으므로 영어 번역체라 지적받는 문장도 한문투와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즉 문어체 자체가 외래어의 영향을 받기 쉬운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번역체를 잘못 구사해 읽기 까다로운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는 번역체 탓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수능 영어를 말할 때 흔히 지적하듯이, 우리나라 영어 교육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문장을 많이 가르친다. 이때 예문으로 등장하는 게 과거 시대 영미권 지식인들의 문장인데, 문제는 지식인들이라고 다 글솜씨가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 지식인의 저서 중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도 글솜씨가 형편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런 읽기 어려운 원서가 우리말로 번역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무식해서 이해를 못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자책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애초에 형편없는 문장이 지식인의 문장으로 잘못 인식되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애초에 문어체가 번역체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보니 그냥 문어체 구사가 서툴러서 생긴 문제를 번역체 탓으로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이오덕은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를 추구했고, 자신의 생각을 글쓰기 책으로 남겨 글쓰기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문제는 애초 학문적 근거 없이 몇몇 한자어를 번역투나 일본어 잔재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4.2. 번역체와 문장 부호

번역체에 민감한 사람들은 어순이나 조사, 단어의 순화에 집착하지만 의외로 간과하는 부분이 문장 부호이다. 일본어를 예로 들면, 띄어쓰기가 애초에 없기 때문에 쉼표를 자주 찍어서 가독성을 살린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는 **입니다'라는 식의 문장을 '~는, **입니다'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는' 다음에 쉼표가 찍혔으면 일본어 번역기를 돌린 문장을 직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투 순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수동태를 배척하거나 특정한 단어 사용을 지양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쉼표 남발에 무관심하게는 대한다. 이는 시적 허용과 잘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이지만, 문학이 아닌 실용문인 경우엔 이를 어색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영어는 대시(-)를 넣고 부연 설명을 하는 문장이 많은데,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직역하여 대시를 넣고 부연 설명을 하는 책이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서구권에서 유학하신 분들 사이에서 영어 번역체라는 지적이 나와서 현재는 보기 어렵다. 대화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등의 경우가 아니어도 느낌표(!)를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느낌표를 잘 쓰지 않는다. 즐겁거나 기대되는 등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되려 싸잡거나 깝치는 말투처럼 느껴질 수 있다.

4.3. 문화 또는 정서의 차이

과거의 한국인들은 영어 속담이 한국어 속담으로 번역된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영어 속담에 익숙해지면서 과거의 의역을 어색하게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It’s a piece of cake를 누워서 떡 먹기로 번역하는 것으로, 미국의 영화 자막의 이런 번역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인데, 번역체를 판단하거나, 인식하는 기준은 다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함에서 전달되는 것이다.

4.4. 번역체로 오해하는 경우

생소한 분야를 다루는 기사일 경우, 분야의 생소함을 번역체 탓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IT 기사에서 저런 반응이 나타난다. 또한 글쓴이가 원래 문체가 특이한데 하필 외국인일 경우, 이를 글쓴이의 특성으로 인식하지 않고 번역체 탓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수능 영어식 문장이 대표적인데, 타일러 라쉬가 지적했듯이 영어권 지식인 기준으로도 이상한 문장이라고는 하지만, 지식인 중에서도 글을 못 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필 출제 의원이 변별력을 위해 일부러 저런 문장만 선정해서 그런 것이지, 출제 의원이 콩글리시로 억지로 지어낸 문장은 아니다.

이걸 번역을 하면 흔히 말하는 번역체 문장이 완성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일은 그냥 원저자가 만연체 문장을 잘못 구사한 것이다.

이런 문장은 의외로 잡지 기사에도 존재한다. 학술지가 아니더라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잡지가 아니면 고인물에서만 통하는 그사세식 표현을 많이 쓰는데, 작가들은 익숙해서 조금 어색하게 말해도 확실하게 알아듣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다. 실제로 작가 입장에서는 구태여 고칠 필요없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하필 번역가에게 저런 기사가 일감으로 주어지면 애꿎은 번역가가 타박을 받는다.

업계 기사라면 업계 사람들만 알 수 있는 비유 표현을 쓰는데, 이것을 번역체로 오해하기도 한다. 흔히 고객이 외국 느낌이 난다고 번역을 지적했을 때 구체적 문법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냥 느낌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원저자가 특이하게 글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때 그냥 사실만 살려서 재창작해야 하는데 문제는 업계 사람이 아닌 이상 사실 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객이 문제의 진짜 원인은 파악하지 못하고, 기계적 규칙만 적용하는 교열자를 불러 글이 더욱 망가지는 일도 있다.

4.4.1. 맡긴 고객의 문제점

외국인 기자가 특이한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이면 이것을 기자의 개성이 아닌 번역체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다. 문제는 이러한 표현을 전부 무시하고 평범한 기사문 양식으로 번역할 때에는 전형적 우라까이 같은 문장이 나온다.

고객이 원문을 읽어 보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니 그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그래서 인용문 어투를 피하고 정직하게 번역하면 기계 돌린 번역투라고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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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목록

5.1. 영어, 일본어 번역체

5.2. 한문 번역체

현대에도 한국어에 중대한 영향을 주므로 이런 한문 번역체들의 수는 셀 수 없다. 만일 쓰더라도 어감이 조금 부드럽지 않기만 하고 번역체라며 지적당하는 일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한문 번역체를 번역체로 딱지를 붙이는 일은 한국어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고대 한국어 이래로, 어쩌면 그 전부터 한국어는 고대 중국어로부터 어휘 수준을 넘어서 문법적인 수준에서까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어와 공유하는 주제격 '은/는'부터 고대 중국어의 주제격 '者'의 차용일 가능성이 있다.[16]

6. 다른 언어에서 발생하는 번역체

번역체가 한국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가까운 일본어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문제이며(하위 문서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 영어 등 서양 언어에서도 최근 들어 한국의 만화, 드라마, 게임 등의 서브컬처가 함께 변역되면서 서구권만의 번역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한 예로, 한국 웹툰이 영미권으로 번역되면서 영어에서 특히 상대적으로 빈약한 의태어들이 기존 영어 동사 명사 등으로 처리되면서 일종의 번역체가 생겨났다.[21] 본래 영어는 의성어는 썼어도 의태어는 좀처럼 쓰지 않았다. 그냥 장면 설명 및 그림에 의존해 표현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아스테리스크 사이에 동작을 넣어서 *smile*과 같이 표현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2000~2010년대를 이후로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서브컬처들이 영어로 번역되어 수출되었는데, 원본 편집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괄호 바깥의 의태어까지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영어의 동사와 명사를 동아시아의 의태어처럼 단독으로 장면에 붙이는 형태가 종래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 때문에 아직도 영미권의 나이 지긋한 사람들 사이에는 만화나 웹툰의 의태어 번역투가 눈에 밟히는 때가 종종 있다.

철학서에서 영어로 된 책인데도 번역체가 상당히 자주 등장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은 물론 프랑스어/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경우 또한 영어스럽지 않은 배배 꼬인 구조의 문장이 난무하거나 고급 어휘가 난무하여 독해가 힘겨울 때가 많은데, 바로 이 때문인 경우가 잦다. 이는 복잡한 내용을 다루는 철학서의 특성상 가급적은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역자들의 역량 문제 역시 큰 이유이기도 하다.

7. 기타

8. 관련 문서


[1] 번역을 뜻하는 translation에 언어를 뜻하는 표현 중 하나인 -ese가 붙은 것이다. '번역어' 정도의 느낌. [2] 모국어를 쓰지 않고 번역한 티가 나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3] 실제로는 영어에서 A의 발음만 해도 대여섯 개의 음성으로 발음할 수 있다. [4] 'boy=남자', 'girl=여자', 'friend=친구', 'boyfriend'와 'girlfriend'에는 띄어쓰기가 없으니 곧 '남자친구', '여자친구'인 것. [5] ' 그녀'라는 단어는 영어의 'she'에 대응하고자 생겨났다는 말이 있는데, 해당 단어가 상황 고려 없이 'she'의 번역어로 쓰이곤 하니 번역체로 볼 수는 있지만, 유래는 불명확하다. 원래 한국어에서는 남자와 여자 모두 '그'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여러 명의 여성을 지칭할 때 '그녀들'뿐더러 '그들' 또한 여전히 같이 사용되는 이유가 '그녀'라는 표현이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 다수나 남녀 다수를 언급할 때는 '그들'과 '그녀들'을 쓴다. [6] 예를 들어 '어여쁘다'는 현재는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불쌍하다', '가엾다'라는 뜻이었다. 훈민정음에서 "내 이를 어여삐 여겨..."라는 대목도 있다. 모든 언어에서 이런 의미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영단어 'silly'는 옛날에 '행복하다'의 뜻이었으나 '순수하다', '축복받았다' 등의 뜻이 된 뒤에 '어리석다'의 의미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사투리 문화어/어휘대조 문서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7] 당연하지만 고유어, 한자어를 외국어, 외래어로부터 지키려는 것과는 무관하다. [8] 외래어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9] '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가 예. 대명사 등이 쓰일 때는 '뭐라고 부르다/불리다'로도 쓰이나, 정작 '어떤 이름이라고 부르다/불리다'로는 안 쓰인다. [10] 학교에서 문법, 어법을 배우지만 모국어 사용자끼리의 대화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기 때문에 비문이 스며들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법 파괴를 많이 한다. 번역체 오염을 막자는 이유로 입말을 기준으로 한 글쓰기를 제안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오덕인데, 이 사람은 번역체 남용을 비판한다면서 정작 자신의 저서에 ' 병신' 같은 비속어를 서슴없이 썼다. 취지야 좋았다지만 저런 글은 실용문으로서 문제가 많은 글이다. [11]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체를 잘 활용한다. [12] 엄민용은 시중에 나온 여러 교열 서적을 우격다짐식 주장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13] 사실 저럴 수밖에 없는 게, 이오덕은 농촌에서 살던 사람인 반면에 번역투 문제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스타벅스가 익숙한 도시인이라 이미 도시 감성, 서구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정보를 공부하면 모를까. 사실 현대 한국어의 문법 체계부터가 서구식 문법 체계를 차용한 것이라 번역체와 고유한 한국어의 경계도 희미하다. [14] 이런 표현들을 쓰이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세세한 분석 없이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 또한 문법 나치의 행위 내지 과학적 방법론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매우 잘못된 것인 셈이다. 고증과 창작물 반영/설정으로 따질 때 세세한 분석은 역사학자들이 그냥 고증 반영이 틀렸다 하지 않고 역추적해서 연구하는 셈이고, 무턱대고 배척하는 것은 창작물 반영 만능주의처럼 되거나 설정 오류를 무시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설정만 즐기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15] 실제로 뜻풀이를 생각하면("대상이나 상대로 삼다.") '~을/를 대하여'로 고치는 게 바르다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널리 퍼져 굳어진 바람에 이런 식으로만 쓰인다. '새로움에 호소하는 오류'와 '전통에 호소하는 오류'도 이런 사례. '호소하다'는 앞에 목적격 조사 '~를/을'을 삼는 것이 바르나 예외적으로 '~에'가 쓰였다.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새로움이나 전통에 오류를 호소하는 것이 된다. [16] 한국어와 일본어가 유사 이래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게 손에 꼽는데도 둘의 문법이 그토록 닮게 된 원인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중국어 말고는 없다. 반도 일본어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고대 일본어까지만 가도 한국어와는 문법이 지금보다 이질적이었다. 오히려 한국어와 밀접하게 있던 반도 일본어 시절에는 한국어가 능격-절대격 언어였을 가능성이 있는 등 둘의 문법적 차이가 더 커진다. 이는 고대 중국어가 한일 양국의 언어에 단순히 한자어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문법 저변에까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큼을 암시한다. [17] '不得已~(~를/을 그칠 수가 없다)'에서 온 말이다 [18] 不可避 [19] 이 둘은 '何如하든'과 '如何하든'이 줄어든 말이다. [20] 곧 즉. '즉시', '즉각', '즉석', '즉결' 등의 단어에서 바로 이 한자가 들어간다. [21] 유미의 세포들 영어 번역판을 보면 이 점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22] 반대로 이러한 보그체를 너무 허세스럽고 사대주의적이라며 싫어하는 의견도 상당히 존재한다. [23] 대표적으로 밝은 면, 레고 공식 홈페이지, 키즈나 아이 A.I.Channel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