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1957년생 전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성순(1957)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성순 李聖淳 | Yi Sung-s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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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시라소니[1] |
출생 | 1916년 2월 29일 |
평안북도 신의주부 미륵동
#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오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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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3년 1월 25일 (향년 66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 (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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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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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전주 이씨 |
신체 | 175~177cm[2], 75kg |
가족 |
아버지 이기정 1878 ~ 1943 (향년 65세) 형 이성덕 1912.1.20 ~ 1968.7.8 (향년 56세) 배우자 이진옥(1928년생), 슬하 1남 5녀 삼녀 이선숙(1950년생) 막내아들 이의현(1960년생) |
종교 | 개신교 ( 예장통합)[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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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제1공화국 시기까지 활동했던 싸움꾼. 본명보다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2. 생애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부농 이기정(1878 ~ 1943)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이성덕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4]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라고 하지만[5], '호랑이도 자식이 여럿이면 시라소니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양자가 무관한 표현이라 보기도 어렵다.[6]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다.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아오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7]이라 정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기록이 없을 리가 없다. 이외 알려진 점은 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만나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상하이에서 명성을 떨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8] 그의 주특기는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인 공중걸이 박치기 지만 어쩌다 한번 쓰는 일격의 필살기술이며, 온몸이 무기라 할 만큼 강해 주먹이든 발차기든 단연 최고였다. 대중매체에서는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더러 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과 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는데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출처]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 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이 공개한 증거 자료. |
당시 아들이 사이트에 남겼던 설명에 따르면, 사진에 적힌 글씨는 사진을 보는 이들 기준이 아닌 사진에 찍힌 병사들 기준이다. 즉, 사진에서 이성순은 우측 하단의 키 큰 사람이며 그 오른쪽이 소대장이다. 이성순의 큰 키를 알 수 있다.
6.25 전쟁 이후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되어 조직을 해산한 이래 서울의 조직폭력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에 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이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 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된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환(5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내달라' 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 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기홍, 조열승, 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많이 상해버렸다.
그래서, 이권의 분산과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한 뒤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그를 잔혹하게 린치했다. 이후, 1983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 동아일보>에서 과거 린치 사건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의 이권독점에 단신으로 싸움을 걸었다가 이정재의 부하 10명 정도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고 시장바닥에 버려졌다한다. 유지광은 본인이 쓴 회고록인 대명에서 이성순은 이정재의 사무실 앞에서 10대 건달 10명을 때려 눕힌 후, 사무실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무장한 이정재 부하 20명과 싸움을 하다가 전화선에 걸려서 넘어지고 그 틈을 타서 갈고리, 낫, 도끼 등으로 난자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유지광의 회고록 내용은 SBS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도 인용되기도 했다. 반면 야인시대에서는 석회가루를 눈에 뿌려서 시야를 가린 뒤에 집단 폭행한 것으로 묘사된다. 야인시대의 영상
이후 청계천에 망태로 싸서 버려졌는데 행인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무튼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병원[10]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부터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 시체인 줄 알았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를 시켜 후환을 없앤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서 나머지 다리도 부러뜨리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신상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이정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으나 이를 실행하기 직전에 김두한과 이정재가 화해를 하는 바람에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로는 거의 폐인이 되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중에 3.1 공수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하고 신익희와 장면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 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도중 시라소니 폭행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도 했는데[출처] 린치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정재를 감쌌다고 했다. 실제로, 사건과 관한 조사가 검찰에서 실시된 기록이 있으나 이정재의 재판 당시 수많은 죄상 가운데 해당 사건과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없음 불기소처분으로 보인다.[출처]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 시라소니는 결국 이정재의 처형 이후부터 조직폭력배 생활을 은퇴했고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에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영락교회 장로로 지냈으며, 2칸짜리 셋방에서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생을 마쳤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아들에게 아래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빛바랜 사진첩과 손때 묻은 성경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후 막내아들 이의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때 뒷세계에 몸담았다가 목사가 되었다.
3. 기타
- 신상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묘사된 날렵해 보이는 외모와 실제 외모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앞머리가 좀 벗겨졌고, 전체적으로 체격이 컸다고 한다. 딱 보기에 근육질은 아니었으나 몸통 자체가 매우 굵었고, 벌어진 어깨와 골격이 대단했으며, 일반 성인 남성에 비해 손이 두 배로 컸다고 하며[13] 왼손 약지 하나가 결손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여기 올라온 사진만 봐도 야인시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 '상하이 독수리'라고 불린 주먹 장천용과 절친한 관계로 지내며 그 아들 장호근과도 친분이 있었다. 소설가가 된 장호근은 이성순이 주인공인 소설 《시라소니》를 집필해서 그의 무용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게 했다.
- 그의 아내 이진옥씨는 "남편은 싸움 뿐만 아니라, 단도의 명사수였다. 30~40m 거리에서도 정확히 과녁을 맞힐 정도였으며, 몸이 정말 민첩했다"고 증언했다.
-
아내의 회고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아내와 결혼하고자 괴팍한 방법을 썼다고 한다.
48년에 친척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솔직히 너무 못생겨서 안 만나려고 했어. 그러니까 하루는 우리 집안 친척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쌍권총을 딱 꺼내놓고 '결혼을 안 시켜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친척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지.[14]
“아이들에겐 무뚝뚝했지만 내겐 한없이 다정했어. 심지어 맛있는 걸 사가지고 오면 아이들 몰래 나만 먹게 했지. 남편은 나 때문에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까.”
“처음엔 깡패란 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알았어. 그래서 굶어 죽어도 좋으니 제발 나쁜 짓은 하지 말라고 간청했지. 그런데 나쁜 짓을 해야 돈이 생기는 거잖아. 그걸 못하니까 남편도 답답했던지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 이력서엔 평생 빨간 줄이 하나도 없어.” 기사 원문
- 그는 비록 자식들에게는 엄한 아버지였을진 모르지만 [15], 그래도 이렇게 얻은 아내를 학대하기는커녕 시라소니에게는 아내가 법이었으며, 아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16] 이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부부관계에서 남자가 여자를 하대하는 것을 넘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많았던 데다, 주변에 공처가인 남자가 있으면 대놓고 호구 취급하거나 아예 가정폭력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았음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 그래서 이로 인해 전국구 주먹이면서도 전과가 없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항상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 피는 못 속이는지 그의 외손자도 좋은 운동신경과 파이터로서의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 홍수환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체육관에서 며칠 권투를 배웠던 관원이 유달리 재능이 있어 보여서 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이 관원이 이성순의 외손자였다고.
-
셋째 딸 이선숙이 2003년에
경인일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녀는 아버지가
장면 박사 등의 경호원을 한 적이 없었고 동대문 사단에 집단 린치를 당한 적도 없었다는 의외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전체 인터뷰 내용은
기사 원문 참조.
- 『시라소니 평전』(동아일보사, 이광석, 2003년)이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시라소니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일본인들과의 관계, 김두한 및 이정재와의 관계, 안두희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의 이정재 이야기에서 처음 부분에 언급되었다. 처음 시작을 시라소니 린치 사건으로 풀었으며 막내아들 이의현 목사의 인터뷰를 담아왔다. 이의현 목사의 말로는 박치기가 주특기였다고 한다. 초반에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본명 '이성순'이라고 불러 누구인지 몰랐던 게스트들이 나중에야 그가 시라소니라는 것을 알고 놀라는 것이 재미있는 포인트.[17] #
- 비록 개신교에 귀의하고[18] 싸움을 피했다지만 노년에도 그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시라소니와 인연이 있었던 영등포 대호파 보스였던 이상훈의 증언에 의하면, 어느 날 사보이 호텔 근처서 젊은이들끼리 시비가 붙어 쌈이 났는데 한 노인이 그걸 보고만 있던 중, 싸우던 한쪽에서 누군가가 품속의 칼을 꺼내 휘두르자 갑자기 칼을 휘두르던 남자의 칼 든 손을 확 붙들고는 그 특유의 말투로 "싸움은 주먹으로 해야 하는 거야."라고 내질렀다 한다. 그 말투 때문에 노인이 시라소니인걸 알아봤다고. 더 놀라운 건 당시 시라소니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있어서 다른 한 손만으로 칼 든 남자를 제압했단 것. #
-
이 당시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시라소니를
사칭하는 자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건장하고 힘 좀 쓰는 남성들 중
무전취식 후 시라소니를 사칭하며 밥값을 안 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 1979년에 이혁수 감독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다음해 속편까지 만들어졌다. 이혁수 감독 문서 참고.
- 1992년 영화도 있다.[19] 100편이 넘는 한국 영화 각본을 맡았던 이일목이 첫 감독 데뷔를 했던 작품. 일본군 장교 앞에서 화장하고 남은 친우의 유골을 씹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영화가 저예산이라 자동차도 1990년대 차를 썼을 정도이며 티날까봐 밤장면에만 나오는데 어차피 헤드라이트가 사각형이면 일제강점기 차량으로 보일리가 없다. 서울 관객 10만으로 흥행은 기대 이하였으며 당시 언론평은 영화 <장군의 아들> 흥행 성공에 나온 짝퉁 수준으로 평가하며 안 좋았다. 그래서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일목은 그 뒤로 <카루나> 같은 영화를 감독했지만 흥행하지 못했고 결국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4.2. 게임
4.3. 만화
- 이재학이 그린 <협객 시라소니>라는 만화가 있는데 이는 대본소용으로 출간되었던 '히라소니' 만화를 서점용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당시 이재학 문하였던 허영만이 전체적인 작화를 담당했다.[20]
- 극화가 방학기가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던 일제 치하부터 제1공화국 종말까지의 주먹계 에피소드들을 그린 < 감격시대>에서 김두한과 더불어 주연급 캐릭터로 등장했고 여기서 시라소니 에피소드만 따로 재각색하여 별도로 연재한 <바람의 아들>이라는 만화도 있다.[21] 어린 시절 서북 지역 유지였던 가문이 개신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해 호구지책으로 열차를 이용한 섬유 원단 밀수를 하는 일명 '도비노리' 일을 하면서 훗날 자신의 싸움 실력의 근간이 되는 신체 능력을 키웠으며 이 때 열차에서 떨어질 뻔하고 순사들에게 짐을 모두 빼앗긴 뒤부터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만주 웨스턴과 무협물 같은 분위기를 지향해서 과장과 왜곡이 심하니 믿지는 말자.[22]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방학기의 원작 <감격시대>를 드라마화한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에서는 원작만화의 시라소니를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지만 '신정태'라는 이름의 가상 인물로 등장하는 듯하다.
- 1994년부터 연재되었던 불문율에서 주인공 임대호와 우정을 나누는 형님으로 등장한다. 만화적 캐릭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제와는 전혀 딴판인 땅딸막하고 대두상의 외모로 그려졌지만, 바로 그래서 박치기의 명수라는 점이 더 두드러졌다. 일부러 땅딸막하게 그린 것인데 이 만화에서 시라소니는 일반적인 박치기가 아닌 몸을 날려서 하는 박치기를 주특기로 하며 그걸 2방 이상 버틴 사람이 거의 없다. 거기에 달리기가 엄청 빨라 차를 달리기로 따라잡는 미친 스피드를 보여준다. 물론 작중 무력은 최상급 수준. 의리까지 대단하여 임대호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많은 고초를 겪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인다.
- 1997년 소설 <시라소니>가 발매되었는데 작가는 친구 장천용의 아들인 장호근이다.
- 웹툰 < 사신소년>에서 이경호의 14번째 사용 영혼으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조선 최고의 싸움꾼'. 이후 벨처의 코어로도 등장하였으며 작중 시점의 10년 전 시점에서 이신이 회수한 코어로도 등장했다.
4.4. 드라마
- 1989년 KBS 드라마 < 무풍지대>에서는 배우 박건식이 연기했다. 실제 인물과의 외모적 싱크로율은 물론, 배우 특유의 으스스한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자신이 만두 장사를 할 적에 보았던 건달들의 행동과 말투, 대학교 시절 스승과 장인의 평안도 사투리를 기억해내며 연기에 참조했다고 한다.
- 2014년 KBS 드라마 <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에서는 가수 김현중이 연기했다. 신정태라는 인물로 재창조되었다. 방송가에서 시라소니를 주인공으로 한 <방학기> 원작의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이야기는 <야인시대> 방영 이후부터 꾸준히 나왔다. KBS는 2008년 6월 <시라소니>라는 월화 미니시리즈를 방영할 예정이었으나 캐스팅을 비롯한 제작 여건을 둘러싸고 방송사와 제작사 사이에서 마찰을 빚어 편성이 무산되었다. 당시 배우 이성재가 남자 주인공이었는데 결국 < 대한민국 변호사>로 가버렸고[23] 우여곡절 끝에 임호가 남자 주인공으로 낙점되었으며 수목 미니시리즈로 편성될 계획이었지만 끝내 무산되었다.[24]
[1]
스라소니의
서북 방언.
[2]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 목사는 아버지의 키가
175cm라고 밝힌 바 있고 이성순의 셋째딸 이선숙도 아버지의 키가
175cm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1983년 이성순 사망 당시
조선일보,
중앙일보,
선데이 서울은 그의 사망 소식과 일대기를 다룬 기사에서 그의 키를 177cm라고 소개한 바 있다.
조선일보 기사
중앙일보 기사
선데이 서울 기사
[3]
영락교회의
장로였다. 훗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실제 시라소니가 출석했던 영락교회에서 시라소니가 개신교에 귀의하게 되는 장면을 방송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4]
도비노리(飛び乗り)란
일본어로 '뛰어서 탄다'는 뜻으로 세관원의 눈을 피해 달리는 열차가 느려지는 때에 빠르게 올라타 중간에 타고 내리는
밀수 수법을 말한다. 당시의 열차 속도가 시속 35~40km 정도로 비교적 느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지금의 운행 속도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적잖은 요령과 신체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여담으로 이 열차 주행시 승하차는 밀수꾼뿐만 아니라 당대 미국, 일본의 철도회사 직원들도 엄연히 정식 업무 중에 하던 기술이었다. 심지어 미국에는 교범 영상도 남아있다.
[5]
이는
야인시대 1부에서
장도리가 언급한 바 있다.
[6]
그러므로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언급이 틀린 말은 아닌 셈.
[7]
훗날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점에 착안해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인 소위
만주 웨스턴이 등장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해 나온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역시도 이러한 만주의 지리적 특징에서 기인한 영화이다.
[8]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며 상하이에서 많이 먹어봤다고 말하고
감격시대는 아예 상하이가 배경이다.
[출처]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1989, 건국청년협의회), 청년운동 반세기(경향신문 1987. 02. 25).
[10]
지금의 보령약국이 있는 자리다.
[출처]
'이석재와 이정재는 이성순이란 사람을 도끼로 때려 중상해를 입힌 사실을 발견 수사를 재개'. - 동아일보 1960. 05. 29
[출처]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13]
반면 김두한 손은 일반 성인 남성보다 작았다고 한다.
[14]
해방 전 조선 최고의 미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동화백화점에서 근무했던 그의 아내는 백화점에서도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고 첫눈에 반한 시라소니는 아내 사랑이 정말 유별났다.
[15]
물론 목사가 된 아들도 있고 아내가 "사랑도 많이 받았고, 행복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엄할지언정 정성을 다해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 이진옥과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뉴질랜드로 이민, 셋째 딸은
평택시
비전동에서 한옥식당을 운영, 넷째 딸은
서울에서
사업, 다섯째 딸은
유학, 막내아들은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시라소니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뉴질랜드 이민 1세인데 부모를 따라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뉴질랜드의 한 한인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손수 내 머리를 빗겨주셨다." 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냈다.
[16]
아내의 회고에 의하면 결혼 후 이성순은 되도록 싸움을 피했다고 한다. 나쁜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아무리 이성순이 싸움을 피해도 그를 습격하는 주먹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한 주먹패가 길을 가던 이성순과 아내에게 시비를 걸며 위협하자 이성순이 순식간에 이를 제압해버렸다고 한다. 아내의 말로는 남편이 싸우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였고 눈 깜짝할 새에 시비를 걸던 주먹패가 쓰러지는 거만 봤을 정도였다고.
[17]
그중에서도
김동현은 처음에 이름을 듣고 자기보다 약할 것이라고 했으나, 그의 정체를 알고 제대로 당황했다. 격투기 선수인 본인 입장에서도 시라소니는 괴물이라는 이야기.
[18]
귀의한 계기도 아내 때문인데 아내가 어느 순간 병에 걸리자 한 번만 아내를 살려주시면 종교인이 되겠다며 신에게 빌었고 이때 기적적으로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자 후에 이정재를 용서하며 종교계에 본격적으로 귀의했다.
[19]
무려
후속작도 있다. 감독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주연이 같으므로 엄연히 후속편 확인 완료. 이 영화에서는 배우 차룡이 봉천두로 유명한 이상대 역을 하기도 했다.
#
[20]
이후 본인 이름으로 출간한
각시탈 시기와 그림체가 거의 같다.
[21]
전작이
최영의의 일대기를 그렸던 <
바람의 파이터>였던 관계로 저런 제목을 채택한 듯하다. 후에 <바람의 아들 시라소니>라는 이름으로 소설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22]
예를 들면
중국에서 벌어진 악녀 '데구치 가야'와의 이야기라든가 '모일화'와의 이야기 등이 있는데 모일화 같은 경우 <감격시대>에서는 포악한 성격의
꽃미남 마적으로 등장했지만 <바람의 아들>에서는 시라소니와 잠깐이지만 불 같은
사랑을 나누는 여협객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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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라소니> 자리에는 <
연애결혼>이 대타로 편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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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라소니> 자리에는 <
전설의 고향>이 대타로 편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