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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white> 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엥겔베르트 돌푸스 Engelbert Dollfuß[1] |
출생 | 1892년 10월 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텍싱 | |
사망 | 1934년 7월 25일 (향년 41세) |
오스트리아 연방국 빈 |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50cm[2], 54kg[3] |
정당 | 조국전선 |
배우자 | 알비네 돌푸스[4] |
자녀 | 에파 돌푸스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이자 독재자로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초대 연방총리(Bundeskanzler)를 역임한 인물이다.2. 생애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니더외스터라이히 지방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학교를 다닌 돌푸스는 빈 대학교에서 법을, 베를린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전쟁 후 농민협회의 사무장이 되어 농업부에서 일하게 된다. 1927년에는 저지 오스트리아의 농업 감독관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농림부 장관이 되면서 빠른 성공가도를 달렸다.
1932년 3월 20일, 돌푸스는 총리가 되어 연립정부의 지도자가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대공황의 여파에 더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체코에 있는 공업 지역을 상실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있었다. 그는 전체주의 독재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으며, 1933년에는 조국전선이라는 파시즘 정당을 새로 창당하였다. 또한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선포하고, 그의 세력을 위협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불법으로 선언하는 한편, 국가 권력의 온전한 장악을 위해 보국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4년 7월 25일 결국 불만을 품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5] 이 때 암살당한 그의 시신이 창문을 통해 실려나오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쿠르트 슈슈니크가 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총리가 되어 조국전선의 통치를 이어갔으나, 4년 뒤 끝내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병합당하고 말았다.
3. 평가
오스트리아 경제회복과 이탈리아와의 동맹, 반나치주의자였고 나치당이 집권하는 것을 저지하긴 했지만 독재자인데다 세부적인 이념만 달랐을 뿐 같은 파시스트였기에 이쪽도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4. 여담
키가 150cm로 키가 엄청나게 작았다. 베니토 후아레스에 이어 인류 역사상 가장 키가 가장 작은 국가원수 2위에 올라와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엥겔베르트가 규정 용례지만 실제
독일어 발음은 [ˈɛŋəlbɛɐ̯t\](엥얼베아트)에 가깝다. 추가로 독일어 원어민의
발음을 참고할 것. 성씨인 돌푸스(Dollfuß)의 경우 1996년 개정된 독일어 정서법에 따라 Dolfuss로 표기하기도 한다.
[2]
#
[3]
#
[4]
혼전성은 '글링케(Glienke)'.
[5]
이 사건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가 분노하며
아돌프 히틀러를 강하게 비난했다. 돌푸스가 암살당하기 며칠 전, 돌푸스와 그 가족은 무솔리니에게 초청받아 이탈리아로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돌푸스의 가족이 먼저 이탈리아에 도착하고, 돌푸스가 따라서 이탈리아로 가기 직전에 암살당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이로 인해 타국 땅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장의 죽음을 알려야 했고, 가족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배후가 나치당이라고 하니 히틀러에게 당연히 화가 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