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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국가/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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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 마피아 조직 지도[1]
1. 뉴욕 5대 패밀리
1.1. 감비노 패밀리1.2. 루케시 패밀리1.3. 제노비스 패밀리1.4. 보난노 패밀리1.5. 콜롬보 패밀리
2. 뉴욕 마피아 주요 인물3. 다른 도시의 마피아
3.1. 시카고 아웃핏3.2. 필라델피아 패밀리3.3. 디트로이트 파트너십3.4. 데카발칸테 패밀리3.5. 페트리아카 패밀리3.6. 버팔로 패밀리3.7. 클리블랜드 패밀리3.8. 로스앤젤레스 패밀리3.9. 캔자스시티 패밀리3.10. 트라피칸테 패밀리3.11. 피츠버그 패밀리3.12. 세인트루이스 패밀리3.13. 밀워키 패밀리3.14. 뉴올리언스 패밀리3.15. 버팔리노 패밀리3.16. 로체스터 패밀리3.17. 샌프란시스코 패밀리3.18. 산호세 패밀리3.19. 콜로라도 패밀리3.20. 댈러스 패밀리3.21. 콜라쿠르시오 조직
4. 다른 도시의 마피아 주요 인물5. 미국 마피아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

1. 뉴욕 5대 패밀리

파일:뉴욕 5대 패밀리 조직도.png
해외 마피아 분석 사이트 블랙핸드 포럼에서 작성한 2010년대 뉴욕 5대 패밀리 예상 조직도[2]
미국 전역의 마피아 패밀리들은 각각 별개의 조직이면서도 라 코사 노스트라로 봤을 때는 하나의 조직이기도 하다. 그중 미국 최대의 도시인 뉴욕은 미국 마피아의 시작 지점이자 본거지로 여겨진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의 총 두목(Capo Di Tutti Capi)이었던 살바토레 마란자노 이후 그런 직책은 없어졌고,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두목(Boss)들이 모인 위원회(The Commission)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뉴욕의 다섯 마피아 패밀리는 영화 대부 속 뉴욕 5대 패밀리, 게임 Grand Theft Auto 시리즈 HD 세계관 리버티 시티 5대 패밀리 등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 영향을 줬다. 1890년대부터 시작되어 130년이 넘는 미국 마피아 역사 동안 각각의 패밀리 내에 하나로 이어지는 조직 계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x대 두목(Boss)이란 표현이 가능하다.[3]
각 마피아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 숫자는 1931년에 러키 루치아노가 정해놓았다고 알려져 있다. # 만약 정규조직원의 사망이나 은퇴 등으로 결원이 생기면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중 한 명을 정식으로 입단시킨다. 마피아 패밀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숫자보다 지나치게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정한 정규조직원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로 전 마피아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디레오나르도(Michael DiLeonardo)는 자신이 활동했던 2002년을 기준으로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 숫자가 약 250명이었고, 그 숫자는 최대 260명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 #[4][5][참고]
2000년대 들어 일선 수사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피아를 수사하는 뉴욕 FBI 팀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왔다. 2013년부터는 제노비스 패밀리만 담당하던 C5 팀이 보난노 패밀리와 콜롬보 패밀리까지 담당하고, 감비노 패밀리만 담당하던 C16 팀이 루케시 패밀리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마피아 수사가 FBI의 최고 목표였던 1980~90년대에 300~400명에 달하던 전문 인력은 여러 차례 개편을 통해 10분의 1 수준으로 감축되어 30~40명만 남았다. # 이는 9.11 이후 테러 방지가 FBI의 최고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7]

1.1. 감비노 패밀리

1963년 이전 명칭은 망가노 패밀리.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150~200명, 추종세력(Associate): 1500~2000명 # 주 구역은 브루클린, 퀸스, 맨해튼, 스태튼 아일랜드, 롱아일랜드이다. 그 외 구역으로 브롱스, 뉴저지주,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 라스베이거스, 코네티컷, 그랜드래피즈 시, 미시간주, 플로리다주, 로스앤젤레스가 있다.

1910년에 살바토레 다퀼라 (사진)가 패밀리의 모태가 되는 조직을 결성했다. 다퀼라는 1928년에 마세리아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주세페 마세리아에 의해 살해된다. 이후 여러 차례 두목이 바뀌어오다 카스텔람마레세 항쟁이 끝나고 라 코사 노스트라가 정식으로 창설되는 1931년에 빈센트 망가노 (사진)가 패밀리의 두목이 된다. 망가노는 1951년에 러키 루치아노와 결탁한 자신의 부두목(Underboss)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사진)에게 살해된다. 1957년에 그 아나스타시아를 제거하고 두목이 된 카를로 감비노가 1976년에 사망할 때까지 약 19년간 군림하며 본인의 조직을 제노비스 패밀리를 뛰어넘는 가장 강력한 미국 마피아 파벌로 만들었는데, 이 시기를 다룬 실화 기반 영화 좋은 친구들에서 주인공 헨리 힐이 감비노 패밀리를 ‘손대어서는 안되는(Untouchable)’ 조직으로 묘사한다. 감비노는 애틀랜틱시티 카지노의 배당금을 올리고 뉴욕시의 건설산업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노동 공갈 사업을 확장했다. 돈 세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합법적인 사업도 다각화했으며 조직을 마약시장에서 큰손으로 성장시켰다. 동시에 바티칸은행 비리의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탈리아인 은행가 미켈레 신도나 (사진)로 하여금 헤로인 사업 수익을 세탁하게 했다.
수갑을 찬 채 연행되는 1970년대 감비노 패밀리 두목 카를로 감비노
1985년에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 폴 카스텔라노를 제거하는 쿠데타로 두목이 된 존 고티 시대를 맞아 뉴저지 주 데카발칸테 패밀리를 사실상 산하 조직으로 두게 되지만 동시에 이때를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제노비스 패밀리에 다시 주도권을 내줬다.[8] 1980년대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gif).
감비노 패밀리 두목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을 다룬 1985년 뉴스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의 종신형 유죄판결을 다룬 1992년 뉴스
정부 측 증인이 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의 1993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파일:1990년대 감비노 패밀리.jpg
1990년대 초반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9]
예로부터 이들은 미국 마피아 중 시칠리아 마피아와 가장 유대가 깊은 패밀리로 알려져 있다. 1980년 이탈리아의 조반니 팔코네 치안판사는 1970년대 후반까지 인제릴로-감비노-스파톨라 네트워크가 매년 6억 달러 상당의 헤로인을 미국으로 밀반입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한편, 1986년 피자커넥션 재판에서 인정된 마약 유통액은 약 16억 달러였다. 더욱이 시칠리아의 코를레오네시 패밀리(Corleonesi Family)가 1992년에 자행한 조반니 팔코네(Giovanni Falcone) 치안판사 암살 당시, 존 고티의 지시로 감비노 패밀리가 폭파 전문가를 시칠리아로 파견해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훗날 드러난다. #[10]
감비노 패밀리는 존 고티 주니어 (사진)가 두목 대행(Acting Boss)이었던 1990년대에 전화카드 사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 범죄의 원리는 간단하다. 마피아가 뉴욕시를 비롯한 미국 주요 대도시에 5달러~500달러 가격에 판매되는 전화카드를 유통했다. 그 카드는 실제로 아주 짧은 통화시간만을 제공했는데, 소비자가 카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려고 돌아올 때쯤이면 기존의 영업을 중단하고 새로운 변장을 하고 거리에 교체 카드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 전화카드는 당국에서 추적할 수 없었고 AT&T MCI 월드컴 같은 통신회사들은 미지급 송장에 발이 묶인 반면 마피아는 부유해졌다. 미 사법당국은 전화카드 사업이 1993년 4000만 달러에서 1998년 20억 달러로 급증한 산업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 밝혔다. 한 조직범죄 수사관은 "전화카드 사업이 마약 사업보다 좋다. 수익성은 높은 반면, 처벌은 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1990년대 말에 미국 비밀임무국 FBI가 공동으로 뉴욕 마피아가 연루된 전화카드 사기를 수사했다. 이런 마피아의 범죄행각은 2002년 분식회계로 파산하며 미국 2위의 부도 기록을 갖고 있는 월드컴 사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2년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교도소에서 패밀리를 관리하던 존 고티가 사망한 이후 그의 형 피터 고티 (사진)가 두목으로 추대되지만 이내 장기 징역형 선고를 받아 수감되면서 이름뿐인 명목상 두목으로 남아있다. 현재 패밀리의 실권은 막강한 시칠리아 파벌이 쥐고 있다. 전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2015년 인터뷰에서 "시칠리아 파벌이 패밀리를 장악한 건 합당한 일이다. 뉴욕 마피아 태동기부터 빈센트 망가노가 살해되는 1951년까지 시칠리아 출신들이 패밀리를 주도해오다 칼라브리아 출신인 앨버트 아나스타시아에게 잠시 주도권을 내줬다. 이후 다시금 시칠리아 출신 카를로 감비노, 폴 카스텔라노가 오랜 세월 존재했고 1985년에 나폴리 출신 존 고티가 그 자리를 차지했었지만, 이제 다시 시칠리아인이 돌아온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특히 마피아 세계에서는 각 가문의 출신 지역별로 파벌이 형성되며 친척 관계가 맺어진 경우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감비노 패밀리는 현재에도 전 시대를 걸쳐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미국 마피아 패밀리로 남아있다. 막대한 거액이 움직이기 때문에 감비노 주식회사(Gambino Corporation)로도 불린다. 감비노 패밀리는 사이버 범죄의 선구자로, 행동대장(Caporegime) 살바토레 로카시오 (사진)와 휘하 행동대원(Soldier) 앤드루 캄포스 (사진), 리처드 마르티노 (사진)가 주축이 되어 1996년~2003년 사이 7년간 총 피해 금액이 7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사이버 범죄망을 운영했다. 이 당시 이들의 범죄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소비자 사기’로 남았다. 일찍이 캄포스와 마르티노를 가리켜 '패밀리의 미래'로 규정했던 존 고티의 예상대로, 이 사건은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을 새로운 범죄 수법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2005년에 이 범죄행각으로 로카시오는 2년형에 470만 달러 몰수, 캄포스는 2년 3개월형에 170만 달러 몰수, 마르티노는 9년형에 910만 달러 몰수를 선고받았다.[11]
2002~05년경 호아킨 가르시아라는 FBI 요원이 잠입하여 많은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을 기소한 잭 팔콘 작전이 있었다. 호아킨 가르시아는 잠입 요원으로는 1970년대 도니 브래스코에 이어 2번째로 정규조직원(Made Member) 입단을 제안받을 정도로 패밀리의 신임을 얻었다. 이때 그가 잠입해서 얻은 정보로 당시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 아널드 스퀴티에리[12],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메갈레, 행동대장(Caporegime) 그레고리 데팔마를 포함한 32명의 조직원들을 기소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FBI는 가르시아가 잠입해있는 동안 감비노 패밀리가 불법 사업으로 얻은 수익이 최소 30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 이에 뉴욕 마피아가 가르시아의 목에 2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FBI는 감비노 패밀리의 니콜라스 (사진) & 조셉 (사진) 코로조 형제와 제노비스 패밀리의 빈센트 & 마리오 (사진) 지간테 형제 등 당대 뉴욕 5대 패밀리 수뇌급 인사 전원에 요원들을 파견하여 관련 경고를 전하기도 했다.[13]
파일:Gambino Surveillance (2007).jpg
2007년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
상기한 FBI 감시 사진을 보면 두목 대행(Acting Boss) 존 다미코 (사진)와 니콜라스 코로조 (사진), 부두목(Underboss) 도메니코 세팔루 (사진), 상담역(Consigliere) 조셉 코로조 (사진), 행동대장(Caporegime) 프랭크 칼리, 행동대장 존 조르다노, 행동대장 알폰스 트뤼키오, 행동대원(Soldier) 리처드 라니에리의 모습이 보이는 등 당대 패밀리 수뇌부가 포함된 조직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에는 감비노 패밀리와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원 62명을 기소한 FBI의 올드브리지 작전(Operation Old Bridge)이 있었다. 이 작전으로 기소된 피고인 중에는 감비노 패밀리의 수뇌부와 시칠리아 코사 노스트라의 두목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 (사진)의 심복 지아니 니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미국 마피아를 겨냥한 공소는 그 증거가 약해 대부분 단기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감비노 패밀리를 노린 올드브리지 작전을 다룬 2008년 뉴스
감비노 패밀리는 부패한 NBA 심판 팀 도너기(Tim Donaghy)와 함께 2005년 6월부터 2006년 7월까지 진행된 여러 프로농구 경기를 조작하는데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도너기는 2007년에 유죄판결을 받았고 15개월의 수감생활 중 어느 뉴욕 마피아 출신 수감자에게 수술이 필요할 만큼 공구로 폭행 당했다고 한다. 그는 출소 후 인터뷰를 통해 감비노 패밀리가 "정보를 주지 않으면 플로리다 주에 있는 당신 아내와 아이들을 누군가가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협박했고 마피아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후 수백만 달러를 벌었지만 자신에게는 정확한 예측 한 건당 2000달러 밖에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더불어 마피아는 항상 프로스포츠의 일부였고, 도박에서 이점을 얻기 위해 심판, 선수, 지도자, 그 외의 내부 정보를 갖고 있는 어느 누구든 이용한다며 스포츠계에서 조직범죄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건 도박 합법화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14] 2022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말하지 못한 이야기: 플레그런트파울 작전이 도너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 다큐멘터리엔 2006년 당시 FBI 뉴욕지국 감비노 패밀리 담당팀장이었던 필 스칼라가 출연해 도너기를 이용한 감비노 패밀리의 NBA 승부조작 도박 규모가 2000만~3000만 달러에 달했다고 밝혔다. 더욱이 도너기의 조작 정보는 필라델피아 마피아 패밀리와 해외 도박사들에게까지 유출되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감비노 패밀리와 제노비스 패밀리가 연루된 5억 6700만 달러 규모의 기록적인 온라인 도박 사업이 적발되었다. #[15]
파일:IMG_778834.webp
2009년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16]
2014년 감비노 패밀리와 보난노 패밀리가 은드랑게타와 공모해 500kg의 코카인을 남미 가이아나에서 이탈리아로 들여오다 FBI와 이탈리아 경찰의 합동 작전으로 적발되었다.[17] 이 작전으로 은드랑게타 측에서는 우르시노 일족의 두목(Boss)인 프란체스코 우르시노가 검거되었고, 감비노 패밀리 측에서는 은드랑게타와 미국 라 코사 노스트라를 잇는 범죄 브로커 프랑코 루포이(Franco Lupoi)가 검거되어 13년형을 선고받았다.[18]
2015년에는 미국 NBC 방송에 패밀리 간부의 아들이 출연해 마피아가 뉴욕 시민들을 이슬람 테러집단 IS로부터 지켜주겠다고 선언했다. #[19]
패밀리의 알려진 주요 사업으로 도박, 고리대금, 포르노그래피, 카드 사기, 주식 사기, 유류세 사기, 의류 산업 갈취 등이 있지만 건설 노동 공갈이 최대 수입원이 되고 있다. 또한 합법적인 음료 산업에 침투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정교한 금융 사기를 수행하는 데 적성을 보여주었다. 특히 5대 패밀리 중에서 주도적으로 산 로잘리아 축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산_로잘리아_축제]
2019년에는 실세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가 젊은 정치 음모론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2020년 기준 지도자는 수감 중인 10대 두목(Boss) 피터 고티 (사진) 였다. 두목 대행(Acting Boss)은 도메니코 세팔루 (사진)[피터_고티][도메니코_세팔루][그_밖의_지도부] 2021년 2월 피터고티는 향년 81세로 교도소 안에서 자연사로 사망했다. # # 현재 두목은 도메니코 세팔루가 이은 것으로 보인다.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칼리 살인사건을 다룬 2019년 뉴스
2020년에 감비노 패밀리의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소장에 의하면 수사의 일환으로 피의자들의 주거지와 파 펀딩이란 회사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현금 250만 달러, 은행 계좌 1000만 달러, 800만 달러 상당의 전용기, 다수의 부동산을 압류했고 AR-15가 포함된 총기 7정을 압수했다고 한다. 아울러 공소장은 감비노 패밀리를 전국구 범죄조직(Nationwide Criminal Organization)으로 묘사하며 행동대장(Caporegime), 행동대원(Soldier), 추종세력(Associate) 같은 조직 체계와 범죄수익 분담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 # 후에 진행된 재판에서 연방검찰 측은 파 펀딩 소속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이 5억 달러 이상의 투자금을 편취하였고 150만 달러에 달하는 범죄수익을 필라델피아를 거쳐 뉴욕의 윗선으로 상납했다고 밝혔다. #
2021년 감비노 패밀리와 연계된 세르비아계 범죄조직 그룹 아메리카(Group America)의 두목(Boss) 밀레타 밀랴니치가 미국 연방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룹 아메리카는 뉴욕시를 거점으로 약 15명의 간부, 100명이 넘는 정규조직원(Made Member), 그 이상의 추종세력(Associate)으로 구성되어 있고 약 24개국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으로 코카인을 톤 단위로 유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룹 아메리카 관계자들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폴란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아르헨티나, 페루 등 9개국 이상에서 체포되어 기소된 바 있다. 남아메리카 언론들은 이 조직을 발칸반도의 카르텔인 "엘 카르텔 데 라스 발칸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0년대에 결성된 그룹 아메리카는 존 고티 시대 때부터 감비노 패밀리와의 관계를 이어왔으며 세르비아 비밀경찰은 물론 각종 정보기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두목 밀랴니치는 2016년에 세르비아 외교부장관 이비차 다치치가 뉴욕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수행한 사실이 있다. # 전기톱을 이용한 것을 포함하여 최소 10여 건이 넘는 살인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는 밀랴니치는 1980년대에 송금사기 혐의로 미국에서 약 3년간 복역했고 2000년대 중반엔 마약 혐의로 그리스에서 복역했으며 2012년엔 코카인 유통 혐의로 이탈리아에서 징역 6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FBI는 밀랴니치의 철근회사가 조직범죄 관계자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전달하는 페이퍼 컴퍼니라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이 회사는 밀랴니치의 가족들과 감비노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으로 알려진 인물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고용하지 않았으며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에게 150만 달러,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에게 48만 4천 달러를 지급하기도 했다. 밀레타 밀랴니치(좌)와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루이스 필리펠리(우)의 모습.

2023년 11월 행동대장(Caporegime)이 포함된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 및 추종세력(Associate) 10명이 도시의 폐기물관리 및 철거 산업을 장악하려는 폭력적인 시도 등으로 기소되었다. 혐의는 피해자 1명에 중상을 입힌 망치 공격과 뉴저지 주의 식당 주인을 칼로 반 토막 내겠다고 위협한 것 등이었다. 특히 암매장된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마피아 관계자 소유의 말 농장 두 곳을 압수수색했다. #

2024년 4월 FBI는 암매장된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 또다시 마피아 관계자 소유의 말 농장들을 압수수색했다.
감비노 패밀리를 노린 말 농장 압수수색을 다룬 2024년 뉴스

1.2. 루케시 패밀리

1963년 이전 명칭은 갈리아노 패밀리.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110~140명, 추종세력(Associate): 1100명 이상 # 주 구역은 브롱스, 맨해튼, 브루클린, 뉴저지 주이다. 그 외 구역으로 퀸스, 롱아일랜드, 스태튼 아일랜드,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 라스베이거스, 플로리다 주가 있다.
1922년에 가에타노 레이나 (사진)가 마세리아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브루클린 분파로 패밀리의 모태가 되는 조직을 결성했다. 마세리아는 카스텔람마레세 항쟁 중인 1930년에 토마소 갈리아노 (사진)를 새 두목(Boss)으로 지명한다. 갈리아노는 마세리아가 살해된 후에도 러키 루치아노와 결탁한 뒤 라 코사 노스트라 창설에 함께한다. 그는 자신이 은퇴하는 1951년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그 후 갈리아노의 부두목(Underboss)으로 있던 토마스 루케시 (사진)가 본인이 사망하는 1967년까지 패밀리의 주도권을 쥔다. 전성기 시절엔 루케시의 영향력으로 특히 정관계와 연계가 좋았다. 특히 루케시 패밀리는 영화 좋은 친구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속해있던 조직이다.
루케시 패밀리 두목이 되는 앤서니 코랄로의 1957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그 후 앤서니 코랄로 (사진)가 두목이 되어 1985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기 전까지 NYPD 소속 경찰관을 조종해 살인을 청부하고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등 도시의 운송노조와 건설노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0년대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 감시 영상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 도청을 다룬 1985년 뉴스
교정시설에 수감되어도 대리인을 통해 패밀리를 운영하는 다른 마피아 두목들과 달리 앤서니 코랄로는 자신이 기소되자 수뇌부 회의를 열어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를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지명했고 자신의 유죄가 확정되자 그에게 두목 자리를 승계했다.
파일:빅터 아무소와 앤서니 카소.jpg
1980년대 후반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와 부두목 앤서니 카소[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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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루케시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
1980~90년대에는 은퇴한 앤서니 코랄로의 뒤를 이은 두목(Boss) 비토리오 아무소와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카소 (사진)가 지나친 학살극을 자행했고 둘 다 법의 심판을 받는다. 이후 패밀리는 아무소의 대리인인 두목 대행(Acting Boss) 체제로 운영된다.[25]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의 종신형 유죄판결을 다룬 1992년 뉴스
2007년 루케시 패밀리는 FBI로부터 뉴저지 주 코스타리카에서 자행해온 22억 달러 규모의 범죄 사업 혐의로 # 2009년엔 4억 달러 규모의 또 다른 범죄 사업 혐의 #로 적발되었다. 이 혐의들의 정점에는 당시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이었던 매튜 마돈나 (사진)가 있었고 다수의 경찰관과 교도관이 매수된 정황 역시 포착되었다. 이후 85세의 마돈나는 퍼플 갱이란 범죄조직 수장에 대한 살인을 지시한 혐의로 사건 발생 약 7년 만에 종신형 유죄판결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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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 매튜 마돈나의 지시로 살해된 퍼플 갱단 두목 마이클 멜디시
2018년엔 루케시 패밀리의 고리대금 사업이 적발되었는데, 이는 역대 뉴욕주검찰총장이 조사한 고리대금업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
패밀리의 알려진 주요 사업으로 도박, 고리대금, 노동 공갈, 건설 공갈, 마약 유통, 다양한 사기 등이 있다. 이들은 범죄 기획을 진전시키기 위해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과 협력하며 가끔 유라시아계 조직범죄 파벌과 결탁한다. 그 증거로 러시아계 범죄조직에 복종하는 많은 매춘부들은 루케시 패밀리가 소유한 뉴저지 주 남부의 술집과 클럽에서 일해왔다. 이 여성들은 매춘부로 일하는 것 외에도 엑스터시와 같은 특정한 불법 마약의 유통을 돕는 데 이용된다. 이렇듯 뉴저지에도 50명 규모의 정규조직원으로 이루어진 큰 파벌이 존재한다. 북부 뉴저지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다.[26] ATF 요원 마이클 할랄라니는 교도소 갱단인 아리안 브라더후드가 루케시 패밀리를 위한 여러 건의 청부살인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
(2020년 기준) 지도자는 1992년부터 종신형 수감 중인 7대 두목(Boss) 비토리오 아무소, 두목 대행(Acting Boss)은 마이클 데산티 (사진)[27]

2023년 1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루케시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5명으로 구성된 무장강도단이 뉴욕시 맨해튼과 뉴저지 주에 위치한 보석상들을 습격하여 도합 200만 달러 상당의 상품을 강탈한 사건이 벌어졌다. 2023년 6월에 용의자 전원이 검거되었는데, 대낮에 발생한 대담한 무장강도단의 구성원들이 20대 차량 운전자 1명을 제외하면 전원 60대의 고령이라 현지에서 화제가 되어 국내 제도권 언론도 이 사건을 보도했다. 美 마피아도 고령화…4인조 보석가게 무장강도 모두 60대[28]

1.3. 제노비스 패밀리

1963년 이전 명칭은 루치아노 패밀리.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250~300명, 추종세력(Associate): 1000명 이상 # 주 구역은 맨해튼, 브롱스, 브루클린, 뉴저지 주이다. 그 외 구역으로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 롱아일랜드,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 뉴욕주 로클랜드 카운티, 라스베이거스, 코네티컷 주, 매사추세츠 주, 플로리다 주가 있다.
1890년대에 미국 최초의 마피아 두목(Boss)이라는 안토니오 모렐로와 그 형제들 (사진)의 조직에 악명 높은 검은 손 갈취자 이그나지오 루포 (사진)가 합세해 패밀리의 모태가 되는 조직을 결성했다. 모렐로 패밀리는 1915년 라이벌인 브루클린의 나폴리 카모라 조직과 코사 노스트라-카모라 전쟁 끝에 승리하였다. 이때 미국 마피아의 주도 세력이 시칠리아계 코사 노스트라가 되었다. 1917년 브루클린 카모라의 잔여세력을 흡수한 뒤 잘나가는 듯 보였으나 이내 조직 내부분쟁에 휘말렸다. 전쟁은 치열하게 진행됐으나 모렐로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었던 주세페 마세리아 (사진)가 내분을 정리하고 라이벌들을 제거한 뒤 두목이 되었다. 이후 마피아 위원회 초대 의장 러키 루치아노, 암흑가의 수상 프랭크 코스텔로, 애팔러친 마피아 회합의 주선자 비토 제노비스 (사진), 미국 마피아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두목 필립 롬바르도 (사진), 목욕 가운을 입은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한 빈센트 지간테 등 미국 뒷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계보를 이어왔다.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루치아노 패밀리(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러키 루치아노의 마피아 위원회 창설·전미범죄연합체 창안·살인 회사의 암살
이들은 5대 패밀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이며 타임지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선정한 러키 루치아노의 계보를 잇는 조직으로 5대 패밀리 중에서도 오메르타 같은 마피아 패밀리의 규율과 원형을 현재까지 가장 잘 지켜온 까닭에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of Organized Crime)라고 불리며 21세기에도 미국의 라 코사 노스트라 패밀리 가운데 최고의 조직으로 남아있다. 특히 미국 마피아 패밀리 중 정규조직원(Made Member)의 숫자가 가장 많다.
루치아노 패밀리(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프랭크 코스텔로의 1951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1950년대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비토 제노비스
1980~90년대에 패밀리를 관리한 전설적인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아지트인 트라이앵글 사교클럽 맨해튼 서쪽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암흑가 사람들은 제노비스 패밀리를 '웨스트사이드(Westside)'로 부르게 되었다.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의 지시로 살해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를 다룬 1986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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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와 수행원들
목욕 가운을 입고 수행원과 함께 거리를 걷는 1990년대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 제노비스 패밀리의 1인자 빈센트 지간테와 2인자 리보리오 벨로모를 다룬 1996년 뉴스
미국의 모든 범죄조직을 통틀어 FBI 홈페이지에 조직의 역사가 따로 정리되어 있는 집단은 제노비스 패밀리뿐이다. # 1969년엔 FBI 측 정보원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카마인 탈리아텔라가 뉴욕에서 가장 두려운 마피아 조직이 제노비스 패밀리라고 밝히며 100%에 가까운 거의 대부분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살인 경력을 가졌다고 밝혔다.[29] 뉴욕주 조직범죄전담반에서 정보계장을 지낸 NYPD 조직범죄전담반장 조셉 코피 (사진)는 1990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우리는 생채기도 내지 못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 마피아 전문가 프레드릭 마르텐스는 뉴욕 타임스와의 1997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는 오랫동안 마피아 위원회의 지배세력이었고 마피아들 간의 주요 분쟁을 해결하는 기관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제노비스 패밀리는 버팔로,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뉴저지 주, 뉴잉글랜드 지방,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뉴올리언스 등 미 동부 지역에 위치한 군소 마피아 조직들의 위원회 내에서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30]
제노비스 패밀리와 보난노 패밀리의 월 스트리트 금융 범죄를 다룬 1990년대 뉴스·마피아의 금융 범죄를 다룬 2000년 연방하원의회 소위원회
제노비스 패밀리의 강력한 내부 규율을 알 수 있는 일화로 2004년 조직의 두목급 간부인 도미닉 시릴로가 마피아 패밀리의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강한 의혹이 있다. 전 FBI 뉴욕지국 조직범죄전담반장 데이비드 셰이퍼(David Shafer)는 "제노비스 패밀리는 가장 효율적인 조직입니다. 그들은 아주 비밀스럽고 조직 내부인조차 서로를 모르며 누가 책임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범죄 음모에 고도로 단련되어 있고 작은 규모의 작업조(Hit-Team)를 운영합니다. 법 집행기관의 내부 침투가 상당히 힘듭니다."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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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의 지시로 살해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대행 로렌스 리치의 시신 발견 현장을 살펴보는 수사기관 관계자들의 모습
한 암흑가 소식통에 의하면 제노비스 패밀리는 중요한 회의 때마다 매번 다른 사람을 보낸다고 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상대를 지치게 하여 협상에서 우위를 점함과 동시에 수사기관의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편,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알폰스 다르코 (사진)에 따르면 제노비스 패밀리는 뉴욕의 마피아 조직 중 유일하게 시카고 아웃핏(시카고 마피아) 과의 소통을 전담으로 하는 조직원을 두고 있을 정도로 둘 사이가 가깝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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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31]
2006년 뉴욕남부지구 연방검사장의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대행 리보리오 벨로모 기소 기자회견
이들은 뉴욕 대도시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박업과 고리대금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외에 알려진 주요 사업으로 건설 갈취, 건설 노동 공갈, 철거, 석면 제거, 재생 사업, 트럭 운송, 항만 사업, 연금 횡령, 연금 착취, 보험 사기, 마약 밀매, 합법적인 사업체 침투, 공공 부패 등이 있다. 또한 몇몇 카지노에 지분을 갖고 있으며 뉴욕시 전역의 노점상을 관리한다. 특히 5대 패밀리 중에서 주도적으로 산 제나로 축제 풀턴 어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한다.[산_제나로_축제][풀턴_어시장] 과거 이들은 버팔로 패밀리와 함께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결탁한 뒤 바티칸은행에 9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채권을 매각하려는 계획을 공모하여 그중 6억 5000만 달러 상당을 매각하였고 #[34] 미국 내 범죄조직 중 러시아계나 쿠바계 같은 비전통적 범죄조직과의 접촉이 가장 많으며 그들을 지휘하는 돈과 힘을 갖고 있다. 실제로 FBI는 1998년에 러시아 혈통의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2명이 러시아 레드 마피아계 최고 거물인 셰묜 모길레비치 (사진)의 심복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미국에서 발생한 유독성 폐기물을 러시아에 무단으로 투기하는 국제범죄 계획을 공모했다고 밝혔다. # 2009년엔 제노비스 패밀리와 감비노 패밀리가 연루된 5억 6700만 달러 규모의 기록적인 온라인 도박 사업이 적발되었다. #[35]
2016년 제노비스 패밀리를 주요 타깃으로 한 대대적인 기소가 있었다. 마피아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결코 사업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FBI 요원이 직접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으로 수년간 활동하며 신뢰를 쌓았다. 결국 그는 수천 시간에 달하는 불법 사업에 관한 대화를 녹음할 만큼 내부 침투에 성공했다. 그 결과 46명의 마피아가 기소되었는데, 진행된 재판에서 주요 피고인으로 있던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Boss) 조셉 멀리노가 2년형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유진 오노프리오가 2년 6개월형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 파스칼레 파레로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뛰어난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원이 밝히길 1970년대에 보난노 패밀리에 잠입한 도니 브래스코나 2000년대에 감비노 패밀리에 잠입한 호아킨 가르시아 같은 선배 요원들은 모두 정규조직원(Made Member) 입단 제의를 받았고 그들은 공무원 신분으로 살인에 가담할 순 없어 불가피하게 위장수사를 그만두었지만 자신은 제노비스 패밀리로부터 정식 입단 제의를 받지 못했으며 작전 기간 동안 패밀리 두목 리보리오 벨로모와 그 외 주요 지도자들은 만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이로써 수사의 한계점을 보임과 동시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교하고 단단한 조직 구조를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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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36]
전직 연방검사와 FBI 요원의 2023년 인터뷰에 의하면 여전히 뉴저지 주의 항구를 제노비스 패밀리가 통제한다고 한다. # 실제로 미국 내 20여 개 항만하역사 연합체인 대도시해양관리도급업자협회(Metropolitan Marine Maintenance Contractors Association 이하 MMMCA)와 미국 최대 노동조합 연맹인 AFL–CIO 소속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 이하 ILA) 모두 제노비스 패밀리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여겨진다. MMMCA 협회장을 맡고 있는 조셉 라구사 (사진)는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급 간부의 형제이며 마찬가지 ILA 국제위원장을 맡고 있는 해롤드 다겟 역시 마피아 연관설이 끊이지 않는 자로, 2005년에 그와 함께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제노비스 패밀리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자동차 트렁크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는 석연찮은 사건이 일어났다.[37] (2019년 기준) MMMCA는 1300만 달러 상당의 자산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고 ILA는 약 6만 5000명의 노조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두 집단은 모든 노사 간 단체협상을 담당하고 수억 달러에 달하는 항만노조원들의 임금과 연금을 공동으로 관리한다. 2024년에는 ILA가 총파업에 돌입하여 미국 내 36개 항구가 올스톱되었고 JP 모건은 이들의 파업이 미국 경제에 하루 최대 6조 6천억 원 규모의 손실을 입힐 수 있다고 예측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되어 국내 제도권 언론에서도 관련 소식을 보도했다. 美동남부 항만 47년만의 파업…인플레 자극 등 경제여파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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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38]
제노비스 패밀리는 러시아계나 쿠바계 조직과 협력하여 컴퓨터 사기, 주식 사기, 증권 사기, 의료보험 사기 같은 보다 정교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진화했다. 보통 이 조직은 다른 패밀리에 비해 하급 구성원들이 범죄수익의 더 높은 부분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며 법 집행기관에서 파사드(façade) 구조라고 부르는 방식을 취해 패밀리 지도자들의 신분을 위장하고 그들을 감시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외부에 자신들의 두목(Boss)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조직원들이 뉴욕주에 거주하며 뉴저지 주에서 불법 활동을 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21세기 들어 패밀리는 도박업의 영역을 해외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공간으로 확장시켰고 # 은드랑게타 같은 본토 조직과 연계해 국제 마약 유통에 개입했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잘 알려진 신종 모기지저당증권 사기의 물결을 이뤄냈으며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재건 공사에 자신들의 건설사를 참여시켰다. # 여기에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새롭게 생겨난 대마초 시장을 관리하며 수백만~수천만 달러 상당의 펌프 앤드 덤프(Pump and Dump) 주가 조작도 감행했다. 특히 라틴 킹스 같은 스트리트 갱스터들과 화폐 위조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 (2020년 기준) 지도자는 11대 두목 리보리오 벨로모[39]
2020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크리스토퍼 키에르치오는 한 변호사와 공모하여 도합 16억 5000만 달러 상당의 복권 당첨금을 수령한 2명의 피해자로부터 약 1700만 달러를 사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과거 브루클린의 고급 아파트 입찰 담합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2019년에 승소한 전례가 있다. 한편, 키에르치오는 복권 당첨자 사취 사건을 FBI가 수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FBI를 데려와, 그들은 날 평생 괴롭혀왔어. 난 그들을 비웃었고."라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이후 그는 2022년에 복권 당첨자 사취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2021년엔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설적인 행동대장(Caporegime) 제임스 나폴리 (사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갱스터 오브 뉴욕이 제작되었다.[40] 본 작품은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를 비중 있게 다루고 아버지 제임스 나폴리를 따라 제노비스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으로 활동한 로코 나폴리가 직접 등장하며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 살인공모 사건을 비롯한 역사적인 마피아 비사를 관계자들의 입을 빌려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41]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말하지 못한 이야기: 죄와 벌 그리고 하키는 20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드라마 소프라노스 속 토니 소프라노 캐릭터의 실존 모델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로서 총 1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25개 폐기물관리 업체를 운영한 사업가 제임스 갈란테와 그가 소유한 아이스하키 구단 댄버리 트래셔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42] 본 다큐멘터리엔 FBI 뉴헤이븐지국으로부터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지목된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가 등장하며 마피아와 연루된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과 워터베리시장 같은 정치인의 사례도 소개된다. #[43]

1.4. 보난노 패밀리

1963년 이전의 명칭은 마란자노 패밀리. (201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130명 # 주요 구역은 브루클린, 퀸스, 스태튼 아일랜드, 롱아일랜드이다. 그 외 구역으로 맨해튼, 브롱스, 뉴욕주 웨체스터 카운티, 뉴저지주, 라스베이거스, 캘리포니아주, 플로리다주, 캐나다 몬트리올이 있다.
1890년대에 시칠리아의 카스텔람마레 델 골포를 떠나 뉴욕으로 온 기존의 마피아 조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패밀리의 모태가 되는 조직이 결성되었다.[44] 1912년에는 초창기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세바스티아노 디가에타노 (사진)가 실종되기도 했다. 이후 미국 마피아를 통일하라는 지시를 받고 시칠리아에서 건너온 살바토레 마란자노 (사진)가 디가에타노의 뒤를 이은 니콜로 스키로 (사진)로부터 조직을 넘겨받은 후, 약 50명이 사망한 카스텔람마레세 항쟁에서 승리했지만 곧 러키 루치아노에게 살해당했다.
살바토레 마란자노에게서 패밀리를 물려받은 조셉 보난노 (사진)는 4개 패밀리가 맞물려 있는 뉴욕시에서는 더 이상 사업 확장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도시 밖으로 눈을 많이 돌렸는데, 특히 캐나다 아이티, 애리조나 주에 진출했다. 1960년대에 보난노가 카를로 감비노, 토마스 루케시 등 두 마피아 두목(Boss)의 암살을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조직이 둘로 쪼개졌고, 보난노가 버팔로 패밀리에 의해 납치되어 2년동안 실종되기도 했다. 보난노는 다시 돌아와 위원회를 상대로 '바나나 항쟁'을 일으켰지만 패배하고 은퇴했다.
은퇴한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보난노의 1983년 인터뷰
조셉 보난노가 실종되었을 당시 위원회에서 새로운 두목으로 가스파르 디그레고리오를 지명했으나, 이후 물러나고 그의 파벌인 폴 시아카가 두목(Boss)이 되었다. 이후 그가 사임하고 1971년 나탈레 에볼라가 두목이 되었으나 2년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1973년에 필립 라스텔리 (사진)가 두목이 되어 1991년까지 조직을 이끌었다. 보난노 패밀리는 이 시기 고리대금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1976년 필립 라스텔리가 수감된 이후 조직은 두목 대행(Acting Boss)인 카마인 갈란테 (사진)가 이끌었다. 그러나 갈란테가 라스텔리를 제치며 조직을 장악하고, 뉴욕의 마약 시장을 독점하려 하자 다른 뉴욕 패밀리인 제노비스 패밀리와 위원회가 라스텔리와 공모하여 식사 도중 총격을 가해 갈란테를 암살했다.[45]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 카마인 갈란테 살인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1970년대에는 FBI 요원이 조직에 잠입했던 도니 브래스코 작전이 있었다. 즉, 보난노 패밀리는 영화 < 도니 브래스코>의 무대가 된 조직이었다. 영화가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되긴 했지만 실제와는 상당히 다르게 각색되었다. 당시 FBI 요원을 조직에 들인 대가로 처형되리란 걸 직감한 행동대장(Caporegime) '소니 블랙' 도미닉 나폴리타노는 바에서 술을 마시던 중 조직의 호출 전화를 받았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바텐더에게 시계, 반지, 갖고 있는 현금 전부를 준 다음 스스로 처형을 당했다.[46] 결국 1981년에는 도니 브래스코 사건에 대한 징계로 보난노 패밀리가 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보난노 패밀리는 정부의 주목을 피하며 조용히 사업을 해나갔다.
1981년에는 조셉 마시노 (사진)와 권력을 두고 경쟁하던 알폰스 인델리카토, 일명 '소니 레드'를 비롯한 도미닉 트린체라, 필립 지아코네가 마시노를 비롯한 라스텔리 충성파를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듣고 마시노가 주도하여 상술한 3명의 행동대장(Caporegime)들을 제거했다.[47] 필립 라스텔리는 부두목(Underboss)이었던 조셉 마시노와 일을 항상 같이 했고, 여러 면에서는 마시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가 자연스럽게 후계자가 되었다. 라스텔리는 1983년에 석방되었으나 1984년 다시 체포되었고 이후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고령에 간암으로 건강이 안좋았기 때문에 1991년 가석방이 된 직후 사망했다. 1991년 조직은 마시노[48]가 이어 받았다. 1992년 마시노는 가석방되었고 부두목으로 살바토레 비탈레를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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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보난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49]
보난노 패밀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 위원회에 재진입했는데, 카스텔람마레세 전쟁 이후 2002년까지 정규조직원들 중 정부 측 증인으로 변절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두목(Boss)이었던 조셉 마시노도 이를 패밀리의 자부심처럼 여겼다. 그러나 2002년에 최초로 정규조직원(Made Member)인 프랭크 코파가 변절하여 정부 측 증인이 되었고, 이후 부두목(Underboss)인 살바토레 비탈레,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이었던 리처드 칸타렐라[50]가 연달아 RICO법으로 중형 위기에 처하자 변절하여 정부 측 증인이 되었다. 이들의 증언은 두목이었던 조셉 마시노에게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을 선고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04년 결국 재판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없게 되고, 살인 혐의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을 위기에까지 처하자 뉴욕 마피아 최초로 패밀리 두목인 조셉 마시노가 변절하여 정부 측 증인이 되는 등 이런저런 고난을 겪었다. 두목의 변절은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랄프 나탈레에 이어 두 번째였고, 뉴욕 마피아에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전까지 이런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보난노 패밀리는 큰 망신을 당했으며, 마시노가 도청기를 달고 대화를 녹음해 증언하는 바람에 후임 두목이었던 빈센트 바시아노가 종신형을 받는 등 타격이 너무 컸다.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마시노 체포를 다룬 2003~4년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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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 마이클 맨쿠소의 지시로 살해된 보난노 패밀리 추종세력 랜돌프 피졸로
이후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마이클 맨쿠소 (사진), 살바토레 몬타냐, 빈센트 바달라멘티를 거쳐 2013년에 마이클 맨쿠소가 수감 중 두목(Boss)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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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중반 보난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51]
2014년엔 영화 < 좋은 친구들> 각본에 모티브를 제공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 강탈 사건인 1978년 루프트한자 사건의 배후로 보난노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아사로가 약 36년 만에 기소되었지만 그 이듬해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보난노 패밀리 행동대장 빈센트 아사로의 무죄 판결을 다룬 2015년 뉴스 무죄판결 이후 치러진 인터뷰
한편 보난노 패밀리는 감비노 패밀리와 더불어 시칠리아 마피아와 유대가 깊은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에는 시칠리아의 카스텔람마레세 델 골포 마피아의 두목(Boss) 프란시스코 도밍고가 체포되었는데, 이탈리아 경찰과 FBI는 프란시스코 도밍고와 보난노 패밀리 사이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발견했다고 한다. 보난노 패밀리의 간부들이 수시로 도밍고의 빌라를 방문했으며, 도밍고는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와의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이들은 고리대금, 도박, 갈취, 마약 밀매 등 실질적인 범죄 활동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며, 여전히 캐나다의 이탈리아계 마피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52] (2020년 기준) 지도자는 제10대 두목(Boss) 마이클 맨쿠소[53] 보난노 패밀리는 이후 가급적 살인을 자제하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연방정부의 시선을 끌지 않고 조용히 사업에 집중했다.
2022년 보난노 패밀리 내에서 전면전까지 치달을 수 있는 내부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패밀리 두목(Boss) 마이클 맨쿠소는 2019년 출소 이후 자신의 대리인으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었던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 (사진)와 그를 따르는 3명의 고위 간부를 조직에서 파문시켰다. 맨쿠소는 파문 사유로 카마라노 주니어가 무죄 판결을 받은 2019년 공갈 재판에서 '맨쿠소가 패밀리의 상담역(Consigliere)을 수시로 교체했다.'라고 한 변론 전략이 자신을 모욕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암흑가 소식통들이 꼽는 진짜 파문 사유는 2017년 경 카마라노 주니어가 맨쿠소를 은퇴시키고, 자신이 보난노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이 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2022년 7월 마이클 맨쿠소는 자신이 파문시킨 행동대장(Caporegime) 비토 그리말디의 장례식에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가 참석하지 말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휘하 행동대장 2명과 행동대원(Soldier) 1명에게 만약 카마라노 주니어가 장례식에 나타나면 그를 폭행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사망한 그리말디는 카마라노 주니어의 장인이었기에 그는 맨쿠소의 지시를 어기며 보란 듯이 장례식에 참석해 3명의 마피아로부터 습격을 당한 뒤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평소 카마라노 주니어와 깊은 관계를 맺어온 한 무리의 바이커 갱 조직원들이 역으로 3명의 마피아들을 구타하며 그들을 장례식장에서 쫓아냈다.[54]
"마이클 맨쿠소는 아주 위험한 남자다. 기본적으로 그는 매우 두려운 존재다.(He's a very dangerous guy. Mikey Nose is very feared.)"라고 보난노 패밀리의 두목(Boss)을 묘사한 어느 암흑가 소식통은 이미 장례식 사건이 있기 1~2개월 전에 맨쿠소가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와 가까운 어느 마피아의 술집을 습격하라고 지시하여 그 마피아가 중상을 입고 운영하던 술집이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양측의 긴장관계가 아주 팽팽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고 설명하며, 두목의 지시를 받고 파견된 마피아 정규조직원(Made Member)들이 파문된 마피아와 그를 따르는 (마피아 기준에서는 2류 범죄조직인) 바이커 갱 조직원들에게 폭행당하고 쫓겨난 수치스러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서 체면을 세워야 한다.(something has to be done. Somebody has to save face somewhere.)"라고 말하며 사건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55]
현재의 상황을 종합하면 보난노 패밀리가 두목(Boss)인 마이클 맨쿠소 파벌과 전 두목 대행(Acting Boss)인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 파벌로 갈라져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1990년대 초반 3차 콜롬보 항쟁 이후 약 30년 만에 벌어질 뉴욕 마피아 전면전으로, 위원회 등 다른 패밀리에서 중재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양측의 골이 깊어질 데로 깊어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가능성도 높다. 특히 카마라노 주니어가 공식적으로는 파문되었을지언정 여전히 암흑가에서 활동하고 보난노 패밀리 내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 역시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며 거칠기로 유명한 바이커 갱 조직원들을 개인 용역으로 부리는 등[56] 자신만의 세력이 확고한 것으로 보여 만약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만만치 않은 피해와 후폭풍이 예상된다. 제리 카피시에 따르면 맨쿠소가 복수를 원할 것이지만 연방 보호 관찰 위반 및 감독된 석방 위반 혐의가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라기 때문에 냉정히 처리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2022년 12월 18일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의 글렌 코브 자택에 자동차를 탄 괴한이 여러 발의 총격을 가해 창문들을 파손시키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후 카마라노 주니어의 사업체 중 한 곳에 방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 이러한 폭력사태의 실행범들은 검거되지 않았지만 이는 여전히 장례식 사건에 대한 분노가 풀리지 않은 마이클 맨쿠소의 보복으로 여겨진다.
논픽션 작가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스콧 번스타인에 따르면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리보리오 벨로모와 감비노 패밀리의 로렌조 만니노 (사진)는 마이클 맨쿠소에게 살인이 유발되는 패밀리 내 갈등의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 이후 2023년 7월 맨쿠소는 가석방 규정 위반 혐의로 11개월간 연방교도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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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연방법원에 출두하는 보난노 패밀리 두목 마이클 맨쿠소의 모습

1.5. 콜롬보 패밀리

1963년 이전 명칭은 프로파치 패밀리.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112명, 추종세력(Associate): 약 500명 # 주 구역은 브루클린, 퀸스, 롱아일랜드이다. 그 외 구역으로 스태튼 아일랜드, 맨해튼, 브롱스, 뉴저지 주, 라스베이거스, 플로리다 주가 있다.
1928년에 조셉 프로파치 (사진)가 처음 조직을 결성했다. 5대 패밀리 중 가장 늦게 생겨났고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조직이었지만 1931년에 라 코사 노스트라가 정식으로 창설될 때 당당히 한 축으로 인정받았다.[57] 프로파치가 군림하는 34년간 보난노 패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강력한 조직으로 자리 잡는다.[58]
프로파치 패밀리(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 조셉 갈로의 1958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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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프로파치 패밀리(콜롬보 패밀리) 소속 갈로 파벌 구성원들의 모습[59]
패밀리 창설 이후 1차 콜롬보 항쟁으로 불리는 갈로 삼형제의 하극상을 겪었다. 조셉 프로파치는 조직원들에게 가혹한 상납금을 받고 그 돈으로 호화생활을 했는데, 자기 취미인 교회에 기부도 열심히 했다. 이런 점들이 젊은 조직원들에게 불만을 일으켰다. 조셉 갈로를 비롯한 갈로 삼형제[60]의 파벌은 당시 콜롬보 패밀리의 상당수 멤버들이 가입하여 독자적으로 무장하고 일종의 조직 내 파벌을 결성한다. 1959년 조 프로파치는 경찰의 억제로 상납급을 5만 달러나 연체한 프랭크 아바테마르코에게 상납을 하라고 독촉한다. 하지만 자신의 사정도 어려운데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던 프로파치에게 불만이 쌓인 프랭크는 아예 상납을 거절한다. 결국 조 프로파치에게 프랭크는 살해됐다.[61] 하지만 프랭크의 아들 안토니오를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한 갈로 파벌에 프로파치도 약속한 프랭크의 사업을 갈로 형제에게 주지 않았다. 불만이 폭발한 갈로 파벌은 카마인 페르시코 (사진)의 가필드 보이즈 파벌과 동맹을 맺고 프로파치에 대해 본격적인 내전을 일으켰다.
1961년 조 마리오코, 프랭크 프로파치, 살바토레 무사키아, 존 시모네 등등 프로파치 파벌을 납치한 갈로 파벌은 조 프로파치와 협상을 하였다. 이 협상으로 인해 조 프로파치는 갈로 파벌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인질들은 모두 평화롭게 풀려났다. 그렇지만 프로파치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갈로 파벌의 조 지오이엘리를 낚시에 초대해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래리 갈로를 술집에서 교살하려고 하다가 우연히 들어온 경찰에 의해 실패했다.[62] 이때 갈로와 동맹을 맺었던 카마인 페르시코가 배신하고 다시 프로파치 밑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갈로 형제는 카마인 페르시코를 '뱀(Snake)'이라 불렀다.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돼 양쪽에서 9명이 사망하고 3명이 실종됐다.1961년 조셉 갈로는 살인 혐의로 징역 7~14년형을 받아 감옥으로 갔다. 그렇지만 남은 갈로 파벌에 의해 내전은 계속 됐다.
1962년 조 프로파치가 암으로 자연사 했다. 조 마리오코가 다음 두목이 돼서 래리 갈로, 앨버트 갈로 형제와 맞서 싸웠다. 1963년 갈로 히트팀이 카마인 페르시코를 저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도 카마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63] 항쟁이 계속 됐지만 결국 패트리아카 패밀리의 중재로 일단 갈로 파벌과 프로파치 파벌은 전쟁을 끝냈다. 한편 이후 조셉 보난노가 마리오코와 손잡고 위원회의 라이벌 멤버들을 죽이고 위원회를 장악하려다 조셉 콜롬보 (사진)의 밀고로 발각 됐다. 조셉 보난노는 숨고 마리오코는 불려간 위원회에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았다. 위원회는 마리오코가 주모자가 아니기 때문에 목숨은 살려줬지만 5만 달러의 벌금과 함께 두목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임은 위원회에 충성한 젊은 조셉 콜롬보가 이었다.
토크쇼에 출연한 1970년대 콜롬보 패밀리 두목 조셉 콜롬보
조셉 콜롬보는 두목이 된 후 조직 개편을 실시하고 조직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사상 처음 미국 땅에서 태어난 마피아 두목이었다. 1968년 갈로 파벌을 이끌던 래리 갈로가 암으로 사망하자 콜롬보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카를로 감비노가 조셉 콜롬보를 적극 지원해줬는데, 일부 두목들은 조셉 콜롬보를 감비노의 꼭두각시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조셉 콜롬보는 당시 활발하던 민권 운동에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계 미국인 민권 연맹을 결성했다. 1970년대에 콜롬보가 이끌던 연맹은 한 번에 3만~4만 명의 군중을 시위에 동원할 수 있었지만 이는 다른 패밀리들을 불편하게 한 지나친 정치적 활동이었다.[64] 한편 1971년 조셉 갈로가 석방이 됐다. 그는 감옥 안에서 니키 반즈를 비롯한 흑인 갱단과 친하게 지내고 자기 파벌을 교도소에서도 통솔하면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63년 평화 협정 당시 감옥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협정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셉 콜롬보는 평화회담을 제의하며 그에게 1000달러의 선물을 줬지만, 조셉 갈로는 그걸 거절하고 10만 달러를 요구했다. 회담은 깨지고 조셉 콜롬보는 조셉 갈로의 히트를 지시했다.
그러나 얼마 뒤 콜롬보는 히트맨에게 저격당해 식물인간이 됐다. 조셉 콜롬보를 저격한 인물은 제롬 존슨이라는 흑인이었다. 그는 사건 직후 콜롬보 경호원들에 의해 즉각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콜롬보의 정치적 활동을 우려한 위원회가 배후라는 설과 당시 교도소에서 석방된 조셉 갈로 (사진)의 쿠데타라는 설까지 총 2가지 가설이 있다. 콜롬보 패밀리는 조셉 갈로 측이 저지른 일이라 확신하고 보복을 해 그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뉴욕 마피아 세계에서 지키는 규칙으로 '암살 대상자를 가족이 있는 집 앞에서 살해하지 않는다'가 있는데, 조셉 갈로는 최고 수준의 처벌을 받은 것이다.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묘사한 조셉 갈로 살인사건
이후 조셉 갈로의 동생 앨버트 갈로 (사진)는 조 갈로의 장례식 때 복수를 맹세했다. 총에 맞아 마비된 조셉 콜롬보의 대리 두목(Acting Boss)인 조셉 야코벨리와 지도부인 알폰스 페르시코(카마인의 형제), 제나로 란젤라를 노리고 히트팀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낸 히트팀은 나폴리 누들 레스토랑에서 목표를 오인하고 전혀 상관없는 민간인 4명을 쐈고 그 중 2명이 사망했다. 이런 무고한 인명피해가 난 살인극으로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결국 갈로 파벌과 콜롬보는 한달 뒤 휴전을 했다.
그 뒤 갈로 파벌은 또 내분이 일어나는데 래리, 조이와 친했던 존 커트론이 앨버트의 지도력에 의심을 표하고 반기를 든 것이다. 양측은 서로 총격전을 주고 받았고, 이 때문에 또 시끄러워지자 결국 위원회가 개입하여 전쟁을 중지시켰다. 협정의 결과 앨버트와 그를 추종하는 파벌은 빈센트 지간테의 인도를 받고 제노비스 패밀리로 이적한다. 존 커트론은 콜롬보 패밀리에 잔류했다. 이로서 1975년 전쟁은 완전히 끝나고 이 일련의 과정을 2차 콜롬보 항쟁으로 부른다.[65] 이후 1976년에 커트론 파벌은 미련을 못버리고 앨버트 갈로에게 복수를 시도하여 저격수를 동원해 갈로 크루의 멤버 한명에게 경상을 입힌다. 이제 제노비스 패밀리가 된 앨버트 갈로는 즉각 콜롬보에 항의했고, 콜롬보 지도부는 커트론과 바시아노를 소환했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인내심을 잃은 콜롬보 지도부는 바시아노와 커트론을 숙청해버렸고, 둘의 죽음으로 내전은 일단락 되었다. 앨버트 갈로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일원으로 남은 마피아 생활을 계속 했으며 오늘날 존경 받는 원로의 위치에 있다고 한다.
이후 다음 조셉 콜롬보의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있던 조셉 야코벨리, 빈센조 알로이, 조셉 브란카토가 모두 물러났고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었던 카마인 페르시코가 1973년 두목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건의 범죄로 자주 체포되어 징역을 오래 살았고 1973년에도 체포되어 1979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이 시기 형제인 알폰스가 토마스 디벨라의 지원을 받아 대리 두목(Acting Boss)을 했다. 1979년 석방된 카마인은 2년만인 1981년 또 수감됐다. 1984년에 석방됐지만 1년만인 1985년 또 체포됐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걸려 2년간의 치열한 재판 끝에 결국 1987년 가석방 없는 도합 139년형을 선고 받는다. 이러한 장기 복역과 대행 두목 체제는 카마인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마인은 감옥안에서 여러 대리인들을 동원해 조직관리를 했고 1,2차 콜롬보 항쟁 이후 콜롬보 패밀리는 오랜만에 평화를 만끽하며 착실하게 사업을 키워 나갔지만, 두목의 부재로 인한 내부 적대 파벌이 크는 것은 막지 못했던 것이다.
여하간 이들은 5대 패밀리 중 가장 폭력적인 조직으로 평가받으며, 마피아들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이들의 항쟁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위험천만했다. 일례로 1987년 자신들을 수사한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에 대한 살인 계획을 주저 없이 실행하면서 그의 판사 아버지를 살해했다.[66] 1997년에는 마피아 사업과 아무 관계없는 NYPD 소속 경찰관을 살해해 동료 마피아들까지 격분하게 했다.[67] 특히 1990년대 초반 3차 콜롬보 항쟁(1991~93년)은 1987년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던 두목 카마인 페르시코의 지시를 따르는 파벌과 따르지 않는 파벌 간의 갈등이 폭발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2019년 기준 가장 최근에 벌어진 뉴욕 마피아의 전면전(Full-scale war)이다.
3차 콜롬보 항쟁을 다룬 1991년 뉴스
당초 콜롬보 패밀리의 부두목(Underboss)인 비토리오 오레나 (사진)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카마인 페르시코의 두목 대행이었다. 그는 카마인 페르시코의 아들 알폰스 페르시코[68]가 석방되면 패밀리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부두목으로 돌아와야 했다. 정작 내려놓을 때가 오자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오레나가 내려놓기를 거부했다.[69] 하지만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가 주도한 위원회는 그런 오레나를 콜롬보 패밀리의 두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70] 이후 위원회를 설득해야 될 필요성을 느낀 오레나는 상담역(Consigliere)인 카마인 세사에게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두목 등극 지지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세사는 오레나가 지시한 조사를 하는 대신 그의 하극상 계획을 수감 중인 두목에게 보고했고 격분한 페르시코는 오레나 제거를 지시했다. 이후 1991년 6월 21일 오레나가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 앞에 대기 중인 작업조를 발견한 뒤 도주한 사건을 시작으로 콜롬보 패밀리는 페르시코를 따르는 파벌과 오레나를 따르는 파벌로 분열되어 서로를 몰살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대화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약 2년 동안의 전면전이 발발하여 일반인 3명 포함 12명이 사망하고 18명의 관련자가 실종되었으며 반대 파벌 구성원과 사업체를 향한 수많은 폭행, 손괴, 방화 등 폭력행위가 벌어졌다.
당시 비토리오 오레나는 그의 조카 마이클과 윌리엄에게 살인 임무를 부여한 뒤 브루클린에 파견했는데, 두 사람이 항쟁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FBI 요원들은 그들이 15명의 관련자가 실종된 것에 크게 관여했다고 확신했다. 항쟁 중 윌리엄이 살인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8정의 권총을 소지한 채 검거되었지만 그가 리버헤드 카운티 교도소에 머무는 동안 권총들이 모두 증거 보관함에서 사라지는 수상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결국 법적 처벌을 피하기도 했다. 한편, 1992년 4월 4일 오레나가 다수의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된 뒤에도 항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듬해인 1993년 10월 20일에 오레나의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인 조셉 스코포가 살해된 뒤에야 항쟁은 페르시코 파벌의 승리로 끝났다. 콜롬보 패밀리는 항쟁 기간 중 위원회에서 제명되었고 패밀리 해체 및 흡수까지 고려되었지만 항쟁 종결 이후 위원회에 재진입한다. 이후 항쟁의 후유증으로 약 20여 년 동안 70여 명의 콜롬보 패밀리 조직원들이 크고 작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당시 콜롬보 패밀리 조직원들의 오메르타는 꽤 단단했는데, 18명의 조직원들이 정부 측 증인으로 협력하여 감형 받는 동안 63명의 조직원들은 협력을 거부하고 의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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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콜롬보 패밀리 조직원들의 모습[71]
한편, 항쟁의 두 주역이었던 비토리오 오레나는 1992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알폰스 페르시코는 2001년에 연방공갈, 고리대금 및 돈세탁 혐의로 수감되는데, 이후 1999년 당시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이었던 윌리엄 쿠톨로의 살인을 교사한 혐의가 입증되어 2009년에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현재 콜롬보 패밀리는 항쟁으로 입은 피해를 추스르고 회복 중이다. 패밀리의 알려진 주요 사업으로 갈취, 도박, 노동 공갈, 고리대금, 포르노그래피, 트럭 강탈, 담배 밀매, 마약 밀매, 기업 파산, 증권 사기 등이 있다. 때때로 이들은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과 범죄 활동을 조정하고, 자동차 유류세 탈루나 증권 사기와 관련된 보다 정교한 계획에 참여해왔다. 영화 대부에서 루카 브라시 역을 맡은 레니 몬타나와 드라마 소프라노스에서 폴리 구알티에리 역을 맡은 토니 시리코는 실제 콜롬보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21년 기준) 지도자는 카마인 페르시코의 사촌인 5대 두목(Boss) 앤드루 루소 (사진)[72]
콜롬보 패밀리 두목 앤드루 루소 기소를 다룬 2021년 뉴스
상기한 공갈사건으로 체포됐다가 10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앤드루 루소가 2022년 4월 18일 병으로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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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콜롬보 패밀리 두목 앤드루 루소의 장례식

2. 뉴욕 마피아 주요 인물

주세페 마세리아 (사진) 러키 루치아노를 부두목(Underboss)으로 두고 있던 원조 뉴욕 마피아 두목(Boss).[73] 1931년 시칠리아 마피아 세력과의 카스텔람마레세 항쟁 중 루치아노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74] 암살자가 포커 카드 중 죽음을 상징하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를 마세리아의 손가락에 꽂아두고 사라져서 범죄 현장 사진이 유명하다. 사후 그의 패밀리는 루치아노가 장악한다.
살바토레 마란자노 (사진) 일명 리틀 시저. 주세페 마세리아와의 카스텔람마레세 항쟁에서 승리해 역사상 유일한 미국 마피아계 두목 중의 두목(Capo Di Tutti i Capi)이 된 인물. 일개 갱스터 집단이던 뉴욕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을 5개 패밀리를 재편하고 전국의 마피아 패밀리와 연계한 뒤, 고대 로마 제국의 체계를 본떠서 미국 마피아 라 코사 노스트라를 창설한 인물이다.[75] 마란자노는 라 코사 노스트라의 행동 강령을 제정하고, 패밀리의 체계를 설정했으며, 마피아들 간 분쟁 해결을 위한 절차를 제정해 조직의 토대를 쌓지만 1931년 러키 루치아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다.[76]
러키 루치아노[77] 본명은 살바토레 루카니아로 미국에서 찰스 루치아노로 개명했다. 라 코사 노스트라의 실질적 수장으로 현대 미국 마피아를 사실상 창조한 인물이면서 마피아 위원회를 만들고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를 구상한 인물. 카스텔람마레세 항쟁 이후 사이가 틀어진 시칠리아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간 회동을 주선한 마피아 세계의 전설.[78]
프랭크 코스텔로[79] 본명은 프란체스코 카스탈리아. 암흑가의 수상이라 불린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사진) 본명은 움베르토 아나스타시오. 일명 최고 사형집행인.[80] 주세페 마세리아를 직접 살해한 4명의 암살자 중 하나. 마피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암살자로 꼽히는 인물로, 이 사람을 묘사하는 또 다른 별명으로 1인 군대(One Man Army)가 있다. 자신의 두목(Boss) 빈센트 망가노를 제거하고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이 되었다. 살인 회사(Murder, Inc.)의 창립자이며 이 '회사'의 사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죽였지만[81] 정작 자신은 마피아 사업에 관계없는 일반인을 죽인 죄로 위원회에서 처형이 의결되어 1957년 자신의 부하 카를로 감비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에 의해 이발소에서 살해되었다.[82] 살해될 당시 아나스타시아는 자신이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공격자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이발소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잘못 보았고, 계속 총격을 당해 결국 살해당했다. 아나스타시아 암살 장면은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한다. 여담으로 배우 겸 전 헤비급 프로복서 잭 오할로런은 자신이 아나스타시아의 사생아라고 주장한다.
조 프로파치 (사진) 본인의 패밀리를 이끌며 마란자노에 의해 뉴욕 5대 패밀리의 한 축으로 인정받은 인물. 대부 비토 콜레오네의 모티브가 된 사람 중 하나로, 실제로 콜레오네 처럼 올리브기름 사업을 했다. 1962년에 사망.
비토 제노비스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러키 루치아노의 부두목(Underboss)이었던 인물. 주세페 마세리아를 직접 살해한 4명의 암살자 중 하나. 1937년 살인을 저지르고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현지 마피아와 함께 파시스트 정권하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사업을 전개했다. 핵심 증인이 독살되어 기소가 취하되자 미국으로 돌아온 후 1957년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이던 프랭크 코스텔로의 저격을 지시하여 그를 은퇴시키고 두목이 된다. 이런 돌발행동에 얼마 안 있어 러키 루치아노, 마이어 랜스키, 프랭크 코스텔로의 계략에 빠져 15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그로부터 1년 뒤 재판에서 제노비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마약상이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83] 그러나 루치아노는 추방되어 이탈리아에 있었고, 랜스키는 이탈리아 혈통이 아니며, 코스텔로는 은퇴한 인물이었기에 제노비스가 감옥에서 대리인들을 통해 패밀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84] 수감 중인 제노비스는 당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던 앤서니 스트롤로가 자신을 감옥에 보내는 루치아노의 계획에 동참한 것으로 의심하여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스트롤로의 시신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다. 제노비스는 1969년에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카를로 감비노[85]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대부 비토 콜레오네의 모티브가 된 사람. 러키 루치아노 이후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역대 미국 마피아 두목 중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토마스 루케시 (사진)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 젊은 시절 기계공장에서 일하는 중 산재를 입어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잃어 ‘세 손가락 토미’라 불렸다. 당대 뉴욕시장 빈센트 임펠리테리의 막강한 후원자로서 뉴욕 경찰 국장 토머스 머피와도 가까운 사이를 자랑했다. 자신의 딸을 카를로 감비노의 아들과 결혼시켜 사돈을 맺었다. 196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엔 1000명이 넘는 정치인, 판사, 경찰관, 갈취자, 마약상, 포주, 카를로 감비노가 참석했다.
조셉 보난노 (사진) 보난노 패밀리 두목(Boss). 일명 열광적인 조(Joe Bananas)라 불린 인물. 살바토레 마란자노에게 패밀리를 물려받았다. 1960년대에 경쟁 조직에 납치되어 약 2년간 실종되기도 했다.[86] 후에 카를로 감비노, 토마스 루케시 두 뉴욕 마피아 두목의 암살을 모의하다 적발되자 ‘바나나 항쟁’을 일으켰다. 항쟁에 패배하고 은퇴한 후 애리조나 주로 가서 자서전을 집필하여 출간하고 여생을 보냈다.[87] 2002년에 사망했다.
조셉 콜롬보 (사진)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이탈리아계 미국인 인권단체를 이끌며 정치적인 야심을 드러냈다.[88] 영화 대부 제작진을 협박해 '마피아'라는 단어와 '코사 노스트라'라는 단어를 대본에서 삭제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제작자 앨버트 루디와 협상을 한 후 대부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89] 1971년 총격을 당해 식물인간이 되고 7년 후 사망한다.[90] 콜롬보 저격사건은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한다.
조셉 발라키 (사진) 젊은 시절부터 제노비스 패밀리의 행동대원(Soldier)이자 히트맨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1963년 매클러런 상원 위원회에 출석하여 "마피아는 존재합니다."라고 최초로 밝혔다. 헤로인 밀매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배신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교도소에 같이 수감 중이던 비토 제노비스에게 사형선고인 일명 '죽음의 키스'를 당했다고 한다. 그의 목에 1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고 이에 두려워하던 발라키는 동료 수감자를 자신을 노리는 마피아 조직원으로 오인해 쇠 파이프로 때려죽인다. 궁지에 몰린 그는 정부 증인이 되어 비밀 입단식과 위원회, 정점인 두목(Boss)부터 말단인 추종세력(Associate)까지 이루어진 조직 구성 등 라 코사 노스트라의 자세한 체계와 역사, 주요 두목들, 마피아 사건사고의 실체에 대해 최초로 폭로하는 인물이 된다. 그의 증언은 1920년대 카스텔람마레세 항쟁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동안 이 정도로 자세한 증언은 없었기에 FBI의 마피아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피아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 교도관을 매수하거나 조직원을 투입해 죽이려 했지만 엄중한 보호를 받은 끝에 1971년 옥사한다. 일설에는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사면을 약속받고 증언을 했지만, 그가 암살 당해 사면 약속이 무산되자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일생이 찰스 브론슨 주연의 영화 바라키로 제작되었다.
필립 롬바르도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일명 사팔뜨기 베니. 일찍이 러키 루치아노의 운전기사를 맡았다. 1940년대에 마약 관련 혐의로 약 6개월간 복역했지만 출소 후 암흑가에서 승승장구하여 1965년엔 수감 중인 비토 제노비스 대신 패밀리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이 되었다. 이후 제노비스가 연방수용자 의료센터에서 사망하는 1969년에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토마스 에볼리 (사진)[91] 프랭크 티에리 (사진)[92] 등 거리 책임자(Street Boss)들을 내세워 다른 마피아 두목과 수사기관을 속였다. 롬바르도는 영화 대부 3편 각본에 영감을 제공한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에 연관된 미국 마피아 인사들 중에서도 정점으로 추정된다.[93] 더욱이 그는 1980년에 벌어진 필라델피아 마피아 두목 안젤로 브루노 (사진) 암살 사건의 실질적인 배후로 추정되지만 교활하게 수사망을 빠져나와 기소되지 않았다.[안젤로_브루노_암살_사건] 1981년 빈센트 지간테로 후계자를 명확히 하고 은퇴한 뒤 뉴저지 주 잉글우드에 거주하며 겨울은 따뜻한 플로리다 주에서 생활하다 1987년에 플로리다에서 사망했다. 영화 아이리시맨에 롬바르도 휘하에서 노조 관련 사업을 담당하던 앤서니 프로벤자노가 등장한다.[95] 한편, 롬바르도의 아들 필립 롬바르도 주니어는 1981년 나이트클럽 실랑이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례가 있다. 당시 롬바르도 주니어는 출동한 경찰관에게 두 차례에 걸쳐 “우리가 뉴욕과 뉴저지를 관리한다.(We run New York and New Jersey.)”라고 과시하며 전화 한 통이면 당신을 보살펴줄 수 있다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카마인 갈란테 (사진) 보난노 패밀리 (비공식) 두목 대행(Acting Boss). 항상 시가를 피운 탓에 일명 The 시가로 불렸다. 조셉 보난노의 부두목(Underboss)을 약 7년간 맡기도 했다. 기존 두목이었던 나탈레 에볼라가 암으로 사망하여 위원회에서 필립 라스텔리 (사진)를 새로운 두목으로 지명하지만 2년 뒤 라스텔리가 수감된 탓에 갈란테가 독단적으로 패밀리의 주도권을 잡았다.[96] 마약 사업에 유독 집착한 갈란테는 정규조직원(Made Member)들까지도 거리에서 직접 마약 거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1970년대에 마약과 관련한 분쟁의 결과로 최소 8명의 이상의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갈란테는 1979년 위원회의 결정으로 부하들에게 제거된다.[97] 영화 도니 브래스코 초반부에 잠깐 나오는 마피아 두목이 갈란테다. 갈란테의 사망 사진을 보면 총격당해 죽는 순간까지 시가를 물고 사망했다.[98]
아니엘로 델라크로체 (사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후에 감비노 패밀리 두목이 되는 존 고티의 멘토로서 약 20년간 부두목이었다.[99] 암살을 수행할 때 가톨릭 성직자 의상을 입고 대상 가까이에 손쉽게 접근해 살해하는 교활함을 보였다.[100]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로 여겨졌지만 감비노는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이에 델라크로체를 따르던 부하들이 격분했지만 정작 본인은 1985년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카스텔라노에게도 충성을 바쳤다. 재판 중이었던 카스텔라노는 델라크로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는 존 고티 등 다른 조직원들을 자극해 쿠데타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폴 카스텔라노[101]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 부하들에 의해 맨해튼 한복판에서 처형당했다.
앤서니 살레르노[102]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급 간부. 일명 뚱뚱한 토니. 중절모, 시가, 지팡이, 육중한 체구, 험상궂은 인상 등 그의 전반적인 모습은 미국인들이 평소에 생각한 마피아의 스테레오 타입과 거의 흡사했다.
빈센트 지간테[103]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라이트헤비급 권투 선수 출신이다. 카를로 감비노 이후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목욕 가운을 입은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했으며 뉴욕의 진정한 두목(The Real Boss of New York)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베네로 망가노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 두목이었던 빈센트 망가노의 친척으로, 일명 계란(Benny Eggs)이라 불렸다.[104]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미 육군 항공대 폭격기 사수로 참전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포함한 33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적에게 2번 피격되었지만 살아남았고 7개의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마피아 조직에 가담했고 제노비스 패밀리 그리니치 빌리지 행동대(Crew)에 소속되어 훗날 두목이 되는 빈센트 지간테의 휘하에 있었다. 망가노는 잉여 주식 유통회사의 사장이면서 의류 산업에 종사하는 도매상이었는데 주요 고객으로 패션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이 있었다. 또한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뉴욕시의 창문 업계를 장악한 마피아 사업의 핵심 인사였다. 4개 뉴욕 패밀리가 참여한 이 사업은 도시 주택 당국이 준 창문 계약의 75%인 1억 4200만 달러와 1억 9100만 달러 사이의 방대한 공공입찰을 조작했다. 설치 회사들은 각 창문에 대해 1달러에서 2달러 사이의 조합비를 지급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는 이 시기 감비노 패밀리와 루케시 패밀리가 창문 사업에서 더 높은 지분을 요구하자 “전부 우리 몫이요, 누구도 건들 수 없소.(It’s all ours, Nobody's supposed to touch it.)”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망가노는 1987년 패밀리 부두목 사베리오 산토라 (사진)가 사망하자 부두목이 된다. 목욕 가운을 입은 지간테와 의자에 앉아있는 망가노.[105] 이 시기 망가노를 감시한 FBI의 도청 자료 중엔 믿을 수 없는 폭력배들과 어울리는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을 질책하는 그의 육성이 있다. 이에 그가 자신의 친구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깡패들이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망가노는 "네 친구들을 데려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해 줄 테니까."라고 대답했다. 이후 그는 창문 재판(Windows case)으로 기소되어 1993년에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106] 복역 중인 1997년엔 빈센트 지간테의 재판에서 증언하기 위해 법원에 소환되었다. 망가노는 협력하면 감형을 해준다는 연방검사를 향해 "뭘 원하는 거요? 차라리 날 총으로 쏘시오! 어떤 심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수작들은 이제 지겨워.(What do you want to do? shoot me! but I'm not going to answer any questions. I'm tired of these charades.)"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오메르타를 지켰다. 약 13년의 복역을 마치고 2006년에 출소한 그는 사망한 지간테의 뒤를 이어 패밀리의 두목으로 추대되지 않을까란 추측이 있었지만, 고령의 나이에 심장병과 시력 문제를 앓고 있어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두목이자 패밀리 내 고위 지도자(Senior leader)로 두루 존경받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다 2017년에 95세로 그리니치 빌리지 자택에서 사망했다. 2023년엔 망가노의 변호인이었던 수전 네첼레스가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변호를 맡아 화제가 되었다. #
존 고티[107] 감비노 패밀리 두목(Boss). 알 카포네 이후 가장 유명한 미국 마피아 두목. 앤디 워홀이 그려준 초상화가 타임지 표지에 올라갔다.[108]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여러 편 제작되기도 했다.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 일명 '황소'라 불린 감비노 패밀리의 부두목(Underboss)으로 존 고티의 오른팔이었다. 그러나 존 고티와 사이가 틀어져 정부 측 증인이 되어 그를 감옥으로 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1994년 증언으로 인해 19건의 살인에도 불구하고 5년형 밖에 안 받았고 그중 4년은 이미 복였했기 때문에 실제 복역은 1년만 하고 풀려나왔다. 이후 증인보호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와 피닉스로 이사를 가서 회고록을 쓰고 언론 인터뷰도 하는 등 매우 공개적으로 살았다. 이런 행보에 존 고티는 감비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피터 고티와의 접견에서 그라바노 암살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편 '애리조나 공화국' 신문지와 인터뷰를 하고 연방요원들과 친구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실렸는데 처음엔 보도를 원치 않았지만 결국 보도가 나갔고 이 보도는 두목 대행 피터 고티와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들을 매우 격분하게 해서 벤데타 시도를 명령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그라바노는 돈이 쪼들렸는지 1990년대 말에 가족들을 동원해 엑스터시를 밀매하게 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2000년 경 마약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2017년까지 감옥에서 복역했다. 수감 중 그레이브스병 진단까지 받아 탈모증세로 머리가 다 빠졌다고 한다. 2017년에 가석방을 받고 석방되었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채널을 개설하여 그간 마피아 비사들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영상들을 만들고 있는데 5대 패밀리 부두목 출신이자 그 존 고티의 최측근이었던 신분 때문인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채널
비토리오 아무소와 앤서니 카소 (사진) 루케시 패밀리 두목(Boss)과 부두목(Underboss).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는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유죄판결이 확실시되자 1987년에 은퇴했다.[109] 이에 두목 자리는 비토리오 아무소 (사진), 부두목 자리는 앤서니 카소 (사진)로 넘어가는데 이들의 통치는 미국 마피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대로 알려져 있다. 아무소와 카소는 라이벌 마피아들뿐만 아니라 법 집행기관 소속 공무원과 합법적인 사업가도 방해가 되면 모조리 살해했다.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는 아무소의 승계를 '미국 마피아 최대의 실수'로 평가했다. 이들은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와 공모해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를 폭탄으로 살해했고 그 밖에도 수많은 마피아들을 죽였다.[110] 이 시기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피터 치오도 (사진)는 조직 내 처형 대상이 되지만 12발의 총격을 받고도 살아남았다. 그 후 조직 수뇌부로부터 아내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아 정보원이 된다. 아무소와 카소가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마피아 세계의 금기를 어겼다는 게 치오도의 주장이다.[111] 그 뒤 루케시 패밀리의 보복으로 치오도의 여동생이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고 삼촌이 살해되었다. 아무소와 카소의 이런 포악함은 존 고티 빈센트 지간테를 상대로도 불리한 증언을 했던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그라바노 (사진)가 카소에 대한 증언만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그라바노는 자신이 카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경우 그가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을 보복 살해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아무소는 1992년에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루케시 패밀리는 부두목 카소가 실질적으로 관리하게 되었지만 수감되어 있던 아무소가 카소를 정보원으로 의심하여 1993년 말 카소를 부두목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패밀리에서 제명했다. 이에 분노한 카소는 실제로 정보원이 되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후 카소가 수사기관 측에 인정한 살인만 37건으로, 실제로는 훨씬 많은 수의 살인을 배후조종한 것으로 여겨진다.[112] 카소의 증언에 의해 연방정부는 수많은 고위급 마피아, 부패한 FBI 요원, 부패한 NYPD 경찰관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카소가 교도관에게 준 뇌물, 다른 수감자들을 폭행한 사실, 여러 차례 허위 진술을 한 점이 지적되었고 결국 그는 정부 측 정보원이 된 고위직 마피아 인사 중에서 유일하게 감형 받지 못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 인물이 된다.[113] 카소가 감형 받지 못한 데에는 그를 기소한 오코넬 연방검사의 개인적 두려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오코넬은 "카소는 음모와 살인에 대해 무한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마약상, 범죄조직 두목, 테러리스트를 기소했습니다. 그중 제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인물은 교도소에서도 손을 뻗어 저를 뒤쫓을 만큼 영리하고 앙심을 품었던 카소였습니다."라고 얘기했다. 특히 오코넬 연방검사는 카소가 정보원이 되지 않고 재판을 이기기 위해 진행했다면 승소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인정했다. 아무소는 1994년에 종신형이 확정되었지만 여전히 루케시 패밀리의 종신 두목으로, 2020년 시점에도 수십 년째 대리인을 통해 교도소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일화로 2012년에 아무소의 부인이 사망하자 그는 모두가 참석했으면 한다는 지시를 내렸고, 루케시 패밀리의 전체 구성원이 참석해 애도를 표해 장례식장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특히 아무소는 수감 중에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조직의 원로인 아니엘로 밀리오레(Aniello Migliore)를 살해하라는 지시가 포함된 여러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114] 변절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의 2019년 증언을 통해, 교도소에 수감된 아무소의 말이 여전히 루케시 패밀리의 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반면 정보원이 되어 마피아 세계에서 제명된 카소는 1998년 공개 인터뷰를 가졌고 딸에게 자신이 정보원이라는 얘기를 하는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 그는 2006년 언론사에 보내온 서한을 통해 정보원이 된 결정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자신을 혐오한다고 밝혔다.[115] 카소는 2009년까지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계호 등급이 낮은 교정시설로 이송되었다.[116] 카소는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되어 민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카마인 페르시코 (사진)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일명 뱀(The Snake). 그는 1957년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 두목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살해한 총잡이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117] 페르시코는 1,2차 콜롬보 항쟁을 겪는 과정에서 얼굴과 어깨, 손에 총상을 입었고 총알을 입으로 뱉어냈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불사신(Immortal)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1973년에 패밀리의 두목이 되지만 이런저런 징역복이 많았던 탓에 수감된 채로 조직을 이끄는 경우가 더 많았다. 1984년 5년 형을 마치고 출소한 그는 1985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재차 기소되자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고 스스로 변호하기로 결정했다.[118] 동료 마피아 두목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페르시코를 말릴 수 없었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우호적인 이미지를 투사하고 마피아나 라 코사 노스트라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고 촉구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검찰 측 증인들에 대한 그의 범죄 행위를 인정함으로써 부주의하게 자신의 법적인 방어를 파괴했다고 믿는다. 재판장은 유죄판결에 앞서 페르시코에게 "비극입니다. 당신은 제가 만나본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지적인 사람입니다."라고 발언했다. 유죄가 확정된 그는 마피아 수사에 앞장섰던 연방검사 출신 변호사 윌리엄 아론왈드의 암살을 지시했고, 그의 판사 아버지인 조지 아론왈드가 대신 살해되었다.[119]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당시 다른 패밀리 두목들은 이미 70대가 넘었기 때문에 재판의 개입 없이도 젊은 세대의 인물이 자연스레 조직을 승계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53세에 불과했던 페르시코는 능력이 절정에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위원회 재판으로 콜롬보 패밀리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페르시코의 수감 이후 콜롬보 패밀리는 그의 통제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로 분열되어 3차 콜롬보 항쟁을 겪는다. 항쟁에서 승리해 종신 두목으로 인정받은 그는 교도소에서 대리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패밀리를 관리했다. 셀윈 랍은 카마인을 평하며 그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고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려고 하게 하는 시도로 콜롬보 패밀리를 거의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셀윈 랍에 따르면 카마인의 기만적인 계획은 동료 마피아 70명을 감옥으로 보내고 12명을 사망하게 했다고 한다. 여하간 그는 수감된 상태에서도 두목으로서 사업 수익을 상납 받았다. 그 증거로 마피아에 정식으로 가담하지 않은 그의 아들 마이클은 브루클린의 평범한 레스토랑 경영자임에도 불구하고 2020년 기준 각각 수백만 달러 가치의 연립주택, 상업건물, 아파트를 20개나 보유 중이다. 페르시코는 알려지지 않은 어느 시점에 형 집행이 정지되어 민간 병원인 듀크 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2019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20] 여담으로 페르시코는 648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기꾼 버나드 메이도프의 교도소 내 보호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둘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 139년 형을 받고도 느긋하게 교도소 생활을 하며 피노클과 보체 놀이를 하고,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동료 갱스터들에게 풀면서 그들을 매우 즐겁게 해줬다고 한다.
조셉 마시노 (사진) 보난노 패밀리 두목(Boss). 2004년 뉴욕 마피아 두목 중 최초로 정부 측 증인이 되어 미국 주요 메이저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121] 1991년 보난노 패밀리 두목 필립 라스텔리 (사진)가 석방되지만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 이후 그의 복심이었던 마시노가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위원회에서 제명된 보난노 패밀리를 1990년대에 재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이 두목 빈센트 지간테로부터 내려온 지시라는 사실을 알릴 때 손가락으로 턱을 가리키는 수신호를 사용한 처럼, 보난노 패밀리 조직원들은 마시노를 언급할 때 손가락으로 귀를 가리켰다. 은퇴 후 자서전을 내 많은 마피아들의 빈축을 샀던 조셉 보난노의 흔적을 지우고자 조직 이름을 아예 마시노 패밀리로 바꾸려 했지만 한번 굳어진 이름 탓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목이 된 마시노는 수사에 대비해 여러 예방 조치를 취했다. 오랜 패밀리 아지트들을 폐쇄하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간부 회동를 하거나 아예 외국에서 회동을 가졌다.[122] 그는 부하들이 배신할 가능성을 낮추려면 배신자의 자식을 확실한 죽음에 직면시키면 된다는 계산하에 적극적으로 조직원의 아들들을 패밀리에 입단시키도록 독려했다. 그는 2000년에 마피아 위원회 회합을 소집하기도 했다.[123] 그의 패밀리는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를 막 겪은 당대 뉴욕 마피아 조직 중에서 보난노 패밀리만 유일하게 두목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지 않은 조직이었다. 언론에서는 그러한 점을 강조하며 마시노를 ‘최후의 돈(Last Don)’으로 불렀다. 그러나 조직범죄와의 전쟁의 대단원을 장식하기 위해 10년 넘게 이어진 FBI의 마시노 수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124] 몇몇 코너에 몰린 간부들이 사법 거래를 통해 정보원이 되어 돌아서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마시노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해진 부두목(Underboss) 살바토레 비탈레(Salvatore Vitale)의 배신으로 본인이 사형 구형을 받고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 뒤 제기된 추가 혐의로 사형 선고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1944년 사형된 렙크 부칼터 이후 미국의 메이저 조직범죄자 중에는 처음이었다.[125] 결국 마시노는 오메르타를 깨기로 마음먹는다. 그 후 연방정부에 자신의 대리인으로 두목 대행을 맡고 있던 빈센트 바시아노 (사진)가 포함된 부하들을 팔아넘기고 자신이 은닉해 두고 있던 자산 중 현금 700만 달러와 500개의 금괴, 자신이 소유한 10채의 부동산 중 5채를 제공하고 감형 받는다.[126] 당시 보난노 패밀리는 마시노가 사형될 경우, 벤데타 차원에서 마시노 재판의 수사와 공소유지를 담당했던 연방검사 그렉 안드레스(Greg Andres)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시노는 바시아노와 면회를 하면서 도청기를 몸에 달고 대화를 녹음해 암살 공모의 증거를 제출하고[127] 그 밖의 여러 혐의를 증언해 바시아노를 종신형에 처하게 만든다.[128] 마시노의 변절은 뉴욕 마피아의 현직 두목이 오메르타를 깬, 도니 브래스코 작전 이후 보난노 패밀리에 핵폭탄 급 충격을 준 사건이다.[129]
도미닉 시릴로[130]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급 간부. 미들급 권투 선수 출신이다. 빈센트 지간테의 심복이자 대리인. 마피아 규율을 어긴 자신의 아들을 살해하라고 지시한 의혹이 있다.
매튜 이아니엘로 (사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급 간부. 어린 시절 야구를 할 때 얼굴을 향해 고의 사구를 던진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상대편 투수를 때려눕힌 이후 "저 아이는 말처럼 힘이 세다."라고 해서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말(Matty the Horse)'이란 별명이 붙었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제2차 세계 대전에 미 육군으로 참전해 퍼플 하트 훈장과 청동성장(Bronze Star) 훈장을 수여받았다. 귀국 이후 마피아 조직원이 된 그는 196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고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Street Boss)가 되는 프랭크 티에리 (사진) 수하에서 활동했다. 이아니엘로의 아버지는 1972년에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조셉 갈로 (사진)의 암살이 벌어진 맨해튼 리틀 이탈리아의 레스토랑 움베르토 클램 하우스(Umberto's Clam House)의 사장이었다. 이아니엘로는 마피아 조직원이라는 신분에다 사건 당일 레스토랑에 있었기 때문에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은 일이 벌어질 때 주방에 있어 모든 상황을 놓쳤고 암살이 이루어진다는 사전 정보가 없었다고 진술해 기소되지 않았다. 당시 이아니엘로는 경찰 조사에서 “당신들은 그곳(아버지 가게)에서 그런 일을 벌이도록 놔둘 만큼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난 아무것도 몰라.”라고 얘기했다. 식당 측은 일종의 랜드마크로 총알 자국을 그대로 놔뒀었다.[131] 1970년대 초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알로가 은퇴하자 이아니엘로가 행동대장으로 승격되었다.[132] FBI에서 도청한 이아니엘로의 육성. 이아니엘로는 표면적으론 번듯한 노조일을 하면서 타임스 스퀘어 일대 80개가 넘는 레스토랑과 유흥업소들을 관리했다.[133] 1970~80년대 뉴욕시의 매춘 산업을 다룬 미국 드라마 ' 더 듀스'에 행동대장 시절의 매튜 이아니엘로를 게리 패스토르가 연기한다. (사진)[134] 약 20년 넘게 승승장구하던 이아니엘로는 1986년에 레스토랑과 술집, 운수회사를 대상으로 한 수백만 달러 규모의 갈취 정황이 드러나 6년 형을 선고받는다. 재판 과정에서 이아니엘로가 양키 스타디움에 핫도그를 공급하는 식품업체의 뒤를 봐주는 대신 그들에게 보호비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기자의 질문을 받는 이아니엘로의 모습. 1988년엔 추가 기소된 건설 부정 입찰죄로 13년 형을 선고받는다. 도합 19년 형을 선고받은 이아니엘로는 약 9년만 복역한 후 1995년에 가석방되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지간테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도미닉 시릴로의 건강 문제로 1998년부터 이아니엘로가 두목의 대리인이 된다.[135] 패밀리 수뇌부가 된 이아니엘로는 전반적인 조직 운영에 깊이 관여했는데, 특히 미 동부 최대의 버스 운전사 조합인 ATU(Amalgamated Transit Union)에 깊이 개입했다. 수사기관에서 2004년에 찍은 이아니엘로의 감시 사진. 2005년 이아니엘로는 뉴욕주에서 자행된 갈취•고리대금업이 포함된 공갈 혐의로 기소된다. 당시 체포에 참여한 수사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아니엘로는 체포 당일 거실에서 대부 3편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136] 이듬해엔 코네티컷 주의 폐기물관리업계를 공갈한 혐의로 추가 기소된다. 불구속 상태로 치러진 재판 과정에서 드라마 소프라노스 속 토니 소프라노 캐릭터의 실존 모델이자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로서 총 1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25개 폐기물관리 업체를 운영한 사업가 제임스 갈란테가 이아니엘로에게 4년간 80만 달러 이상의 보호비를 상납한 사실이 밝혀졌다.[137] 2007년 이아니엘로는 기소된 2건 모두 유죄를 인정했고 변호인은 피고인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관대한 판결을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2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2009년에 출소했다. 일선에서 물러나 패밀리의 원로가 된 이아니엘로는 출소 3년 후인 2012년에 92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아니엘로의 사망 소식을 보도했다. #[138]
존 다미코 (사진) 감비노 패밀리 두목급 간부. 일명 재키 다미코. 존 고티의 휘하 행동대원(Soldier)으로 활동하다 1970년대 후반에 행동대장(Caporegime)으로 승격된다. 이후 고리대금, 갈취, 도박 사업에서의 뛰어난 수완 덕에 패밀리 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한 전직 FBI 요원은 다미코를 가리켜 ‘패밀리에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유형의 인물은 아니고 자주 도박에 돈을 탕진하는 퇴폐적인 도박꾼이지만, 인간적으로 아주 매력 있는 인물이라 주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외교관 혹은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설명했다. 전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다미코를 전형적인 맨해튼 깡패라고 묘사했다. 그는 1985년에 쿠데타로 두목이 되는 존 고티의 심복으로 유명하다. 존 고티를 수행하는 다미코.[139] 존 고티 재판에서 포착된 다미코의 모습. 1992년 종신형을 선고받은 존 고티는 아들 존 고티 주니어 (사진)를 대리인으로 삼는다. 동시에 경험이 모자란 고티 주니어를 보좌하는 간부 위원회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 다미코를 발탁했다.[140] 다미코는 마피아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표면적인 직업으로, 음료회사 크리스탈 가이저에 소속되어 연봉 7만 1천 달러와 수수료를 받는 영업사원 행세를 했는데, 감비노 패밀리가 소유하고 있는 공급업체들에게 크리스탈 가이저 제품의 주문을 강요했다고 여겨진다. 1991년부터 회사 직원으로 등록된 다미코는 크리스탈 가이저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빅 가이저 인코퍼레이션의 창업주 어빙 허스코비츠와 고교 동창이며 상당히 절친한 사이다.[141]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99년에 도박업 혐의로 수감되어 약 2년간 복역한 후 2001년에 출소했다. 이후 존 고티가 사망하고, 고티 주니어가 은퇴하고, 새로운 두목이 된 피터 고티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되는 등 고티 가문의 시대가 끝나는 2003년 즈음엔 다미코가 패밀리의 수괴로 확인되었다.[142] 다미코는 1990년대부터 자신의 브루클린 행동대(Crew)에 시칠리아 파벌을 대거 발탁했고, 조직을 장악한 뒤에는 주요 요직에 프랭크 칼리 같은 시칠리아 파벌을 배치했다. 다미코와 칼리가 포착된 2007년 FBI 감시 사진. 그는 2008년에 감비노 패밀리와 시칠리아 마피아를 대상으로 한 양국 정부의 대규모 작전에서 미국 측 정점으로 지목되어 기소된다. 작전을 다룬 뉴스 영상. 다미코는 같이 검거된 대부분의 다른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경미한 공갈죄만 인정되어 약 1년만 복역하고 출소할 예정이었으나, 1989년에 발생한 살인사건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이 사건은 ‘Weiss’라는 이름의 잠재적 밀고자를 마피아 측에서 처형한 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법정 싸움 끝에 폭행 공모죄만 인정되어 총 4년을 복역하고 2012년에 75세의 나이로 출소했다. 이후 패밀리의 원로가 되어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그는 공식적으로 뉴저지 주 교외의 작고 검소한 집에 아내와 함께 살았지만, 실질적으로 세계 최고의 부촌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호화로운 고층 아파트에 주로 머물렀다.[143][144] 그런 이유로 2008년 FBI가 체포영장을 집행할 당시, 그가 어느 집에 있을지 몰라 두 거주지에 각각 체포조를 파견했다. 당시 급습 정보를 미리 입수한 다미코는 잠적했지만 얼마 안 있어 자수 의사를 밝혀왔고, 재판을 받은 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약 4년간 복역했다. 이후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2023년 12월 27일에 87세로 사망했다.
존 프란지스 (사진)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일명 소니 프란지스. 1917년에 태어나서 1930년대 후반에 조직 생활을 시작했고 2020년에 103세로 사망한 전설적인 마피아다. 일생 동안 40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단 한차례도 오메르타를 어기지 않은 업계의 전설적인 갱스터였다. 연방정부는 마피아 변절자 어니스트 루폴로 처형을 포함해 암흑가에서 벌어진 40~50건 살인사건의 배후로 프란지스를 지목했지만 정작 그는 살인으로 단 1건의 유죄판결도 받지 않았다. 프란지스의 도청 기록 중엔 그가 스스로 "난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4명, 5명, 6명, 10명을 말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내용이 포착되었지만 법리적으론 정황증거에 불과했다. 평생 2건의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그는 1965년 미 전역을 배경으로 한 은행강도의 배후로 지목되어 50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판결이 선고되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50년을 전부 복역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는 1978년에 가석방되지만 1982년에 가석방 규정 위반으로 재수감되었고 한 평생 풀려났다 수감되기를 여섯 차례나 반복하며 그런 식으로 수감된 기간이 총 30년이 넘는다. 그는 암흑가의 전설로서, 교도소에 수감될 때면 시설 내 모든 것을 통제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다고 전해진다.[145] 그는 마피아 활동을 하면서 표면적으로 드라이클리닝 사업주, 음반 회사 투자자 행세를 했다. 프란지스의 동업자 중 사업을 포기한 칼라 레코드 음반사의 사장 네이트 맥컬라가 1980년에 처형 방식으로 살해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1972~74년엔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10만 달러 정도를 투자하여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2003년의 어느 마피아 영화도 본인이 제작자로 참여했다.[146] 프란지스는 2011년에 콜롬보 패밀리의 부두목으로 지목됨과 동시에 갈취 혐의를 받아 만 93세의 나이로 8년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프란지스는 자신의 공판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 잠을 잤는데 이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령의 프란지스가 복역 중 사망하리라 예상했지만 2017년에 100세의 나이로 가석방되어 끝내 사회로 돌아왔다. 말년의 프란지스는 휠체어에 의지하며 운전사가 모는 레인지로버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그는 그 시기에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생애 처음으로 가졌다.[인터뷰_내용] 한편 그의 아들 마이클에 의하면, 아버지는 전설의 러키 루치아노 알 카포네직접 만나본 적 있고 1980~90년대 국가 최고의 마피아 두목이었던 빈센트 지간테도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한다. 과거 프란지스는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한 마이클이 마피아 세계를 떠나려 했을 때 직접 아들의 살인을 허가했지만 결국 부자관계가 회복되었다. 마이클은 마피아 세계에서의 궁극적인 성공이란 바로 돈과 지위가 결합된 권력이며 말단 조직원에서 출발해 부두목이 되었고 적지 않은 재산을 모아 이제 콜롬보 패밀리가 존경하는 원로 마피아 중 하나가 된 아버지는 스스로를 가장 성공한 마피아라고 여길 것이라고 했지만, 아들인 자신이 보기에 그가 조금만 덜 성공한 마피아여서 아버지의 삶 속에 자리하는 40년 넘는 수감 생활 중 자유인으로 살았던 날들이 더 많았더라면 하고 생각한다고 밝혔다.[148] 마이클의 동생 존 프란지스 주니어는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 아니었고 심각한 마약중독자였는데, 과거 프란지스 주니어에게 마약을 판매한 마약상이 브루클린에서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아버지 프란지스가 강력히 의심받았지만 그는 끝내 법망을 피했다. 평소 프란지스는 작은 아들의 약물 문제를 상당히 걱정했고 관련자들에 의하면 그 때문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훗날 프란지스 주니어는 미국 마피아 변절자 중에서도 아버지를 상대로 불리한 증언을 한 최초의 아들이 된다. 프란지스는 인생의 황혼기인 2019년에 과거의 배신을 용서하고 작은 아들과 화해했고 # 아들도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프란지스 주니어는 그 해에 증인보호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아버지 프란지스는 그 이듬해 사망했다.[149] 프란지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5부작이며 말년의 프란지스가 직접 출연한다.)
마이클 프란지스[150] 전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존 프란지스의 아들. 강연가 겸 작가로 400개가 넘는 NCAA 대학에서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강연했고 MLB, NBA, NFL에서 뛰는 프로 선수들에게도 강의를 해왔다. 교정당국 자문위원으로 전국 교도소를 다니며 소년 수용자들과 일부 성인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범죄 예방 강연도 했다. 또 그가 쓴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서 출판되었다. 현재 각종 마피아 관련 다큐멘터리나 프로그램에 관계자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
리보리오 벨로모[151]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후계자.
프랭크 칼리[152]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존 다미코 (사진)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었고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3. 다른 도시의 마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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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FBI가 정리한 미국 전역의 마피아 두목
2007년 FBI 요원 로버트 그랜트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할리우드에 의해 여러 차례 미화된 시카고 아웃핏의 정규조직원 숫자가 얼마나 적은가와는 상관없이 그 작은 지도자 집단은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 이로 미루어 보면 시카고 등 다른 도시의 마피아 패밀리는 주요 이권을 쥐고 있는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조직 구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53]

3.1. 시카고 아웃핏

미 중부 최대의 도시이자 미국 제3의 도시인 일리노이 주 시카고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07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28명, 추종세력(Associate): 100명 이상 # 1910년에 빈첸조 콜로시모가 조직을 결성한 후 콜로시모를 살해하고 뒤를 이은 자니 토리오와 그 후계자 알 카포네 아일랜드 갱단과의 항쟁 끝에 승리를 쟁취하고 시카고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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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시카고 아웃핏 두목 알 카포네와 수행원들[154]
이후 조직은 폴 리카 (사진), 앤서니 아카르도 (사진), 샘 지앙카나 (사진), 조셉 아이우파 (사진), 조셉 페리올라 (사진), 사무엘 칼리시 (사진) 같은 두목(Boss)들의 지도하에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등지로 진출했다.
시카고 아웃핏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의 1958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155]
프렌치 커넥션이 성행하던 시절엔 뉴욕, 디트로이트, 플로리다 주의 패밀리가 마약을 들여오면 아웃핏이 중서부를 통해 미 전역에 분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웃핏이 시카고의 모든 조직범죄를 독점하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미 중서부에서 가장 강력하고 폭력적인 거대 범죄조직이었다. 특히 아웃핏은 뉴욕 패밀리들을 제외하면 위원회가 창립된 1931년부터 현재까지 의석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조직이며 밀워키, 캔자스시티, 세인트루이스, 플로리다 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등 미 중서부 지역에 위치한 군소 마피아 조직들의 위원회 내에서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156] 시카고에 위치한 올드 네이버후드 이탈리안 아메리칸 클럽은 아웃핏의 아지트로 여겨진다.[157] 아웃핏은 영화 카지노 속 주요 등장인물들의 소속 조직이며 영화 야망의 함정, 페이백, 아웃핏 등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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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시카고 아웃핏 조직원들의 모습[158]
시카고 아웃핏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횡령을 다룬 1980년대 뉴스 시카고 아웃핏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의 1984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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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아웃핏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를 수행하는 미래의 두목 존 디프론조[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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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카고 아웃핏 조직원들의 모습[160]
1980~90년대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에 비교적 작은 타격을 입었지만 대규모 범죄조직으로 간주되던 과거에 비해 현대에는 구성원 숫자를 줄이며 건설, 공공 부패, 폐기물관리, 식품 등 합법적인 사업에 대한 비중을 높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리노이 주의 도박, 고리대금, 갈취, 매춘, 마약 유통 같은 전통적인 불법 사업에도 큰 영향력을 끼친다. 조직범죄 전문가 존 바인더에 의하면 아웃핏은 시카고의 갱들이 거리에서 판매하는 마약의 도매와 수입에 관여한다고 한다. # 2003년엔 아웃핏이 아웃로스 MC[161] 조직원을 이용하여 평소 사업상 마찰을 빚어온 사업체를 폭파시키는 등 바이커 갱단과의 협력이 관측되기도 했다. # 수사기관에서는 1920년대부터 아웃핏에 의해 살해당한 피해자의 숫자를 11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
초기 마피아 규율 상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하기 위해서는 한 건 이상의 살인을 수행한 100%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규율은 뉴욕 패밀리들에 의해 부계만 이탈리아 혈통이면 된다는 식이거나 막대한 상납금 등 살인을 대신할 다른 공로를 인정하는 식으로 차츰 완화되고 때론 무시되어 왔다. 하지만 적어도 시카고에서만큼은 이러한 규율의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아웃핏의 정규조직원 입단식은 뉴욕의 그것보다 다소 혹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입단자가 총과 권총이 놓인 탁자 앞에서 자신의 피를 떨어트린 가톨릭 성인의 사진을 손에 들고 불로 태우며 오메르타를 맹세한다는 기본 형식은 같지만 시카고의 경우 입단자가 사진을 태우며 자신의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낄 때 움찔하지 않는 기개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화상을 입도록 유도한다고 알려져 있다.[162]
2005년에는 14명의 아웃핏 정규조직원(Made Member) 및 추종세력(Associate)이 18건의 살인과 1건의 살인미수를 포함한 다수의 범죄 혐의로 기소된 패밀리 시크릿 작전(Operation Family Secrets)이 있었다.
시카고 아웃핏을 노린 패밀리 시크릿 작전을 다룬 2007년 뉴스
당시 아웃핏 역사상 최초로 조직을 배신하고 밀고자가 된 정규조직원 니콜라스 칼라브레스가 결정적인 증언을 제공했다. 이 재판으로 1978년 아웃핏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의 자택을 턴 7명의 도둑을 보복 살해한 사건의 관계자들과 영화 카지노 각본의 모티브를 제공한 1986년 아웃핏 행동대원(Soldier) 앤서니 스필로트로 (사진) 살인사건의 관계자들이 사건 발생 수십 년 만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패밀리 시크릿 작전 1년 후 아웃핏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지조(Anthony Zizzo)가 실종되었는데, 아내에게 점심 식사를 하러 간다고 얘기한 후 그대로 실종된 지조는 조직 내부를 정화하는 차원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FBI에서 지조의 행방을 아는 신고자에게 1만 달러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법 집행기관에서는 지조의 뒤를 이어 아웃핏의 부두목이 된 조셉 안드리아키 (사진)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고 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었다.
2015년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과는 시카고가 미국 부패의 수도라고 천명했다. 그들은 1976년부터 약 38년 동안 도합 1642명의 시카고 공무원이 부패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2013년에만도 45명의 공무원이 유죄로 판결됐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엔 시카고 교외 노스레이크 경찰서장이 아웃핏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 2002년엔 시카고 교외 스톤파크 시장이 아웃핏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 2009년엔 시카고 경찰관이 아웃핏에 매수되어 가담한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 같은 해 연방보안관이 아웃핏에 기밀 정보를 유출한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 2015년엔 아웃핏 관계자가 자신에게 30만 달러를 빚진 시카고 교외 멜로즈 파크 시장의 조카를 보복 폭행하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연방차장검사 게리 샤피로는 "(아웃핏이) 약 100년 동안 정치인, 경찰, 판사, 기업인들과 인맥을 쌓아왔다."라고 지적했다. # 과거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과의 교수이자 알 카포네 시대를 직접 목도한 찰스 미리엄은 시카고를 위부터 아래까지 완벽히 부패한 미국 유일의 도시라고 했다. 이러한 부패의 구심점이 바로 아웃핏이라고 여겨진다. 이들은 시카고에서 시작한 전미 규모 노조인 LIUNA 로컬 1번, 5번, 8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1번 로컬 회장 빈센트 솔라노와 5번 로컬 회장 알프레드 필로토는 아예 아웃핏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들이었다. 노조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들도 아웃핏과 가까웠다.
아웃핏 두목(Boss) 존 디프론조 (사진)의 제수(弟嫂)가 소유주로 있는 D&P 건설사는 2000년대 중반까지 올스테이트 보험사, 시카고 공원지구, 쿡 카운티 법원, 일리노이 대학교, 여러 건설사 및 유명 식료품점 체인들과 계약을 맺은 최고의 폐기물관리사로 알려져 있었고 2015년까지 시카고의 공립학교 공사 #를 독점으로 맡고 있었다. 2017년에 미국에서 7번째로 큰 식료품 협동조합으로 연간 매출액이 20억 달러가 넘었던 시카고의 중앙잡화협동조합(Central Grocers Cooperative)은 100년을 일기로 파산신청을 했다. 관계자 조셉 포스코에 의하면, 협동조합이 몰락한 이유는 조직범죄 쪽 이사진 때문이고 그중에는 아웃핏과 결탁한 이사가 최소 3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시카고 아웃핏 두목 존 디프론조를 다룬 2009년 뉴스
사무엘 칼리시의 뒤를 이어 1996년부터 약 18년간 두목(Boss)으로 재직한 존 디프론조가 건강상 이유로 은퇴하고 그 뒤를 살바토레 드로렌티스 (사진)가 이었다.[163]
시카고 아웃핏 두목 살바토레 드로렌티스를 다룬 2018년 뉴스
아웃핏 소속 암살자 출신 프랭크 컬로타의 2019년 인터뷰에 의하면, 뉴욕 5대 패밀리와 시카고 아웃핏의 가장 큰 차이점은 뉴욕은 5명의 두목이 있는 반면, 시카고엔 1명의 두목이 있는 점이라고 한다. #
시카고 아웃핏 소속 추종세력으로 활동한 일본계 미국인 켄 에토 시카고 아웃핏 고위 간부의 고리대금 협박전화 육성
시카고 아웃핏 부두목 조셉 안드리아키의 사망 소식을 다룬 2024년 뉴스

3.2. 필라델피아 패밀리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50명, 추종세력(Associate): 100명 이상 # 과거에는 브루노 패밀리 혹은 스카르포 패밀리라고 불렸다. 안젤로 브루노 (사진)가 두목(Boss)으로 재직하던 1961년부터 1980년까지는 위원회에 의석이 있었다. 1980년에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약 21년간 패밀리를 이끌던 안젤로 브루노가 살해된 뒤[164] 1980~90년대에 패밀리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항쟁이 벌어졌다.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안젤로 브루노 살인사건을 다룬 1980년 뉴스
혼란기가 계속되던 중, 니코데모 스카르포 (사진) 같은 두목은 시카고 아웃핏의 예를 좇아서 필라델피아 애틀랜틱시티에서 벌어지는 모든 범죄활동에 세금을 매기기로 하는 등 전에 없던 정책을 고수하기도 했다.[165]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니코데모 스카르포의 1982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20년 가까이 패밀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권력을 잡은 두목들이 조직 내 알력 다툼으로 암살 당하거나[166], 무분별한 살인으로 덜미를 잡혀 종신형에 처해지거나[167], 오메르타를 깨고 정부 측 증인이 되는 등[168] 혼란의 시기를 거친다.
1990년대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약 20년 동안 이어진 치열한 내부 항쟁과 연방정부의 조직범죄와의 전쟁 결과 필라델피아 패밀리는 30명 이상의 정규조직원과 추종세력이 살해되었고 전체 정규조직원의 절반에 가까운 20여 명이 수감 중이었으며 270명 이상이었던 추종세력 숫자는 100명 대로 줄어들었다. 특히 애틀랜틱시티 내에서의 조직 영향력이 뉴욕 마피아에 밀려 사실상 사라졌다.[169] 1980년대에 조직을 배신하고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마리오 리코베네가 증인보호 프로그램에서 제외된 뒤 1993년에 보복으로 살해되거나 1995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필라델피아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존 비시의 동생 윌리엄 비시가 마피아 재판이 열리는 당일에 보복으로 살해되는 등 최종적으로 조셉 멀리노가 항쟁에서 승리한 뒤 당대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리보리오 벨로모의 후원을 등에 업고 패밀리를 장악했다. 이후 멀리노는 1999년에 그동안의 항쟁에 대한 대가로 약 12년간 복역한다. 멀리노 수감 이후 조셉 리감비 (사진)가 두목 대행을 맡아 지역 내 여타 범죄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피하며 조용히 사업을 전개했다. 조직을 다시 한번 전성기로 이끈 리감비의 재직 기간 동안 10여 명의 정규조직원이 출소해 빈자리를 채웠으며 2007년에는 애틀랜틱시티 카지노에서 필라델피아 패밀리가 연루된 6000만 달러 규모의 스포츠 도박 사업이 적발되기도 했다. # 리감비는 10년 넘게 아주 안정적으로 필라델피아 마피아를 이끈 인물로서 과거의 안젤로 브루노와 비견된다. 2011년에 패밀리 두목 조셉 멀리노가 출소하면서 리감비는 뒤로 물러났다.[170]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대행 조셉 리감비를 다룬 2011년 뉴스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조셉 멀리노를 다룬 2016년 뉴스
패밀리의 알려진 주요 사업으로 스포츠 도박, 숫자 도박, 비디오 도박, 고리대금, 갈취, 단순 절도, 바이커 갱단과 제휴하는 마약(특히 필로폰) 밀매가 있다. 2020년에 패밀리의 전 부두목(Underboss) 필립 레오네티가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공개 인터뷰를 가졌다. # [인터뷰_내용_요약] 필라델피아 마피아 조직원들이 서로 볼키스를 나누는 장면(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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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 패밀리 단체 사진[172]
2024년 9월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에 의하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셜 미디어 활동을 이어가던 조셉 멀리노가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주도로 파문되어 마피아로서의 모든 권리와 책임을 잃었고 멀리노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조셉 리감비의 조카인 조지 보르게시 (사진)가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Boss)이 되었다고 한다. #

3.3. 디트로이트 파트너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11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40~50명 # 금주법 시기엔 도시 내 범죄조직 중 2등 조직으로 있다가 유대계 갱단 '퍼플 갱'이 해체된 후 1933년에 도시를 장악한다. 과거에는 제릴리 패밀리라고 불렸다. 조셉 제릴리 (사진)가 두목(Boss)으로 재직하던 1961년부터 1977년까지는 위원회에 의석이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 중 하나인 지미 호파 실종사건에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와 함께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트로이트 파트너십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 그 규모가 감소했을지언정 역사상 단 1명의 정규조직원만 정부 측 증인이 되는 등 큰 풍파를 겪지 않은 상당히 안정된 마피아 패밀리로써 여전히 미시간 주의 모든 범죄조직을 통틀어 최고의 집단으로 여겨진다. 디트로이트 마피아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화로 트루 로맨스가 있다. 제릴리의 조카 잭 토코 (사진)가 1979년부터 약 35년간 두목으로 재직하다 2014년에 사망했다.
디트로이트 파트너십을 다룬 1977~96년 뉴스·수사기관 기자회견
이후 잭 토코의 뒤를 이은 인물은 지미 호파 실종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디트로이트 파트너십의 전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앤서니 지아칼로네 (사진)의 조카 잭 지아칼로네 (사진)다.[173] 2021년 잭 지아칼로네는 8년 전 땅콩 알레르기 쇼크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딸에 대한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는 이유로 병원을 상대로 6000만 달러 규모의 소송을 제기하여 295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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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변호인과 함께 민사재판을 지켜보는 디트로이트 파트너십 두목 잭 지아칼로네

3.4. 데카발칸테 패밀리

뉴저지 주 뉴어크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04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40명, 추종세력(Associate): 50명 이상 # 패밀리 이름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두목(Boss)이었던 샘 데카발칸테 (사진)의 이름을 땄다.
데카발칸테 패밀리 두목 샘 데카발칸테를 다룬 1977년 뉴스
인접한 뉴욕 5대 패밀리와 유대가 있으며 미드 소프라노스와 게임 GTA IV 페고리노 패밀리에 모티브를 제공한 조직으로 유명한데, 실제 패밀리의 추종세력이 소프라노스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 이들은 뉴욕 패밀리들과 협력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멸시를 당했는데, 위원회의 뉴욕 두목들은 데카발칸테 패밀리가 정규조직원 입단식을 치르며 테이블에 권총을 올려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이러한 입단을 부정행위로 판결했다고 전해지며 1990년대에는 뉴욕 패밀리들의 압박으로 '더 이상 뉴욕 주민을 정규조직원으로 입단시키지 않고 뉴저지 주민만을 입단시킨다.'라는 내용의 합의를 했다. 2004년 보고서에 의하면 몇몇 데카발칸테 패밀리 구성원들은 뉴욕의 감비노 패밀리나 제노비스 패밀리 구성원들과 제휴나 교류가 있지만, 그러한 연계는 집단적인 조직 대 조직 간 제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관계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뉴저지주를 넘어 뉴욕시, 코네티컷주, 플로리다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데카발칸테 패밀리 두목 지오바니 리지를 다룬 1983년 뉴스
1982년에 은퇴한 샘 데카발칸테의 뒤를 이은 지오바니 리지 (사진)는 1990년에 수감되어 2012년에 출소할 때까지 약 22년간 교도소에서 조직을 관리했다. 당시 리지가 수감되자 두목의 대리인이 된 부두목(Underboss) 존 다마토는 시간이 흐르자 스스로 두목으로 자칭하는 오만함을 보였고 패밀리의 돈을 횡령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동성애 행각이 폭로되어 1992년에 처형되었다.[174] 이후 리지의 수감 기간 동안 지아코모 아마리(Giacomo Amari)[175]-조셉 미란다(Joseph Miranda)-프란시스코 과라치 (사진) 등이 연달아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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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 데카발칸테 패밀리 단체 사진[176]
이후 패밀리 두목 리지가 2015년에 사망하고 두목 대행을 맡았던 과라치도 이듬해 61세로 급사하면서 찰스 마주리 (사진)가 두목이 되어 패밀리의 주도권을 잡았다.

3.5. 페트리아카 패밀리

뉴잉글랜드 지방을 기반으로 프로비던스 파벌과 보스턴 파벌로 나뉘어 활동하는 마피아 조직. (2012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30명 # 패밀리 이름은 1954년부터 1991년까지 두목(Boss)이었던 페트리아카(Patriarca) 부자(父子)의 이름을 땄다.[177]
페트리아카 패밀리 두목 레이먼드 페트리아카의 연방하원의회 청문회를 다룬 1972년 뉴스
보스턴 파벌은 1970~90년대에 아일랜드 갱인 윈터 힐 갱단과 대립했다. [원터_힐_갱단] 이들은 약 5억 달러 규모의 미국 역사상 최대의 예술품 도난사건인 1990년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 사건의 배후로 추정되며 2021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것은 강도다: 세계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2019년에는 약 3000만 달러에 달하는 페트리아카 패밀리의 범죄수익을 훔친 도둑들을 다룬 실화가 겟 머니란 영화로 제작되었다.
페트리아카 부자가 물러난 후[179] 프랭크 살렘이 다음 두목 후보로 떠올랐는데 살렘을 반대하던 행동대장(Caporegime) 조셉 루소는 1989년 안젤로 머큐리오를 사주하여 살렘을 폭행하기도 했다. 내부 파벌 싸움은 결국 뉴욕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의 중재로 화해를 한다. 1991년 계약에 따라 니콜라스 비앙코가 잠깐 두목을 하고 조셉 루소가 상담역(Consigliere)이 됐다. 비앙코는 살렘 충성파였고 별건으로 구속되어 바로 물러난다. 1991년 말 다음 두목이 된 프랭크 살렘 시대에 보스턴 파벌이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파벌싸움으로 치열한 내부 투쟁이 있었고, 1995년 99레스토랑에서 일어난 4명이 죽는 참사로 살렘은 체포된다.
99레스토랑 사건을 다룬 1995년 뉴스
프랭크 살렘은 한때 윈터 힐 갱단 두목 제임스 벌저와 우호관계였으나 그와 스티븐 플레비가 FBI 정보원인 걸 알고, 벌저에 대한 증언을 하는 정부 측 증인이 되어 조기 석방된다.[180] 한편, 살렘이 체포되자 1996년에 프로비던스 파벌의 루이지 마노키오 (사진)가 두목이 되어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다 2009년에 은퇴한 뒤[181] 무고한 살인죄로 약 33년의 복역을 마치고 2001년에 출소한 보스턴 파벌의 피터 리모네 (사진)가 두목이 되어 내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채 대리인을 내세우며 조용히 조직을 이끌다 한차례 도박업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이후 2017년에 사망했다.[182]
페트리아카 패밀리 두목 피터 리모네와 그의 심복들을 다룬 2010년 뉴스 은퇴한 페트리아카 패밀리 두목 루이지 마노키오를 다룬 2011년 뉴스
이후 피터 리모네의 후임은 보스턴 파벌의 카르멘 디넌지오 (사진)로 알려졌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페트리아카 패밀리 조직원들을 다룬 2014년 뉴스 페트리아카 패밀리 부두목 에드워드 라토의 사망 소식을 다룬 2024년 뉴스[183]

3.6. 버팔로 패밀리

뉴욕주 캐나다 국경지대 도시 버팔로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18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30명 # 과거에는 마가디노 패밀리라고 불렸다. 일명 장의사(The Undertaker)로 불린 초창기 두목(Boss) 스테파노 마가디노 (사진)의 지도력과 밀주 유통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 아래 금주법 시대에 큰 성장을 했다. 이를 발판 삼아 1931년 위원회 창립 당시, 마가디노는 의석을 가진 7명의 두목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버팔로 패밀리 조직원들의 1950년대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1974년 마가디노의 사망 이후 두목 자리를 두고 10여 년간 내부 항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로 인해 패밀리는 위원회에서 의석을 잃었다. 2006년에 아버지 조셉 토다로 (사진)의 뒤를 이은 조셉 토다로 주니어 (사진)가 패밀리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캐나다의 루피노 패밀리 및 파팔리아 패밀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추정되며 그 두 조직은 사실상 버팔로 패밀리의 분가 조직이다.
2017년에 버팔로 패밀리 두목 조셉 토다로 주니어가 캐나다 국적의 도메니코 비올리를 부두목(Underboss)으로 임명하기 위해 위원회와 상의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비올리가 부두목 자리에 오르기 위해 30명 이상의 경쟁자를 물리쳤다고 자랑하는 육성 역시 수사기관 도청기에 포착되었다. 수사기관은 비올리의 부두목 임명 소식이 뉴욕시의 보난노 패밀리, 제노비스 패밀리, 콜롬보 패밀리에 전달된 것 역시 확인했으며 마약 유통 혐의로 비올리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당시 유명 마피아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주연배우 5명의 친필 사인이 적힌 포스터를 발견하기도 했다. #
버팔로 패밀리는 2017년과 2020년에 발생한 캐나다의 이탈리아계 마피아 거물인 무시타노 형제 살인사건의 배후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으며 2010년대부터 벌어지고 있는 캐나다의 피비린내 나는 마피아 항쟁에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2017년 안젤로 무시타노 살인사건 현장 CCTV 영상 팻 무시타노 살인사건을 다룬 2020년 뉴스
2019년에 버팔로 패밀리에 매수된 DEA 요원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
마피아 조직원들은 조셉 토다로 주니어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버팔로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될 수 없으며 버팔로의 마피아들은 토다로 주니어 휘하에 있거나 그게 아니면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암흑가에서의 그의 영향력을 묘사했지만 토다로 주니어 본인은 대외적으로 라 노바라는 상호의 유명 피자 체인을 운영하며 조직범죄와의 연관설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치즈와 페퍼로니에 대한 훌륭한 요리법을 원한다면 말해주겠다"라고 답했다. #

3.7. 클리블랜드 패밀리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20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10~15명 # 과거에는 스칼리시 패밀리라고 불렸다. 존 스칼리시 (사진) 같은 두목들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패밀리를 관리했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도시 내 노조 지배권을 두고 대니 그린(Danny Greene)이란 아일랜드계 갱스터와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그린은 마피아와 동업관계에 있었지만 결국 전면전을 벌이게 되는 인물이다. 당시 항쟁이 진행됨에 따라 클리블랜드에서 40여 개의 폭탄이 터져 당대 언론은 클리블랜드를 미국의 폭탄 도시(Bomb City U.S.A.)라고 불렀다. 그린과 클리블랜드 마피아의 항쟁을 다룬 영화로 2011년에 제작된 킬 더 아이리쉬맨이란 영화가 있다.[184]
클리블랜드 패밀리 수뇌부를 다룬 1977년 뉴스 대니 그린과 클리블랜드 패밀리의 항쟁을 다룬 1977년 뉴스
결국 그린의 폭사로 항쟁은 끝이 나지만, 패밀리는 1980~90년대에 다른 도시의 마피아 조직과 마찬가지로 FBI의 집중적인 수사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185]
이후 조셉 이아코바치 (사진)가 약 12년간 두목(Boss)으로 재직하면서 정부의 눈길을 끄는 살인 등 강력 범죄를 최대한 배제하고 화이트칼라 범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1995년에 뉴저지 은행에서 약 300만 달러를 사취한 혐의로 약 30개월간 복역한 경력이 있으며 그의 지도하에 클리블랜드 패밀리는 뉴저지 주 데카발칸테 패밀리, 시카고 아웃핏과 강한 관계를 맺고 디트로이트 파트너십와의 관계를 재설정했다.[186] 이후 2005년에 패밀리를 계승한 러셀 파팔라도 (사진)의 지도하에 조직 재건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2020년에 클리블랜드 패밀리는 연간 3000만 달러 상당의 불법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알려졌다. #

3.8. 로스앤젤레스 패밀리

미 서부 최대의 도시이자 미국 제2의 도시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03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15~20명 # 과거에는 드라냐 패밀리라고 불렸다. 도시의 규모와 경제력을 생각했을 때 마피아 패밀리가 번성했을 만도 하지만, 과거부터 캘리포니아 주의 마피아는 지역 규모에 비해 세력이 약해 미키 마우스 마피아로 불린 조직이다.[187] 이들은 과거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구역임에도 시카고 아웃핏이 허가 없이 영화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못했다. 로스앤젤레스 패밀리가 이러한 것은 지역 내 이탈리아계 시민의 비율이 낮아 지역 커뮤니티 내에 영향력이 적고, 초기 패밀리 두목(Boss)이었던 잭 드라냐 (사진)가 다른 패밀리들의 영역 침범을 방치하고 충돌을 피해서 얕보였다는 게 정설이다.[188] 오늘날 로스앤젤레스 패밀리는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지역의 매춘, 도박, 나이트클럽, 마약 거래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 오히려 현재의 LA는 전통적인 조직범죄 활동보다는 다양한 스트리트 갱단의 활동이 아주 활발하다.[189]
2000년대 로스앤젤레스 패밀리 감시 영상
2012년에 오랫동안 로스앤젤레스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피터 밀라노 (사진)가 사망한 뒤 패밀리의 잔존 세력과 사업은 뉴욕 패밀리들에 흡수되었다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밀라노의 부두목(Underboss)으로 알려진 토마소 감비노 (사진)가 패밀리를 정상 계승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토마소 감비노는 뉴욕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로사리오 감비노(Rosario Gambino)의 아들로,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급 간부들인 존 감비노 (사진) 프랭크 칼리의 사촌이다.[190] 2001년 토마소 감비노는 아버지 로사리오 감비노의 가석방을 위해 현직 대통령 빌 클린턴의 이복형제인 로저 클린턴 주니어에게 현금 5만 달러와 롤렉스 시계를 뇌물로 준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된 바 있다. # 결국 로사리오 감비노의 가석방은 무산되었으나 약 5년 후인 2006년에 가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191]
FBI 왕립 캐나다 기마경찰의 정보원들에 따르면 2018년 9월 13일 캐나다 해밀턴에서 살해된 # 마피아 관계자 앨버트 이아바론은 살해되기 2주일 전 로스앤젤레스 패밀리에 정규조직원으로 입단했다고 한다. 한 수사관은 로스앤젤레스 패밀리 두목 토마소 감비노가 이아바론을 입단시킨 이유는 그로 하여금 뉴욕 두목들을 위한 캐나다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사이 연락책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지만 이는 전통적으로 캐나다 마피아와 미국 마피아 사이 연락책 역할을 해온 버팔로 패밀리의 두목 조셉 토다로 주니어 (사진)를 화나게 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토다로 주니어의 설계로 이아바론이 제거되었다고 말했다. 상술했듯 이아바론이 살해된 해밀턴에는 버팔로 패밀리의 분가 조직 격인 루피노 패밀리와 파팔리아 패밀리가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다른 정보원은 토다로 주니어는 이아바론의 사망에 크게 관련이 없다고 그 이론을 부정했다. # 현재 토마소 감비노는 대외적으로 부동산 개발업자 행세를 하며 와인 사업도 병행하는데, 그의 와인 사업과 관련된 2021년 인터뷰 기사가 존재한다. #

3.9. 캔자스시티 패밀리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2015년 기준) 정규조직원(Made Member): 약 12명 # 과거에는 시벨라 패밀리라고 불렸다. 이들의 사업은 주로 도박과 고리대금이 중심이며 이외에도 매춘, 마약, 스트립클럽 업계를 대상으로 보호비를 갈취한다고 알려져 있다. 패밀리의 두목급 간부였던 칼 시벨라는 영화 카지노에서 묘사된 것처럼 시카고 아웃핏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전대미문의 횡령을 하다 적발되어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캔자스시티 패밀리 두목 대행 칼 시벨라의 1981년 인터뷰
니콜라스 시벨라 (사진), 칼 시벨라 형제의 뒤를 이어 패밀리의 두목이 된 윌리엄 캠미사노가 1995년에 사망하자 칼 시벨라의 아들 앤서니 시벨라 (사진)가 패밀리를 이었지만 그는 1992년에 수감되어 약 5년간 복역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자(代父) 존 소르티노 (사진)가 약 2년간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다. 이후 2006년에 앤서니 시벨라가 사망하자 소르티노가 패밀리를 이었다. 정부 측 증인이 된 뉴욕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의 2019년 인터뷰에 의하면 마피아가 여전히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도시로 뉴욕, 시카고와 함께 캔자스시티를 거론했다. # 2024년에 제작된 드라마 털사 킹 시즌 2에 캔자스시티 마피아인 베빌라쿠아 패밀리가 등장한다.

3.10. 트라피칸테 패밀리

플로리다 주 탬파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192] 탬파 마피아라고 불리기도 한다. 패밀리 이름은 1940년부터 약 50년간 두목(Boss)이었던 트라피칸테 부자(父子)의 이름을 땄다.[193]
트라피칸테 패밀리 두목 산토 트라피칸테 주니어의 연방하원의회 청문회를 다룬 1978년 뉴스
트라피칸테 주니어의 뒤를 이어 1987년에 빈센트 로스칼조 (사진)가 패밀리를 이어받지만, 현재는 플로리다 주로 진출한 뉴욕 마피아 세력의 영향력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다.[194][195]

3.11. 피츠버그 패밀리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라로카 패밀리라고 불렸다.
피츠버그 패밀리를 다룬 1978년 뉴스
1984년에 사망한 존 라로카 (사진)에게 패밀리를 물려받은 마이클 제노비스[196]가 20년 넘게 두목(Boss)으로 재직하다 2006년에 사망한 뒤 존 바자노 주니어[197], 토마스 시안커티[198]가 차례로 패밀리를 이었다. 2013년 피츠버그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이 연루된 도박업 혐의가 적발된 사례 # 등을 통해 암암리에 패밀리 계보를 이어오며 지역 내 불법 사업에 관여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3.12. 세인트루이스 패밀리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조르다노 패밀리라고 불렸다. 캔자스시티 패밀리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고 알려진 두목(Boss) 앤서니 조르다노가 1960년부터 약 20년간 패밀리를 관리했고 그가 사망한 뒤 존 비탈레[199], 매튜 트루피아노 주니어[200], 앤서니 페리노[201]가 차례로 패밀리를 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의 독자적인 조직 계보는 알려진 바 없다.
1980년대 세인트루이스 패밀리 내부 항쟁을 다룬 2022년 뉴스

3.13. 밀워키 패밀리

위스콘신 주 밀워키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발리스트리에리 패밀리라고 불렸다. 초창기부터 시카고 아웃핏에서 뻣어나온 가지로 평가되던 패밀리다. 1960~90년대 초까지 패밀리 두목(Boss)이었던 프랭크 발리스트리에리 (사진)는 영화 카지노에서 묘사된 것처럼 시카고 아웃핏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전대미문의 횡령을 하다 적발되어 약 8년간 수감되기도 했다. 당시 피터 발리스트리에리가 아버지 부재중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으며 199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자신이 두목이 되어 본인이 사망하는 1997년까지 패밀리를 이었다. 이후 조셉 카미니티[202], 피터 피치우로[203]가 차례로 패밀리를 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의 독자적인 조직 계보는 알려진 바 없다. 한편, 패밀리의 남아있는 세력은 시카고 측에 흡수되었고 시카고 아웃핏이 밀워키 불법 사업의 지배권을 쥐고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
밀워키 패밀리의 역사를 다룬 2022년 뉴스

3.14. 뉴올리언스 패밀리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마셀로 패밀리라고 불렸다. 미국 마피아가 최초로 생겨난 곳은 뉴욕이 아닌 뉴올리언스로, 최초에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미국으로 들어온 도시다.[204] 1947년에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된 카를로스 마셀로는 거대한 범죄 제국을 꾸려나갔고, 훗날 미 의회에 의해 케네디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고발되기도 했다.
뉴올리언스 패밀리 두목 카를로스 마셀로의 1959년 연방상원의회 청문회
1993년 마셀로의 죽음 이후 패밀리는 다른 마피아 패밀리들과 비 마피아 범죄조직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눈에 띄게 세력이 약화되었고, 현재는 조직 계보가 끊긴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대 중반에 두목 앤서니 카롤라(Anthony Carolla)와 정규조직원들인 프랭크 갈리아노(Frank Gagliano), 필립 리주토(Philip Rizzuto)가 사망하는데 FBI에서는 이들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피아 조직이 숨을 거뒀다고 평가한다. # 게임 마피아 3의 배경이 뉴올리언스이며 뉴올리언스 마피아가 등장하는 영화로 조엘 슈마허 감독의 의뢰인이 있다.

3.15. 버팔리노 패밀리

펜실베이니아 주 북동부에 위치한 피츠턴, 스크랜턴, 윌크스-배리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패밀리 이름은 1950년대부터 1994년까지 두목(Boss)이었던 러셀 버팔리노 (사진)의 이름을 땄다. 지리적으로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중간에 위치해있고 중소규모의 조직이었기에 이 패밀리의 두목들이 마피아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82년 지미 호파와의 관계에 대해 심문 받는 버팔리노 패밀리 두목 러셀 버팔리노의 모습
버팔리노의 후계자 윌리엄 디엘리아 (사진)는 2006년에 본인 재판의 증인 살해를 시도하다 적발된 뒤 9년 형을 선고받자 2008년에 오메르타를 깨고 정부 측 증인이 되어 포코노스의 한 카지노 소유주를 상대로 증언한다. 2012년에 전 펜실베이니아 주 조직범죄 수사관 제임스 카나비는 버팔리노 패밀리의 잔당은 뉴욕 패밀리들에 흡수되었고, 펜실베이니아 주 북동부의 독립된 마피아 패밀리는 독자적인 조직 계보가 끊겨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했다. #

3.16. 로체스터 패밀리

뉴욕 주 로체스터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발렌티 패밀리라고 불렸다. 1950년대에 콘스탄체 발렌티가 버팔로 패밀리의 분가 조직으로 패밀리를 결성했다. 1970년에는 일찍이 형제 콘스탄체 발렌티의 뒤를 이은 프랭크 발렌티가 버팔로 패밀리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프랭크 발렌티는 조직범죄로 쏟아지는 수사기관의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유대교 회당 3곳과 흑인 교회 2곳을 포함한 건물 9곳에 폭탄을 터트리기도 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를 최소화한 탓에 부상자는 1명에 불과했다.
수사관에게 항의하는 로체스터 패밀리 두목 프랭크 발렌티의 모습
1972년에 프랭크 발렌티가 은퇴하면서 사무엘 루소티가 패밀리를 이었지만 1970년대에 내부 항쟁에 휘말리면서 많은 사상자와 유죄판결을 낳았다. 1990년대에 이르러 패밀리 구성원 절반은 뉴욕 보난노 패밀리에, 나머지 절반은 버팔로 패밀리에 합류하면서 조직 계보가 끊어졌다고 판단된다. #

3.17. 샌프란시스코 패밀리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란자 패밀리라고 불렸다. 초창기 프란체스코 란자가 지역 내 리틀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패밀리를 결성했다. 프란체스코 란자의 아들 제임스 란자 (사진)가 1961년부터 두목(Boss)을 맡으면서 15~20명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이끌며 샌프란시스코 시장과의 친분 및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와의 연계로 라스베이거스 등지에 진출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 후반 제임스 란자는 언론에 자신을 샌프란시스코 마피아 두목으로 소개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6년에 제임스 란자가 사망하면서 조직 계보가 끊어졌다고 판단된다.
1970~80년대 샌프란시스코 리틀 이탈리아의 모습

3.18. 산호세 패밀리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세리토 패밀리라고 불렸다. 이들은 뉴욕 보난노 패밀리와 함께 산호세 지역의 조직범죄 활동을 통제한 두 개의 라 코사 노스트라 패밀리 중 하나였다. 초창기 두목(Boss) 오노프리오 시오르티노의 뒤를 이은 조셉 세리토가 약 25명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을 이끌며 1978년에 사망할 때까지 패밀리를 이었다. 세리토의 뒤를 이은 안젤로 마리노는 치즈 회사를 운영했는데, 한창때 캘리포니아 주와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 내 치즈 유통량의 85%를 통제하기도 했다. 이후 마리노는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되는 등 홍역을 치르다 1983년에 사망하고 그의 부두목(Underboss)이었던 엠마누엘 피글리아가 2009년에 사망할 때까지 패밀리를 이었으나 현재는 조직 계보가 끊어졌다고 판단된다.

3.19. 콜로라도 패밀리

콜로라도 주 덴버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스맬던 패밀리라고 불렸다. 금주법 시기 피트·샘 칼리노 형제가 이끄는 주류 밀매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이후 주세페 로마가 패밀리를 이었는데, 이 시기 라 코사 노스트라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로마는 갈취, 고리대금, 마약, 도박 등지로 패밀리 사업을 확대하던 중 1933년에 총격을 받고 살해되는데, 이 사건의 배후가 스맬던 삼형제로 알려져 있다. 현지 언론에서는 1992년에 사망한 유진 스맬던의 뒤를 이은 형제 클라렌스 스맬던이 2006년에 사망하면서 조직 계보가 끊어졌다고 판단한다. #

3.20. 댈러스 패밀리

텍사스 주 댈러스를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과거에는 시벨로 패밀리라고 불렸다. 초창기 카를로·조셉 피라니오 형제가 패밀리를 이끌다 1956년경 조셉 시벨로 (사진)가 두목(Boss)이 되었다.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불모지인 텍사스 지역을 연고로 한 만큼 세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 실행된 장소가 댈러스이며,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를 살해한 지역 나이트클럽 사장 잭 루비가 시벨로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미 연방하원 암살특별위원회(HSCA)가 밝히기도 했다. 그 후로도 패밀리가 이어지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는 조직 계보가 끊어졌다고 판단된다.

3.21. 콜라쿠르시오 조직

워싱턴 주 시애틀을 기반으로 한 마피아 조직. 시애틀 패밀리(Seattle Family)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에 프랭크 콜라쿠르시오 (사진)[205]가 중심이 되어 시애틀 일대에서 담배, 자판기, 매춘 사업 등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뉴욕 보난노 패밀리와 제휴하는 모습이 수사기관에 목격되었다. # 2003년경 시애틀의 유흥과 매춘 업계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어 2009년 프랭크 콜라쿠르시오의 조카, 측근, 운전기사 등이 공갈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프랭크 콜라쿠르시오의 아들 프랭크 콜라쿠르시오 주니어도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년, 900만 달러에 달하는 스트립클럽 관련 자산 등에 대한 몰수 명령을 받았다. # # 이후 프랭크 콜라쿠르시오는 2010년에 사망했다.
2008년 워싱턴서부지구 연방검사장의 콜라쿠르시오 조직 기소 기자회견

4. 다른 도시의 마피아 주요 인물

빈첸조 콜로시모[206] 시카고 아웃핏의 초대 두목(Boss)으로 칼라브리아 출신의 이민자다. 미국식 이름으로 제임스 콜로시모라 불리기도 했으며 덩치가 커서 빅짐(Big Jim) 콜로시모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시카고에서 거대한 성매매 산업과 도박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뉴욕의 자니 토리오를 데려와서 부두목(Underboss)으로 삼았으나 금주법 시기가 오자 밀주산업에 뛰어들자는 젊은 조직원들의 요청을 거부해 불만을 샀다. 이는 성매매와 도박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정부와 옥신각신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구식 마인드를 싫어했던 자니 토리오와 그의 사주를 받은 프랭키 예일에게 암살당했다. 비록 허망하게 죽었으나 인망이 좋고 평판이 나쁘지 않아 장례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자니 토리오[207] 여우란 별명을 가진 인물로 시카고 아웃핏 초대 두목(Boss) 빈첸조 콜로시모 (사진)의 암살을 교사하고 자신이 두목이 되었다. 아일랜드 갱단과의 항쟁에서 저격을 받고 카포네에 조직을 물려준 뒤 은퇴하였다. 그 후 최고 고문 비슷한 지위에 있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알 카포네[208] 별명 스카페이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젠나 형제들 (사진) 시칠리아 마르살라 출신의 6형제로 안젤로,안토니오,마이크,피터,샘,빈첸조의 형제들이 뭉쳐서 만들었다. 금주법 시기 밀주 조직으로 위세를 떨쳤다. 재미시칠리아 향우회인 우니오네 시칠리아나를 장악하고 위스키를 대량 밀조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시카고를 3분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처음엔 시카고 아웃핏(사우스 사이드 갱)하고도 사이가 안좋았으나 이내 아일랜드 갱단인 노스사이드갱과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아웃핏과 손잡고 노스사이드갱 두목(Boss)인 딘 오배니언 암살에 일조했다. 그러나 이에 격분한 아일랜드 갱단의 후계자인 하이미 와이스,조지 모랜, 빈센트 드루치에게 계속 공격당해 안젤로가 살해당하고 그들의 백업을 받아 우니오네 시칠리아나 회장으로 있던 사무조 아마투나도 살해 된다. 이후 마이크가 빈센트 드루치를 암살하려고 하나 실패하고 오히려 주변에 있던 경찰들의 총격을 받고 살해당한다. 이후 안토니오도 아일랜드 갱단의 습격을 받고 사망했다. 아일랜드 갱단은 딘 오배니언 암살에 젠나 형제들이 관련 된 것으로 확신하고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기 때문에 나머지 삼형제는 공포에 질려 시카고를 떠나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이후 젠나 형제와 친했던 조셉 아이엘로가 두목에 올라 아일랜드 갱단과 화해하고 조직을 추스렸다. 그러나 이후 우니오네 시칠리아나에 간섭하려는 카포네와 사이가 안좋아저 서로 험악한 관계가 됐고 카포네를 독살-암살 하려다가 실패하고 뉴욕으로 도피했다. 이후 그의 부하들이 카포네측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한편 뉴욕에서 조 아이엘로는 카스텔람마레세 전쟁에 휘말렸고 이후에도 카포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1930년 시카고에 돌아왔다가 카포네의 지시를 받은 히트맨에게 총알세례를 받고 암살당한다. 사후 젠나 조직은 시카고 아웃핏에 흡수 된다.
프랭크 니티 (사진) 카포네의 오른팔인 동시에 공식적인 후계자. 카포네가 등장하는 영화인 언터처블에 동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실제 인물과 큰 연관성은 없고 이름만 따온 캐릭터다. 1943년에 마피아 두목(Boss)으로서는 특이하게(아마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폴 리카 (사진) 프랭크 니티의 뒤를 이어 시카고 아웃핏의 두목(Boss)이 된다. 이탈리아어에 유창했다. 갈취죄로 수감되기도 했다. 훗날 후계자 앤서니 아카르도와 최고 고문 역할을 하는 그림자 집행부(Shadow executive)를 이룬다. 성격적으로는 살면서 단 한 명의 애인도 두지 않았다고 알려진 아카르도와 떠들썩한 남자로 유명한 지앙카나의 중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리카는 너무 화려한 옷은 싫어했지만, 옷 잘 입는 건 좋아했으며 꽤 가정적인 남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1972년에 사망.
앤서니 아카르도 (사진) 말단 조직원 시절, 조직을 배신한 3명의 마피아를 야구 방망이로 살해하여 당시 두목(Boss) 알 카포네로부터 강타자(Joe Batters)라는 별명을 부여받았다. 그 뒤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며 폴 리카의 부두목(Underboss)으로 있다가 그의 뒤를 이어 약 10년간 시카고 아웃핏의 두목으로 재직했다. 국세청의 관심을 돌리고자 1957년에 샘 지앙카나에게 조직을 물려주고 원로가 된다. 이탈리아어에 유창했으며 전대 두목 폴 리카와 함께 지앙카나보다 더 상부인 그림자 집행부(Shadow executive)를 이루며 최고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체포 기록은 있지만 1992년에 86세로 사망할 때까지 약 70년의 마피아 인생을 통틀어 단 하루도 수감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아카르도는 20세기 시카고 조직범죄 세계의 진정한 흑막이자 정점으로 '두목 위의 두목'으로 묘사된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모든 합법적인 카지노에 자신의 슬롯머신을 사용하도록 했다. 법 집행기관에 의하면, 아카르도가 뉴욕 마피아와 만나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는 주로 시카고가 담당하고 애틀랜틱시티 카지노는 주로 뉴욕이 담당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했다고 한다. # 생전의 공식적인 직업은 시카고 양조장의 영업사원이었다. 유명한 일화로, 1978년 캘리포니아 주로 휴가를 떠난 아카르도의 교외 자택에 도둑이 들었다. 얼마 안 있어 3명의 도둑과 4명의 관계자들은 모두 목이 졸리고 목구멍이 절개된 시체로 발견되었다.[209] 1984년 미 국회 청문회에서 답변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존재한다. # 마피아나 라 코사 노스트라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의에 “잘 모릅니다 의원님.(No Sir.)”이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샘 지앙카나 (사진) 앤서니 아카르도의 후계자. CIA와 손을 잡고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하던 적이 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추측이 있다.[210] 세기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밀회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의외로 몇몇 단어를 제외하면 이탈리아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 아웃핏의 두목(Boss)이었지만 암살 대상자를 결정할 때는 폴 리카 및 앤서니 아카르도와 상의해야만 했다. 지앙카나는 1974년 미국 상원의회에서 피델 카스트로에 관한 CIA의 음모와 관련된 증거 제출을 요구받은 후 그것을 무시하고 피해 다니던 중 멕시코에서 체포되어 미국으로 호송되었는데, 마피아와 CIA 모두 지앙카나의 의중을 종잡을 수 없었기에 그의 입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존 로셀리의 폭로에 의하면 샘 지앙카나와 산토 트라피칸테 주니어가 카스트로의 암살에 적극적으로 나서 CIA를 도왔다고 한다. 2007년 기밀해제된 CIA 패밀리 쥬얼스 문서에 따르면 샘 지앙카나는 카스트로의 음식에 독극물을 타서 암살하는 방법을 CIA에 제시했다고 한다. 결국 1975년 의회 출석을 앞두고 괴한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당대 시카고 아웃핏 두목 조셉 아이우파(Joseph Aiuppa)의 측근과 CIA 국장 윌리엄 콜비(William Colby) 둘 다 "우리는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했다. 살해된 원인으로는 폭로를 두려워한 트라피칸테 주니어나 CIA가 손을 써서 암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지앙카나는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한다.
조셉 아이우파 (사진) 전직 웰터급 복서 출신으로, 앤서니 아카르도의 운전기사였다. 1971년에 시카고 아웃핏 두목(Boss)이 된다. 영화 카지노에 등장하는 리모 가지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 영화 속 내용처럼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전대미문의 월권을 행사하다 1986년에 적발되어 28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 검사 측에서 "국내 조직범죄 세계에서 아이우파보다 높은 인물은 없다. 다른 두목들은 그의 의견을 따른다. 그는 마피아 위원회의 구성원이다."라고 묘사했는데, 아이우파는 그 설명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유죄가 확정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형기의 대부분을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보냈다. 약 10년간 복역하고 1996년에 가석방된 그는 이듬해 사망했다.
존 로셀리 (사진) 본명은 필리포 사코로 일명 잘생긴 자니란 별명으로 불렸다. 시카고 아웃핏에 속해있으면서 알 카포네의 수하로 일했고, 이후 할리우드 노조를 조종하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운영에도 끼어들어 벌어들인 수익을 시카고로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 쿠바의 마피아 카지노들이 큰 타격을 받자, 샘 지앙카나, 산토 트라피칸테 주니어와 함께 CIA와 공모해서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는 작전을 추구했지만 실패했다. 1960년대에는 라스베이거스 프론티어 호텔의 미공개 자산을 분양해 10만 달러에 달하는 중개 수수료를 얻고, 그 돈을 바탕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소개로 들어간 플라이어스 클럽의 도박장에 사기도박판을 벌여 저명한 연예인들을 뒤통수치며 떼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67년 사기도박판 협력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수감됐다. 1973년 출소한 이후 상원 청문회에 피델 카스트로 암살 관련 증언을 할 것을 요구 받았다. 거기서 피델 카스트로 암살 관련 작전을 폭로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 직전 샘 지앙카나가 살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플로리다로 도피를 준비했다. 1976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 관련 증언을 위해 다시 한번 청문회에 소환됐다. 그러나 3개월 후 실종됐고, 얼마 뒤 플로리다 해안 비스케인 만에서 드럼통에 담긴 시체로 발견됐다. 살해된 이유로는 카스트로 청문회 폭로나 케네디 암살 음모에 휘말려서 살해됐다는 설이 있으며, 라스베이거스 도박 이익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아서 살해됐다는 설도 있다. 잘생긴 외모로 연예인들과 친분이 깊었으며, 항상 애국자로 자칭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 입대해서 복무 했고, 피델 카스트로 암살 작전도 애국적 의무로서 CIA와 협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셉 페리올라 (사진) 1986년에 조셉 아이우파가 수감되자 조직의 최고 고문인 앤서니 아카르도는 시카고 아웃핏 두목(Boss) 자리를 조셉 페리올라로 대체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심장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다. 1989년에 사망한다. 2005년 시카고 마피아 재판 과정에서 조셉 아이우파의 유죄판결에 책임을 지고 처형된 행동대원(Soldier) 앤서니 스필로트로 (사진) 살해 당시, 페리올라가 최고 책임자 자격으로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무엘 칼리시 (사진) 조셉 아이우파의 운전기사로 범죄 경력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마피아 전령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녀 '날개'라는 별명을 얻는다. 1986년 시카고 아웃핏 행동대원(Soldier) 앤서니 스필로트로 (사진) 살인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여겨진다. 1989년에 조셉 페리올라가 사망하자 두목(Boss)이 된다. 두목으로 재직 중 1996년에 여러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13년 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복역 중 사망했다.
존 디프론조 (사진) 일명 '코가 없는(No Nose) 디프론조'라고 불렸다. 그 이유로 21세 때 옷 가게에서 절도를 하고 유리창을 뛰어넘다 코의 일부가 베여졌기 때문이다. 그는 1952년에 발생한 후 미제로 남은 '정치인 찰스 그로스 살인사건'의 용의자였다. 1996년에 수감된 사무엘 칼리시의 뒤를 이어 조직을 장악한 그는 아주 성공적인 범죄지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1994년 이후로 단 한차례도 수감되지 않았다. 부하 조직원들은 디프론조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 이름을 얘기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는 수화로 대체했다. 당국은 디프론조의 지위가 마피아들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디프론조의 실명을 거론하며 두목(Boss)을 연루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005년에 'Operation Family Secrets'라는 시카고 아웃핏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기소가 있었지만 조직의 수괴인 그는 기소망을 피했다. 법 집행 소식통에 따르면 수집한 증거가 빈약했고 그들 역시 디프론조에 대한 소송에서 패소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디프론조가 왜 기소되지 않았냐는 언론의 질문에 FBI는 보도 금지령을 내리며 답변하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냐는 질문에 로스 라이스 FBI 대변인은 "그의 행방을 알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기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There is no reason for us to know his whereabouts because he hasn't been charged with anything.)"라고 답했다.[211] 알츠하이머의 영향으로 2014년에 일선에서 물러난 디프론조는 2018년에 89세로 사망했다. 생전의 그는 표면적으로 자동차 영업소를 운영했다. 사망 소식이 미국 방송국 뉴스에 나온 바 있다. #[212] 2020년에는 디프론조의 상담역(Consigliere)이었던 마르코 다미코가 84세로 사망했다. #[213]
카를로스 마셀로[214] 뉴올리언스 마피아 두목(Boss).
러셀 버팔리노 (사진) 자신의 이름이 붙은 버팔리노 패밀리를 약 35년간 이끌었던 인물. 청문회에 출석한 버팔리노가 프랭크 시런과 지미 호파에 관한 질의를 받는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 버팔리노는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조 페시가 연기한다.[스포일러]
조셉 멀리노[216]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Boss).

5. 미국 마피아의 고위 관계자(High-level Associate)

아널드 로스스틴 (사진) 유대계 폭력배의 대부 격으로 주세페 마세리아와 같이 사업을 했다. 러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의 멘토였다. 블랙삭스 스캔들에도 관여하여 월드 시리즈를 조작한 거물 도박사이기도 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등장인물 마이어 울프스하임의 모티브가 된 인물. 1928년에 총에 맞아 살해당한다.[217]
마이어 랜스키 (사진) 마피아의 회계사(Mob's Accountant)라 불린 암흑가의 아인슈타인. 유대계 폭력배 거물이자 러키 루치아노의 측근으로[218] 독자적인 조직을 거느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초창기 미국 마피아를 포함한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의 계획을 짠 사람. 최초로 폭력배들 중 스위스 은행 계좌를 생각해냈으며, 쿠바 진출 계획(비록 실패했지만), 전시 체제하에 미국 정부와 협력을 꾀하는 등 범죄 역사상 최고의 지략가였다고 한다. 영화 대부 하이먼 로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랜스키는 일생 동안 딱 한 번 1972년에 세금 포탈 혐의로 기소를 당하는데 연방 정부에서는 이마저도 혐의 입증에 실패한다.[219] 랜스키는 이스라엘로 도피했다가 무죄를 선고 받고 다시 귀환했다. 이후 마이애미에서 말년을 보내던 랜스키는 1983년에 사망했다. FBI에서는 3억 달러에 달하는 숨겨진 랜스키의 재산이 있을 거라고 추정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편, 랜스키의 전기 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오랜 취재와 연구 끝에 암흑가의 흑막이라는 랜스키의 이미지는 과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취재 과정에서 랜스키의 유족들이 고인이 남긴 재산이 5만 7천 달러에 불과하다고 증언했으며 랜스키는 서류상으로 거의 아무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를 연구한 전기 작가는 쿠바 혁명으로 카지노 사업이 실패하면서 랜스키가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고 주장했다.[220] 랜스키의 장애인 아들은 의료비도 없어 제노비스 패밀리 간부 빈센트 알로에게 도움을 받았고,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살레르노는 랜스키가 어떤 일을 하려면 반드시 빈센트 알로를 거쳐서 해야 했으며 독립적인 권력은 없었다고 했다.[221] 또한 랜스키가 이스라엘로 도피했을 당시 본인의 재산이 3억 달러라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부인하기도 했다. 다만 랜스키가 죽었을 때 빈센트 알로가 부인 테디에게 랜스키의 돈 12만 5천 달러를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222] 그러나, 랜스키를 수년간 연구해 온 마이애미 헤럴드의 행크 메식 기자는 랜스키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주변 사람들에게 있으며 "그는 사람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맨해튼 지방 검사 로버트 모겐타우는 "랜스키가 수십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명의로 많은 돈을 보관해 왔고 자신의 명의로 적은 돈을 소유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돈이 유족한테 전달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2010년에는 랜스키의 딸 산드라가 그녀의 아버지가 국세청과 문제가 있었던 1970년대에 형제에게 1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산드라는 아버지가 국세청과 문제가 생기자 형제에게 모든 걸 넘겼는데 가족들은 그 돈을 1500만 달러로 계산했지만 랜스키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산드라는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거의 없었으며 자신들이 수억 달러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소문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웃었다.[223] 어느 쪽 말이 맞든지 간에 확실한 사실은, 랜스키가 미국 조직범죄사의 거인이라는 것과 앞으로도 그가 얼마만큼의 돈을 어떤 형태로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2015년에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개선되자 그의 유족들이 쿠바 정부를 상대로 랜스키가 아바나에 건설한 리비에라 호텔 압수에 대한 보상을 요청하기도 했다. 1971년 마이어 랜스키가 이스라엘 언론과 인터뷰한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
벅시 시겔 (사진) 본명은 벤자민 시겔. 주세페 마세리아를 직접 살해한 4명의 암살자 중 하나. 유대인 혈통의 폭력배로,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유대계와 이탈리아계로 이루어진 독자적인 범죄조직을 거느렸다.[224] 라스베이거스를 사실상 만든 인물. 1947년에 카지노에서 수익이 안 나오자 성급한 동료들이 그 책임으로 총을 쏴서 살해했다(총알이 눈을 뚫고 지나갔다).[225][226] 아이러니하게도 시겔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라스베이거스가 활발하게 돌아갔는데, 그가 600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라스베이거스 최초의 호텔 플라밍고는 1991년까지 무려 1100억 달러의 이익을 창출한다. 시겔은 영화 대부 모 그린 캐릭터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 인물을 다룬 벅시라는 제목의 영화가 1992년에 제작되었다.
이노크 존슨 (사진) 애틀랜틱시티의 인물로 아일랜드 혈통의 인물. 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주인공인 너키 톰슨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는 갱스터로 마피아와 경쟁을 하면서 몰락하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갱 보스라기보다는 부패 정치인에 가까운 인물로 마피아들과 동업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적 흑막으로 시를 좌지우지 했다. 탈세로 체포되어 감옥에 갔지만 이후 풀려나와 애틀랜틱시티에서 여전히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살다가 1968년에 편안하게 사망했다.
범피 존슨 (사진) 러키 루치아노의 측근으로, 할렘의 흑인 조직폭력배 두목(Boss)이다. 미드 더 와이어에서 언급되기도 함.[227] 수많은 대중매체에 영향을 준 전설적인 흑인 폭력배.[228] 1968년에 사망했다.
니키 반스 (사진) 할렘의 흑인 조직폭력배 두목(Boss). 마약 혐의로 수감된 교도소에서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원들과 만나 친분을 쌓으며 그들로부터 범죄조직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다. 이후 마피아가 제공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유죄판결이 뒤집혀 출소했다. 그 후에도 마피아가 제공하는 마약을 유통하는 역할을 맡아 할렘의 지배적인 마약왕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위원회(The Commission)를 본떠 7명의 동업자들로 구성된 평의회(The Council)를 창설해 흑인 범죄조직으로는 이례적으로 조직을 체계화했다. 전성기에는 순자산만 5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대통령 지미 카터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 모델이 되는 등 눈에 띄는 행동을 이어나가다 1978년에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정부 측 증인이 되어 평의회의 구성원인 동료들을 밀고했다. 이후 평의회는 1983년에 해체되었다. 2012년에 사망.
프랭크 루카스 (사진) 범피 존슨의 뒤를 이은 할렘 인물. 마찬가지로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와 동업했다. 2007년에 제작된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로도 잘 알려진 인물. 2차례에 걸쳐 약 12년을 복역한 바 있다. 2019년에 사망. 2023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갱단 두목이 되는 법: 탄탄한 사업체를 구축하라가 루카스를 다루고 있다.
프랭크 시런 (사진) 아일랜드 혈통의 인물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다. 평범한 트럭 운전수였지만 버팔리노 패밀리와 관련을 맺어 조직 구성원이 되었고 전미트럭운송조합 간부 직책을 맡았다. 이후 미국 조직범죄사의 여러 굵직한 사건에 관여했다. 미국 정부는 시런을 이탈리아 혈통이 아님에도 라 코사 노스트라 위원회와 범죄를 공모할 수 있는 단 2명뿐인 인물로 파악했다. 노동 공갈 혐의로 32년형을 선고받지만 13년을 복역한 뒤 1993년에 가석방되고 2003년에 사망했다. 시런은 1995년 필라델피아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호파를 살해한 범인으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살바토레 브리굴리오를 지목했다.[229]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프랭크 시런은 자신이 호파를 살해했다고 주장을 번복했다. 시런의 주장들은 마피아 전문가들에 의해 반박되는 경우가 많으며 사망 직전 무일푼이었던 시런이 자신의 딸들에게 인세라도 남겨주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런의 회고를 기반으로 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책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영화화 한 아이리시맨이 2019년에 제작되었다. 작중 로버트 드 니로가 시런을 연기한다. 과연 전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에 의하면 영화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이리시맨 문서 참고.
지미 호파 미국의 거물급 노동운동가로 전미트럭운송조합 위원장이었다.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다.[노조에_관해]
제임스 버크 (사진) 좋은 친구들 속 지미 콘웨이의 실존 모델.[231] 아일랜드 혈통의 인물로 루케시 패밀리 고위간부 폴 바라오 (사진)의 휘하에 있었다.[232]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 강탈 사건인 1978년 루프트한자 강탈 사건에 가담했다.[233] 복역 중 1996년에 사망했다.
프랭크 로젠탈 (사진) 영화 카지노 속 에이스 로스스틴의 실존 모델.[234] 유대인 혈통의 시카고 아웃핏 구성원이자 전설적인 도박꾼으로 통했다.[235] 시카고 아웃핏 두목(Boss) 조셉 아이우파는 로젠탈의 명석한 두뇌를 신뢰해 그에게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운영을 맡기고 행동대원(Soldier) 앤서니 스필로트로 (사진)로 하여금 로젠탈을 보호, 감독하게 했다.[236] 말년까지 스포츠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다 2008년에 사망.
예베시 아그론 (사진) 미국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의 대부로 불린 뉴욕의 1세대 보르 브 자코녜(Thief in law) 두목(Boss).[237] 1970~80년대에 동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브루클린 브라이튼 비치를 거점으로 활동하다 1985년에 총에 맞아 살해된다.[238]
마랏 바라굴라 (사진) 예베시 아그론의 후계자. 미국 활동 초기에 콜롬보 패밀리가 바라굴라의 휘발유 사업을 공격하자 바라굴라는 루케시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크리스토퍼 퍼나리에게 담판을 요청했고, 갤런당 2%의 마피아 세금(Family tax)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239] 1986년에는 러시아 이민자 폭력배 블라디미르 레즈니코프(Vladimir Reznikov)라는 인물이 바라굴라의 사무실에 AK-47을 난사하여 1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후에는 레즈니코프가 직접 찾아와 권총을 바라굴라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조건으로 60만 달러와 앞으로 본인을 범죄 사업에 포함시키라는 협박을 한다. 레즈니코프가 떠난 후 바라굴라는 충격과 공포로 심장마비를 겪고 쓰러진다. 바라굴라는 루케시 패밀리에 도움을 요청했고 레즈니코프는 루케시 패밀리 암살자들에 의해 제거된다.[240] 이후 바라굴라는 기소를 피해 3년간 도망 다니다 독일에서 체포되고 신용카드 사기와 휘발유 밀매 혐의로 15년을 복역한 후 2004년에 출소한다. 이후 2019년 암으로 사망했다.
보리스 녜필드 (사진) 마랏 바라굴라의 후계자. 예베시 아그론의 경호원이었다. 중국-싱가포르-폴란드를 경유하는 헤로인 밀수 루트를 통해 일부는 5대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패밀리에, 일부는 히스패닉계 거리 갱단에 팔며 큰돈을 벌었다. 일찍이 녜필드를 지원했던 라 코사 노스트라는 그가 두목(Boss)이 되자 협력을 그만뒀다. 후에도 범죄 경력을 이어갔지만 잘 풀리지 않았는지 2016년 재판 때 변호사 선임비용이 없어 국선 변호를 받는 와중에 정부 증인이 되어 동업자들을 밀고했다. 2019년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의_레드_마피아에_관해]
크레이 형제 (사진) ’The Firm’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이끌며 1950~60년대 영국 런던 암흑가를 제패한 전설적인 쌍둥이 갱스터. 미국 마피아 라 코사 노스트라와 연계해 사업을 했다.[242] 그러한 사실을 반영해 두 형제의 일대기를 다룬 톰 하디 주연의 영화 레전드에 마이어 랜스키 (사진)가 언급되고, 미국의 필라델피아 라 코사 노스트라 두목(Boss) 안젤로 브루노 (사진)가 등장한다.[243] 크레이 형제는 1969년에 나란히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로니 크레이는 1995년에 복역 중 사망, 레지 크레이는 2000년에 가석방되고 2달 뒤에 사망했다.


[1] 빨간색은 활동 중인 지역, 파란색은 과거 활동했으나 현재 활동하지 않는 지역이다. [2] 사진을 구할 수 없거나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 조직원들은 행동대원(Soldiers)에 위치해있다. [3] 두목 대행(Acting Boss)은 제외하고 공식 두목만 카운트해서, 각 패밀리 별로 적게는 4대 많게는 14대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난다. [4] 뉴욕 5대 패밀리,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주요 사업에 관한 출처: The Changing Face of Organized Crime in New Jersey – A Status Report State of New Jersey Commission of Investigation. May 2004 [5] 표기에 관해 이탈리아 식으로 'Genovese'를 제노베세, 'Lucchese'를 루케세로 표기해야 하지 않냐는 시각이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이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고 미국의 마피아인 걸 감안하면 영어식인 제노비스, 루케시가 맞다. 만약 축구선수 티에리 앙리(Thierry Henry)가 영국인이었으면 티에리 헨리로 발음하겠지만 프랑스인이기에 티에리 앙리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 비슷한 논리로 키티 제노비스 사건도 보통 제노비스로 표기한다. [참고] 주요 언론이나 수사기관에서 공표한 각 패밀리 지도부의 현황을 서술해놓았는데, 베일에 싸여진 범죄조직의 그 특성상 알려진 수괴와 실제 수괴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일본 만화 명탐정 코난 속 등장하는 검은 조직의 두목처럼 실제로 십수 년간 자신을 대외적으로 철저히 숨겨온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의 사례도 있기 때문. [7] 뉴욕 마피아 담당 부서만 감축된 게 아니라, FBI 전체에서 사이비종교, 금융 사기, 인신매매 등 수많은 다른 부서가 축소되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방지팀으로 재배치되었다. [8] 두목 존 고티의 개인적 실책과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던 조직범죄와의 전쟁 탓. [9] 제일 하단의 인물이 감비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존 고티 주니어 (사진). [10] 실제로 팔코네 치안판사 부부와 그들을 경호하던 3명의 경찰관은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간 감비노 패밀리는 코를레오네시 패밀리의 라이벌 파벌들과 가깝다고 알려져 왔기에 의외의 사실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모든 시칠리아와 미국의 마피아 조직은 파벌을 막론한 사촌 조직들이기에 이상할게 전혀 없다는 시각도 있다. [11] 시간이 흐른 2019년에 캄포스와 마르티노는 11명의 다른 마피아 조직원 및 관련자들과 함께 기소되었다. 검찰 측 공소장에 의하면 캄포스는 승진하여 패밀리의 행동대장이 되었고, 마르티노가 여전히 캄포스 휘하에서 함께 일한다고 한다. 공소사실로 적시된 내용 중에는 전직 프로복서 2명이 징수원으로 가담한 고리대금업 같은 전통적인 마피아 사업부터, 세계적으로 100억 달러 이상의 개발을 담당하는 HFZ 캐피탈 그룹의 전무이사 존 시몬카라즈가 연루된 화이트칼라 범죄까지 다양한 혐의가 적시되어 있다. (시몬카라즈는 기소와 동시에 회사에서 퇴출되었다.) 그중 눈길을 끄는 점으로, 14년 전 마르티노가 선고받은 910만 달러 몰수 집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마르티노는 범죄활동으로 얻은 자산은 대부분 은닉했고 2014년 출소 후에도 건설•식음료 등 각각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여러 회사를 본인이 실질적으로 운영해 오면서도 자신의 수입이 한정되어 있다고 거짓 신고하는 등, 편법과 탈법을 이용해 법 집행을 피해왔다. [12] 당시 스퀴티에리가 두목 대행이라고 알려졌지만 그의 공식 직책은 부두목(Underboss)이었고 당대 감비노 패밀리를 이끌던 두목 대행은 존 다미코 (사진)였다는 증언이 있다. 실제로 다미코의 패밀리 내 위상이나 경력이 스퀴티에리 보다 더 높다. [13]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 [14] 실제로 2004년에는 MLB 뉴욕 메츠 소속 투수 존 프랑코와 보난노 패밀리의 유착설이 불거졌고 # 2010년에는 뉴욕 메츠의 홈구장 시티 필드를 마피아 관련 기업에서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불거지는 등 # 21세기에도 여전히 미국 프로스포츠계와 마피아 사이에 여러 의혹이 있다. [15] 당시 이 사업의 총책으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프랭크 바스토와의 연관성이 지적된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조셉 파폰이 지목되었다. # [16] 왼쪽 인물이 감비노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바르톨로메오 베르나스. [17] 국내 기준 코카인 1kg은 시가 30억 원이다. 500kg은 1조 5000억 원 규모. 물론 외국은 시가가 다르다. [18] 루포이는 대외적으로 브루클린에서 제과점을 운영했고,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은 아니었다. [19] 기사 속 인터뷰에 응한 지오바니 감비노(Giovanni Gambino)는 마피아 조직원이 아니지만, 마피아 집안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오메르타의 왕자(Prince of Omerta)라는 마피아 소설을 쓴 작가다. [산_로잘리아_축제]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수호성인 로잘리아를 기념하기 위해 뉴욕시 브루클린 벤슨허스트에서 개최되는 축제. 매년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다. [피터_고티] 존 고티의 형 피터 고티는 녹내장 탓에 한쪽 눈이 하얗게 변해 일명 외눈박이(One Eyed Pete)로 불린다. 그는 1998년 존 고티 주니어 (사진)가 체포되면서 패밀리의 두목 대행이 되었다. 이후 2002년에 존 고티가 사망하자 은퇴한 조카 대신 두목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갈취죄, 살인공모죄 등으로 장기 징역형 선고를 받아 수감되었고 출소 예정일은 2032년이다. 2011년 뉴욕 데일리 뉴스는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의 칼럼을 인용해 피터 고티의 두목 직책을 도메니코 세팔루가 정식으로 승계했다고 보도했지만, 4년 후 카피시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고하는 칼럼을 통해 감비노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은 여전히 피터 고티라고 정정보도를 했다. 실제로 라 코사 노스트라 두목은 본인 스스로 사임하거나, 위원회에 의해 강등되거나, 밀고자가 되지 않는 한 사망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고령의 나이에 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을 확률이 상당히 높은 장기 징역형을 앞두고도 동료를 밀고하지 않은 피터 고티의 태도는 부하 조직원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도 패밀리를 관리한 동생과 달리 피터 고티는 수감된 이래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단, 2008년 재판 과정에서 감비노 패밀리가 수감된 두목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범죄수익의 일부를 피터 고티의 친족에게 지급해온 사실이 밝혀지긴 했다. 2019년 피터 고티는 가석방 신청 요건에 도달했고 그의 변호사는 가석방을 신청하며 자신의 의뢰인이 나이와 지병 탓에 폭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 측에서는 ‘피터 고티와 같은 감비노 패밀리 지도자가 제기하는 위험은 그가 개인적으로 폭력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가석방 청구는 기각되었고, 그는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여담으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에 등장하는 아일랜드 갱스터 칼 포가티 (사진)는 애꾸눈 캐릭터인데, 피터 고티의 눈과 꽤 흡사하다. 감독이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도메니코_세팔루]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Zip'이라는 은어로 불리는 시칠리아 출신 마피아들은 미국 현지 마피아들보다 더욱 비밀스럽고 폭력적인 걸로 알려져 있다. 감비노 패밀리 내 시칠리아 파벌의 대표적인 인물인 도메니코 세팔루는 고향 시칠리아를 떠나와 뉴욕 감비노 패밀리의 추종세력(Associate)이 되어 마약을 취급하는 일로 범죄 경력을 시작했다. 1982년 헤로인 밀수와 은행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6년을 복역한 그는 1990년 감비노 패밀리에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했는데, 이는 당시 두목(Boss) 존 고티가 수감 전 마지막으로 직접 주관한 입단식이었다. 정규조직원이 된 세팔루는 행동대원(Soldier)-행동대장(Caporegime)-부두목(Underboss)을 거치는 18년간 총 3차례에 걸쳐 수감되었는데, 1992년과 1996년의 증언 거부로 인한 법정 모독죄와 2008년의 공갈•갈취죄로 도합 6년 3개월의 수감 경력이 있다. 특히 2008년에는 건설 공사에서 출토된 흙을 운반하는 트럭 운송업계를 갈취하면서,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인 자신의 영향력과 뉴욕시의 시멘트 업계를 주름잡는 마피아 조직의 통제력을 이용해 새로운 사업을 하거나 새로이 가게를 차리려는 회사들로부터 불법적인 세금을 상납 받았다고 알려졌다. 소식통에 의하면 2011년 세팔루가 패밀리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전문가들은 그가 감비노 패밀리를 정통(Old-Fashioned) 마피아 조직으로 돌려놓았다고 말한다. 또한 그의 집권은 존 고티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세팔루는 뉴욕 타블로이드 신문 1면에 신임 마피아 수괴로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지도자의 삶과는 전혀 닮지 않은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표면적인 직업으로 제빵 재료 회사의 영업사원 행세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회사로부터 고액의 봉급을 받으며 실적에 따라 수수료까지 수령하는 영업사원은 마피아들이 아주 선호하는 직업이다. 이들은 결코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영업도 일반적인 방법으론 하지 않는다.) 브루클린의 대표적인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 벤슨 허스트에서 노모와 함께 산 세팔루는 2015년부터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 당국에서는 벤슨 허스트를 뉴욕 마피아 내 시칠리아 파벌의 본거지로 파악하고 있다. 2020년 그의 삼촌이자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인 리카르도 세팔루가 92세로 사망했다. 리카르도 세팔루는 한평생 마피아로 살며 단 1건의 유죄판결도 받지 않은 인물로 유명하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도미닉 세팔루라는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역시 도메니코 세팔루의 사촌이다. [그_밖의_지도부] 2019년 정치 음모론자에 의해 살해된 부두목(Underboss) 프랭크 칼리 사후 그의 직책을 꿰찬 인물로 보고 있는 로렌조 만니노 (사진) 역시 시칠리아 파벌 소속이다. 그는 1988년에 발생한 프란체스코 올리버리의 살인을 공모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이 살인 공모죄와 마약 밀수죄로 15년의 수감 경력(1989-2004)이 있다. 2010년에는 뉴저지 주에서 열린 감비노 패밀리와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수뇌부 회의에 당시 조직의 수괴였던 존 감비노 (사진)를 보좌하는 수행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 현시점에서 당국은 만니노를 패밀리의 실세로 보고 있다. 미국의 한 기사에서는 수사기관 관계자의 입을 빌려 "여전히 세팔루가 두목이지만 만니노가 진짜 지도자다.(Cefalu is still the boss, but Mannino is the real leader)"라고 전하기도 했다. # 만니노는 특히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유일한 마피아다.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제임스 코미를 신임 FBI 국장으로 지명할 당시 '코미가 연방검사 시절 기소했던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 로렌조 (만니노)'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상담역(Consigliere)을 맡고 있는 마이클 파라디소 #는 1970년대 젊은 시절, 친구였던 존 고티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는 1980년대에 발생한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카소 (사진) 저격사건의 배후이며, 총 25년의 수감 경력이 있는 베테랑 마피아다. 2016년 파라디소는 도박업 및 캘리포니아 주에서 뉴욕주를 가로지르는 1500만 달러 상당의 대마초와 옥시코돈(마약성 진통제) 사업 혐의로 20명의 다른 감비노•제노비스•보난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 및 추종세력(Associate)과 함께 기소되었다. 그 이후로 후속 보도는 없고, 파라디소 또한 현재 수감된 상태는 아니다. 아마 공소가 취하된 듯. [24] 1이 아무소, 2가 카소. [25] 이들이 지도부로 재직 중일 때의 패밀리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일화로, 앤서니 카소가 "죽여라, 죽여라,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녀석들을.(kill, kill, get what you can, even if you didn't earn it.)"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26] 필라델피아 마피아의 니키 스카르포 주니어는 아버지가 수감된 이후, 조직 내부 투쟁에서 조셉 멀리노로 추정되는 범인에게 총격을 받았다. 이후 목숨은 건졌지만 더는 필라델피아 패밀리에서 활동하기 어려워, 감옥에 있던 아버지의 주선으로 루케시 패밀리 뉴저지 파벌로 조직을 옮겼다. [27] 최근 보도에 의하면 조직의 두목 대행을 맡고 있던 매튜 마돈나(Matthew Madonna)가 2007년과 2009년에 기소되고 2015년부터 재판이 확정되어 수감되면서, 2017년 즈음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는 마이클 데산티를 새 대리인으로 삼을 것을 명하는 암호화된 서신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만약 마돈나 측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시 실행에 옮길 암살 리스트도 함께 작성하여 보내왔다고 한다. 결국 유혈사태 없이 마돈나는 두목의 뜻에 따라 일선에서 물러났고 데산티가 두목 대행을 맡아 루케시 패밀리의 실권을 쥐고 있다. # 데산티는 1980년대 젊은 시절에 두목 아무소를 위해 2건의 암살을 수행해 18년의 수감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한편 2000년~2015년대에 매튜 마돈나, 조셉 디나폴리(Joseph DiNapoli)와 함께 집단지도체제로 루케시 패밀리를 이끌던 구성원 중 유일하게 아니엘로 밀리오레(Aniello Migliore)만 기소되지 않았고 평화롭게 은퇴했다. [28] 링크된 기사에선 뉴욕 마피아인 루케시 패밀리를 캔자스시티 마피아로 표기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29] 마피아 정식 입단을 위해 살인이 필수이던 규율은 20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차츰 완화되었지만 탈리아텔라의 증언으로 제노비스 패밀리가 규율을 가장 잘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탈리아텔라는 두 번째로 두려운 조직으로 자신이 속한 루케시 패밀리를 꼽았는데, 의외로 감비노 패밀리는 퇴보한 조직이라고 폄하했다. [30] 버팔로는 1931~74년, 필라델피아는 1961~80년, 디트로이트는 1961~77년까지 위원회에 자신들의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석을 잃은 뒤로는 제노비스 패밀리가 그들의 권한을 대행했다고 한다. [31]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앤서니 팔룸보 (사진). [산_제나로_축제] 1926년부터 개최된 맨해튼 리틀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축제. 영화 대부 2편과 3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축제다. 매년 9월이면 200만 명 이상의 뉴요커와 관광객들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리틀 이탈리아를 찾는다. 한 전직 마피아는 산 제나로 축제를 마피아 조직원들의 가을 소풍에 비유하며 축제에 개입해 이권을 추구하는 건 물론이고 마피아들끼리 사적인 친교를 다지는 행사로 설명했다. 산 제나로 축제에서 포착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안젤로 프리스코. 부패 척결에 앞장선 루돌프 줄리아니는 뉴욕시장 재직 시절인 1996년에 비로소 산 제나로 축제가 마피아의 부패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지만 그해 새롭게 선출된 축제 조직위원장 역시 보난노 패밀리 소속 페리 크리스시텔리였다. 크리스시텔리는 뉴욕에서 다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인물로, 특히 줄리아니가 가장 좋아하는 다 니코 레스토랑의 주인이며 2004년까지 약 8년간 산 제나로 축제를 총괄했다. 이후 2014년 시점에도 여전히 제노비스 패밀리가 산 제나로 축제에 부정하게 개입하다 적발된 사례가 있다. # 한편, 뉴욕 마피아(특히 제노비스 패밀리)가 산 제나로 축제에 개입하듯이 일본 야쿠자 조직 스미요시카이는 도쿄 산자 마츠리 축제에 개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풀턴_어시장] 연간 10억 달러 가치인 91000톤의 생선을 취급하는 뉴욕시의 초대형 어시장이다. 과거 신임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가 본격적으로 어시장에 개입하기 전인 1994년까지 풀턴 어시장을 통제해왔던 인물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카마인 로마노 (사진)가 유명하다. 로마노는 어시장에서의 불법 활동으로 약 5년간 복역하고 1999년에 출소했다. 2001년부터는 시위원회에서 어시장을 관리하게 되면서 조직범죄의 영향력을 줄이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피아가 존재한다는 의혹이 있고 # 1995년부터 법령이 바뀌어 어시장 내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물고기를 하역하는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게 바뀌면서 마피아가 개입할 여지가 오히려 더 무궁무진해졌기 때문에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34]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은 영화 대부 3편 각본에 영감을 제공했다.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 [35] 당시 이 사업의 총책으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프랭크 바스토와의 연관성이 지적된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조셉 파폰이 지목되었다. # [36] 가장 오른쪽 인물이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피터 디키아라 (사진). [37] 살인사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의 '마지막 처형: 행동대장 대행 로렌스 리치' 문단 참고. [38] 11시 방향 파란색 넥타이를 한 검은 머리카락 인물이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니콜라스 칼리시. [39] 전 제노비스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마이클 디우르소(Michael D'Urso)는 마피아 항쟁으로 사촌이 살해되고 자신은 머리에 총격을 당했다. 결국 패밀리 수뇌부로부터 처형당할 위험에 직면하자 정부 측 정보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패밀리 두목(Boss) 빈센트 지간테와 후계자 리보리오 벨로모가 포함된 70여 명의 조직원들을 상대로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한 뒤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2020년에 그의 새 신분과 주소가 마피아 측에 새어나갔고 FBI는 그 사실을 본인에게 통보했다. 어느덧 리보리오 벨로모는 패밀리의 두목이 되었으며 당국에 의하면 몇몇 마피아들이 뉴욕시에 위치한 'TBar Steak & Lounge' 레스토랑에서 디우르소의 근황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이에 디우르소는 마피아 측에 전하는 공개편지를 언론사에 보내 사건을 공론화시켰다. # 편지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자신은 여전히 과거에 몸담았던 마피아 세계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폭력은 원활한 사업에 안 좋으니 지금처럼 계속 현명하게 사업을 전개하며 본인을 살해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또 연방증인 살인사건은 공소시효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살해하면 언젠가는 관련자들이 법적으로 책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본인은 브라질리언 주짓수 검은띠에 종합격투기 수련만 14년째라고 하며 굳이 보복하려면 칼이나 야구방망이가 아닌 총을 지참하고 오라는 엄포를 놓았다. [40] 공식 한글자막 존재. [41] 제임스 나폴리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의 여담 문단 참고. [42] 댄버리 트래셔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이스하키 문서의 매체 문단 참고. [43] 링크된 기사에선 갈란테가 제노비스 패밀리를 팔아넘기는 대신 형량을 적게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그는 이아니엘로를 포함한 그 어떤 마피아 관계자도 밀고하지 않았다. 단지 재판에 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감형 받는 유죄인정을 했을 뿐인데, 이걸 기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44] 즉, 제노비스 패밀리 다음으로 오래된 조직이다. 1915년~1920년 사이에 미국으로 건너와 이 패밀리의 구성원이 된 인물들 중에는 후에 버팔로 패밀리의 두목(Boss)이 되는 스테파노 마가디노도 있었다. [45] 항상 시가를 애용했는데 죽었을 때도 시가를 물고 죽어 이 사진이 또 유명해졌다. [46] 아래에 나오는 3명의 행동대장을 죽인 이후, 도니 브래스코(조 피스톤)의 상사인 소니 블랙은 살아남은 인델리카토의 아들이자 복수를 맹세한 앤서니 '브루노' 인델리카토(영화에서도 아버지 소니 레드가 죽을 때 브루노!를 애절하게 외친다.)를 죽이기 위해 도니를 지명했다. 도니를 아낀 소니 블랙은 살인을 해결한 후, 그를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도니는 FBI 잠입요원이었기에 잠입을 중단하고, 그간의 정보를 FBI에 제공해 보난노 패밀리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소니 블랙은 결국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마시노의 지시를 받은 프랭크 코파 등에게 살해되었다. 죽을 것을 알았는지 담담하게 행동했으며, 프랭크 코파는 소니 블랙이 남자답게 행동했다고 나중에 증언했다. 소니 블랙이 사망한 후 조 피스톤은 나중에 행한 인터뷰에서 내 목적은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었지,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47] 영화 <도니 브래스코>에서도 묘사된다. 조셉 마시노는 평화회담을 한다는 핑계로 이들을 유인하여 모조리 살해했다. 이때 실행역은 나중에 변절한 처남 살바토레 비탈레, 도미닉 나폴리타노 일명 '소니 블랙', 캐나다에서 온 비토 리주토였다. 결국 3명의 행동대장을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같이 온 프랭크 리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후 프랭크 리노는 조셉 마시노의 편을 들었지만 나중에 변절하여 정부 증인이 되었다. [48] 도니 브래스코가 가져다온 증언으로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도망다녔다. 이후 자수해서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으나 1986년 노동 공갈 혐의로 다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었다. 운좋게도 1987년 재판에서 3명의 행동대장 살인 혐의는 마시노가 관여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려워 무혐의로 끝이 났다. 이미 이전부터 처남인 살바토레와 여러 조직원들에게 실권을 잃은 라스텔리를 이어 두목이 되라고 요청을 받았으나, 마시노는 두목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평생 간다는 마피아의 전통을 지켜 그런 제안을 거부했다. 그렇게 의리를 지키다가 라스텔리가 사망하자 수감 중에 살바토레 비탈레를 시켜 자신을 두목으로 추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필립 라스텔리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행동대장 회의에서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49] 보난노 패밀리의 두목 필립 라스텔리의 장례식에서 포착된 사진들이다. 첫 번째 사진 가운데 인물이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앤서니 스페로. [50]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갔다가 이후 나와 공개적으로 살고 있다. 2017년에 애리조나에서 <Unprotected>라는 리얼리티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애리조나주 이탈리아계 미국인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51]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 (사진). [52]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보난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이었던 살바토레 몬타냐(Salvatore Montagna)는 이탈리아계 캐나다인이었고, 2011년 캐나다에서 살해당했다. 몬타냐는 캐나다의 리주토 패밀리와 가까웠고, 살해된 것도 리주토 측의 항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정설이다. 몬타냐는 2017년 캐나다의 마피아 드라마 <배드 블러드>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53] 1984년 마이클 맨쿠소는 자신의 아내를 총으로 살해하여 과실치사 혐의로 10년을 복역했다. 그는 패밀리의 두목 대행이었던 2004년에 무용담을 여기저기 누설하고 다닌 입이 가벼운 히트맨의 살인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혐의로 2006년에 수감되었다. 맨쿠소는 조직 서열상 최선임자였기 때문에 복역 중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2012년 수감 중이었던 맨쿠소는 부하들에게 루케시 패밀리의 아지트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당시 루케시 패밀리 두목 대행 매튜 마돈나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을 두목으로 추대한 보난노 패밀리의 결정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발언했다는 얘기를 맨쿠소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가 루케시 패밀리의 사교클럽에 여러 명의 보난노 패밀리 정규조직원(Made Member)과 추종세력(Associate)이 권총을 차고 들이닥쳐, 그들의 부두목(Underboss)과 상담역(Consigliere)을 모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사교클럽 내부에 젊은 루케시 패밀리 소속의 행동대원(Soldier)들이 없었기 때문에 연로한 루케시 패밀리 지도부는 어이없이 사태를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보통 마피아의 사교클럽은 성역으로 여겨지며, 말단 추종세력이 상대 패밀리의 지도부를 모욕한 사실은 마피아의 규칙대로라면 충분히 두 조직 간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결국 보난노 패밀리가 선을 넘었던 것으로 합의되었고, 얼마 안 가 사건에 앞장선 보난노 패밀리 추종세력이 처형되었다. 맨쿠소는 2019년 3월 12일에 출소했다. 두목의 출소 다음날에는 맨쿠소의 부재 중 두목 대행을 맡아온 조셉 카마라노 주니어 (사진)와 조직의 상담역(Consigliere)이었던 존 젠코키호(John Zancocchio)의 재판이 열렸는데 두 사람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는 1987년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 존 고티가 RICO 재판에서 승소한 이후 32년 만에 마피아 수괴급의 피고인이 RICO 재판에서 승소한 사건이었다. [54] 이는 장례식장에서는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는 마피아 세계의 금기를 어긴 것이었기에 맨쿠소가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55] 실제로 수십 년간 뉴욕 마피아를 취재해온 제리 카피시는 자신의 2022년 8월 4일자 기사에서 ‘암흑가 역사상 가장 기괴한 폭력사건 중 하나(In one of the most bizarre beatdowns in Gang Land history)’로 장례식 사건을 묘사했다. [56] 형인 디노와 함께 바이커 갱인 크레이지 피스톤스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57] 예나 지금이나 콜롬보 패밀리는 다소 작은 규모의 조직원 숫자를 유지했다. 전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자신이 현역이었던 1980년대 당시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 숫자가 150명 내외였다고 밝혔다. [58] 전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 마이클 프란지스는 인터뷰에서 “1980년대에는 감비노 패밀리가 가장 강한 조직이었나?”라고 묻는 질문에 감비노 패밀리와 제노비스 패밀리의 조직원 숫자가 제일 많은 건 사실이지만, 가장 강하다는 표현은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했다. 특히 자신이 기억하는 콜롬보 패밀리 두목(Boss) 카마인 페르시코는 ‘우리가 가장 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즉, 조직원 수는 적을지언정 콜롬보 패밀리 역시 뉴욕 내 다른 4개 조직들과 대등한 입장에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5대 패밀리는 서로 간의 우위가 없는 관계다. [59] 가운데 담배를 든 인물이 앨버트 갈로. [60] 래리 갈로, 조셉 '조이' 갈로, 앨버트 갈로 [61] 이때 프랭크를 죽인 사람이 사업권을 약속 받은 갈로 형제라는 설도 있고, 아니라는 설도 있다. [62] 이 일화는 영화 대부 2편 속 로사토 형제 일화의 모티브로 보인다. [63] 이때 카마인 페르시코에게 불사신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64] 당시 시위는 뉴욕 타임스 추산 3만 1200명, 경찰 추산 4만 명, 주최 측 추산 62만 명이었다. # [65] 조셉 갈로는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하며 영화에서는 쿠데타 설을 차용했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가설을 절충하면, 당시 위원회에서 콜롬보를 제거함과 동시에 골칫거리였던 조셉 갈로도 함께 제거하기 위해 콜롬보 저격의 책임을 조셉 갈로에게 전가했거나, 그가 저격을 하도록 부추겼을(예컨대 콜롬보가 사라지면 조셉 갈로를 패밀리의 두목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두목의 권위에 대항한 현실 속 갈로 삼형제는 영화 대부 2편에 등장하는 로사토 형제 캐릭터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콜롬보가 결성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민권 연맹은 지금도 존재한다. [66] 사건 발생 후 16년이 지난 2003년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패밀리 고위 간부가 유죄판결을 받아 17년을 복역하고 2020년에 출소했다. 이 간부의 이름은 조엘 카카스 (사진)다. 전설적인 마피아 해결사로 통한 그는 1970년대에 자신을 노린 3명의 공격자를 상대로 총상을 입었지만 상대방의 권총을 빼앗아 그중 한 명을 사살하고 시신을 경찰서에 던져두고 간 전적이 있다. 또 1990년대 3차 콜롬보 항쟁 중에는 2명의 반대파에게 습격당해 총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복부와 하반신에 총격을 당해 한쪽 고환을 잃었지만 살아남았다. 2000~03년에는 수감된 두목(Boss)을 대리하는 패밀리 내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다. 상술했듯 카카스는 2020년 초에 석방되었고 그해 10월, 콜롬보 패밀리에게 아버지를 잃은 전 연방검사 윌리엄 아론왈드가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67] 상술한 패밀리 고위 간부 조엘 카카스 (사진)의 전처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랄프 돌스(Ralph Dols)라는 경찰관을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경찰 당국과 시민들을 화나게 한 건 물론이고 다른 패밀리 간부들조차 콜롬보 측에 책임 있는 관계자들을 살해하라는 요구를 하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후 16년이 지난 2013년에 관계자들이 정식으로 기소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68] 삼촌인 알폰스 페르시코와 동명이다. [69] 후에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1980년대 후반 교도소에서 카마인 페르시코를 만났는데 그가 자신에게 “내가 멀리 있는 동안 오레나를 대리인으로 삼아야겠어.”라고 얘기해 “그건 안 좋은 생각 같지만 당신이 보스니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회상했다. 프란지스에 의하면 오레나는 누구나 야심가로 판단한 인물이었고, 카마인 페르시코는 그런 오레나를 통제할 자신이 있다고 단언했지만 결국 전면전이 일어났고 패밀리는 큰 피해를 봤다. [70] 3차 콜롬보 항쟁의 원인인 지간테와 고티의 위원회 주도권 싸움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 생애 문단의 존 고티와의 대립으로 인한 제3차 콜롬보 항쟁 발발 부분 참고. [71]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이 콜롬보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윌리엄 쿠톨로. [72] 종신형 복역 중 콜롬보 패밀리를 관리해온 4대 두목 카마인 페르시코(Carmine Persico)가 2019년 듀크 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하면서 카마인 페르시코의 사촌이자 최근까지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온 앤드루 루소가 5대 두목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이 검찰 측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 # 고령인 루소의 후계자로는 카마인 페르시코의 조카 시어도어 페르시코 주니어(Theodore Persico Jr)가 꼽힌다. [73] 마세리아 이전에 모렐로 형제나 빈센초 테라노바가 있긴 했다. [74]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세리아의 최후. [75]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라 코사 노스트라 창설 장면. 상석에 앉은 이가 마란자노, 칼을 들고 구성원들의 손을 따며 의식을 치르는 이가 러키 루치아노. [76]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묘사하는 마란자노의 최후. [77] (개별 문서 존재) [78] 루치아노의 위원회는 시칠리아 마피아가 '큐폴라'라는 민주적 기구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줬다. [79] (개별 문서 존재) [80] 또 다른 별명으로 매드 해터(Mad Hatter)가 있는데 모자를 떨어뜨리는 순간 사람을 죽이는 기벽 때문이라고 한다. [81] 살인 회사는 400~1000명의 사람을 제거했다고 알려져 있다. [82] 처형의 직접적인 명분은 일반인 살해지만, 거국적으로 봤을 때 프랭크 코스텔로와 비토 제노비스 간 권력 다툼에서 아나스타시아가 희생된 게 진실에 가깝다. [83] 1957년 제노비스는 그 러키 루치아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다 상술했듯 마약 사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다. 미국 최대 마피아 조직의 두목이 길거리에서 마약 거래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혐의로. [84] 제노비스의 대리인들: 1959년~1962년: 앤서니 스트롤로 (사진)→1962년~65년: 토마스 에볼리 (사진)→1965년~: 필립 롬바르도 (사진) [85] (개별 문서 존재) [86] 영화 아이리시맨에 이 일화가 언급된다. [87] 영화 대부 2편부터 마이클이 서부 네바다 주로 이주하는 설정의 모티브 제공. [88] 그는 미국 내 최초의 이탈리아계 민권단체를 설립했다. [89] 이 때의 일화는 드라마 디 오퍼에 잘 묘사된다. [90] 콜롬보는 자신이 주도하는 시위 도중 저격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석한 빈센트 지간테의 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 (사진)가 군중들을 진정시키고 콜롬보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렸다. [91] 에볼리는 롬바르도 보다 앞서 비토 제노비스의 대리인이었던 인물이지만 세력 다툼에서 밀려났다. 그는 훗날 카를로 감비노와의 불화로 살해되었다. [92] 마피아를 겨냥해 제정된 RICO 법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피고인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1981년에 10년형을 선고받지만 항소하며 법정구속되지 않았다.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2개월 뒤 사망했다. [93]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롬바르도의 뒤를 이어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된 빈센트 지간테 문서 참고. [안젤로_브루노_암살_사건] 이 사건은 1978년 애틀랜틱시티에 도박이 합법화되면서 카지노가 들어서게 되는 것과 관련 있다. 뉴욕 패밀리들은 카지노 사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애틀랜틱시티의 대부분은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영역이었다. 당시 필라델피아 두목 안젤로 브루노는 위원회에 의석을 가진 명망 있는 마피아였고 자신의 구역 내에서 뉴욕 패밀리들이 사업을 전개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제노비스 패밀리는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 쿠데타를 조장해 브루노를 제거했고 사건 관계자들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실제로 브루노의 사망 이후 뉴욕 마피아 세력은 애틀랜틱시티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실화를 각색한 2013년 영화 아메리칸 허슬이 애틀랜틱시티 내 카지노 합법화와 마피아 이야기를 약간 다루고 있다. 작중 등장하는 마피아 거물 빅터 텔레지오의 모티브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빈센트 알로다. [95] 작중에선 주로 별명인 토니 프로라고 불린다. 한글 자막에서 행동대장을 뜻하는 'Capo'를 두목으로 번역해 뉴저지의 두목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 뉴저지 행동대(Crew)의 수장이었다. 영화의 주요 시간적 배경이 롬바르도가 두목으로 재직하던 시기와 많이 겹친다. [96] 라스텔리는 징역복이 많았던 탓에 두목 재직 기간 중 4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항상 수감된 상태에서 조직을 관리했다. 그는 1991년에 가석방되고 그해에 사망했다. [97] 이후 살바토레 파루지아가 위원회에 의해 지명되어 한동안 두목 대행을 맡는다. [98] 미드 소프라노스에서 이에 대한 대화가 나오는데 마피아 팬으로 보이는 토니의 골프 친구들이 그것에 대해 감탄하고 토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99] 고티와 함께있는 델라크로체의 사진. 두목 폴 카스텔라노를 우습게 보던 존 고티가 델라크로체만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두려워했기에 고티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100] 영화 대부 3편에 등장하는 모스카라는 이름의 암살자가 가톨릭 성직자 의상을 입고 대상을 살해한다. 아마 델라크로체에서 영감을 얻은 듯. [101] (개별 문서 존재) [102] (개별 문서 존재) [103] (개별 문서 존재) [104] 어린 시절 베네로 망가노의 어머니가 계란 가게를 운영해서 붙여진 별명. [105] 뒷모습 인물은 식별할 수 없고 제일 오른쪽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비토 팔미에리다. [106] 망가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마이클 제네로소 (사진)가 부두목 대행(Acting Underboss)을 맡았다. [107] (개별 문서 존재) [108] 타임지 표지에 오른 마피아 두목으로는 알 카포네, 프랭크 코스텔로에 이어 3번째. [109] 보통 종신 두목을 자처하는 다른 마피아 두목들과 다른 결정이다. [110] 데치코 암살 후 감비노 패밀리의 반격으로 카소가 총격을 당했다. 이에 카소는 감비노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제임스 하델을 NYPD 소속 강력계 형사를 시켜 납치한 뒤 자신이 직접 고문한 끝에 권총 탄창이 텅 빌 때까지 사격을 가해 살해했다. 훗날 카소는 이에 대해 "그는 날 죽이려고 했어... 그게 마피아의 법칙이야.(He tried to kill me... that was the law of the Mafia.)"라고 대답했다. [111] 훗날 카소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치오도의 아내는 마피아 사업에 연루되어 수입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 케이스로 취급하면 충분히 살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12] 일설에 의하면 직접 30~40명을 살해했고 100건이 넘는 살인을 지시했다고 한다. [113] 1993년 정보원이 되기 전의 카소는 체포되자 탈옥을 시도했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교정센터에서 매수된 교도관의 안내를 받아 구치소 문을 거의 통과할 뻔했으나 다른 교도관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했다. 거기다 자신의 재판장인 유진 니커슨을 살해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14] 밀리오레는 1992년에 샷건으로 총격을 받지만 살아남았다. 이후 아무소와의 오해를 풀고 계속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 2010년경에 이르러 평화롭게 은퇴했고 2019년에 85세를 일기로 자연사했다. [115] 1998년 공개 인터뷰 시점만 해도 예전의 전설들은 다 죽었고, 현재의 마피아는 타락했다는 식으로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했다. 태도가 바뀐 걸 보아 심경의 변화를 겪은 듯. [116] 정보원 출신이니 만큼 신변 안전을 위해 일반 수용자(general population) 들과 분리 수용되어 있을 것이다. [117] 뉴잉글랜드 지방의 페트리아카 패밀리 소속 총잡이가 아나스타시아를 살해했다는 대체 이론도 존재한다. [118] 당시 페르시코는 검찰의 공소장이 발표되자 잠적했는데, 약 4개월의 짧은 도피 기간이었지만 FBI에 의해 세계 10대 지명수배자로 등재되었다. [119] 일선 히트맨들의 착각으로 아버지가 살해된 것. 2명의 히트맨은 실수의 대가로 처형되었다.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은 16년이 지난 2003년에 밝혀졌다. [120] 139년 형을 선고받은 마피아 두목의 형 집행을 정지한다는 사실을 보도자료로 냈다가 교정당국이 세간의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안 낸 것으로 보인다. [121] 두목 대행(Acting Boss)까지 포함하면 1991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소속 알폰스 다르코 (사진)가 있다. 그는 수감된 두목 비토리오 아무소로부터 처형 대상이 되었고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지만 부하 조직원이 화장실에 총을 숨기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이 처형 대상이라는 걸 깨달은 뒤 그대로 도주해 정부 측 증인이 되었다. [122] 외국에서 회동을 가질 때는 간부들이 아내를 데리고 와 휴가를 보낼 수 있도록 했다. [123] 당시 제노비스 두목 대행 로렌스 덴티코, 감비노 두목 대행 피터 고티, 루케시 두목 대행 루이스 다이도네, 콜롬보 두목 대행 조엘 카카스가 참석한 이 회합에서, 기존의 부계만 이탈리아 혈통이면 정규조직원(Made Member)으로 입단할 수 있었던 것을 100% 이탈리아 혈통만 정규조직원으로 입단할 수 있도록 고쳤고, 각 패밀리 별로 5명의 신입 정규조직원을 충원하기로 했으며, 마약 전과가 있는 인물은 5년의 유예기간이 지나야지만 정규조직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124] 당시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던 미국 법무부 장관 존 애쉬크로프트의 숙원 사업 중 하나가 마시노의 유죄판결이었다. 그만큼 양질의 수사관이 집중 투입됐을 것이다. [125] 사실 미국에서 마지막 연방 사형 집행은 2003년이다. 연방 사형수를 대상으로는 사실상 집행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는데 2020년에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약 17년 만에 집행을 재개하여 총 13명을 형장에 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126] 부동산 중에는 보난노 패밀리의 본부격이었던 ‘카사블랑카’라는 이름의 자신이 운영하던 레스토랑도 있다. 마시노는 현재 협조에 대한 공로로 석방되었다. 정부에 제공되지 않은 나머지 5채의 부동산은 마시노의 어머니와 아내의 집 등이다. [127] 다만, 결정적인 증거를 캐치하지는 못했다. [128] 바시아노는 마시노와 달리 오메르타를 깨는 증언을 하고 감형 받으라는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생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걸 택했다. 최근 전해지는 사진을 보면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도 아주 행복해 보인다. # 그의 변호사는 바시아노가 자신이 만나본 사람 중 가장 터프하고 굉장한 사람이라고 전했다. [129] 2004년 마시노의 변절 이후 2007년까지 연달아 4명의 보난노 패밀리 정규조직원(Made Member)들이 사법거래를 위해 오메르타를 깨고 정부에 협조한다. [130] (개별 문서 존재) [131] 식당은 1996년에 폐업하지만, 2000년에 원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재오픈하여 지금도 영업 중이다. 현 주인 로버트 이아니엘로(Robert Ianniello)는 매튜 이아니엘로의 동생이다. 실질적인 영업은 로버트의 아들이 맡고 있다. 조셉 갈로 암살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 아이리시맨에 이 레스토랑이 나온다. [132] 알로는 1970년에 사법방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약 3년간 복역한 뒤 출소했고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133] Gilded Grape나 the Hay Market 같은 전설적인 게이바 역시 이아니엘로가 관리했다. [134] 작중에선 주로 별명인 '매티 더 호스'로 불린다. [135] 이아니엘로가 이 당시엔 반쯤 은퇴 상태였다는 대체 이론이 있다. 2004년 뉴저지 주 조사위원회(State of New Jersey Commission of Investigation)는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된 이래 일상적으로 제노비스 패밀리를 관리해온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그의 형 마리오 지간테 (사진)와 조직의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 (사진)를 지목했다. 실제로 이아니엘로는 빈센트 지간테 쪽 계보가 아닌 프랭크 티에리 쪽 계보로 분류되며, 지간테의 대리인이 되기에는 연관성이 다소 떨어진다. [136] 85세의 노회한 마피아 수괴가 가상의 마피아 두목 마이클 콜레오네의 말년을 묘사한 대부 3편을 보다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묘한 느낌을 준다. [137] 갈란테와 그의 아이스하키 구단 댄버리 트래셔스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말하지 못한 이야기: 죄와 벌 그리고 하키에 이아니엘로가 등장한다. (댄버리 트래셔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아이스하키 문서의 매체 문단 참고.) # 링크된 기사에선 갈란테가 제노비스 패밀리를 팔아넘기는 대신 형량을 적게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그는 이아니엘로를 포함한 그 어떤 마피아 관계자도 밀고하지 않았다. 단지 재판에 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감형 받는 유죄인정을 했을 뿐인데, 이걸 기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38] 이아니엘로의 자택은 뉴욕주 올드 웨스트베리(Old Westbury)에 있는데 이 마을은 2011년 블룸버그지에 의하면 미국 전체에서 2번째로 부유한 마을이다. 매튜 이아니엘로의 조카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유력 간부 콘라드 이아니엘로 (사진)다. [139] 이 외에도 현재 남아있는 존 고티의 사진들을 보면 다미코와 함께 찍힌 사진이 아주 많은 걸 알 수 있다. 거의 항상 옆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실제로 존 고티가 다미코를 좋아한 가장 큰 이유로 다미코는 포커게임을 할 때 고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동료 도박꾼이었고 그 과정에서 빚을 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0] 나머지 구성원으로 피터 고티와 니콜라스 코로조 등이 있다. 존 고티 주니어가 이끌던 1990년대 감비노 패밀리 모습. 제일 하단이 고티 주니어, 바로 위 은발머리가 다미코. [141] 2008년 경 마피아를 취재하는 기자의 전화를 받은 허스코비츠는 다미코에대한 질문이 나오자 잠시 침묵한 뒤 “그는 우리 직원입니다.”라고 얘기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후 허스코비츠가 다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만나서 인터뷰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한 전직 마피아는 합법적인 사업가인 허스코비츠가 감비노 패밀리와 교류해서 얻는 이점으로 ‘보호’와 ‘마피아 조직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꼽았다. [142] 다미코가 감비노 패밀리의 새 수괴가 되었음을 알리는 뉴욕 일간지 1면. 이 시기 다미코는 수감된 두목 피터 고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스스로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불렸다. [143] 다미코는 맨해튼 인근의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 ‘Fresco by Scotto’의 단골손님으로 알려져 있다. [144] 2005년 다미코를 취재하기 위해 뉴저지 집을 찾아온 기자를 향해 그의 아내는 “당신은 나에게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할 거예요. 그이는 왔다 갔어요. 지난 40년간 쭉 그래왔는걸요."라고 밝혔다. [145] 본래 마피아의 오메르타는 동료를 밀고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가 자신에게 제기한 혐의를 받아들이는 ‘유죄인정(a plea of guilty)'을 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유죄인정이란, 범죄자가 자신의 변호인과 함께 수사기관에서 수집한 증거를 살펴본 후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법정에서 유죄인정을 해 형량을 축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유죄인정을 한다고 해서 마피아 세계에서 제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대 마피아 세계에서 유죄인정은 흔한 일이 되었고 동료를 밀고하지 않는 의리 있는 마피아들도 유죄인정을 통해 자신의 형량을 감소시키는 경제적인 전략을 사용한다. 당장 상단의 빈센트 지간테, 도미닉 시릴로, 매튜 이아니엘로, 존 다미코 같은 전설적인 마피아들도 유죄인정 경력이 있다. 반면 프란지스는 일생에 유죄인정을 한 일이 없다. 그가 조금만 타협했더라면 1965년과 2011년 재판에서 더욱 줄어든 형량을 선고받을 수 있었텐데도 하지 않았다. 본인 입장에서는 정부에게 하는 유죄인정조차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의 마피아 전문가 조지 아나스타시아는 프란지스는 마피아 세계의 ‘아이콘’이었고, 그가 사망함으로써 전통적인 오메르타 정신을 가진 세대가 비로소 끝났다고 보았다. 여담으로 존 고티 역시 프란지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정통파 중 하나였다. [146] 콜롬보 패밀리가 1972년에 제작한 전설적인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는 4만 7천500달러(2020년 기준 29만 1천 달러)의 제작비와 음악비를 들여 6억 달러(2020년 기준 37억 달러) 상당의 총수익을 올렸다. 당시 프란지스는 이 영화의 제작자 중 정점이었다. 당대 목구멍 깊숙이 신드롬을 다룬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 [인터뷰_내용] 불세출의 연예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아냐는 질문엔 “프랭크 시나트라한테 소니 프란지스를 아냐고 물어야지.”라고 대답했고, 자신을 교도소에 보낸 판사, 검사들에 대해서는 “지옥에서 그들을 만나겠다.”라고 대답했다. 반면 오메르타, 암흑가의 사업을 운영하는 방법, 프랭크 코스텔로나 조셉 보난노를 묻는 질문엔 “오메르타가 무슨 뜻이지? 질문이 이해가 안 간다.”라며 대답을 피했다. 동료를 밀고하지 않은 이유엔 "감옥이 어떤 곳인지 알기 때문에 동료들을 보낼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자신의 삶에 후회가 없으며 단 한 번도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살 폴리시라는 전 마피아 추종세력(Associate)은 "프란지스가 이룩한 금융 제국은 너무 광대하고 그의 권력 역시 너무 강력해서 진정한 터프가이들도 그를 두려워했고 여전히 두려워한다."라고 밝혔다. [148] 프란지스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패밀리 내에서 최근까지 1.5인자 급의 위상을 지닌 제노비스 패밀리의 도미닉 시릴로, 감비노 패밀리의 존 다미코, 루케시 패밀리의 아니엘로 밀리오레 같은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프란지스의 수감 경력이 훨씬 많긴 하다. 물론 프란지스가 이들보다도 약간 앞 세대 사람이다. [149] 사망 기사. 프란지스의 관을 성조기로 덮은 이유는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150] (개별 문서 존재) [151] (개별 문서 존재) [152] (개별 문서 존재) [153] 19세기경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방의 범죄조직 은드랑게타 역시 혈연으로 뭉친 '은드리나' 단위로 조직이 구성되었고 대개 규모가 큰 조직도 정규조직원이 30명을 넘지 않았다. [154] 아웃핏의 역사를 다룬 책의 표지이다. [155] 영상 속 아카르도에게 질의하는 연방상원의원은 로버트 케네디다. [156]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가 그런 아웃핏의 위원회 내에서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 [157] 아웃핏이 1980년대에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횡령한 200만 달러로 이 사교클럽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158] 앞 줄 제일 좌측 인물이 아웃핏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 (사진), 뒷 줄 제일 좌측 인물이 아카르도의 후계자 조셉 아이우파 (사진). [159] 왼쪽이 디프론조, 오른쪽이 아카르도. [160] 왼쪽에서 두 번째 악수하는 인물이 훗날 아웃핏 두목이 되는 존 디프론조 (사진). [161] 헬스 엔젤스 MC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바이커 갱단. [162] 초기 아웃핏 두목(Boss) 알 카포네가 시칠리아인들의 의식주의를 싫어해 입단식을 거부했기 때문에 뉴욕 등 다른 지역 마피아들과 달리 시카고엔 입단식이 없다고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왔다. 실제로 아웃핏의 입단식은 카포네 시대 이후 바로 부활했다. [163] 도박업과 공갈 혐의로 약 16년간 복역했다가 2006년에 출소한 드로렌티스는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카펫 세탁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주로 위스콘신 주에 머무르고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앨버트 베나 (사진)가 시카고에 머물며 조직을 관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164] 안젤로 브루노는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하비 카이텔이 연기한다. [165] 마피아가 아닌 일반 범죄자들이 불법 행위로 수입을 올릴 경우에도 마피아에게 수입의 일부를 바치라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많은 범법자들이 반항했으나 스카르포는 항의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대표적으로 필라델피아 그리스 마피아 두목 첼세이즈 부라즈가 길거리 세금을 거부하다 살해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이 모두 통한 건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강력한 바이커 갱인 페이건스 MC는 거리세를 내는 것을 거부했으며, 페이건스의 멤버였던 Jimmy D의 증언을 보면 필라델피아 마피아가 페이건스와 관련된 사람을 납치해서 협박하자 보복으로 필라델피아 마피아 멤버들을 납치하고 총으로 쏘기도 했다. 결국 페이건스는 니키 스카르포의 거리세를 결코 내지 않았다. # [166] 필립 테스타 (사진)가 해당. 테스타는 영화 아이리시맨에 1컷 등장한다. 그의 아들 역시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이었는데 아버지가 살해되고 3년 후에 살해되었다. [167] 니코데모 스카르포와 존 스탠파 (사진)가 해당. 니코데모 스카르포는 1989년에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직후 그의 아들인 니코데모 스카르포 주니어가 아버지의 대리인이 되어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았지만 암살자로부터 목, 팔, 몸통 등에 8차례 총격을 당해 겨우 살아남는다. 당국은 이 사건을 통해 니코데모 스카르포가 패밀리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 후 니코데모 스카르포 주니어는 살아남기 위해 뉴욕 루케시 패밀리로 조직을 옮긴다. 한편, 당시 니코데모 스카르포 주니어에게 총격을 가한 인물이 훗날 필라델피아 패밀리의 두목이 되는 조셉 멀리노로 알려져 있다. [168] 랄프 나탈레 (사진)가 해당. 나탈레는 미국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두목 중 최초로 정부 증인이 된 인물이다. 1995년에 조셉 멀리노가 자신은 부두목(Underboss)을 맡고 나탈레를 두목으로 추대한다. 나탈레가 1998년에 가석방 규정 위반 혐의로 재수감되었을 때 멀리노가 패밀리의 전권을 장악하고 수감된 그에게 일체의 지원을 끊는데, 나탈레는 그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낀 후 오메르타를 깬다. 나탈레는 멀리노의 재판에서 불리한 증언을 한 건 물론이고, 뉴저지 주 캠든 시의 시장이었던 정치인 밀튼 밀란과 마피아의 관계를 폭로해 현직 시장으로 하여금 유죄 판결을 받게 만든다. 이후 자서전을 발매하고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2022년 1월 노환으로 사망했다. [169]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필라델피아 마피아는 여전히 뉴저지 주 남부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전개하고 있고, 북부에서도 1개의 도박 사업을 전개한다고 알려져 있다. [170] 리감비는 2019년에 자신의 80번째 생일파티에서 한발 물러났고 # 마이클 랜슬로티(Michael Lancelotti)가 리감비의 직책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뷰_내용_요약] 1989년에 45년 형을 선고받은 후 정부 증인이 되어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간 필립 레오네티는 전 패밀리 두목 니코데모 스카르포의 조카다. 그는 1970년대에 삼촌과 플로리다 주에 갈 때면 항상 마이어 랜스키 (사진)를 만났다. 랜스키는 자신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자기 앞에서 말하고 손짓하는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랜스키는 자신에게 전설적인 과거 얘기들을 직접 해줬다. 다만, 자신이 보기에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랜스키가 돈이 많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한다. 랜스키는 벅시 시겔의 죽음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자책했다. 레오네티는 필라델피아 현역 마피아 중 조셉 리감비에 대해 자신이 필라델피아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호평했지만, 조셉 멀리노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사람 중 최악의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과거 삼촌의 명령으로 살해된 살바토레 테스타에 대해 묻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감정이 격해지는 모습을 보였고, 반면 자신이 제거한 빈센트 팔코네에 대해 묻자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대답하며 웃음을 보였다. [172] 가운데 인물이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이었던 조셉 리감비. [173] 앤서니 지아칼로네는 영화 아이리시맨에 등장한다. 작중 앤서니 지아칼로네의 별명인 토니 잭으로 불린다. 잭 지아칼로네의 아버지는 앤서니 지아칼로네의 동생 비토 지아칼로네인데 2012년에 사망할 때까지 도박 사업을 관장하는 패밀리의 행동대장(Caporegime)으로 있었다. [174] 다마토 처형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빈센트 지간테 문서의 여담 문단 참고. [175] 위암으로 사망한 이 인물은 소프라노스 속 재키 에이프릴 시니어의 모티브로 평가받는다. [176] 사진을 찍은 배경은 데카발칸테 패밀리의 본부 아지트인 리베라 사교클럽이며 1열 가운데에 패밀리 두목 지오바니 리지가 있고 그 양옆으로 두목 대행 프란시스코 과라치와 로만 칼라를 입은 가톨릭 사제가 앉아있다. [177] 프로비던스 파벌 출신. 각각 레이먼드 시니어 (사진), 레이먼드 주니어 (사진)라고 불렸다. [원터_힐_갱단] 영화 디파티드와 블랙매스로 잘 알려진 윈터 힐 갱단은 1955년에 보스턴에서 결성된 아일랜드 혈통과 이탈리아 혈통으로 구성된 범죄조직이었는데, 활동 지역이 겹치는 페트리아카 패밀리의 보스턴 파벌과는 적대했지만 프로비던스 파벌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3대 두목 제임스 벌저의 카리스마와 부패한 FBI 요원과의 연계로 한때는 라 코사 노스트라를 제치고 보스턴 제일의 범죄조직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정부에 협력한 마지막 두목 케빈 윅스를 끝으로, 1999년 즈음에 조직 계보가 끊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FBI로부터 세계 10대 지명수배자가 되어 1995년부터 도피 행각을 이어가다 2011년에 체포된 제임스 벌저는 2018년에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 출신 수용자에게 교도소에서 살해당했다. # 벌저에 협력했던 부패한 FBI 요원 존 코널리도 2002년에 10년, 2008년에 40년으로 도합 50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179] 1989년 보스턴 페트리아카 패밀리의 간부였던 안젤로 머큐리오는 도청기를 차고 조직원 입단식 상황을 사상 최초로 녹음해서 FBI에 제보했다. 머큐리오는 녹음을 개선하기 위해 TV볼륨을 낮추기까지 했다. 이는 FBI의 보스턴 마피아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아버지를 이었지만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주요 간부들한테 치이던 레이먼드 페트리아카 주니어는 이때 가장 큰 타격을 받고 8년형을 선고 받는다. 그는 패밀리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이후 은퇴했다. [180] 그러나 2018년에 1993년 살인사건 때문에 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181] 마노키오는 2024년에 사망한다. [182] 1968~2001년까지 복역한 리모네는 후에 마피아 행동대원(Soldier)이라는 신분 탓에 FBI의 표적 수사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그는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260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다. [183] 라토의 장례식에는 바이커 갱 헬스 엔젤스의 두목급 간부가 참석하기도 했다. # [184] 이 영화는 2019년에 제작된 아이리시맨과는 다른 영화다. [185] 뉴욕 5대 패밀리의 두목(Boss)과 부두목(Underboss)들을 겨냥한 1985년 위원회 재판으로 가는 본격적인 수사의 시작이 클리블랜드 마피아 수사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 측의 결정적인 증인이 된 마피아 변절자로 로스앤젤레스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레이 페리토 (사진)가 있다. 페리토는 그린을 직접 암살한 인물이다. [186] 이아코바치는 2020년에 70세로 사망한다. [187] 영화 갱스터 스쿼드로 유명한 1940~60년대 로스앤젤레스 암흑가를 지배한 미키 코헨(Mickey Cohen)은 러키 루치아노의 측근 중 하나인 거물 유대계 폭력배 벅시 시겔의 죽음 이후 그의 조직을 장악했던 인물이며, 유대계와 이탈리아계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범죄조직을 이끌었다. 그는 마피아 위원회와도 가까운 사이였지만, 엄연히 라 코사 노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패밀리의 두목(Boss)은 아니었다. 로스앤젤레스 패밀리는 그런 독립적인 코헨 조직과의 싸움에서도 무능함을 보였다. [188] 한 마피아는 로스앤젤레스 패밀리가 한일이라고는 슈퍼맨을 죽인 것 밖에 없다고 했는데, 1950년대 TV 시리즈에서 슈퍼맨을 연기했던 조지 리브스의 사망 사건을 빗댄 농담이다. 당시에는 자살로 알려졌지만 여러 법의학자들은 타살을 의심했고 암흑가에서는 리브스와 정을 나누던 정부의 남편이 로스앤젤레스 패밀리에게 청부 살인을 요청해 암살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89] 크립스 블러즈 갱단에 마약을 공급했던 LA의 흑인 마약왕으로 ‘프리웨이’ 릭 로스가 있다. 그는 활동 시기는 다르지만 2007년에 제작된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로 유명한 뉴욕 할렘의 흑인 폭력배 두목 프랭크 루카스와 비견된다. [190] 토마소 감비노의 아버지 로사리오 감비노는 존 감비노와 형제다. [191] 이후 로사리오 감비노는 2019년에 시칠리아-미국 양대륙 간 불법 마피아 공조에 다시 한번 연루되었다. [192] 탬파는 야구팀 탬파베이 레이스의 그 도시다. 홈구장은 탬파의 위성도시인 세인트피터즈버그에 위치. [193] 산토 트라피칸테 시니어 (사진), 산토 트라피칸테 주니어 (사진)라고 불렸다. 특히 트라피칸테 주니어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마피아가 맡은 부분이 있다면 가장 깊이 관여했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영화 도니 브래스코에도 잠깐 등장한다. [194] 로스칼조는 플로리다 주 전역에서 술집, 라운지, 식당, 나이트클럽, 주류 가게를 운영한다. 1987년에 공갈 혐의로 3개월의 보호관찰을 받고, 1992년에 탬파공항 세관을 통과하는 중 자신의 서류 가방에서 38구경 권총이 발견되어 그 일로 2달간 수감되기도 했다. 2007년에 이르러 사실상 은퇴한 상태. [195] FBI에 의하면 전 뉴욕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 (사진)가 감비노 행동대장(Caporegime) 신분으로 2005년부터 탬파의 조직범죄를 총괄했다고 한다. 그는 2008년에 공갈, 납치, 살인 공모, 마약 밀매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 재판에서 승소했다. 고티 주니어 본인은 2001년을 끝으로 마피아를 은퇴했다고 주장한다. 여담으로 2017년에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 로에라가 고티 주니어의 무죄를 이끌어낸 변호사 제프리 리치만(Jeffrey Lichtman)을 선임했지만, 종신형을 피할 순 없었다. [196] 뉴욕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Boss) 비토 제노비스 (사진)의 사촌. [197] 2008년 사망. [198] 2021년 사망. [199] 1982년 사망. [200] 조르다노의 조카, 1997년 사망. [201] 2014년 사망. [202] 프랭크 발리스트리에리의 상담역(Consigliere), 2014년 사망. [203] 프랭크 발리스트리에리의 사촌, 2024년 사망. [204] 뉴올리언스의 이탈리아인 게토는 미국에서 가장 빈곤하고 큰 규모를 자랑했다. [205] 사진 가운데 시가를 물고 있는 인물. [206] (개별 문서 존재) [207] (개별 문서 존재) [208] (개별 문서 존재) [209] 2005년에 진행된 재판에서 생존한 일부 암살자들이 약 18년 만에 도둑들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210] 전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장(Caporegime) 마이클 프란지스는 "이런 얘기를 하면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앙카나가 대통령 암살에 관여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 [211] 당시 언론에서 존 디프론조의 동생이자 아웃핏 행동대장(Caporegime)인 피터 디프론조를 찾아갔는데, 시카고 아웃핏에 대한 취재를 하고 있다고 하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를 타고 떠났다. [212] 영상을 보면, 디프론조는 70년의 범죄 경력을 통틀어 단 한차례의 장기 징역형 선고도 받지 않은 진정한 기소 면역성 두목(Teflon Don)이며, 과거 전설적인 시카고 마피아 두목 앤서니 아카르도와 선대 두목 사무엘 칼리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되었다고 소개한다. 앞서 말했듯, 시카고 아웃핏을 겨냥한 2005년의 대대적인 마피아 기소에서도 검찰의 창끝이 디프론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213] 1990년대~2000년대까지 약 10년의 수감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디프론조의 참모 역할을 해왔다. [214] (개별 문서 존재) [스포일러] 영화에서는 버팔리노가 연방교정의료센터에서 사망하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1989년에 석방되었고 5년 후 민간 병원에서 사망했다. 대리인을 내세웠지만 공식적으로는 사망할 때까지 패밀리의 두목(Boss)이었다. [216] (개별 문서 존재) [217] 조지 맥마누스라는 도박꾼이 용의자로 검거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살해 동기는 로스스틴이 암살자에게 진 도박빚을 갚지 않아서라는 게 정설. [218] 미국 조직범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둘의 첫 만남은 이렇다. 어린 랜스키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였던 루치아노가 랜스키의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 이에 랜스키는 격렬하게 반항했는데,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덩치도 작았지만 그 배짱을 높이산 루치아노는 랜스키를 존중했고 그 뒤 평생 동안 지속되는 우정을 쌓는다. [219] 한 FBI 요원은 랜스키가 합법적인 길을 걸었으면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이라도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220] 이때 약 1800만 달러가 넘는 호텔을 날리고 700만 달러가 넘는 개인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랜스키는 말년에 인터뷰를 했을때도 쿠바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221] 요양원에서 고생하던 랜스키의 장애인 큰아들 벤자민 랜스키는 아버지가 사망 후 의료비로 남긴 돈도 부족해서 결국 요양도중 의료비가 끊겼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저렴한 시설로 옮긴 뒤 결국 빈궁 속에서 사망한다. 그나마 벤자민을 돌본 건 후처 테디로 차남 폴이나 막내 산드라는 벤자민을 도와주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의 시사프로그램 60분에 나와서 인터뷰한 후처 테디도 3억 달러 소문에 대해 바보 같은 루머라고 부인했다. 랜스키가 유족한테 남긴 돈이 많았다면 그의 큰아들이 빈궁 속에 죽은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222]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1957년에 러키 루치아노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프랭크 코스텔로가 비토 제노비스에 의해 밀려나고, 1962년에는 그 러키 루치아노가 사망하면서 마피아 세계에서 랜스키의 입지가 좁아졌고, 그저 지난 시대의 전설로 현직 마피아들에게 전관예우를 받으며 사망할 때까지 최소한의 생활만 영위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특히 랜스키는 이탈리아 혈통이 아니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223] 산드라에 말에 따르면 랜스키 형제의 자손들은 모두 부자가 됐는데, 그의 형제가 랜스키의 돈을 가로챘을 가능성이 있다. 차남 폴과 막내 산드라의 손자들은 랜스키의 숨겨진 재산 찾기에 몰두했지만 여태까지 직계친족들이 발견한 돈은 없다. 실제로 수사기관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 갱단이 버는 돈을 부풀려서 발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마피아의 위력을 과장할 수록 그들을 잡는 자신들의 업적이 빛나기 때문이다. [224] 이 조직은 유대계인 시겔이 수장인 조직으로써 당연히 라 코사 노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패밀리와는 별개의 조직이었지만, 시겔의 영향력으로 전미범죄연합체(National Crime Syndicate)에도 참여하고 뉴욕의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 패밀리들과 아주 가까웠으며 1961년에 조직이 해산되기 전까지 줄곧 로스앤젤레스 패밀리를 압도해왔다. [225] 러키 루치아노가 1946년 아바나 회합에서 시겔의 삶이 종결되어야(conclusion) 한다고 주장했고, 마이어 랜스키가 동의했다고 한다. 암살은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Soldier) 프랭키 카보가 수행했다. [226] 시겔 사후 그의 조직은 같은 유대인 혈통의 '로스앤젤레스의 왕(King of Los Angeles)'이라고 불린 미키 코헨(Mickey Cohen)에게 넘어갔다. [227] 우리나라 기준으로 야인시대를 본 이들이 이성순이 최고냐 김두한이 최고냐라며 논쟁하듯이 더 와이어에서 볼티모어의 한 흑인 마약상이 "뉴욕의 범피라는 인물이 경찰도 두려워할 정도로 흑인 조직폭력배 중 최고였다."라고 언급한다. [228] 2019년에 범피 존슨을 주인공으로 한 ‘갓파더 오브 할렘’이란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작중 실존 마피아 두목 프랭크 코스텔로와 조셉 보난노가 등장하고, 행동대원(Soldier) 시절의 빈센트 지간테가 등장한다. 특히 지간테는 사사건건 주인공 존슨과 마찰을 빚는 악역이다. 실제론 작중 묘사와 달리 둘 사이가 나빴다는 기록은 없고 동업자에 가까웠다. [229] FBI에서도 호파 살인을 실행한 인물로 살바토레 브리굴리오, 가브리엘 브리굴리오, 토마스 안드레타, 스티븐 안드레타를 유력 용의자로 여기고 있다. 이들의 윗선으로는 뉴욕의 앤서니 프로벤자노와 디트로이트의 앤서니 지아칼로네를 의심했다. [노조에_관해] 지미 호파의 전미트럭운송조합 외에도 국제항만노동자조합, 지붕수리공조합 등 셀 수 없이 많은 미국의 노동조합들이 여러 이유로 이탈리아계 마피아와 결탁 관계에 있었거나, 결탁 관계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마피아의 수지맞는 핵심 사업이 바로 노동 공갈이기 때문. [231] 지미 콘웨이는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다. [232] 바라오는 단순한 행동대장(Caporegime)이 아니라 약 6년간 루케시 패밀리의 상담역 대행(Acting Consigliere) 직책을 맡은 인물이다. 그의 동생 역시 루케시 패밀리의 정규조직원(Made Member)이었고 바라오가 부재할 때는 형을 대신해 행동대장 대행 (Acting Caporegime) 직책을 수행했다. 바라오의 영화 속 이름은 폴 시스로. [233]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600만 달러어치의 현금과 보석이 강탈된 사건으로, 이를 2013년 가치로 환산할 경우 약 3배인 1790만 달러에 달한다. 이 사건을 뉴욕 5대 마피아 패밀리가 배후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건 대부분의 관련자가 검거되지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600만 달러 강탈 기록은 2019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234] 에이스 로스스틴은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다. [235] 로젠탈이 배팅하면 미국 지하 도박판의 판도가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236] 앤서니 스필로트로를 모델로 한 캐릭터 니키 산토로는 영화에서 조 페시가 연기한다. 스필로트로는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유독 폭력성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주먹으로 때리면 자신은 야구 방망이를 들었고, 상대방이 칼을 휘두르면 자신은 총을 꺼냈으며 상대방이 총을 겨누기라도 하는 날에는 끝까지 쫓아가 살해했다고 한다. [237] 보르 브 자코녜는 영화 이스턴 프라미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238] 아그론 암살의 배후로 감비노 패밀리가 경유세 사기를 일으킨 보복의 일환으로 살해한 것이라는 설과, 1989년에 RICO 법으로 기소되는 보리스 골드버그라는 레드 마피아 두목이 배후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239] 바라굴라는 후에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카소와 호흡이 잘 맞아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도 함께 했다. [240] 2명의 레즈니코프 암살자들은 1989년에 10건의 살인으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사건의 자세한 인과 관계는 시간이 흐르고 1994년에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Underboss) 앤서니 카소가 정부 측 증인이 된 이후 언론에 사건을 회고하기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여담으로 크리스토퍼 퍼나리는 1986년에 보난노 패밀리 두목 대행(Acting Boss) 카마인 갈란테 살인 혐의가 포함된 여러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8년 복역 후 2014년에 출소했고, 앤서니 카소는 증언을 했음에도 다른 마피아 출신 증인들과 달리 감형이 인정되지 않아 1994년에 36건의 살인이 포함된 여러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의_레드_마피아에_관해] 이탈리아계 라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드러나지 않아서 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는 레드 마피아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자면 첫째로, 드러난 정보가 워낙 적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러시아계 폭력배라는 보리스 카민 (사진)이 있고, 미국 교도소에서 9년을 복역하고 2004년에 러시아로 추방된 뱌체슬라프 이반코프 (사진), 2010년에 연방 의료 보험 사기로 3년형을 선고받은 아르멘 가자리아란 (사진), 2017년에 기소된 라즈덴 피테르스키 (사진) 등이 있다. [242] 미국 마피아는 이탈리아 본토의 친척들은 물론이고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범죄조직과 연계하여 대륙 간 다양한 사업을 주관했다. 미국 마피아의 영국 내 파트너 중 하나가 크레이 형제. [243] 영화에서 묘사하는 크레이 형제와 안젤로 브루노의 담판 장면. 할리우드의 마피아 전문 배우 채즈 팰민테리가 안젤로 브루노 역을 맡았다. (다만 조연이기 때문에 작품 내적으로 큰 비중은 없다.) 여담으로 링크 속 유튜브 영상에서 수익의 6:4를 요구하는 안젤로 브루노에 맞서 5:5를 주장하는 크레이 형제의 모습을 보고 영국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재밌는 댓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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