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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16:50:11

국윤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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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麴允
(? ~ 316)

서진의 인물. 자는 불명. 양주(凉州) 금성군(金城郡) 출신.

2. 생애

영가 5년(311년) 6월, 유총이 낙양을 함락하고 장안으로 도망치려던 회제 사마치를 붙잡아 황궁에 유폐시켰다. 뒤이어 유총은 평서장군 조염, 안서장군 유아(劉雅)를 보내 장안도 공격했다. 장안을 지키던 남양왕 사마모는 병졸과 장수들이 모두 흩어져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투항했으나, 하내왕 유찬이 그를 살해해버렸다. 이에 당시 안이호군, 시평태수를 지내고 있던 국윤은 빙익태수 삭침(索綝), 빈양현령 양숙(梁肅)과 함께 안정(安定)으로 도망쳤다.

영가 5년(311년) 10월, 국윤 등은 안정태수 가필과 더불어 진나라 황실의 부흥을 모의하고, 가필을 평서장군으로 추대해 50,000 군사를 일으켰다. 이 소식에 한나라에 항복했던 옹주자사 국특(麴特), 신평태수 축회(竺恢)도 호응하여 100,000 군대를 이끌고 이들과 합류하였다. 가필, 삭침, 국특 등이 유찬을 포함한 중산왕 유요, 조염, 유아 등을 모두 무찌르고 한나라의 양주자사 팽탕중(彭蕩仲)을 죽이자, 유찬은 평양(平陽)으로 달아나고, 유요는 장안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이때 진왕 사마업을 모시고 장안으로 향하던 염정의 무리도 가필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영가 6년(312년) 4월, 가필이 장안을 포위하고 유요가 보낸 군대를 수차례 격파하자, 유요도 장안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주했다. 가필은 장안에 입성하여 옹성(雍城)에 머물고 있던 진왕 사마업을 모셔와 황태자로 옹립하고, 행대(行臺)를 세운 후 대사면령을 내렸다. 가필은 옹주자사, 정서대장군에 올라 병권을 맡았고, 염정은 태자첨사에 임명되어 백관을 통솔하였다.

영가 6년(312년) 12월, 죽은 팽탕중의 아들 팽천호(彭天護)가 가필을 습격해 죽이니, 사마업은 국윤을 옹주자사에 임명하였다. 당시 국윤은 전횡을 부리는 염정을 제거하고자 했는데, 때마침 염정이 경조태수 양종(梁綜)과 다투다 양종을 살해하자, 국윤은 무이호군 삭침, 빙익태수 양위 등과 힘을 모아 염정을 공격해 장안에서 쫓아냈다.

건흥 원년(313년) 4월, 평양에 볼모로 붙잡혀 있던 회제 사마치가 피살당하자, 진왕 사마업이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국윤은 상서좌복야, 영군, 지절, 서융교위, 녹상서사에 임명되고 옹주자사 직책은 전과 같이 하였다. 그때 한나라에서는 중산왕 유요, 사예교위 교지명, 평서장군 조염을 파견해 수만 대군으로 장안을 침공해왔다. 국윤은 황백성(黃白城)에서 이들을 막고 여러 번 항전했으나 번번이 격파당했다.

건흥 원년(313년) 9월, 조정에서 경조윤 삭침을 정동대장군에 임명하고 국윤을 구원케 하였다. 삭침의 군대가 황백성으로 출발하자, 유요는 조염에게 5,000 기병을 주어 장안 외성을 습격해 탈취하였다. 민제 사마업은 사안루(射雁樓)로 대피했고, 조염은 외성을 점거한 채 서진군 1,000명을 죽이고 여러 군영을 불사른 뒤 소요원(逍遙園)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아성(阿城)을 진수하던 장군 국감(麴鑒)이 장안을 구원하기 위해 5,000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조염은 철수하여 유요의 군영으로 복귀했다. 국감은 그 뒤를 추격했다가 유요의 반격을 받고 영무(零武)에서 대패하였다.

건흥 원년(313년) 11월, 싸울 때마다 승리한 유요는 자신이 완전히 승기를 잡은 것이라 믿고 방비를 게을리 하였다. 이때 국윤이 유요군을 공격해 대파하니, 교지명은 전사하고 유요는 패잔병을 수습해 평양으로 돌아갔다.

건흥 2년(314년) 6월, 유요, 조염, 장수 은개(殷凱) 등이 수만 군대를 거느리고 침구하여 국윤을 격파했다. 국윤은 잠시 물러났다가 밤에 은개의 진영을 습격해 적장 은개를 죽이자, 유요는 군대를 돌려 회현(懷縣)으로 향하면서 목표를 장안 점령에서 하내군 공략으로 바꿨다. 얼마 뒤, 하내를 장악한 유요가 조염을 보내 북지군(北地郡)을 공격하니, 국윤은 청백성(青白城)에서 조염군을 막았다. 조염이 전투 중 중노(中弩)로 발사한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한군은 물러났다.

건흥 3년(315년) 9월, 유요가 대사마에 임명되어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침공을 개시하였다. 민제 사마업은 국윤을 대도독, 표기장군에 삼아 유요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유요는 빙익태수 양숙을 격파하고 빙익군을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나아가 상군(上郡)을 공략했는데, 국윤은 일단 영무(靈武)에 진을 쳤으나 병력이 약해 감히 나아가지 못 했다. 이에 민제 사마업은 남양왕 사마보에게 서신을 보내 군대를 징병하여 국윤을 원조케 하였다.

건흥 4년(316년) 7월, 유요가 군대를 돌려 북지를 포위하자, 북지태수 국창(麴昌)이 구원을 요청했다. 국윤은 보•기 30,000여 명을 이끌고 북지로 향했다. 그때 유요가 꾀를 내어 성 주변에 불을 질러 그 연기가 하늘을 뒤덮게 하고, 북지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대장인 국윤부터가 이 소문을 믿기 시작하면서 국윤의 군대는 두려움에 휩싸여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이내 반석곡(磻石谷)에서 유요의 공격을 받고 궤멸당했다. 국윤은 영무로 패주했고, 국창은 성을 빠져나와 포위망을 돌파해 장안으로 도주하였다. 이로 인해 북지군은 유요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국윤은 성품이 어질고 후덕하였으나, 위엄과 결단력이 없어 오피(吳皮), 왕은(王隱)과 같은 무뢰배에게도 중요한 관직을 내렸다. 신평태수 축회, 시평태수 양상(楊像), 부풍태수 축상(竺爽), 안정태수 초숭(焦嵩)에게도 모두 시중이나 상시가 더해졌고, 심지어 세력이 작은 오주(塢主)마저도 은 인장을 하사해 장군으로 높여 주었다. 국윤은 후히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결집하기를 희망했으나, 정작 그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오히려 인심을 잃었다. 결국 강족은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유요의 연이은 장안 공략으로 관중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유요가 승세를 몰아 장안으로 진격해오고 관중 지역이 크게 요동치자, 국윤은 안정태수 초숭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평소에 국윤을 비판하던 초숭도
"국윤이 위급하다면 구원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라며 안정에서 군대를 일으켜 국윤과 삭침을 도왔다.

건흥 4년(316년) 8월, 유요군이 경양(涇陽)에 이르러 위수 북쪽의 성들을 모조리 휩쓸고 건위장군 노충(魯充), 산기상시 양위(梁緯)를 붙잡아 죽인 후, 마침내 장안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때 국윤의 급보를 받고 모인 안정태수 초숭, 신평태수 축회, 홍농태수 송철(宋哲)의 군대가 산기상시 화집(華輯)의 지휘 아래 패상(霸上)에 주둔했지만, 유요군이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남양왕 사마보 역시 장안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장군 호숭(胡崧)을 파견하였다. 호숭은 장안의 영대(靈臺)에서 유요군을 한 차례 격파하였으나, 장안의 진나라 조정이 다시 세워지면 국윤과 삭침이 정권을 잡으리라 여기고 군을 괴리(槐裡)로 철수시켰다. 이를 본 유요가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장안의 외성을 무너뜨리니, 국윤과 삭침은 장안성의 소성(小城)으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장안성의 기근은 더욱 심해져, 쌀 시세가 1두에 금 2냥으로 폭등하였고, 죽은 자는 절반이 넘었다.

건흥 4년(316년) 11월, 국윤은 태창(太倉)의 곡식이 거의 다하자, 남은 곡식으로 누룩 수십 덩이를 만들고, 그것을 잘게 빻아 죽을 끓여 민제 사마업에게 진상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것마저 다 떨어지니, 민제 사마업은 투항을 결심하고
"짐의 일을 그르친 자는 국윤과 삭침 두 공이로다!"
라 한탄하였다. 이후 사마업은 국윤 등 공경 이하의 관리들과 함께 유요에게 투항하여 그의 군영에 머물다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사마업이 평양에 이르러 황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자, 한나라의 황제 유총은 친히 광극전(光極殿)에서 사마업을 맞이하였다. 국윤은 이 치욕스런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유총은 대로하여 그를 끌어내 감옥에 가두게 했다. 국윤은 이내 감옥에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유총은 자결한 국윤의 충렬을 아름답게 여겨 거기장군으로 추증하고, "절민후(節愍侯)"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여담으로 장안을 구원하기 위해 모였다가 진군하지 않던 관서의 구원군은 장안 함락 후 곧바로 유요에게 토벌당해, 초숭 등 여러 군의 태수들은 전사하고, 화집은 남산(南山)으로 도망쳐 몸을 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