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헌의 수상 및 명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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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농구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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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박재헌 朴載憲 / Jae-Hoen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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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3년 4월 20일 ([age(1973-04-20)]세) |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1]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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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200cm| 체중 97kg | |
직업 |
농구선수(
센터 / 은퇴) 농구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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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
학력 |
서울대방초등학교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Artesia H.S. (졸업) UC 데이비스 (자퇴)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 / 졸업)[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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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입단 | 1997년 창원 LG 세이커스 창단멤버 | |
병역 | 공익근무요원 소집해제[4] | |
등번호 | 33[5], 8[6], 54[7], 14[8] | |
소속 | <colbgcolor=#eeeeee> 선수 |
창원 LG 세이커스 (1997~2004) 서울 SK 나이츠 (2004~2006) |
감독 |
청주 KB 스타즈 (2015 / 대행) [9] 창원 LG 세이커스 D리그 (2019~2020, 2021~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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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
청주 KB 스타즈 (2013~2015) 청주 KB 스타즈 (2015~2016 / 수석코치) 창원 LG 세이커스 (2017~2020) 창원 LG 세이커스 (2020~2021 / 수석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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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였으며, "캘리포니아 특급"이란 별명으로 KBL에 이름을 남겼던 선수였다.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농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선택하였다. 선수 생활이 한창이던 33세 때 미국 영주권 만기 문제로 인해 캘리포니아로 떠나면서 아쉽게 선수 생활을 마쳤고, 코치로도 활약했다.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멤버이자 창단 주장이었고, 2004년까지 활약한 이후 2017년에는 은퇴 이후 무려 13년만에 코치로 돌아온 리얼 LG 맨으로 사실상 LG의 프랜차이즈 스타[10]로 알려졌다.
1.1. 고교-대학 시절
서울 대방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여, 전희철, 김병철 등과 함께 선수 생활을 했다. 허재의 모교이기도 한 용산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농구를 그만뒀다.미국 학교 생활 중 우연히 학교 관계자 눈에 띄어 Artesia 고교에 진학하면서 농구를 다시 시작했다. JAY PARK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전미 고교농구 최우수 선수였던 에드 오배넌 형제와 함께 Artesia 고교의 돌풍을 주도하였다.[11]
고등학교 졸업 후 UC 데이비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연세대에게 서장훈을 빼앗기고 발을 동동 구르던 고려대 박한 감독의 제안을 받고 귀국해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93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12] 휘문고 시절부터 한국 농구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온 서장훈과 달리 박재헌은 국내에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선수다 보니 소문이 또다른 소문을 낳곤 했다. 전미 최고의 고교 선수 에드 오배넌[13]과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무명의 Artesia 고교를 캘리포니아 주 최강으로 이끈 컨퍼런스 No.3 수준 센터. 여기까진 진실이나, 미친듯한 서전트로 림을 부서버릴 듯이 덩크를 한다는 등 이런저런 호들갑이 좀 있었다는 듯. 심지어 박재헌이 가세한 고려대를 1993년 12월에 열리게 될 1993-94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로 꼽는 전문가가 나타나기도 했다.
유례 없는 관심 속에 1993년 3월 23일, 박재헌은 1993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2회전 명지대와의 경기에서 국내 데뷔 무대를 가졌고, 팀은 대승했지만 주전 센터로 나선 박재헌은 8득점 8리바운드의 평범한 스탯에 그쳤다. 같은 날 데뷔전을 치른 서장훈이 25점 9리바운드의 압도적 활약을 펼친 것과 많이 비교되긴 했지만, 이제 겨우 첫 경기고 이틀 후 연세대와의 맞대결 때 박재헌의 진면목이 나올 것이란 기대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승자 준결승에서 고려대와 맞붙은 연세대는 87:69로 완승을 거뒀고, 양교 기둥 센터 중 서장훈이 20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한 반면 박재헌은 7득점 2리바운드의 초라한 기록만 남겼다.
MBC배 이후 여름 훈련기간 내내 절치부심한 박재헌은 이후 모두가 아는 수비형 센터로 완벽하게 변신하면서 약점을 완벽히 상쇄하였고, 전희철-박재헌 더블포스트의 활약 속에 고려대는 라이벌 연세대, 중앙대를 각각 격파하면서 9월과 12월 1993 대학농구연맹전 1, 2차 연맹전을 모두 석권했고 2차 연맹전은 중앙대와 공동 우승하며 시즌 2관왕에 오른다. 비록 소문 속의 특출난 탄력이나 화끈한 공격력은 없었지만 다른 대학팀 센터들보다 월등한 프레임을 적절히 활용해 몸싸움으로는 서장훈과도 비등할 정도였고, 무엇보다 탁월한 박스아웃으로 리바운드를 충실히 잡아준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맘 놓고 중거리슛을 쏠 수 있었다. 박재헌의 헌신 덕분에 고려대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도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리그 4위로 8강까지 진출한다.
재미교포 출신 선수라는 특이사항에 잘 생긴 외모, 유창한 영어 실력, 성실함 그리고 본인의 입학 직후 소속팀 고려대가 대학 농구 강호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한국 농구계에 새로운 화제거리가 되었고,1993-94 농구대잔치와 같은 시기에 방영된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박재헌을 롤모델로 한듯한 재미교포 선수 '마이클 최'라는 역할이 나오기도 했다.
1994년 3월 열린 MBC배 결승에서 박재헌은 서장훈을 육탄방어하며 전시즌 농구대잔치 우승팀인 연세대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하였고 박재헌은 MVP까지 수상한다. 1994년 한해 동안 전희철과 현주엽이 국가대표에 연이어 차출되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박재헌은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등 1994 대학농구연맹전 1, 2차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데 기여하지만, 국가대표 멤버들이 모두 복귀한 1994-95 농구대잔치부터는 벤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당시 고려대 박한- 임정명 코칭스탭은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전희철- 현주엽의 베스트 5만 주구장창 돌리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박재헌 등 지나치게 훌륭한 벤치 멤버들은 웬만큼 가비지 타임이 나지 않으면 출장 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고려대가 대승하는 경기에서 마지막 5분 정도씩만 뛰면서 겨우겨우 감을 이어가던 중, 농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연세대 전에서 서장훈의 마크맨으로 깜짝 출장하게 된다.
1995년 고베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명지대 진성호 감독은 서장훈이 빠진 유니버시아드팀에 고려대 백업센터 박재헌을 선발하면서 전체 엔트리 12명 중 고려대 선수만 6명(박재헌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전희철, 현주엽이 뽑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6 시즌, 전희철이 졸업하면서 다시 주전 센터가 된 박재헌은 미국에서 갓 귀국한 서장훈을 잘 마크하며 고려대의 1996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우승에 기여한다. 이렇게 박재헌의 대학 시절은 마무리되고,동기이자 국가대표팀 포워드 양희승과 같이 신생팀인 LG세이커스에 입단하게 된다.
1.2. 프로 시절
선수 초년인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14][15] |
선수 말년인 서울 SK 나이츠 시절 |
대학 시절 만년 후보였던 선수가 프로에서 얼마나 하겠냐 싶었지만, KBL 데뷔 후 박재헌은 180도 달라진 모습과 본토 미국 농구의 탄탄한 기본기를 사용하며 1997-98 시즌 신생팀이던 경남 LG 세이커스 돌풍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이야 무능한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충희 감독이지만 이 때만 해도 KBL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던 명장으로 손꼽혔는데, 주전 라인업 중 버나드 블런트를 제외하곤 모두 수비에 일가견 있는 선수들과 로버트 보이킨스로 구성하면서 원조 "짠물농구"를 통해 팀을 창단 첫 시즌에 정규리그 2위까지 올려놓았다.
특히 박재헌은 고려대 벤치 시절의 울분을 토해내는 듯 게임당 평균 30분 이상 출전하며 적극적인 몸싸움으로 제이 웹(201cm, 대전 현대), 존 스트릭랜드(200cm, 수원 삼성) 등 외인 센터들을 상대했고, 덕분에 다른 팀 장신 외국인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았던 골밑 파트너 로버트 보이킨스(194cm)[16]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4강에서 허재의 기아를 만나 패했으나, 박재헌은 1997-98 시즌 KBL 기량발전상 및 수비 5걸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98-99 시즌에는 다소 부족한 기량의 파트너 아미누 팀버레이크(202cm)와 함께 골밑을 지키면서도 팀을 정규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고, 박재헌 개인은 2시즌 연속 수비 5걸에 이름을 올리며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99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회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그시절 저녁뉴스 경기 인터뷰는 항상 승리의 주역이었던 박재헌이었다 .
2000-01 시즌까지 마친 후, 재미교포 1.5세대임에도 병역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였고 부상 재활까지 마친 후 2003-04시즌 창원LG로 복귀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골밑이 완벽히 외인들 차지가 되어버린 후였다. 골밑에서 박재헌은 주전 센터로서 출장시간이 대폭 감소하고 만다. 01-02 시즌 이후부터 서장훈, 김주성을 제외하곤 주전으로 뛰는 토종 빅맨은 찾아볼수 없었다. 2003-04 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박재헌은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했고 2005-06 시즌 종료 후 박재헌이 갑자기 은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유는 미국 영주권 유지를 위한 영구 귀국.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간 박재헌은 고려대 입학 후에도 미국 영주권을 유지하며 비시즌마다 미국을 오가고 있었는데, 2005년 미국 입국 당시 실제로 미국에 거주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미국 영주권을 박탈하겠다고 경고하였다. 박재헌은, 비록 한국에서 병역 의무까지 완수했음에도 결국 미국에서의 생활을 선택하고 서울 SK 나이츠에서의 잔여 연봉을 포기한 채 은퇴,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서장훈 이후 센터가 약해졌지만 서울 SK는 백업센터진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고 김선형과 최부경이 입단하기 전까지 플레이오프 연속 탈락 기록을 이어나갔다.
2. 시즌별 성적
역대 기록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2점슛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슛 |
1997-98 | LG | 45 |
271/471 (57.54%) |
1/9 (11.11%) |
80/105 (76.19%) |
625 | 249 | 53 | 69 | 28 |
1998-99 | 30 |
113/236 (47.88%) |
3/10 (30.00%) |
49/64 (76.56%) |
284 | 155 | 36 | 25 | 17 | |
1999-00 | 39 |
91/182 (50.00%) |
0/9 (0.00%) |
26/42 (61.90%) |
208 | 128 | 32 | 27 | 17 | |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2점슛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록슛 |
2003-04 | SK | 21 |
10/27 (37.04%) |
1/4 (25.00%) |
0/2 (0.00%) |
23 | 22 | 8 | 2 | 3 |
2004-05 | 30 |
27/62 (43.55%) |
0/2 (0.00%) |
11/15 (73.33%) |
65 | 44 | 10 | 9 | 3 | |
2005-06 | 31 |
17/34 (50.00%) |
1/6 (16.67%) |
11/15 (73.33%) |
48 | 32 | 6 | 13 | 3 | |
KBL 통산 (6시즌) |
196 |
529/1012 (52.27%) |
6/15 (40.00%) |
177/243 (72.84%) |
1,253 | 630 | 145 | 145 | 71 |
2.1. 국가대표
1997-98 시즌 창원 LG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1998 아테네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발되지만, 이 때 무릎 연골 수술을 받으면서 최종 엔트리에선 빠진다. 이로 인해 중앙대 1학년 센터 김주성이 국가대표팀에 대신 합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도 역시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 회복이 덜되어서 역시 합류하지 못했고, 인천 대우 제우스의 토종센터 이은호가 대신 합류하였다.연이은 부상으로 인해 박재헌의 국가대표팀 출전은 1999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되었다. 전희철이 공익근무로 인해 국가대표팀 차출이 안되면서[17] 대표팀 골밑은 부동의 주전 현주엽- 서장훈에 백업으로 박재헌, 이은호, 정경호로 구성되었는데, 박재헌은 이들 백업센터 중엔 언제나 No.1이었다.
3. 은퇴 후
은퇴 후 가족들이 거주하던 캘리포니아로 돌아갔고 이후 컴퓨터 관련 회사에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시작해 많은 사회 경험을 쌓았지만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4. 지도자 생활
2013-14 시즌을 앞두고 WKBL의 전통있는 팀인 청주 KB 스타즈의 신임 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모교 선배인 서동철 감독의 요청 속에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이후 2015-16 시즌 직전에는 수석코치로 승진하여 서동철 감독을 보좌하는가 하였으나, 서동철 감독이 십이지장 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면서 갑작스레 ~감독대행~ 으로서 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감독 부재 속에 시즌 내내 고전하던 청주 KB 스타즈였지만 시즌 막판 극적인 7연승을 달리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해피엔딩으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지만 챔피언결정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서동철 감독과 함께 팀에서 물러났다.
2017년 4월 27일 창단멤버 출신으로 주장을 맡았던 친정팀인 창원 LG 세이커스 코치로 부임하였다. 당시 후배인 현주엽 감독의 요청 속에 센터들을 맡으며 팀이 2018-2019 시즌부터 D리그를 운영하면서 간간히 D리그에서도 감독역할을 했다.
3년 뒤 현주엽 감독의 성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조성원 감독을 직접 보좌하기 위해 도울 수석코치로 팀에 적응했고, 선수단 지도도 좋은 평이었다. 하지만, 팀 성적 최하위권과 함께 김동량 선수의 음주사건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면서 벌금을 낸 흑역사도 있다.
2021-22 시즌에는 D리그 감독을 맡았지만,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결국 새로운 코칭 스태프가 구성되면서 물러났다.
5. 플레이 스타일
당시 국내 센터 중 거의 최고 수준으로 넓은 어깨, 단단한 하체 등 튼실한 몸을 바탕으로 KBL 초창기 외인 센터들을 잘 막아냈다. 1997-98 시즌에는 대학시절에 보기 힘들었던 중거리 슛을 전희철 급으로 팡팡 터뜨리며 공격력까지 만개, 평득 13.9점을 올리며 팀 내 득점 3위에 오르기도 했다. 탄력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골밑에서 성실하게 본인 책임을 다해 움직이는, 착실하고 기본기 좋은 센터였다고 평가받는다.6. 역대 프로필 사진
창원 LG 세이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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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 시즌 (코치) | 2021-22 시즌 (코치) |
7. 관련 문서
[1]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2]
귀국 후에도 주소지를 미국에 두고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던 중,
2006년 미국 이민국의 영주권 박탈 경고(미국 국적임에도 미국에서의 소득이 없었던 게 문제가 되었다.)를 받았고, 고민 끝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였다.
[3]
UC 데이비스 1학년을 마치고, 고려대 신입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바람에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전희철,
김병철의 1년 후배로 입학하게 되었다.
[4]
재미교포 1.5세대임에도 병역 해결을 위해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5]
군 입대 이전 창원 LG 시절
[6]
군 제대 이후 창원 LG 시절
[7]
04-05 시즌 서울 SK 시절
[8]
현역 마지막 시즌 서울 SK 시절
[9]
서동철 감독 재임 중 입원으로 인한 대행.
[10]
원 클럽 플레이어는 아닌데, 30대 시절에 SK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물론 LG에서 오래 선수 생활을 했기에 그의 상징 구단은 사실상 LG다.
[11]
NBA스타
제임스 하든도 Artesia 고교 출신이다.
[12]
일찍부터 미주 교포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박재헌을 박한 감독이 눈여겨 보고 있었다고 한다.
[13]
그는 1991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로 진학하여 4학년 때인 1994-95 시즌에 농구부를 20년 만에 우승시키는 데 기여했고, 졸업 후 NBA 드래프트 전체 9번으로 뉴저지 네츠에 입단했으나 마른 체형, 부상, 향수병 등의 이유로 슬럼프에 빠져 2년 동안 평균 5.4점을 기록했고, 1997년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몇 게임 못 뛰고 올랜도 매직으로 또 트레이드됐으나 얼마 못가 방출됐다. 이후 유럽 리그를 주로 전전하다가 2004년에 은퇴한 뒤,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자동차 딜러로 근무해왔다. 동생 찰스도 1997 드래프트 때 디트로이트에 전체 31번으로 선발된 이래 2013년까지 유럽, 일본 등지의 여러 팀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일본 농구 팬들 사이에선 좀 지명도가 있다.
[14]
초년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데 군 제대 이후였던 2003-2004 시즌에 찍은 사진이다.
[15]
거기다가 박재헌은 선수 초년시절에 33번을 달았었다.
[16]
단신이었지만 서전트 점프가 무려 101cm에 달하는 초고탄력 빅맨이었다.
[17]
상무와는 다르게 공익근무 중인 선수는국제대회 출전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