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김진(농구인)
1. 개요2.
국군체육부대 상무 농구단 코치3.
대구 동양 오리온스 코치-감독 대행4.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감독5.
서울 SK 나이츠 감독6.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7.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8. 감독 퇴임 이후9. 통산 감독 성적10. 100승 단위 달성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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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구인 김진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2. 국군체육부대 상무 농구단 코치
1995년 은퇴 이후 당초 미국 유학을 검토했으나 당시 군무원인 국군체육부대 상무 농구단의 코치 제안을 받으면서 지도자 생활을 일찍 시작했다.은사인 김홍배 부장의 제안과 함께 현대전자의 명 가드였던 박광호 감독을 보좌하게 된다.
당시 90년대 농구대잔치 스타가 즐비했단 상무농구단에서 삼성전자 후배들인 문경은과 김승기 마지막으로 라이벌인 현대전자의 이상민과 조성원을 지도했다.
이후 1996년 박광호 감독이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자 같이 자리를 옮겨서 동양의 창단 코치를 맡게 된다.
3. 대구 동양 오리온스 코치-감독 대행
1997 시즌 한국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박광호 초대 감독을 보좌하면서 창단 멤버들인 전희철과 김병철을 중심으로 포인트 가드가 약했지만 단신 외국인들의 활약까지 이루어지면서 1997-1998 시즌까지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박광호 감독은 팀의 미래를 위해 창단 멤버들인 전희철과 김병철의 입대를 결정하게 된다. 전희철의 공익과 김병철의 상무 입대로 인해 전력이 급약화되었다. 추가로 외국인이었던 센터 그렉 콜버드마저 가족사를 이유로 무단 도주를 하는 초대형 악재 속에 역대급 흑역사와 굴욕을 당하게 된다. 당시 멤버 중 기아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한 식스맨 포워드인 이훈재와 2라운드 가드인 정락영의 고군분투가 보일 정도로 안타까움을 보여주었다. 추가로 입단 동기였던 1라운드 포워드인 박재일은 박광호 감독은 전희철과 함께 공익으로 보냈다.
결국 약해진 팀 전력과 함께 프로농구 역대급 최다연패인 32연패(...)로 막장을 찍던 시절 코치 신분으로 방송 취재라는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박광호 초대 감독이 전희철의 복귀와 조우현의 입단에도 1999-2000 시즌마저 성적 부진으로 인해 자진 사퇴를 하는 아픔 속에서도 코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켰다.
후임 감독은 나래 블루버드 시절 정인교와 주희정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던 최명룡 감독이었지만 창단 시절부터 이어졌던 포인트 가드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플레이오프에 또 탈락했다. 그러다가 2000-01 시즌에는 1999-2000 시즌 활약했던 조우현을 LG 세이커스로 트레이드하는 대신 상무에서 제대한 김병철의 가세에도 연패가 계속되면서 결국 최명룡 감독이 자진 사퇴를 하게 되었으며 감독 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치렀다. 한때 2000-01 시즌 정규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고개를 숙인 모습에 팬들은 마음 아파했다. 심지어 대구 홈 최종전에서도 패하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인 10승을 거두지도 못했다. 총 성적은 9승 36패.
이 과정에서 고려대 출신의 정태호 단장이 시즌 중 부임하면서 2000-01 시즌 감독 대행 중 이미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2000-2001 시즌 중 큰 합의를 본 이후 2000-2001 시즌 이후 동양의 창단 멤버였던 김진 코치의 감독 승진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당초 동양 오리온스는 LG 세이커스 초대 사령탑이자 모교 1년 선배인 이충희 감독이 창단 첫 시즌에 정규 리그 2위로 선전하면서 후보군에 있었는데 정태호 단장은 동양 창단 멤버인 김진 코치를 신뢰하게 된다. 그 결과는 박광호 초대 감독의 희생과 함께하게 된다.
4.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감독
바로 다음 시즌인 2001-2002 시즌부터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정식 감독으로 3대 감독 선임과 함께 내부 승격했다. 이 시즌부터 KBL 프로농구의 정규 리그 경기 수는 45경기에서 54경기로 바뀌었다. 이유는 수원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연고 이전한 서울 삼성 썬더스와 청주시에서 서울특별시로 연고 이전한 서울 SK 나이츠로 인해 KBL 잠실실내체육관 중립 경기가 사라지면서 나온 변화 때문이다. 김진 감독은 동양과 2년 계약을 했다.그 변화 속에 2001-2002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이 당시 평가는 중위권이었고 절대로 우승 후보가 아니었다.
1997-1998, 1998-1999 KBL 2년 연속 통합 우승의 현대 다이넷-걸리버스의 후신의 최고 명가인 전주 KCC 이지스와 99-00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이었던 서울 SK 나이츠, 그리고 00-01 KBL 통합 우승의 명가 서울 삼성 썬더스가 우승 후보였다.
이외 플레이오프권은 역시 고려대 농구부의 대선배인 초대 이충희 감독과 양희승 선수와 박규현 선수, 그리고 박재헌 선수가 상징이었으나 중앙대학교와 국민은행 여자 감독 출신의 김태환 감독에 양희승과 트레이드된 조성원과 박훈근과 트레이드된 조우현의 창원 LG 세이커스도 지난 해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하면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포지션과 높이만 보면 다소 부족했다.
SBS 스타즈와 SK 나이츠의 SK가 형제 더비가 된 SK 빅스 그리고 김주성을 준비하는 허재와 김승기 및
동양 오리온스의 경우 전희철과 김병철의 동반 전역 가세로 인해 창단 초기처럼 기본이 6강이었고 최대 4강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고질병과 같은 포인트 가드 부재. 동양 오리온스의 전통적인 팀컬러인 가드 중심에서 나오는 공격력인데 정작 약점은 힘에서 부족한 골밑이었다.
그러나 김진 감독이 승진하면서 내부에서 본 약점이 어딘지 잘 알고 있었으며 두 역대급 토종 선수와 외국인 선수로 인해 180도 다른 팀이 되었다. 결국 처음부터 우승 후보는 없던 듯하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한 동국대 출신 포인트 가드인 김승현을 시작으로 새롭게 뽑은 외국인 선수 마르커스 힉스와 라이언 페리맨의 맹활약,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창단 멤버인 전희철과 김병철 및 박재일의 가세로 팀을 기존전력에서 베스트 멤버들을 보강하면서 완전히 다른 팀이 된다.[1]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에 이어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까지 현재 유일한 KBL 통합 우승을 이끌면서 일명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40대 중 40세의 나이로 당시 감독 대행을 거쳐 사실상 차기 감독을 예약한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전창진 감독을 제외하면 감독직 세대교체 기수론의 중심으로 등극하게 된다. 32연패 시절 코치로서 선수단에게 자존심을 지켜야 함을 강조했는데 인고의 시간 끝에 3년 만에 동양의 신화 창조로 한국프로농구를 빛내게 된다.[2]
그리고 프로농구 우승 팀 자격으로 발탁된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안방에서 개최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대표팀 감독으로 대한민국을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 만의 아시안 게임에서 극적인 금메달과 함께 한국 농구의 신화 창조와 함께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2001-2002 시즌 창단 멤버이자 통합 우승의 주역이었던 전희철은 외국인과의 매치업으로 인해 파워 포워드와 스몰 포워드 사이의 포지션 문제와 샐러리 캡 문제로 인해 트레이드를 했고[3] 높이 문제로 인해 리바운드 머신이었던 라이언 페리맨의 재계약 포기 및 창원 LG 세이커스로 떠나게 되었다.
비록 전력이 약해졌지만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정규 리그 최종전 끝에 당시 2002-2003 시즌 대구 홈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2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최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2002-2003 TG 엑서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5차전에서 통한의 계시계 오작동으로 패배를 당하면서[4] TG(현 DB 프로미)에게 2승 4패로 패배하며 우승을 놓쳤다. 당시 동양 정태호 단장과 김진 감독은 농빠들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하게 되는 가슴 아픈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그의 리즈 시절(...).
2003-2004 시즌에는 마르커스 힉스가 부상으로 팀을 떠나게 되는 초대형 악재를 맞이하게 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외곽슛을 쏘는 백인 빅맨으로 에릭 이버츠 이후 성공평이었던 바비 레이저와 마르커스 힉스의 대처 외국인으로 포스트에서 밀렸던 아이작 스펜서를 대신해서 김동광 감독의 삼성 썬더스 시절에 00-01 KBL 통합 우승을 이끌었던 아티머스 맥클래리를 시즌 중 트레이드 영입하면서 원주 TG 삼보 엑서스와 전주 KCC 이지스라는 두 우승 후보를 넘기 위해 승부수를 띄우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가슴 아팠던 장면이 또 나왔다. 원주 TG 삼보 엑서스와 전주 KCC 이지스가 아닌 6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 세이커스에 2년 전 4강 플레이오프와는 반대의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03-04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의 오심. 그와 함께 분노에 이어 통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5]
그런 시련 속에서도 KBL 원년 구단이었던 대구 동양 오리온스를 창단 시절부터 코치로서 2년의 전성기와 함께 3대 감독으로 승진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런앤건이라는 공격 농구라는 팀 컬러를 통해 기존의 전희철과 김병철이 있었지만 김승현과 20년 만에 한국 농구에 있어서 신화와 같았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금메달 감독을 통해 2001-2002 시즌부터 2006-2007 시즌까지 대구 동양 오리온스 겸 대구 오리온스를 KBL 인기 구단으로 만들어냈다.[6]
2001-2002 KBL 통합 우승과 2002-2003 KBL 정규 리그 우승과 함께 김진 감독은 3년 재계약을 했다. 역대 동양-오리온 감독 중 첫 3년 재계약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며 40대 초보 감독의 성공으로 세대교체 기수론의 중심으로 첫 재계약과 함께 KBL에서 롱런한 감독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오리온스 감독 재임 시절에는 팀을 6년 연속 부임 내내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괜찮은 감독이라는 평판을 이어갔다. 김승현을 드래프트를 통해 얻은 성과와 2004-2005 시즌 네이트 존슨으로 6강에 올랐고 2005-2006 시즌 아이라 클라크와 트레이드로 리 벤슨을 영입하면서 4강에 오르면서 플레이오프에는 간간히 진출을 하게 된다.
2006-2007 시즌에는 역대급 외국인 선수로 평균 득점 30점대의 득점왕이었던 피트 마이클과 함께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및 4강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다.
물론 마르커스 힉스와 피트 마이클의 등장에 덕을 본 결과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맡는 팀을 PO에 계속 올려 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종종 오심의 피해를 보기도 했고 김승현이 부상으로 골골대는 와중에도 전력을 잘 추스린 편이다. 물론 김승현의 부상과 주장 김병철의 무리한 출전 속에 혹사라는 비판도 적지는 않지만 오리온스 자체가 로스터가 두텁지 못한 팀으로서 그래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던 것은 김진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김진 감독이 물러난 뒤, 자신의 대학 모교 선후배 사이의 이충희와 김상식에 고등학교 선배였던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과 함께 LG 초대 감독이었던 후임인 이충희 감독은 2007-2008 시즌 김진 감독보다 주전만 더 쓰는 등 더 심한 고집으로 시즌도 다 못 채우고 시즌 도중 26경기에서 4승 22패로 불명예의 자진 사퇴를 했고 당시 수석 코치에서 감독 대행을 거쳐 2008-2009 시즌 감독으로 승진했던 안양 SBS 스타즈-안양 KT&G 카이츠의 선수-수석 코치 출신이었던 김상식 감독 또한 외국인 부상 악재로 인해 1년을 못 버틴 채 자진 사퇴를 했다.[8]
이후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대구 오리온스의 역사는 추일승 감독이 부임하고 3개월 후 대구광역시에서 경기도 고양시로의 충격적인 연고지 이전과 함께 대구 시민들에게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다.[9]
5. 서울 SK 나이츠 감독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의 영광을 뒤로하고 11년간 정들었던 팀을 떠난 그를 서울 SK 나이츠가 전격적으로 모셔 왔다. 3년 계약에 연봉 3억 3천으로 당시 최고 대우였다. 2007-08 시즌부터 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당시 참모로 이상윤 감독과 김태환 감독을 보좌했던 강양택 수석 코치를 자신의 삼성전자 시절의 인연이 있었는지 추가로 김태술 선수를 지명한 행운인지 우선 수석 코치직을 유지하면서 팀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동양 오리온스 시절 수석 코치였던 김지홍 코치는 SK 나이츠에서는 보조 코치를 맡게 된다.[10]
하지만, 자유계약에서 드래프트로 바뀐 외국인 제도의 변화로 인해 역량을 드러낼지는 반신반의였다.
래리 스미스와 트래비스 개리슨을 선발했지만 KBL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각각 자시 클라인허드와 브랜든 로빈슨으로 바뀌는 악재를 겪었고 부상이 매번 고질병이었던 SK는 김진 체제로도 매번 부상을 당하는 악재만 반복했다.
그러나 시련을 삼아서 막내인 방성윤과 김태술의 맹활약 덕분에 간간히 승리를 따내면서 마침내 봄 농구에 진출했다. 최인선 감독 이후 봄 농구에 오르지 못했던 서울 SK 나이츠를 6년 만에 플레이오프 6강에 올리면서 역시 명장의 클래스는 다름을 증명했다.
그 이전 형제인 SK스포츠의 SK 와이번스는 왕조를 세우게 된다. 김진 감독이 재임할 때 SK 나이츠는 07-08 시즌 6년 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SK 와이번스는 2년 연속 KBO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실제로 6강 PO에 팀을 올려 놓았지만 애당초 07-08 시즌 스폰서가 SK 텔레콤이라서 심판이 도와줬다[11]는 풍문부터 김태술 덕이라는 이야기까지 전술적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2007-08 시즌 SK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면서 암흑기를 청산한 듯 했지만 그 다음 시즌 8위 추락, 그리고 또 다음 시즌 13연패의 수렁에 빠트리며 SK를 DTD의 팀으로 입증시킨 감독.[12]
위기는 소리없이 찾아오게 된다. 2008-2009 시즌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의 스코어러였던 테런스 섀년을 영입했지만 계속되는 토종 선수(방성윤, 김태술)의 부상에 이어 조직력에 문제점을 드러내며 KBL 감독 경력상 처음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면서 지도력에 위기를 받게 된다. 추가로 디엔젤로 콜린스는 대마초 사태로 팀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로 변화를 물색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그 이전 강양택 수석 코치마저 성적 부진으로 사퇴이후 허재의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이동하게 되었고 구단에서 차기 지도자로 준비중인 전희철 코치가 선임되면서 오리온스 시절 호흡했던 기존의 김지홍 코치가 1년 수석 코치직을 맡기도 했다.
결국 김태술을 안양 KGC인삼공사로 트레이드 하는 대신 야심차게 영입했던 포인트 가드로 자신이 유독 아꼈던 대학 제자였던 투맨 게임을 잘하는 주희정 트레이드 카드가 실패하게 된다. 추가로 외국인 또한 LA 레이커스 출신의 포워드였던 사마키 워커 카드도 체력 부족으로 인해 매번 힘들어했다.
시즌 초반 13경기에서 1승을 거두는 최악의 부진이 이어지자 결국 2009년 12말 연말 팀 성적 부진에 책임지고 충격적인 자진 사퇴의 아픔을 겪었다. KBL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결국 모래알 조직력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모두에게 안타까움을 전했다.[13]
6.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6.1. 2011-12 시즌
한동안 명목상 서울 SK 나이츠의 기술 고문으로 있다가 미국 NBA 최고 인기팀이자 명가인 코비 브라이언트의 LA 레이커스 연수를 SK 나이츠 시절에 함께했던 강양택 수석 코치와 함께 다녀오면서 견문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 한국 농구에 있어서 NBA 전국구 팀인 LA 레이커스 연수는 김상식이 유일할 정도로 쉽지는 않다.2011년 5월 계약이 만료된 자신의 실업 삼성전자 시절 친하면서도 닮은꼴(?)의 후배인 강을준 감독의 후임으로 창원 LG 세이커스의 6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서울 SK 나이츠 5대 감독 이후 1년 5개월만에 KBL 감독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전임 강을준 감독이 허병진 단장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었는데 반영이 된 격이다.[14] 코칭스태프도 과거 삼성전자-동양 오리온스-SK 나이츠 시절에 대학을 제외한 인연이 있는 코치진을 구성했다. 삼성전자와 SK 나이츠 시절에 인연이 깊었던 강양택 수석 코치와 대구 오리온스 시절부터 김지홍 수석 코치와 함께 인연이 있는 정재훈 코치를 선임했다. 전력도 전임 강을준 감독과는 다르게 베스트 5 슈터 색깔이 있는 라인업으로 개편했다.
강을준 감독 시절에 자리를 잡지 못했던 김현중에게 주장직을 주면서 부활을 배려했고 문태영 또한 스코어러로서의 아이솔레이션을 배려했으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는 강대협과 이현민을 내주는 대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함께했던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6강은 기본이고 4강을 목표로 2011-2012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실제로 LG는 2011-2012 시즌 창원 홈경기 개막전이었던 모비스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임 강을준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던 조직력은 여전히 모래알이었다.
LG의 입장에서는 에이스 문태영이 뛰는 마지막 시즌인 만큼 2011-12 시즌 올인을 목적으로 영입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그러나 야심차게 영입한 서장훈 카드가 실패로 돌아갔고 외국인 선수도 시즌 초반에 두 번이나 바꾸면서 처음 표방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실패했고 당시 외국인이 1명 보유에 1명 출전이라는 제도에도 발목이 잡혔다.
리바운드 머신이었던 올루미데 오예데지의 빈약한 공격력으로 인해 외국인 또한 올어라운드 스코어러인 애런 헤인즈를 영입하는 등 꼬이기도 했다. 여기에 구단이 김승현 트레이드 파문으로 인해 김현중은 마음의 상처를 안으면서 한 시즌을 겨우 마칠 정도로 부침이 심했다.
성적도 전년보다 되려 더 떨어진 21승 33패 7위로 LG는 6년 만에 6강 PO 진출에 실패하게 되면서 첫해부터 지도력에 위기를 받게 된다. 시즌 중에도 김승현 트레이드 실패로 인해 허병진 단장이 문책성으로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김완태 단장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젊은 선수 위주의 재건을 선택하게 된다.
6.2. 2012-13 시즌
결국 김진 감독은 첫해의 실패와 함께 재건속의 비상을 선택하게 된다.2012-13 시즌은 에이스 문태영이 리그 규정에 따라 이적하게 되어 최악의 시즌을 맞을 것으로 우려되었다.
대구 오리온스 감독 시절 정들었던 제자들인 김현중과 오용준을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있는 부산 kt 소닉붐으로 보내는 대신 오리온스 감독 재임 시절부터 눈여겨 보았던 포워드인 김영환과 KTF-KT의 찰거머리 가드 수비수였던 양우섭을 받는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체질개선과 재건을 시작했다.
서장훈 또한 주장 김현중과 함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무상으로 부산 kt 소닉붐으로 보내게 된다.
팀도 당시 백인선을 제외하면 20대의 젊은 팀으로 바뀌었으며 주장도 김현중의 후임으로 김영환을 선임하며 팀컬러를 입히기 시작한다.
12-13 시즌 중반까지는 이 트레이드를 통해 의외로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골밑 장악력이 검증된 로드 벤슨과 젊은 가드- 포워드진을 앞세워 양궁농구 컨셉으로 바꾼 것이 잘 먹혔다는 평.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어이없는 작전 구사를 보여주며 도대체 경기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있는 건지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신인 픽 먹으려고 6강 포기하고 그냥 대충대충 하는 게 아니냐고 LG 구단과 김진 감독에게 엄청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15]
로드 벤슨을 트레이드 한 대신 모비스의 3년 이해 향후 1라운드 지명권과 양도한 것이다.
결국 같이 다음해를 위해 쉬어간 동부, kt와 함께 20승 34패 동률 속에 정규 리그 8위로 진정한 비상을 위한 쉬어감이 되고 말았다.
6.3. 2013-14 시즌
로드 벤슨을 트레이드한 대신 모비스의 3년 이해 향후 1라운드 지명권과 양도를 했는데 그 중 하나로 트레이드를 통해 김시래를 영입했다.추가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서 강을준 시절 2009-10 시즌 득점왕이었던 문태영의 형으로 알려진 국가대표 슈터인 문태종을 LG 창단 이후 역대 최고 FA 총액인 6억 8천에 영입을 하면서 대권도전을 노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2순위로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포워드인
추가로 2012-13 시즌 비슷한 양상의 플레이를 보여준 LG와 kt는 2013년 9월 신인 드래프트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되는데...
LG는 전체 1순위로 김종규를 잡았지만 kt는 삼성의 1.5%에 밀려서 5순위. 하지만 2013년 11월 6일 현재 kt, LG 둘 다 7승 4패~~
그러나, 김진 감독은 임기 만료 때 조급하지 않았다.
2년 전 실패를 통해 임기 만료인 2년 뒤를 준비하고 있었다.
11-12 시즌 서장훈- 문태영- 김현중 트리오와 올루미데 오예데지 및 애런 헤인즈로 이어지는 실패를 거울삼아서 12-13 시즌부터 세대교체와 체질개선을 준비하면서 13-14 시즌을 기다렸다.
외국인 드래프트에서도 전체 2순위로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테크니션인 데이본 제퍼슨을 선발했고 이후 센터인 크리스 매시를 선발했다.[16]
토종 선수단 또한 고려대 출신의 파워 포워드로 한 때 상무 시절 스몰 포워드로 대표팀에 승선했던 김진 감독이 오리온스 시절부터 유심히 보았던 주장 김영환을 중심으로 하프코리안 출신 최고의 슈터이자 FA 대박계약의 주인공이었던 문태종과 모비스에서 로드 벤슨을 보내면서 반대급부로 트레이드로 영입한 명지대의 어시스트 몬스터였던 김시래와 경희대 10 학번이자 국가대표 센터인 김종규까지 더해지면 우승 후보가 되었다.
구슬이 서말이야 보배인데 김진 감독은 맞춤형 전술 & 전략으로 경기를 거듭하면 거듭날 수록 비상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13-14 시즌 김종규를 지명하기 전 개막전이었던 문태종의 친정팀이기도 한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와의 개막전에서 공교롭게도 문태종 선수의 천금같은 결승 3점포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승리는 김진 감독의 KBL 통산 300승 경기였다.
김영환- 문태종- 김시래- 김종규에 이어 러시아 리그 득점왕 출신의 데이본 제퍼슨과 골밑의 제왕인 크리스 매시와 함께 NBA LA 레이커스 연수 때 써먹었던 마침내 KBL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포함해서 맞춤형 전술과 전략을 찾아내면서 통해 속공과 3점포로 경기를 지배하게 된다.
시즌 초반에도 조직력에서 물음표가 붙었지만 기우였고 경기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젊은 신바람과 함께 승부처에서 문태종의 결승 3점포까지 나오면서 신바람 비상을 이어가게 된다. 이와 함께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창원체육관은 12월 초부터 관중들이 몰리면서 입석이 판매되는 등 흥행몰이를 주도했다. 초대 이충희 감독과 2대 김태환 감독 그리고 4대 신선우 감독 시절 호성적 때의 팬들이 몰린 격이다.
12월 초부터 LG 세이커스의 창원 홈경기에서는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리기 시작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게임에서 전창진 감독과 조성민 선수가 있는 부산 kt 소닉붐을 상대로 성탄절에서 승리를 하면서 좋은 기운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 때 kt는 오리온과의 4대4 트레이드로 인해 장재석 대신 전태풍을 영입하면서 운이 따랐는데 4쿼터 막판에 신승을 하게 된다. 이날 창원체육관은 7000여 명의 팬들이 현장을 찾으면서 모처럼 LG의 신바람 비상에 환호했다.
하지만 젊은 팀의 특성상 기복이 있었다. 사실 5라운드 중반까지는 3위였는데 무섭게 비상했다. 5라운드 막판부터 연승을 달리기 시작했고 최대 고비였던 서울 SK 나이츠와 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넘어 창단 최고의 연승행진을 달리더니 12연승까지 거두게 된다.
2014년 3월 7일 울산동천체육관에서 열린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의 경기에서 전력의 열세를 딛고 예상외의 10점 차 이상으로 승리하게 된다. 이로 인해 3승 3패 동률에 공방율까지 근소하게 앞서면서 첫 신화 창조의 서막을 열게 된다.
마침내 2014년 3월 9일 창원실내체육관, 크리스마스에 격돌했던 부산 kt 소닉붐과의 홈 최종전 경기에서 무난하게 승리했다.
이로 인해 울산 모비스 피버스를 2위로 밀어내고 정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날 울산도 홈 최종전이었지만 마치 초상집 분위기였다. 중계도 프로농구 인기가 떨어진 시점에서 울산은 단편 보도였지만 창원은 중계진이 찾았다.
이와 함께 감독 생활에서 2002-03 시즌 이후 무려 11년 만에 정규 리그 1위를 탈환했다. 한 시즌 최다 창단 첫 13연승 그리고 17년 만의 KBL 무관 탈출. 창원 LG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
[17]
이후 김진 감독은 LG 세이커스의 17년 만의 창단 첫 KBL 정규 리그 우승의 공을 인정 받으면서 구단으로부터 김태환 감독 이후 LG 세이커스 역대 감독으로 두 번째 재계약을 확정 지었고 역대 LG 감독 중 유일하게 KBL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명장으로서 잃었던 자존심을 되찾았다.
KBL 4강 플레이오프에서 전창진 감독이 이끌고 있으며 조성민 선수와 송영진 선수가 중심이었고 시즌 중 트레이드로 영입한 전태풍이 있는 10-11 시즌 정규 리그 우승팀(13-14 시즌 당시 정규 리그 5위)이었던 부산 kt 소닉붐을 상대로 단기전 경험 부족으로 인해 우려가 들었지만 3전 전승을 통해 팀은 13년 만에 창단 두 번째로 KBL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KBL 파이널에서 당시 SK를 2년 연속으로 울렸던 모비스에게 2승 4패로 패하면서 LG의 창단 첫 정상 등극에는 아쉽게 실패하게 되었다.[18] 어쨌든 작년에 6강도 못 든 LG를 정규 리그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감독상을 11년 만에 다시 수상했다.
비록 2013-2014 플레이오프 우승에는 젊은 선수들의 경험 부족에 따른 고비를 넘지 못하면서 아쉽게 되었지만 LG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00년대만 보면 2000-2001 시즌부터 2003-2004 시즌에 이어 창단 10주년이었던 2006-2007 시즌 이후 오랜만의 호성적이었다.
2014년 03월 09일,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KBL 정규 리그 우승 이후의 인터뷰는 이러했다.
"LG에서 기회를 줘서 오늘 이런 영광이 있었다. 그동안 자만했던 점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깨달은 시간도 있었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준비해 나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된 것 같다"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어린 선수들과 함게 항상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겠다"
"좋은 선수들을 만나 행복한 시즌이었다.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구단과 열렬한 응원을 보낸 준 창원 팬들에게 감사하다"
"구단과 다음 시즌 얘기를 하고 있다. LG에 남을 것이다"
"KBL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들, 또 패기가 넘치는 우리 선수들과 코트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고 구단에 감사한다"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어린 선수들과 함게 항상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겠다"
"좋은 선수들을 만나 행복한 시즌이었다.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구단과 열렬한 응원을 보낸 준 창원 팬들에게 감사하다"
"구단과 다음 시즌 얘기를 하고 있다. LG에 남을 것이다"
"KBL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들, 또 패기가 넘치는 우리 선수들과 코트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게 돼 매우 기쁘고 구단에 감사한다"
6.4. 2014-15 시즌
LG 창단 이후 최고의 한 시즌을 보낸 뒤 김진 감독은 다시 KBL 총재직으로 돌아온 김상식 감독의 부친으로 유명하신 스승인 김영기 총재[19]에게 2014-2015 시즌을 앞두고 총재가 된 정규 리그 우승팀의 감독으로 격려를 받았고(절대로 학력이 아닌 실력) 주축 선수들은 큰 변동 없이 2014-2015 시즌을 맞이했다.
LG 구단에서는 정규 리그 역대 팀 최다승(40승), 최다 연승(13연승) 기록과 함께 팀의 창단 후 첫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탁월한 지도력으로 팀을 젊음과 패기의 명문 구단으로 만든 공과 함께 3년 4억에 연봉 재계약을 2013-2014 KBL 파이널 이후 내부적으로 확정했고 2014년 05월 01일에 공식 재계약을 발표했다. 강양택 수석 코치와 정재훈 코치도 같이 3년 재계약과 함께 팀과 함께한다. 프로농구 LG, 김진 감독과 연봉 4억원에 재계약
2014-2015 시즌을 앞두고 2014년 08월 LG 세이커스는 정들었던 서울 방이 체육관 대신 형제 야구단인 LG 트윈스와 함께 훈련하게 될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 개관식에서 LG 트윈스의 양상문 감독님과 함께 LG스포츠단의 사령탑으로서 10년대의 신바람 비상을 이끌게 된다.[20]
그리고,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LG 창단 이후 전 LG 출신[21]이 아닌 현 LG 출신이 2013-2014 시즌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과 함께 무려 2명의 선수를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귀화 출신 슈터 문태종 선수와 2013-14 시즌 신인왕 센터인 김종규가 창단 처음으로 현 LG 소속으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여기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농구는 안방에서 열렸던 대회로 12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2013-2014 시즌 신인왕에 올랐던 김종규는 병역 면제[22]와 함께 면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년도 정규 리그 우승팀에 대한 우승 후보들인 원주 동부 프로미와 서울 SK 나이츠의 경계를 포함해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후율증은 꽤 길어지면서 슬럼프로 이어지더니 전년도 정규 리그 우승팀은 순탄치 않았던 차기 시즌 초반을 보내게 된다.
2014-15 시즌에는 초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서 금메달을 했던 주역인 문태종과 김종규의 체력 문제로 인해 조직력이 무너지면서 8승 14패로 전년도 정규 리그 우승팀이 8위의 부진으로 인해 다시 팬들에게 비난을 받다가 2015년 들어서 모비스 피버스와 SK 나이츠 및 원주 동부 프로미 등을 물리치고 11연승을 달리며 비판은 사라졌고 오히려 13-14 시즌 정규 리그 우승팀이 맞는지 그 저력에 박수를 보냈다.
2015년 2월 4일 기준으로 2015년에는 한 번도 패하지 않는 신바람을 이어갔다.
이 당시 창원 LG는 프로농구 10개팀 중 유일하게 팀 공격력이 평균 80점을 넘어서면서 전체 공격력 1위를 기록했다.
2014-2015 시즌 정규 리그는 전년도 정규 리그 우승이 무색할 정도로 8위까지 추락했지만 11연승을 통해 1위에서 5위로 추락했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23]와의 6강 플레이오프 홈코트 어드벤티지가 걸려 있는 정규 리그 4위라는 역전의 비상과 함께 극적으로 14-15 시즌 정규 리그를 마무리하게 된다.
2014-15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를 상대로 창원 홈에서의 1차전 압승에도 불구하고 창원 홈 2차전을 패하면서 고양 어웨이 3차전에도 겨우 승리하는 등 창원 홈 최종 5차전까지 가며 고전을 했지만 선수단의 투혼과 함께 2년 연속으로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체력 문제와 데이본 제퍼슨의 기행과 함께 13-14 KBL 파이널에서 아픔을 주었던 14-15 통합 우승팀이자 KBL 플레이오프 3연패를 달성했던 모비스를 만나 여러 악재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했으나 최종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승 3패로 또 고배를 마시게 된다.[24]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용병 데이본 제퍼슨이 구설수에 올라 중도 퇴출 당했고 시즌 후 김시래가 상무에 입대하게 되고 문태종이 FA 계약 만료에 따른 이적하는 등 예년보다 힘든 다음시즌을 예고하고 있다.
6.5. 2015-16 시즌
2014-15 시즌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던 전천후 빅맨인 트로이 길렌워터와 문태종의 FA 보상으로 2015 드래프트에서 정성우가 입단했지만 오히려 김시래의 공백을 절감했는지 의존도가 높았고 유병훈도 불미스런 징계로 인해 시즌 초반에 출전 정지를 당하면서 개막 이후 시즌 초반부터 7연패의 부진으로 몰락을 겪게 된다.2015-2016 시즌이 개막하고 20게임을 치렀는데 5승 15패로 압도적인 최하위로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선수층이 엷어진 문제가 크지만 그 동안 작전이나 전술 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미 분위기가 상대편으로 다 넘어간 뒤에야 작전 타임을 부르는 등 전성기와 다른 작전타임 타이밍까지 놓치는 모습을 간간히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LG 팬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20점 차 넘게 이기고 있다가도 마지막에 뒷심 부족으로 어이없이 패배하는 양상이 3경기 연속으로 반복되기도 했다.
[25]~~ #
그러나, 2016년의 시작과 함께 다시 귀신같이 승을 찍으면서 LG는 고춧가루 부대가 되었다.
대체 용병선수인 샤크 맥키식의 활약이 큰 듯. 결국 8위로 마무리했다.
2016년 02월 12일 주장 김영환은 삼성전에서 극적인 3점 버저비터를 터트리며 김진 감독의 신뢰에 보답했다.
그리고 정성우 선수는 신인왕을 수상하게 된다.
6.6. 2016-17 시즌
3년 재계약의 임기 만료인 2016-2017 시즌에는 2016 프로-아마 최강전 결승에 오르면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26]외국인 또한 빅 포워드이자 스트레치 4 빅맨에 해당되는 레이션 테리[27]를 영입했지만 포스트 열세(골밑 몸싸움 부족)로 인해 중국 C 리그에서 산시 울브즈의 2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제임스 메이스를 영입하면서 김종규 선수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력을 했다.
KBL 통산 400승을 거두었으나 LG는 여전히 기복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2016-2017 시즌에도 기복이 심한 경기력은 달라지지 않았고 김시래 선수의 공백은 컸으며 그 부담은 김영환 선수에게로 향하게 된다.
김시래 선수의 전역 복귀를 준비해서 그런지 조급한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김시래의 상무 전역 대비를 위해 리딩이 떨어지는 마이크 이페프라를 중도 퇴출하는 모험을 건 대신 마리오 리틀을 데리고 왔으나 리딩 가드에 대한 약점이 명확했다. 두 선수 모두 제임스 메이스처럼 김시래의 공백인지 팀 플레이 대신 개인 플레이로 조직력을 다운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직접 키우면서 분신과 같은 주장 김영환 선수는 3점슛 22개 연속 실패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구단 최고위층은 경기에 개입한 설이 있었다.)
우선은 6강에 들기 위해
물론 조성민의 활약으로 초반에는 승리를 가져갔으나 김종규의 부상 이후 인삼공사와 전자랜드 상대로 대패를 기록하고 kt전에서 트레이드로 넘어간 김영환에게 충격적인 결승 버저비터를 맞게 되면서 6강 플레이오프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환은 구단의 원망감을 표시하는 과도한 세레머니를 하게 되었고 LG 팬들은 분노했으며 스승인 김진 감독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kt 팬들도 처음에 자기 팀에서 자리를 못 잡았던 선수가 돌아오면서도 비난을 했는데 단숨에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kt 팬들 대다수는 조성민을 내놓은 충격으로 인해 구단에 시위까지 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계다가 천적과 다름이 없었던 원주 동부에게는 시즌 5경기 전패를 기록하는 바람에 6강 진입에 위험하게 되었다.
게다가 데이본 제퍼슨 때도 그러했듯 외인 선수인 제임스 메이스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행동을 수차례 보여줘서 선수 한 명 컨트롤도 못하는 비판을 받았다.
창단 20주년 기념 경기였던 3월 11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홈경기에서도 패배하면서 봄 농구의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구단에는 김진 감독과 김영환 선수의 업적 대신 과거 전임 감독이었던 신선우 감독과 신선우의 제자들이자 LG 출신 스타들인 현주엽과 조성원만 띄우는 등 구단 신뢰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29]
결국에는 3월 21일 6강 플레이오프에 모든 것이 걸린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한때 25점 차까지 끌려다니는 등 무의미한 경기를 펼치며 63-79로 대패, 6강 탈락 트레직 넘버에 1만 남겨뒀다.[30] 다음날 인천 전자랜드가 서울 삼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 자동으로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는 것. 결국에는 이날 전자랜드가 서울 삼성에게 81-78로 승리를 거두며 두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다. 동부에 또 져 6연패 압살이 확정되었다. 이 경기에서 지면서 전 구단 상대 승리를 2연속 실패[31]한 것은 구단 역사상 최초였다. 마지막 날 오리온스와의 경기에 패배하여 마침 동부에 승리한 SK에 밀려 8위로 추락했다. 이제는 부상이 있었지만 2년 연속 봄 농구에 실패하면서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며 당장 사퇴하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결국 LG 구단은 2017년 4월 13일 재계약을 하지 않음을 발표하여 LG 역대 최장수인 6년의 감독사를 뒤로하고 사령탑에서 쓸쓸하게 물러나게 되면서 명장의 퇴장을 알리게 되었다. 김 감독은 스포츠단 본사인 서울 잠실야구장과 클럽 하우스인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32]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강양택 수석 코치와 정재훈 코치와 외롭게 짐을 챙기고 떠났다.[33]
다음은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 이후 퇴임하게 된 김진 감독님의 LG 세이커스 팬들에 대한 마지막 편지 인사였다.
지난 6년간의 시즌들을 되돌아보면서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보내주신 창원 LG 세이커스 팬 여러분의 열정적인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챔피언이라는 창원 LG 세이커스팀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내지 못해 세이커스 팬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 아쉽고 죄송합니다.
늘 선수단과 함께 해주시고 분에 넘치는 관심과 열정적인 응원으로 선수단에 힘을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챔피언이라는 창원 LG 세이커스팀의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내지 못해 세이커스 팬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 아쉽고 죄송합니다.
늘 선수단과 함께 해주시고 분에 넘치는 관심과 열정적인 응원으로 선수단에 힘을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추가로 김진 감독을 지원해 준 김완태 단장은 16-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퇴를 하게 된다.
실제로 김진 감독의 퇴임 직전 김영환과 조성민이 포함된 kt 소닉붐과의 충격적인 트레이드 이후 김진 감독이 한 게 아닌 한상욱 단장의 주도로 나왔고 맞트레이드를 했던 kt 또한 당시 사령탑이었던 조동현 감독이 주도한 게 아닌 최현준 단장이 했던걸로 나왔다. 이 트레이드로 kt는 허훈과 양홍석을 모두 지명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LG 농구의 황금기를 같이했는데 LG 세이커스에는 큰 울림이었다.
고려대 농구부 출신을 살리는 LG 세이커스의 전통을 보면 서동철 KB 스타즈 감독과 전희철 SK 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고 이외 이상범 KGC인삼공사 감독과 위성우 우리은행 위비 감독이 후보군에 올랐지만 김완태 단장의 후임인 한상욱 단장의 선택은 코치경험이 없었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주역으로 현역 말미 4년을 보낸 현주엽이었다. 하지만 8년 만에 선수에서 감독으로 돌아온 현주엽을 7대 감독으로 선임을 하면서 친정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건 성적 부진이었다. 이건 현주엽과 한상욱을 참고. 2016-20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을 지원했던 김완태 단장은 갑작스럽게 사임을 하게 되고 그 후임으로 사무국장이었던 한상욱 단장이 승진을 했다.
결국 LG는 김진 감독의 퇴임 이후 자신의 모교후배이자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함께했던 팀의 슈퍼스타 출신이자 KBL 레전드 12에 선정된 현주엽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이후 후임도 명지대와 현대-KCC의 레전드인 조성원 감독이 부임했으나 이미 현주엽 시절에 무너진 팀 전력과 함께 최하위 성적으로 인해 LG의 대몰락으로 비극이 되었다.
LG 팬들에게는 큰 충격이자 슬픔이었다.
7.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1/2002 KBL 통합 우승과 함께 당시 대한민국농구협회는 90년대 최고 명장으로 한국의 필 잭슨이라 불렸던 최인선 감독과 함께 유력한 대표팀 감독 후보군에 있었다.
이미 최인선 감독은 한국 농구의 마지막 올림픽 본선을 이끌었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의 사령탑이었다. 그 이전 한국 농구의 올림픽 본선은 1988 서울 올림픽이었다. 당시에도 고전은 했지만 당시 활약했던 이충희, 김현준, 허재, 유재학은 세계를 맞이해서 당당히 경쟁했다.
8년 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흑역사가 있었다. 주축이었던 허재의 음주 파문과 함께 성적보다 이미지가 좋지 못했다. 참고로 올림픽 농구는 각 대륙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나가는 만큼 아시아 변방인 한국으로서는 승리가 그만큼 순탄치 않았다.
그리고 최인선 감독을 2001-2002 KBL 파이널에서 넘은 김진 감독에게 기회가 가게 된다. 대한민국농구협회는 당시 규정으로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으로 인해 당초 유력했던 최인선 감독 대신 김진 감독이 맡게 되었다.
한국 농구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개최국의 자격으로 금메달에 도전하게 된다. 허재가 등장했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의 기적 이후 2회 연속 우승에 도전했으나 금메달에 실패했다. 남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농구 관련은 해당 문서로 참고. 당치 코치로 최인선 감독을 보좌하던 박건연 SK 나이츠 코치가 선임되었다.
주요 명승부로 4강 복병 필리핀전 패배 위기를 이상민의 버저비터로 극복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1994 히로시마와 1998 방콕 대회 이후 3회 연속 아시안 게임 농구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NBA에 진출한 센터 야오밍을 중심으로 슈터 후웨이동 그리고 아시아 최고 가드인 류웨이가 이끄는 중국이었다.
결승 아시아 최강인 중국전에서 무려 15점 차 이상 끌려간 경기를 김승현과 문경은을 중심으로 현주엽과 서장훈의 결승 득점으로 연결되며 한국 농구는 신선우와 이충희가 중심이었던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며 4달전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극적인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김진 감독은 금메달 감독 또는 국민 감독으로 농구 팬들의 기억에 남았다. 당시 우승 주역들은 향후 농구대잔치 세대의 마지막 불꽃이자 한국프로농구에서 레전드로 남게 되었다. 이후 12년 뒤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농구에서 12년 만에 금메달을 따내게 된다. 그 시절 LG 감독에 재임하면서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던 문태종과 김종규는 금메달의 주역이 되었다.
8. 감독 퇴임 이후
보통 감독들은 퇴임을 하게 되면 방송 해설 위원을 통해 감독 재취업 또는 농구 이론을 재정리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방송 해설 위원을 하지 않은 바람에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았다.대신 NBA를 즐겨보는 농구인으로는 정보가 나와 있다. 평소에도 코치와 감독 재임 시절에도 미국 유학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감독 재임 기간에도 강양택 수석 코치와 김지홍 코치와도 NBA 농구로 격이 없는 소통을 한다.
미국 농구, 특히 런앤건을 사랑했고 유타 재즈의 제리 슬로언 농구를 보았지만 사실 NBA의 최고 인기팀이자 최고 명문인 코비 브라이언트의 LA 레이커스를 더 볼 정도로 한국 농구에 있어서 NBA와 가장 유사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LA 레이커스의 최고 스타인 코비 브라이언트를 만난 한국 농구의 유일한 농구인이었다.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명장 시절에도 NBA를 봤으며 SK 나이츠 감독으로 자진 사퇴 이후 강양택 코치와도 NBA 견문을 넓히러 미국으로 유학 겸 여행을 떠나면서도 NBA 내기를 했다.
더 놀라운 건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과 LG 역대 감독으로 KBL 감독상 수상 이후 LG그룹의 한 블로그에서 NBA 잡지를 보았던 김 감독의 자료가 나왔다는 거다. LG 세이커스, 송골매의 비상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김진 감독의 퇴임 이후 LG는 더 비참한 몰락사를 겪게 된다.
그 이전 대구 동양 오리온스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동양은 김진 감독이 떠난 이후 대학 선배인 이충희와 대학 후배인 김상식 그리고 고등 선배였던
대구 팬들에게 봄 농구는 2006-2007 시즌이 마지막이었고 김승현의 허리 디스크 수술과 김병철의 노쇠화에 그리고 외국인 악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면서 대구에서 4년간 양궁 순위인 10-9-10-10으로 암흑기였다.
결국 2010-2011 시즌 이후 대구체육관에서 더 이상 KBL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추일승 감독은 살아남기 위해 대구체육관의 훈련 시설을 지적하면서 구단과 함께 고양으로 연고 이전을 단행하면서 대구 팬들에게는 끝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암흑기도 2012-2013 시즌에 겨우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 오리온 팬은 대구 팬과 고양 팬으로 양분화가 되었고 더 이상 예전 대구 동양 오리온스 시절의 절대적인 응원을 기대하지 못했다. 고양 연고 이전 이후 주말에도 응원 열기가 뜨겁지 못한 편인데 아직도 옛 팬들은 대구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대구 동양의 팬들이 김진 감독이 서울 SK 나이츠와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이 되어서도 대구 동양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따라갈 정도다.
본격적으로 김진 감독이 떠난 창원 LG 세이커스도 이 비극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외에 인연이 깊지 못했던 대학 후배 현주엽이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혹독한 지도자로서의 경력 자체가 없었다. 프로에서 코치는 둘째 쳐도 모교인 고려대 농구부의 감독설까지 나왔으나 코치도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초보 티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나면서 더 부각이 되더니 오죽했으면 LG 팬들은 너무 속상해서 여기에는 대학이자 실업 시절 후배였던 서동철을 더 인정하게 되었을 정도였다. 참된 LG 팬들이나 참된 kt 팬들이 모두 김진 농구의 후계자라는 극찬을 보냈다.
실제로 LG 구단에서는 이상범과 위성우를 후임 감독으로 올렸지만 비고려대 출신이었는지 역시 두 감독은 고사를 했고 LG 세이커스라는 팀 자체가 동양 오리온스와 함께 고려대 농구부 출신이 맡는 만큼 전희철과 서동철도 검토했으나 구단이 고사를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고려대 농구부 감독 취임설이 있었으나 아마든 KBL이든 감독보다 코치 경험 자체가 없는 현주엽을 선임하는 큰 누를 끼치면서 LG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LG 역대 단장들과 과거 구단 직원들은 다른 직원보다 2016-2017 시즌부터 사무국장에서 승진한 창단 멤버 출신인 한상욱 단장과 사무국장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현주엽의 감독 부임 이후 인터뷰에서 솔직히 한상욱 단장과의 선수 시절 인연을 직설적으로 말했다.
농구 팬들은 조성민을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면 기존의 김시래와 김종규 콤비가 여전한 걸 보면 LG 프런트가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있는 감독으로 서동철 감독을 LG 팬 포함 KBL 팬들이 추천을 했는데 LG는 선수시절 스타 출신 및 감독으로서 우승경험이라는 이름값 문제로 인해 하지 않았다. 여기에 김영환도 같이 있었으면 금상천화였다.
재임 기간 2년 말년에는 FA로 풀린 문태종의 오리온 이적을 시작으로 아마 시절부터 대표팀까지 쉴 새 없는 차출로 인한 김종규의 부상, 김시래의 입대, 유병훈의 불법토토 도박으로 인한 출장정지를 넘어 당시 외국인들의 도미노 같은 부상 때문에 성적은 다시 추락했다. 힘겹게 2015-2016 시즌에는 5승 15패로 LG 창단 첫 꼴찌 위기였는데 당시 김완태 단장은 팬들에 대한 애정과 격려를 부탁하며 신뢰를 통해 20승 34패로 최하위에 탈출하면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문태종의 이적과 김시래의 상무 입대를 감안하면 실패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6-2017 시즌 개막을 앞두고 김완태 단장은 비시즌 중에도 활동을 하셨으나 시즌 개막 1달을 남겨 놓고 돌연 사퇴를 하면서 창단 프런트 직원이었던 한상욱 사무국장이 단장으로 승진하면서 방향성은 거꾸로 갔다.
김영환 선수는 3점슛 22개 연속 실패를 이유로 kt 소닉붐으로 충격적인 트레이드 재복귀를 당했고 조동현 감독이 장악하지 못한 KTF-kt의 11년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슈터였던 조성민 선수를 그것도 2017 KBL 드래프트 1라운드 픽까지 주면서 김진 감독 몰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이 트레이드는 당시 kt 최현준 사무국장(향수 서동철 감독 선임 때 단장 승진)과 LG 한상욱 단장이 실무진에 성적 부진 압박을 받으면서 몰래 짜고 쳤다.
그 결과 2017년 2월 24일에는 적으로 창원에 온 김영환의 충격적인 버저비터를 당하면서 LG는 연패에 빠지더니 창단 20주년에 정규 리그 8위의 부진의 책임을 물어 2017년을 끝으로 연장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팀을 떠나게 된다. 심지어 창단 20주년 기념 경기에서 김진 감독과 김시래 선수 및 김종규 선수에 대한 인터뷰조차 없었고 당시 2대 김태환 감독과 조성원 선수 그리고 4대 신선우 감독과 현주엽 선수만 인터뷰를 했다. 여기서 김영환 선수가 트레이드 되지 않았으면 추가될 가능성이 있었다.
김진 감독은 퇴임 이후 이 트레이드는 내가 한게 아니라며 당시 OSEN 서정환 기자에게 크게 화를 냈다. 침착하기로 유명했던 전임 감독이라는 점에서 KBL 팬들은 물론이고 그 전성기 시절 LG 팬들도 퇴임 이후 놀랄 정도였다. 김완태 단장 또한 퇴임 이후에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추가로 한상욱 단장은 2년 뒤 김종규를 FA 때 놓치면서 김완태 단장과 LG 팬들에게 역대급 디스를 또 당하게 된다. 한상욱 단장은 직원들을 두고도 활용조차 못한 것이다. 그것이 김진 후임의 LG 사령탑이이었던 현주엽이었다. 추가로 현주엽이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이후 후임이 대학에서도 매번 패했던 팀 MVP 출신인 조성원으로 바뀐 이후 김시래마저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했다. 결국 자신의 재임시기에 만들었던 김영환,김종규,김시래 트리오는 8년도 채 못간채 해체를 당했다. 그만큼 희생을 한 증거였다.
그런데, 후임자가 감독 데뷔 시즌에서부터 크게 삽질을 하고 있어서 뜻밖에 김진이 졸지에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만 2년 차에 똑같이 제임스 메이스를 보유하고도 3위까지 치고 올라가서 다시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었다가 3년 차에 팀을 또다시 심하게 망치고 계약만료 이후 물러나면서 김진>현주엽이었음이 최종적으로 밝혀졌다. 여기서의 스토리는 이렇게 나온다.
LG의 후임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서동철 KB 스타즈 감독은 kt 소닉붐 감독이 되었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최현준 kt 단장은 당시 임종택 kt 단장이 너무 못해서 리빌딩에는 적합함을 말했다. 사실 LG도 조금의 검토는 했어야 했다.
실제로 김진 감독의 농구와 거의 비슷한 서동철 감독은 높이가 고질병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허훈 선수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보게 되고 잃었던 김영환마저 어떻게 된건지 몰라도 kt에서도 주장이 되면서도 재미를 보았다. 양홍석의 경우 서동철 감독의 혹독한 채찍과 당근으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참고로, 김영환 선수는 김진 감독에 대한 존경을 고백했다. 그리고, 같은 주장 출신의 모교 대선배이자 오리온스의 레전드인 김병철 수석 코치도 실제로 존경을 했으며 본인도 그리움을 표시했다. 실제로 김 감독과 비슷한 스타일인 서동철 감독 덕인지 잘 모르겠으나 회춘하듯이 30대 중반에도 불구하고 kt의 10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조성민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는데 과거 LG 주장 시절에 못지 않았다. 사실 조성민은 조동현과 현주엽 사이의 강훈련 속에 상처투성으로 좋지 못했던 경기력을 보인 걸 보면 대조적이었다.[34]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이미 조성민의 영입 대가로 내준 드래프트 지명권은 LG의 공이 2순위로 추첨되어 2순위 픽이 kt로 넘어가 버리면서 후임인 현주엽은 흥분을 했고 또 한 번 LG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35]
하지만 후임으로 들어온 현주엽이 외국인 선수에서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면에서 초짜인 티를 내며 심하게 무너지고 있어서, 그래도 외국인 선수는 잘 뽑던 김진을 은근 재평가하기도 한다.
참고로 현주엽이 2년 차에 본인이 마지막 시즌 때 썼던 치트키로 김종규와 트윈 타워였던 제임스 메이스를 데리고 우격다짐으로 3위와 힘겹게 4강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했을 정도로 김진 감독이 본 외국인의 눈은 적중했다.[36]
사실 한 때 지휘봉을 잡았던 12-13 시즌 이후 5년 만에 17-18 KBL 파이널에 진출한 서울 SK 나이츠가 애런 헤인즈의 부상으로 인해 문경은 감독은 김진 감독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제임스 메이스를 추천했고 17-18 시즌 기적의 정규 리그 우승과 함께 이해 통합 우승을 원했던 원주 DB 프로미를 극적으로 넘으면서 SK는 18년 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하게 되었는데 김진 감독 또한 다른 농구인들과 농구 기자에 비해 DB보다 SK의 우승을 더 높게 평가했다. 역시 외국인 보는 눈은 거의 귀신이었다.
이 장면을 본 현주엽은 1년 전 서울 잠실 야구장에서의 LG 7대 감독 취임식 이후 따로 김진 감독에게 전화를 통해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드린 이후 조언을 받았다. 결국 방송해설위원 시절에 제임스 메이스를 비판했는데 17-18 SK 나이츠의 KBL 파이널 시절 때의 경기력을 보고 즉시 제임스 메이스를 영입하며 김종규와 함께 LG 트윈타워로 그나마 선전했다.[37]
현재 LG 팬들은 김진 감독의 선임과 선택이 맞았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캥거루였던 스타 출신인 조성원 감독의 선임과 함께 무너진 분위기와 신바람이라는 팀 컬러 개편 차원에서 13-14 시즌 정규 리그 우승 멤버들이 모두 떠나면서 그리움을 표시하고 있다.[38]
즉, 방송해설과 예능으로 인기를 얻은 후임인 하마를 더 미워하고 있고 오죽했으면 서궁사를 상대팀 감독이었지만 같은 농구스타일인지 몰라도 더 지지하는 역함수가 나왔다.
동양 오리온스 시절 지지했던 대구 팬들도 연고 이전과 김 감독을 힘들게했던 프런트는 원망을 해도 오히려 김 감독을 LG 팬들보다 더 지지를 하고 있다.[39]
LG 세이커스는 김진 감독이 퇴임한 이후 현주엽 강점기와 조성원 암흑기를 거쳐 SK 우승 멤버에 팀 출신이었던 조상현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 코치-감독 부임 이후 2022-23 시즌에 마침내 암흑기에서 탈출하게 된다. 대다수 멤버가 변했으나 그 중 생존자는 한상혁 선수와 정인덕 선수였다. 정인덕 선수는 2라운더에 그것도 조상현 감독 조차 몰랐던 선수였는데 임재현 수석 코치와 자신이 한 때 지도했던 박유진 코치로 인해 살렸다.
LG 감독 퇴임 이후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동아리 또는 동호회 농구의 일일 선생이자 일일 강사로 재능 기부 활동을 통해 활약을 하고 있으며 동양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정재훈 코치가 모교인 한양대의 감독이 되면서 자신의 모교가 아닌데도 한양대 농구부의 선수들(사실 농구부 학생들)를 시작으로 원 포인트 레슨을 A부터 Z까지 다양하게 일일 농구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40]
참고로 KBL 플레이오프 2개팀 우승은 최인선 감독이 유일하지만 KBL 정규 리그 2개팀 우승은 현재까지 두 명[41]인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김진 감독이다. 3년 전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2003-2004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KBL 첫 정규 리그 우승 이후 2004-2005 원주 TG 삼보 엑서스의 KBL 통합 우승과 2007-2008 원주 동부 프로미의 KBL 통합 우승 이후 2006-2007 KBL 파이널 이후 성적 부진이었던 KTF 매직윙스의 후신인 부산 kt 소닉붐에서 2010-2011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전창진 감독은 TG 삼보-동부와 kt라는 두 개의 팀에서 정규 리그 우승을 했다.
김진 감독은 2001-2002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KBL 통합 우승 이후 2002-2003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2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1년 뒤 2013-2014 창원 LG 세이커스의 17년 만에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양과 LG에서 모두 정규 리그 우승으로 해냈다. 사실 두 개의 팀에서 플레이오프 우승은 고사하고 정규 리그에서도 우승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인데 이건 명장의 흔적이다.
후발 주자로 KBL 플레이오프 우승과 KBL 정규 리그 우승을 팀마다 따로 해 봤던 이상범과 한 팀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모두 KBL 통합 우승에 성공한 김승기에 이어 SK의 레전드로 KBL 정규 리그 우승과 KBL 플레이오프만 따로 우승해 본 문경은이 도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다.
자신은 오늘의 명장까지 학력과 실업에서 인연조차 없었지만 상무 농구단과 동양 오리온스에서 인연이 되었지만 박광호 감독님에게 32연패 시절의 마음고생이 컸는지 가장 감사함를 표시했고 최명룡 감독 또한 큰 인연이 없었는데 자신을 감독으로 시험까지 주면서 감독 대행을 거쳐 동양 오리온스 감독으로 내부 승진할 때 감사함을 표시했다. 실업 시절 김인건 감독님과 대학시절 은사였던 박한 감독님에게도 고마워했다. 당시 동양은 김진 코치의 내부 승진보다 최고위층에서 이충희 LG 초대 감독을 영입하려 했으나 정태호 단장이 반대했으며 동양 3대 감독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김진 감독님에 떠나면서 이충희는 오리온스 4대 감독이 되었지만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김진 감독이 도전했던 SK도 최인선 이후의 가능성을 주었지만 현대-KCC의 명장인 신선우 감독이 LG 4대와 김진 후임의 SK 6대 감독이 될 때 몰락했다. 그만큼 동양-LG의 명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돌보지 못했던 아들인 김윤 선수는 공교롭게도 감독으로서 퇴임 이후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감독이 아닌 학부모로 출석을 했는데 가장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 농구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휘봉을 잡았던 창원 LG 세이커스는 걸렀고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도 냉정했다. 다행히도 김윤 선수는 3라운드로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 지명되면서 취업을 했다. 어머니는 기뻐하셨지만 아버지인 김진 감독은 눈물과 함께 미안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정작 D리그에서도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하면서 2년 만에 은퇴를 하게 된다.
감독 시절 많이 미안했는지 공부하는 농구인이 되길 바랬는데 프로의 벽은 높았다. 고등학교를 중간에 전학 가게 되었는데 대학을 위한 진학이었는 평이 있었다. 농구 팬들은 조성원 감독과 김시래 선수가 있는 명지대학교였으면 출전 시간을 통해 농구 선수로서의 가능성이 있었으리라는 평이 있었지만 끝내 부친과 같은 길이었지만 출전이 어려운 고려대학교를 선택하면서 제2의 농구 인생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건 김동광의 아들인 김지훈 선수도 그랬다. 김동광 감독의 경우 부친 논란 속에 감독직을 내려놓는 아픔이 있었고 복귀할 때 매니저였던 아들 김지훈에게 다른 일을 찾으라는 냉정함을 보였다. 참고로 고려대 농구부 출신의 농구인들은 모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는 편이다. 김지훈의 경우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아마 농구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외 스토리는 고려대학교 농구부가 포함된 아마 농구 스토리에 나와 있다.
감독으로 물러난 이후 행정가가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의 대학 후배인 전창진 감독이 불미스런 일로 인해 감독이 아닌 재정위원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KBL 영구 제명에 따른 자격회복회의였던 KBL 재정위원회에서 별명이 스님이었는지 법전을 꼼곰히 보면서 자신도 감독으로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고심을 많이했다. 과거 경쟁했던 후배가 명장이지만 농구인으로서 안타까움이 들었는지 심사숙고를 했다. 과거 OB 선배들이 주축인 KBL 재정위원회의 KBL 재정위원으로서 출석하는 모습까지 고심을 했다. 결국 전창진 감독은 KBL 회원으로서 자격 회복과 함께 부산 kt 소닉붐 감독 퇴임 이후 전주 KCC 이지스의 감독으로 우여곡절 끝에 4년간의 마음고생과 함께 KBL 감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때 전창진 사건으로 인해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 농구 팬들이 안쓰러운 모습에 안타까움을 보이기도 했다. 전창진 감독의 적응을 도울 수석 코치로 한때 인연이 깊었던 강양택 수석 코치도 스승의 퇴임 이후 전창진 감독을 보좌하면서 3년 만에 KBL에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4년을 KBL 재정위원과 대한민국농구협회 이사를 포함해서 행정을 보았지만 한국 농구 유망주인 중고등학생에 대한 원 포인트 레슨과 대학생 레슨과 함께 마지막 KBL 지휘팀이 된 LG 세이커스 시절의 일화를 공개한 플레이 북이라는 농구 전술서를 저서하면서 농구에 대한 애정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모교 후배였던 김상식 감독이 계약 만료이자 대표팀 차출 문제로 사퇴한 대한민국농구협회 감독직에 지원하게 되었다. 사실상 참모였던 강양택 수석 코치가 KCC 이지스에서 전창진 감독을 보좌하는 바람에 같이 경쟁했던 중앙대-기아 및 동부의 상징과 같은 김영만 전 동부 감독 및 전 LG 수석 코치를 코치로 둘 예정으로 대한민국농구협회에서 2021년 04월 15일자로 감독 면접을 보았다. 후보는 동세대 경쟁했던 추일승 전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시절 지도했던 조상현 대표팀 코치였다.
현재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은 모교 대선배였던 김동광을 감안하면 지도자 복귀 가능성이 열려 있는 편이다. kt 소닉붐 팬들도 전창진 감독 재임 시절 그렇게 비판했던 김진 감독을 모교 후배인 서동철 감독이 변거박 논란으로 인해 영입전도 추진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 면접에서 대표팀 상비군을 역설했다. 김상식 전 대표팀 감독의 숙원을 이룰지 농구 팬들의 시선이 다시 2002 부산 사직의 신화를 쓴 김진 감독에게 향하고 있다.
하지만, 끝내 복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2021년 5월 6일 대한민국농구협회에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함께했던 제자 중 하나인 조상현 전 대표팀 코치를 김상식 전 대표팀 감독의 후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아무래도 4년의 현장 공백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 거 같다.
농구 팬들은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평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추일승 전 경기력향상위원장의 경력 가산점으로 인해 감독으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팬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동세대 라이벌인 신선우의 경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인수한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의 총감독, 즉 기술 고문으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기약 없는 지도자 또는 프런트 복귀를 농구 팬들이 기다릴 정도다.
대신 자신이 저서했던 농구 전술서인 플레이북은 자신이 지도했던 전희철 SK 나이츠 감독과 김승기 KGC인삼공사 감독 그리고 서동철 kt 소닉붐 감독을 포함해서 여자 농구에 오래 있는 김완수 KB 스타즈 감독 등이 직접 구독하면서 모교 농구 제자들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임 이후 유소년 클럽과 동호회 농구 및 아버님 농구 대회 활약을 통해서 미래의 한국 농구 유망주들과 농구 동호회 관계자들은 명장의 등장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추가로 개인 사업으로 인해 제주에 머물게 되었는데 휠체어 농구대회에서도 조동기 감독과도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 면접 탈락 이후 농구와 무관한 광어 양식인으로 새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아들인 김윤도 은퇴 이후 농구와 무관한 일을 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9. 통산 감독 성적
연도 | 소속 구단 | 경기 수 | 승 | 패 | 정규 시즌 | 플레이오프 | |
2000-01 |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 | 22 | 6 | 16 | 10위[42] | - | |
2001-02 | 54 | 36 | 18 | 1위 | 우승 | ||
2002-03 | 54 | 38 | 16 | 1위 | 준우승 | ||
2003-04 | 54 | 32 | 22 | 3위 | 6강 PO | ||
2004-05 | 54 | 26 | 28 | 6위 | 6강 PO | ||
2005-06 | 54 | 28 | 26 | 6위 | 4강 PO | ||
2006-07 | 54 | 31 | 23 | 4위 | 4강 PO | ||
<rowcolor=#ff0000> 통산 | 346 | 197 | 146 | 0.569 | - | ||
연도 | 소속 구단 | 경기 수 | 승 | 패 | 정규 시즌 | 플레이오프 | |
2007-08 | 서울 SK 나이츠 | 54 | 29 | 25 | 5위 | 6강 PO | |
2008-09 | 54 | 20 | 34 | 8위 | - | ||
2009-10 | 25 | 8 | 17 | -[43] | - | ||
<rowcolor=#e1002a> 통산 | 133 | 61 | 72 | 0.459 | - | ||
연도 | 소속 구단 | 경기 수 | 승 | 패 | 정규 시즌 | 플레이오프 | |
2011-12 | 창원 LG 세이커스 | 54 | 21 | 33 | 7위 | - | |
2012-13 | 54 | 20 | 34 | 8위 | - | ||
2013-14 | 54 | 40 | 14 | 1위 | 준우승 | ||
2014-15 | 54 | 32 | 22 | 4위 | 4강 PO | ||
2015-16 | 54 | 21 | 33 | 8위 | - | ||
2016-17 | 54 | 23 | 31 | 8위 | - | ||
<rowcolor=#c30452> 통산 | 324 | 157 | 167 | 0.485 | |||
<rowcolor=#373a3c> 총계 | 797 | 415 | 388 | 0.517 | V1 |
10. 100승 단위 달성 경기
소속 구단 | 시즌 | 승리 | 상대 구단 | 날짜 | 경기장 |
대구 오리온스 | 2003~2004 | 100승 |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 2003년 11월 25일 | 대구실내체육관 |
서울 SK 나이츠 | 2007~2008 | 200승 | 대구 오리온스 | 2007년 10월 28일 | 잠실학생체육관 |
창원 LG 세이커스 | 2013~2014 | 300승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 2013년 10월 13일 | 창원실내체육관 |
2016~2017 | 400승 | 2016년 12월 10일 |
- 프로농구에서 네 명뿐인 400승 이상 감독으로 역대 최다승 감독 3위다.[44]
[1]
기존의 창단 멤버로 호흡했던 전희철과 김병철에게 휴식을 주면서도 수비와 속공을 강조하면서 식스맨들의 영입을 통해 부담을 덜게 했다. 다만 김병철에게는 자신이 슈팅 가드 출신이라서 그런지 포인트 가드 시절에 좋지 못했던 모습으로 인해 주장직을 주면서 책임감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2]
2002년은 국내에서 열린
FIFA 월드컵 및
아시안 게임 외에
대구광역시 연고 프로 팀 2개 우승이라는 최초의 기록이 나온 해다.
[3]
트레이드 팀으로는 신선우 감독의 KCC 이지스와 이상윤 감독-김태환 감독의 SK 나이츠였다.
[4]
이 오작동 때문에 역전을 당하는데, 오작동이 아니었다면
동양이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5]
이 과정에서 침착하기로 알려진 사람이 그 동안 쌓이고 쌓였는지 광고판을 걷어차기도 했다.
[6]
이런 과정은 1997-98 시즌부터 KBL 프로농구에 데뷔하면서 향후 맡게 된
창원 LG 세이커스도 초대 이충희 감독 시절부터 KBL 인기구단으로 성장했는데 김태환 감독 시절 경쟁을 하면서 KBL 최고 인기 구단으로 발돋움을 했던 시절이 있었고, 2011-2012 시즌부터 2016-2017 시즌까지 LG 6대 감독 재임 시절 런앤건을 포함해서 신바람 농구로 KBL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창원 LG 세이커스 팬들의 자존심을 키워주었다.
[7]
김남기 감독은 따로 설명을 할 수 없는 게 불의의 구설수가 나왔는데퇴진 이후
명지대학교 감독 시절에
성추행이라는 누구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농구 팬들에게는 그리 지명도가 높지 못한 농구인이지만 몰락은
강동희급.
[8]
이충희 감독은 이후 2013-2014 시즌 농구명가이자 고향팀이기도 한
전창진 감독과
강동희가 포함된 그의 참모들이 피땀흘려 만들었던 원주 동부 프로미도 그렇게 몰락시키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9]
이 시기에 오리온스가 암흑기에 빠진 것은 김진 감독이 물러난 이유도 있지만, 자유계약에서 트라이아웃으로 바뀐 용병 제도와
김승현 이면 계약 파문을 비롯한 심용섭 전 단장의 간섭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12년간 정들었던 오리온스를 떠나 SK 나이츠로 도전하게 만든 빌미를 제공했다. 2006-2007 시즌 계약 1년을 남겨놓고 결렬된 뒤 SK가 바로 최고 대우로 동양의 명장을 데리고 간다. 추가로 오리온스 또한 고양으로 연고 이전을 하면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로 바뀌었으나 2021-2022 시즌을 끝으로 매각된 이후 캐롯 점퍼스와 소노 스카이거너스로 바뀌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대구는 2010-2011 시즌 종료 이후 10년간 프로농구를 못보게 된다. 10년 뒤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매각으로 인해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에 인수되면서 대구에 다시 농구를 보게 되었다.
[10]
강양택 코치와 김지홍 코치 모두 알고보면 김진 라인이다. 수석 코치를 차기 감독으로 만들었던
전창진도
강동희와
김승기를 동부 프로미의 코치로 두면서 강동희는 동부의 차기 감독이 되고 김승기는 향후 KT 소닉붐으로 이적할 때 수석 코치를 두었으며 향후 KGC인삼공사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것이 전창진 라인이다.
[11]
일명
문경은 시절부터 본격화 된
잠학콜
[12]
이로 인해 중도 사퇴하였다가
신선우 감독이 취임하였지만 신선우 역시
김선형을 발굴한 것 외에는 별 효과가 없었는지 2시즌만에 물러났다. 그 다음 감독인
문경은이 2012-13 시즌에
애런 헤인즈를 영입해서 정규 리그 우승,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일구며 청산하는가 싶었는데 헤인즈가 나가고 나니 역시나 9위로 추락하였다. 하지만 17~18 시즌 헤인즈를 다시 영입하면서 우승에 성공했다.
[13]
SK 스포츠단 연말 인사 단행 분위기가 있었으며 본인은 슬럼프로 인해 힘들어하면서 자진 사퇴를 스스로 결정했으나 SK 감독직 사퇴 이후 자진 사퇴를 빌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강을준 LG 5대 감독은 재임 중이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으며 위로를 하기도 했다. 후임 감독은 LG 4대 감독으로 현대-KCC 초대 감독이었던
신선우였다. 하지만 SK는 12연패를 당했다.
[14]
11-12 시즌 중 허병진 단장이 김승현 영입 실패 및 당시 성적 부진으로 인해 떠났으나 후임이 된 김완태 단장님은 현장을 배려하면서 2년 뒤 13-14 시즌 창단 17년 만에 정규 리그 우승으로 김진 감독을 배려했다.
[15]
경희대 10학번 빅3를 노리는 쉬어가기다. 김종규를 얻기 위해 미리 준비한 허재의 KCC와 김민구나 두경민을 얻기 위해 쉬어간 강동희의 동부에 이어 박상오의 FA 이적과 서장훈의 아름다운 은퇴로 쉬어간 전창진의 kt도 해당되었다. 그리고 김동광의 삼성은 정석으로 갔는데 이후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다.
[16]
1순위는 원주 동부의
허버트 힐이었는데 당시 동부 감독이 강동희나 김영만이 아닌
이충희였다.
[17]
바로 이 장면. 17년 만에 LG 세이커스의 KBL 무관의 한을 풀었다. 그에게는 농구의 국민 감독이자 우승 청부사라는 긍정적인 평을 얻게 되었다.
[18]
이때 LG 주전 라인업은 준수한 빅맨이었던
크리스 매시, 당해 정규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 문태종과 전 시즌부터 주장으로 맡았던 김영환을 중심으로 젊고 재능있던 김시래와 김종규에 13-14시즌 최종 보스(?)였던
데이본 제퍼슨으로 구성됐는데 훗날에도 간간이 회자될 정도로 대단한 팀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준우승에 그쳤는데, 비록 모비스 우승에 문태영의 맹활약과 함지훈의 김종규 참교육(?)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긴 했어도 김진 감독의 경기 운영 능력에도 문제가 있었다는게 당시 팬들의 생각이었다.
[19]
배재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김영기 KBL 신임 총재는 국가대표로 활약한 경기인 출신이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과 1964년 도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1984년 LA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KBL 총재의 역사와 같았으며 2014-2015 시즌에 다시 돌아온 김영기 총재는 대한농구협회 이사와 부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냈다.
[20]
김진 감독은 2013-2014 시즌 정규 리그 우승을 포함해서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양상문 감독은 2014 시즌 중 부임해서 최하위에서 4위로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을 포함해서 2016 시즌에도 포스트 시즌을 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21]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코칭스테프와 선수단에서 LG 출신은 김진 감독과 현주엽 선수 그리고 조상현 선수였다. 그 시절 김진 감독은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현직 감독이었고 현주엽 선수는 코리아텐더 맥스텐 소속이었고 2001-2002 시즌 이후 상무에 입대를 했으며 조상현 선수 역시 2001-2002 시즌 이후 SK 나이츠 이후 상무에 입대를 했다.
[22]
현주엽 선수는 코리아텐더 맥스텐 소속이었고 2000-2001 시즌 이후 상무에 입대를 하면서 상무 소속이었고 조상현 선수 역시 2001-2002 시즌 이후 SK 나이츠 이후 상무에 입대를 한 뒤 상무 소속이었다. 이 시절 금메달에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의 금메달과 함께 병역 면제의 혜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2년 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이 흑역사는 바뀌었다.
[23]
당시 명칭은 고양 오리온스였고 이 명칭은 2015-16 시즌부터 해체 시기까지 이어졌는데 팬들은 13-14 시즌부터 15-16 시즌까지 유니폼이 보라색에 회사 로고인 오리온 그룹이 유니폼에 새겨지면서 부른 명징이다.
[24]
14-15 시즌 KBL 통합 우승 포함 KBL 첫 플레이오프 3년 연속 우승으로 역대급 팀이었던
울산 모비스는
서울 SK 나이츠와
원주 동부 프로미가 같이 우승 후보로 경쟁을 했으나 넘을 수 없는 태양이었다. 마침내 15-16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3전 전승으로 왕조를 하야시키면서 이해 14년 만에 KBL 플레이오프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25]
2015년
9월 17일
동부 VS LG 전 프리뷰이다.
[26]
결승전은 상무였다. 1년 전 추일승 감독이 이끌었던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가 2015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KBL 팀으로 유일하게 정상에 올랐다.
[27]
만수라 불렸던 유재학 감독의 흑역사 외국인 중 하나다. 김진 감독의 설명을 보면 팀 동료와의 신뢰가 좋았다. 외곽 슈팅이 뛰어난 반면 골밑 수비를 못했다. 이 선수를 잘 써먹은 건 김승기 감독
[28]
이 트레이드는 각종 농구기사와 농구 커뮤니티에서 보면 김 감독이 하기보다 구단에서 먼저 했던 게 알려졌고 트레이드도 LG보다 kt가 우선 추진을 했다. 트레이드 당시 김진 감독은 kt가 조성민을 먼저 내놓은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29]
이후 LG 구단은 김진 후임 사령탑을 당초 전희철 SK 코치나 서동철 KB 감독 대신 LG 출신을 이유로 현주엽과 조성원을 연달아 선임했으나 암흑기만 더 길어지게 되었다.
[30]
재미있는 건 시즌 개막 미디어데이 때 10개 팀 감독 중 유일하게 김진 감독만이 KGC를 우승 후보로 꼽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안양 KGC는 16-17 정규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플레이오프 준결승에 직행했고 통합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31]
2015-16 시즌에는
울산 모비스 상대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다.
[32]
김진 감독은 2014년 08월 형제 야구의 대학 동문이자 부산 출신인
양상문 감독님과 이천 시대 첫 번째의 LG 스포츠단 사령탑이었다.
[33]
2016-2017 시즌 개막전에 창단 첫 정규 리그 우승 시절의 구단 단장은 이 시즌 개막전에 갑작스럽게 정들었던 구단과 팀을 떠나게 되었다. 예전 동양 시절 정태호 단장이 떠난거처럼 된 분위기였다.
[34]
물론 허훈은 kt 역대 최저성적인 10승 44패를 당했던
조동현이 뽑았고
조성민의 트레이드도 LG 프런트가 먼저 했지만 자세히 알고 보니 kt 프런트가 이미
조성민을 먼저 내 놓았다. 2017년 01월 31일 트레이드 이후 김 감독은 이렇게 회고를 했다.
[35]
kt에서는 연고 고등 출신인 양홍석을 원했지만 발표는 허훈을 더 원한 설이 뜨기도...
[36]
한마디로 현주엽은 지도자로서 복사하여 붙여넣기씩으로 전임 감독의 유산이라는 거센 비판이 있기도 했다.
[37]
이것은 현주엽이 그야말로 복사하여 붙여놓기식 농구였다. 사실 LG 팬들에게 현주엽이라는 슈퍼 스타에게 절대로 좋은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부임 초기와 김시래 선수의 상무 입대로 인해 고전했던 그 시절은 비판했지만 김진 감독님을 더 머리숙여 고마워한다.
[38]
19-20 시즌 종료 이후 13-14 시즌 정규 리그 우승 멤버 중 유일하게 생존한 선수는 감독 생활 중 모험으로 걸었던 포인트 가드인
김시래 선수였다. 하지만 20-21 시즌 중 삼성으로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겪으면서 13-14 시즌 정규 리그 우승 멤버들은 8년도 지나지 않은 채 모두 이별했다. 18-19 시즌 이후 김종규는 FA로 이적을 했고 19-20 시즌 이후 김시래보다 1년 전 영입했던
양우섭과
유병훈도 모두 FA로 이적했다. 정규 리그 우승 멤버가 아니지만 이후 입단한 김진 감독과 강양택 수석 코치의 제자로는 신인왕
정성우마저 20-21 시즌을 끝으로 FA 때 공교롭게도
서동철 감독과 전 주장이었던
김영환이 있는 kt로 이적했다. 결국 임기만료 때 같이 했던
박인태 정도가 있는데 큰 성장을 못한점을 보면 김진 감독의 주축 제자들이 모두 타구단의 간판으로 활약한 점을 보면 사실상 해체로 보아야 한다.
[39]
대구 동양 시절 프런트는 심용섭 단장이고, 창원 LG 시절 프런트는 공교롭게도 창단 멤버였던 한상욱 단장(13-14 시절 사무국장)으로 팬들이 알렸다. 심용섭 전 동양 단장은 이충희와 김상식의 흑역사에 있었고 추일승 감독은 끈기로 버티면서 떠난 이후 오리온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감독이 장수하기 어려우며 지원도 열악한 과자업계 팀인 동양-오리온에서 소처럼 묵묵하게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한 이후 구단의 신뢰를 받으면서 15-16 플레이오프 우승을 했다. 공교롭게도 김진 감독은 대구 동양의 영웅이었는데 추일승 감독은 고양 오리온의 영웅이 된 격이다. 한상욱 LG 단장은 창단 시절부터 스타 출신 농구 선수를 감독으로 두며 대만 리그 감독이었던 이충희 초대 감독 영입에 공이 컸지만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현주엽 감독 선임으로 인해 큰 비난을 받고 있다. 현주엽 선임의 최대 지목자로 최고 스타인 김종규 사태와 함께 KBL 최고인기인 LG의 과거 역사를 하루아침에 몰락시키면서 결국 전희철 코치와 서동철 감독을 놓친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LG 세이커스 감독 부임 이후 대구 연고 팬들이 김진 감독을 따라 LG 팬이 되기도 했다.
[40]
명장이라서 그런지 농구인 대다수가 놀라워했다.
[41]
후배 전창진 감독이 3년 전에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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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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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중 사퇴
[44]
1위
유재학, 2위
전창진, 4위
유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