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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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64년경 | ||
사망 | 1399년 11월 28일 이전 (향년 35세)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394년 ~ 139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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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로만 1세 어머니: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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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이우가, 알렉산드루 1세, 보그단 | ||
자녀 | 슈테판, 보그단 | ||
가문 | 무사티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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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몰다비아 공국 제8대 보이보드.2. 행적
1364년생으로 전해진다. 1394년 1월 6일 폴란드 왕국 수체아바에서 작성된 문서에서, "슈테판은 페트루 2세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인 로마누스보다 그를 선호하는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도움으로 왕좌에 올랐다. 그 후 그는 폴란드 왕의 가신이 되어 어떤 적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 그의 유해에 관한 DNA 분석 결과, 그는 로만 1세의 아들이라고 한다.1395년 1월 6일, 몰다비아 공실 문서는 슈테판 1세가 몰다비아 땅과 국민의 이름으로 폴란드를 주권자로 받들며, 폴란드의 적, 특히"헝가리의 폭군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겠다고 밝혔다.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지그문트는 이에 반발해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국의 가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기로 했다. 1395년 초, 카니자의 슈테판이 이끄는 헝가리군 선봉대가 크리스투루 세쿠이에스크에서 오이투즈 고개 방향으로 침공했다. 이후 지그문트가 직접 지휘하는 헝가리군 주력 부대는 판가라시 고개를 통과해 슈테판 1세가 거주하는 할라우 시로 향했다.
지그문트는 판가라시 고개를 넘은 뒤 네암슈 요새를 요새를 포위했지만, 몰다비아군의 유격 전술로 인해 식량이 거진반 바닥나고 병사들이 피폐해지면서 공략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때 슈테판 1세가 앞으로는 헝가리 국왕을 주군으로 모실 테니 적대 행위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자, 지그문트는 이를 받아들여 후퇴했다. 하지만 슈테판 1세는 곧바로 몰다비아인을 대거 동원한 뒤 트르구 네암슈 시 인근 비카즈 고개로 돌아가던 헝가리군을 추격한 끝에 1395년 2월 12일 긴다오아니 전투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지그문트는 적군의 화살 세례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겨우 목숨만 건져 트란실바니아로 피신했다.
1399년 8월 12일, 슈테판 1세는 폴란드의 동맹자로서 타타르족을 상대로 한 보르스클라 전투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많은 병력을 상실했으며,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 그해 11월 28일 이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라두우치에 있는 보그다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80년 5월 20일, 그의 증손자인 슈테판 3세는 그를 기리는 묘비를 세웠는데, 묘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래된 슈테판 보이보드는 긴다오아니에서 헝가리의 폭군을 격파했다."
그에게는 올드 프로보타의 성 니콜라에 수도원의 구슬 두루마리에서만 명기된 아들 슈테판과 보그단이 있었지만, 그가 죽었을 때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형제 이우가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알렉산드루 1세가 찬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