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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6:32:47

임수경 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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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임수경은 누구인가?3. 입북 배경 및 과정4. 입북 과정5. 입북 후
5.1. 북한5.2. 대한민국
6. 귀환과 그 이후7. 후폭풍
7.1. 북한7.2. 대한민국
8. 임수경 방북을 둘러싼 NL과 PD 간의 논쟁9. 비판10. 사건 이후의 임수경11. 참고/관련 자료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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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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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2] 생이었던 임수경 북한을 방문한 사건. 80년대 한국의 반공 분위기를 떠나서 불과 2년 전인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3]이 발생해 무고한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여대생이 북한의 최고지도자와 대면한 것이 남한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생각해 볼 만했다. 당시 남북한 사회 모두에게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후의 남북관계에도 꽤나 영향력을 끼친 대사건이다.

'미국과 노태우 일당'에 분노를 표하며 "미국놈들 몰아내자!"고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임수경을 내세워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던 북한 측의 의도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지도자 험담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모습과 화려한 패션으로 자유분방한 모습에 인민들이 동요를 일으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은 독재를 혐오하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였는데 정작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자 독재자[4]인 김일성을 만나 연예인를 본 것처럼 좋아하며 껴안고 건배는 물론 6.25 전범들이 안장된 혁명열사릉에 찾아가 참배하는 모습으로 인해 운동권에 종북 프레임이 씌워지는 부정적인 효과도 있었으며 '김일성 만세가 표현의 자유라더니 그냥 김일성이 좋았던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여론이 생겼다. 비유하자면 '일본의 욱일기는 주일미군에서도 쓰이는 수교국의 군기니 존중하자'는 논리로 대중들을 설득시켜 왔던 사람이 어느 날 야스쿠니 신사에서 참배하는 모습이 딱 공개되었을 때 대중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면 감이 올 것이다.


2. 임수경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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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은 1967년 11월 6일이며 1988년 7.7 선언 후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1989년에 방북한 사람이며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서울특별시에서 1967년 11월 6일에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 임판호(1933~2021)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54학번 출신에 1959년 경향신문 수습 기자로 입사해 중앙일보, 조선일보 등을 거쳐 서울신문 사회부장까지 지낸 기자로, 1975년 퇴직 후 문교부 대변인과 총력안보중앙협의회 홍보국장 등을 거쳐 1982년부터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부친이 공직자 경력이 있고 집에 컴퓨터가 있었을 정도니[5] 당시에는 제법 부유한 집 출신이었기 때문에 1986년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운동권과 접점이 없었다. 월간 <말> 지 1989년 8월호 기사에 따르면 대학생 때도 운동권과는 무관했고 모친으로부터 미스코리아 출전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자 1987년에 서울 올림픽 우정의 사절에 억지로 응모한 후 사진을 찍거나 1986년 여름방학 KBS1 <젊음의 행진>에 출연해서 김형곤과 짧은 콩트를 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임수경은 겉으로는 부잣집 딸내미이자 잘 나가는 아가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였고 대학생 치고 사회 운동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때였기 때문에 점점 사회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자서전인 <임수경 스토리>를 통해 1984년에 오빠 임용준이 군 복무 중 의문사를 당했기 때문에 학생 운동권에 발을 들인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1987년 불어과 풍물패 '어울'에 합류한 후 정치문화연구회, 13대 대선 공정선거감시단 등 내부적인 민주화 운동을 주로 했고 당대 주류였던 NL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보면 완전히 분리가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진해서 입북할 기미는 없었다. 그런 것이 총학생회에서 일하면서 바뀌었는데 원래 그녀는 프랑스 유학을 가서 불어과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총학 총무부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합류했다.

3. 입북 배경 및 과정

북한은 1989년 2월, 당해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 → 조선(북한)적십자사 → 대한적십자사 → 국토통일원(현 통일부)[6] →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되었고 제3기 의장 임종석의 주도 하의 전대협은 산하에 '평양축전 참가 준비위원회'를 두어 축전 참가를 준비했다. 총학생회에서 일하던 임수경은 당연히 ' 용인/ 성남 지역 총학생회연합 축전준비위원회'와 연결되어 일하게 되었다.

북한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하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노태우 정부 시절에 가능했던 건 당시 전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남북 간에도 화해 분위기가 퍼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 없는 남북 대화를 주장한 7.7 선언으로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7] 즉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자체는 당시의 정부 방침에 어긋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제재거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일보 2월 12일자에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는 우호적인 기사가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하고 성경을 건네주기까지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시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정부는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대협은 평축 참가를 위해 문교부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1989년 6월 6일에는 문교부 장관 정원식이 평축은 북한의 반미/반한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했다.[8] 거기에 공안정국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운동권 내부에서도 "지금 상황에서 통일 운동에 주력하는 게 올바른 방향인가"란 문제까지 제기되면서 평축 참가는 물 건너간 듯했다.

하지만 이미 실무적인 차원의 준비는 끝나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에서 안 된다고 해서 안 할 전대협이 아니었다. 전대협은 밀입북하기로 결정했다.

4. 입북 과정

대한민국에서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은 휴전선과 북방한계선을 제외하면 서울- 홍콩- 베이징- 평양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한중수교 이전에 가장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문익환 목사가 이 루트로 방북하는 바람에 이용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임수경은 크게 빙 돌아서 일본- 서독- 동독- 소련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6월 21일에 가족에게 "남해안에 놀러간다"고 말한 뒤 집을 나가 도쿄로 출발해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으로 갔으며 동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간 다음 평양으로 출발해 9일 만인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 날 임수경은 "돌아갈 때는 판문점을 통과하겠으며, 남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죽음을 각오한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이 순간 전 세계 언론사들의 텔렉스는 ' 전대협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식으로 그녀의 평양 도착 및 성명서를 긴급 타전했다.

임수경 북한에 발을 들이기 전날 한양대학교에서는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평양축전 전야제에 참가한 5천여 명의 대학생들은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써 북으로 향한다는 속보를 듣고 환호성을 올렸다. 다음날 6월 30일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평축 준비위원장 전문환은 한양대 기자회견에서 임수경을 평축에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들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대표 파견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을 조국통일의 단심으로 이해해 주기 바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불순한 마음도 없는 우리의 통일을 향한 평양행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경찰은 평축 출정식이 막 진행되려는 찰나에 임종석 의장 체포를 위해 7천 5백여 명의 전의경 병력을 한양대로 투입해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때 홍성담, 차일환 등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하 민미련) 소속 민중 화가들이 제작한 연작 걸개 그림 <민족해방운동사>가 경찰에 의해 탈취되어 이리저리 찢겨 불태워지기도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임수경 맞이를 준비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호텔에 1주일간 투숙시키면서 빵, 고기, 우유를 배터지게 먹여 급하게 살을 찌웠고 임수경용 박수, 김일성용 박수, 김정일용 박수도 다 따로 연습시켰다.

5. 입북 후

임수경은 7월 7일 북한 조선학생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해 남한의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발표 닷새 전인 7월 3일에 푸른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의 임수경은 평양 인민대회장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전대협이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한 후 "귀국 뒤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한국에서는 감옥에 가는 게 죄가 아니며 나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녀는 국보법을 어기면서까지 북한에 온 동기는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면서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되어야 하며 미국 한국 내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했는데 이 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5.1. 북한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폭탄을 터트린 것과 같았지만 남한에서는 당시 온갖 밀입북 사건이 난무했기 때문에 '이제는 평범한 대학생도 북한에 들어가네?', '아이고, 어린 게 사고 쳤구나.' 정도로 끝났는데 북한에서는 이 사건이 그야말로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폭탄

당시 온갖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정신없으면서도 즐거워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방북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남자였으며 남한에서도 명망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라 북한 측에서도 그 사람들도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웠던 반면 임수경은 중산층 출신이자 특별히 잃을 명망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거기다 임수경의 모습은 노동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 투신한 투사가 아니라 발랄한 남한 대학생이었다. 당장 북한의 관심은 기존의 방문 인사보다는 임수경에게 더 집중되었다. 살벌한 사회 통제가 당연시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사전 동원 명령을 받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학생들은 대학으로 복귀하라는 지도원의 명령도 거부하고 임수경을 보겠다고 농성하는 수준이었고 가는 곳마다 수천수만의 군중이 몰려들어 임수경의 차가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아예 남장을 하고 이동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북한에서는 선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상투적인 선전 방문을 준비했는데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임수경의 돌발적인 행동은 북한 측의 예상을 뛰어넘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 없이 즉석연설을 하는 등 통제가 안 되었으니 선전 담당자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일반 대중들도 당 간부들이나 로동신문 기자들도 발언요강 없이는 인사말도 못 하고 쩔쩔매는 것만 보아 오다가 젊은 여대생이 거침없이 청산유수로 말하는 것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한참 나중인 2023년, 탈북민이 하는 유미카 채널에서 역시 같은 탈북민인 박유성(유튜버)와 한국의 교육에 대한 대담을 하는데, 여기서 임수경이 언급된 적이 있다. 한국과 북한의 중등교육 격차에 대하여 토크를 진행하면서 임수경을 직접 겪어본 세대인 이유미씨는 "북한 대학생들은 다들 토론문(원고)을 가지고 나와서 읽는데, 임수경은 원고도 없이 그냥 말을 막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임수경이 굉장히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기(대한민국) 와서 보니 전부 다 그 정도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하는 내용이 있다. #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16비트급 컴퓨터[9]를 보고 "어, 우리 집에 있었던 거랑 똑같은 거네?"[10]라는 발언으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었다고 알려졌지만 2016년에 출간된 임수경 스토리에 따르면 와전된 이야기라고 하며 대신 북한 룡성 맥주가 맛없어서 하이네켄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특히 앞서 말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도 결코 빈말이 아니라 세습 정치까지 물고 늘어져서 주변의 안내원들을 경악시켰다.[11]

특히 북측이 미리 준비해 둔 ' 조선은 하나다'라는 선전 문구를 끝끝내 거부하고 '조국은 하나다'로 고치게 만들었다. '조선'이란 공식 국호를 쓰는 북한의 입장에서 '조선은 하나다'는 한 마디로 우리가 정통이고 남한은 사이비 짝퉁 정권이란 소리다. 임수경은 이걸 거부하고 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 조국'을 사용한 것이다. 출발 직후 가족에 보낸 편지에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썼다. 거기에 북한의 학생들이 손수 매 준 붉은 스카프를 덥다는 이유로 풀어헤쳤을 뿐 아니라 집단체조 관람 중에 퇴장하였다. 임수경을 환영하기 위해 나온 대학생들 중에 양말이 없어서 못 신고 나온 학생이 있었는데 임수경이 또 그 학생을 놓치지 않아서 왜 맨발이냐고 묻는 바람에 또 북한 측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은 임수경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처음엔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뜻을 보였으나 북측 실무자들이 취지를 설명하자 납득하고 방문했다고 한다. 김일성 체제 찬양에 악용될 수도 있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KBS1 <인물현대사>에 출연해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임수경은 북쪽 실무자들한테 "만경대가 세계청년학생축전의 행사 중에 하나냐? 거기 가는 게 그렇다면 가겠다. 나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러 온 사람이지, 만경대에 가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고 이에 대해 "북한을 방문한 고위 인사들은 만경대를 방문하는 게 공식 행사"라고 북측이 설명하자 결국 만경대를 방문했다고 해명했다. 과연 북한 측의 저 정도의 설명이 김일성 생가를 방문할 만한 정당한 사유인지 여부는 각자 판단하자.

하지만 임수경의 북한에서의 여러 발언보다는 젊은 여대생의 존재 자체에 북한 사람들은 더 관심을 보였다.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의 특성상 임수경의 영향력은 북한의 일부에 한정됐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임수경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북한 일각에서 임수경은 인기 정상의 아이돌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수경은 전형적인 새내기 운동권 여대생의 복장(하얀 티셔츠에 긴 청바지)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이미지부터가 북한에서는 엄청난 문화충격이었다. 마치 극성 아이돌 팬들이 하듯이 북한 젊은이들이 임수경에게 달려들어와 포옹을 하고 격하게 스킨십을 해대서 보호위원이 진땀을 빼며 그들을 떼어놓는 모습이 영상으로 찍히기도 했다. 임수경이 남한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12] 북한 중고생과 대학생들이 못 가게 막으려고 스크럼을 짜고 함께 데모를 했으며 단식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90년 남북고위급 회담 차 방북한 남한 취재진에게 북측 안내원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임수경 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해서 남측 취재진은 대단히 당황했다.

당시 북한에서 대학생의 이미지라고 하면 그저 시커먼 옷을 입고 당의 규율이나 주체사상만 외워야만 했던 수동적이고 암울한 이미지였는데 작고 당돌한 여성캐주얼한 복장으로 통일, 통일을 외치니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인민군 군인들이 부대 안에서 임수경 사진을 아이돌 사진처럼 들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북한 대학생들은 몰래 모여서 "남조선의 대학생이 저렇게 당당하게 다니는데 우리는 뭐냐."고 한탄 비슷하게 말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 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 전대협진군가> 같은 걸 불렀다고 하는데 이후 이 두 노래는 북한에서 유행했다. 오죽했으면 이런 예상하지 못한 임수경의 선전전(?) 덕분에 의도치 않게 이득을 본 남한 정부에서 뜻하지 않게 공을 세웠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할까. 관련 칼럼

다만 임수경은 이런 효과를 의도적으로 노리고 간 것이 아니었으므로 자유의 열사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될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단의 비판 문단 참고.

5.2. 대한민국

방북 자체야 임수경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했지만 문익환 목사나 평화민주당 서경원 국회의원 같은 명망 있는 사회운동가도, 황석영 같은 저명한 문필가도, 대학생 운동권의 핵심 인사도 아닌 평범한 여대생의 입북은 남쪽에서도 큰 관심사였고 TV 대담토론에서도 거론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치기 어린 여자애의 행동으로 취급되었고 임수경의 방북으로 인해 남한이 뜻하지 않게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라도 썩 나쁘게 평가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이 발표된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임수경이 직접 기초했다는 이 선언문은 당시 화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 평화협정 체결, 남북 불가침 선언처럼 상식적이며 누구나 납득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이었지만 하필이면 그 중에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꼭 북한의 주장을 따라서만은 아니었고 당시 전대협도 주한미군이 자주통일의 방해물이라는 이유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임수경은 단계적이란 용어를 빼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긴 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주한미군 철수는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13] 비록 탈냉전 분위기가 강해지는 중이었다곤 해도 당시 남한에서 주한미군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우리나라를 구해준 군대'였다. 게다가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거는 일이었다.

덕분에 남측에서 임수경에 대한 비난이 거셌으며 언론도 공안당국이 흘려준 '임수경 가족의 좌익 성향'이란 유언비어를 충실히 보도하여 마녀사냥에 적극 가담했다. 1984년 군 복무 중에 총기사고로 이미 죽은 오빠는 염세주의로 자살했다고 했고[14] 10촌 이내 친척 가운데 월북자가 8명이라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근거 없는 기사가 나왔다. 이로 인해 당시 한국언론회관 이사장 비서실에 수습직으로 근무 중이던 임수경의 언니는 6월 30일에 '임용해제' 통지를 받았고[15] 부친은 다니던 직장에서 사직 종용 및 해고 협박, 그리고 온갖 욕설이 들어간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6. 귀환과 그 이후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바오로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했다. 원래는 7월 27일[16]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지만 마침 이 시기에 판문점 군사정전위 협정이 열려 6일간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북한 청소년과 대학생 수백 명이 함께 투쟁을 하며 임수경을 응원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직접 임수경의 안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할 정도로 정권 차원의 관심을 받기도 했으나 임수경 신드롬이 너무 큰 수준으로 발전하자 북한 당국도 부담감을 느끼고 임수경에게 3국을 통한 귀국을 종용했으나 임수경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막상 귀환한 순간 그들 앞엔 전대협 학생들도, 임 양의 부모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도 아닌 유엔군과 안기부 수사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엔군 소령은 이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판단해 체포될 것이라고 했고 안기부 수사관들은 몸 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이들은 멸공관에 배치된 경찰 헬기에 탄 채 안기부로 가서[17] 조사를 받았다.

11월 13일 1차 공판이 열렸다. 이 날 심리에 앞서 임수경은 모두진술을 통해 " 북한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 선전에 앞장섰다는 안기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하면서 "현직 장관[18]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 5시간 동안이나 평양축전을 관람했으면서도 공직에서 활동 중인데 내가 수의를 입은 채 포승줄에 묶여 법정에 선 건 형평성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국가보안법에 대한 처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열흘 뒤 전대협 의장 임종석은 기자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발표하며 전대협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임 양의 평양축전 참가는 반국가단체로의 잠입탈출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조국으로 간 것에 지나지 않고,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할 뿐 아니라 이 법에 의해 구속/수감된 임 양 및 모든 양심수는 즉각 석방되어야 한다. (중략)

현재 노태우 정권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은 반국가단체 우두머리와의 회합통신을 시도하는 무모한 불장난일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에 해당하므로 이를 추진해 온 노태우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이적행위자로 처벌되어야 한다 (중략)

지난 1988년의 7.7 선언을 통해 북한을 적이 아니라 민족공동체로 규정한 노태우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극형에 처해져야 하며 현재 진행 중인 남북적십자회담, 체육회담, 국회회담 등도 동일한 근거로 엄벌에 처해져야 한다. (중략) 이미 구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린 냉전논리에 따라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정권은 더 이상 이러한 냉전논리를 정권 유지에 이용해선 안 된다.
- 대학정론 1989년 11월 30일자 1면 기사 <임종석 의장 기자회견 - "임 양 방북, 전대협 독자적인 판단">
해를 넘겨 1990년 1월 8일 임수경 문규현 신부는 5차 공판을 거부했고 변호인단은 사임하겠다고 했다. 당시 주임 변호사로 이 사건을 맡은 천정배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그 동안 국민적 관심에 비추어 법원 설비가 허용하는 한 최대한으로 공개된 상태에서 재판 받기를 희망해 왔으나 이 같은 극도의 방청 제한 상태에서 공개재판 원칙에 비추어 정당한 재판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며 " 국가보안법 자체의 위헌성과 반통일적 성격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과거 행적에 비추어봐도 법원이 정당한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판에 임했던 것은 공개재판을 통해 국민들에게 방북의 정당성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나 사실상 비공개나 마찬가지로 진행돼 더 이상 재판에 응할 의미가 없어졌다."고 했다.

2월 5일 선고공판에서 법원은 임수경 문규현 신부에게 국가보안법상 특수탈출 및 잠입, 회합, 고무찬양, 금품수수죄 등을 적용해 이들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 징역 8년 및 자격정지 8년을 각각 선고했고 이들이 항소하면서 6월 11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들에게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으로 각각 감형했다( 90노1023). 임수경은 7월 27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청주여자교도소로 이감되었다. 8월 1일에는 임수경의 모친과 대학생 등으로 구성된 면회단이 청주여자교도소로 면회를 가려다 교도소 측 관계자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9월 26일에 대법원은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상고를 기각하고 이들에게 각각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측은 "피고인들의 입북은 전대협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원심대로 이들을 유죄로 인정한 건 정당하다고 했으며 재판부도 "피고인들에 대한 항소심이 끝난 뒤 '남북교류협력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시행되고 있지만 이 법은 남북한의 왕래/교류협력사업 및 통신/역무제공 등의 남북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해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법률에 우선 적용된다"고 지적하며 위와 같은 요건을 충족치 않은 이 사건에 대해선 해당 법률의 적용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90도1613).

그러나 이들은 3년 5개월간 복역한 후 199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7. 후폭풍

7.1. 북한

"남한의 체제 경쟁 승리를 북한이 생중계로 알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정부 당국에도 "(비록 범죄자지만) 뜻밖의 공로를 세운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당시 북한 사회가 이 사건으로 받은 충격은 상당했는데 임수경 자체가 당시의 북한 젊은 층에게 엄청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북한에서 임수경은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다. 방북 후 북한 대학생 사이에서는 원래는 금지된 미국의 상징인 임수경과 같은 면티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이 일명 림수경 복장으로 유행했으며, < 전대협 진군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북한 전역에서 유행했다.

북한은 중산층 자제인 임수경을 통해서 남한이 어떤 사회인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즉 임수경의 여유롭고 자유분방한 행동과 경제적 여유를 통해 남한의 경제적 수준과 남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북한에서 사상 투쟁(사상 통제를 겸한 사실상의 재 세뇌)을 하느라고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임수경의 가족들도 뜻하지 않게 북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을 때 임수경과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걸 믿지 못한 북한 기자방문단이 불시에 임수경의 집을 방문했는데 '통일 열사의 가족이 고초를 당하는지 확인하고, 만약 사실이면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임수경이 살던 자택에 가 보니 식솔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고 임수경 가족의 생활상까지 북한 TV로 방영(사실상 생중계)되었다. 북한에서 사는 사람이 무단으로 남한에 갔다가 되돌아오면 본인은 사형수가 되고 식구를 포함한 일가친척은 연좌제가 적용되어 3대가 정치범수용소로 들어가기 때문에 임수경의 가족들이 멀쩡히[19]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에게는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인민혁명당 사건,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정치적인 사건의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주기적인 감시와 막대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던 사례는 있긴 했으나 박정희, 전두환 정권조차도 반체제 인사, 그것도 (누명을 쓰고) 처형된 반체제 인사의 가족들을 가족만이라는 이유만으로[20] 모조리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임수경이 방북한 1989년은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이후였다. 노태우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적어도 이 무렵부터 군부독재의 청산과 민주화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권위주의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적어도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끌고가서 고문하는 식의 공안몰이가 횡행하는 시절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사건처럼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라면.

더구나 그런 정치범의 집안이 우선 수도인 서울에서 쫓겨나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단 사실에 북한 사람들은 경악했고[21] 임수경의 아버지가 지하철 공사 간부라는 사실에 또 경악했으며[22] 기자들이 남조선 당국의 탄압과 감시를 뚫고 갔다고 강조해 놨는데 임수경의 집에서 컬러 텔레비전[23], 소파,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이 있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통조림이나 우유가 우수수 쏟아져나와서 북한 주민들은 그만 눈이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잘사는 집의 기준은 소위 ' 5장 6기'였다. 링크에서도 언급되지만 5장은 " 이불장, 양복장, 책장, 식장, 신발장"을 말하며 6기는 " 수상기, 랭동기, 세탁기, 재봉기, 선풍기[24], 록음기"를 말한다.[25] 거기에 임수경의 어머니는 기자들을 환대하면서 "늘 먹던 대로 차렸다"면서 밥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쌀밥에 반찬도 많이 나왔다.

반면 당시 북한의 에피소드 중에는 평양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아주 넉넉한 형편’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외국인 대접용으로 통조림 2개를 주고 이를 외국인들에게 접대하게 했다는 에피소드와[26] # 평양 가게의 점원이 닭 한 마리를 얼마 동안 먹을 수 있냐는 서독 취재진의 질문에 "닭 한마리면 온가족이 한 달은 거뜬합니다!"[27]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28][29]

북한에는 옛날이나 요즘이나 평양, 신의주, 라선, 평성처럼 잘 사는 지역을 제외하면 상술한 물품들을 모두 갖춘 집은 극소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고난의 행군 당시 경제가 쇠퇴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후에도 80년대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한 걸 보면[30] 평양 바깥에서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31] 물론 남한에서 저것들은 1990년 당시에도 중산층이나 중산층 아니더라도 재봉틀만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다 있었다. 당장 단칸셋방에 살아도 1990년대라면 웬만하면 다들 갖고 있었던 물건들이다. 재봉틀은 두지 않는 집이 많았지만, 이것은 남한이 북한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옷 가게만 가면 입맛대로 옷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남한의 경제 발전의 영향으로 이미 1980년대부터 패션 산업이 발달하고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의류 공급이 늘어난지라, (지금도 그렇지만) 재봉틀로 만들어 입는 것보다 가게에서 사서 입는 게 더 저렴했다.

물론 위에 설명했듯이 임수경은 남한에서도 제법 형편이 넉넉한 중산층 이상의 집안 출신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안면몰수하고 임수경과 그 가족들을 부르주아라고 폄하하며 '저건 남조선의 거짓 선전일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체제 경쟁에서 졌다는 걸 TV 생중계를 통해 보여주면서 통렬하게 인정하고 만 꼴이 되고 말았다.

임수경이 재판을 받을 때도 북한은 충격을 받았다. 북한은 로동신문으로 "임수경이 구형 15년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고 소개하며 한국 정부를 비판하긴 했지만, 사실 이것도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답정너식 인민재판이 아닌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은데다, 사형이나 무기징역도 아닌 징역 15년을 구형받고 최종적으로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은 북한 주민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관대한 처분이기 때문. 게다가 그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선고 형량의 70%인 3년 반만에 나왔다는 사실까지 북한 언론에 그대로 보도되면서, 반역자를 엄벌하기는커녕 고작(?) 15년형을 구형하고 그건 너무 과하다며 1/3로 깎아 주는 것도 모자라 그것조차 다 채우기 전에 석방해 버리는 남한 정권의 상상도 못한 상냥함(?)에 북한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다 그 기간에 (북한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감옥에서 편지 일기를 쓰고 책도 읽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북한으로서는 진짜 뒤집어질 일이었다.[32]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공식 처벌 외에도 임수경과 그 가족들이 겪은 유무형의 불이익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것은 북한의 현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실제로 북한이탈주민인 도명학 작가는 "아니, 남조선에서는 어떻게 정치범이 감옥에서 글을 쓸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 못 가서 석방도 되었다고? 그럼 지금 남조선이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 아닌가?" 라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의 발전상을 1988 서울 올림픽이 방영되는 중국 방송을 몰래 TV로 보고 너무 놀라서 "나는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는 거지들만 살고 있다고 배웠는데, 어떻게 남조선에서는 강대국들만 하는 올림픽을 개최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못 사는데 서울은 저렇게 높은 건물도 많고 국민들도 잘 먹어서 영양 상태가 저렇게 좋은 것인가? 내가 북한 사회에 속았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북한의 체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배신감을 느껴 탈북을 선택했다고 한다. 실제로 서울 올림픽 직전과 그 전의 올림픽 개최국이 다름아닌 냉전 시기 양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 소련이었으니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휴전선을 넘어 돌아갈 때 죽으려고 돌아가는 줄 알고 슬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기준으로 사실상 용서해 준 거나 다름없는 이 행위에,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남한에 대한 이미지가 왕창 무너지면서 충격은 훨씬 커졌다.

더구나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89년, 즉 민주화 2년 후였고[33]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전쟁 이후 경제가 매우 급격히 성장하긴 했어도 아직 미흡한 점이 수두룩한 신흥공업국이었다.[34] 그런 시절에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의 모든 것을 보고 잘 살고 자유로운 한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2024년 현재에는 그때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국가 수준 차이가 더더욱 커졌다.[35]

탈북자 출신 가수인 김용도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책에 이 일을 회고하며 충격이었다고 서술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 2024년 8월 18일 방영분에서도 언급되었으며, 동독 유학생 출신으로 탈북한 사업가 전철우가 출연해 임수경에 반해 탈북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

7.2. 대한민국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남한에선 이 사건을 북한에 비해서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였다. 북한에서 임수경이 했다는 남한 정부 비판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었으며, 거기에 앞서 서술한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를 북한 사회 내부에 뜻하지 않게 알리게 되는 효과까지 나름대로 정치적인 이익이 컸기 때문. 덕분에 이적행위 자체보다는 북한에 변화의 바람을 약간이라도 불고 온 통일의 기수라는 면이 더 강조되었다.

물론 정말 아무 일도 없는 수준은 아니었고, 이 사건으로 임수경의 가족들은 크고 작은 사회적 불이익을 겪었다. 임수경의 언니는 언론회관에서 짤렸고,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던 임수경의 부친은 7월 기구개편에 따라 이사로 승진할 뻔하다가 해당 사건으로 승진이 누락되었고, 온갖 폭언과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정권과 타협했다. 그리고 1995년에 관리이사로 승진하기 전까지 교육원장 등 한직에 머물렀다.[36] 뿐만 아니라 일가 친척 모두 주변에서 '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다. 비록 민주화가 되었다지만 아직까지 레드 컴플렉스가 만연했던 시대에서 임수경의 집안이 연좌제 형태로 이런 고초를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당시 노태우 정부가 임수경에게 압박을 가한 건 사실이고 우익 측에서 엄청 욕하긴 했다. 결정적으로 임수경 방북 이후 8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쉴 새 없이 온갖 사건이 몰아쳤고 거기에 1991년 박성희-성용승, 1994년 최정남, 1996년 도종화-유세홍 등 후배들의 방북 사건 때문에 재판 이후에는 금세 잊혀졌다.

2012년 임수경의 탈북자=변절자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이 사건이 잠시 재조명되기도 했다.

8. 임수경 방북을 둘러싼 NL과 PD 간의 논쟁

임수경의 방북은 NL과 PD 학생 운동권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당시 PD 계열은 임수경의 방북을 반대하면서 "반파쇼 투쟁에 깃발을 내린 민중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어떠한 수단으로도 평축에 참가하고자 하는 무원칙적 투쟁이자 개량주의적 통일 운동이며, 적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어리석은 투쟁."이라고 개탄했다.[37]

1989년 7월 5일 서울대학교 교내에 게재된 대자보에서도 "임 양의 평양 행적은 평축 참가만을 목적으로 하는 '만남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현 정권(노태우 정권)이 휘몰아치는 매카시즘을 자초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결국 민주 노동 운동, 반민주 악법 개폐 투쟁 등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민중 역량을 한꺼번에 꺾어버리는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임수경이 평축 참가로 분단의 벽을 넘어섰다는 전대협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임수경의 언동은 북한 편향주의에 매몰되어 대한민국에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켜 5공 청산, 광주학살 문제 해결, 악법 개폐 운동을 통한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전대협 측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 NL 노선에 반대하는 경향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 분열주의라고 반박하였다.[38]

9. 비판

강철환은 자신의 저서 < 수용소의 노래>에 당시 임수경을 본 충격을 그대로 서술했는데 임수경의 방북으로 남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라디오를 몰래 청취하다가 탈북했다고 밝혔다.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근무하다 탈북한 완전통제구역의 저자 안명철은 경비대로 근무하던 시절 임수경의 자유분방함에 놀랐고 이후 임수경이 그 끔찍한 국가보안법에 걸려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39]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북한 체제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탈북자들 사이에서 임수경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행위 자체가 옳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임수경이 세운 공을 생각해 보면 투옥하지 않았어야 맞다든가 아예 이런 효과를 노리고 자유롭게 방북을 허용해야 한다거나 하는 의견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것은 긍정적인 효과를 냈으면 행위도 정당화된다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효과는 긍정적이더라도 행위 자체는 비판받을 수 있다. 일단 임수경의 방북 자체는 북한의 내부적 붕괴와 대한민국 실체에 대한 대중의 파악을 노리고 간 것이 아니었다. 되려 임수경이 정말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방북한 것이라면 탈북자 증가와 북한 내부 붕괴 효과는 그녀가 원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긍정적 효과와는 별개로 방북 행위나 의도 자체는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다.

결정적으로 만일 그녀가 북한 체제의 붕괴나 민주화를 목적으로 방문했다면 탈북자를 배신자로 지칭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발언 때문에 한때 탈북자들의 우상이기도 했던 임수경의 이미지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탈북자 대학생에게 "근본도 없는 탈북자 XX들이 대한민국 왔으면 입 닥치고 조용히 살어. 이 변절자 XX들아."라고 막말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임수경 "탈북자 XX들" 욕설...논란 일파만파) 탈북자 단체는 분노하여 '의원직 사퇴 요구' 움직임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생존을 위해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등 심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탈북 대학생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게 아닌 심한 막말로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은 실드 쳐줄 건덕지가 없다.[40]

애초에 임수경이 북한 인민들을 탈북시키기 위해 갔던 것도 아니고 임수경이 가서 한 것이라곤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 듯이 발광을 합니다.'라거나 '외세에 억압 받고 있는 조국'이라며 미국 놈을 몰아내자라는 둥 철저히 북한의 선전선동에 이용당하고 왔을 뿐이다. 임수경이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하라거나 자유를 쟁취하라거나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북한에 가서 남한과 미국 디스했을 뿐인데 그걸 본 일부 주민들이 임수경의 옷차림이나 임수경이 남한에서 안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 깐 것은 그들 스스로의 눈썰미가 대단한 것일 뿐이지 임수경이 의도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어떤 사건을 조작해서 발표했는데 너무 티가 나게 조작해서 정부의 음모를 간파한 사람들이 일부 있다면 그 사람들의 눈썰미가 대단한 것이지... 사건을 조작한 행위 자체가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조작된 사건을 발표할 때 그대로 믿는 국민들도 많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조선 대학생' 임수경이 남한과 미국 깐 것을 보고 '역시 남조선과 미제는 나빠' 라고 생각하는 북한 주민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북한 중국을 깠어도 북한 주민들이 열광했을지 생각해 보자.

'北 매체 대남 비방 리트윗' 임수경 의원 수사 착수(2012) 사실 임수경으로 인해 진보세력과 민주당이 적지않은 손해를 봤다. 뜬금없이 북한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의 글을 리트윗해서 논란이 됐는데, "지금 청와대는 리명박을 우두머리로 한 대결분자들의 집합체, 쉬파리 서식장으로 되고 있다"는 글을 태연히 퍼와서 보수단체에게 고발까지 당했다. 보수단체는 "과거 방북해 북한을 찬양한 임 의원은 이번에도 국가보안법을 고의적으로 어겼다는 결론"이라며 "또다시 종북 행각을 했으니 가중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 "색깔론 무찔러야…임수경 리트윗은 주의줬다" 기사를 보면,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박지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철지난 색깔론이라고 반격하는 한편, 임수경에게 북한 사이트의 글은 퍼오지도 말고 접속도 하지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수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뼈있는 말도 남겼다.

이런 임수경의 행보로 인해 일반적인 운동권마저 종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 진보세력들은 이석기의 통합진보당과 함께 하던 시절 NL의 종북성을 간파하여 당권파를 종북주의자로 규정하고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등 종북과 거리를 두었음에도 워낙 인상적인(?) 임수경의 활약으로 인해 운동권들은 다 저렇게 북한 좋아하지 않냐며 매도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유시민 입장에선 도매금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41]

임수경은 김일성을 BTS 만난 듯이 좋아하고 "미국과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듯이 발광을 합니다"[42]라는 등 북한 편에 서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보였다.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지만,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43]는 말처럼 박정희, 전두환이 독재를 했다고 그리 문제 삼던 운동권들이 정작 김일성에게는 독재를 문제 삼지 않고 너무 좋아하는 모습에 운동권 자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김일성 앞에서는 전두환이란 독재자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으로 전락할 정도로 차원이 다른 독재자이다. 유시민은 카메라를 향해 "전대갈!" 외치며 탈모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만약 북한의 대학생이 "김돼지!" 외치거나 "혹부리 영감!" 외쳤다면, 확실한 것은 본인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독재자 끝판왕' 김일성에게는 '민족의 령도자'처럼 대하는 모습이 반공세력들의 눈에 좋게 보일리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전두환을 못잡아 먹어 안달했던 것이 독재자를 혐오하고 자유를 열망했기 때문이라면 김일성을 보면 멸공이라도 외쳐야 하겠지만 오히려 좋아했기에 운동권을 싸잡아 종북이라 의심하던 세력들에게 확신을 주었다.[44] 게다가 노태우는 전두환보다는 나은 인물이었음에도 "미국과 노태우 일당"이라며 증오심을 보인 반면, 정작 6.25 침략을 일으키고 통일을 방해한 '가해자'인 "중국과 김일성 일당"에게는( 1951년에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 건물 앞에서 춤을 추며 승리를 자축하는 사진을 보자) 꽤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한국전쟁 피해국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사안 자체의 정당성을 흐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실제 임수경은 '미국과 노태우 일당'이 북한을 비판하면 한국 정부의 실정을 부각시키면서[45] 북한에 향하는 반공 정서를 약화시켰고, 북한에서도 남조선 역시 어차피 똑같다며 피해자 비난과 함께 자신들의 악행을 물타기했다.

전술했듯 당시 임수경의 북한 내부 행보가 북한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자유의 열사라고만 볼 순 없으며 임수경의 행보가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임수경의 방북 당시 발언 전문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다음과 같다. 다만 반미 감정은 당시에는 급진적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기도 했다. 시대상을 감안하면서 보자. 그간의 행적을 담은 KBS 보도 자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축전 참가자로 온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임수경입니다.
자동차로 불과 4시간이면 올 거리를 저는 24시간을 비행하면서 그리고 열흘이라는 시간을 걸려서 이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전대협은 평양축전에 참가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청년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반드시, 반드시 조국 통일의 염원을, 조국 통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46]
자랑스러운 조국 통일 투쟁 만세! 감사합니다.
남한에서는 통일은 곧 좌경이고 용공입니다.
미국 노태우 일당은 통일이란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미친듯이 발광을 합니다.
지금 제가 평양에 도착한 것을 그들도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지금 굉장히 고민하면서 제가 돌아올 때 '어떻게 하면 전대협이란 조직을 와해시킬까' 라고 생각을 할겁니다.
여러분들께 전투적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
남과 북의 우리 청년 학생들은 '조국은 하나다'라는 외침으로 이 선언을 시작한다.
우리는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한다.
우리 모두 서로 어깨 걸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힘차게 진군하자!
미국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 땅에서 45년간 우리 민족에게 범행을 저질러온 미국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국놈을 몰아내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장렬히 산화돼가신 항일 열사들의 넋을 따라 아직도 외세에 억압 받고 있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차게 투쟁하겠습니다.
허리가 잘려왔어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자들이여! 분단의 꼭두각시 놀음 속에 부귀와 영화를 자랑하는 자들이여! 우리의 만남을 막으려는 너희들의 장벽은 단단하고 두터웠지만 그러나 보라. 조국 통일의 함성으로 일제히 일어서는 7천만 겨레를 하나의 삶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10. 사건 이후의 임수경

임수경은 이 사건으로부터 한참 뒤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 국회의원이 되어 새정치민주연합의 통일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에 방남한 최룡해와 25년만에 재회하기도 했는데 같이 동행한 황병서와도 인사했다.
왕재산 (간첩) 사건도 기획 사건이다.
왕재산 (간첩) 사건의 관련자들이 종북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의견이다. 왜냐하면 제 지인들이기 때문에.
이는 백지연의 끝장토론에 출연해서 한 발언이다. 임수경은 왕재산 사건이 북한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 주장했다. 전부 저 위의 동영상에서 임수경이 직접 한 발언을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다.

임수경은 황길경 같은 종북주의자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의 모든 선전 문구를 답습하는 행태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운동권 사고의 보유자였기 때문에 애초에 불법 방북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임수경의 행보가 좋은 것만 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문제는 임수경 혼자 저런 건 아니라 당시 운동권에 저런 사고가 만연했으며 아직도 저런 생각을 극단적으로 고수해 사고 치는 인간들이 나온다는 것이지만...

19대 국회에서는 주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20대 국회에서는 출마하거나 비례를 받지 않아 국회의원 임기는 19대 회기를 끝으로 종료하였다.

한편 2014년 자신을 종북이라고 비판한 박상은 전 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으나 2019년 6월 13일 대법원"국회의원에게 ' 종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신공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앞서 1심에서는 "의견 내지 논평을 표명한 것에 불과할 뿐"이라며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지만 2심에서는 원고 일부 승소로 2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는데 대법원은 "비판적 표현이 상당히 악의적인 정도에 이르지 않는 한 인격권 침해로 보기 어렵다", "정치인 등 공적 인물에 대해 광범위하게 문제제 기가 허용돼야 한다"며 소송을 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 #

대법원의 판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본 재판에는 14명의 대법관 박상옥, 안철상, 노정희, 김상환 4명이 참여하였고 이들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판결했다. 4명 중 박상옥 제외 3명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도 같은 판단이 내려졌다. #
◇'종북의 상징'이라는 표현행위가 의견표명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함으로써 불법행위를 구성하는지 여부(소극)◇
표현행위자가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한 때에 그 표현행위의 형식과 내용 등이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하거나 혹은 타인의 신상에 관하여 다소간의 과장을 넘어서서 사실을 왜곡하는 공표행위를 함으로써 그 인격권을 침해한 경우에는 의견표명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서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09. 4. 9. 선고 2005다65494 판결 등 참조).
한편, 정치인이나 공직자 등 공적인 인물의 공적 영역에서의 언행이나 관계와 같은 공적인 관심사안은 그 사회적 영향력 등으로 인하여 보다 광범위하게 공개․검증되고 문제제기가 허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표현이 악의적이거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었다고 볼 정도에 이르지 않는 한, 이를 쉽게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거나 법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더욱이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은 입법과 국정통제 등에 관한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고 나아가 그 직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도록 면책특권을 보장받는 등으로 통상의 공직자 등과도 현격히 다른 발언의 자유를 누리는 만큼(대법원 2014. 8. 20. 선고 2012다19734 판결 참조) 그의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 등에 대한 비판도 더욱 폭넓게 수인되어야 한다.
의견표명으로 인한 불법행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해당 표현행위의 내용․형식뿐 아니라 표현행위가 행해진 정황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 피고가 2013. 7. 30. 당시 인천광역시장을 비판하면서 " 천안함 46용사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백령도 청정해역에 종북의 상징인 임 모 국회의원"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성명을 발표하자 원고가 '종북의 상징'이라는 표현행위로 인해 인격권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위자료를 청구한 사건에서, 이 사건 성명서에서 ‘종북의 상징’이라는 용어는 '북한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대표적 인물'이라는 취지로 사용되었다고 보이고 이는 모욕적 언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표현행위가 지나치게 모욕적이고 경멸적인 인신공격에 해당하여 의견표명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면서 이와 달리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판단한 원심을 파기환송한 사례임
'종북의 상징'이라는 표현행위로 인한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한 위자료 청구 사건 [대법원 2019. 6. 13. 선고 2014다220798]
2020년 3월 31일 외교부에서는 30년 지난 외교 기밀문서 1577권(24만여 쪽)을 전면 공개했지만 이 사건에 대한 문서는 일부만 공개되었다. 일부 해외의 친북 정부 관계자들이 당시 한국 외교관들에 "왜 임수경을 구속했느냐"고 압박하는 상황을 포함한 문서는 공개하면서 이 사건의 본질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아 공정성 및 형평성 논란이 일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인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연루되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결국 보수 성향의 변호사 단체인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은 외교부의 조치에 반발해 2020년 4월 24일 서울행정법원 강경화 장관을 대상으로 정보공개 거부 처분 취소 소송을 내 법정 싸움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외교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공개와 관련한 심사 과정을 강화하겠다고 공표했다. #

11. 참고/관련 자료

12. 관련 문서


[1] 북한 측 자료에는 " 김일성 주석께서 (중략) 림수경 학생을 만나주시였다"라는 선전성 문구가 적혔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신경 쓸 것은 없는데 북한은 외국 정상들을 상대로도 김일성이 그들을 만나주었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2] 지금의 국제지역대학 프랑스학과. 임수경의 재학 당시에는 분교였다. 2023년 이후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다. [3] 이제 만나러 갑니다 KAL기 폭파 사건의 진실 편에서 방송 말미(16분경)를 보면 "국민들만 불쌍하다"는 말이 나온다. 훗날 공개된 문건에 의하면 안기부에서 이 사건을 선거에 써먹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구하여 북중러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으므로 과거를 덮고 미래를 향해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 KAL기 사건은 그렇게 버려 졌다. 대개 전두환 정부에 의해 희생되었던 피해자들이나 일제 피해자들은 야당이 적극 발굴하여 이슈화시키지만 북한 피해자들은 이들조차 외면했는데 여야 모두 정략적인 면에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불리는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와 비교해 보면 미군이 고의로 죽인 것도 아니고 과실치사로 피해자 2명이 발생했고 미군이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은 사고였음에도 10년을 넘어 20년간 엄청난 추모식 겸 시위가 성대하게 열리면서 '살인자 나라 미국'이라면서 반미 감정의 도구로 이용됐는데 이들이 'KAL기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라'며 반공주의를 조장할 리는 없었다. Fucking USA 가사를 보면 '노근리 학살을 똑똑히 기억하라 살인자 나라 Fucking U.S.A'에 이어 '민족의 힘 국민의힘으로 통일을 하리라'며 본심을 드러내는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는 이들이 'KAL기 사건을 똑똑히 기억하라'며 북한에게 통렬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리는 없었다. [4] 김일성은 전두환이 독재자라는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할 정도로 '독재자 끝판왕'이다. 북한에서는 전두환은커녕 현 투르크메니스탄 수준으로만 개방돼도 자유가 찾아왔다고 '개혁군주'라는 칭송을 들을 수도 있다. 가령 대학가에서 김정은 비판 벽보를 붙인다든지, 북한의 대학생이 카메라를 향해 "김돼지!"라고 외친다든지( 유시민이 "전대갈!"이라고 외치며 탈모인들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었다) 시위를 벌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김정은을 비판한 것도 아니고 박수를 심장 위에서 쳐야 하는데 심장 아래로 낮춰서 치는 장면을 보여주자 패널들이 '죽을만 했네'란 반응을 보인 것이 북한의 분위기이다. 진짜 독재국가에선 독재란 비판조차 없다는 점에서 전두환이 김일성에게 '땡전뉴스'를 보여주며 "나도 독재자야!"라고 큰소리 쳐봤자 유시민의 "전대갈!" 굴욕 장면이 오버랩되며(무너진 존엄) '독재 호소인' 취급 당할 수도 있다. 원래 캐릭터가 겹치는 등 서로 닮은 사람들은 서로를 싫어하거나 묘한 경쟁 심리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5] 그 시대에는 컴퓨터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1985년에 처음 나온 삼보컴퓨터(現: TG삼보)가 당시 돈으로 500만 원(현재 가치로 무려 약 1,888만 원)이었다. 참고로 당시 삼성전자 임원의 평균 월급이 200여만 원(현재 가치로 약 756만 원)이었다. [6]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이 전달해 준 초청장을 임수경 방북 이후 북한의 사주와 지령으로 발표해서 비웃음을 자초했다. [7] 당시에는 김종필 같은 강성 보수 인사들도 국가보안법 대폭 개정을 수용할 정도였다. 신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보다 원래 더 우성향이었음을 생각하면 국가보안법 개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파에 가까운 입장이었음에도 그랬다. 이는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장했던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 주장에 점차 힘이 실리자 부분적으로 양보하더라도 일단 보안법 자체는 지켜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토씨 하나 고칠 수 없다고 거세게 나오면 그 반발로 아예 폐지로 이어질 정도로 당시 탈냉전 무드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여 개정으로 유도하고 법 자체는 존속시키자는 마인드다. [8] 이에 워싱턴 포스트는 " 노태우 정부의 종잡을 수 없는 대북 정책으로 한국인들이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9] 검증되지 않은 설에 따르면 MSX였다고 한다. MSX가 맞다는 전제 하에 16비트급이라고 하면 해당되는 규격은 MSXturboR밖에 없는데 터보 R은 1990년에 규격이 발표되었으니 16비트 컴퓨터라는 설과 맞지 않는다. [10] 남한에서는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부터 컴퓨터가 일상생활 속에 본격적으로 녹아들기 시작했지만, 상술한 대로 그 당시 대기업 임원 월급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비싼 가격 때문에 아무나 사진 못하고 중산층 가정 이상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남한은 비싸서 잘 사지 못했지 마음 먹으면 살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은 현재까지도 컴퓨터가 보급된 가정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11] 사실 북한의 세습 체제는 소련을 비롯한 다른 공산권 국가에서도 엄청나게 씹어댔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하는 1당제 정치 체제라는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다른 공산 국가들은 공산당 내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며 여러 파벌들 가운데 정세상 가장 유리한 파벌이 정권을 잡고 국가 그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 이상 표현과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물론 그 자유는 민주화 이전 대한민국 같은 독재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1세계 국가들에 비하면 아주 조그마한 자유고 북한처럼 말 잘못하면 잡아가던 건 사실이다. 다만 북한보다는 훨씬 나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그냥 부자지간에 권력을 물려주는 체제에다가 어떠한 표현과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독재 체제였으니 그럴 만하다. 이는 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인민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표방하는 공산 국가들은 '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양당/다당 체제의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1당 체제일지라도 공화국은 맞다. 과두제라도 공화국인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12] 후술하겠지만 남한에 돌아가면 꼼짝없이 처형당할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13] 70년대부터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박동선 사건과 인권외교 등의 명목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주한미군 철수하겠다'며 위협을 가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면 내가 먼저 철수시키겠다'라며 강하게 나가는 등 주한미군 철수 건은 미국-한국-북한이 복잡하게 얽힌 문제였다. [14] 2001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군내 의문사로 거론된 바 있었다. 결과는 시간이 많이 지난지라 원인 판별 불능. 그러나 임수경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1984년 당시 검사표를 본 어른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체념하며 덮기로 하였다고 한다. [15] 당시 그녀는 4월 3일에 입사하여 7월 3일로 수습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16] 이 날이 무려 1953년 정전 협정을 한 날이다. [17] 반면 문규현 신부는 옥인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향했다. [18] 박철언 당시 정무제1장관을 지칭. [19] 사실 앞서 설명했듯 온갖 언론플레이로 직장도 짤리고 힘든 고초를 겪는 등 고생은 상당히 했다. 오죽하면 이 기습 취재마저 임수경 가족 측이 북한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고 안기부에서 조사를 벌인 것을 주류 언론에서 떠들었을 정도였다. [20] '가족만이라는 이유만으로'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당대 남한에서도 일가족이 간첩단 활동을 했다고 조작하는 사건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21] 참고로 평양 기본 군중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사람만 살 수 있는 곳이며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낮다고 판단되면 평양에서 쫓겨난다. 사실 박정희, 전두환 시기에도 독재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서울에서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심지어 어느 면에서는 북한도 능가하는(!) 21세기 최악의 독재국가인 에리트레아에서도 2017년에 수도 아스마라에서 공개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는 것을(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에리트레아에서도 반정부 인사가 수도에 사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감안하면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만 수도에 살 수 있는 북한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국가인지인지 알 수 있다. [22] 이것이 와전되어 북한에서는 임수경 아버지가 남조선의 전 지하철을 소유했으며 임수경을 죽이면 지하철을 다 폭파시켜버린대서 임수경을 죽이지 않고 가둔 거라는 말이 돌았다.(...) [23] 북한의 농촌에서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컬러 TV가 상당히 귀했다고 한다. 물론 도시에서는 컬러 TV가 어느 정도 보급된 상황이었다. [24] 현재는 남한 기준으로 선풍기가 아직도 잘만 쓰이긴 하지만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대세다. [25] 다만 오늘날에는 중산층만 되어도 이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한다. 물론 평양 한정으로. [26] 물론 외국인들은 이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27] 1~2주도 아니고 한 달 동안이나 거뜬하게 먹는 것은 닭을 푹 고아 사골 수준으로 우려먹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핵가족인 4명 기준으로 닭 한 마리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약 1주 만에, 심하게는 3일 내외로 다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양이다. 남한에서는 흔해빠진 닭고기조차 북한에는 귀중한 음식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공급량이 매우 낮고 굉장히 비싼 음식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2월 기준 3kg짜리 냉동 닭이 평양 중구역 기준으로 북한 돈 42,000~50,000원(약 5.25~6.25달러)인데 평양방직공장 노동자 월급이 100,000원(약 11.76달러)라는 것을 보면 현 북한에서 닭 한 마리 가격은 평양 노동자 한 달 월급의 절반 수준인 셈이다.(...) # [28] 사실 당시 북한에서는 고기가 워낙 귀해 고기를 삶을 때 떠오르는 기름을 따로 모아서 조명을 켜는 등에 사용했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저 에피소드가 과장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2021년 김정은 김정일의 유훈이라며 평양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특별 배급으로 공급한 것을 '위민헌신' 운운했다가 남한 네티즌들에게 ' 이밥에 고깃국은 포기한 것 같다'는 식의 조롱을 받았다. # [29] 하다못해 유럽 공산권 국가 중 가장 빈곤했다는 알바니아조차 4인 가족 기준 한 달에 한 마리의 닭은 배급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늦어도 1989년 이전부터 북한 배급제가 평양 주민들에게 고기도 제대로 못 줄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알바니아 주민들도 평상시에는 배급받은 빵과 야채로 연명해야 했지만. [30] 참고로 1989년 UN 통계 기준 북한의 1인당 GDP는 811달러로 수치상으로는 북한 역사상 가장 높았다. 다만 이조차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2052달러로 최빈국을 겨우 면하는 수준. [31] 사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을 통해 스스로 삶을 일궈나가며 여유롭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고,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도 이겨낸 후 김정은이 장마당을 어느 정도 허용하던 2010년대 후반에는 시골에서도 쌀밥에 기름을 두르고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북한 역사상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 물론 코로나 19 이후 북한이 봉쇄 + 통제 강화에 들어가며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32] 비슷한 사례가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 보도와 2024년 윤석열 정부 퇴진 운동 보도에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남한의 '혼란상'을 알려주기 위해 이들을 보도했으나, 오히려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남한 사회의 자유를 북한 주민들이 더 부러워하게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그나마 전자는 박근혜 탄핵이 가결된 것은 꽁꽁 감췄지만 후자는 윤석열 탄핵 청원에 대해 김여정이 '국민이 뽑은 대통령' 운운하는 담화까지 대놓고 로동신문에 실어 버려 말 그대로 자폭이 되었다.(...) [33] 이때는 6.29 선언이 있은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안 되었다. [34]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89년 기준 한국은 1인당 GDP 세계 평균을 넘긴 지 고작 2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으며, 당시 한국의 1인당 GDP(3,882달러)는 세계 평균의 1.5배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이 실질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임수경의 방북 13년 후이자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개최한 2002년 무렵이다. 자세한 것은 선진국/대한민국 항목 참조. [35] 1989년 북한의 1인당 GDP는 ( UN 통계 기준으로) 811달러였고 남한은 5,724달러였던 만큼 둘 사이에는 7배에 달하는 격차가 있었는데, 심지어 당시 한국과 최전성기였던 일본간 1인당 GDP 격차도 5~6배로 한국과 북한간 격차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2022년 현재에는 북한 590달러, 남한 32,530달러로 격차가 62배로 더 벌어졌는데(이는 일본: 콩고민주공화국 수준이다.), 즉슨 버블경제 시기 일본과 북한 간 격차보다 오늘날 한국과 북한 간 격차가 훨씬 큰 셈이다. 덤으로 1961년 최빈국이던 남한(94달러)과 세계 최강대국 미국(3,067달러)의 차이가 약 32.6배였다. 그리고 임수경 방북 이후 30년도 더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은 꾸준히 성장하여 이탈리아와 동급 수준의 강대국의 최소로 등극한 것과 달리 북한은 꾸준히 하락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내에서도 최빈국으로 꼽히는 나라들과 동급 수준의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2022년 기준 북한의 1인당 GDP(590달러)는 소말리아(592달러)보다도 낮다.(…) [36] 1997년 신대방역 탈선 사고 등으로 인해 인책사퇴했고 2001년부터 국제방송교류재단 감사를 지내기도 했다. [37] 원 출처: <학생운동 논쟁사> 2권 - 김광 외. 일송정. 1991. p 74. [38] 원 출처: <민주화와 학생운동의 방향> - 김영국 저. 대왕사. 1991. p119~120. [39] 안명철은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수용소의 끔찍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남측의 인권 유린이 이보다 더 심하다고 왜곡하기 때문에 안명철 입장에서 보면 임수경은 귀국과 동시에 즉결처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40] 이 탈북 대학생 백요셉은 훗날 '촛불을 끄러 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남한이 북한보다 인민재판이 심해 보이고 좌익 세력이 많다면서 박근혜가 인민재판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고 탄핵에 찬성하는 촛불 시민들은 언론이 선동한 것 같다며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넘어갈 것 같아서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촛불집회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가하는 이유가 좌경적 교육 때문에 그런 거라는 말도 하였다. 이 측면에서 임수경을 옹호하는 의견이 있는데 해당 대학생이 극우 성향의 문제적 인물로 나선 것은 임수경에게 폭언을 들은 지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다. 사건 당시 그가 문제가 있거나 극우적 발언을 해서 임수경이 이를 받아친 것이 아닌 이상 임수경이 탈북자=변절자라고 지칭하는 폭언을 한 것은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후관계를 따져보면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범진보진영에 실망한 탈북자들이 우경화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봐도 할 말이 없다 [41] 유시민은 운동권 시절 민간인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취조한 것에 대해 훗날 설사 프락치여도 그러면 안됐다며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보였다. 또 자신은 최대한 비폭력적으로 취조하고 프락치가 아니면 최대한 빨리 풀어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해야 일반 대중들이 그나마도 공감을 하게 되는데, 임수경 쪽의 운동권은 요상한 논리로 합리화를 하려다 어그로를 끌고 심지어 자승자박 꼴이 되기도 한다. 당시 운동권은 정부와 일종의 '전쟁' 중이었으니 한국군도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의심하여 죽이지 않았냐면서, 아무런 권한도 없던 학생들이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게 한 것을 잘했다고 우긴다. 하지만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면, 전두환 정부 역시 당시 북한과의 준전시 상황에서 한국에 간첩들과 종북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면 할말이 없어진다. 운동권은 자신들이 '피해자'였기에 정당하게 대응하려다 보니 민간인들의 희생이 불가피했을 뿐 이유없이 민간인을 납치한거냐고 반박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전두환 정부도 북한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을 당한 '피해자'였기에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인의 인권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게 희생된 측면이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사실 유시민처럼 '설사 프락치여도 인권을 지켜줬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북한과 맞서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전두환 측의 논리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42] 김정은은 2023년 12월에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 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밝혔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이와 비슷한 식의 발언을 했다면 동족을 혐오했다며 "반민족행위자"라고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며 들고 일어날 사람들이 많겠지만, 최고존엄의 발언이라 그런지 위인맞이 환영단 등에서도 침묵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현미경 검증으로 세세하게 꼬투리 잡아 비난하면서, 정작 김정은에 대해서는 독재자인 것을 문제삼지 않고 민중들이 열광한다는 둥 갖은 명목을 갖다붙이며 '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조차 박수를 건성으로 친다는 등의 명목으로 처형당했으니 열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생존자 편향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아무리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타당하다고 한들, 북한 정부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고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의도에 따라 잣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43]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에 베트남에서 “이 세상에 국민들이 호치민 주석의 정신을 본받는다면 이 세상에 부패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라고 극찬했는데, 2018년 베트남의 부패지수는 117위로서 한국(45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실 북베트남은 1973년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미국 사이에 맺은 평화 협정(파리 조약) 따위 무시하고 미군이 떠나자 남베트남을 침공하여 무력으로 적화통일 시켰으니 만약 패했다면 전범 재판에 불려가 평생 까이며 고통을 받을 '전범국'이었다.(역사는 승자의 기록) 게다가 베트남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76위일 정도로 자유를 잃은 독재국가로 전락했으나,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베트남이 자유통일 했다면 든든한 우방이 되었을 미군과 한국군은 결과적으로 패했으니 침략자처럼 묘사되며, 적화통일한 베트남에 희열을 느꼈던 일부 한국인들은 미군과 한국군의 잘못을 부각시키며 한미동맹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기는 것이 정의'이며 '약한 것이 죄'라는 시각이 가능할 수도 있다. 전쟁이란 것이 승전국은 모든 것을 거머쥐고 패전국은 모든 것을 다 잃곤 하는데 '점령군처럼 행세한다'는 말과 '패잔병 꼴'이란 말의 의미를 떠올려 보자. [44] 성공한 독재자들은 김일성, 시진핑, 푸틴만 봐도 모든 걸 다 거머쥐며 심지어 문재인 정부 시절 한국에서조차 김일성 위인전 전집이 발매됐다. 오래 전부터 한국에 어떻게든 발매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기어이 김일성 위인전 전집인 '세기와 더불어'가 발매됐고 더불어민주당은 '표현의 자유'라고 했다. 임수경 방북 사건이 국회의원이 되는데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로 인해 유명세를 얻어 국회의원이 됐다. 이미 김일성은 북한에선 신인데, 반공 정서가 강한 남한에서조차 김일성의 일대기가 '위인전'이랍시고 슬쩍 발매되어 있을 정도다. [45]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며 무관심보단 악플도 관심(애증)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한국을 까면서 북한을 치켜세운다면 그냥 '북뽕'이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자국 혐오자들은 슬픔과 노여움이 사랑이라면서 국까야말로 애국자이고 국뽕은 반애국자라는 적반하장 논리로 자기합리화를 하지만, 사랑은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이런 식이면 가스 라이팅이나 그루밍도 사랑으로 포장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해도 있는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도 있고(고슴도치도 이뻐하는 부모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떠올려 보자), 사랑의 정의 자체를 본인이 편한대로 정의했다는 문제가 있다. [46] 발언 출처: KBS 인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