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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우아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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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udad prehispánica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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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멕시코 시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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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Histórico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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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테오티우아칸의
선(先)스페인 도시

Ciudad prehispánica de Teotihuacán
1987년

오아하카 역사 중심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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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histórico de Oaxaca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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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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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o histórico de Puebla
1988년

과나후아토 역사 도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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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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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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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turas rupestres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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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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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las laderas del Popocatepetl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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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as Grandes)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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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a de monumentosp
históricos de Tlacotalpán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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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a de monumen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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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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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udad histórica
fortificada de Campe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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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evas prehistóricas de Yagul y Mitla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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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tema hidráulico del acueduc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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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ques tropicales protegidos
de Calakmul, Campeche
2018년

테후칸 - 쿠이카틀란 계곡
: 메소아메리카의 근원 거주지
Valle de Tehuacán-Cuicatlán
- Hábitat originario de Mesoamé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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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un_Pyramid_05_2015_Teotihuacan_3304.jpg
테오티우아칸과 태양의 피라미드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colbgcolor=#fff,#1c1d1f> 테오티우아칸의 선(先) 스페인 도시
영어 Pre-Hispanic City of Teotihuacan
스페인어 Ciudad prehispánica de Teotihuacán
프랑스어 Cité préhispanique de Teotihuacan
국가·위치 멕시코 멕시코 주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7년
등재 기준 (i)[1], (ii)[2], (iii)[3], (iv)[4], (vi)[5]
지정번호 414


1. 개요2. 상세3. 역사
3.1. 기원3.2. 전성기3.3. 쇠퇴와 멸망3.4. 발굴과 재발견
4. 문화5. 주요 건축
5.1. 태양의 피라미드5.2. 달의 피라미드5.3. 케찰코아틀 신전
5.3.1. 지하의 수은 연못
5.4. 케찰파팔로틀 궁전
6. 교통편7. 치안8. 기타

[clearfix]

1. 개요

Teotihuacan

해발 2,300m에 형성된 멕시코의 고대 도시.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산 후안 테오티우아칸 데 아리스타[6]에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지로서 거대한 건축물들이 특징이다.

2. 상세

파일:200528124734-11-unesco-sites-restricted.jpg
테오티우아칸 유적의 모습
테오티우아칸 지방에는 기원전 6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대도시가 형성된 것은 기원후부터였다. 인근 도시 쿠이쿠일코가 멸망하자 그 난민들이 테오티우아칸으로 몰려들었고, 쿠이쿠일코의 지적 자원이 테오티우아칸으로 유입되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테오티우아칸은 이후 수백여 년 동안 화려하게 번성했으며 그 국력이 절정에 달한 450년경에는 200,000명의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이자 단독으로 멕시코 고원 지대의 인구 절반을 차지한 도시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자랑하기도 했다.[7] 심지어 아즈텍 제국의 전성기 시절 테노치티틀란도 능가하는 수준의 거대한 대도시였다.[8]

그러나 테오티우아칸도 여느 문명들이 그렇듯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기후 변화와 가뭄, 속국들의 반란으로 끊임없이 국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치명타를 입으면서 8세기에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테오티우아칸에 거주했지만 그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1200년대에 일부 나와인들이 정착하긴 했지만 과거를 재현하는데는 실패했고, 속국을 두기는 커녕 오히려 인근 국가들의 속국이 되어 철저히 휘둘렸다. 테오티우아칸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올 때까지 무력하게 쇠락하다가 결국 끝내 멸망하고 폐허로 전락했다.

오해와는 달리 테오티우아칸은 단 한 번도 버려진 적이 없었다. 버려지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거대했고, 과거의 국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절대로 잊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아즈텍 제국은 이 장대한 폐허에 압도되었는데, 신의 탄생지 또는 신의 길을 가진 자들이 사는 곳, 신들의 도시라는 뜻의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아즈텍인들이었다.[9] 원주민들은 이곳으로 순례를 왔고, 이 시대가 시작된 곳이라고 여겨 신성하게 여겼다. 굳이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진짜 이곳에서 태양이 떠올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10] 그야말로 메소아메리카 버전 로마로 대접해주었다고 보면 된다.[11]

주요 건축물로는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12], 대규모 저택 단지이자 번화가였던 '죽은 자의 거리', '케찰코아틀 신전' 등이 있다. 특히 태양의 피라미드, 그리고 달의 피라미드는 천문학 기하학적인 원리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유명하며, 수없이 많은 인신공양이 행해졌던 장소로 수 백여 구의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케찰코아틀 신전 역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은이 흐르는 지하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한때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3. 역사

파일:pyramid-of-the-sun-teotihuacan-mexico-wallpaper-preview.jpg
테오티우아칸의 전경
당대의 문자 기록이 단편적인 단어 이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테오티우아칸의 특성상 발굴된 유물만으로 역사를 추측해야 되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설이 많다. 고고학 및 과학적 분석으로 밝혀진 사실을 뼈대로, 탄생과 번영, 그리고 쇠락 등의 커다란 기조는 거의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학계에서 이견이 분분하다. 그래서 확실한 신뢰성은 보장할 수 없다. 지속적인 연구와 발굴 성과에 따라 미래에 학설이 뒤바뀔 수도 있다.

테오티우아칸의 역사는 크게 4개의 단계로 구분한다. 기원전 600년부터 이미 사람이 살았으나 기원전 200년까지는 도시가 아니라 여러 마을의 집합체에 불과했기에 도시 '테오티우아칸'의 진정한 역사는 기원전 200년부터 시작된다.

Phase I은 기원전 200년부터 1년 사이의 기간을 의미하며, 테오티우아칸의 수원지 중심으로 농부들이 모여 산재한 마을들을 하나로 합치고 도시의 기틀을 잡는 시기였다.

Phase II는 1년부터 350년 사이의 기간으로, 이 시기의 테오티우아칸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대도시였다. 테오티우아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죽은 자의 거리도 전부 다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시기에 정치 권력의 이동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원래 테오티우아칸의 초기 중심지는 '깃털 달린 뱀의 신전'이었는데, 250년 300년 경 사이 어느 시점에 정치 권력이 죽은 자의 거리로 이동했다. 1인 군주를 위해 사용되었던 깃털 달린 뱀의 신전이 몰락하고, 귀족정 중심의 죽은 자의 거리로 권력이 이동한 것으로, 즉 테오티우아칸의 정치 체제가 왕정에서 귀족정으로 변모했다는 걸 의미한다. 기존의 깃털 달린 뱀의 신전은 크게 더럽혀졌고, 테오티우아칸의 석조 건축물들은 1명의 군주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공공이나 주민들을 위해서 지어지는 쪽으로 변화했다.

Phase III는 Phase II부터 시작된 도시화와 권력 증대의 정점을 찍은 시기였다. 서기 350년부터 650년까지 약 30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 영향력도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테오티우아칸의 인구는 무려 200,000명으로 고대 세계에서도 가장 거대한 도시였으며, 2,000여 개에 달하는 석조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훗날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마저도 이 정도 수준의 대도시는 아니었다.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멕시코 고원 지대에서 기형적일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다. 건물들도 대대적으로 개축되었고, 더럽혀졌던 깃털 달린 뱀의 신전 역시 화려한 조각으로 다시 뒤덮였다.

이렇게 번성하던 테오티우아칸도 Phase IV에 들어서서는 쇠퇴했다. 이 시기에 죽은 자의 거리, 태양의 피라미드, 귀족들의 저택에 불에 탄 흔적들이 만들어졌다. 즉 도시가 외부에게 약탈을 당하거나, 내부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13] 인구는 감소했고, 끊임없이 인근 세력들에게 침략을 당하며 비참한 속국으로 전락했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 수는 몇 백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굉장히 적었고, 사람들은 옛 유적에 기생하다시피 살았다. 이후 콩키스타도르들이 쳐들어왔을 때, 테오티우아칸의 폐허에서 연명하던 사람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3.1. 기원

테오티우아칸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14] 테오티우아칸 지역에는 기원전 6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00년까지 조그마한 마을들이 테오티우아칸 계곡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이 시기에 테오티우아칸의 인구는 약 6,0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대도시의 모습은 아니었고, 그냥 그럭저럭 중소규모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랬던 테오티우아칸이 거대한 대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생겨났다. 바로 멕시코 고원 지대의 최초 중심지였던 쿠이쿠일코(Cuicuilco)[15]가 멸망하면서 그 피난민들이 테오티우아칸 지대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쿠이쿠일코 바로 남쪽에는 시틀레(Xitle) 화산[16]이 있었는데, 그 화산이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00년 사이에 대규모로 폭발하면서 용암 화산재가 도시를 덮어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메소아메리카판 폼페이였다. 화들짝 놀란 쿠이쿠일코 사람들은 도망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테오티우아칸이었다.
파일:245_General_Cuicuilco,_Gran_Basamento_Ramn_Lpez_Valenzuela.jpg
파일:Fragment-of-the-mural-paint-of-the-Xitle-eruption-and-impact-on-Cuicuilco-Artist.png
쿠이쿠일코 원형 피라미드 제단 시틀레 화산 폭발로 멸망하는 쿠이쿠일코
참고로 쿠이쿠일코 사람들이 굳이 위험한 시틀레 화산 주위에 자리를 잡고, 숭배까지 하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멕시코 고원 지대가 해발 2,250m로 고도가 높다보니 저위도 덕으로 상춘 기후라고 해도 선사시대의 의류와 주거의 부실 때문에 겨울이나 밤에 추위를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화산 주변은 따뜻한 공기가 365일 내려오기에 활발한 야외 활동에 적합하고, 무엇보다 귀중한 화성암 계열의 흑요석을 대량 생성해냈기에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덤으로 화산재로 비옥해진 넖은 분지를 풍부한 텍스코코 호숫물로 관개하면서 도시가 발달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17]

어쨌든 이렇게 쿠이쿠일코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은 테오티우아칸의 질서를 잡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쿠이쿠일코에서 이어졌던 강력한 신정일치를 테오티우아칸 지방에 그대로 이식했으며, 테오티우아칸에 거주하던 수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왕국을 세웠던 것이다. 특히 쿠이쿠일코에서 시틀레 화산의 분화 징조를 미리 알고 대피를 준비했던 사람들이 선지자로 칭송받으며, 하나의 지배 계급으로 떠올랐고, 이들이 그대로 테오티우아칸의 새로운 엘리트층으로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테오티우아칸은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세가 급격히 안정될 수 있었다.

3.2. 전성기

파일:테오티우아칸.jpg
파일:테오티우아칸2.jpg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테오티우아칸 복원도
이렇게 테오티우아칸은 화산 폭발로 멸망한 쿠이쿠일코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거대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테오티우아칸은 멕시코 고원 지대에서도 온갖 민족들이 몰려드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였는데, 그야말로 다민족 다문화 제국이었다. 테오티우아칸 사람들은 거대한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고 치남파라고 하는 땅높이기 기법을 활용해 노후화된 경작법에도 불구하고 높은 농업 생산력을 뽑아낼 수 있었다. 식량 생산량의 증대는 인구 증가로 다시 이어졌고, 도시 주변의 농장에서 카누를 통해 식량을 운송할 거대한 수로가 파였다. 기원전 200년에 지어진 테오티우아칸의 첫 번째 건물은 흙집에 불과했지만, 불과 300년 만인 서기 100년에는 그 유명한 '태양의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테오티우아칸은 기원후에도 착실하게 발전했는데, 눈여겨볼만한 점은 단일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야 문명의 도시들, 자포텍 문명 등 다양한 남미 문명들은 왕궁이나 연회장처럼 1명의 군주를 위해 지어진 건물들을 많이 지어서 후대에 남겼다. 하지만 이 시기의 테오티우아칸은 1명의 단일 군주를 위한 유적들이 별로 없고, 심지어 군주들의 왕명표조차 제대로 남은 것이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이 왕정이 아니라 귀족정이나 유력 가문들이 다스리는 집단지도체제였다고 추정하는 중이다.

이 시기 테오티우아칸은 메소아메리카 최고의 대도시이자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인근 유카탄 반도에까지 손길을 뻗치곤 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378년 1월 테오티우아칸의 시야즈 칵 장군이 600마일 떨어진 티칼까지 쳐들어가서 왕을 죽여버리고 스스로 티칼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당시 티칼 칼라크물과 함께 마야 문명에서 꽤나 끗발을 날리던 도시였던 걸 생각해보면 그런 티칼의 왕을 날려버린 테오티우아칸의 국력이 실감되는 부분이다.

테오티우아칸은 450년 경에 그 국력의 정점을 찍었다. 이때 테오티우아칸은 3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덮은 거대한 대도시였고 무려 최대 200,000명에 달하는 인구를 달성했다.[18] 유카탄 반도, 멕시코 고원 등 수많은 곳에서 온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렸으며 심지어 저멀리 과테말라에서까지 온 마야인들까지 테오티우아칸에 터를 잡고 살았다.

문화적으로도 메소아메리카의 최고 중심지라 도예, 보석 세공, 장인들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테오티우아칸에서만 나는 녹색 흑요석은 마야 문명권에서도 인기가 엄청 많았다. 마야 도시들의 엘리트 귀족들은 평민들과 똑같은 흑요석을 쓰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테오티우아칸 산지의 녹색 흑요석을 사용했다고 한다. 건축학적으로도 봤을 때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 높이는 웬만한 마야 문명, 심지어 아즈텍 제국의 피라미드보다도 압도적으로 높고 화려했다. 아즈텍 제국에서 가장 높았던 쌍둥이 피라미드가 높이 60m였던 것에 비해 테오티우아칸 '태양의 피라미드'는 그 높이가 70m가 넘어갔다.

3.3. 쇠퇴와 멸망

파일:istockphoto-1336022005-170667a.jpg
황혼의 테오티우아칸
테오티우아칸은 서기 6세기에 들어서 점점 쇠퇴하더니 7~8세기에 완전히 멸망했다. 학자들은 처음에 외부의 적이 테오티우아칸을 점령하고 불태웠다고 생각했지만, 더 연구해보니 약탈과 방화의 흔적이 궁전 등 엘리트 계층들의 건물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외부의 침략이라기보다는 내부의 반란이나 쿠데타가 더 큰 원인이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테오티우아칸 최고의 중심지인 '죽은 자의 거리'에 있는 사원들이 죄다 불타 있는 것과 궁전 내부의 조각품들이 모조리 산산조각나 있는 반면, 민간 주거지나 평민들의 집은 방화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테오티우아칸은 인구가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535년~ 536년에 걸쳐 엘 살바도르팡고 화산이 폭발하고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으며, 이미 오랫동안 가뭄과 흉작이 이어졌다. 영양실조에 걸린 유년기의 골격 비율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도 이 주장에 대한 강력한 증거이다. 도시화가 극도로 진행된 테오티우아칸은 옥수수, , 아마란스, 호박 같은 농작물에 크게 의존했는데, 가뭄이 들어서 식량 생산량이 줄자 더이상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테오티우아칸이 스스로 지킬 힘을 상실하자 주변 도시들이 테오티우아칸의 막대한 부에 눈독을 들였다. 테오티우아칸이 언제 파괴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이런 식으로 주변 도시국가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고, 쇠락하다가 결국 전염병 과 가뭄이 겹치고 내부의 반란으로 치명타를 맞아 8세기 후반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한 도시가 멸망하는 건 메소아메리카에서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야 문명의 도시들이었던 티칼이나 코판, 칼라크물 등도 다 이런 식으로 정글에 묻혀 사라졌고, 테오티우아칸을 공격하여 약화시켰던 멕시코 고원의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멸망했다. 테오티우아칸의 속국이었다가 독립하여 테오티우아칸의 멸망에 일조했던 소치칼코는 900년에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멸망했고, 툴라 역시 1150년 경에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테오티우아칸이 하도 거대한 도시였기에 아예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는 않았다.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테오티우아칸의 폐허에 기생하듯이 살아갔다. 1200년대에 나와족 이민자들이 테오티우아칸에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살았지만 그 옛 영광을 재현하는 데는 실패해서 1300년대까지는 우엑소틀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1418년 아츠카포찰코가 쳐들어와 우엑소틀라를 몰아내고, 테오티우아칸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10년도 안되어 메소아메리카 최후의 대제국인 아즈텍 제국이 세워졌고, 테오티우아칸은 또 한번 아콜화의 속국이자 약소국으로 살다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의 도래와 함께 완전히 인적이 끊긴 폐허가 되어버렸다.

3.4. 발굴과 재발견

파일:FiBEN9aWIAA82hS.jpg
발굴되기 이전 태양의 피라미드의 모습
테오티우아칸은 결코 사람들에게서 잊힌 적이 없다. 애초에 잊히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유적이고 한때 영향력도 너무 컸기 때문.[19] 아즈텍인들은 이곳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경외하며 '신들의 땅'이라고 불렀고 태양이 떠오른 곳이라고 믿어 순례를 오기까지 했다.

테오티우아칸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17세기 들어서부터였다. 17세기 후반 카를로스 곤가라가 태양의 피라미드 인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체계적인 고고학적 발굴은 아니었고, 오히려 도굴을 목적으로 한 훼손성 파헤치기가 더 많았다. 19세기 들어서 조금씩 소규모 발굴이 이루어지더니 1905년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 아래에서 본격적인 복원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특히 멕시코 독립전쟁 100주년을 맞아 애국심 고취 목적으로 테오티우아칸에 대한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고 1910년에는 아예 국가 재산으로 분류되어 세심한 관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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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되기 이전 테오티우아칸의 폐허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기 전까지는 테오티우아칸 유적지에만 250여 개에 달하는 밭들이 있었고 소규모 마을까지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테오티우아칸 전체를 몰수하며 농민들에게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쫒아내버렸다. 1908년에는 테오티우아칸을 연결하는 철도가 깔리며 테오티우아칸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관광객들을 실어날랐고 1920년에는 마누엘 가미오의 지휘하에 추가 발굴을 진행했다. 1940년대, 50년대에도 꾸준히 발굴 작업을 진행했으나 가장 핵심적인 프로젝트는 1960년부터 65년까지 약 5년간 진행된 복구 작업. 주로 죽은 자의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무너진 궁전을 다시 발굴하면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정리해놨다. 특히 1980년대에는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들도 잡초를 뽑고 붕괴한 석벽을 다시 쌓아서 흙 둔덕이나 다름없던 옛날에 비하면 거의 온전한 외양을 갖추게 만들었다.

2003년 말에 깃털 달린 뱀의 신전 지하에서 터널이 발견되며 큰 관심을 끌었다. 6년이 지난 2009년에 멕시코 정부가 발굴 허가를 내줬고 무려 1,000여 톤의 흙과 토사물을 제거한 끝에 으로 깎은 마스크, 석영, 도자기, 고양이 뼈, 사람 피부 조각, 반지, 인간 조각상, 재규어 조각 등을 발견했다. 특히 수 백여개의 신비한 금속 구체가 함께 발견됐는데, 40~130mm의 구체로 코어는 점토로 빚었고 황철석으로 덮었다. 독특한 생김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하 방들의 모서리에 조심스레 올려져 있던 것을 보면 아마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뿐이다.

2009년 발굴의 최대 업적은 바로 피라미드 지하의 수은 연못의 발견이었다. 피라미드 지하에는 17m에 달하는 긴 토굴이 있었는데, 이 안에 호수를 상징하는 액체 수은이 찰랑거리는 작은 연못이 있었던 것. 토굴의 벽과 천장에는 자철석, 황철석, 적철석 등이 빼곡히 박혀있어서 일렁이는 횃불을 들고 서 있으면 마치 별들 사이로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토굴 끝에서는 4개의 녹색 돌과 인간 형상의 조각상을 발견했는데 눈에는 귀중한 광물이 박혀있었다. 조각상들은 등을 기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였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조각상들이 테오티우아칸의 샤먼들로 순례자들의 영혼을 하늘 위로 끌어올려주는 모습을 묘사한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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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우아칸 복원도 사원의 복잡한 장식 멕시코시티 박물관의 복원물
테오티우아칸은 기본적으로 다민족 다문화 도시였다. 가장 큰 원인은 쿠이쿠일코가 멸망함에 따라서 쿠이쿠일코의 난민들이 테오티우아칸으로 쏟아져들어왔고, 이 과정에서 테오티우아칸 계곡에 살고 있던 수많은 원주민 그룹들을 하나로 묶어냈기에 근본부터가 단일 민족 도시가 아니라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인 잡탕 도시였던 것이다.

테오티우아칸의 사람들은 크게 귀족 엘리트, 중산층, 하위 노예 계급 이렇게 3개의 단계로 이루어졌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번화가인 '죽은 자의 거리'에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거대한 석조 저택에 거주했다. 중산층은 그보다 약간 떨어진 주택에 살았고, 평민층은 도시 최외곽에 흙이나 짚으로 대충 집을 짓고 살았다. 다만 다른 나라들만큼 계급 경직도가 심하지 않았다. 테오티우아칸은 1인 왕정이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이 연합한 귀족정이었고, 절대왕정이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나라들보다 사회적 수직성이 약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수직성이 약했다는 것일뿐 테오티우아칸 역시 혹독한 계급 사회였다. 대귀족들은 정교하게 장식된 거대한 석조 주택에 살았는데 벽에 사제들의 행렬, 재규어 신, 폭풍의 신 등을 화려하게 그려넣은 벽화를 그려넣었다. 특히 테오티우아칸 벽화의 특이점은 왕을 찬미하는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 다른 메소아메리카 벽화들을 보면 죄다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요소들 밖에 없지만 테오티우아칸의 벽화는 순수예술적 요소가 더 강하고 신에 대한 경배가 더 주를 이루는 면이 강하다.

하위의 노동 계급은 농부, 숙련된 공예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온종일 일을 하면서 살았다. 도시 전역에 분포한 집단 거주지에 몰려살았으며 종종 거주지에 벽을 둘러 다른 구역들과 구분하곤 했다. 바로 옆에 거대한 시장이 함께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중심지는 귀족들이 사는 '죽은 자의 거리'였지만 경제적 중심지는 명실공히 이 곳이었다. 이 구역에서 발견되는 유골들을 보면 앞니를 사용해 섬유질을 갈아내느라 이빨이 다 닳아버린 그물 제작자의 해골, 오랫동안 무거운 물건을 옮기느라 무릎 관절이 마모되어버린 유골 등 노동자들의 것들이 대다수다. 다만 도시의 농부들은 처우가 좋지 못해서 도시 변두리 사이사이에 고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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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우아칸 지하에서 발견된 유골 테오티우아칸의 위대한 여신
테오티우아칸도 인신공양을 했다. 도시의 피라미드를 발굴하던 도중 인간과 동물의 유해를 발견했고, 사람들은 건물을 증축하거나 기공할 때 인신공양을 통해서 축복했다. 대부분의 인신공양 제물들은 전쟁에서 사로잡힌 전사 포로들로 추정, 목이 잘리거나 심장을 산 채로 들어내거나 머리를 둔기로 맞아 죽거나 산 채로 땅에 묻혔다. 신성하게 여겨지던 동물들도 바쳐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어 독수리, , 늑대, , 올빼미 등등도 제물로 바쳐졌다. 테오티우아칸의 유적에서는 수많은 마스크들이 발견되었는데, 학자들은 이 마스크가 장례용은 아닌 것 같고 인신공양 제물 대신 묻힌 게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테오티우아칸의 종교는 아즈텍이나 마야 신화와도 확연히 달랐다. 테오티우아칸의 주신은 이름이 확실하지가 않아서 그냥 '테오티우아칸의 위대한 여신'이라고 부른다. 아즈텍인들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소치케찰(Xochiquetzal)'의 전신이라고 보기도 한다. 테오티우아칸 외부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신격인 반면, 테오티우아칸에서는 재규어 궁전, 사원, 달의 피라미드 등 곳곳에 새겨져 있기에 테오티우아칸 한정으로만 숭배되던 신이라고 여겨진다. 새머리 장식과 거대한 송곳니를 가진 여신의 모습으로 항상 가면을 쓰고 손에는 맑은 물, 씨앗, 옥 등이 흘러내린다. 지하 세계, 어둠, 대지, 물, 전쟁, 창조 그 자체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그녀를 상징하는 동물은 거미였다.

테오티우아칸에는 독자적인 문자 체계와 언어가 있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마야 문자와 아즈텍 문자와 거의 비슷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테오티우아칸 한정으로만 통용되었던 문자였다. 유적 밑바닥에서는 30여 개가 넘는 석판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신전 벽면, 피라미드 등지에도 곳곳에 문자가 빼곡하겨 새겨져 있었다. 다만 마야 문명의 경우 도자기나 공예품에도 글이나 문자를 새겨넣었던 반면에 테오티우아칸은 벽화나 건축물에만 문자를 새겼다. 테오티우아칸 사람들도 가죽에 문자를 써서 책 비슷하게 썼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살아남은 책은 없다.

테오티우아칸 최고의 특산품이자 수출품은 바로 흑요석이었다. 테오티우아칸은 흑요석을 팔아서 막대한 부를 창출했고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가장 정교한 흑요석 세공 기술을 보유했다. 테오티우아칸에서 만들어진 흑요석제 물품들은 티칼, 멕시코 오악사카 등지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주 물품은 칼날, 화살촉, 스파이크, 칼 손잡이, 보석류, 장신구 따위였다. 특히 테오티우아칸 한정으로 고급 녹색빛이 나는 흑요석이 채굴되었는데, 일반 평민들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싶던 마야 귀족들이 일부러 비싼 값에 테오티우아칸산 녹색 흑요석을 사들여서 과시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5. 주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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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도 위성사진 테오티우아칸의 항공 사진
테오티우아칸은 웬만한 마야, 아즈텍, 잉카 도시들보다도 석조 건축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거대하다. 주택 단지, 사원, 대형 광장, 구기 경기장, 궁전 등은 다른 메소아메리카 도시들과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차이점이라면 그 크기가 훨씬 더 크다는 것. 애초에 테오티우아칸의 전성기 때는 이 곳이 메소아메리카 전역으로 문화를 퍼뜨리는 허브이자 중심지였다.

가장 잘 알려진 건축물들은 그 유명한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죽은 자의 거리', '케찰코아틀 사원(깃털 달린 뱀의 신전)' 등이 있다. 죽은 자의 거리는 테오티우아칸의 가장 번화가이자 중심 대로로 폭 45m, 길이 4km에 달하는 도로이며 테오티우아칸 곳곳을 서로 연결한다. 그 동쪽에는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피라미드[20]인 '태양의 피라미드'가 버티고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부피 100만 입방미터, 높이 65m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이며 꼭대기에는 인간 제물을 바치는 단이 있었다.

죽은 자의 거리 북쪽 끝에는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달의 피라미드 역시 태양의 피라미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만만찮게 거대한 피라미드이며 그 발치에는 여러 소규모 피라미드들이 규칙적으로 광장을 둘러싼 채 세워져있다. 죽은 자의 거리 남쪽 끝에는 '케찰코아틀 사원', 즉 '깃털 달린 뱀신의 사원'이 있는데 케찰코아틀 신을 묘사한 깃털 달린 뱀들의 모습이 사면에 튀어나와 있다.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가 그 압도적인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라면 깃털 달린 뱀신의 사원은 그에비해 상대적으로 규모는 약간 작지만 훨씬 화려한 인상을 준다.

원래 테오티우아칸의 역사적 중심지는 깃털 달린 뱀신의 사원이었는데 훗날 테오티우아칸이 확장되며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가 있는 곳으로 중심지가 옮겨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케찰코아틀 사원을 보고 요새라고 생각해 '시타델'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 전역에 퍼져있는 주택에 모여 살았고 장인들은 특정 구역, 작업장 바로 곁에 붙어 있는 건물에 따로 모여 살았다.

테오티우아칸의 건물 배치는 천문학과도 연관이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와 케찰코아틀 사원은 각각 특정 날짜의 일출과 일몰에 맞추어 세워져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2월 11일, 10월 29일의 일출과 4월 30일, 8월 13일의 일몰에 맞추어 건물이 지어졌는데, 이 시간대 사이의 간격은 정확히 260일로 테오티우아칸에서 신성하게 여겨졌던 13과 20의 공배수이자 메소아메리카식 1년의 일수였다. 태양의 피라미드 북면이 북쪽의 세로 고르도 산맥과 정렬되도록 맞추어진 것, 피라미드 아래에 일부러 인공 동굴을 파서 숭배한 것 역시 태양의 피라미드가 아무데나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테오티우아칸의 건축가들은 도시 곳곳에 쪼개진 십자가형 둥근 돌을 박아넣었다. 도시를 설계할 때 3km씩 박아서 거리를 측정하는가 한편, 도시를 설계할 때에 건축물들의 각도와 위치를 표시하는 데에도 활용했다. 꼭 테오티우아칸에서만 볼 수 있는건 아니라 메소아메리카 도시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모두 땅이나 바위에 쪼아져 있는 형태로, 2개의 동심원이 새겨져있다.

케찰코아틀 사원 맞은편, 죽은자들의 거리 건너에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도심에 거대한 시장이 존재한다는 건 이미 당시 테오티우아칸에 체계적인 정치 체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몇만 명이 북적거리는 시장과 도시를 느슨한 족장 제도로 통치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 케찰코아틀 신전 자체는 무려 10만 명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폐쇄형 광장으로 7만 입방미터의 석회와 벽돌들이 투입됐다. 전체적으로 방문객을 압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인상이 확 드는 건축물로 주변에는 상류층들의 저택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물론 현재 저택들은 대부분이 파괴되어버린 상태.

5.1. 태양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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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이며 메소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들 중 하나. 서기 200년 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죽은 자의 거리를 따라 달의 피라미드와 케찰코아틀 신전 사이에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라는 이름 자체는 훗날 이 폐허를 방문한 아즈텍 제국 사람들이 붙인 명칭으로 테오티우아칸 사람들이 이 피라미드를 뭐라 불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총 2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는데, 서기 200년 경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완공 당시에는 75m의 거대한 높이로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피라미드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꼭대기의 신전이 무너지고 깎여나가며 현재는 65.5m 정도로 높이가 줄었다.

원래는 회반죽으로 외벽을 덮고 붉은색 염료로 칠했다. 그러나 수 세기의 몰락을 거치면서 회반죽은 죄다 뜯겨나가거나 폭우에 쓸려나갔고 현재는 그냥 회반죽 아래의 돌덩어리들만 황량하게 남아있다. 그나마 현재의 모습도 어느 정도 고고학자들이 재건한 것으로, 테오티우아칸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면 안그래도 무너진 폐허 위에 초목들까지 울창하게 자라서 산인지 피라미드인지 구분이 안되는 수준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피라미드 지하, 피라미드 정중앙에서 정확히 7m 지하인 위치에 상당한 크기의 인공 동굴이 있다. 원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용암 동굴인데 테오티우아칸인들이 이걸 확장하고 깎아내면서 거대한 동굴로 만든 것이다. 1959년에 이 동굴의 존재가 처음으로 고고학계에 알려졌고 1971년에 제대로 발굴이 이루어졌다. 학자들은 이 곳이 왕릉이나 성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태양의 피라미드가 이 곳에 세워진 이유 자체가 이 동굴 때문이라고 여긴다.[21] 깨진 도자기 조각, 난로 등 조그마한 유물들이 나왔지만 유골이나 보물처럼 화려한 것들은 없었다. 아마 테오티우아칸의 몰락과 함께 제일 먼저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피라미드를 조금 더 꼼꼼히 발굴한 결과 흑요석 화살촉, 인간 형상의 조각상 등이 피라미드 속에서 발견됐다. 피라미드 모서리에서는 어린이들의 유골이 발견됐는데 아마 인신공양 의식에 바쳐진 걸로 보인다. 그나마 오셀롯의 형상을 조각한 설화석고 조각상이 이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영국인들이 잽싸게 영국으로 실어가버린 탓에 현재는 대영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5.2. 달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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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피라미드
태양의 피라미드를 이어 테오티우아칸에서 2번째로 거대한 피라미드. 규모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전형적인 콩라인이다. 200년 경에 지어진 태양의 피라미드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존재했던 피라미드기도 하다. 서기 100년부터 450년 사이 그 어느 시점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당시에는 인신공양을 하고 희생자들을 묻는 묘지였다. 그 어떠한 피라미드들보다도 확장과 개축 작업이 자주 이루어진 피라미드기도 한데, 제사를 치르고 나면 이 피라미드 속에 희생자들을 묻었고 더이상 공간이 없으면 새로운 피라미드를 덧씌워서 개축하는 방법으로 공간을 넓혔기 때문이다. 최소 6번 이상 개축했다고 한다.

테오티우아칸의 주신 '테오티우아칸의 위대한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그 어떠한 신전보다도 여신의 형상이 많이 나타난다. 꼭대기에 있던 신전은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공간이었으며 플랫폼, 기둥, 심지어 바닥에조차 여신의 모습이 새겨져있었다. 지금이야 꼭대기의 신전이 붕괴해서 44m 정도지만 당시에는 더 높았다.

애초부터 시체를 묻는 공간으로 활용했기 때문에 이미 도굴당해 싹 털린 태양의 피라미드보다 더 발견된 유물들이 많다. 1999년에 일본 아이치현립 대학교 부교수였던 스기야마 사부로 교수가 이 곳에서 4개의 인간 해골, 동물 뼈, 흑요석 유물, 보석류 따위를 발견했다. 대략 5번째로 개축된 피라미드에 조성된 무덤으로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매장된, 무려 2,000년이나 봉인되어 있었던 무덤이라고 한다.

학자들이 더 깊숙이 피라미드를 파고들어가면서 추가적인 발견들도 일어났다. 4번째로 개축된 내부 피라미드 안에서도 또다른 무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유물이 많아서 늑대, 재규어, 뱀, 퓨마, 등의 뼈대와 거대한 녹색과 흑요석 조각상, 제례용 칼, 창 끝 등을 포함해 400여 개가 넘어가는 유물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함께 매장되어버린 불우한 성인 남성의 유골도 있었다.

이 곳에서는 수많은 무덤들이 차례로 발견되었는데, 특히 인골 즉 사람의 유골들이 많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들도 있었고 나이도 13세에서 70대까지 다양했다. 공통점이라면 대부분이 남성인데다가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구덩이에 던져진 채로 압사했다거나 둔기로 머리가 후려쳐져 잔인하게 죽은 인물도 있었다. 이렇게 묻힌 사람들은 대부분이 전쟁 포로였으며, 구슬과 귀걸이를 찬 높은 지위의 포로도 재갈이 물리고 아무 장식도 없는 하층민 포로도 있었다. 다만 유일하게 한 무덤에서만큼은 묶이지 않고 정갈한 자세로 매장된 시체 3구가 발견되었는데 옥으로 된 가슴판을 차고 퓨마, 검독수리와 함께 묻힌 걸로 보아 매우 지위가 높은 인물의 공식 무덤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5.3. 케찰코아틀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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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찰코아틀 신전
테오티우아칸에서 3번째로 거대한 피라미드. '케찰코아틀 신전'이라고도 하고 '깃털 달린 뱀의 사원'이라고도 부른다. 크기만 따지만 태양, 달의 피라미드들보다도 작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만 보면 전혀 꿀릴 것이 없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 사원이 유명한 이유는 지하에 200명이 넘는 유골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사원을 봉헌할 때 의식을 치르면서 함께 묻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다양한 위치에 그룹을 지어 묻혀져 있다. 남성과 여성 유골이 둘다 발견되지만 남자들의 유골이 약간 더 많다. 남자들의 유골에는 용맹과 힘을 상징하는 뼈, 이빨 따위로 만든 목걸이들이 걸려 있었고 따라서 학자들은 이 남자들이 단순한 전쟁 포로가 아니라 테오티우아칸에서도 선택받은 전사들이라고 결론내렸다. 상식적으로 포로라면 저런 기념물과 함께 묻히도록 내버려뒀을 리가 없기 때문. 피라미드 중앙으로 갈수록 묻혀있는 유골들의 지위나 부장품의 질이 높아지며, 유골들도 그 지위가 최고 엘리트층에서 하층 노예까지 다양하다.

케찰코아틀 사원과 인근 구역은 테오티우아칸의 정치적 핵심 구역이었다. 로마 제국으로 따지면 포로 로마노, 한국으로 따지면 광화문 광장이나 다름없는 구역이었던 것이다. 테오티우아칸의 초기 지도자들은 케찰코아틀 사원에서 제례를 치렀고 그 주변에 있는 거대한 석조 주택들에서 살았다. 반란이 일어나 테오티우아칸의 왕이 쫒겨나고 귀족들이 득세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한 것이 이 케찰코아틀 사원을 더럽혀 왕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다시 복구되긴 하지만 이 곳이 당시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건축물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는 뜻이다.

케찰코아틀 사원 자체는 6층 계단 피라미드로 기단마다 비의 신 틀랄록, 그리고 깃털 달린 뱀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일부 석상들은 원래 흑요석으로 만든 눈알을 가지고 있었는데, 테오티우아칸의 몰락과 함께 죄다 뜯겨나갔다. 전성기 시절에는 사원 벽은 붉은색으로, 뱀머리 조각들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조개껍데기로 장식했다. 당시로서는 아마 가장 화려한 건물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기단에도 장식이 빼곡히 들어차 창조와 물을 상징하는 깃털 달린 뱀들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는 '아다스다 기단'이라는 축조물 하나가 사원 바로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데, 아마 귀족들이 왕을 몰아내고 독재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왕권의 상징 케찰코아틀 사원 앞에 일부러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5.3.1. 지하의 수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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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지하의 비밀 동굴
2003년 말, 케찰코아틀 사원 지하의 수은 연못이 우연히도 세계에 알려지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며칠 동안 폭우가 몰아친 후, 유적을 둘러보던 INAH의 연구자 고메즈 차베즈의 눈에 너비 3m도 넘는 거대한 싱크홀이 사원 기슭에 뻥 뚫린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고메즈는 당장에 손전등을 구멍 안으로 비추었으나 싱크홀이 생각 외로 엄청나게 깊어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발견이 될 것을 직감한 고메즈는 허리에 두꺼운 밧줄을 매고 안으로 내려갔다. 안으로 내려가던 고메즈는 싱크홀이 완벽하게 원통형으로 뚫린 인공 구조물이라는 걸 알아냈고, 인공적인 동굴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바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흥분한 고메즈는 일단 싱크홀에다가 텐트를 치고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했다. 그는 이 동굴이 사원 지하의 비밀 방들로 통한다고 생각했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물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탐사 자금을 조달받고 멕시코 정부의 승인을 받는데까지 무려 6년의 시간이 걸렸다. 발굴이 제대로 시작되기도 전인 2004년 초에는 20명의 고고학자 팀이 미리 아래로 내려가 매일마다 지하 토굴의 대략적인 길이와 부피를 측정, 고메즈의 컴퓨터에 일일이 입력했다. 2005년에는 이미 3D로 내부를 완벽히 구현한 디지털 지도가 만들어졌고, 아예 원격 제어 로봇을 내부로 들여보내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까지 착실하게 탐사해나갔다.

2009년에 마침내 멕시코 정부가 발굴 허가를 내주자 본격적인 발굴에 돌입했다. 최고 수준의 고고학자 30여 명으로 구성된 팀이 2010년에 토굴의 봉인된 부분을 개봉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 통로는 사원 바로 아래로 이어졌으며, 정식 입구는 사원 밑바닥에 있었으며 무려 2천년 전에 거대한 바위로 막혔던 걸로 드러났다. 2003년의 폭우로 드러난 구멍은 정식 입구가 아닌 개구멍이었던 것이다. 작업은 굉장히 신중하게 이루어졌고 100% 수작업이었다. 사람들이 일일히 삽과 손만을 사용해 1천 톤에 달하는 흙과 토사물을 제거하자 마침내 동굴의 진면목이 세상에 드러났다.

동굴에서는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큼직한 나선형 조개껍데기, 재규어 뼈, 도자기, 인간피부조각, 옥과 석영으로 상감한 마스크, 목걸이, 반지, 녹암악어 이빨 및 조각상, 상자 속 가지런히 배열된 딱정벌레 날개, 수 백여개의 금속 구체 등이 나왔다. 특히 40~130mm 정도 크기의 금속 구체가 눈길을 끌었는데, 코어는 점토로 만들었고 황철석으로 도금해서 원래는 반짝반짝 빛났을 것이라고 한다. 정확한 용도는 잘 모르겠으나 방 모서리마다 조심스레 올려져 있었던 걸 보면 아마 신에게 봉헌하는 제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터널 끝에는 테오티우아칸의 지하세계를 상징, 축소해놓은 방이 있었다. 피라미드 중앙에서 약 17m 바로 수직 아래에 태양을 상징하는 공이 하나 박혀있었고, 산을 축소한 미니어처들이 그주변에 놓여있었다. 작게 만들어진 계곡에서는 액체 수은이 흘러내려와 중앙의 작은 연못, 즉 호수와 바다를 상징하는 연못에 고였다.[22] 4개의 그린스톤으로 깎은 조각상들도 함께 있었는데 옷과 구슬을 착용하고 있었고 눈에 보석이 박혀있어서 횃불을 아른거리면 찬란하게 빛났다. 토굴의 벽과 천장에는 자철석, 황철석, 적철석 따위가 조심스럽게 박혀있어 불빛에 비추어 마치 별빛처럼 반짝반짝거렸다. 이 곳에서 의식을 치르는 사제들은 마치 별들 사이에 서있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5.4. 케찰파팔로틀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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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찰파팔로틀 궁전
'케찰파팔로틀 궁전'은 테오티우아칸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건물군이자 궁전이다. 정문은 죽은 자의 거리를 향하고 달의 피라미드 남서쪽에 있는, 꽤나 크기가 거대한 저택이다. 말은 '궁전'이지만, 장식품의 질이나 벽화의 내용을 감안할 때 왕이 살았다기보다는 고위 사제나 대귀족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아예 신전에 딸려있는 부속건물들일 수도 있다.

이 건물들은 450년 ~ 500년 경 사이에 지어진 궁전으로 이미 200년 된 오래된 건물 부지 위를 그대로 돌로 덮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케찰파팔로틀'이라는 이름 자체는 궁전 벽화에 그려진 신화 속 새의 부조에서 유래됐다. 나와어로 '케찰리'라는 새의 이름과 '파팔로틀'이라는 나비의 이름을 합쳐서 '케찰파팔로틀'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사진을 보면 거의 완벽한 수준의 보존도를 자랑하는데, 사실은 2010년 즈음에 다시 복원 공사를 거쳐서 저런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962년에 처음 발굴되었는데 그 시기의 사진을 보면 색도 대부분 다 벗겨지고 허물어진 돌무더기일 뿐이다. 그런 폐허를 원 모습을 가정해 복원하고 남아 있는 안료를 분석해서 다시 덧칠한 것. 하지만 이마저도 완벽히 복원된 것은 아니라서, 실제 궁전의 모습은 저것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색감도 다양했다고 한다.

궁전 내부의 안뜰에는 소라 껍질을 들고 있는 깃털 달린 고양잇과 맹수와 독특한 머리 장식을 쓴 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궁전 지하에 묻힌 사원에는 녹색 새와 물, 생명과 관련된 벽화가 있으나 현재 관광객들은 출입이 불가하다. 테오티우아칸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회화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

6. 교통편

7. 치안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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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루타 식당 내부 모습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6] San Juán Teotihuacán de Arista [7] 당시 전세계에 200,000명에 달하는 인구를 넘기는 도시가 몇 개 없었다. 테오티우아칸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낙양, 크테시폰,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거대한 도시였다고 추정하는 자료까지 있을 정도이다. [8] 아즈텍 제국의 테노치티틀란 역시 위대한 대도시였으나 테오티우아칸만큼 영향력이 넓지 못했고, 그만큼 전성기를 오래 유지하지도 못했다. 테오티우아칸은 저멀리 유카탄 반도 티칼까지 정벌했으나, 아즈텍은 그쪽에는 별 관심이 없어 멕시코에 머물렀고, 테오티우아칸이 600년 가까이 번성한 것과는 달리 테노치티틀란은 대제국의 수도가 된지 100년도 못 가서 스페인군에게 멸망했다. 건축물들의 규모 역시 그렇다. 아즈텍의 최고 신전이었던 '템플로 마요르'에 비해 테오티우아칸의 '태양의 피라미드'가 10여m는 더 높았다. [9] 현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테오티우아칸의 마지막 지배 부족의 이름이 현지어로 메히칸으로 발음되었으며, 이후 마야 및 아즈텍 역시 같은 이름으로 불렸고, 여기에서 현대의 멕시코라는 국명이 나왔다고 한다. [10] 아즈텍 신화에서는 신들이 제 몸을 희생해서 태양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 신들이 제 몸을 바친 곳이 바로 테오티우아칸이라고 생각했다. 신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1] 아즈텍인들은 스스로를 테오티우아칸의 후예이자 공통 조상을 공유한 일족이라고 여겼으며, 스스로 테오티우아칸식 전통을 따르려 노력했다고 한다. [12]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는 당대 테오티우아칸인들이 부르던 이름이 아닌 메히칸 시기의 지배자들이 발굴 이후 붙인 이름으로 전해진다. 태양의 신전은 폭풍과 번개, 흐르는 물의 신을 모시며, 달의 피라미드는 물의 신전으로 통한다. 또한 아메리카 토착 문명이 그렇듯 재규어가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유적지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13] 다만 과거에는 전자인 외부의 약탈로 봤으나, 현재는 내부 반란이 더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는데 자세한 건 쇠퇴와 멸망 문단 참고. [14] 초기에는 톨텍 문명이 테오티우아칸을 건설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 톨텍 문명의 연대가 오히려 테오티우아칸보다도 늦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15] 약 기원전 1000년 전쯤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멕시코 고원 지대 최초의 피라미드 제단이 건설된 곳이었다. 멕시코시티 서남부인 틀라판(Tlalpan) 행정구에 위치해있다. [16] 후대의 아즈텍에서는 늙음의 신이라고 불렸던 우에우에테오틀로 전해지는 등 쿠이쿠일코 사람들은 시틀레 화산 자체를 신으로 모셔서, 화산들과 불의 신으로 숭배했다. 기원전 800년경에 세워진 수로로 둘러싸인 동그란 피라미드 제단 자체가 바다 속에서 솟아나온 시틀레 화산을 상징하는 일종의 미니어쳐의 역할이었다. 인간형으로는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는 조각상 등으로 묘사된다. [17] 쿠이쿠일코는 그 전성기 때의 인구가 20,000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기원전임을 감안할 때 어마어마한 인구다. [18] 당시 전세계에 200,000명의 인구를 넘기는 도시가 몇 개 없었다. 테오티우아칸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낙양, 크테시폰,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거대한 도시였다고 추정하는 자료까지 있을 정도이다. [19] 비슷한 예시로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가 있다. 프랑스 탐험가 '앙리 무오'가 밀림 속에 파묻혀 있던 앙코르 와트를 '발견'했다고 믿는 오해가 퍼져있으나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인들 사이에서 한 번도 잊힌 적이 없다. 앙리 무오는 그저 서양에 처음으로 앙코르 와트를 소개했을 뿐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서양 탐험가가 18세기 조선을 왔다가 '내가 석굴암을 발견했다!'라고 떠드는 식이다. [20] 1위는 의외로 멕시코 촐룰라의 대피라미드다. 밑면의 길이만 기자 대피라미드의 2배가 넘어가며 메소아메리카에서 지은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로 꼽히지만 현대는 다 허물어졌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피라미드다. [21] 테오티우아칸인들은 동굴을 어머니의 자궁이라 묘사하며 태초의 생명이 탄생한 곳이라 생각했다. 최초의 인류가 걸어나온 곳이 바로 이 동굴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22] 마치 진시황릉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진시황 역시 자신의 무덤에 천하의 축소판을 만들어놓고 액체 수은으로 만든 호수와 바다를 재현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수은이 바다에서 계속 파도치면서 철썩거리도록 만들었다는데 진실은 진시황릉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알 수 없다. [23] 테오티우아칸행은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 시내 방면 광역버스 및 티사유칸행에 비해 표적이 될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다. [24] 산 후안 데 테오티우아칸, 아콜만 등. [25] 이 두 도시에는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맛있기로 소문난 맛집들이 좀 있다. [26]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획득 고도만 해도 최소 1,000m는 우습게 나오는 곳이다. [27] 멕시코도 원래 고속도로의 자전거 진입은 불법이나 불안한 치안과 대체도로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 눈감아준다. [28] 해당 인물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사이클팀 소속이기도 하기 때문에 선수/현역 생활 중 사망자 목록 명단에도 등재되어 있다. 그의 부친도 함께 작고하였으며, 뺑소니 운전자는 음주 상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