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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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8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854년 6월 12일 (향년 86세)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807년 3월 7일 ~ 7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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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게오르게 한제를리 어머니: 스마라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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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콘스탄틴 한제를리 | ||
배우자 | 스마라그다 칼리마치 | ||
자녀 | 그레고리에 한제를리, 텔레마크 한제를리 | ||
가문 | 한제를리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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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90대 보이보드.2. 생애
1768년경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게오르게 한제를리와 스마라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콘스탄틴 한제를리가 있었다. 한제를리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후손을 자처했으며, 조상이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의 중병을 치료한 뒤 이 이름을 부여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오스만어, 아랍어 뿐만 아니라 여러 유럽 언어를 구사하도록 훈련받았으며, 20대에 몰다비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칼리마치의 딸 스마라그다 칼리마치와 결혼했다. 1805년 오스만 궁정의 대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으로 발탁된 뒤 1807년까지 그 직위를 역임하다가 오스만 제국 파디샤 셀림 3세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당시 몰다비아 공국은 러시아군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이아시에 있는 몰다비아 궁정에 갈 수 없었고, 그 대신 오스만 제국군에 종군했다. 그러다가 1807년 7월 24일 스카를라트 칼리마치로 교체되었는데, 이 이유는 출처마다 의견이 다르다. 1858년 페르디낭 회퍼가 발간한 프랑스어 전기 작품 <누벨 전기 일람(Nouvelle biographie générale)>에 따르면, 그는 셀림 3세에 대한 반대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스스로 폐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한 프랑스인 대위 오베르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더 많은 뇌물을 제공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이를 충족하지 못해 결국 축출되었다고 한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한 뒤, 오스만 궁정이 파나리오테스를 경계해 모조리 숙청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불안해 했다. 그러던 중 코스탄티니예 주재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로부터 그가 코스탄티니예의 저명한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암살당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받자 도주를 결심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흑해를 건너 오데사에 상륙해 러시아에 귀순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이동해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 귀족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고, 두 아들은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840~1842년 프랑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오스만어 단어를 모은 3권짜리 사전을 편찬했고, 이 공을 인정받아 성 안나 훈장을 받았다. 1854년 6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의 손자 미하일 울란갈리(Michel Ulangali)는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훗날 프랑스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