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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한삼재도회/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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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단어 소개3. 거리( 14권 포함)4. 지도(64권)5. 본문
5.1. 震旦5.2. 朝鮮5.3. 耽羅5.4. 兀良哈5.5. 琉球5.6. 蝦夷5.7. 韃靼
5.7.1. 몽골어 낱말 (북로역어)
5.8. 女眞5.9. 大冤5.10. 交趾5.11. 東京

1. 개요

화한삼재도회 13권 이국인물(異國人物)의 본문과 소개를 담은 문서이다. 권 제목은 ' 인물'이지만 현대어의 '인물'과는 좀 뜻이 달라서, 개별 인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1] 일본 주변의 지역과 민족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중국은 62~63권, 일본은 65~80권에서 지역별로 더 자세히 다룬다.

13권은 14권 외이인물(外夷人物)과 쌍을 이룬다. 14권 외이인물에 비해서는 일본과 가까운 지역의 민족을 다루고 있다. 14권 권두에서 "外夷は横文字を用ゐて中華の文字を識らず。物を食ふにも亦た、箸を用ゐずして手づから擭み食ふ"(외이는 가로쓰기 문자를 써 중국 문자를 모르고 먹을 때도 젓가락을 쓰지 않고 손으로 집어 먹는다)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한자문화권/ 젓가락 사용 여부를 기준으로 가른 것으로 추측된다. 가령 루손(呂宋)이나 마카오(阿媽港)는 본문에서 언급하길 일본에서의 거리는 대만과 거의 유사하고, 13권의 교지(交趾), 통킹(東京)보다도 가깝다고 나오나 일본과 동일한 문화권으로 여기지 않아 14권으로 분류되어있다.

대만(大寃), 교지(交趾), 통킹(東京) 항목에서는 특산물이 소개된다.

항목의 수는 11개로 많지 않은 편이다. 본문 쪽은 1888년본 기준 46쪽으로 중간 정도 분량이다. 다만 낱말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페이지를 많이 차지하고, 중국(11쪽)과 조선(16쪽)[2]이 장장 27쪽이나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밖의 항목들은 분량이 별로 없다. 류큐(4쪽), 아이누(4쪽), 몽골(3쪽), 여진(2쪽)이 그 뒤를 잇는다. 이들 6개 항목을 제외하고 나면 6쪽이 남고 나머지 5개 항목(탐라, 우량카이, 대만, 교지, 통킹)이 그림과 함께 반쪽 정도의 분량이다.

1715년본과 1888년본의 그림 풍이 유독 눈에 띄게 다른 편이다. 본문 입력에는 대만 편에만 1715년본을 비교 삼아 실어두었다. 아무래도 사람 얼굴이라는 게 그리는 사람에 따라 인상 변화가 심하다 보니까 베껴 그린다고 그렸어도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것 같다.

외국 주제다 보니 와카 인용은 거의 없다. 아이누에 대해서만 와카가 1개 인용돼있을 뿐이다.

이웃 조선의 이덕무가 지은 청령국지(蜻蛉國志)[3]의 이국(異國) 편에서 화한삼재도회 13권의 서술을 대거 인용했다. # 류큐-아이누[4]-대만-안남-동경-(14권)참파-캄보디아 식의 순서조차도 동일하다. 이덕무가 화한삼재도회를 열독했다는 일화가 유명한 것을 보면 아마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2. 단어 소개

파일:hanal.png
조선, 류큐, 아이누, 몽골 항목에서는 이들의 언어도 낱말이 몇 개 소개되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표기는 다음과 같이 낱말의 뜻이 한자로 크게 써져있고 오른쪽에 히라가나, 아래쪽에는 가나 발음에 해당하는 한자가 써져있다. 외국어라서 그런지 본문과는 달리 탁점이 부기되어있다. 단어는 1줄에 4개씩 8줄이 한 쪽을 이룬다. 위 단어는 조선어로 소개된 ' 하늘'의 예인데, 이라 쓰고 오른쪽에 はのる(하노루),[5] 밑에 波乃留라고 되어있다. 몽골어 외에 한국어, 류큐어, 아이누어에서는 가나와 아래 발음 표기 한자가 거의 정확히 일대일 대응되므로 본 문서에서는 발음 표기 한자를 따로 적지 않고 가나만 적었다.

3. 거리( 14권 포함)

지리 내용이기에 '일본에서 몇 리'와 같은 서술이 종종 나온다. 이들 거리는 대체로 '바다로 몇 리'의 형식으로, 직선 거리는 아니고 바다를 통해 이동했을 때의 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6] 직선 거리는 애당초 측정할 수도 없고 별 의미도 없긴 하다.

일본어 위키백과 리(里) 문서를 참고하면 당시 일본의 1는 약 4 km 정도이다.[7] 문서를 보면 정확히는 조금씩 달라졌다고 하는데 이 문서에서의 거리 언급은 그다지 세밀하지 않으므로 대충 4km 정도로 추산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례로 아래 통킹(東京)은 베트남 하노이 일대인데 1600리, 즉 6400km 정도 떨어져있다고 언급되지만 실제 도쿄~ 하노이의 거리는 3600km 가량으로 훨씬 가깝다.[8] 대만은 640리(2560km)라고 나오는데 실제로도 2100km로 좀 유사한 편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베트남을 너무 멀리 잡았다기보다는 대만을 류큐보다도 가까울 정도로 너무 짧게 잡은 것 같다.

14권에는 온갖 전설 속 지역들도 많이 나오는데, 적어도 이런 식으로 거리가 명시된 곳은 '저자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현실에 있을 것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보면 거리가 명시된 곳들 중 환상의 지역은 없다.

이렇듯 현대 기준으로 거리가 정확하진 않지만 멀고 가까운 순서, 가령 네덜란드가 대만보다 멀다든가 하는 순서 관계는 크게 틀리지 않은 편이다. 13~14권의 각 지역의 거리를 모아 가까운 순서대로 정렬하면 다음과 같다. 직접적으로 거리가 명시돼있지 않아도 다른 항목의 지역에 빗대어 '~로부터 며칠 거리' 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들도 좀 있다.



4. 지도(64권)

파일:eastasia.jpg
파일:westasia3.png
64권
북지제적(北地諸狄) 지도[상]
서남제만(西南諸蠻) 지도[하]
지리 내용이지만 지도는 지리부를 참고하라고만 하고 이 권에는 따로 실려있지 않다. 이 문서에서는 참고를 위하여 64권의 지도 중 본 권에서 다루는 항목이 표시된 지도(1715년본)를 첨부한다. 탐라는 작은 탓인지 지도에 표시되어있지 않다. 흐릿하게 표시한 것은 지도에는 등장하지만 13권에는 등장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런데 64권은 주제가 지리이면서도 나라들에 대한 소개는 오히려 13권보다 소략한 편이다.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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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단어 소개3. 거리( 14권 포함)4. 지도(64권)5. 본문
5.1. 震旦5.2. 朝鮮5.3. 耽羅5.4. 兀良哈5.5. 琉球5.6. 蝦夷5.7. 韃靼
5.7.1. 몽골어 낱말 (북로역어)
5.8. 女眞5.9. 大冤5.10. 交趾5.11. 東京

5.1. 震旦

[10][ruby(震旦, ruby=しんだん)]
チンタン(zhèndàn)
중국[11]
별칭: 中國( 중국)/中華( 중화)/支那( 지나)。和名、毛呂古之(もろこし, 모로코시)[12]
파일:jindann.png 五雜俎云禹別天下爲九州三代因之秦分天下爲三十六郡漢分爲十三部一部六郡晉分爲十五道唐十道宋四京二十三路元十一省二十三道大名兩京十四省後因棄安南實十三省也郡共一百六十州二百三十四縣共一千百十六詳于地部中華之圖
中華歷代
天皇氏一万八千年 地皇氏一万千年 人皇氏四万五千六百年
共治天下七万四千六百年謂之天地人三才始定歲月支干晝夜飮食男女
有巢氏百代不記年
未有宮室冬則營窟夏則居櫓巢未有火化食草木之實鳥獸之肉飮血茹毛
燧人氏三万六千年
是時敎人鑚木出火始敎民熟食
伏羲氏在位百十年
蛇身人首是時始有甲曆畵八卦造書契制嫁娶禮分九州第二主名女媧氏伏羲之妹後共十五代一万七千七百八十七年席上腐談云女媧非女主乃男聖也
神農氏在位百四十年
號炎帝人身牛首種五穀日中爲市作酒嘗百草除病後七代至楡岡亡共四百六十六年
軒轅氏在位百年 號黃帝
始垂衣裳作舟樴杵臼弧矢車乘馬構棟宇蒼頡作字隷首造算奚仲造車
以上謂之中古伏羲神農黃帝謂之三皇
(중략)
蒙古高句麗將攻日本國
蒙古北狄討取宋朝改大元國自立爲中華王號世祖皇帝以高麗爲嚮導將討日本先是贈書於日本龜山帝文永中
大蒙古皇帝奏書日本國王朕惟自古小國之君境土相接尙務講信修睦況我祖宗受天明命奄有區夏遐方遠城畏威懷德者不可悉數朕卽位之初以高麗無辜之民久瘁鋒鏑卽令罷兵還其疆域返其旄倪高麗君臣感戴来朝義雖君臣歡若父子討王之君臣亦己知之高麗朕之東藩也日本密邇開國以來亦時通中國至於朕躬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尙恐王國知之未審故遣使持書布告朕志冀自今以徃通問結好以相親睦且聖人以四海爲家不相通好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夫孰所好王其圖之
高句麗書卽高麗也使名潘阜
我國臣事蒙古大國禀正朔有年矣皇帝仁明以天下為一家視遠如邇日月所照咸仰其德今欲通好於貴國而詔寡人云日本與高麗爲隣典章政治有足嘉者漢唐而下屢通中國故特遣書以徃勿以風濤阻險爲辭其旨嚴切茲不獲已遣其官某奉皇帝書前去貴國之通好中國無代無之況今皇帝之欲通好貴國者非利其貢獻蓋欲以無外之名高於天下耳若得貴國之通好必厚待之其遣一介之使以徃觀之何如也貴國商酌焉
其書甚無禮故無返瀚以後使來再三皆追還之蒙古大憤急用兵船九百艘征日本後宇多帝文永十一年
蒙古軍大將
忽敦都元帥 洪茶丘右副元帥 劉復亭左副元帥
高麗三翼軍
金方慶中軍 朴之亮金忻知兵馬事 任愷副使
金侁左軍使 韋得儒 孫世貞
金文庇右軍使 羅裕朴保 潘阜
蒙古軍二万五千 高麗軍八千梢工水手六千七百
船發合浦越十一日至壹岐嵨相戰而復亭中流矢遂引兵還會夜大風雨戰艦觸巖崖多敗金侁隨水死殘黨逃去其不還者無慮一万三千五百餘人翌年建治元年蒙古使杜世忠及高麗使來於鎌倉殺杜世忠梟首之同四年蒙古阿剌罕范文虎率蠻軍十万發江南茶丘忻都率蒙麗漢四万軍發合浦高麗金方慶朴球金周鼎等二十四日而至日本世界村大明浦
伊勢勅使及諸社祈願最切也北條時宗在鎌倉名筑紫武士防戰之蒙軍至壹岐島船軍遭風百十三人梢工三十六人失其所之既而力戰相屬倭兵突進蒙軍大潰茶丘乘馬走免翼日復戰敗績軍中大疫死者凡三千餘人忻都茶丘等累戰不利且阿刺罕病于路不來范文虎亦過期不至皆狼狽旣而范文虎以戰艦三千五百艘蠻軍十餘万至八月朔日適值大風皆溺死屍隨潮汐入浦浦爲之塞可踐而行茶丘范文虎等逃不知行方也生虜三万人於八角島悉斬殺之 唯救干閶莫靑吳万五三八還國汝須語形勢也再三大風以爲伊勢神風以風社勅使風宮世傳蒙古無久利高句麗古久利合戰是也蒙古卽大元其後爲大名所滅
大明太祖皇帝洪武元年日本後光嚴帝應安元年遣使禪僧中津一名絶海玅佐一名汝霖二人有分才謁皇帝獻詩賜和韻
同四年關西親王良懷南朝之宮也菊池武政奉之以爲主遣使書日本國王良懷故大明實以爲國王而後大明使來三於筑紫菊池潜解開之足利義満伏降壽南朝亦和睦
應永八年義満入道道義贈書於大明黃金千兩及器物若干明皇帝以道義封日本國王五年義満薨大明成祖皇帝賜祭文謚恭憲王
後土御門帝文名六年義政遣書於朝鮮求大明國勘合印信大内介義興預之鹿苑院殿義満以來大内介家掌異國徃來事預勘合印信大内於周防國造船令商賣徃來其後後奈良院享祿二十年大内介義隆家臣陶尾張守謀叛而義隆自殺而失勘合印於是止倭船不入
五雜俎に云く、禹、天下を別て九州とす。三代、之に因る。秦は天下を分て三十六郡とす。漢は分て十三部とし、一部ごとに六郡。晉は分て十五道とす。唐は十道、宋は四京・二十三路、元は十一省・二十三道なり。大明の兩京・十四省。後に安南を棄るに因りて實十三省なり。郡、共に一百六十、州は二百三十四、縣は共に一千百十六。地部、中華の圖に詳しき。
中華歷代
天皇氏一万八千年 地皇氏一万千年 人皇氏四万五千六百年
共に天下を治ること、七万四千六百年。之を天地人の三才と謂ひ。始めて歲月・支干・晝夜・飮食・男女を定む。
有巢氏百代。不記年
未だ宮室有らず、冬は則ち營窟し、夏は則ち櫓巢に居る。未だ火化有らず。草木の實・鳥獸の肉を食ひ、血を飮み、毛を[ruby(茹,ruby=くら)]へり。
燧人氏三万六千年
是の時、人に敎て木を[ruby(鑚,ruby=き)]り火[ruby(出,ruby=さ)]して始めて民に熟食を敎ゆ。
伏羲氏在位百十年
蛇身人首。是の時、始めて甲曆有り、八卦を畵がき、書契を造り、嫁娶の禮を制し、九州を分つ。第二主を女媧氏と名づく。伏羲の妹後、共に十五代。一万七千七百八十七年席上腐談に云く、女媧は女主に非らず、乃ち男聖なり。
神農氏在位百四十年
炎帝と號す。人身牛首。五穀を種へ、日中に市を爲し、酒を作り、百草を嘗て病を除ぐ。後七代にして楡岡に至り亡ふ。共に四百六十六年。
軒轅氏在位百年 黃帝と號す。
始めて衣裳を垂れ、舟檝・杵臼・弧矢・車・乘馬を作り、棟宇を構へ、蒼頡、字を作り、隷首、算を造り、奚仲、車を造る。
以上、之を中古と謂ふ。伏羲・神農・黃帝、之を三皇と謂ふ。
(중략)
[ruby(蒙古,ruby=ムクリ)]・[ruby(高句麗,ruby=コクリ)]將に日本國を攻んとす
蒙古は北狄宋朝を討ち取り、大元國と改め自立して中華の王と爲り、世祖皇帝と號し、高麗を以て嚮導と爲し、將に日本を討んとす。是れより書を日本に贈る。龜山帝、文永中
大蒙古・皇帝、書を日本國王に奉る。朕、惟ふに古より小國の君境土、相接り、尙ほ信を講し睦を修むるを務む。況んや我祖宗、天の明命を受け、奄に區夏を有つ、遐方遠城、威を畏れ、德を懷く者、悉く數ふべからず。朕、卽位の初、高麗、無辜の民久、鋒鏑に瘁するを以て、卽ち兵を罷て其の疆域に還く其の旄倪を返さしむ。高麗の君臣、感戴して来朝す。義は君臣と雖ども、歡、父子の若し、討るに王の君臣も亦た、己に之を知らん。高麗は朕の東藩なり、日本、密邇なり。開國以來、亦た時に中國に通す。朕が躬に至りて、而して一乘の使、以て和好を通する無し。尙ほ恐くは、王の國、之を知るや。未だ審せず故に、使、書を持して朕志を布告せしむ。冀くは、今より以て、徃は問を通し、好を結て以て相ひ親睦するを、且つ聖人は四海を以て家とす。相ひ通好せざらば、豈に一家の理なりん。以て兵を用るに至りては夫れ、孰か好む所ならん。王、其れ之を圖れ。
[ruby(高句麗,ruby=コクリ)]の書卽ち高麗なり。使を潘阜と名く。
我が國、事へ蒙古の大國に臣とし、正朔を禀ること年有り。皇帝・仁明、天下を以て一家とし、遠を視ること邇が如し。日月の照す所、咸く其の德を仰ぐ。今、好を貴國に通さんと欲し、而して寡人に詔して云ふ、「日本と高麗、與に隣をす。典章・政治、嘉するに足る者有り。漢・唐、而して下かた屢々、中國に通す故に、特に書を遣はし、以て徃、以て風濤の阻險なるを辭を爲す勿んと。」其の旨、嚴切なり。茲に已を獲らず。其の官、某に皇帝の書を奉し、前に去らしむ。貴國の中國に通好する代して之れ無きこと無し。況んや、今の皇帝の貴國に通好せんと欲する者、其の貢獻を利するに非らず。蓋し、外無き名を以て、天下に高せんと欲するのみ。若し貴國の通好を得ば、必ず厚く之を待ん。其れ、一介の使をして以て徃て之を觀せしむ。何如ぞ、國商、酌せよ。[13]
(후략)
《오잡조》(五雜俎)에 이르길 하우씨(夏禹氏)는 천하를 9주로 나누었다. 하(夏)·은(殷)·주(周)는 이를 따른다. 진나라(秦)는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었다. 한나라(漢)는 13부로 나누고 1부마다 6군을 두었다. 진나라(晉)는 15도로 나누었다. 당나라(唐)는 10도, 송나라(宋)는 4경·23로(路), 원나라(元)는 11성 23도였다. 명나라(明)는 2경·14성이다. 나중에 안남(安南)을 포기함에 따라 실제로는 13성이 되었다. 군은 모두 160개, 주는 234개, 현은 모두 1116개였다. 지부(地部) 중화 지도에 더 상세히 다룬다.
  • 중국 역사
  • 천황씨(天皇氏): 18000년 - 지황씨(地皇氏): 11000년 - 인황씨(人皇氏): 45600년
    천하를 통치하기를 합쳐 74600년이다. 천지인을 합쳐 삼재(三才)라 한다. 처음으로 세월·간지·밤낮·음식·남녀를 정했다.
  • 유소씨(有巢氏): 100대. 햇수는 기록에 없다.
    아직 집이 없어 겨울에는 굴에서 살고 여름에는 움집에서 지냈다. 아직 불을 피우는 방법은 몰랐다. 초목 열매나 짐승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시고 털을 먹었다.
  • 수인씨(燧人氏): 36000년
    이때 사람들을 가르쳐 나무를 베어 불을 피웠으며 처음 사람들에게 익혀먹는 법을 가르쳤다.
  • 복희씨(伏羲氏): 재위 140년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했다. 이때 처음으로 갑력(甲曆)이 있었고 팔괘를 그리고 서계를 만들었으며 혼례를 만들고 9주를 나누었다. 2대를 여와씨(女媧氏)라 한다. 복희의 여동생이다. 이후 합쳐 15대를 갔다. 17787년 《석상부담》(席上腐談)에 이르길 여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 한다.
  • 신농씨(神農氏): 재위 140년
    염제(炎帝)라 칭한다.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를 했다. 오곡을 싹 틔우고 낮에 시장을 열고 술을 만들며 여러 풀을 맛 보며 병을 고쳤다. 이후 7대에 걸쳐 유강(楡岡) 시기에 죽었다. 합쳐서 466년이다.
  • 헌원씨(軒轅氏): 재위 100년. 황제(黃帝)라 칭했다.
    처음으로 의상을 차리고 배와 노, 절구, 활과 화살, 수레, 마구를 만들었으며 마룻대와 추녀를 갖추었다. 창힐(蒼頡)은 글자를 만들고 예수(隷首)는 계산법을 만들었으며 해중(奚仲)은 수레를 만들었다.

    • 이상을 중고(中古)라 한다. 복희, 신농, 황제를 삼황(三皇)이라 한다.
(중략)
몽골·고려, 일본을 치려 하다
몽골북적(北狄) 송나라(宋)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로 이름을 고치고 중화의 왕이 되어 세조 황제를 칭했다. 고려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게 하고 일본을 치려 했다. 이에 따라 칙서를 일본에 보냈다. 가메야마, 분에이 연간
"대몽골의 황제는 일본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짐이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작은 나라의 군주는 영토가 맞붙어 있으면 신의와 우호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왔다. 하물며 우리 선조는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아서 중화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머나먼 곳에서도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인덕을 흠모하여 귀순하는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짐이 즉위한 초기에 고려의 무고한 백성이 오랜 전란에 신음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영토를 돌려주었으며 포로도 돌려보냈다. 고려의 임금과 신하가 모두 감격하여 내조(來朝)하여, (몽골과 고려는) 의리로는 군신(君臣)이지만 정(情)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아마도 일본의 군신들도 이미 알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쪽 번국(藩國)으로 일본과는 매우 가깝다. (일본도) 개국한 이래 때때로 중국과 왕래하였다고 하지만 짐의 통치 시기에는 한 번도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혹시 일본국에서는 잘 알지 못한 것 같아 사신을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짐의 뜻을 알리고자 한다. 지금부터는 서로 왕래하고 우호를 닦아서 서로 친목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온 천하를 한 집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서로 우호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어찌 한 집안이 되겠는가? 군대를 파견하는 데 이른다면 어느 쪽이 좋을 것인지 왕은 잘 생각하기 바란다."
고구려고려의 국서는 다음과 같다. 사절의 이름은 반부(潘阜)이다.
"우리나라가 대국 몽골의 신하로서 섬기며 정삭(正朔)을 받든 지 몇 년이 되었다. 황제는 인자하고 현명하여 천하를 한 집안으로 여기므로 멀리 있는 나라도 가까이 있는 나라처럼 대하며,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서는 모두 그 덕을 우러르고 있다. 이제 귀국과 우호관계를 맺고자 과인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일본은 고려의 이웃 나라이고 그 법률과 정치는 제법 훌륭하다. 한·당 이후 누차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므로 특별히 국서를 보내어 가게 하는 것이니, 풍랑이 험해서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황제의 뜻이 이와 같이 엄중하기에 부득이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에게 황제의 글을 가지고 가게 한다. 귀국이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은 것은 어느 때에도 없던 적이 없다. 하물며 지금 황제가 귀국과 우호하려는 것은 귀국의 공물을 이롭게 여겨서가 아니라 아마도 황제의 덕화를 입지 않는 곳이 없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고 함인 듯하다. 만약 귀국이 우호관계를 맺는다면 반드시 특별히 우대할 것이니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귀국은 잘 생각해 보라."
이 글은 매우 무례했기 때문에 답장은 없었다. 이후 사절이 두세 차례 찾아왔으나 모두 돌려보냈다. 몽골은 매우 노하여 즉시 병선 900척을 동원해 일본을 쳤다. 고우다 천황, 분에이 11년
(후략)

5.2. 朝鮮

[ruby(朝鮮, ruby=ちゃうせん)]
チャウスヱン(cháoxiān)
조선
별칭: 鮮卑( 선비)[14]/雞林( 계림)
파일:chosunn.png

5.2.1. 한국어 낱말

はのる すたぐ いる おる
하늘
ぺる くるむ ぱらん
구름 바람
ぬん そる をる はのる
うんた
서리 하늘 운다
をろん もゑ こかい はたぐ
얼음 고개 바다[15]
かぐ こる ぶる ぷる
[16]
ふる なん そなん
나무 소나무
たい ばいはい くく
人蔘 煙艸
いんそん たんばこ ほり ぴさる
인삼 담배 보리
大豆 小豆
こぐ ぱつ ぱび する
未醬
そくむ ちゃぎ やく でる
소금
ばい ちぶ ざり しうてい
(돗)자리
扇子
ぶつ ぼく なむたい ぶつぞい
나무 대 부채
茶碗
うさん はり はるたい ちゅぐばり
우산 활 대 중발
酒杯
うん ざん ちょほい ぶって
종이 부처
農夫
ちゅぐ ほぱん ぱくせぎ なんざう
호반[17] 백성 남자
かんなへ くん ちょぐのん あばみ
간나 종놈 아버지
をゆみ おばい あとる へき
어머니 어버이 아들
商人
あし ちゃくそ しょ もる
아우[18] 장수
かい ぼん こい くはくち
まい かまくい とるき とり
까마귀
烏鱡
いふち こき りがい をそがい
고기 잉어 오징어
海鰮 大口魚
ぶがい めちこき とん たいこ
붕어 멸치고기 대구
衣服 紗綾
さんむすい ぼる をす あしちり
살무사
綸子 木綿
ずぐ めぐぢゅ しる むめぐ
명주 무명
綿
めぐそ とぐ とをんぶる
더운물
はんな とをる そい とい
하나 서이 너이
たそ よそ ぢるこふ よとろく
다섯 여섯 일곱[19] 여덟
あほぶ ゑる いるばく いるてん
아홉 일백 일천
いるまん
일만
[20]
대체로 현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蚊(모기 문)의 대응어로 모기가 아니라 을, 蛇(뱀 사)의 대응어로 의 한 종류인 살무사를 쓰는 등 다소간의 오류가 있다. 地-すたぐ(ᄯᅡᇰ), 米-ぷさる(ᄡᆞᆯ)처럼 한글의 ㅅ계 합용병서, ㅂ계 합용병서를 어두자음군으로 보고 표기한 예들도 몇 개 있다. 또한 어중 が행 가나를 비탁음이 들어간 음절로 읽어야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다. 즉 川에 대응하는 かぐ는 /ka.ɡɯ/보다는 /ka.ŋɯ/로 읽어야 /kaŋ/이라는 원음에 더 가까워진다.

현대에 단모음이 된 ㅐ, ㅔ는 あい, おい 계열로 적고 있다. 허인영(2021: 107)[21]에 따르면 이는 화한삼재도회를 포함한 17~18세기 일본 서적들에서 나타나는 한국어의 가나 표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경향이다.

5.3. 耽羅

[22][ruby(耽羅, ruby=ちんら)] 탐라
별칭: 耽牟羅(탐모라)
파일:tamraa.png 東國通鑑云其國在南海中古初無人物有三神人從地涌出長曰良乙那次曰高乙那三曰夫乙那一日三人出獵海濱得石函開之有三女及諸駒犢五穀種遂分娶三女各就泉甘土肥處卜居焉良乙那居曰第一都高乙那居曰第二都夫乙那居曰第三都始播五穀且牧駒犢日就富庶當宋元徽四年始遣方物于百濟國
△按耽羅國在百濟之南島也天智天皇五年始來于日本同七年來貢方物賜五穀種歸國至朝鮮一統竞所併爲朝鮮中
東國通鑑に云く、其の國、南海の中に在り。[ruby(古初,ruby=そのかみ)]、人物無く、三神人有り、地より涌出つ。長きを良乙那と曰ひ、次を高乙那と曰ひ、三を夫乙那と曰ふ。一日、三人、出て海濱に獵して石の[ruby(函,ruby=はこ)]を得たり。之を開くに、三女、及び諸々の[ruby(駒,ruby=うまのこ)]、[ruby(犢,ruby=うしのこ)]、五穀の種有り、遂に分けて三女を娶り、各々泉甘く、土肥たる處に就りて居を卜す。良乙那が居を第一の都と曰ひ、高乙那が居を第二の都と曰ひ、夫乙那が居を第三の都と曰ふ。始めて五穀を[ruby(播,ruby=し)]き、且つ駒、犢を[ruby(牧,ruby=か)]ひ、日々に富庶に就き宋元徽四年に當る始めて方物を百濟國に遣る。
△按ずるに、耽羅國は百濟の南に在る島なり。天智天皇・五年に始めて日本に來たる。同七年に來りて方物を貢す。五穀の種を賜て國に歸らしむ。朝鮮一統に至りて、竞に[ruby(併,ruby=あ)]はせられて朝鮮の中となる。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길 이 나라는 남해 중에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없었고 삼신인(三神人)이 있었다. 땅에서 솟아올라 가장 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어느 날 셋이 나와 해변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돌로 된 상자를 얻었다. 이를 열어보니 세 명의 여자와 여러 망아지, 송아지, 오곡 씨앗이 있었다. 이를 나누고 세 여자와 결혼하였다. 샘물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 살 곳을 점쳤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처음 오곡을 피우고 그 다음 망아지와 송아지를 키우니 날로 부유해졌고 송나라(宋) 원휘(元徽) 4년(476년)에 해당한다. 처음으로 백제에 특산물을 바쳤다.
△생각건대 탐라는 백제 남쪽에 있는 섬이다. 덴지 천황(天智天皇) 5년(672년) 처음 일본에 왔다. 덴지 천황 7년(674년)[23] 일본에 와 특산물을 바쳤다. 오곡의 씨앗을 하사해 돌려보냈다. 삼국통일 시기에 합병되어 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5.4. 兀良哈

[ruby(兀良哈, ruby=おらんかい)] 우량카이[24]
별칭:
파일:orangg.png 大明一統云兀良哈東海西連開平界北京北也北抵北海也春秋時山戎地泰爲遼西其風俗與韃靼同當朝鮮之西北
大明一統に云く、兀良哈、東は海、西は開平の界に連り、北京の北なり北は北海也春秋時山戎地泰爲遼西其風俗與韃靼同當朝鮮之西北北は北海に抵る。春秋の時の山戎の地、秦には遼西とす。其の風俗、韃靼と同じ。朝鮮の西北に當る。
《대명일통》(大明一統)에 이르길 우량카이(兀良哈)는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개평(開平)북경의 북쪽[25]의 경계에 접하고 북으로는 북해에 이른다. 중국 춘추시대에 산융(山戎)의 영역은 진나라(秦)로서는 요서(遼西)였다. 풍속은 몽골과 같다. 조선의 북서쪽에 해당한다.

5.5. 琉球

[ruby(琉球, ruby=りうきう)] 류큐
별칭: 流虬/西南は則ち暹羅。東北は則ち日本。地部に詳し。(남서쪽은 태국, 북동쪽은 일본이다. 지부에서 자세히 다룬다.)
파일:ryukyuu.png 三才圖會云有大琉球小琉球各出名玉異寶其國在福建泉州東其國本無文字不知晦朔視月盈虧以知時視草榮枯以知歲其人深目長鼻頗類婦人男子去髭鬚黥于手以羽毛爲冠粧以珠玉女人以墨黯首爲龍虵紋皆紵繩纏髮以白羅紋爲帽維毛爲衣漢魏以來不通朝貢至大明洪武壬申始王子及陪臣子來學中國學分其國爲三中山王山南王山北王而惟中山王朝貢不絕其二王俱爲所併今則夷風變冠裳被服禮儀皆中華風也其國小而貧弱不能自立雖受中國冊封而亦臣服於日本倭使至者不絕與中國使相錯也蓋倭與接壤攻之甚易其國敬神以婦人守節者爲尸謂之女王世由神選以相代云自國王以下莫不拜禱惟謹田將穫必禱於神神先徃採數穗茹之然後取穫否者食之立死禦災捍患屢顯靈應中國使者至則女王率其從二三百人各頂草圜入王宮中視供億厨饌恐有毒也諸從皆良家女神特攝其魂徃耳中國人有代彼治疱者親見神降其聲鳴鳴如蚊焉蓋從中國徃琉球海道甚險而封琉球之役無不受風濤之難者
世法錄云古爲流虬地界萬濤蜿蜒若虬浮水中因名後轉謂之琉球嘉靖三十四年其國王尙淸卒同三十七年遣使持節冊封尙元爲王万曆元年尚元卒四年世子尙永嗣及永卒三十一年封尚寧嗣王
大明万曆三十七年日本慶長十四年薩摩州倭侵琉球虜中山王尙寧同四十年慶長十七年尙寧復遣使修貢同四十四年遣使報倭造戰艦五百餘脅取雞籠山嶋野夷雞籠淡水洋一名東番東去三百里爲葉壁山又東即日本恒與貿易假貸近國哪霸首里竝有馬市販鬻率女僧市用日本錢十當一如宋季鵝眼挺環其俗不貴紈綺貴磁噐鐵釜賜予及市馬多用之鹽舶魚艇制稍異酷信鬼不知醫藥以婦人不二夫者爲尸其魁號女君近王宮有寺藏經千卷它籍無五經有四書以杜律虞話爲經土田砂礫樹藝鹵莾野多鹿及馬牛羊豕山多蛇無虎樹之佳者鳳尾蕉貢有蘇木胡椒黃熟降檀諸香竝非所產產饒硫黄海貝讌會令童歌夷曲舞以有觴酒以水漬米越宿婦人嚼以取汁曰未奇間來自暹羅清冽易令人醉學書及武以倭爲師甲用皮革矢可至二百步節以金皷衆驍耐饑寒勞苦好爭狠鬪度不免即引刀自斃於海上故稱勍國然不當倭十一
△按琉球開闢未詳始于何世旣云漢魏以來不通朝貢又云隋煬帝大業六年遣官軍攻琉球殺其王則其來尚矣
相傳鎭西八郎源爲朝勇力無雙士也二條院永満元年流于豆州從大島渡琉球驅魑魅安百姓於是島民皆爲日本風俗爲朝逝後立祠神號曰舜天太神宮
後花園院實德三年琉球人來朝獻錢一千貫及方物正親町帝元龜十一年亦來貢焉近年爲薩摩附庸之國而頃有不從命慶長十四年大明万曆三十七年島津家立言于關東遣數千兵以討之那覇都陥捕尙寧王以歸尙寧王在薩摩三年而赦還本國自是愈每年貢物不怠而將軍家嗣立時王子來獻方物
琉球尙寧王還國遣大明國書後水尾帝慶長十七年大明万曆四十年
上書大明國福建軍門老大人閣下恭審小邦去日本薩摩州者僅三百餘里以故三百年來以時獻不腆方物修其鄰好頃在不肖嗇夫緩其貢期是故薩摩州進兵於小邦小邦荒墟者誠天之所命而我亦以無苞桑之戒也不幸而爲其俘囚在薩摩州者三年矣州君島津家久外好武勇內懷慈憫待我以待貴客之禮禮遇之厚者三年一心加之送還我於小邦於是吾民之歌於市抃於野者玆非幸歟州君寄言於我其言曰夫邦國之在四方也有金玉者或不足乎錦繡有粟米者或不足乎器皿若有餘而不散不足而無聚民用不足而其貨亦腐惟坐而待腐不如通其有無各得其所矣日本非無金玉器皿其土宜質素而不及於中華之文質彬彬是故使我參謀於兩國一以使日本商船許以容之大明邊地二以使大明商船來我小邦交相貿易三以使一遣使年年通其貨之有無者匪翅富兩國人民大明亦無爲倭寇嚴備兵備矣三者若無許之令日本西海道九國數万之軍進寇於大明大明數十州之鄰於日本者必有近憂矣是皆 日本大樹將軍之意而州君所以欲通兩國之志者也伏冀軍門老大人於斯三者許一於此我小邦大沐大明之德化且遂日本之夙志是亦天朝恤遠字小之仁心也若然則永守藩職無生貳心遐方嚮他之念没世不忘也伏楮伸鄙忱仰祈尊炤不宣
凡文字音訓或用中華或做日本又有自國語淨屠來日本留學故言語能通於倭
王號中山王 后稱中婦君 皇子稱王子和牟之 春宮稱中城 武士稱親雲上 其次者稱筑登 又有按司 親方等官名 美童稱里子倭云小姓之類 庶人子幼名曰太郎金次郎金等
三才圖會に云く、大琉球・小琉球有り、各々名玉異寶を出す。其の國、福建・泉州の東に在り、其の國、本々は文字無く、晦朔を知ず、月の盈虧を視て以て時を知り、草の榮枯を視て以て歲を知る。其の人、深目・長鼻・頗る婦人に類す。男子は髭鬚を去りて手に[ruby(黥,ruby=いれずみ)]し、羽毛を以て冠とす。粧るに珠玉を以て、女人、墨を以て黯首、龍虵と紋をす。皆な、繩を紵し、髮を纏へ、白羅紋を以て帽とし、維毛を衣とす。漢・魏以來、朝貢を通せず、大明・洪武・壬申に至りて始めて王子、及び陪臣の子、來りて中國の學を學ぶ。其の國、分て三とす。中山王・山南王・山北王。而惟だ、中山王、朝貢、絕へず。其の二王は俱に爲めに併せらる。今は則ち夷風、變して冠、裳被服、禮儀、皆な中華の風なり。其の國、小にして而て貧弱、自立すること能はず。中國の冊封を受ると雖へども、而れども、亦た日本に臣服す。倭の使、至る者、中國の使と絕へず、相錯る。蓋し、倭と壤と接し、之を攻む。甚だ易く其の國、神を敬し。婦人、節を守りて者を以て尸とし、之を女王と謂ひ、世々神の選に由りて以て相代ふと云ふ。國王より以下、不拜禱せざることなし、惟だ、謹田、將に穫んとす。必ず神に禱る。神、先づ徃きて數穗を採り、之を茹ひ、然るの後、取り穫る。しからざれば、之を食ひて立死す。[26]災を禦ぎ、患を捍ぐに屢々靈應を顯す。中國の使者、至れば則ち、女王、其の從、二三百人を率て、各々草圜を頂し、王宮の中を入る。供億の厨饌を視る。毒有んことを恐れてなり。諸從は皆な、良家の女なり。神、特に其の魂を攝し徃しむるのみ。中國の人、彼に代を、疱を治むる者有り、[ruby(親,ruby=まのあたり)]神降を見る。其の聲、鳴鳴として、蚊の如し。蓋し、中國より琉球に徃く海道、甚だ險にして琉球を封する役、風濤の難を受けざる者なし。
世法錄に云く、古へは流虬とす。地界、萬濤蜿蜒として、虬の水中に浮ぶと若し。因りて名づく。後轉して之を琉球と謂ふ。嘉靖・三十四年、其の國王・尙淸、卒す。同・三十七年、使を遣し節冊を持たして尙元を封して王とす。万曆・元年、尚元、卒す。四年、世子・尙永、嗣く永卒するに及びて三十一年、尚寧を封して嗣て王たらしむ。
大明・万曆・三十七年、日本・慶長・十四年薩摩の[ruby(州,ruby=くに)]の倭、琉球を侵して中山王・尙寧を虜にす。同・四十年、慶長・十七年尙寧、復りて使を遣て修貢せしむ。同・四十四年使を遣し報す。倭、戰艦・五百餘を造り、雞籠・山嶋野夷を脅し取る。雞籠は淡水洋一名、東番東を去ること三百里、葉壁山とす。又た、東は即ち日本、恒に[ruby(與,ruby=とも)]に貿易假貸す。近國、[ruby(哪霸,ruby=なは)]、[ruby(首里,ruby=すり)]、竝に馬市、有りて販鬻す。[ruby(女僧,ruby=すあい)]を率て市す。日本の錢を用ゆ。十、一に當つ。宋の[ruby(季,ruby=すゑ)]の鵝眼挺環の如し。其の俗、紈綺を貴ひず、磁噐、鐵釜を貴ふ。賜予、及び市馬、多く之を用ゆ。鹽舶、魚艇の制、稍や異なり。酷だ鬼を信じて、醫藥を知らず。婦人、二夫せざる者を以て[ruby(尸,ruby=かたしろ)]とす。其の[ruby(魁,ruby=かしら)]を女君と號し、王宮に近く寺有りて、藏經千卷、它籍は五經無く、四書有り、杜律虞話を以て經とす。土田砂礫樹藝鹵莾なり。野に鹿、及び馬・牛・羊・豕に多く、山に蛇多く、虎無し。樹の佳なる者は[ruby(鳳尾蕉,ruby=そてつ)][27]、[ruby(貢,ruby=みつきもの)]に[ruby(蘇木,ruby=すわう)]、[ruby(胡椒,ruby=こせう)]、[ruby(黃熟,ruby=きやう)]、降檀の諸香有り、竝に所產に非ず。產饒、硫黄、海貝なり。讌會に童歌夷曲をして舞はしむ。以て觴酒有り、水を以て米を漬して宿を越て婦人、嚼て以て汁を取るを[ruby(未奇,ruby=あらき)]と曰ふ。[ruby(間々,ruby=まま)]、暹羅より來る清冽にして易く人をして醉はしむ。書、及び武を學ぶに倭を以て師としす。[ruby(甲,ruby=よろい)]は皮革を用へ、矢は二百步に至るべし。節するに金皷を以てす。衆驍く饑・寒・勞苦に耐ゆ。爭を好て狠鬪、度るときは免さず、即ち刀を引き、自ら海上に斃る。故に勍國と稱す。然れども倭の十が一つにも當らず。
△按ずるに、琉球の開闢、未だ何の世に始るを詳せず。旣に云く、漢・魏以來、朝貢を通せずと。又た云く、隋の煬帝、大業・六年、官軍を遣し、琉球を攻め其の王を殺す。則ち其れ、來ること尚し。
相傳ふ鎭西八郎源の爲朝は勇力無雙の士なり。二條院永満・元年豆州に流されて、大島より琉球に渡り、魑魅を驅り百姓を安んす。是に於て島の民、皆な日本の風俗とする。爲朝、逝て後、祠を立ちて神號を舜天太神宮と曰ふ。
後花園院實德・三年琉球人、來朝して錢・一千貫、及び方物を獻す。正親町の帝、元龜・十一年にも亦た、來貢す。近年は薩摩の附庸の國となる。而頃ろ、命に從ざる有り、慶長・十四年大明・万曆・三十七年島津家、言を關東に立てて數千の兵を遣し、以て之を討ち[ruby(那覇,ruby=なは)]の都を陥いれて尙寧王を捕へ以て歸る。尙寧王、薩摩に在ること三年。而して赦して本國に還す。是れより愈々、每年、貢物、怠らずして、將軍・家嗣立の時、王子、來りて方物を獻す。
琉球・尙寧王、國に還り、大明國に書を遣す。後水尾帝、慶長・十七年、大明・万曆・四十年
書を大明國・福建の軍門、老大人の閣下に上る。恭しく審るに小邦、日本・薩摩の州を去ること僅に三百餘里。この故に三百年、來りて時を以て不腆の方物を獻し、其の鄰好を修す頃、不肖の嗇夫に在りて其の貢期を緩くす。是の故に薩摩州より兵を小邦に進して小邦、荒墟する者、誠に天の命する所而。我、亦た苞桑の戒、無きを以てなり。不幸にして其の[ruby(俘囚,ruby=とりこ)]と爲り、薩摩州に在る者、三年なり。州君・島津家久、外には武勇を好し、內には慈憫を懷き、我に待するに貴客待する禮を以てし、禮遇の厚きこと三年。心を一にす。之に加ふるに送て我を小邦に還す。是に於て吾民、之を市に歌ひ、野に抃つ者、玆れ幸に非らず。歟州君、言を我に寄す。其の言に曰く、夫れ、邦國の四方に在るや。金玉有る者は、或は乎錦繡に足らず、粟米有る者は、或は乎器皿に足らず。若し餘り有りて而して散せず、足らずして而して聚むる無きは民用、足らずして而して、其の貨、亦た腐れん。惟だ、坐して而して腐るを待んより如かず。其の有無を通して各々其の所を得。日本、金玉、器皿、無きに非ず、其の土、宜質素にして於中華の文質、[ruby(彬彬,ruby=ひんぴん)]たるに及ばず。是の故に、我をして兩國に參謀せしむ。一には、以て日本の商船をして許して以てして之を大明の邊地に[ruby(容,ruby=い)]れしむ。二には、以大明の商船をして我が小邦に來らせしむ。交々相貿易せん。三には、以て一遣使をして年年、其の貨の有無を通せしめば、[ruby(翅,ruby=た)]だ兩國の人民を富すのみに匪ず、大明も亦た倭寇の爲め嚴に兵備を備ることなし。三には、若し之を許しずんば、日本、西海道・九國、數万の軍をして大明に進寇せしめん。大明、數十州の日本に鄰なる者、必ず近き憂有ん。是れ皆な、 日本・大樹將軍の意にして州君の兩國に通と欲する所以ての志者なり。伏して冀くあは軍門・老大人、斯の三つ者に於て一を許さば此に於て我が小邦、大に大明の德化に沐して且つ日本の夙志を遂ん。是れ、亦た天朝、遠を恤み小を[ruby(字,ruby=やしな)]ふ仁心なり。若し然らば則ち、永く藩職を守り、貳心を生むこと無らん。遐方、他に嚮ふ念、世を没て忘れず。楮を伏て鄙忱を伸べ、仰て尊炤を祈る、宣かざる。
凡そ、文字の音訓、或は中華を用い、或は、日本に做へ、又た、自ら國語有り、淨屠、日本に來りて、留學す故に、言語、能く倭に通す。
王を[ruby(中山王,ruby=ちうさんわう)]と號し、后を[ruby(中婦,ruby=ちうふ)]君と稱し、皇子を[ruby(王子,ruby=わんし)]と稱し和牟之、[ruby(春宮,ruby=とうくう)]を[ruby(中城,ruby=なかぐすく)]と稱し、武士を[ruby(親雲上,ruby=はいきん)]と稱し、其の次なる者を[ruby(筑登,ruby=つくとう)]と稱し、又た[ruby(按司,ruby=あんし)]、[ruby(親方,ruby=をやかた)]等の官名有り。美童を[ruby(里子,ruby=さとのし)]と稱す。倭に云く、小姓の類なり 庶人子の幼名を太郎[ruby(金,ruby=かね)]、次郎金[ruby(等,ruby=など)]と曰ふ。

5.5.1. 류큐어 낱말

おくだ
오쿠다
おつきかなし
오쓰키카나시
ほとけかなし
호토케카나시
かめかなし
가메카나시
つき
쓰키
ほとけ
호토케
かみ
가미
おへい
오헤이
おまつ
오마쓰
おさけ
오사케
めし
메시
(동일) (동일)
おけが
오케가
おいなご
오이나고
せうまい
쇼마이
あんまあ
안마
刀劍 衣服
すいざ
스이자
おっとう
옷토
ほうてう
호초
いぶく
이부쿠
おとうと
오토토
(동일)[28] いふく
이후쿠

아무래도 류큐어가 일본어와 동계 언어다 보니 일본어와 큰 차이는 없는 편이다. 관련이 있어보이는 현대 일본어를 아래 칸에 써두었다.

5.6. 蝦夷

[ruby(蝦夷, ruby=ゑぞ)] 아이누
東夷/[ruby(獲服,ruby=ゑり)](에리)/日高見の國(히타카미노쿠니)/和名、惠曾(ゑぞ, 에조)
파일:wezoo.png 蝦夷去日本東北海中島也其地圖詳于地理部
日本紀景行天皇下云武內宿禰自東國還之奏言東夷中有日高見國其國人男女推結文身爲人勇悍是総曰蝦夷亦土地沃壤而曠男女交居父子無別冬則宿穴夏則住樔衣毛飮血昆弟相疑登山如飛禽行草如走獸承恩則忘見怨則必報是以箭藏頭髻刀佩衣中或聚黨類犯邊界伺農桑以略人民擊則隱艸追則入山故往古以來未染王化也而王子日本武尊奉勅平討之
敏達天皇十年春蝦夷数千寇於邊境由是召其魁師綾糟等遵景行天皇例欲誅於是恐懼乃下泊瀨中流面三諸岳𣼴[⿰氵軟]水而盟而自今以後子子孫孫用清明心事奉天闕若違盟者天地諸神及天皇靈絶滅臣種而後亦動則叛矣
齊明天皇朝阿倍比羅夫征伐之建政所還
桓武天皇朝亦有版坂上田村丸征伐之
齊明天皇五年遣唐使坂合石布津守吉祥添蝦夷人入唐乃載通典云蝦夷國海島中小國也其使鬚長四尺尤善弓矢插箭於首令人載弧而立四十步射之無不中者唐高宗顯四年隨倭國使人入朝
△按蝦夷開闢不知何世也景行天皇以來爲本朝之奴其爲人長六尺被髮髭鬚長垂蔽口飮食時以箸揭髭啜物也眼圓大而光容貌如夜叉每裮跣而走其行也無足音能登喬走險游水身輕捷如禽如獸蓋不吃鹽醬故然矣嘗無擧斗之力惟額有力而荷擔負戴皆用額國人年齡有過四五十歲者稀也是肉食不食米故矣阿蘭陀人夭死亦然焉熱病發則多殞命痘疹最爲危難蓋不知醫療也爲國長之名號沙具沙允或號鬼菱其稱允者以爲貴族乎國無文字言語不通近頃僅有通倭語者猶酒曰佐計然又取魚脂飮之名脂酒阿布良佐介偶賜倭酒吃之則甚喜也負劒於背挾弓於脇獵食鳥獸其射不敢致遠惟二三丈之中正諍分厘而必不差又製草烏頭毒塗鏃射人如中則肌膚腐爛死急剝去所中身皮蒜器硏末傳之乃無害也若値父母及夫之喪則親屬集會敲喪者頭背其木刀縱施鐵條故肌腐破傷將絕入則止以爲孝悌之法謂之吊打傍人介抱投海用鹹水浸滌之則疪愈亦一異也而後再不悔慕如有人誤訪尋亡者之事則忿怒不休也爲出品物贖之言將忘之愁何為勸悲歎耶
相傳云源義經在奧州衣河舘泰衡變心暴攻之從者戰死畢義經僞死而奔蝦
夷島民皆敬服終天年死其地曰沙古丹建神祠甚崇信每稱南無義經
寬文年中蝦夷叛命松前志摩守征伐之殺魁首紗具紗允及黨数復一統
[30]
錢銀金小判等不通用物與物交易
拾玉 ゑびすこそ物の哀の知ときけいざみちのくの奥へ行かなん 慈圓 [31]
蝦夷は日本の東北海の中を去る島なり。其の地圖、地理の部に詳なり。
日本紀に、景行天皇の下に云く、武內の宿禰、東國より還り、之れを奏して言く、東夷の中に日高見の國有り、其の國[ruby(人,ruby=たみ)]、男女、[ruby(推結,ruby=かみをかふ)]ぶる、身を[ruby(文,ruby=もどろ)]け[32]、人となり、勇悍なり。是を総て蝦夷と曰ふ。亦た土地、沃壤にして曠し、男女、交居、父子、別無く、冬は則ち穴に宿し、夏は則ち樔に住み、毛を衣き、血を飮み、昆弟、相疑ひ、山に登ること飛禽の如く、草を[ruby(行,ruby=はし)]ること走獸の如し。恩を承て則ち忘れ、怨を見ては則ち必ず報す。是を以て箭を[ruby(頭髻,ruby=たぶさ)]に藏くし、刀を衣の中に[ruby(佩,ruby=は)]き、或は黨類を聚め、邊界を犯し、農桑を伺ひ、以て人民を[ruby(略,ruby=かす)]む。擊ては則ち艸に隱れ追へば則は山に入る。故に往古より以來、未だ王化に[ruby(染,ruby=したが)]はず。而して王子、日本武尊、勅を[ruby(奉,ruby=は)]り之を平討す。
敏達天皇十年春蝦夷数千寇於邊境由是召其魁師綾糟等遵景行天皇例欲誅於是恐懼乃下泊瀨中流面三諸岳𣼴[⿰氵軟]水而盟而自今以後子子孫孫用清明心事奉天闕若違盟者天地諸神及天皇靈絶滅臣種而後亦動則叛矣
齊明天皇朝阿倍比羅夫征伐之建政所還
桓武天皇朝亦有版坂上田村丸征伐之
齊明天皇五年遣唐使坂合石布津守吉祥添蝦夷人入唐乃載通典云蝦夷國海島中小國也其使鬚長四尺尤善弓矢插箭於首令人載弧而立四十步射之無不中者唐高宗顯四年隨倭國使人入朝
△按蝦夷開闢不知何世也景行天皇以來爲本朝之奴其爲人長六尺被髮髭鬚長垂蔽口飮食時以箸揭髭啜物也眼圓大而光容貌如夜叉每裮跣而走其行也無足音能登喬走險游水身輕捷如禽如獸蓋不吃鹽醬故然矣嘗無擧斗之力惟額有力而荷擔負戴皆用額國人年齡有過四五十歲者稀也是肉食不食米故矣阿蘭陀人夭死亦然焉熱病發則多殞命痘疹最爲危難蓋不知醫療也爲國長之名號沙具沙允或號鬼菱其稱允者以爲貴族乎國無文字言語不通近頃僅有通倭語者猶酒曰佐計然又取魚脂飮之名脂酒阿布良佐介偶賜倭酒吃之則甚喜也負劒於背挾弓於脇獵食鳥獸其射不敢致遠惟二三丈之中正諍分厘而必不差又製草烏頭毒塗鏃射人如中則肌膚腐爛死急剝去所中身皮蒜器硏末傳之乃無害也若値父母及夫之喪則親屬集會敲喪者頭背其木刀縱施鐵條故肌腐破傷將絕入則止以爲孝悌之法謂之吊打傍人介抱投海用鹹水浸滌之則疪愈亦一異也而後再不悔慕如有人誤訪尋亡者之事則忿怒不休也爲出品物贖之言將忘之愁何為勸悲歎耶
相傳云源義經在奧州衣河舘泰衡變心暴攻之從者戰死畢義經僞死而奔蝦
夷島民皆敬服終天年死其地曰沙古丹建神祠甚崇信每稱南無義經
寬文年中蝦夷叛命松前志摩守征伐之殺魁首紗具紗允及黨数復一統

錢、銀金の小判等は通せず。物と與に交易す。
拾玉集 ゑびすこそ物の哀の知ときけいざみちのくの奥へ行かなん 慈圓 

5.6.1. 아이누어 낱말

とうき つき ちらり きみた
あつい へつ わつか あんべ
れら あぶたあし うばし とつあつふ
うくら あまも しとあまも ややさけ
煙草 昆布 衣服
ちゃ たんばこ こんぶ ちめつふ
木綿衣
しゃらんべ せんどかけ たち ちせ
おつかい めのこし はんべ はほ
伯父
ゆび あぎ[34] まつなへかち いちや
日本人 大守 武士
しゃも かもゐ い?しつば ちつふ
獵虎
ちあふ さるる くま ゑり
沙金
しんべ びるか うゑん しゃもたから
しねつふ つつふ れつぷ いねつぷ
あしけね いわむ あるわん つべさん
しのべさん わんべ

일본어 위키백과: 아이누어 어휘 일람(アイヌ語の語彙一覧)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5.7. 韃靼

[ruby(韃靼, ruby=たったん)] 몽골
별칭: 蒙古/北狄/獯鬻(훈육)・玁狁(험윤)・匈奴( 흉노)秦、漢・突厥( 돌궐)・契丹( 거란)・[ruby(韃子,ruby=だそ)](달자)。其名、歷代各異なり。
파일:tatarr.png 三才圖會云及宋復盛其別部小者曰蒙古曰泰赤烏曰塔塔兒曰克列後蒙古盛兼幷入寇中國伐宋稱元閏位十四傳而天命歸大明蓋韃靼其種本有五皆或牛玃猪鹿之屬所生而其一種蒼色狼與慘白鹿所生者二十五世生帖木眞是稱大蒙古都長僭號皇帝世居沙漠東北六千里後居山陰號韃靼地產羊馬無城池房舍隨水草所居俗尙射獵食羊馬野鹿衣皮革帖木眞四世孫忽必烈僭居中國稱帝改國號曰大元
△按蒙古東至兀良哈西脫忽麻撒馬兒罕北盡沙漠直長安東北六千里其種類生無痘疹以不食鹽醋故也其居無城郭然亦各有分地無文書以言語爲約束兒能騎羊引弓射鳥鼠少長則射狐兎其俗寬則田獵禽獸爲生業急則習戰攻以侵伐其長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不知禮儀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皮革旃裘壯者食肥美老者飲食其餘貴壯徤賤老弱彼人病即舁置深谷中任其死生絕跡不敢省視矣
蒙古入中國爲大元皇帝以來始令西蕃借馬八巴造爲字書今世謂蒙古白是也與中國互市間亦學中國飲食逐一有之敬信佛法愛禮君子凡中國經書皆以重價購之獨無孟子云有擕其書往者舟輙覆溺此亦一奇事也
大元為大明所滅有年矣後復蒙古入中國滅大明今稱大淸是也相傳其王夷種而有仁愛能撫民慕聖賢之道然蒙古風俗剃項至額方其形留髮於正中謂之怯仇兒如今中國民俗皆習之
三才圖會に云く、宋に及び復盛なり。其の別部、小なる者を蒙古と曰ふ、泰赤烏と曰ひ、塔塔兒と曰ふ、克列と曰ふ。後に蒙古、盛にして兼幷、入りて中國に寇す。宋を伐て元と稱す。閏位・十四、傳にして天命、大明に歸す。蓋し韃靼、其の種本、五つ有り、皆な或は牛、玃、猪、鹿の屬の生む所、而して其の一種、蒼色の狼と慘白の鹿と與に生む所の者、二十五世に帖木眞を生む。是れを大蒙古の都長と稱す。僭かに皇帝と號す。世々沙漠の東北、六千里に居る。後に山陰に居り、韃靼と號す。地、羊、馬を產し、城、池、房、舍、無き、水草に隨ふ。居る所、俗に射獵を尙とひ、羊、馬、野鹿を食ひ、皮革を衣き、帖木眞が四世の孫、忽必烈、僭に中國に居り帝と稱し、國號を改めて大元と曰ふ。
△按ずるに、蒙古は東は[ruby(兀良哈,ruby=ヲランカイ)]に至り、西は脫忽麻[35]、[ruby(撒馬兒罕,ruby=サハジカン)][36]、北は沙漠を盡し、長安の東北・六千里に[ruby(直,ruby=あた)]る。其の種類、生れて痘疹無し。鹽、醋を食はざるを以ての故なり。其の居、城郭無し。然れども、亦た各々分地有り。文書無して言語を以て約束をす。兒は能く羊に騎て弓を引き、鳥、鼠を射る。少し長すれば則ち、狐、兎を射る。其の俗、寬なれば則ち、禽獸を田獵し、生業とす。急なれば則ち、戰攻を習ひ、以て其の長を侵伐す。利あれば則ち進み、利あらざれば則ち退き、遁走を[ruby(羞,ruby=はぢ)]とせずんば、禮儀を知らず。君王より以て下咸々く畜肉を食ひ、皮革、旃裘を衣き、壯者は肥美を食ひ、老者は其の餘りを飲食す。壯徤を貴ひ、老弱を賤む。彼の人、病めば即ち舁て深谷の中に置き、其の死生に任し、跡を絕て敢て省視せず。
蒙古、中國に入りて大元皇帝とする以來、始めて西蕃の借馬八巴をして字書を造らせしむ。今世に蒙古白と謂ふ、是れなり。中國と與に互市して[ruby(間,ruby=まま)]、亦た中國の飲食を學んで、遂一、之れ有り。佛法を敬信し、君子を愛禮す。凡そ中國の經書、皆な重き價を以て之を購ふ。獨り孟子無しと云く。其の書を[ruby(擕,ruby=たづさ)]へ往く者有れば舟、輙、覆り溺ると[37]。此も亦た一奇事なり。
大元、大明のために滅ばれて年有り。後復蒙古、中國に入りて大明を滅して今に大[ruby(淸,ruby=しん)]と稱す、是れなり。相傳ふ其の王、夷種にして而も仁愛有り、能く民を撫り、聖賢の道を慕ふ。然るに蒙古の風俗、項を剃り額に至り、其の形を方にして髮を[ruby(正中,ruby=まんなか)]に留む、之を怯仇兒と謂ふ。如今、中國の民俗に皆な之に習ふ。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이르길 송나라(宋) 대에 이르러 부흥하였다. 그 일부 부족들을 몽골(蒙古), 타이치우드(泰赤烏), 타타르(塔塔兒), 케레이트(克列)라 했다. 나중에 몽골이 흥성하여 모두 합치고 중국을 침략해 송나라를 정벌하고 원나라를 칭했다. 그렇게 14대가 지나고서 천명이 명나라로 돌아왔다. 무릇 몽골에는 5개 씨족이 있다. 모두 소, 원숭이, 멧돼지, 사슴 등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 중 한 곳, 푸른 늑대와 창백한 사슴이 사는 곳에서 25대에 테무친(帖木眞)을 낳았다.[38] 이를 대몽골의 부족장이라 칭했으며 황제를 참칭하였다. 대대로 사막 너머 동북쪽 6천 리에 살았다. 이후에 골짜기에 들어가 타타르라 칭했다. 땅은 말과 양이 많으며 성곽과 집은 없어 수초에 의존한다. 살면서 수렵을 숭상하고 말, 양, 사슴을 먹으며 가죽 옷을 입는다. 테무친의 4대손 쿠빌라이(忽必烈)는 중국으로 가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쳤다.
△생각건대 몽골은 동쪽으로는 우량카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사마르칸트, 북쪽으로는 사막에 이르러 장안 동북쪽 6000리에 해당한다. 이들 부류는 천연두를 겪지 않는다. 소금과 식초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곳에는 성곽이 없다. 그래도 각자가 나누어 가진 땅은 있다. 문자가 없어서 말로 약속을 한다. 아이는 곧잘 양에 올라타 활을 쏘고 새와 쥐를 잡는다. 조금 더 자라면 여우와 토끼를 잡는다. 이 풍속은 평화로울 때에는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그러나 급하면 전법을 배워 상대의 수장을 공격한다. 이득이 있으면 전진하고 그렇지 않으면 후퇴한다. 달아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예의도 알지 못한다. 왕부터 아랫사람까지 모두 짐승 고기를 먹으며 가죽 옷을 입는다. 장성한 자가 좋은 고기를 먹고 늙은 사람은 그 나머지를 먹는다. 건장함이 존중받으며 노약함을 천시한다. 그들은 병약해지면 바로 깊은 계곡에 방치해두고 생사를 맡긴다. 그러고서 종적을 끊고 돌아보지 않는다.
몽골은 중국에 들어와 원나라 황제를 칭한 이래 처음으로 티베트(西蕃)의 파스파(八巴)에게 문자를 만들도록 했다. 오늘날 몽골 문자(蒙古白)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중국과 함께 도시를 이루고 사는 동안 중국의 음식을 배웠는데 수일(遂一?)이 그것이다. 불법을 믿으며 군자를 따랐다. 대개 중국의 경서는 모두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 이를 구하고자 했다. 오직 맹자의 책만이 없었다고 한다. 책을 지니고 가는 사람은 배와 수레가 뒤집어지고 침몰했다고 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화이다.
원나라 명나라에 의해 멸망한 지 오래이다. 이후 몽골이 부흥하여 중국에 들어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늘날 청나라라고 칭했다.[39] 전해지기로 그들의 왕은 오랑캐이면서도 인덕이 있고 백성을 살피며 성현의 길을 공경한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풍속으로 머리를 이마까지 밀고 그 모양을 각지게 하여 머리를 한가운데만 남기는데 이를 허헐(怯仇兒, 겁구아. 몽골어 kegűl의 음차)이라 한다.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모두 이를 따른다.
본서에서는 몽골 청나라를 세운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혼동을 하거나 잘못된 사실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5.7.1. 몽골어 낱말 (북로역어)

てんげり
騰革力
なら
納剌
さら
撒剌
ほうとん
火墩
тэнгэр нар сар од[40]
はうげら
襖兀剌[41]
たああらい
打來
もうろをん
母倫
ううそ
五速
далай мөрөн ус
けい
克亦
ふうら
虎剌
さっそ
叉速
ううとうるる
五堵兒
хий бороо цас өдөр
焼酒
そよい
速伱
あらき
阿剌乞
あも
阿目
ぶうた
補荅
шөнө архи будаа
衣服 金子 銀子 銅錢
ほびつぁそ
忽必叉速
がんぼい
俺炭
もんこ
猛谷
ちゅいあ
主阿
хувцас алтан[42] мөнгө
男子 婦人
これ
額勒
ほとん
哈屯
こちけ
額直革
こけ
額克
эр хатан[43] эцэг эх
兄弟 娘子
てうげ
斗兀
あり?
阿喝
ぷうけ
補兀
こうふけ
我土革
дүү өтөг
腰刀
いるるとう
亦兒度
のうも
奴木
ならそ
納剌速
ちゑゑちゑゑ
扯扯
илд нум нарс цэцэг
타 언어와는 달리 '~국어' 식으로 표제가 달려 있지 않고《북로역어》(北虜訳語)로 되어있다. 《북로역어》는 명나라 시기에 출간된 중국어-몽골어 대역 어휘집이다. # 《등단필구》(登壇必究)에도 인용이 되어있다고 하며 화한삼재도회에서도 소개에 앞서 《등단필구》(登壇必究)에 대략적으로 나온다고 언급하고 있다.

몽골어 단어 부분만은 예외적으로 한자 표기 위에 가타카나도 적혀 있어서 음 표기가 3종(히라가나/가타카나/한자)이다. 그도 그럴 게 다른 언어 표기에서 나오는 한자들은 일본에서의 취음인 반면[44] 이 단락의 한자는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몽골어의 취음 표기라서 그런 것 같다. 때문에 본 페이지에서도 몽골어 단락은 한자 표기까지 입력하였다. 가타카나는 히라가나와 동일하므로 생략했다. 몇몇 예에서는 취음 표기를 잘못 읽은 경우도 좀 보이는 것 같다. 가령 額은 'e' 정도로 읽어야 맞으나 여기서는 こ(ko)로 되어있다. 兀 역시 본문에선 け(ke)로 읽고 있으나 'u' 정도로 읽는 게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때문에 가나만 봐서는 알기 어렵고 한자 표기를 봐야 어형을 추측할 수 있는 예가 좀 있다.

한국어와 함께 오늘날에도 쓰이는 언어다 보니 무슨 단어를 적은 것인지 찾기 쉬운 편이다. 관련 현대 어형을 아래 칸에 써두었다.

5.8. 女眞

[ruby(女眞, ruby=ぢょしん)]
ヂュイチン
여진
별칭: 女直/肅愼( 숙신)/和明、阿之波世(あしはせ, 아시하세)
파일:yeojinn.png 三才圖會云女眞在契丹之東北長白山之下鴨綠水之源古肅慎之地也其地產金故以爲國號其先新羅人曰完顏氏者奔於其地遂世居焉至阿骨打自稱帝國人皆以鹿皮魚皮爲衣
有一種野人膝朌皆縛刀出入晝夜不解輕死重强毒如虎狼男子皆黥其面女眞人與其爲婚者亦刺其口
東國通鑑云昔高麗僧今幸之克守初入女眞居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舌乙生活羅太師活羅多子長曰劾里鉢李曰盈歌盈歌最雄傑得衆心死劾里鉢長者鳥雅束嗣位鳥雅束卒弟阿骨打立完顔氏中興祖於時宋政和五年阿骨打自稱皇帝更國號金侵大遼及高麗至宋端平元年爲蒙古降之蓋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饒猪羊牛馬馬多駿其人鷙勇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朝鮮東海北奴兒干西隣元良哈到大明京師三千五百里日本道凡三百五十里許
大明一統志云女直用石砮其石名水花石堅利入鐵可銼鏃矢土人將取之必先祈神
有長白山者亘千里高二百里倭二十里許其巓有潭周八十里南流爲鴨綠江北流爲混同江東流爲阿也苦河
又有太山者俗甚畏敬之过者不得溲污以物盛去有熊羆豹狼皆不害人人亦不敢殺之
△按肅愼女眞也日本紀云欽明天皇五年十二月佐渡島北御名部之碕岸有肅慎人乗一船舶而淹留春夏捕魚充食彼島之人言非人也亦言鬼魅不敢近之島東部禹武邑人採拾椎子爲熟喫著灰裏炮其皮甲化成二人飛騰火上一尺餘經時相鬪邑人深以爲異取置於底亦如前飛相鬪不巳有人占云是邑人必爲鬾[45]鬼所迷惑不久如言被其抄掠於是肅愼人移就瀨河浦浦嚴忌人不敢近揭而飮其水死者旦半骨積於巖岫俗呼肅愼隈也
齊明天皇四年遣阿部比羅夫討肅慎國獲生羆二隻並羆皮七十張還又次伐蝦夷島比羅夫得大勝利建政所於彼地還

5.9. 大冤

[ruby(大冤, ruby=たいゑん)] 대만
별칭: 臺灣(대만)/東寧(동녕)/塔曷沙古(타카사고)、和、高砂の字を用ゆ(일본에서는 高砂라는 표기를 쓴다.)。/日本に至り、海上六百四十里。(일본까지 바다로 640리이다.)
파일:taiwann.png [46] 大冤在廈門之南百里而中華之巽日本之申酉方甚熱國而春如夏冬如秋其人品卑賤常裸形身甚輕捷如飛以漁獵爲業每食鹿生肉而以鹿皮交易也往古無本主中古阿蘭陀人劫簒之搆城郭以爲日本通路旅館焉於是有國姓爺者父則唐人寓居日本長崎生子國姓爺是也住居廈門福建之思明州也寛文初攻彼島追阿蘭陀人自立爲主改建城郭改塔曷沙古爲東寧既而國姓爺死子名錦舍欲攻滅大清興大明而終不從淸朝至子秦舍之代戰負降于清退出淸皇帝賜王號徙于北京當貞享元年如今則大清置布政司治島也近頃用中華文字五常之人品徐備
 大冤土産
白砂糖 鹿皮 山馬皮 獐皮 木綿 西瓜
大冤は[ruby(廈門,ruby=カモン)]の南、百里に在り、中華の巽、日本の申酉の方。甚だ熱國にして、春は夏如く、冬は秋如く。其の人品、卑賤にして常に裸形、身、甚だ輕捷し、飛ぶが如し。漁獵を以て業とし、每に鹿の生肉を食ひ鹿皮を以て交易す。往古、本主無く、中古に阿蘭陀人、之を[ruby(劫簒,ruby=うば)]ひて城郭をへ以て日本通路の旅館とす。是れに於て[ruby(國姓爺,ruby=こくせんや)]なる者有り。父は則ち唐人、日本の長崎に寓居して子を生む。國姓爺、是れなり。廈門に住居す。福建の思明州なり寛文の初、彼の島を攻め、阿蘭陀人を追ひ、自立して主となり、改めて城郭を建て[ruby(塔曷沙古,ruby=たかさご)]を改めて東寧とす。既にして國姓爺、死す。子を錦舍と名づく。大清を攻滅して大明を興せんと欲し終に[ruby(淸,ruby=しん)]朝に從はず。子の秦舍の代に至りて戰、[ruby(淸,ruby=しん)]に負けて降り、退出す。淸の皇帝、王號を賜て北京に徙す。貞享・元年に當る。如今は則ち大清、布政司を置きて島を治む。近頃、中華の文字を用へ、五常の人品、徐く備る。
대만은 샤먼(廈門) 남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중국의 남동쪽(巽)이며 일본의 남서쪽(申酉)이다. 매우 더워서 봄은 여름 같고 겨울은 가을 같다. 사람들의 성향은 비루하여 항상 벗고 다니며 몸은 매우 재빨라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어렵을 주된 업으로 한다. 늘 사슴 생고기를 먹으며 사슴 가죽을 교역한다. 매우 예전에는 주인이 없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네덜란드인이 이곳을 빼앗아 성을 짓고 일본으로 가는 기착지로 삼았다. 이때를 즈음하여 국성야(國姓爺)라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는 중국인이며 일본 나가사키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이를 얻었다. 그 아들이 국성야이다. 샤먼에 살았다. 복건성 사명주(思明州)이다.[47] 간분(寛文) 초(1660년대 경)에 대만 섬을 공격해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새로 성을 짓고 타카사고(塔曷沙古)라는 이름을 동녕(東寧)이라고 바꿨다. 이윽고 국성야는 죽었다. 아들은 금사(錦舍)라 이름 붙였다. 청나라를 격멸하고 명나라를 부흥하고자 하여 끝끝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들 진사(秦舍) 시기에 이르러서야 청나라에 패배하고( 펑후해전) 항복하고 추방당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왕호(王號)를 하사하고 북경으로 옮겼다. 조쿄(貞享) 원년(1684년)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는 청나라에서 포정사(布政司)를 두어 섬을 통치한다. 근래에는 중국 문자를 쓰고 오륜의 인품이 서서히 정비되고 있다.

5.10. 交趾

[ruby(交趾, ruby=かうち)] 교지
별칭: 安南/日本に至り、海上千四百里。(일본까지 바다로 1400리이다.)
파일:kauchii.png 三才圖會云其人乃山狙瓠犬之遺種其性奸狡剪髮跣足窅昻喙極醜惡其狀類𧞵[⿰衤厲]廣人稱爲夷鬼貌類人者漢馬援兵之遺也國俗父子不同居共爨凡嫁娶不通媒妁男女自相烏合以檳榔爲信然後歸家若妻與他人相通卽休其前夫今其別娶其國乃占城之屬郡其民爲占城之役歲供租稅男子尙賊盜婦女好淫亂自漢中國取之治爲郡縣立交州刺史後漢復叛馬援平之至五代末節度使吳昌文始借王號其後皆稱王歷代皆異姓篡奪至今不絕中華朝貢
△按登壇必究云南古交趾也東至海日本道凡三十二里西至雲南老撾宣尉司界五十六里南至占城界百九十里北至廣西思明府四十里至南京七百七十二里余至北京,,千百十六里半
其國甚煖溫不見霜雪男女皆染齒男則剃百會用中華文字禮義稍備焉福州漳州商人行交易以來于日本者多往昔日本有到于彼其子孫至今間有之
五雜組云荊蠻閩越六詔安南皆昔爲蠻夷今入中國
有仙遊山一名爛柯山相傳有樵夫觀二仙奕碁於是不覺斧柯已爛之山是也
 交趾土産
奇楠 沈香 紗 羅 玉絹 絲線 鳥鮫 鈇刀木 牛黃 藤黃 漆 蠟 胡椒 梹榔 蘇方 椰子油 甘松 肉桂 鮫 紬 沙糖 烏藥 藿香 山歸來

5.11. 東京

[ruby(東京, ruby=とんきん)] 통킹[49]
별칭: 日本に至り、海上千六百里。(일본까지 바다로 1600리이다.)
파일:tonkingg.png 東京即交趾之都府也本爲兄弟至子孫世相爭而交趾與東京分以爲二國兩國之界有山名岐夜牟有肉桂樹以爲天下第一然近頃係兵火山焼肉桂絶根近年東京肉桂最鮮焉其人物與交趾同但不剃項而束髮黑齒用中華文字知經書
 東京土産
黃絹 綾子 黃絲 縐紗 紗 羅 天鵝絨 五絲[50] 木綿 縮砂 麝香 肉桂 紦 綃 龍眼肉 藿香靑葉 石黃 亞鉛 蘇方 檳榔 紕 漆上 山歸來 陶器 漆器 天禮女牟天以奈 獲神香
東京は即ち交趾の都府なり。本々、兄弟とす。子孫の世に至りて相爭て交趾、東京と與に分けて以て二國となる。兩國の界に山有り、[ruby(岐夜牟,ruby=キヤン)]と名づく。肉桂の樹有り、以て天下第一とす。然るに、近頃、兵火に[ruby(係,ruby=かか)]り、山焼く、肉桂、根を絶つ。近年、東京、肉桂、最鮮し。其の人物、交趾と同じく。但だ、項を剃らずして、髮を束ね、齒を黑し、中華の文字を用ゑ經書を知る。
통킹은 교지(交趾)의 수도이다. 교지와 통킹은 본래 형제이다. 자손 대에 이르러 서로 싸워 교지와 통킹으로 나눠지고 두 나라가 되었다.[51] 두 나라 사이에 산이 있는데 캰 산이라고 한다. 육계(肉桂) 나무가 있어 품질이 천하 제일이다. 그런데 근래에 전쟁으로 인해 산이 타고 육계나무의 뿌리가 많이 없어졌다. 오늘날 통킹의 육계는 아주 신선하다. 인종은 교지와 동일하다. 단, 목덜미를 밀지 않고 머리를 묶으며 이를 까맣게 하고 중국의 문자를 써 경서를 안다.

[1] 본 문헌은 개별 인물을 다루는 부분이 매우 적다. 64권 후반부에서 불교 관련 인물들을 다루는 정도만을 꼽을 수 있을 뿐이다. [2] 전체 6000개 표제어 중에서 이렇게 10쪽이 넘게 서술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22권 형벌구(8쪽)처럼 매우 짧은 권보다도 많은 분량이다. 1888년본을 기준으로 1쪽을 꽉 채우면 약 500자 정도가 들어가니 10쪽이면 분량이 약 4000~5000자 정도인 셈이다. [3] 청령국은 '잠자리 나라'라는 뜻으로 일본의 별칭이다. 일본의 지형이 잠자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4] 이 뒤에 화한삼재도회 13권에서는 아래에서 보듯 타타르와 여진이 이어지나 청령국지에는 빠져있다. 14권 내용은 100여개 가운데 17개만 발췌되어있다. [5] 위 이미지의 히라가나 첫 글자는 처럼 보이지만 헨타이가나이다. 헨타이가나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波에 대응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は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화한삼재도회가 간행된 1712년도에 비행기가 없었으리란 것은 상식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니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 최초의 비행기는 미국인 라이트 형제 1903년에 날린 플라이어(Flyer)로 본다. 화한삼재도회의 근대 출간본 시점인 1888~1900년 경에도 비행기는 발명되지 않은 상태였다. [7] 한국에서는 10리가 4km라 한국 10리 = 일본 1리 정도가 된다. 이 때문에 엄마 찾아 삼만리는 원제에서 '삼천리'인 등의 그런 차이가 있다. [8] 실제로 도쿄에서 6000km 떨어지려면 동남아시아를 훨씬 넘어서 뉴델리, 이슬라마바드 남아시아까지 가야 한다. [9] 馬六甲, 麻六甲이라고도 하는데 앞의 '말' 부분이 떨어진 것이다. [10] 중국을 가리키는 옛 일본어 표현인 もろこし도 부기되어있다. [11] 원문의 ' 진단'(震旦)은 산스크리트어 시니타나(cinitana)의 음역으로 동쪽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중국은 스스로를 가운데로 보았지만 인도에 비해서는 동쪽이므로 진단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단어를 국명에 자주 쓴 것은 한국 계열 국가로 발해가 '진단'을 국호로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태봉의 국호 중 하나인 마진(摩震) 역시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줄임이라는 설이 있다. 더 나아가 단군(檀君)과 연결지어 震壇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 [12] 백월(百越) 혹은 제월(諸越)의 훈독. [13] 이 서한의 내용은 고려사 원종 8년(1267년) 8월 22일자 기사에도 실려있다. # [14] 원문에는 이렇게 다루고 있으나 조선과 선비족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15] 이어지는 ぐ를 보았을 때 고형 '바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16] 일본어 표기는 /mɯ.ɾɯ/ 대신 /bɯ.ɾɯ/에 가깝게 되어있다. 한국어의 비음은 비음성이 약한 편이라 동일 조음 위치의 유성 파열음으로 들릴 때가 많다. 즉 일본인들은 한국어의 /ㄴ/를 /n/ 대신 /d/로 듣고는 한다. 이 사례 역시 한국어의 /ㅁ/를 /m/ 대신 /b/로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17] 虎班 [18] し로 쓴 것으로 보아 고형 '아ᅀᆞ'를 표기한 듯하다. [19] 옛 어형 '닐곱'의 어두 /ㄴ/를 /n/가 아니라 /d/로 듣고 표기한 듯하다. 한국어의 비음은 비음성이 약하여, 한국어 모어 화자가 아닌 이에게는 동일 조음 위치의 유성 파열음으로 들릴 때가 많다. [20] 佐野三枝子(2001:135-138)에서 로마자 전사형과 대응되는 어형을 다루고 있다. - 佐野三枝子(2001). "日本 資料에 나타난 近代 韓國語의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5-138. [21] 허인영(2021), 전사 자료를 통해 본 한국어 전설모음의 형성 과정,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2] 독음이 ちんら로 되어있는데 한국식 한자음으로 치면 '침라'로 읽은 모습이다. 일본에서도 보통은 '탐라'에 대응되는 たんら라고 읽고 ちんら라고 읽는 것은 흔치 않다. # 일본이나 한국이나 은 たん/탐으로 읽지 ちん/침으로 읽지 않는데 아무래도 冘이 들어가는 다른 한자들(, )을 보고 ちん(침)이라고 오해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 [23] 그런데 덴지 천황은 672년 사망하여 덴지 천황 7년은 있을 수가 없다. 이후에는 덴무 천황(天武天皇)이 뒤를 잇는다. 674년은 덴무 천황 3년이다. [24] 한국어 ' 오랑캐'의 기원이 된 부족 이름으로 유명하다. [25] 개평은 상도라고 한다. 북경과 가까운 편이다. [26] 우측에 ロニ와 유사한 자형이 보이나 판독하기 어렵다. [27] 봉미초(鳳尾蕉)는 소철(蘇鉄)의 다른 이름이다. 훈 ソテツ는 소철의 일본식 음독이다. [28] 包丁(ほうちょう)라고 쓴다. 부엌칼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氵軟] [30] 이 뒷줄은 단어가 제시된 뒤에 실려있다. [31] 참고 페이지 #1, #2 [32] 오늘날에는 斑け라고 쓴다. # 文의 '무늬'의 의미로 쓴 것이다. [⿰氵軟] [34] 여동생(妹)도 같다고 본문에 부기되어있다. [35] 한국어 웹에서 자세히는 나오지 않으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칭하는 것 같다. [36] 사마르칸트 음역이다. 중국어로는 지금도 사마르칸트를 撒馬兒罕(간체로 撒马尔罕)이라 한다. 다만 일본 가나 표기는 잘 맞지 않는다. 특히 兒는 중국 음으로는 /r/ 계열이나 여기서는 일본식으로 ジ(지)라고 읽고 있어 음이 완전히 달라진다. 아울러 사마르칸트는 다음 권 14권에서도 개별 항목으로 다루고 있다. [37] 1715년본에는 おぼると로 전훈독되어있다. [38] 코에이에서 만든 칭기즈 칸 관련 게임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는 이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39] 몽골족과 만주족을 광의의 유목 민족으로 보았는지, 원을 세운 몽골족과 청을 세운 만주족을 굳이 뚜렷이 구별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청의 홍타이지는 원의 대원전국옥새(大元傳國玉璽)를 확보한 후, 만주의 한이자 몽골의 대칸임을 자처하였다. 서양 사료에도 청조를 타타르 왕조로 서술한 것이 있다. [40] hodun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몽골어 од(od)는 이 어형에서 탈락을 거친 것 같다. # [41] awula 정도로 재구되는 것 같다. 현대어 대응형을 찾기는 다소 어렵다. #(자동 다운로드) [42] 정확히 '금'은 алт고 алтан은 관련 어형인 것 같다. 참고 페이지 가나 표기 がんぼい는 음이 완전히 다른데 아무래도 炭(탄)을 灰(회)로 잘못 본 것 같다. [43] 그냥 부인이라기보다는 왕후, 귀부인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구글에 "哈屯"이라고 치면 몽골의 왕후들이 많이 나온다. 한국에선 보통 ' 카툰'으로 음차하는 듯하다. [44] 때문에 가나 글자 수와 한자 글자 수가 항상 동일하다. [45] 원문은 ⿺鬼友이다. [46] 1715년본과 유독 그림의 느낌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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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본은 좀 더 우직한 인상이다.
[47] 思明은 오늘날 샤먼시의 구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 [⿰衤厲] [49] 통킹은 하노이를 가리키는 옛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통킹 만으로 유명하다. [50] 원문은 ⿰糹系로 되어있다. [51] 베트남/역사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근래의 일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후 레 왕조/ 막 왕조로 분단된 시기(1533-1592)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