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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53:03

레오폴트 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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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
오스트리아 제13대 총리
레오폴트 피글
Leopold Figl
파일:20047373_500.jpg
<colbgcolor=#D81E05><colcolor=#fff> 출생 1902년 10월 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미헬하우젠 루스트
사망 1965년 5월 9일 (향년 62세)
오스트리아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임기 오스트리아 총리
1945년 12월 20일 - 1953년 4월 2일
오스트리아 대통령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6월 21일
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
1953년 11월 26일 - 1959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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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1E05><colcolor=#fff> 소속 정당
[[오스트리아 인민당|
인민당
]]
학력 빈 천연자원 및 생명공학 대학교
약력 오스트리아 총리
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
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지사
}}}}}}}}} ||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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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총리와 대통령, 외무장관직을 차례로 역임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를 이끈 외교관이다.

2. 생애

1902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농민협회에서 활동했다. 이때 후일 오스트리아의 총리가 되는 엥겔베르트 돌푸스를 만나 그의 측근이 된다. 1930년 조국전선에 입당하고, 엥겔베르트 돌푸스 밑에서 일하며 독재 정권에 부역하였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권 하에서는 연방 경제 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되고 안슐루스로 나치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 나치독일과의 합병을 결사 반대했던 그는 나치당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8년 안슐루스 직후 레오폴트 피글은 나치당 정권에 체포되어 다카우 강제수용로도 보내졌다가, 1943년 5월 석방되었다. 1944년 다시 체포되어 빈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1945년 소련군에 의해 기적적으로 사형 직전에 석방된다.

1945년 소련군 치하에서는 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업무를 받게 되어 시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 인민당 창당에 주된 역할을 해 인민당의 부대표직에 올랐으며, 얼마 안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임시 주지사와 오스트리아 부총리직에도 오른다. 1945년 치러진 첫 총선에서 오스트리아 인민당이 다수당이 됨에 따라, 카를 레너를 잇는 오스트리아의 13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총리 임기 동안에는 마셜 플랜으로 무너진 오스트리아 경제를 되살리는데 주력해 약 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31일 카를 레너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급서하자 약 6개월 동안 임시 대통령 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 오스트리아 파시즘 정권 부역 행위로 당 내 비판을 받아 총리직을 사임하고, 이후 약 6년 동안 외무장관직을 맡았다. 오스트리아의 영구 중립국 선언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1959년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1962년까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주지사직을 맡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주지사직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 1965년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오스트리아의 경제를 복구하고 중립국 선언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전후 회복을 이끈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1930년대 파시즘 정권에 부역한 어두운 면이 있다. 또 당대의 여느 오스트리아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인사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것 역시 비판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평범하고 무난했던 경제 회복의 공로자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2020년 로마 가톨릭 교구에 의해 '하나님의 종'(Servus Dei) 칭호를 받은 것을 보면 그렇게 인식이 나쁘지는 않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