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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에스파냐-명나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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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성립2.2. 초반2.3. 중반2.4. 후반2.5. 종결
3. 관련 사건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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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세 중국 명나라와 스페인 식민지로 오늘날 멕시코 쿠바, 중미 지역 및 동남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아우르던 거대 식민지였던 누에바에스파냐 사이의 관계.

2. 역사

스페인 본토와 중국과의 교류는 제한적이었으나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스페인이 도래하기 몇 백년전 당나라 시대부터 교류가 활발하였다.[1]

스페인 본토와의 관계보다는 과거 멕시코 식민지, 필리핀 식민지와의 교류가 훨씬 더 밀접했다.

2.1. 성립

스페인 필리핀을 식민지배한 이후 필리핀 도독령을 통해 중국과 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멕시코 광산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과 은에 대한 수요가 중국에서 높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많은 인구에 비해 , 보유량이 다른 문명권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였다.

스페인은 마카오와 새로 얻은 식민지 필리핀을 통해 중국 명나라와 많이 교역했으며 특히 명나라 누에바에스파냐 사카테카스 포토시 은광에서 나는 갤리온 삼각무역을 통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명나라 경제와 조세제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한 이듬해 필리핀에서 멕시코 아카풀코로 가는 항로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약탈한 이 매우 풍부했다.

오늘날의 볼리비아에 해당하는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은 오늘날 멕시코에 해당하는 아카풀코의 산디에고 연안 요새[2]을 거쳐 마닐라로 운송된 이후, 명나라로 가서 상품 구매 대금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인 보따리 상인들이 마닐라로 들고 온 상품들은 다시 갤리온에 실려서 태평양을 건너 아카풀코 항으로 이동된 이후 다시 노새를 이용해서 멕시코시티를 거쳐 베라크루스 항구로 이동한 후 대서양을 넘어 스페인의 세비야로 이동되었다.

2.2. 초반

물론 필리핀 식민지 초창기의 운영 과정은 다소 험난했다. 중국의 유명 해적 리마홍이 필리핀의 스페인인 정착지 습격을 시도하고 마닐라 전투(1574년)까지 일어나면서 스페인은 중국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1603년에 마닐라에서 화교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측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국인 사망자가 6만여 명에 달하였고, 1609년에는 화교들이 세금 인하를 요청하며 폭동을 일으켰다가 진압 과정에서 2만여 명이 중국인이 사망하였다. 만약 영락제 정화가 살아있던 시절이었다면 중국과 스페인이 대판 싸웠겠지만 당시 명나라 황제는 그 유명한 만력제였다. 1603년 학살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우리 땅으로 온 중국인들이 반란 일으킬 것 같아서 몇 만 명 정도 처형했으니 그렇게 알아두셈."이라고 말하자 조정에서는 누에바에스파냐 측에 "응 알았어." 정도로 대답하고 사건을 끝냈으며, 아예 명나라 조정을 만만하게 본 누에바에스파냐 관료들이 1603년 학살 이후 새로 들어온 중국인 노동자들을 또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자, 조정에서는 "여송(필리핀)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은 더 이상 명나라 백성이 아니다."라는 엉뚱한 대답을 하면서 누에바에스파냐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참고로 전근대 중국은 원래 이렇게 자국 밖에서 사고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지법 따라 처리하는 거에 토달지 않았다. 뭐 옛날부터 사람 목숨이 아까운 나라는 아니기도 하고(…) 중국같은 패권국은 일상 민간 차원 교류에선 져주는 면이 있어야 대국적인 패권 관계가 유지된다는걸 알았기 때문. 이런 관습이 없었던 스페인측에선 반대로 이런 16세기 말 필리핀 총독부에서 터진 화교와의 마찰 문제에서 중국 측 자세가 별로 강하지 않은거에 놀라면서 '중국 오히려 저거 덩치만 큰 약한거 아님? 혹시 찔러볼까?' 하면서 펠리페 2세 치세 말기,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전후로 중국 정벌 계획에 대한 상상을 조금 품다가 제정신 차리고 포기한 적이 있다. 애초에 당장 현실적으로 당시 기술력으로 콩키스타도르 정복단도 아니고, 수만단위의 스페인 정규군을 태평양으로 옮기는게 가능한지부터 재쳐두고 진짜로 당시 전쟁 터졌으면 몇번 전투에선 스페인 세력이 이겨도 장기적으론 필리핀의 중화권 편입이란 결과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계에 대한 반란 진압과 학살 이후에도 필리핀의 스페인인들은 중국인들을 계속 필리핀 마닐라로 이주하는 것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스페인인들이 퍼트린 질병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궤멸시켰던 것과는 반대로 필리핀에서는 열대 질병이 원주민보다 오히려 스페인인들에게 좀 더 위험했기 때문이다.[3] 중국인이라고 필리핀의 열대성 질병에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쪽은 죽는 속도보다 들어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스페인 측은 명나라와 갈등이 생기면서 중국을 정복한다는 계획까지 했지만,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 준 정보를 바탕으로 명나라 국력을 개략적으로 파악한 상황이라 실현되지는 않았다.

2.3. 중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인구 상당수가 이베리아계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 혼혈의 후손인 메스티소인 것과 다르게, 오늘날 필리핀인들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유럽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평균 3%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동아시아계 조상을 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물론 표본 집단마다 다르며, 지역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필리핀 도독령 후기~말기에, 많은 필리핀 메스티소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대거 이주하였다. 때문에 오늘날 이들은 히스패닉으로 동화되었고 스페인어를 쓴다.

필리핀인들은 갈레온 무역 루트를 따라 멕시코에도 정착하였으며, 종종 스페인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서 필리핀과 멕시코를 거쳐 데려온 중국인 하인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2.4. 후반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포토시와 사카테카스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의 양은 유럽의 총 은 보유량을 7배 늘려놓을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근데 그것보다 더 많은 양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중국으로 갔다. 청나라가 영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기 이전 중국의 주 교역 상대는 바로 스페인이었다. 영국 역시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스페인 달러로 결제대금을 지불하곤 했다. 명나라 말 장거정의 조세개혁 일조편법은 당시 명나라에 은화가 늘어난 것을 반영해서 새로 개혁된 조세제도이기도 했다.
시암에 이어 두 번째로 대규모 화교 공동체가 조성된 곳은 필리핀 마닐라였다. 에스파냐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화교 공동체 또한 거의 전적으로 남성으로만 구성돼 있었다. 원주민 여성과의 내연 관계 혹은 혼인에 의한 메스티소(혼혈 인종)의 출현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 중국인들이 언어와 문화적 기술이 부족하고 상호 문화 교류에도 서툰 유럽 이주민들을 대신에 문화의 조정자 겸 경제적 중개인이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복합 사회 루손섬에서는 현지인을 가리키는 에스파냐식 표현인 에스파냐화된 인디오의 문화는 최하위로 분류되고, 중국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둘 모두 고급문화의 뿌리를 둔다는 인식하에 최고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원주민들에게 융자도 해 주며 채무 불이행 시에는 토지를 압류하는 등 도시에 기반을 둔 경제를 농촌의 지주에게까지 반경을 넓혀 나간 것은 중국계 필리핀 메스티소들이었다.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870~1945 - 3부 이주와 소속감

비교하자면 포르투갈의 아시아 식민지에서 실질적인 식민지 운영 인력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현지 필리핀인/인도인/스리랑카인 무역상인들 혹은 기존의 남인도 케랄라에 거주하던 도마 기독교인[4]이었던 것과 1:1로 대입은 할 수 없지만 화교들은 식민지 중반까지도 별 힘을 쓰지 못하다가 후반에 스페인의 독점무역이 해제되고 금융지배력이 약해지면서 필리핀 도독령이 유럽,영국,북미와 무역로를 열고나서야 그 틈을 타 비로소 주도권을 쥐며 힘을 키우게 된다.

2.5. 종결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중국에는 만주족 청나라가 들어섰다. 청나라는 남명 견제를 위해 해금 정책을 실시하자 잠깐 교류가 주춤하기도 했으나 강희제가 대만 섬 수복으로 해금령을 풀자 다시 교역이 활발해졌다.

청나라 치세 중반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계속해서 은화가 유입되었고, 이는 청나라의 조세정책으로도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되었다. 옹정제는 명나라 때 일조편법을 개선한 지정은제를 실시한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오늘날 필리핀인들을 대상으로 한 하플로그룹 조사 결과 유럽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평균 3%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동아시아계 유전자가 훨씬 많았다. [2] 멕시코 영토였다가 미국으로 넘어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시와 다르다. [3] 라마말고는 대형 가축이 없었던 터라서 인수공통 전염병에 취약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는 달리, 필리핀의 원주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돼지 등을 키우면서 강한 면역력을 갖게 된 탓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들어온 전염병에도 이미 면역이 있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에 의하면, 필리핀 말고도 1930년대에 뉴기니 섬의 내륙 지대를 침공한 유럽 열강의 군인들이 현지 풍토병에 감염되어 역관광당하고 침략을 포기한 사례가 있었다. [4]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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