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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5:05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농노 해방에서 넘어옴
1. 개요2. 개혁 목록
2.1. 농노 해방
2.1.1. 농노 해방 이전의 러시아 농촌의 상황2.1.2. 농노 해방의 배경2.1.3. 농노 해방의 과정2.1.4. 농노 해방의 의의2.1.5. 농노 해방의 한계
2.1.5.1. 반론
2.1.6. 농노 해방 이후의 귀족들이 겪은 변화
2.2. 지방 통치 제도 개혁
2.2.1. 젬스트보2.2.2. 도시 자치2.2.3. 볼로스트
2.3. 재정 개혁2.4. 사법 개혁2.5. 교육 개혁2.6. 군제 개혁2.7. 개혁의 한계와 반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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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실시한 대개혁.

2. 개혁 목록

2.1. 농노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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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 해방령 포고식

2.1.1. 농노 해방 이전의 러시아 농촌의 상황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인구 6,700만 명 중 5천만 명은 농민이고 5천만 농민 중에서 4천만 명은 농노, 나머지 1천만 명은 일부 자유 농민과 특수 계층이다. 농노 중에서도 1,800만 명은 국가에 예속된 '국가 농민', 2,200만 명은 지주에게 예속된 '사유지 농노'이다. 국가 농민은 사유지 농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경제력과 토지 보유량이 더 좋았으며 이들을 통제하는 관료들도 지주보다는 관대했다. 그러나 국가 농민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토지에 예속당한 처지이기 때문에 니콜라이 1세가 칙령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차르가 신하들에게 땅을 하사할 때 같이 팔려가서 사유지 농노가 될 수 있었다.

사유지 농노는 마을에 살면서 소작료와 부역을 바치는 이들과 지주의 저택에 거주하면서 지주에게 봉사하는 '가내 농노[3]'로 나뉜다. 사유지 농노는 국가에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제국 정부는 지주들이 농노를 노예처럼 다루어도 방관했다. 지주는 농노를 담보물로 잡을 수 있고 마음대로 매매할 수 있고 동 시기 미국의 지주들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하던 것처럼 가족 구성원들을 따로 떼어내서 하나씩 팔아버리는 잔혹한 일도 자주 벌였다. 또한 지주는 농노에 대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어서 시베리아 유형과 체형을 포함한 무제한적인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농노들은 지주에게 분여지를 제공받아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하는 대신, 수확량의 30% ~ 50%를 공조로 바치고(오브로크)[4] 1주일에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 나가서 일해주는 부역(바르시치나)을 할 의무가 있었다. 지역마다 의무의 형태는 상이해서, 중부와 북부의 비흑토지대 지주들은 공조를 선호한 반면에 비옥한 남부 흑토지대의 지주들은 부역을 선호했다. 비흑토지대는 토지의 생산력이 낮아서 수확량이 적기 때문에 부역보다는 소작료를 받는 게 더 이득이고, 흑토지대는 토지 생산력이 높아서 비흑토지대와는 반대로 부역이 더 좋았다. 둘 다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중부 러시아는 둘의 비중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1861년에 제국 정부가 농노들을 해방하고 토지 분배를 위해 지주들의 토지를 구매할 때, 비흑토지대의 지주들은 정부의 토지 매각 요청에 대체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토지를 팔아 줄테니, 현금만 많이 쳐달라'는 태도를 보였다. 반대로 남부의 지주들은 토지 가치가 높아서 토지 매각을 꺼렸다. 그러나 토지 매각을 강요하는 정부와 농노 해방을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강한 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토지의 일부를 매각했다.

사회적으로 농민들은 농민 공동체(мир/미르, община/옵시나)에 속했다. 미르는 각 가정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만큼의 의무도 부과했다. 몇 년 주기로 토지를 정기적으로 재분배하면서 구성원들의 공동 생활을 이끌고 공동 경작을 주도했다. 그리고 미르는 마을의 행정과 복지 업무도 수행하고 마을 공금을 이용해 학교나 병원을 짓거나 도로와 기반 시설을 관리했다. 그러나 정부가 미르를 이용해 농민들을 통제했기에 미르는 농민들의 자치 조직인 동시에 국가의 지배 도구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전반부터 곡물을 수출하기 위해 경작지를 늘리고, 주곡인 호밀뿐만 아니라 감자 사탕무, 포도주의 생산을 증가시켰다. 전체적으로 감자는 4배, 포도주는 3배 늘어나고 가장 중요한 수출 작물인 밀의 생산량도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일부 지주들은 19세기 전반부터 외국의 농기계과 새로운 경작법, 좋은 종자와 좋은 육종의 가축들을 도입하는 식으로 영농 기술과 경작 방식을 개선하고 농노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작물 중에 호밀은 기후나 토질을 잘 따지지 않고, 키우는 것도 어렵지 않아서 농민들은 호밀을 많이 심었다. 저장 기간도 긴 데다 호밀로 보드카 맥주, 크바스를 빚을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의 주식은 호밀이었고 밀은 판매용으로 재배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해서 수출 항구가 늘어나자, 러시아는 밀 수출로 큰 이익을 보았다. 밀의 수요가 증가하고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것을 확인한 러시아의 지주들은 대량으로 밀을 생산해 목돈을 챙기려 했다. 지대로 밀을 요구하고 지주 직영지에도 밀을 심었으며 농민들이 자율적으로 생산한 밀들을 사들여 대상인들과 판매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농민들에게 밀은 식량이라기보다는 상품 작물이나 지대로 바치는 현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농업 자체가 비효율적인 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질적인 성장은 매우 낮았으며 곡물 수출과 생산량 증가로 인해 생긴 이익은 지주들이 독차지했다. 그리고 일부 지주들이 영농 기술과 경작 방식을 개선하고 농노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지만, 자유 노동자들의 수가 부족하고 일부 지주들만의 혁신이어서 이러한 변화가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대다수의 지주들은 그저 농노들을 더 착취해서 수입을 올리려 했다. 이 때문에 농업 경제가 쇠퇴하고 농촌이 황폐화되었으며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게다가 크림 전쟁으로 화폐 가치가 급락하고 물자 공급을 위한 가축 징발, 전쟁세 징수 때문에 러시아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대다수의 지주들은 그저 농노를 착취하여 수입을 올리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했으며 곡물 수출과 생산량 증가로 인해 생긴 이익을 독차지하고 축적한 자본을 자신들의 사치에 소모했다. 그래서 당대 러시아의 곡물 수출량은 증가했음에도 농업 생산성은 제자리였다. 이 때문에 농업 경제가 쇠퇴하고 농촌은 황폐해졌으며 농민들이 도시나 지주나 정부의 힘이 약한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크림 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루블을 너무 찍어낸 탓에 화폐 가치가 급락하고[5] 물자 공급을 위한 가축 징발, 전쟁세 징수 때문에 러시아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2.1.2. 농노 해방의 배경

19세기가 되자, 러시아 농노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지식인과 대중, 심지어는 황제까지도 농노제가 러시아의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노제에 대한 개혁은 번번히 좌절되었는데, 섣불리 농노를 해방하면 귀족들이 반정부 세력으로 돌아서서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6]

예카테리나 2세가 정권 안정화를 위해 농노제를 강화하고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리를 나눠준 것은 귀족들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고 예카테리나 사후의 황제들은 이것이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황제권 강화와 농민들의 불만 감소라는 1석 2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개혁을 실시했는데, 귀족들이 황제권 견제 세력이면서 정권 지지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들은 귀족들의 이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개혁을 실시했다. 그래서 19세기 전반의 농노제 개혁은 지나치게 온건한 수준에 머물렀고 큰 효과가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니콜라이 1세다. 철권 통치와 반동 정치로 유명한 니콜라이 1세이지만, 그런 그도 농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었고 농노제를 악으로 규정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는 농노제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급진적인 개혁은 혁명을 비롯한 사회 혼란을 부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일관했다.

1842년, 국가 재산부 장관 파벨 키셀료프(Па́вел Дми́триевич Киселёв)는 농노들에게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귀족이 빚을 갚기 위해 농노들을 경매에 내놓거나 가족 중에 한 명을 따로 떼어내서 파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토지 분배 없이 농노들을 해방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농촌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고 감자도 심게 했으며, 각종 교육을 진행하고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건물들을 세우는 복지 정책도 시행했다.

하지만 토지 분배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개혁에 무관심했고, 토지를 받지 않는 대가로 풀려난 농노들은 고작 수 만명이었다. 학교와 학생의 수가 늘어났지만 전체 농민의 수와 비교하면 큰 성과라 하기 힘들었고, 니콜라이 1세는 농노의 자녀들이 중등 교육 이상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게 막는 모순적인 조치를 취했다. 가족 구성원을 강제로 분리시켜서 파는 일 역시 근절되지 않았다.

정부 당국이 감자 재배를 강요한 것은 '감자 반란'으로 이어졌다. 원래 감자는 표트르 대제의 시대에 처음 도입한 작물이지만, 러시아의 농가에서는 감자를 그리 잘 심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칫 잘못하면 1년 농사를 망칠지도 모르는 새로운 작물의 재배를 기피했고[7] 농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직자들은 감자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배를 반대했다. 감자의 유용성을 알던 정부 관료들은 농민들을 설득하기보다는 강압적으로 대했고 결국 사태는 반란으로 변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반란' 이후에 농민들이 감자의 장점을 알고 점점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1840년대에 감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듯 농노제에 대한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러시아는 농노제를 강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농업이 위기 상황을 맞이하자, 농업에 기반을 둔 귀족 지주 계급이 붕괴하고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났다.[8] 이제 농노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더욱이 산업 혁명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자본주의도 농노 해방을 요구했다. 공장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노 노동자들은 자유 임금 노동자에 비해 생산성이 낮고, 농번기만 되면 공장을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이런 문제 때문에 러시아의 공업은 성장이 지체되었고 기업가들은 농노 노동자보다 효율이 좋은 자유 임금 노동자들을 수급하기 위해서 정부에 농노 해방을 청원했다.

그리고 대외무역량이 늘어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화폐 경제와 각종 상품들이 농촌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농촌의 자연 경제가 붕괴하고 교환 경제가 성장했으며 농촌에서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재산 수준이 서로 비슷했던 농민층이 분화하기 시작해 빈부격차가 생기고 부농과 빈농의 숫자가 늘어났다. 농노 중 일부는 대상인으로 성장하고 모로조프, 가릴린, 프로호로프 가문처럼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와 농노제 사이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노 해방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당국이 농노 해방을 단행한 가장 큰 이유는 농민 폭동이 급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세기 초에는 연간 10여건에 불과하던 농민 폭동이 19세기 중반에는 매년 50건으로 늘어났다. 농민들은 부역과 소작료의 집단 지불 거부, 대규모 탈주, 지주 재산 방화, 약탈, 지주 일가와 관리 살해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항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농민 반란도 급증해서 1848년에만 107건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으며, 1854 ~ 1855년에 일어난 격렬한 농민 반란은 정부 당국에게 더 이상 농노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더 심각해져서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1856년부터 해방령을 반포한 1861년까지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가장 심했던 1858년에는 무려 378건의 폭동이 일어나고 수십 명의 지주와 관리가 살해당했다. 소요와 반란이 터질 때마다 제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지만, 아무리 진압해도 농민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규모가 계속 커졌기 때문에 정부는 농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회적인 여론도 농노 해방에 기여했다. 크림 전쟁의 패전으로 러시아는 국가의 정치 · 사회 체제가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지고 부패했음이 드러나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부패와 낙후성은 농노제 때문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전부터 농노제를 비판하던 자유주의자들은 '농노제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경제적'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대중매체에 기고했다. 그 중에서도 역사학자 콘스탄틴 카벨린(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Каве́лин)의 <농민해방에 관한 비망록>은 유명하다. 카벨린은 '지주들의 토지소유는 유지하되, 적당한 양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지주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민주의자인 알렉산드르 게르첸(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은 러시아 최초의 혁명 신문인 <종>에서,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와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обролю́бов)는 푸시킨이 창간한 진보 성향의 잡지 <동시대인>에서 조건 없는 농노 해방을 호소했다. 심지어 보수파 역시 농노제 폐지를 외쳤는데, 1840년대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유명한 미하일 포고딘(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Пого́дин)이 차르 전제정과 농노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서유럽에 비해 후진적이며 서유럽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한 서유럽주의자들은 서유럽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농노제를 비판하고, 농노제를 폐지해야 러시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유럽주의를 비판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적 전통을 옹호한 슬라브주의자들조차도 농노제를 비판했다.[9] 이해당사자인 농민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지식인 전체가 농노제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도주의도 농노제 폐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농노제는 19세기 유럽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였다. 개 몇 마리와 농노 한 가족을 교환하거나, 어머니는 팔고 자식은 남겨두는 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2.1.3. 농노 해방의 과정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암덩어리인 농노제를 도려내기 위해 농노 해방을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모았다. 이들은 일부 고위 관료와 사회 활동가, 진보적인 관료, 지주들로 구성되었다. 고위 관료 중에서는 해군부 장관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내무부 장관 란스코이, 황제를 보좌하던 밀류틴 형제, 재무부 장관 미하일 레이테른(Михаи́л Христофо́рович Ре́йтерн / Michael Graf von Reutern, 독일어 표기)이 대표적이다. 콘스탄틴 대공이 이끄는 해군은 장관의 영향을 받아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선 관료들이 많았고 개혁에 공감하는 관료들을 모아 개혁 세력을 구축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황제의 숙모인 옐레나 대공비, 야코프 로스톱체프 백작(Граф Яков Иванович Ростовцев), 체르카스키 공작 등의 사회 활동가들도 농노 해방을 위해 황제에게 협력했다. 특히나 옐레나 대공비는 인도적인 이유로 농노 해방을 지지한 사회 활동가로서 해방령 이전부터 농노들을 풀어주는 사업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로스톱체프가 모아온 사마린, 체르카스크, 솔로비예프, 세메노프 등의 진보적인 관료들도 개혁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그 진보성 때문에 '붉은 관료들'이라고 불렸다.

1856년 3월 30일, 크림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칙령에서 황제는 백성에게 개혁을 약속했다. 그리고 황제는 대관식에 모인 귀족에게 농노제에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다고 말하며 " 밑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는 위에서 일으키는 게 나을 것이다"라고 귀족들을 설득했다. 1857년 1월 3일, 황제는 비밀 위원회를 설치해 농노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1857년 11월, 제국 정부는 토지 분배 없는 농노 해방이라면 검토해 보겠다는 서부 3개 구베르니야[10] 지사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미르의 존속과 토지의 유상 분배가 정부의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1858년, 46개 주의 귀족들로 구성한 주 위원회를 설치하고 농노제 폐지를 논의하게 했다. 추가적으로 제국 정부는 러시아 각 지역을 비흑토 지대, 흑토 지대, 스텝 지대로 나누어서 지역 사정에 맞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조치하고 농노제 폐지에 대한 언론 통제도 풀었다.

다만 귀족들의 반발과 의견 차이로 인해 농노 해방에 관한 논의가 지지부진하고 곳곳에 농민 폭동이 터지자, 황제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농노 해방에 소극적인 귀족들을 직접 설득했다. 1858년 2월, 황제는 비밀 위원회를 <대 위원회>로 개칭하고 1859년 3월, 법전 편찬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각 주 귀족 대표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해방령과 관계된 법령을 제정했다. 2년 동안의 토론과 법제화 과정에서 귀족 지주들의 요구가 대폭 수용되었다. 귀족 지주들의 반발이 너무 강했기에 개혁파 관료들과 주 위원회의 자유주의자들이 원안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많은 부분이 귀족 지주들의 요구대로 수정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 분배량은 줄어들고 부역과 납세는 강화되는 등,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매우 불철저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861년 2월 19일, 황제는 "지주의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민과 가내 농민들에 대한 농노제를 영원히 폐지한다"는 내용의 농노 해방령을 공표, 농노에게 법적으로 자유인 신분과 시민권을 부여하고 2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에 완전히 농노제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해방령은 지역별로 3 ~ 12 데샤티나에 해당하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토지 상환금을 부과했다. 토지 상환금의 20%는 즉시 지주에게 내고 80%는 토지를 대신 구매해 준 국가에게 49년 만기 6%의 이자로 납부하는 것이며, 농민들은 토지 상환금을 모두 갚기 전까지 임시로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거나 부역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농민을 통제하기 위해 미르를 강화하고 미르 몇 개를 묶어서 '볼로스트'라고 하는 새로운 행정단위를 만들었다.[11] 수십만의 황실 사유지 농노가 1863년, 국가 농민들이 1866년에 해방됨으로서 러시아에서 농노제는 완전히 소멸했다.

2.1.4. 농노 해방의 의의

농노 해방은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이었다. 4,0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노예 상태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다.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해방자'라 불렸고,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이자 인민주의자인 게르첸은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는 정복하셨도다." 라고 말하며 황제를 찬양했다. 억압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려는 인민주의자가 억압의 상징인 황제를 예수 12사도에 빗대 찬양할 만큼, 농노 해방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농민들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이제부터 농민은 지주의 허락 없이 결혼하고 취업할 권리와 상업과 각종 부업에 종사하거나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법적으로 지주가 농민들에게 행사하던 사법권이 소멸하고, 농민들은 정식으로 법정에 소송할 권리를 받았다. 정신적으로 농노 해방은 농민의 노예 근성을 뿌리 뽑고 농민들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점점 농민들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차르에게 탄원서를 보내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민 대표를 선출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고 통치에 참여하려 했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들이 타격을 받고 지방 귀족들이 장악한 지방 행정 제도가 재조직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적 개인 영농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도시민들과 상인들 중에서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늘어나고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는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와 전문직 종사자의 영향력이 늘어나고 각종 제도를 근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드디어 러시아가 봉건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접어든 것이다.

2.1.5. 농노 해방의 한계

하지만 농노 해방이 마냥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농노 해방령은 매우 불충분한 개혁이었고, 동시에 농민들에 대한 기만이나 다름없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목초지와 삼림, 전체 토지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남겨주고 나머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때문에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전체 농민의 수에 비해 부족했고, 농민 개개인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르를 통해 분배한 것이라서 농민들의 토지는 오히려 해방 이전보다 20% 이상 감소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최대 50%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토지 문제를 조정하는 조정관들은 주로 귀족 지주의 편을 들었다.[12]

게다가 원래 정부가 매입한 토지의 가격은 5억 4,400만 루블이었는데, 정부는 매입한 토지의 가격이 원가보다 1.5배 이상 더 높은 8억 6,700만 루블이라고 발표하고 이를 기준으로 토지 상환금을 부과했다. 지주에게 직접 지불하는 20%의 토지 상환금도 농민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워서 이 20%를 갚는 데 20년이나 걸리기도 했다. 나머지 80%는 49년 만기에 연리 6%라는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했으며 농민들은 이 과중한 토지상환금의 이자까지 다 갚아야 완전한 자영농이 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제국 정부가 토지 상환금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세금은 원가의 4배 가까이 되는 20억 루블이었고[13] 이것은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상환금 외에도 제국 정부가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한 탓에 상환금과 각종 세금을 다 합해서 농민들이 1년에 내야 할 세금의 액수는 총 30 루블로 농민들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14] 정부가 농민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은 귀족의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보다 10배 더 높았다. 농민들은 이제 인신적으로 예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예속당했고, 예전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농민들은 상환금을 다 갚을 때까지 '임시 의무 농민'으로서 소작료를 내고 어느 정도의 부역도 해주어야 했다. 어떤 지역은 농노 해방령 이후 20년이 지난 1881년까지 농민들이 임시 의무 농민으로 남아 있었다.

제국 정부는 농노 해방령을 선포한 뒤, 소요나 반란을 막고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미르를 강화했다. 미르를 기반으로 각종 행정 단위를 만들어서 지주가 가졌던 징세·징병·재판 등의 권한을 미르에 위임하고, 미르에 연대 책임을 지워 농민들을 미르에 묶어두었다. 이런 제약 때문에 농민들은 독립적인 자영농이 될 수도,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로 변신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자기 몫의 의무를 수행하고 정기적으로 상환금을 납부해야 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미르의 동의를 얻어 국내 여권을 발급받아 도시로 일을 다니는 농민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여권 발급에는 일정한 수수료를 받았고 정부는 이 여권 발급 수수료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미르가 정기적으로 각 가정의 노동력 수준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하다 보니 가정내 구성원이 많을수록 더 많은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은 자식을 많이 낳았고[15]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1인당 토지 보유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1877년 농민의 1인당 토지 보유량은 평균 13.2 데샤티나인데 1905년에는 10.4 데샤티나로 감소했다. 토지 보유량이 줄어드니 생계 문제가 심해져서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토지 재분배는 농민들의 노동 의욕, 미래에 대한 희망, 농업 기술을 혁신하려는 시도를 꺾어 버렸다. 땅을 잘 경작하고 노력해 봐야 미르에서 땅을 빼앗아서 재분배해 버리니, 농민들의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르의 강화는 산업화에 장애가 되었다. 러시아가 산업화를 이루고 서유럽을 따라잡으려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농촌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미르가 인구 이동을 통제하니 전면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산업 노동자의 숫자도 농민의 숫자에 훨씬 못 미쳤다. 정부라고 이 문제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르의 통제를 해제하는 순간 대규모 농민 반란이 터질 수 있어서 미르의 통제를 풀 수가 없었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미르를 없애야 하지만, 미르를 없애면 체제가 위험해지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농민들이 어떻게 농노 해방을 바라보았는지 알아보자면, 1856년부터 해방이 이루어질 거란 기대 속에 있던 농민들은 농노 해방령을 듣고 경악했다. 농민들이 원하던 해방령은 모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임시 기간 없이 해방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이런 식의 해방은 원하지도 않았고 차르 - 아버지께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해방령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해방령에 분노한 농민들은 부역과 소작료 지불을 거부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관리와 지주들을 살해하거나 지주들의 재산을 탈취, 방화했다. 농노 해방령을 선포한 1861년에만 1,176건의 농민 소요가 발생하고 정부는 1864년이 되어서야 겨우 진압했다. 황제와 관료, 지주들은 자신들이 선포할 농노 해방령이 농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와 경찰이 경계 태세를 유지하게 하고 일부 지주들은 해방령이 반포되기 직전에 도시로 피신했다.
2.1.5.1. 반론
해당 논리는 90년대 이전에 주류였던 전통주의적 사관이고 현재로는 전통주의 사관의 기본구조를 따르는 학자들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편이다.

흔히 무시되는 사안이지만 원칙적으론 '전제정'인 이상 '봉건정'의 부수물인 농노제가 존재할 수 없다. 차르권력이 그 귀족들을 견제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된 시기거나 전쟁, 흉년 등의 위기가 아닐 경우 귀족의 농노에 대한 권리는 제한적이었다. 또한 귀족들은 영지에 살지 않았고 영지 관리는 마름[16]과 농민공동체 대표들이 협의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러시아 특유의 거대한 땅덩이라와 다양한 민족, 종교, 언어 구성 때문에 귀족의 농노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은 유럽에 비해 크게 낮았으며,[17] 토지상환금이든 뭔가 다른 가혹한 세금이든 농민들이 못 내면 그냥 안 내면 그만이었고 딱히 국가와 귀족도 그걸 강요하는게 불가능했다. 때문에 웬만한 위기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억지로 통제하기보다는 유연하게 풀어주는게 많았고, 실제로 18세기 말에 중부지역에서는 농노의 1/4 이상이 공식 이동증을 발급받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비공식적으로 이주한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러시아 제국의 농노 이동성은 자유로웠다.[18]따라서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는 러시아 특유의 거대한 땅덩어리, 자본주의와 공업의 발전, 귀족의 농노에 대한 통제력을 제한함으로서 전제정을 수립하려는 차르들, 농노와 귀족의 경제적 필요로 인해 이미 18세기부터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1861년의 농노제 폐지는 그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러시아 농민은 직업 구분이 아니라 신분 구분이다. 상대적으로 척박한 땅이 많아서 러시아 농민들은 농노 시절에도 (전근대 농민 기준으로) 농업에 크게 종사하지 않았다. 때문에 농업을 가지고 평가하는 건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농노제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않고 지방 유력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비러시아계 주류 지역이나 차르권력이 붕괴된 시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농노가 해방되면서 토지를 받는데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첫째는 토지상환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최소크기의 토지만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토지상황금을 지불하면서 평균크기의 토지를 받는 것이다. 당시 농민 입장에서 굳이 돈을 벌자면 도시로 가서 노동자로 일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농업에 종사하더라도 일단 전자를 선택하고 부족한 양이 생기면 지주의 토지를 임대하는 편이 훨씬 더 싸게 먹혔다. 때문에 토지가 많든 적든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토지상환금 문제는 더 간단한게 농민들은 토지상환금을 지불할 수 없으면 안냈고, 국가에서도 지속적으로 연기, 감면해주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면제시켰다.

2.1.6. 농노 해방 이후의 귀족들이 겪은 변화

농노 해방 이후, 일부 귀족 지주들은 농장의 체질 변화에 성공해 영화를 누렸지만, 대부분의 지주들은 변화에 실패했다. 지주들이 변화에 실패한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게다가 제국 정부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기만했다. 제국 정부는 재산의 54%를 정부에 빚지고 있던 귀족 지주들에게 상환금을 변제하고 남은 액수만 지급했다. 결국 귀족 지주들은 생계를 위해 땅을 팔거나 농민들에게 임대하고 임시 의무 농민들에게 부역을 시켰다. 그리고 귀족 지주들은 완전 농노제였던 농장을 귀족 지주의 직영지를 경작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방식(반(半)농노제) 농장으로 전환했는데,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지주들이 급속도로 파산했다.

귀족들은 서서히 토지 소유권을 상실해 갔다. 통계에 따르면, 1861년부터 1905년까지 귀족들은 소유한 토지의 1/3을 농민들에게 매매하고 귀족 보유지의 면적은 연간 68만 평방미터씩 감소했다. 1861년에는 귀족의 88%가 지주였지만, 1878년에 56%, 1895년에는 40%만 지주이고 보유한 토지의 40%를 저당 잡혔다. 이제는 소작료가 아닌 월급이 귀족의 주요 소득이 되었다. 비지주 귀족의 다수는 도시로 이주해서 의사와 법률가 같은 전문직 종사자나 예술가로 전업하고 일부는 철도 건설 · 공업 · 보험 · 금융업에 뛰어들어 대자본가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완전히 파산해서 사회의 저소득층으로 전락했다.

점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자, 귀족들은 어떻게든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대신과 부(副)대신, 지사와 각 부서의 중요 직책을 장악했다. 관직 승진에서의 우선권도 유지하고 보수 반동적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공공기관에서 귀족의 비중이 감소하고 정부에서 직책을 맡을 만한 인력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또한 공직 임용에서 출신 성분이 아니라 능력과 준비 과정, 자격을 고려하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개혁 이후, 비귀족 계급들이 적극적으로 귀족이 되려 했기 때문에 비귀족 계급의 신분 상승 사례가 늘어나고 귀족 계급의 분화 현상이 발생했다. 제국 정부는 정권을 지지하는 귀족층이 분열되면 정권에 큰 위협이 되리라 보고 이를 막으려 했고, 1865년에 개인 귀족(본인 1대만 귀족 대우를 받는 귀족)과 세습 귀족(귀족 권리 세습 가능)이 될 수 있는 관직 등급을 높였다. 이제부터는 12급 이상의 군직이나 9급 이상의 관직에 올라야 개인 귀족이 될 수 있고 세습 귀족이 되려면 6급 이상의 군직이나 4급 이상의 관직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귀족의 증가와 계급 분화 현상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1867년에만, 귀족이 65만 2천명이나 되었고, 1897년에는 그 숫자가 2배 가까이 증가해 122만 2천명이 되었다. 19세기 말, 장교의 51.2%는 귀족 출신이고 고위 관료와 중간관료의 30.7%가 귀족 출신이었다. 귀족층은 국가 공직의 1/4를 차지했다. 원래 동질적이었던 귀족층은 점점 구(舊) 귀족과 신(新) 귀족, 토지를 보유한 귀족과 토지가 없는 귀족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렇듯 제국 정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귀족들은 농노 해방이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갔다. 그들은 농노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의 전환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 탓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다. 수백 년간 농노들을 착취하며 편하게 살아온 귀족들은 그토록 많은 재산과 권리, 정부의 지원을 가지고도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20]

하지만 이 때문에 귀족들은 제국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직접 혁명에 뛰어든 이는 많지 않았지만 황제를 돕지는 않게 된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황제를 위해 나섰던 귀족은 거의 없었고 자신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에야 백군을 일으켜 싸웠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2.2. 지방 통치 제도 개혁

2.2.1. 젬스트보

예전부터 러시아는 지방 행정 제도가 빈약하고 신분적 성격을 가진 자치 기관들이 난립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카자크 공동체와 농민 공동체, 지방 귀족 위원회와 상인 길드를 비롯한 자치 기관들이 제각각 행정과 사법, 징세권을 행사하고 주지사의 권한은 불명확했으며 지방에 설치된 정부 부처들은 서로 행정과 징세권을 놓고 서로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혼란은 행정 제도의 비효율과 관리 난항으로 이어졌다. 또한 대개혁으로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변화하고 농노 해방으로 농민들이 자유민이 되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더 이상 지방 통치를 관료와 귀족들에게 일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의 지방 행정 참여를 배제한 것이 지방의 경제, 보건, 교육을 비롯한 각종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 행정 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1864년 1월 1일, 제국 정부는 '주 · 군 지방자치기관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주와 군에 젬스트보(지방 의회)를 설립했다. 젬스트보는 신분에 상관없이 지주, 도시민, 농민 공동체의 3개 계층이 3년 임기의 의원을 선출하고 선출된 의원들이 운영기관과 집행기관을 구성하는 제도였으며 각 지역의 주지사와 내무부 장관의 통제를 받았다.

젬스트보의 의원 선출 과정과 선거권 부여 기준은 다음과 같다.

젬스트보는 도로 정비 · 의료 · 보험 · 초등교육 · 우편 · 지방의 무역과 산업 발전 · 영농 기술 지원 · 교회 신축 · 교도소 운영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로부터 세금과 의무를 부과할 권리와 기금을 조성해서 운용할 수 있는 권한, 토지, 가옥, 공장과 같은 부동산에 특별세를 부과할 권한을 받았다. 만약 업무 중에 오해가 생기면 젬스트보는 중앙의 원로원에 민원을 제기할 수도 있었다.

젬스트보는 운영기관과 집행기관으로 구성한다. 먼저, 젬스트보 운영기관은 젬스트보 의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예산 책정과 기본적인 정책들을 논의하는 기구이다. 운영기관 의원은 무보수직으로 젬스트보의 '제1요소'라고 불리며 집행기관(또는 상임 위원회) 위원들과 상급 젬스트보에서 일할 의원들을 선출했다. 상임 위원회 위원은 젬스트보의 '제2요소'라고 불리며, 상임직이라 그런지 보수를 받았다.

상임위 위원들은 각종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전문 인력들을 고용했으며 상임위에서 고용한 이 전문 인력들을 일컬어 젬스트보의 '제3요소'라고 부른다. 제3요소는 의사 · 수의사 · 농업 전문가 · 통계학자 · 교사 · 기술자 등,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자기 희생을 무릅쓸 정도로 헌신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제 3요소는 19세기 말에는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간주받을 만큼 위상이 커졌으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에 공감하고 있어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젬스트보가 귀족과 관료를 대신해서 지방 자치를 시작하자, 지역 경제가 성장하고 교육과 보건 수준이 향상되었다. 젬스트보는 제한된 자원으로 학교와 병원을 짓고 농민들에게 가축 진료와 영농 기술, 농기구, 종자를 제공해주었으며 교량과 새로운 도로를 건설했다. 지역 상거래와 산업에 투자하고 신용 기관과 협동 조합에도 자금을 지원했으며, 농촌의 신용 협동 조합과 생산자 협동 조합 뿐만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 협동 조합과 주택 조합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아울러 이들은 미래에 더 많은 개혁을 시작하기 위해서 야심차게 통계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젬스트보는 러시아 의사 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로부터 지원을 받아[22] 무상 의료 지원 제도를 실시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처음 의료 지원을 시작할 때는 의사들을 고용해서 왕진을 보냈지만, 의사들이 도시에 머무르다가 필요할 때만 왕진 나가는 것으로는 의료 수요를 채워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젬스트보는 천천히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젬스트보는 지역을 4 ~ 5개 혹은 그 이상의 지구로 나누고 의사들을 지역 보건의로 고용해 각 지구에 배치한 다음, 마을이나 거점 지역에 병원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외래 환자들을 받고 입원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수용했으며 환자들에게 안정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젬스트보 병원'은 5 ~ 10개의 침상을 갖추고 진료실과 응급실 · 산부인과 · 매독 병동 · 관사를 보유했다. 젬스트보가 고용한 지역 보건의들은 간호사와 산파, 의사보들과 함께 평균적으로 1,000 ~ 1,500명의 환자를 담당했으며, 왕진을 나가게 되면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이러한 젬스트보의 무상 의료 지원은 '젬스트보 의료 제도'라고 하는 일종의 사회화된 의료 제도를 탄생시켰으며 러시아에서 의사의 역할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이 제도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의사나 간호사는 돈을 벌기 위해 의료 활동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에게 의료 복지를 제공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의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젬스트보 의료 제도의 성장은 의사와 간호사의 증가에도 영향을 주고 치료사의 전통 의료에만 의존하던 러시아의 마을에 현대 의학의 혜택을 제공했다. 그리고 젬스트보 의료 제도는 러시아의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농민들에게 의료 지원을 해주기 위해 인구 통계와 질병률, 의학을 연구하고 지역 위생을 관리했으며 젬스트보는 1910년까지 2,686개소의 병원을 세우고 3,100명의 의사들을 지역 보건의로 고용했다.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17 마일마다 한 명씩 있었으며 2,800명의 환자를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젬스트보 의료 제도는 소비에트 의료 제도와 현대 러시아 연방 의료 제도의 기초가 되었으니 러시아의 공공 의료 제도의 발전에 젬스트보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고 평할 수 있다.

젬스트보는 별도의 보험 제도를 운영했다. 이 보험은 주 젬스트보 상임 위원회가 관리했으며 위원회는 보험율과 보험 규정, 보장 기준을 정했다. 그리고 보험금 지불과 징수, 운영 등의 세부적인 업무는 군 젬스트보와 볼로스트 회의, 보험 설계사들이 담당했다.

젬스트보 보험 제도는 의무 보험, 선택 부가 보험, 자발성 보험의 3 종류로 나뉘며 가장 보편적인 보험은 화재 보험이었다. 그밖에도 젬스트보는 농작물과 가축 피해를 보상해주는 농업 보험과 재산 피해를 보상해주는 상호 보험 제도를 운영했다. 도시 두마도 이와 같은 보험 제도를 운영했기 때문에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의 보험 제도는 러시아 보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1870년대에 보험 회사들이 속속 등장한 뒤에도 젬스트보 보험 제도는 꾸준히 성장해 나가서 보험 시장에서 보험 주식 회사들이 제공하는 보험 다음으로 높은 비중(2위)를 차지했다.

1867년, 뱟카 주 젬스트보가 자체적인 우체국을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젬스트보 우편 제도가 탄생했다. 뱟카 주에서 우체국과 우편 제도를 운영하자, 사라토프와 탐보프 주도 영향을 받아서 자체적인 우편 제도를 실시하고 각 주와의 연계를 꾀했다. 이어서 페름, 사마라, 뱟카, 카잔, 우파와 같은 시베리아 서부와 볼가강 지역 젬스트보, 카르코프, 폴타바, 쿠르스크, 탐보프, 예카테리노슬라브 같은 중앙 러시아, 서부 지역 젬스트보들도 우편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제도를 운영했다. 각 젬스트보 우체국은 자체적인 우표와 엽서, 소포를 발행했으며 편지 뿐만 아니라 택배나 화물도 배송해 주었다. 젬스트보 우편 제도는 점점 규모를 늘어나서 1880년에는 러시아 전체 359개 군에서 129개 군이, 1901년에는 243개 군이 젬스트보 소속 우체국을 운영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가 젬스트보 우편 제도에 규제를 가하는 바람에 성장이 위축되기도 했다. 젬스트보 우체국은 국영 우체국이 없는 곳에서만 활동해야 하고 정부에서 명령하는 우편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법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표는 발행할 수 있지만, 국가에서 발행하는 우표와 다른 디자인으로 제작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또한 점차적으로 국영 우체국이 증가하고 제도가 개선됨에 따라 1900년대부터 1914년까지 젬스트보 우편 제도의 이용량이 50%로 감소하고 점점 그 비중이 감소해 갔다. 10월 혁명 이후 젬스트보 우편 제도는 사라졌지만, 반세기 가까이 러시아의 편지와 화물을 배송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것을 생각하면 그 공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젬스트보는 지방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서 자신이 전임자들보다(귀족, 관료) 훨씬 더 유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전임자들이 방치했던 농촌 지역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젬스트보는 농민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제도를 발의하고 시행했는데, 젬스트보가 지방 자치를 시작한 이후로 대부분의 마을에 학교와 병원이 생기고 병원을 못 지으면 작은 진료소라도 지어주었다. 중심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도 도로망이 깔렸다. 내부적으로 귀족 의원들의 수가 더 많긴 했지만, 젬스트보는 귀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서 일했으며[23] 조금씩 활동 범위를 확장해, 국가가 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손을 댔다.

그러나 젬스트보 제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젬스트보는 국가적인 사안에는 관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방의 각종 현안들만 처리할 수 있었다. 일반 행정과 공권력은 중앙에서 파견한 행정관들이 집행하고 이들이 젬스트보의 활동을 감독했다. 보유한 과세권은 제한이 많고 담당하는 구역은 너무 넓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젬스트보는 농노제를 폐지한 러시아의 34개 주에만 설립했기 때문에 원래 농노제가 없었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캅카스, 백해 연안과 러시아인들이 적었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우안 지역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젬스트보를 설립하지 않거나, 제정이 몰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설치하지 않았다. 젬스트보를 설립한 이후에도 군 단위의 행정은 여전히 군 귀족 회의의 의장이 전담해서 지역 행정은 계속 비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귀족들은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고 1905년 혁명 이후, 표트르 스톨리핀이 각 군에 군수를 파견하고 지방 정부의 재조직을 시도하는 것을 끝까지 방해했다.

젬스트보는 재산 규모와 부동산 보유 규모에 따라 투표권을 제한하기 때문에 귀족들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주 젬스트보에서 20%는 상인과 기타 계급, 38%는 농민들이 차지한 반면, 귀족, 관료 계급 의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42%, 상임위에서는 62%, 군 젬스트보에서는 74%나 될 정도로 귀족, 관료 계급 의원들이 다른 계급 의원들에 비해 매우 많았다. 상임위가 담당하는 지방 행정 업무가 높은 교육 수준, 시간적 여유를 요구한다는 점도 귀족의 상임위 장악에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 보수파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비귀족 계급의 의원 선출이 제한당하기 시작하고 젬스트보에 대한 귀족의 영향력과 정부 통제가 강화되었다. 제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젬스트보를 통해 지방 자치를 이루고, 더 나아가 관료나 귀족이 아니어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인민의 꿈을 무시하는 조치였다.

2.2.2. 도시 자치

1870년, 제국 정부는 '도시법'을 제정, 젬스트보를 모델로 해서 도시의 모든 계층이 의원을 선출하는 도시 의회(도시 두마)를 설립했다. 세금 납부액을 기준으로 해서 3 부류로 유권자들을 나누었다. 각 계급간 비중이 상이하던 젬스트보와 달리 도시 두마의 경우에는 각 집단이 1/3씩 선출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509개 도시에서 두마를 소집하고 젬스트보가 없던 캅카스,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우안 지역 도시에서도 두마를 소집했다.[24] 4년 임기의 두마 의원들은 시장 선출권과 각종 행정(복지, 상거래 보호, 의료 등)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도시의 발전과 도시민들의 편익을 위해 활동했다. 이러한 두마의 활동은 광범위한 계층의 정치 참여를 촉진시켜 시민 사회와 법치 국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시장 선출은 지사나 내무 대신의 인준을 받아야 했고 두마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관료들이 이를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각 주마다 감찰 위원회를 설립해서 두마를 감시했다. 선거권도 문제였다. 제국 정부가 재산 보유량에 따라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두마는 일반 도시민보다 재산이 많은 대자본가들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또한 도시에 호적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선거권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출신 도시민들은 두마 의원 선출과 도시 행정에서 아예 배제당했다.

2.2.3. 볼로스트

마을 몇 개의 연합인 볼로스트는 농민의 자치적 행정 기관으로서 볼로스트 회의, 법정 등을 운영했으며 각 마을에서 선출한 대표들(주로 미르의 장로)과 서기, 1~2명의 보좌관과 재무 담당, 세금 징수원, 일부 공무원, 볼로스트 법정의 판사들이 볼로스트를 운영했다.

행정적으로 면 회의는 면의 주요 직책들의 선출, 면서기, 면장 보좌관, 징세 담당관, 면 법정의 판사, 군 젬스트보 의원 후보자를 선출했다. 그리고 볼로스트의 경제적, 공적 사업과 각종 업무, 면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처리했으며 공공 요금을 부과하고 면에서 일하는 공직자들의 업무를 감시했다. 주민들의 민원 수렴과 정책 집행에 대한 주민의 불만 사항을 접수하고 해결하는 것도 면 회의의 몫이었다.

사회 · 경제적으로 면 회의는 자선 기금을 운영하고 볼로스트 산하의 학교 설립, 식량 창고를 비롯한 면 소속의 점포와 공공 시설을 운영했다. 고아들의 양육권을 지정하고 상속자가 확인되지 않은 재산이 있으면 상속자를 찾아 주었다.

면 법정을 운영하는 판사는 3년 임기. 35세 이상 60세 이하에 볼로스트의 다른 직책을 역임 중이 아니고 범죄 기록이 없으며 과거가 ‘깨끗한’ 주민이 피선출권을 가졌다. 미르에서 후보자를 선출해 볼로스트로 보내면 젬스키 나찰니크가 후보자들 중에 4인을 임명하고 그중에 1명을 주심으로 임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판사를 4 ~ 12인을 임명했다. 볼로스트 법정은 300 루블 이하의 재산, 금품, 재산 분쟁 사건과 사소한 위법 행위를 재판했다.

다만, 볼로스트 법정은 판사들이 뇌물을 받고 편향된 판결을 내리거나 비상식적인 판결을 내리는 문제가 있었으며 관습법에 의거한 판결을 내리기도 해서 인민의 불만이 많았다. 또한 체벌을 선고할 수도 있어서 자유주의, 진보 세력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면의 대표인 면장은 임기가 3년이고 미르에서 선출한 대표들이 모여서 면장을 선출했다. 면장의 주요 업무는 면의 질서와 안정 유지, 주민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며 제국 정부는 법적으로 면의 모든 권한을 면장과 면 담당 세무 공무원에게 위임했다.

행정적으로 면장은 면 회의의 소집, 해제를 명할 수 있고 면 회의를 주재했다. 볼로스트의 예산과 재산도 관리하고 주민들에게 거주 허가서도 발급해 주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정부의 칙령과 소식을 알리고 괴소문이나 잘못된 법령이 퍼지는지를 관찰, 감시했다.

면장은 사법권도 행사해서 면 법정의 재판 과정과 판결을 감독했다. 지역에 부랑자나 도망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구금, 조사할 권한도 보유하고 있어서 의심 가는 이들은 직권으로 체포했다. 만약 제한 구역에 침입하거나 소지한 여권에 문제가 있는 이들이 있다면 체포하여 상급 기관에 보고했다. 범죄나 소동이 발생하면 상급 기관에 보고하고 경찰이 오기 전에 1차적으로 해당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주민들을 진정시킨 뒤, 범인 색출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경찰에 협조한다.

도로, 다리, 관문 등의 교통 인프라를 유지, 보수하는 업무도 수행하고 화재나 홍수를 비롯한 각종 재해가 발생하면 사람들을 동원해 진화나 각종 작업에 투입한다.

2.3. 재정 개혁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 8억 루블에 달하는 전비를 소모했다. 1857년 한 해의 재정 적자만 해도 7,500만 루블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력이 유럽보다 좋지 않은 형편인데도 무리를 하면서 전쟁을 했으니 최악의 재정 적자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25]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렸으며 전쟁 기간 동안 루블을 과다하게 남발한 탓에 루블의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오르는 등, 국가 경제까지 혼란해졌다. 그래서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은 금 보유량을 필사적으로 늘려 화폐 가치를 높이고 신용을 되찾는 데에 주력해 러시아의 경제 회생에 기여했다.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금을 채굴해서 1840년대에 세계 1위의 금 생산국이 되었는데, 이 덕을 많이 봤다.

1863년, 타타리노프의 주도하에 제국 정부는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각 부서들이 개별적으로 금고를 두고 자체적으로 수입을 모으고 지출하던 제도를 개혁해서 금고는 재무성에 두고 재무성이 각 부서의 예산을 통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부 기관에 예산 편성을 지시하고 국가의 수입-지출을 매년 공개했으며 현금 출납 제도를 통일했다. 또한 제정 러시아의 고질병인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각국의 감사 제도를 도입하고 감사원에 불시 감사권을 주어 감사원을 강화하고 부정부패를 감시했다. 이러한 재정 개혁으로 정부의 재정 관리는 효율성이 높아지고 공정해졌으며 국가 경제도 안정을 찾았다. 이외에도 제국 정부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관세를 확대하고, 예카테리나 2세 시절부터 있었던 주류 독점권을 폐지했다. 이 때의 주류 독점권은 개인이 정부에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정해진 지역에서 독점적으로 주류를 판매할 권리를 얻는 것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모든 주류에 소비세가 붙는 대신,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주류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재정 개혁과 은행 설립, 적자를 줄이기 위한 관료들의 노력으로 정부의 재정 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은 균형 재정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이 유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은 철도 건설 비용과 귀족에게 주는 토지 보상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국 정부는 이렇게 발생한 막대한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국채를 발행했는데, 정부의 이러한 재정 정책은 해외의 투자를 유도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고 단기적으로 정부의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해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부 부채가 늘어나게 하고 러시아 산업이 창출하는 이익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패가 극심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특히 고위 관료들의 부패가 심해서 관료들과 기업인들이 서로 결탁해서 이권을 주고 받기도 했다.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철도업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부정부패가 발생했는데, 건설 회사 입찰 과정, 부지 선정, 건설비, 자재 문제 등등 온갖 부분에서 부패가 발생했다. 심지어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장성 여럿이 어떤 회사의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챙겼던 부패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제국 정부가 부정부패를 가만히 놔두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정부패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일을 공정하고 사심없이 처리하고 재정 통제를 강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런 그도 황족들을 위해서 재정을 낭비하거나 정부 소유 토지를 '하사'하는 등, 관료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적으로 정부가 진 부채는 계속 늘어나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던 1881년의 정부 부채는 총 60억 루블에 달했고 알렉산드르 2세는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후계자에게 막대한 재정 적자와 경제적 침체, 심각한 부패를 물려주었다. 제국 정부가 이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고 흑자를 보게 된 것은 1890년대가 되어서였는데, 알렉산드르 3세 시기의 니콜라이 분게, 이반 비시네그라드스키(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Вышнеградский), 세르게이 비테 같은 유능한 경제 관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2.4. 사법 개혁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사법 제도는 전근대적이고 불공정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지사와 지방관들이 사법 업무를 맡으니, 행정권과 사법권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이루어지고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사건에 대한 서류만 가지고 진행했다. 게다가 정확한 기한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 재판 과정은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법은 신분에 따라 불평등하게 적용하고 심문은 서면으로 진행하며 증거는 형식적으로 다루었다. 경찰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피의자를 고문하거나 협박했고, 판사는 피고에게 체벌과 거열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26] 피고는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판결에 대한 소원을 제기하는 것도 어려웠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사법 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라다셰프가 서유럽 사법체계의 도입을 주장하고 지주들의 사법권 행사를 비판했으며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서유럽 사법체계를 받아들이고 너무 숫자가 많은 법원들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실패하고 난 뒤, 50년대에는 게르첸, 아가료프, 투르게네프를 위시한 라스노친지[27] 지식인들이 그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강력하게 사법개혁을 요구했다. 여러 잡지에서도[28] 서유럽 국가들의 근대적인 사법제도를 소개하고 러시아 사법 제도의 후진성을 비판했다.

지식인들이 제기했듯이 러시아의 사법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제국 정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크림 전쟁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이 드러난 이상, 사법 개혁을 더 이상 미뤄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1857년부터 개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성을 놓고 관료들이 보수파와 개혁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개혁파 관료들은 서유럽을 모델로 해서 러시아의 사법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 관료들은 러시아적 가치를 지킬 필요가 있으며 일정 부분에 대한 개혁은 동의하지만 서유럽식 사법 체계의 도입은 제국을 위험하게 할 것이라면서 반대했다.[29] 양 세력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합의를 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알렉산드르 2세와 황제의 동생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개혁파의 손을 들어줘서 논의를 마무리하고 서유럽을 모델로 한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주로 프랑스의 사법 제도를 따랐으며, 다른 나라의 제도들도 받아들였다.

1864년 11월, 제국 정부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 아래에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독립시키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기구로 개편했다. 본래 원로원은 러시아어로 세나트(сена́т)라고 부르는 기관이며 국가 원로, 황제의 고문, 고위 관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때부터 원로원은 최고 공소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30] 1872년에는 군과 도시에 치안 판사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치안 판사는 경미한 법률 위반, 500 루블 이하의 민사 재판, 소규모 형사 사건을 다루었다. 그리고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교육 수준과 재산 자격을 요구 받았다. 1877년에는 몇 개 주마다 하나씩 지방 법원을 설립하고 그리고 지방 법원의 상위 기관으로 최고 재판소를 설립해서 최고 재판소가 지방 법원들을 총괄하게 했다. 지방 법원과 최고 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인 판결로 간주했으며, 오직 재판 절차를 위반한 경우에만 공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판관 해임 불가의 원칙'을 세우고 판사의 독립성도 보장했다. 이제부터 판사들은 법원의 조치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해임당하거나 전보당할 수 없었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법관 임용 과정도 개선했다. 일부 법관직을 임명직에서 선출직으로 전환하고 개혁 과정에서 신설한 치안 판사는 군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에서 선출한 다음,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 그리고 고위직인 지방 법원장과 최고 재판소 재판관, 재판소장 임용은 황제의 승인을 받게 만들었다. 일단 승인만 받으면 일시적인 정직도 시킬 수 없었고, 해임도 불가능했다. 판사직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전환하고 판사들이 권력이나 금전에 굴복하는 일을 막기 위해 2,200 ~ 9,000루블에 달하는 상당히 좋은 연봉을 지급했다. 하지만 판사들의 승진은 여전히 고위 관료들이 결정했다.

제국 정부는 재판 과정도 개혁해서 제소와 변론을 도입하고 매질, 채찍질, 낙형 등의 가혹한 체벌을 폐지했다. 재판은 공개 재판의 원칙을 세워서 방청객이 참석한 상태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재판은 판결문의 요약을 보도하는 것도 허가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피고 없이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와 배심원들이 출석한 상태에서 구두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에 대한 소원도 제기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재판에 정확한 기한을 정해서 재판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했다.

법적 절차는 21가지나 되던 것을 일반 절차와 약식 절차로 간소화하고 재판에 배심원 제도를 도입했다. 지방 법원과 최고 재판소의 재판, 중대한 형사 범죄의 재판에는 배심원 재판을 진행하고 치안 판사들만 단독으로 판결을 내리게 했다. 형사재판의 심사는 12명의 배심원이 참석했으며, 치안 판사들만 단독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라도 대체로 공정했다고 한다. 배심원은 25 ~ 70살의 러시아 국민으로 2년 이상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총액이 2,000루블 이상인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야 선발될 수 있었다. 배심원은 추첨으로 정했고 그 명단은 주지사가 추인했다. 그리고 배심원은 의외로 권한이 막강해서 배심원이 내린 판결에 대한 항소는 허락하지 않았다. 권한도 강했지만 깡도 좋았는지, 어떤 배심원은 황제 암살미수범에게까지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보수파의 반대가 심하긴 했지만, 법정에 변호사 제도를 도입해서 피고의 이익을 보호하는 변호사의 입회를 보장했다. 그러자 러시아 사회에서 변호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플레바코, 우루오프, 스파소비치, 아로예니예프와 같은 유명한 변호사들이 등장해 러시아의 변론계가 성장했다.

여러 사회 계층들을 위한 특수 법정도 설립했다. 농민들을 위한 볼로스트 법정이 설립되었고, 볼로스트 법정의 판사는 미르에서 선출했다. 또한 귀족, 장교, 고위 관료들을 위한 특별 재판소를 설립하고 국경 지역에는 국경 지역 재판소를 설립했는데, 국경 지역 재판소의 판사는 법무성의 추천을 받아 황제가 임명했으며 판사는 형사와 민사를 담당했다. 다른 개혁이 좌초되거나 왜곡되는 와중에도 사법 개혁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서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 전역에서 사법 개혁이 완료되었다.

사법 개혁은 법무성 장관 자먀틴과 그를 보좌한 자루드니, 법무성의 진보적인 관료들이 이뤄낸 것으로 대개혁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개혁이었다. 사법 개혁은 악명 높은 러시아의 사법 제도를 확실하게 개선하고 백성이 재판을 신뢰할 정도로 공정성을 확보했으며 러시아가 제대로 된 법치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체벌을 폐지했지만, 농민은 여전히 체벌을 당할 수 있었고 농민을 위한 볼로스트 법정은 제국법이 아닌 관습법에 토대를 두고 재판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가톨릭을 차별해서 일부 법관직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진출을 막아 버렸다. 일부 지방의 치안 판사는 임명직이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배심원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의 자질도 문제였다. 어떤 배심원은 " 이콘 앞에서 제비뽑기를 해서 평결을 내리자"고 주장하기도 했고, 피고가 자백해서 진상이 다 드러난 사건인데도 배심원들이 무죄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정부가 사법 개혁을 무력화하려 한 시도 역시 문제였다. 1878년, 암살미수범 베라 자술리치(Ве́ра Ива́новна Засу́лич)의 재판에서 어떤 배심원은 죄인에 대한 폭력 사용을 근거로 해서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돼서 베라 자술리치에 대한 처벌과 항소가 불가능해지자, 제국 정부는 모든 정치범 관련 사건들을 일반 법정이 아니라 군사 법정으로 넘겨서 정치범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정치범 재판을 일반 법정에서 하면 혁명가들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반영돼서 매우 관대한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도 높았는데, 군사 법정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고 중형을 선고하는 것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의 개혁이 당시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사법 개혁에 실망했고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또한 개혁 자체가 전제군주인 황제의 의지에 따라서 이루어진 '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2.5. 교육 개혁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부터 러시아는 꾸준하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행정 제도와 문화가 발달하여 잡지와 신문, 도서관과 학교가 늘어나고 문자 사용자의 숫자도 증가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르 2세가 통치를 시작했을 무렵의 러시아에서는 8천 개의 학교가 45만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전체 러시아의 인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45만의 숫자는 전체 인구에서 취학 연령을 9%로 잡을 때, 1%도 안 되는 수치였고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기인 1860년대의 문해율은 고작 6% 정도였다. 이 수치는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낮았다. 비슷한 시기의 영국, 프랑스는 문맹율이 30% 안팎이었고 인접국인 오스트리아도 변경 지역의 문맹율이나 러시아와 비슷할까, 중심 지역의 문맹율은 러시아보다 훨씬 낮았다. 1880년 기준으로 변경 지역까지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문맹율은 30%대였다. 이는 기존의 교육 제도로는 러시아가 가진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시작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와 산업화에 필요한 국민 계몽과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1862년, 알렉산드르 2세는 교육 개혁을 위해 푸타틴 제독을 경질하고 자유주의적인 관료였던 골로브닌을 교육성 장관에 임명했다. 골로브닌은 곧바로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고 니콜라이 1세가 폐지했던 대학법을 되살려, 그 동안 대학이 빼앗겼던 권리를 돌려주었다.(대학의 부분적인 자치, 총장이나 학장의 선출권 등) 1864년 6월, 골로브닌은 중학교 입학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신분과 종교의 차이 없이 모든 계급의 자녀들에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는 <인민 초등학교에 관한 법령>을 선포해 공립 초등학교를 세우고 사립학교의 설립도 허가했다.

이 법령으로 인해 러시아 각지에서 국립 학교와 지방 학교, 교회 부속 학교, 일요 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초등학교들이 나타났다. 교회 부속 학교는 정교일치의 당시 러시아 체제에서 정부가 가장 선호한 학교로, 1882년까지 4,500개로 늘어났으나 예산 부족으로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일요 학교는 1859년에 키예프에서 처음 생겼고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서 1862년에는 그 수가 300개를 넘었다. 일요 학교는 학비가 무료였으며, 학생들에게 물리, 화학의 기초를 가르치고 지리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일요 학교의 교과 과정은 국립 학교보다 훨씬 폭넓었다. 초등학교의 교육기간은 대체로 3년을 넘지 않았다.

아울러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사범 학교를 설립해서 교사를 양성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 외에도 지방의 젬스트보가 교육 확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젬스트보는 문맹 퇴치 위원회와 계몽 기관을 만들어 교과서와 책을 출판하고 학교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또한 젬스트보는 보편적인 초등교육 도입의 필요성을 토의하고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젬스트보는 1864년부터 74년까지 10년 동안 1만 개의 젬스트보 산하 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젬스트보 산하의 초등학교는 모든 주와 군의 관청 소재지와 농촌 지역에 가장 많이 보급된 초등 교육 기관이 되었다.

1864년 11월, 제국 정부는 중등 교육 과정을 개설해서 중등 학교(김나지야)를 고전 중학교(8년제)와 실업 학교(6년제)로 나누고 김나지야를 중등 교육 기관의 기본형으로 만들었다. 고전 중학교는 라틴어 그리스어를 중점으로 가르치고 졸업생들에게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주었다. 실업 학교의 교과 과정은 다양한 산업 분야와 무역과 관련된 업무로 구성되어 있었고 실업 학교는 라틴어, 그리스어 과목이 없는 대신 수학, 자연과학, 기술 과목들을 중요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실업학교 졸업생에게는 대학 입학의 기회를 주지 않는 대신, 공업 전문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주었다.

사회적으로 여성 교육에 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전까지는 사설 기숙학교 정도만 있고 귀족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제국 정부는 계급과 종교의 차이 없이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여성 중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여자 중학교들을 설립했으며 1863년에는 여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도 만드는 등, 여성 교육 제도를 개선했다. 제국 정부는 여자 중학교 졸업생들의 대학 입학은 불허했지만, 청강생 자격으로 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여학교 숫자는 계속 늘어나서, 1890년대 초에는 300개의 여성 중학교에서 7만 5천의 여학생들이 교육받았다. 그리고 1869년에는 여성들을 위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키예프와 같은 대도시에 여성 고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1872년부터는 여 의사들도 양성했다. 또한 정부는 성직자의 딸들을 위한 학교들도 설립했다.[31]

대학을 위한 새로운 규정도 제정해서 학생 정원 제한을 없애고 청강생에게도 대학을 개방했다. 1863년의 대학법 제정과 자치권 회복 덕분에 대학은 더 이상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았고, 교수 협의회가 자체적으로 대학을 감독했다. 교수 협의회는 대학 총장과 학장을 선출하고 교육계획을 정하며 재정과 교직원 문제를 처리했다.[32] 그리고 교육 개혁에 영향을 받은 톰스크와 오데사와 같은 도시에서 새로운 대학들이 들어서고 의과의술(전쟁의술)학원, 기술, 광산, 교통, 전기공학 대학, 페트롭스크 농업원과 같은 특수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교육 개혁으로 러시아의 교육은 크게 성장했다. 초등 교육에 대한 성과는 아주 커서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 말기가 되면 유럽 러시아 지역 60개 주에서 22,570개의 초등학교가 114만 1,000명의 학생들을 수용했으며, 전체 초등학교의 68.5%가 젬스트보 개혁 이후에 설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중등 교육도 크게 성장해서 1861년에는 85개의 중학교에서 25,000명의 학생들이 교육 받았지만, 1876년에는 학교와 학생의 수가 3배나 늘어났다. 대학과 중학교에서 귀족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비귀족 계급 출신 학생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면서 교사와 언론인, 문학가, 전문직 종사자들의 숫자도 함께 증가했다. 예전에는 귀족들로만 이루어졌던 지식인 집단은 다양한 계층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소위 라스노친지(잡계급인)이라고 부르는 비귀족 계급 출신 지식인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은 선배들과 함께 정부에 개혁을 촉구하고 혁명 활동에 뛰어드는 등, 러시아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문해율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1880년대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수는 20%였고 1897년에도 문자 해독율은 21.2%으로, 남성 문해율은 29.3%, 여성 문해율은 13.1%였다. 동시기 프랑스와 비교하면, 혁명기(1790년대) 프랑스의 남성 문맹율이 50%, 여성 문맹율은 75%였고, 제3공화정(1875년 ~ 1940년) 초기에는 남성 문맹율이 25%, 여성 문맹률이 30% 정도였다. 러시아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주로 대도시에 몰려 있었고, 농촌 지역에서는 문해율이 평균보다 더 낮았다.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는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않았고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숫자도 전체 인구의 4%에 불과했다.

한편 여자중학교는 수업료를 높게 받으면서도 남자중학교보다 가르치는 지식의 양이 뒤떨어졌다. 제국 정부가 여성 고등 교육 과정을 만든 것도 여성 인권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해외 유학을 가게 되면 서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급진화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리고 정부가 대학생들에게 단체를 조직할 권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학생 소요'를 자주 일으켰다.

2.6. 군제 개혁

크림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제국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나폴레옹을 패퇴시켜 파리로 진격하고, 유럽 각지의 혁명을 분쇄해 '유럽의 경찰'로 군림한 러시아 제국군이 크림 전쟁에서는 유럽 연합군에게 완전히 박살나 버리면서 그 후진성과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제국군이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러시아군이 가지고 있는 이 수많은 문제들은 농노제를 폐지해야 해결할 수 있었고, 1861년에 제국 정부가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주어졌다. 상처받은 국민들의 자존심과 러시아의 대외적 위상을 회복하고 다른 열강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군제 개혁을 단행해야 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군제 개혁을 농노 해방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1864년에 제국 정부는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파 관료인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 백작(Граф Дмитри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은 전국의 군대를 국방부 장관의 직접 통제를 받는 10개의 군관구로 편성했다. 군관구 제도는 지역별로 그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작전을 수행하게 만드는 제도였다. 광대한 러시아의 국토를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개혁이었다. 1864년에 6개 군관구로 편성했다가 1865년에 4개를 추가했다. 또한 사관 양성 제도를 개혁해서 육군 유년학교를 설립하고 사관 교육 과정을 일반 교육 과정과 특별 교육 과정으로 분리했다. 이 때부터 사관 후보생들은 육군 유년학교에서 종합적인 교육 과정을 이수한 다음, 육군 사관학교로 진학해서 전문적인 군사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보수파의 반대를 받았으나 드미트리 밀류틴은 밀어붙였다.

새로 설립한 육군 유년학교는 귀족들만을 위했던 사관학교와 달리 모든 계층에게 입학을 허용했으며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군인들을 위한 교육도 진행했다. 제국 정부는 1867년에 군 법무관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1868년에는 육군 유년 학교의 보충을 위해 육군 중등 예비 학교를 설립했다. 해군도 콘스탄틴 대공의 주도하에 이와 같은 개혁을 실시하고 1877년에 해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사관 양성 제도를 개혁한 것에 이어서 제국 정부는 병역 제도를 개혁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부터 귀족의 병역 의무가 완화되고 부자들이 사람을 사서 병역을 회피했기 때문에 병역 의무는 귀족과 상류층을 제외한 계층에게 큰 부담이었으며 군대는 점점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이 25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부양자나 가장을 군대에 보낸 가정이 생활고로 파괴되는 일이 속출했고, 농노 해방과 사법 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불평등한 징병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1874년 1월 1일, 제국 정부는 국민개병제를 도입하고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의무 복무제를 실시해 20세 이상의 모든 러시아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다. 제국 정부는 매년마다 필요한 군인의 수를 결정한 뒤, 20세가 된 젊은이들을 소집하여 추첨을 통해 필요한 군인의 숫자를 채우고 추첨에서 떨어진 이들은 예비군에 편성시켰는데 현재의 태국과 유사한 형태의 방식이다. 육군 현역 복무 기간은 6년이고 해군 현역 복무 기간은 7년이었으며, 육군은 전역하고 9년 동안, 해군은 전역하고 3년동안 농한기에 훈련받는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래도 실질적으로 군 복무 기간이 25년에서 6년으로 줄어든 셈이었고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계층이 병역 의무를 지게 된 것이라 효과가 좋았다.

군 면제 대상은 장남과[35] 독자, 가족 중 유일한 부양자,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과 신학생[36], 지방 주민 중 일부와 상인들이었으며[37] 면제자들은 전시에만 동원하는 민병대에 등록했다. 그리고 교육 수준이 높으면 복무 기간을 줄여 주었다. 초등학교 졸업자는 4년, 중학교 졸업자는 1년 6개월, 고등 교육, 즉 대학생들은 6개월만 복무하게 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에게 단축 복무 혜택을 주는 것을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물질적인 부분도 개혁했다. 가혹한 복무 조건을 개선해서 군대에서 신체형을 폐지하고 신체형은 징벌 부대에 편입된 군인에게만 가했다. 보급도 개선하고 막사도 개축했으며 병사들을 위한 읽고 쓰기 교육과 초등 교육을 실시해 문맹률을 낮추었다. 그리고 서유럽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구형 머스킷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무기 개발자인 실베스트르 크른카(Sylvester Krnka)가 만든 '크른카' 소총을 채택해 개조했다. 더불어 미국인 무기 개발자인 하이럼 베르단이 개발한 신형 베르단 소총을 도입했으며 주철 대포와 청동포는 강철 대포로 대체했다. 전투 준비 체제를 개정하고 새로운 복무 규정, 교훈, 교범 등을 출판해서 대열 정비 시간을 크게 줄이고 병사들의 자기 업무 파악을 도와주었다.

해군 역시 체질 개선에 나섰다. 해군은 범선을 퇴역시키고 영국과 프랑스의 배들을 모방해 새로 증기선과 철갑선을 건조했으며 거기에 신형 대포를 탑재했다. 이렇게 꾸준히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기술 개발에도 힘써서 1873년에는 세계 최초의 장갑 순양함을 개발하고 어뢰정을 건조했다. 1871년에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파리 강화 조약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런던 의정서를 체결하여 흑해 함대를 재건하고 크림 반도를 다시 요새화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러시아 제국 해군은 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튀르크 해군을 양과 질에서 압도하고 전쟁의 승리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체질 개선으로 도입된 어뢰정들이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많이 활약했다.

군제 개혁의 결과, 러시아군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국민개병제로의 변화와 군인 교육 실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사회 계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군 동원력이 좋아지고, 이전보다 더 적은 군대를 가지고도 충분히 치안 유지와 방비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군 감축을 이루면서 군사 분야에 대한 정부 지출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크림 전쟁 이후에 잃어버렸던 자존심을 다시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군제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효율적인 군대가 되지는 못했으며 서유럽과의 격차도 여전히 존재했다. 개혁을 시작한지 13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군수 물자와 최신형 무기, 유능한 지휘관들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겪었다.[38] 예를 들면 플레브나 전투 당시, 오스만 군은 레버액션 연발총인 윈체스터 M1866 마티니-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러시아군은 단발 볼트액션 소총인 크른카 베르단으로 무장했다. 당연히 화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며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강요받았다.[39] 게다가 제정 러시아가 튀르크를 멸망시키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고 기를 쓰고 튀르크를 지원하다 보니 전투는 이겼으나 원래 목적인 튀르크 멸망은 실패로 돌아간다.[40]

2.7. 개혁의 한계와 반개혁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농노해방령은 농노들의 불만을 샀고 상환금 문제는 농민들을 옥죄었으며 정부가 그토록 편의를 봐주었던 귀족 지주들은 농노 해방 이후로 몰락해 갔다. 지방 의회인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는 귀족과 관료, 대 자본가의 비중이 높아서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사법 개혁을 해서 행정부와 사법부가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특히 혁명가들을 비롯한 정치 사범 문제에 관여하려 했고, 행정부는 편법을 써서 정치 사범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불충분한 개혁에 실망한 대중과 지식인, 혁명가들은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폴란드 입헌왕국에 대한 처우 개선은 1863년의 마지막 무력 봉기를 통한 폴란드인들의 독립 시도로 이어졌지만, 영국 프랑스 등 열강들의 외면과 러시아의 강경한 탄압으로 좌절당했다.[41]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 프리비슬린스키라는 직할령으로 편입되었고, 드미트리 밀류틴의 동생 니콜라이 밀류틴(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Милю́тин)이 초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66년 4월 4일, 인민주의 혁명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Дми́т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Карако́зов)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은 제국 정부를 충격에 빠뜨렸다.[42]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 경악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황제의 정책은 개혁 정책에서 보수 반동적인 정책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수화되자, 골로브닌과 란스코이를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이 사임하고 보수파 관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드미트리 톨스토이 백작(гра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Толсто́й, 레프 톨스토이의 친척)이 교육성 장관이 되고 표도르 트레포프(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Тре́пов) 장군이 헌병대장이 되었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표트르 발루예프 백작(граф Пёт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Валу́ев)이 내무 대신이 되었고 표트르 슈발로프 백작(гра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Шува́лов)이 황제원 3부(비밀경찰)의 수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비록 알렉산드르 2세는 파벌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개혁파의 지도자인 드미트리 밀류틴을 국방부 장관에 유임시켰지만 주도권은 보수파가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보수파들은 반개혁 정책을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취임 이후 김나지야는 수업 시간의 40%를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투자했다. 다른 과목의 비중이 크게 줄이는 이 조치는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비귀족 계급의 상급 학교 진학을 방해하고 졸업 조건을 엄청 까다롭게 만들어서 김나지야를 졸업하는 학생은 전체 학생의 40%에 불과했다. 보수적인 정책 집행과 비귀족 계급 학생에 대한 방해 공작 때문에 톨스토이 백작은 러시아 대중들의 증오를 샀다. 처음부터 농노 해방을 반대한 인물이었던 발루예프는 내무 대신이 되자 농노제 개혁을 왜곡하려고 했다. 더불어 젬스트보를 약화시키고 젬스트보 귀족 의원들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검열도 강화해, 출판에 새로운 규제를 제정하고 반정부지로 유명한 <현대인>과 <러시아의 말>을 폐간시켰다.[43]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서 국정을 보도하는 것과 노동자 파업, 농민 봉기를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슈발로프는 테러에 충격을 받은 황제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표트르 4세'라는 별명을 얻었다.[44]

이처럼 러시아 제국 정부가 보수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통제를 강화했으나, 인민주의 계열 혁명가들의 테러와 혁명 운동은 사그라들지 않고 더 크게 타올랐고, 러시아 제국은 이 시기부터 오래도록 혁명가들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872년,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이 러시아로 수입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모든 서적을 검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다른 수많은 책처럼 검열관의 손을 거쳤다. 책을 검토한 검열관들은 러시아에서 이렇게나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테고, 책을 읽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도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출판을 허가했다. 독일에서 수입된 그 책의 이름은 Das Kapital, 자본론. 그리고 저자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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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당시 유명한 비평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2] 그리고 이후 수십년 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며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 말을 빌려 말하면 자발적으로 내놓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권을 조금이라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은 결과 결국 아래에서는 강제로 빼앗는 것 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공산당이 집권하자 말 그대로 다 뺏긴다. [3] 가내 농노는 농노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농노였다. [4] 소작료는 최소 19%, 최대 81%였다. [5] 이 때문에 귀금속인 은으로 만들어 가치가 보장되는 '은화 루블'이 러시아의 화폐로 기능했다. [6] 실제로 러시아 혁명의 혁명가들 상당수가 몰락 귀족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였으므로 이는 어찌보면 정확히 들어맞은 셈이었다. [7] 당시 러시아에서는 감자 재배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모르는 작물을 함부로 재배했다가 쪽박차면 그 손해는 농민이 뒤집어써야 했다. [8] 귀족 지주들은 점점 수익이 떨어지는데도 착취를 멈추지 않았고, 땅을 저당잡거나 농노들을 더 착취하는 '제 살 깎아 먹기'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미 1844년에 지주들은 자기 재산의 54%를 정부에 빚지고 있었다. [9] 몇몇 슬라브주의자들이 전제정을 지지하고 슬라브주의자들이 서유럽주의자들과 대립했기 때문에 슬라브주의가 농노제를 옹호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의 슬라브주의자들은 차르 전제정을 비판하고 차르의 권력 약화, 개인의 자유 확대, 농노제 폐지를 주장했다. 포고딘 역시 보수주의자면서 슬라브주의자였다. [10] 구베르니야는 러시아의 행정 단위이며 하위 행정 단위로 우에즈드가 있다. 구베르니야는 주나 군, 우에즈드는 군이나 현으로 번역하는 편이다. 본 문서에서 구베르니야는 주, 우에즈드는 군으로 번역했다. [11] 볼로스트들은 읍, 또는 면으로 번역되는데, 본 문서에서는 면으로 번역했다. [12] 지주들의 편에 서지 않고 진정으로 농민을 위해서 활동한 유일한 조정관이 바로 레프 톨스토이였다. [13] 농민의 원성을 산 토지 상환금은 결국 1905년 혁명 이후 폐지되었다. [14] 1870 ~ 80년대 러시아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이 150 루블이며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농민들보다 수익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30 루블은 확실히 큰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15] 농민들의 다산은 19세기 중후반에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860 ~ 1897년까지 농민 인구는 5,000만명에서 7,900만명까지 급증하고 러시아 전체 인구는 1897년까지 1억 2,600만명으로 늘어났다. [16] 중부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마름을 농노 중에서 선출하거나 농민공동체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17] 반대로 귀족의 저택에서 같이 거주하거나 바로 옆에 사는 농노들의 경우 지주들이 직접적인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냥 정부 당국에 고발해버린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18] 해당 시기에 가면 귀족농노의 이동사례가 급증하는데, 이는 귀족들이 자기 농노들에게 도시 가서 사업이나 노동하라고 투자해준 결과였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자면 농노제가 자본주의와 공업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것. [19] 애초에 지주라는 것이 전반적으로 그런 면이 있어서 기업가의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든 노력하지 않으면 경쟁자에게 밀려서 패배하므로 악덕 기업가라고 해도 자기 기업이 독점기업이 아닌 이상에야 자기 물건이 어떻게 더 팔리게 해야 할 지 고심해야 하지만 지주의 경우에는 생필품을 파는 만큼 수요는 충분히 있고 적어도 땅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이 있기에 굳이 기업가들처럼 치열하게 경쟁할 필요도 없다. 이렇다 보니 지주들은 필연적으로 개혁에 부정적이고 때문에 산업화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지주는 청산 대상이 되며 그래서 토지개혁에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산업화에 성공하여 선진국 대열에 끼느냐 실패하여 지주 권력이 막강한 나라로 남느냐로 갈리며 후자의 경우 형식상 민주주의 국가가 되더라도 실제로는 몇몇 유력 지주 가문들에 의해 휘둘리는 과두정 국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20] 안톤 체호프의 명작 희곡 < 벚꽃 동산>은 이 시점의 지주 귀족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당시 귀족들의 현실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러시아식•단위] 평으로 계산하면 2,000평 이상. 1 데샤티나는 10,926 평방미터. [22] 1871년에 설립한 돈 지역 의사 협회를 비롯한 지역 의사 협회, 여러 의료 협회들이 젬스트보 의료 제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23]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온정적이고 진보적인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젬스트보에 참여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후진적인 농촌 지역에 문명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톨스토이와 체호프 본인들 또한 젬스트보에 참여해서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지주가 거의 없었던 러시아 북부의 젬스트보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는 평가가 있기 때문에, 젬스트보 운영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활동한 귀족 지주들 또한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24] 폴란드 핀란드 지역은 원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고 의회가 있었기 때문에 젬스트보를 설립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만 두마의 설립이 상당히 늦었다. [25] 비교하자면 조국 전쟁의 재정적 손실은 6억 루블이고 당시 1년 예산은 4천만 루블이었다. [26] 데카브리스트의 난 주모자 중 몇 명이 거열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사건의 피해자였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어느 정도 처벌 수위를 완화해서 사지가 찢기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27] 잡계급인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비귀족 계급 지식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 [28] 1856년의 러시아에는 226개의 잡지가 있었으며 많은 수의 잡지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었다. [29] 예를 들어,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변호사들이 혁명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변호사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 당통·쿠통·베르니오·브리소 같은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은 전부 변호사였다. [30] 교회 법정과 군사 법정은 독립적인 사법기관으로 남았다. [31] 정교회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사제의 결혼이 가능하다. 물론 주교부터는 짤없이 독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의 자녀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약간 경원시 되는 존재들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최측근이며 러시아의 법전을 새로 쓴 스페란스키조차 관료 사회와 사교계에서 '신부의 아들놈'이란 멸칭을 들어야 했다. [32] 다만 교수 협의회는 교육성 관료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33] 다만 질적 수준과는 별개로 러시아 병사들은 예전부터 온갖 악조건 하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것으로 유명했다. 18세기 전술의 천재로 인정받는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대왕도 악으로 버텨내는 러시아군을 결국 뚫지 못하고 여러 차례 패배했고, 러시아군은 이번 크림 전쟁 뿐만 아니라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어지간한 다른나라 군대는 금방 와해될만한 상황에서도 오랜기간 전선을 유지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사용할 총탄이 무려 2,800만 개나 모자랐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아직 완공되지 않아서 보급 상황이 나빴는데도 일본군을 상대로 잘 버텼다. 오히려 일본군이 러시아군과 봉천 회전을 벌인 직후에 "포탄 등의 군수 물자가 모자라서 더는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우니,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빨리 끝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긴급 회신을 보낼 정도였다. [34] M1 개런드 소총의 유효사거리가 450m 정도인데 이 시대의 소총이 800m나 되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데, 크림 전쟁에서 영국군의 주력 화기였던 엔필드 1853 소총의 구경은 14.5mm나 되었고 총열 길이도 99cm로 현대의 돌격 소총보다 거의 2배 길었다. 그러니 흑색화약을 쓰던 시대였음에도 사거리 800m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조준 장치의 한계 때문에 당시 영국군 내에서 일반 보병의 교전 거리를 400m 이내로 보았고, 800m 거리에서 (20발 중에 몇발 수준이라도) 적을 명중시킬 수 있는 병사는 지정사수로 뽑힐 정도로 그 수가 드물었다. [35] 장남이 복무 중이거나 예비역이면 차남은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36] 이들은 예비역으로 편성했다. [37] 상인은 그냥 상행위를 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 만든 '상인 길드'에 소속된 '상인'을 말한다. [38] 크림 전쟁 당시 나히모프, 코르닐로프, 이스토민 등의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한 것은 러시아군 입장에서 매우 뼈아픈 일이었다. [39] 윈체스터와 마티니의 화력에 경악한 군 수뇌부들이 새로운 소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발한 소총이 바로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다. [40] 주 전선은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지역이었지만 러시아의 최종 목표는 튀르크의 심장인 코스탄티니예였으며 러시아군은 에디르네까지 함락시켜서 코스탄티니예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개입이 없었다면 코스탄티니예로의 진격도 가능했다. [41] 조선 말기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개혁을 시도했다가 좌절했던 것처럼, 폴란드인들도 영국과 프랑스의 힘에 기대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 이후 폴란드인들의 독립에 대한 방침은 현실을 인정하고 낭만주의적인 무장 독립 운동 대신 계몽운동과 문학, 사회운동을 주류로 한 현실적이고 냉정한 대응이 주류를 이뤘다. [42] 여담으로 이 암살범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막내인 알렉세이 카라마조프가 이 암살범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2부의 초안 내용은 알렉세이가 혁명 세력에 가담하여 황제를 암살하고 처형당하는 줄거리였다고 한다. [43] 반대로 보수주의적 색채를 띤 언론은 이러한 탄압을 받지 않았다. 원래 자유주의자였다가 폴란드 반란 이후로 보수주의자가 된 카트코프가 편집하는 <모스크바 신문>은 대내외 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44] 그러나 슈발로프는 베를린 회의에 외교관으로 참석했다가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 실패해서 러시아 대중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이 문제 때문에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