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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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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 이전2. 19세기3. 20세기4. 21세기

1. 독립 이전

약 1만 8천년 전부터 다양한 원주민들이 시베리아에서 베링 해를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을 거쳐서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점차적으로 남하하면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칠레 북중부 일대는 15세기 들어 잉카 제국에 정복되었지만 중남부 일대는 마푸체, 알랄카루페, 우이지체, 피쿤체, 셀크남 등의 잉카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남미 원주민이 부족 단위로 터를 잡고 살았다.[1] 즉 칠레 북부는 안데스 문화권의 연장으로 원래 잉카 문명이 꽃피던 곳이었으며 남부 파타고니아는 마푸체족과 셀크남, 카웨스카르 등 기타 원주민 부족들이 원시적인 수렵과 어업을 펼치며 살고 있었다.

16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으로 식민지를 만들며 진출한 스페인 제국이 이 일대 지역들을 정복해서 식민지로 삼았다. 칠레에 해당하는 지역은 페루 부왕령이라는 행정 구역에 속해있었다. 스페인 제국은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에 비해 유럽 본토와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개발에 관심이 적었을 뿐더러 원주민들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고 스페인 식민 시절 칠레는 가난한 식민지로 남았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부르봉 왕조가 칠레 일대에 대한 개발 계획에 착수하면서 스페인 본토 주민 상당수를 식민시키고[2] 태평양 쪽에 항구를 추가로 프랑스에 개항한 것을 계기로 18세기 이후에는 칠레에도 상당한 수준의 크리오요 부유층 사회(이른바 "카스티야-바스크 귀족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칠레는 3세기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은 뒤 1810년에 독립했다.

2. 19세기

아르헨티나, 페루와 함께 이 나라의 독립 영웅은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와는 달리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1778~1850)이다. 그러나 칠레에서 '해방자(El Libertador)'라 하면 보통 산 마르틴이 아니라 칠레 초대 지도자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3]를 가리킨다. 물론 남아메리카 각국의 독립운동 당시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오이긴스가 이끄는 칠레 독립군을 지원해주기는 했다.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세 나라의 해방자를 자처했으나 결국 갑자기 떠나버리고 페루는 시몬 볼리바르가 아르헨티나는 마누엘 벨그라노, 그리고 칠레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가 각각 해방시킨다. 아무튼 그 후 1818년 정식으로 독립국으로 승인되었고 스페인 1844년에야 칠레의 독립을 인정했다.

1851년과 1924년 사이에 칠레는 유럽계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중 유럽 본토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잉여 땅에 불과했지만 칠레가 독립 국가가 된 이후부터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캘리포니아 그리고 호주를 잇는 항구들을 보유한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개발을 추진하였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요 이민 목적지는 대서양과 마주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었고, 대서양과 접하지 못한 칠레의 경우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에서 다시 칠레로 이민하는 사람들을 주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단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열대/아열대성 기후를 띄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들과 달리 칠레 남부는 지리적으로 극지방인 남극과 가깝고, 유럽인들이 정착해서 살기 좋은 온대 및 한대기후를 띄고 있다.[4] 19세기 중후반에 정착한 약 8000여 명의 프랑스인 이민자들은 칠레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오늘날 칠레가 세계적인 와인 양조국가로 거듭나는데 기여하였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레바논인 이민자들에게 밀려난 팔레스타인인 출신 이민자들이 칠레로 재이주 정착하기도 했다. 칠레 사회에 더 큰 영향을 준 이민자 그룹은 19세기 도착한 약 3만여 명에 달하는 독일계 이민자들과 58,000여 명에 달하던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들 수 있다. 독일계/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은 그동안 백인 인구가 희박하던 칠레 남부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현지 원주민들을 소탕하면서 빠른 속도로 동화시켰는데 이들 독일계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원주민 인구 비율이 높았던 칠레 남부에 메스티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원주민에 대한 잔혹한 탄압과 학살극이 극심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 항구와 인접한 초석 광산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영국인/아일랜드인 광산업자들이 정착하기도 했으나 1차대전 종전 이후 초석 광산의 사업성이 낮아지자 이들 상당수가 칠레를 떠나기도 했다.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부르주아의 성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멕시코시티나 리마와 같은 스페인 제국의 대도시보다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자립하기에 여의치 않았던 칠레에서 나타났다.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 러시는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칠레의 농산물 시장에 커다란 수요를 창출했다.[5] 한편 유럽은 칠레의 초석과 구리 광산을 개발하여 그것들을 대량으로 가지고 갔다.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 연합국과의 아타카마 사막에 매장되어 있는 초석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페루는 남부지역을 상실했다. 자유항 발파라이소를 중심으로 태평양 무역을 지배하게 된 칠레는 이제 국가적으로 거대한 부를 얻었고 자유주의적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확장의 대가는 비쌌다. 칠레는 구리와 초석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계 시장의 가격변동에 따라서 칠레의 운명 또한 부침했다. 독립국 칠레는 세계시장이 칠레에 의존 하는 것 이상으로 점점 더 세계시장에 의존하게 되었고, 뒤에 독일에서 인공 질산염의 생산이 시작되면서 칠레는 거의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기 10여년 전인 1918년에 칠레는 파산했다. 그러나 자유무역의 시대였던 19세기 최전성기에 칠레의 정치는 그 경제 발전과 상응하면서 놀라울 만큼 발전을 이루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인접국인 볼리비아와는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이후 사이가 극악이 되었다. 칠레가 안토파가스타 주 등 볼리비아 땅이던 태평양 해안가 지역를 뺏어먹어 볼리비아가 바다 출입구를 잃은 내륙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볼리비아는 티티카카 호수와 아마존 밀림 지대 내륙 하천에 소규모지만 해군을 두고 있으며[6] 과거 볼리비아령이었다가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전해 칠레에게 빼앗긴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한 영토반환을 요구하며 칠레와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해 바다를 잃고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의 입장에선 해양진출을 주장, 칠레에게 이 지역에 대한 영토 반환과 항구 사용권을 요구하며 외교적으로 맞서고 있지만 군사력도 칠레가 볼리비아보다 강대한데다가[7] 안토파가스타의 지역주민들 대다수가 칠레령 잔류를 원하며[8] 볼리비아로의 귀속을 거부, 반대하고 있어 분쟁의 양상이 전반적으로 칠레에게 유리한 실정이다. 게다가 칠레는 안토파가스타를 돌려달라는 볼리비아의 요구에 볼리비아가 파라과이 브라질로부터 빼앗긴 그란차코, 아크레 지역부터 먼저 돌려받고 오라며 무시하고 있다. 근데 볼리비아가 그란차코와 아크레 지역을 파라과이와 브라질로부터 다시 되돌려받아도 칠레가 안토파가스타를 볼리비아에게 돌려줄 거 같지 않다. 라틴아메리카 4각 관계.

3. 20세기

1930년대까지 계속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상인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이끈 보수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면서 비교적 일찍 정치 안정을 이룬다. 하지만 칠레 역사가 가브리엘 살라사르는 정치 안정이 곧 좋은 정부라는 뜻은 아니라며 포르탈레스 체제를 엄청나게 깐다.

안데스산맥 일대에 위치한 국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이후에는 잉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면서도 한편으로 독립 이후에도 상당히 장시간 동안 백인지배층에 의해 원주민인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진행하였다. 또한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도 소외되어 왔다.[9] 덕분에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더불어 원주민 비율이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다.[10] 상술한대로 독립 이후 마푸체족과 알랄카루페족 등 원주민들이 살던 칠레 중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유럽계 이민을 정착시킨 일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경찰이 우리 땅 내놓으라고 시위하는 마푸체족을 죽이거나 폭행하는 일이 잊을 만하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군사정권 시절도 지났는데 경찰이 끌고 간 마푸체 청년이 '행방불명'된다든지 등등. 그리고 인종차별과 관련된 또 다른 상징적인 사례로는 2009년 대선 때 마푸체족 노인 하나가 주민등록에 '죽은 사람'으로 처리돼서 투표를 못 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

지금은 1989년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민간정부가 들어섰지만, 1970년대~ 1980년대에는 군부독재로 악명이 높았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가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민선대통령이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저항 끝에 자살하고[11], 반란군은 정권을 탈취에 성공했다. 곧바로 피노체트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었는데, 초기 몇년간은 반대파 탄압이 워낙 지독해서 십만명 단위로 정치적 망명이 대거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 망명자들은 미국, 프랑스, 스웨덴이나 바티칸의 칠레 주재 대사관이 받아들여서 다른 나라로 피신시켜 주었다. 여기에는 가톨릭이 종교적 주류인 칠레의 특성 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2] 그리고 이 때 호주, 뉴질랜드로 칠레인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어 현재도 시드니에서 칠레계 호주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베네수엘라도 칠레인 이민자들을 수십만명이나 받아들여 피노체트의 독재로부터 보호했는데 때문에 칠레계 베네수엘라인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상당수가 피노체트 정권 붕괴 후 고국으로 귀국했다.

피노체트는 16년간의 독재기간 동안 무자비한 살인, 고문, 구금 등을 저지르며 반인륜적 폭정을, 학정을 벌였다. 당시 정보기관이자 비밀경찰인 칠레 국가정보부(DINA)가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경제적으로는 GDP를 상당히 상승시키긴 했으나[13] 빈부격차 확대/국채 급증 등의 부정적 결과도 상당히 끌어온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4. 21세기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우루과이와 함께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군에 속한다.[14] 그리고 도시철도가 여러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아르헨티나에 상당히 밀리며[15], 2017년 기준으로는 에콰도르와도 비슷해졌다. 칠레의 물가는 남미에서 비싼 데다가 최저임금 수준의 봉급으로 먹고 사는 빈민층들도 많고 공공요금이나 교육비도 비싸다. 당연히 먹고 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다만 그럼에도 임금수준이 남미기준으로는 비교적 높은 축에 속해서, 최저임금 수준이 칠레에 비해 월등히 낮은 페루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서 이 정도 수준의 임금도 높다며 노동자들이 오는 일이 많다.

2017년에 칠레 정부는 낙태완화정책을 실시할 예정이다. #

2019년에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가려져 주목을 못 받았지만 저 둘보다 더 심각한 폭동 수준의 시위가 일어났다. 2019년 10월 20일에 칠레에서는 산티아고 수도권 지하철 요금이 올라가자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발생되었고 칠레 정부는 경찰력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했고 하원에서는 지하철 요금 인상안을 백지화시켰다. # 그리고 비상사태와 통행금지령을 확대시켰다. # ## 그리고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10월 22일에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한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연금 20% 인상 등 개혁안을 제시했다. # 칠레 정부는 민심 달래기에 나섰고 유엔도 인권조사관을 파견하기로 밝혔다. # 10월 25일에는 산티아고에서 100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석했다. # 결국 10월 30일에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APEC정상회의는 취소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칠레에서 반정부시위가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칠레 정부는 개헌작업에 서둘러 착수했다. # 또한 UN은 2019년 12월 13일에 보고서에서 칠레 경찰이 반정부시위대에 대해서 불법적인 살인과 학대, 성폭력 등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 한편 칠레에서 반정부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칠레 내무부가 K-Pop 팬들이 반정부시위 동참을 부추겼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자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 2019년 12월에는 칠레에서 반정부시위가 2달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시위가 다시 격렬해졌다. #

그러나 2020년으로 들어서면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로 칠레 시위도 저절로 가라앉고 동력을 상실했다. 그래도 결국 피노체트 이후에도 군사독재의 그림자가 남아있는, 40년간 유지되어 온 헌법을 개헌하려 시도하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 2021년 4월 투표로 제헌위원이 선출되어 2022년 9월 국민투표로 개헌 승인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공기업과 공공기관에 무조건적으로 여성임원 50% 할당제를 의무화하는 등 지나치게 좌파적인 개헌안은 정작 국민투표에서 62%에 가까운 반대표를 받고 폐기되었다

2021년 2월 7일에 곡예사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자 시위가 발생했다. #

5월에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기존 정당들이 크게 몰락하고, 무소속이 약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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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크남 같은 경우 학계에서는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1세기 이후 칠레에서는 보고된 바 없으며, 극소수가 아르헨티나에 살아남았다는 말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 [2]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 은광이 서서히 고갈되면서 수입이 감소하자 내놓은 정책이었다. [3] 성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아일랜드인 귀족 가문 출신이다. [4] 방한복이나 긴팔 옷을 입고 여행을 가야 할 정도로 기후가 쌀쌀한 곳이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 지방들이다. 여기는 푼타아레나스나 마르델플라타처럼 아예 겨울철에 눈 내리는 지방도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남극과 가깝다. 뉴질랜드 남섬과 기후가 똑같다. [5] 당시 아직 파나마 운하 및 캘리포니아 횡단 철도가 완성되기 이전이었다. [6] 무려 해병대까지 두고 있다. [7] 일례로 F-16이나 F-5 등 전투기 여러 대를 보유, 운용하고 있는 칠레 공군과 다르게 볼리비아 공군에는 전투기가 하나도 없다. [8] 메스티소,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등 해당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역내 칠레인 주민들 대다수가 인종 구분 막론하고 칠레 영토로 남기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9] 원주민 인디언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도 예외는 아니다. 그나마 볼리비아와 페루는 원주민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라도 했었지만 칠레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는 원주민 출신 정치가가 대통령이 되거나 유력 대선후보가 된 사례는 없었다. [10] 그래도 칠레, 아르헨티나보다 영토면적이 작고 자국내 원주민 집단들이 좁은 영내에서 멸족되다시피한 다른 남미의 백인계 국가인 우루과이보다는 소수지만 원주민들이 남아있는 편이다. [11] 쿠데타군 장교가 자동권총으로 암살해서 타살당했단 설도 있으나 2011년 7월 재부검 결과 자살로 결론났다. [12]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현지인의 망명이 받아들여지는 사례가 있긴 한데, 이는 주로 현지 국가에 외교적인 약점이 있고, 해당 공관을 설치한 국가가 현지인의 망명을 거부하기 어려운 명분이 있으며, 공관을 설치한 국가의 국력이 현지 국가에 비해 우월해서 현지 국가의 압력을 배재하고 역으로 현지 국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13] 경제파탄으로 끝을 맺었던 브라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정권과 다르게 아직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과실은 무분별한 민영화 때문에 상류층이나 중상층들 정도나 혜택을 봤고, 중산층 이하는 다른 중남미국가 빈곤층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건 마찬가지였고 실제 피노체트 후반기 때 경제는 성장했기는 했다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된 상태였다. 민주화 이후로 이 추세가 반전되기는 했다만 빈부격차는 여전히 넘사벽급이라고 민영화정책도 여전히 잘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빈부격차는 여전하다. [14] 2015년 기준 우루과이에 이어 2위 [15] 다만 아르헨티나가 농산품은 비교적 싸기는 하지만, 공산품 물가는 부가가치세나 중간 이윤등의 요인으로 비싸다보니 아르헨티나에서 칠레로 쇼핑을 오는 경우가 많다. 아르헨보다 칠레가 더 공업화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