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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7:10:23

황보중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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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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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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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皇甫重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로 자는 윤숙(倫叔)으로 옹주 안정군 조나현 출신.

2. 생애

어릴 적부터 침착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으로 재능이 있었다. 사공 장화가 황보중의 재능을 알아보고 천거해 신평태수가 되었다.

303년 7월, 장사왕 사마예가 정권을 잡자 황보중의 동생 황보상은 사마예의 참군, 황보중은 진주자사로 임명받았다. 평소 황보상과 사이가 좋지 않던 이함은 하간왕 사마옹에게 '황보상을 제거하기 위해 황보중을 내직으로 옮기고 황보상이 장안을 지나가는 것을 이용해 붙잡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황보중은 이를 간파하고 상서성에 '하간왕 사마옹이 이함의 참언을 믿고 난을 꾀하고 있으니 진주의 병력을 모아 이함을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올렸다. 하지만 사마예는 최근까지 내전이 많이 일어나서 병사들이 좀 쉬어야 한다며 황보중의 요청을 거절하고 이함을 징소해 하남윤으로 삼았다. 이함은 징소에 응했으나 황보중은 조서를 받들려 하지 않았다.

사마옹이 금성태수 유해(游楷), 농서태수 한치(韓稚) 등을 파견해 4개 군의 병력을 합쳐 황보중을 공격하게 하고, 하남윤 이함, 시중 풍손(馮蓀), 중서령 변수(卞粹)에게 은밀히 연락해 사마예를 암살하도록 했다. 황보상이 이 일을 사마예에게 알리니, 사마예는 이함, 풍손, 변수 셋을 잡아 죽였다. 사마옹은 '사마예가 간신들의 말을 듣고 어진 대신들을 죽였다' 하여 간신 황보상과 양현지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켜 난을 선포했고 성도왕 사마영이 이에 가세하였다.

303년 8월, 사마예는 황보상에게 샛길을 통해 황제가 손수 쓴 조서를 품고 가서 황보중을 공격하던 유해 등에게 군사 행동을 중지하게 하고, 황보중에게는 칙령을 내려 사마옹을 토벌하게 했다. 하지만 유해는 조서를 무시한 채 계속 공격을 감행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생 황보상은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사마옹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 더해서 자신이 섬기던 장사왕 사마예까지 패망해 죽었으나 황보중은 성을 굳게 봉쇄한 나머지 그런 사실도 모르고 굳게 지켰다. 그리고 자신의 양아들 황보창을 동해왕 사마월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사마월은 이미 효산 동쪽에서 사마옹과 만나 화해한 관계로 응하지 않았다.

유해 등은 토산을 쌓아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황보중이 연노병을 앞세워 적들을 사살하고 토산을 점거해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땅굴로 성 안에 진입하려 시도했는데, 이번에도 황보중은 임기응변을 발동해 땅굴을 무너뜨리면서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렇게 3년 동안이나 뭘 해도 함락시킬 수 없자 사마옹은 도저히 힘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 여겨, 황제의 어사를 보내 항복할 것을 명했다. 황보중은 이것이 황제의 본의가 아님을 눈치채고 어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내 동생이 병마를 거느리고 온다 하였는데, 혹시 거의 다 왔는가?
어사는 "그 자는 이미 하간왕께서 살해하셨소"라 답했다. 성을 지키느라 바깥 상황을 전혀 몰랐던 황보중은 뜻밖의 소식에 아연실색하여 곧장 어사를 죽이고는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사마예와 황보상의 사망 소식은 금방 새어나가 순식간에 진주성 안에 퍼졌다. 가망 없음을 깨달은 부하들은 황보중을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사마옹에게 항복하였다.

참고로 사마월의 구원병을 얻는 데 실패한 황보창은 사마월의 명령을 사칭하여 양편(楊篇)과 함께 금용성에서 양황후를 다시 맞아들임으로써 낙양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 처음에는 궁중의 백관들이 이를 사실로 알고 모두 따랐으나, 얼마 안가 황보창의 거짓말이 탄로나면서 황보창은 대신들에게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