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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미상 | ||
사망 | 서기 17년 (향년 ?세) | ||
재위기간 | 카파도키아 국왕 | ||
기원전 36년 ~
서기 17년 (50~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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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아르켈라오스 어머니 글라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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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피토도리다 | ||
자녀 | 글라피라, 아르켈라오스 | ||
형제자매 | 없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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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파도키아 왕국 15대이자 마지막 국왕. 폰토스 여왕 피토도리다의 국서를 겸하기도 했다.2. 생애
폰토스 왕국 제8대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장군이었던 아르켈라오스의 증손자라고 전해진다. 증조부 아르켈라오스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소아시아 일대를 평정하고 그리스까지 진격했지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연전연패했다. 기원전 85년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미트리다테스 6세를 버리고 로마에 귀순했다. 또한 조부 아르켈라오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신전 국가인 코마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기원전 56년 베레니케 4세에 의해 남편으로 받아들여져 왕을 칭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고자 이집트로 진격한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로마군에게 붙들려 처형당했다.아버지 아르켈라오스는 코마나 대제사장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기원전 51년 카파도키아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가 암살당하자 자기가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킬리키아 총독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를 제지하고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의 장남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를 군주로 공인하면서 좌절되었다. 그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7년 동방 일대의 질서를 재편할 때 폐위되었다. 그는 미녀로 알려진 글라피라와 관계를 맺고 아들 아르켈라오스를 낳았다.
그 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서 동부 지중해 세계를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소아시아에 부임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기 전에 글라피라와 단기간 성관계를 맺고, 그녀의 아들을 좋은 직위에 앉히겠다고 약속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1년 카파도키아 왕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처형하고 아르켈라오스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반면 디오 카시우스는 기원전 36년에 그 일이 일어났으며, 안토니우스가 수행한 동방의 정치 조직 개편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서기 14년 로마에 투옥될 때까지 50년간 통치했다는 타키투스의 기록을 근거로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의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 안토니우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의 내전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항구 도시인 엘라이우사 세바세테와 그 주변 킬리키아 해안, 소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을 수여받았다. 그는 그 대가로 해적들을 근절하고 파르티아에 대항해 견고한 요새를 짓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궁전을 엘라이우사 세바세테로 이전하고, 가르사우라 마을을 아르켈라이스로 개명하고 행정 중심지로 개편했다. 기원전 23년, 그는 신하들에게 폭정을 일삼고 파르티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그는 막 공직 생활을 시작한 젊은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티베리우스는 재판에서 그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그의 왕위는 공고해졌다.
한편,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 글라피라를 낳았다. 글라피라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결혼하여 티그라네스 5세와 알렉산드로스를 낳았다. 티그라네스 5세는 나중에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고, 동생 알렉산드로스의 아들 역시 티그라네스 6세로서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르켈라오스는 예루살렘에 종종 들렀고 헤로데 대왕과 자신의 사위인 알렉산드로스간의 갈등을 중재해 양자를 화해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헤로데 대왕은 아들에 대한 의심을 끝내 떨치지 못하고 기원전 7년 알렉산드로스를 처형했다.
글라피라는 지참금을 돌려받고 카파도키아로 돌아간 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했다. 유바 2세는 문학과 과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여러 저작을 집필했다. 그 역시 유바 2세와 교류하면서 지리학과 광물학에 관심을 보였다. <바위와 강들>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고, 광물학과 관련된 여러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훗날 대 플리니우스는 ' 박물지'에서 광물을 다룰 때 그의 저서를 많이 참고했다.
기원전 8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폴레몬 1세가 죽고 미망인인 피토도리다가 폰토스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피토도리다와 결혼하고 그녀와 그녀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아르탁세스 3세와 폴레몬 2세를 카파도키아 궁정에서 지내게 했다. 그렇지만 피토도리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대 율리아와의 불화, 마르쿠스 롤리우스 등 정적들의 심한 압박, 아우구스투스의 지나친 간섭을 견디다 못해 로도스 섬으로 은퇴했다. 그는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와 종종 만났지만, 그는 이제 가망없다고 판단해 매우 냉정하게 대했다. 티베리우스는 과거에 자신의 변호 덕분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적이 있었는데도 경멸어린 태도로 대하는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뒤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가 되면서, 그의 입지는 매우 불안해졌다.
17년,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노령으로 인한 병환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자살했다는 설을 역사서에 동시에 기재했다. 그가 사망한 뒤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피토도리다와 두 아들은 폰토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