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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23:22:15

황하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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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 문명
黃河文明
Yellow River Civilization
파일:Yellowrivermap.jpg
황하 유역
기원전 1900년 ~ 기원전 1400년[1]
위치 중국 황하 일대

1. 개요2. 역사3. 관련 유물

[clearfix]

1. 개요

/ Yellow River civilization

중국 황하 중· 하류 유역의 황토 지대에서 발달한 세계 4대 문명, 곧 구대륙에 있었던 문명의 요람 중 중 하나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은 자연지리적인 장벽이 없었기에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지만, 황하 문명은 타클라마칸 사막 히말라야산맥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유라시아의 다른 주요 문명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발전 방향을 보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한편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황하 문명이 다른 주요 문명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청동기의 사용이 문명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19세기 유럽의 사학계에서는 한때 그런 기준이 있었지만, 당시 서유럽이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심 기준이기에 현대 학계에서는 청동기 사용 여부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4대 문명 대신 사용하는 개념인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에는 아메리카 대륙 문명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석기 시대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속칭 세계 4대 문명과 함께 문명의 요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다만 청동기가 문제가 아니라 문자, 도시, 법률의 발달 등 일반적으로 문명의 요소라 여겨지는 것들의 발굴연대가 아무래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에 비해서 늦기는 하다. 이는 당대 중국 북부가 빽빽한 밀림 지대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상대적으로 평지가 많아 개척이 쉬웠던 타 지역과는 달리, 건물 하나를 지어올리려고해도 먼저 을 밀어내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했던 까닭에 상대적으로 문명의 형성이 어려웠던 것이다,[2] 그래서 중국에서도 하상주단대공정을 시행하여 중국 문명의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이 자체는 중국 학계로부터 역사 왜곡으로 여겨져서 맹렬한 비판을 받고있다.[3]

주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황하가 범람원을 형성하는 지금의 산시성, 허난성 부근이다. 황하 문명의 근거가 되는 황하 근방은 홍수가 수시로 일어나 흙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이때 농사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도 같이 실려오기 때문에 농지가 발달하였고 또한 이러한 범람은 관개와 치수 기술, 건축 기술 및 대형 정치 권력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고대 하나라의 전설의 개조인 우임금이 치수를 중시한 것이 고대의 치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허베이성 등 하류 지방에서도 유물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으며, 황하 이외에도 장강 일대나 쓰촨 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추세이다. 현재 중국 학자들은 황하문명보다 빠른 시기 나타난 홍산 문화를 주목하고 있는데, 이 문화의 구성원들이던 요하 유역의 사람들 일부가 기후 등 환경변화로 인해 대량 남쪽으로 이동하여 해당 지역인들을 거의 다 몰아내었고, 이후에 황하 지역에 정착하여 황하 문명을 이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가설에서는 홍산 문화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나[4], 황하 지역에서 오랜 시간 지나면서 황하 문명이 나타났고 황하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갑골 문자가 나타났다고 본다. 왜냐면 홍산 문화의 유물이 시간을 지나면서 장강 유역에서까지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 학계 내부에서는 단순한 문물 교류를 해당 문화권의 진출로 착각했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5]

대표적인 유물로는 청동기, 귀갑[6] 등이 있다.

2. 역사

황하 문명은 신석기 시대 황허강 유역에서 가장 이르게 확인할 수 있는 문화인 난좡터우 문화 및 이를 계승한 츠산 문화[7] 및 페이리강 문화[8], 페이리강 문화에서 분화된 바이지아 문화[9], 다디완 문화[10]로 이어졌다. 특히 츠산 문화의 경우 양사오 문화 초기까지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 및 쓰촨성 등지로의 확장이 집단유전학적으로 처음 확인되는 문화이기에 한장어족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서 중요하다. 이 문화들은 기원전 5000년경 양사오 문화[11]로 모두 통합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농경 문화가 매우 발전한 문화로서 현재의 허베이성, 산시성 등 황하강 중류 유역 전역에 걸쳐 분포하였다. 기원전 3300년경에는 황하강 상류 유역의 현재의 간쑤성에서 마지야오 문화가 분화되었고, 양사오 양식의 토기는 더 서쪽으로 뻗어나가 중앙아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류학적으로 양사오 문화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렇듯 번영하던 양사오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 산동 반도의 재지 신석기 문화인 다원커우 문화(대문구 문화)[12] 일부와 합쳐져 롱산 문화를 이루게 된다. 롱산 문화는 이전 세대의 문화들에 비해 도자기 제작 기술에서 진일보한 문화로서, 도기를 돌려가면서 점토를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할 수 있는 도기 바퀴(pottery wheel)이 처음 등장하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보인데, 195-60년대만 해도 동시대 북중국에서 도기 바퀴가 나타나는 모든 문화 유역권을 롱산 문화의 유역권으로 이해했을 정도였다.[13] 비록 지금은 이 학설이 깨져 황하강 중하류 유역으로 한정되었고 동시대 다른 문화들도 공존했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화인 것은 분명하다. 또 양잠이 기초적으로나마 시행되었으며, 인신공양 흔적이 발견되는 등 상나라 인신공양의 시조 후대 중국 고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된다.

롱산 문화는 기원전 2600년경을 기점으로 후기 롱산 시대로 접어든다. 이 시대에는 인구가 폭증하면서 정착지가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사람들 간의 위계질서 및 계급 차이가 명확해졌다. 도시들은 유력한 수장 집단 및 그 친족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되었으며, 몇몇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한 대도시들이 나타났다. 또한 산동 지방을 제외하면 도시들 간의 전쟁 및 폭력이 두드러졌지만, 국가라고 부를 만한 정치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산동지방의 롱산 문화와 이외 황하강 중류 지방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났으며, 구리의 사용이 눈에 띄게 증가하는 등 청동기 시대로의 전조를 보이고 있다. 이중 황하강 중류의 왕안 3기 유적은 후대의 얼러터우 문화(이리두 문화)와 밀접한 유사성을 보여 왕안 3기 유적의 롱산 문화가 이리두 문화로 진화했음이 입증된다. 또 산동 지방의 롱산 문화는 후일 동이족이라 불리게 될 산동 동이족의 중시조 격인 웨시 문화로 발전한다.

이리두 문화(얼러터우 문화)는 기원전 19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 현재의 허난성 서부 황하 유역에 존재한 청동기 문화로, 최초로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단계에 진입한 문화이다. 중국에서 하나라라고 비정하는 문화이기도 하다. 얼러터우 문화는 총 4단계로 나뉘는데, 이중 3단계 시기가 가장 번영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로 최고 24000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도시를 건설했다. 이외에도 청동의 사용이 확산되어 의식용으로 청동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지배자들을 위한 궁전이 건축되었고, 기타 청동 세공 문화가 발전하였다. 또한 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상형문자들이 최초로 발견되었으나 한자의 원조인 갑골문과의 연결성은 떨어진다. 이리두 문화는 허난성, 산시성, 허베이성까지 확장되었으나, 기원전 1600년경 얼리강 문화가 성립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600년경 성립되어 기원전 1400년경까지 존재했던 얼리강 문화는 일반적으로 중국 최초의 왕조로 확인된 상나라 초기로 여겨진다. 다만 이런 중국 학자들의 추정과는 달리 서양 학자들은 이에 회의적이다.

양쯔강 유역의 지방에도 황하 문명과 병행하여 고대 문명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양쯔강 유역의 문명은 장강 문명(長江文明)이라고 부른다. 장강 문명의 경우 저장성의 량주 고성으로 대표되는 문화들이 무려 얼러터우 문화보다 천년이나 앞서 초기 국가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인정받아 의의가 크다.

이 시기 이전부터 양잠(누에나방)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며, 비단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하 유역의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단 조직은 거의 BC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1. 하나라

기원전 2070? ~ 기원전 1600?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아 공적을 이룬 임금이 임금의 신임을 얻어 후계자로 지목되고, 순 임금 사후 즉위한 우 임금이 세웠다고 하는 왕조. 기록상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했다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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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나라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의 하나라와 달리 실존 증거가 발견되어 전설이 아닌 역사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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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주나라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

황하 문명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청동기와 고대 전차 등을 활용하여 각지로 퍼져나가며 토착민과 이민족을 정복하고 흡수하면서 영향권이 급속히 증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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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유물


[1] 청동기를 사용했고 하나라와 연대가 겹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얼리터우 문화와 중국에서 초기 상나라로 비정하는 얼리강 문화를 기준으로 기재. [2] 비슷한 환경에서 건설된 마야 문명 올멕 문명도 이 때문에 유라시아의 다른 문명에 비해 형성 시기가 현저히 늦다. [3] 중국이 독재 국가라서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중국의 주류 역사학계 고고학계, 인류학계 언어학계 중국공산당이 추진하는 역사 왜곡에 매우 부정적이고, 어용 학자들을 학계에서 철저하게 배척하고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중국 학계의 역사 및 언어, 인류학 관련 연구는 서구권 학계도 인정할 정도로 신뢰도가 매우 높다. [4] 이 언어가 무엇인지는 의문인데, 홍산 문화가 있던 자리가 뒷날 고조선이 건국된 곳이라서 홍산 문화인들의 언어를 원시 한국어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중국 언어학계 고고학계는 고조선으로 비정되는 최초의 문화는 그와 인접한 곳에 있는 다른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와 그 분파로 추정되는 위영자 문화, 그리고 또 그 후계 문화인 십이대영자로 보고 있으므로, 이런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강하다. [5] 일례로,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서 발행한 화폐인 명도전은 제나라 본토인 산동성 일대 뿐만 아니라, 고조선령 지역이었던 랴오닝성 일대와 한반도 등지, 그리고 심지어 오키나와 일본 본토에서도 출토된 바 있는데, 이를 제나라가 이들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한 결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례로는 미국 알래스카 주의 원주민들인 틀링깃족이 17세기에 건설한 유적지를 미국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과정에서 15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제작한 목걸이가 출토된 사례가 있는데, 이 역시도 실크로드를 통해 아시아로 팔려간 목걸이가 어쩌다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손에 넘어간 뒤로 다시 교역을 통해 틀링깃족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 갑골 문자가 기록되어 있는 거북이 배껍질 [7] 기원전 6500년 ~ 기원전 5000년 [8]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5000년 [9] 기원전 5800년 ~ 기원전 5000년, 최초로 도자기에 회화를 칠했다. [10] 기원전 5800년 ~ 기원전 5400년 [11]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 [12] 허우리 문화와 베이신 문화에서 계승되었다. 존속 기간 기원전 4300년 ~ 기원전 2600년 [13] 과거 우리나라 학계에서 고인돌과 동검의 분포도를 고조선의 영역으로 배정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 역시 현재는 반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