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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정치사/전기/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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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반도의 경우 수에비족 알란족, 반달족들이 먼저 들어와 서로 연합된 상태였고, 이중 알란족이 연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 일대에 정착한 서고트족들이 서로마 제국과 손을 잡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하면서 418년 수에비는 이베리아 서북부로 밀려나고 알란족은 크게 패하면서 반달족에게 흡수되었고, 반달족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축출되었다.

이후 438년 레칠라가 수에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영토 확장을 시도해 448년까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레칠라 사망 후 다시 서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의 공격을 받고 영토가 다시 줄어들었고, 잔존 세력들은 재각기 여러 왕들을 웅립하였고, 이렇게 웅립된 왕들은 누가 진정한 왕인인지를 두고 456년부터 469년 동안 혼란기를 맞이하다가 레미스문트 이후 90여년 동안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서고트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1.1. 수에비 왕국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수에비 왕국은 90년간의 공백기 중이었고, 이기간 왕들이 어떠한 행적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쯤에 아리우스 파에서 가톨릭으로 전환하면서 당대 역사가들을 겸하고 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수에비 왕국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수에비 왕국이 언제 가톨릭으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해서 제각기 연대기들마다 차이가 있으나 현재 다수의 학자들은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는 558년 5월이나 559년 4월 사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아리아미르의 치세부터였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561년 5월 제1차 브라가 공의회를 개최해 가톨릭을 왕국 각지에 전파하는 방한을 논의했다.

반면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다음 왕인 테오데미르 아래에서 가톨릭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아리아미르와 테오데미르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두 사람은 다른 인물이며, 아리아미르 왕이 가톨릭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뒤 테오데미르 대에 이르러 국교로 확정되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테오데미르 다음 즉위한 미로부터 치적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 572년, 미로는 칸타브리아에 거주하는 바스크 부족인 루스콘 족과 전쟁을 벌였다. 이는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행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을 자극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겠다는 야망에 불탔던 리우비길드는 서고트 왕국에게 매년 공물을 바쳤던 루스콘 족을 공격한 점을 빌미삼아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리우비길드는 573년 사바리아에 진군하여 사프 부족의 영역을 황폐화시켰는데, 사바리아는 자모라와 살라망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곳을 점령한 의도는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전초기지 마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우비길드는 아들 헤르메네길드 레카레드에게 점령지를 임의로 다스리게 했다. 574년, 리우비길드는 칸타브리아로 진군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모조리 분쇄하고 수에비 왕국을 더욱 압박했다. 576년, 리우비길드는 수에비 왕국의 본토인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미로 왕이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며 매년 공물을 바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하자, 리우비길드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이렇듯 서고트 왕국의 공세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미로는 이에 대응하고자 내부 단결을 꾀했다. 572년 제2차 브라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조직 체계를 재정비했으며, 브라가 대주교이자 갈리시아의 대주교인 두미오의 마르틴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마르틴은 미로의 조언자들에게 왕에게 더욱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저서를 읽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580년 부르군트의 왕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견제해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동맹인 프랑크-네우스트리아의 왕 힐데베르트 2세의 군대에 사로잡혀 파리에 억류되었다가 1년 후에야 풀려났다. 한편 리우비길드는 579년경 아들 헤르메네길드와 프랑크-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의 결혼을 주선해, 프랑크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하고자 했다.

580년, 헤르메네길드가 아내 인군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단인 아리우스파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미로는 583년 헤르메네길드의 반란을 지원하고자 세비야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자신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서고트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가 며칠 만에 세비야 인근의 나쁜 물과 건강에 해로운 기후의 여파로 심각한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그 뒤를 아들 에보리크가 즉위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군주 리우비길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권위에 의존해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584년 안데카가 이끄는 반 고트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수도원으로 보냈고, 이소식을 들은 리우비길드는 충실한 가신을 해친 반역자를 무찌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에비 왕국을 공격했다. 비클라의 요한에 따르면, 리우비길드는 갈리시아를 황폐화시키고 안데카의 통치하에 있던 국고와 땅을 확보하고 고트족의 영역으로 삼는다.이소식을 들은 말라리크라는 자가 갈리시아에서 거병하며 수에비의 왕을 칭했다. 그러나 얼마 후 리우비길드의 부관에게 패배하여 체포된 뒤 리우비길드에게 끌려가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1.2. 서고트 왕국
1.2.1. 가톨릭 개종 전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에게 패해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자 서고트의 귀족들은 아직 어렸던 아말라리크 대신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인 게살레크를 추대하지만 4년 만에 수도인 툴루즈마저 함락당하자 나르본으로 파천하지만 얼마안가 나르본까지 공격당하면서 결국 피레네 산맥 넘어 바르셀로나로 수도를 옮긴다. 하지만 부르군트 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까지 공격하자 결국 히스파니아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긴다.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처음에는 그가 서고트 왕이 되는 걸 용인했지만, 연이은 패전을 당하는 걸 보고 등을 돌렸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 1세와 협상해 프랑크 왕국이 아키텐을 획득하는 대신 서고트 왕국을 유지하는 걸 동의하게 한 후 군대를 파견해 바르셀로나까지 침입했던 부르군트족을 격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 후 510년 게살레크가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서고트 귀족 고야리크를 처형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아말라리크를 새 왕으로 추대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511년 군대를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동고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르셀로나에 입성했고, 아말라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왕'으로서 서고트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탈리아에 남아 통치를 행사했고, 리우비리투스와 암펠리우스를 민사 감독관에, 테우디스를 군사 담당관에 선임하여 히스파니아를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 신민들은 자신이 정한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두 종족간의 혼인을 후원했다. 한편, 게살레크는 아프리카로 도주한 뒤 반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반달 왕 트라사문드는 동고트 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그는 갈리아 남부로 이동한 뒤 프랑크 왕국이 장악하고 있는 아키텐으로 이동하여 프랑크 왕국의 후원을 받아 복위를 꾀했다.

당시엔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네 아들에게 분할되어 있었다. 이 네 명의 왕들은 권력을 확장해 상대방으로부터 복종을 얻어내길 갈망했지만,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테오도리크 대왕과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후원을 받으려는 게살레크의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 간 세월을 보내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몇몇 서고트 귀족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513년 바르셀로나 외곽에서 테오도리크의 부관 이바스에게 참패했다.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지만 뒤랑스 강을 건너려다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뒤, 아말라리크는 비로소 실권을 잡았다. 그는 히스파니아 신민들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지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동고트 관료들이 계속 머무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527년 톨레도에서 정교 사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529년 현치인 출신의 스테판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세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며 지난날 부이예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를 아내로 삼는 등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서고트 궁정 내에서 배척당했다. 왕국에 큰 손실을 입힌 클로비스 1세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은 데다, 아리우스파를 고수하는 귀족들 입장에서 정교를 믿는 왕비를 곱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갔을 때 거름 등 여러 가지 불순물을 그녀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내를 너무 심하게 때려서 코피가 났고, 그녀는 피묻은 손수건을 오빠 킬데베르 1세에게 보냈다고 한다.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31년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던 나르본을 침공해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킬데베르는 여동생과 지참금을 챙긴 뒤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아말라리크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척 역시 알려진 바 없었기에, 알라리크부터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는 단절되었다.

아말라리크 사후, 서고트 귀족들은 몇달 동안 새 왕으로 누구를 세울 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테오도리크 대왕에 의해 아말라리크의 군사 방면 후견인으로 선임되었던 테우디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동고트 계열이던 그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랜 기간 군사 업무를 맡았고 2,000명의 사병을 갖추고 히스파니아의 로마 귀족가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데다 동고트 왕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왕위에 오른 테우디스는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해 국경지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프랑크군이 점령한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고, 나르본을 완전히 떠나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다만 수도를 정식으로 정하지는 않았고, 툴레도와 세비야도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그리하여 남부 갈리아를 사실상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이베리아 반도 남부 해안 지역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이베리아 남부 해안 지역은 한때 수에비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5세기 중반 수에비 왕국이 서고트족에게 참패한 뒤 서고트 왕국 역시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베티카의 여러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 명목상 충성을 바쳤지만, 실제로는 무제한의 자치를 누렸다. 그는 이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공세의 진행 과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곡창지인 과달키비르 계곡 일부 지역을 공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지브롤터에 이르렀을 때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카르타고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달 왕국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우타 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곧 공세에 착수해 세우타를 공략하고 그곳의 고트 수비대를 섬멸했다. 동로마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세우타에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함대를 배치해 고트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뒤이어 반달 왕국이 소유했던 발레아레스 제도도 동로마 해군에 의해 공략되었다.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군주 헬데바두스는 고트족끼리 힘을 합쳐 동로마 제국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그 역시 동로마 제국의 연이은 공세에 위협을 느꼈기에 지원군을 곧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541년 헬데바두스가 피살당하면서 연합 계획은 중단되었다.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테우데베르 1세가 두 삼촌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팜플로니아를 점령한 뒤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인들은 성 빈센트에게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군이 49일간의 포위전 끝에 사라고사를 함락했다고 하며, 사라고사의 교회 유물인 성 빈센트의 튜닉이 프랑크군에 약탈당했고, 칠데베르트 1세는 파리의 성문에 튜닉을 갖다대고 못을 박았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테우디기셀 휘하 고트군을 피레네 산맥에 매복시켰다. 프랑크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짊어진 채 귀환하다가 산길에 매복하고 있던 고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돌아갈 길이 끊기자, 프랑크군은 테우디기셀에게 뇌물을 줘서 하루 동안 길을 열게 했다. 테우디기셀은 그들이 산길을 지나가는 걸 허용했다가 후위대만 추격해 섬멸했다. 그렇게 프랑크군을 물리친 테우디스는 베르베르 부족들의 습격으로 아프리카 속주가 혼란한 틈을 타 세우타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547년에 감행된 세우타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고트군은 처음에는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지만 주일이 되었을 때 무기를 벗어두고 예배에 전념했다. 동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적진을 공격했고, 적 함대가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트군은 전원 피살되었다고 한다.

한편, 테우디스는 고트인과 로마인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 노력했다. 그는 고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르셀로나, 예이다, 발렌시아에 대성당을 세우는 걸 허용했으며,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 역시 허락했다. 또한 그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혈통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모든 히스파니아 지방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래 히스파니아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에 대한 선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등 당대 로마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 군주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체택한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546년 11월 24일, 테우디스는 로마인과 고트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반포했다. 이 법은 로마인과 관련된 알라리크 2세의 법전에 추가될 예정이었지만, "모든 신민"에게 적용된다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고트족에게도 유효했다. 그는 모든 지방 당국과 법원에 이 법전을 보내면서 앞으로 판결을 내릴 때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트족과 로마인들의 법적 통합을 향한 첫 단계였다. 하지만 2년 후 테우디스는 세비야의 궁전에서 암살되었다.

테디우스가 암살을 당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같은 동고트 계의 사령관이었던 테우디기셀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설에 따르면 방탕하고 난폭했으며, 많은 고트 귀족들을 처형할 계획을 수립하고 축제 중에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고 하는 등 서고트 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549년 12월, 그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이후 테우디키셀 사후 음모를 주동한 이들 중 한 사람인 아길라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550년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철저하게 약탈했는데, 시민들의 존경을 받던 아시스클리우스 주교의 묘지마저 파헤쳐지자 시민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켜 아길라 1세의 군대를 쫓아냈다. 이때 그의 아들이 여러 병사와 함께 죽었고, 그는 메리다로 도망쳤다. 이 일로 아길라 1세의 지지도는 급락했고, 세비야에서 아타나길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길라 1세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아타나길드는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동고트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에 개입하기로 했다. 황제는 아타나길드와 모종의 조약을 맺었으나,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552년, 80세의 노장 티베리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동로마군이 스페인 남부 해안가에 상륙한 뒤 아길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중해 연안과 내륙을 따라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베티가 일대를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귀속시켰다. 554년, 아길라 1세는 메리다에서 반란군에게 피살되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아타나길드에게 귀순했다.

동로마 제국 덕분에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아타나길드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코르도바 등 안달루시아 일대를 굳건히 지켰고, 아타나길드의 코르도바 탈환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고이빈타 왕비와의 사이에서 두 딸 브룬힐트와 갈스빈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프랑크 왕국의 시게베르 1세와 결혼하여 아들 킬데베르 2세, 딸 인군트 2세와 클로도신드 2세를 낳았다. 갈스빈트 역시 프랑크 왕국의 킬페리크 1세와 결혼하여 메로베우스 2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613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 왕국의 정계를 지배하면서 서고트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서고트 왕국은 이 덕분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567년 12월, 아타나길드는 자연사했다. 생전에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고트 왕국는 그의 사후 5개월간 왕을 정하지 못하다가 피레네 산맥 북쪽의 유일한 서고트 왕국령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의 공작 리우바 1세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지 않고 셉티마니아에 남아 있었고, 568년 말 또는 569년 초에 동생 리우비길드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570년~572년 사이에 리우바 1세가 죽자 리우바길드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그는 그동안 왕위 분쟁으로 어지러운 왕국 내의 내치를 바로 잡으려고 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지방 영주들은 중앙 정부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소국을 세웠으며,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동로마 제국의 위협은 거셌다. 이중 프랑크 왕국은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이는 터라 이베리아 반도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수에비 왕국은 일전에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들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석권하길 희망하며 서고트 왕국 내 정교 신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왕위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켈라리 등 왕실 근위대와 고트족 자유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동원했다. 그는 반기를 든 영주를 굴복시키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근위대와 민병대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이에 근위대와 민병대는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각지에서 할거하던 영주들은 토지를 대거 빼앗겨 몰락했다. 그렇게 내부 문제를 해결한 뒤, 그는 570년부터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과 하자르의 발칸 반도 침략, 사산 왕조의 동방 속주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기에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전쟁을 시작해 베티스 강을 건너 바스테티니아와 말라키타나를 황폐화시켰다. 571년 다시 원정을 감행해 요새화된 도시 아시도나를 공격해 내부 인사의 배신 덕분에 손쉽게 함락시키고 도시에 보관되어 있던 재원을 확보하고 동로마 군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572년에는 전임 국왕 아타나길드가 여러 차례 탈환을 시도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던 코르도바를 공략했으며, 고트군은 동로마령 이베리아 반도 영토의 수도인 카르타헤나 인근까지 진출했다. 결국 현지 동로마 당국은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고, 해군이 부족했기에 완전 제압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받아들였다. 협상 결과 베티스 계곡 전체가 그의 통치 아래 귀속되었고, 해안 도시들만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그 후 북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수에비 왕국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573년 사바리아로 진입하여 단숨에 평정한 뒤 두 아들 헤르메네길드 레카레드에게 그 땅의 경영을 맡기고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574년 칸타브리아로 진입하여 수에비군을 격파한 뒤 칸타브리아를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575년 아레게니 산맥[1]에서 할거하던 아스피디우스를 복속시키고 그의 가족과 보물을 툴레도로 가져왔다. 576년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수에비군을 또다시 격파했고, 수에비 왕 미로가 평화를 간청하자 친히 그와 협상한 뒤 서고트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577년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서로마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역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오로스페다에 진입해 현지 주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한편, 그는 그동안 수도가 정해지지 않았던 서고트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툴레도를 수도로 확정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모델로 삼고 툴레도에 궁전을 세우고 정부 기관들을 잇따라 건설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578년 차남 레카레드 1세의 이름을 따서 레코폴리스를 건설하고, 신도시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레코폴리스는 30헥타르에 달하는 큰 도시로 성장했고, 도시 내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동로마 제국 양식의 대성당이 있는 궁전이 세워졌다.

그는 화폐에도 손을 댔다.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주화를 모방하여 유스티누스 2세의 이름으로 된 동전을 발행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게 된 뒤에는 자신만의 주화를 주조했다. 그는 중요한 사건을 화폐에 문구로 담게 했다. 메리타를 공략했을 때는 "메리타의 승리(EMERITA VICTORIA)"를 새겼으며, 세비야를 공략한 후에는 "신과 함께 세비야를 정복했다(CVM DEO SPALI ADQVISITA)"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다.

리우비길드는 법전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578~580년에 에우리크의 법전과 알라리크의 서약서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한 '개정 법전(Codex revisus)'이 신설되었다. 그는 이 법전에서 딸과 아들 모두 평등한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로마인과 고트인 사이의 결혼 금지를 철폐했다. 여기에 고트족의 특별한 지위도 상당부분 폐지되었다. 이는 그가 두 종족이 동등한 관계가 되어서 왕국에 충성하는 신실한 신민이 되기를 희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왕실 내에 분란의 씨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579년 프랑크 왕국이 자국에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장남 헤르메네길드를 프랑크 왕국의 군주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결혼은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왔다. 인군타는 어린 나이에도 아리우스파 개종을 단호히 거부하고 남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그의 아내이자 헤르메네길드의 계모이고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인 고이빈타 왕비는 이에 분개해 며느리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그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고심했다. 아리우스파를 확고히 믿는 고이빈타 왕비와 고트 귀족들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됐고, 그렇다고 며느리를 해꼬지했다가는 강력한 국력을 갖춘 프랑크 왕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베티카 속주 일부와 세비야 시를 장남에게 떼주고 그곳에서 통치를 행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조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세비야의 주교 레안데르의 설득을 받아들인 장남이 579년 또는 580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 'REX'를 칭한 것이다.

또한 동전에 자신의 초상을 새기고 'A DEO VITA(신의 구원)'이란 문구를 덧붙이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관철시키겠다고 선포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동로마 제국, 수에비 왕국과 손을 잡았고, 프랑크 왕국 내 인군타의 친척들과도 연계했다. 리우비길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 대신 581년 아들과 동맹을 맺었을 지도 모르는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빅토리아쿰(현재 빅토리아)를 건설했다. 이후 피레네 산맥에 강력한 분견대를 배치해 프랑크 왕국이 헤르메네길드를 지원하려고 달려드는 걸 사전에 차단한 뒤, 582년 아들을 향해 진군하여 메리다를 공략하고 수에비 왕국과 세비야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레안데르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구원을 간청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동로마 제국은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다.

그 후 리우비길드의 토벌군은 세비야를 포위해 1년 이상 공성전을 벌였다. 583년, 수에비 왕 미로가 병력을 동원하여 세비야 구원에 나섰으나 도중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헤르메네길드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코르도바로 도망쳤다. 그 후 세비야를 함락시킨 리우비길드는 584년 코르도바를 노렸다. 그는 코르도바의 동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줬고, 총독은 헤르메네길드에게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군타와 어린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헤르메네길드는 교회로 숨었다가 584년 초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한 명의 하인과 함께 아버지 앞에 찾아갔다. 리우비길드는 아들을 처음에 발렌시아로 유배했고, 나중에는 타라고나로 보냈다. 585년 3월 24일, 시세베르트라는 인물이 헤르메네길드를 살해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리우비길드 왕은 이 일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고트족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로마인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제든지 반란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로마인을 아리우스파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툴레도에서 아리우스파 공의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성물과 순교자 공경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고, 가톨릭식 세례 성사도 용인하게 했다. 여기에 가톨릭 사제들과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감화되어 아리우스파로 기꺼이 개종하기를 희망했다. 그의 이같은 전술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사라고사의 빈센티우스 등 몇몇 저명한 주교들이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좀처럼 아리우스파로 개종할 기미가 없자, 그는 박해를 감행했다.

585년, 리우비길드는 미로 왕의 전사 후 왕위를 놓고 분란이 벌어진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침략하여 안데카 왕을 사로잡고 수에비 왕실의 보물을 탈취했다. 안데카 왕은 툴레도로 끌려간 뒤 수도자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수에비 왕국을 돕기 위해 상선을 보냈지만, 이 상선은 도중에 갈리시아에서 라우비길드의 명령으로 사로잡힌 뒤 모든 물건을 빼앗기고 선원 대다수가 생포되었다. 말라리크 왕이 수에비 왕국의 잔여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라우비길드 휘하 부관에게 진압되었고,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한편, 프랑크 왕국은 상선을 탈취한 것에 보복하고자 셉티마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프랑크군은 진군 도중에 자기 나라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교회를 강탈하고 성직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그러다 고트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황폐화시킨 영토를 통과하여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전염병 창궐, 자국 주민들의 보복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라우비길드는 차남 레카레드를 시켜 반격을 개시하게 했고, 레카레드는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하지만 도중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레카레드 1세로 즉위한다.
1.2.2. 가톨릭 개종 후
레카레드 1세는 아버지와 달리 다수의 신민이 신봉하는 가톨릭을 박해하고 소수의 고트 귀족만이 믿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587년 2월 또는 3월에 정식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으며, 그해 4월 툴레도에서 가톨릭을 따르는 성 마리아 교회를 축성했다. 이후 아버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전부 돌려주고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형의 명예를 신원하고 형을 죽인 시세베르트를 체포해 처형했다.

589년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비세우, 투야, 루고, 포르투, 팔렌시아, 토르토사 등 각 도시의 주교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엔 48명의 아리우스파 주교와 8명의 전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가톨릭 주교와 전 아리우스파 주교가 각각 한 명씩 별도의 교구를 임시로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노예를 두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 여성 사이에서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첩실에게서 낳은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도록 규정하는 등 전례와 교회법에 관한 일련의 법률이 반포되었다.그리고 2년이 지난 후 지속적으로 열린 세비야 공회의에서 전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사제로서 직위를 유지하고 옛 아리우스파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 개조하는 것, 나르본 공의회에서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주교로 세워질 수 없다는 법령을 체택했다. 아리우스식 예배는 고트식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아리우스파가 공식적으로 사멸되면서 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히스파니아-로마인의 언어로 전환했다.

늘 그렇듯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파를 국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여러 귀족은 가톨릭이 국교로 확정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8년, 메리다 백작 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가 음모자들을 모아 루시타니아 봉기를 꾀했다. 그들은 리우비길드 치세 때 망명했다가 리우비길드가 사망한 뒤 메리다 주교로 복귀한 가톨릭 주교를 살해하고 세가를 왕으로 세워 중앙 정부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수나는 망명했으며 세가는 두 손을 잃고 갈리시아로 추방되었다.

더 큰 위협은 리우비길드의 전 왕비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고이빈타가 지원한 음모였다. 고이빈타는 툴레도에서 반 가톨릭 음모의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아리우스 주교 울디다와 함께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망했고, 또한 울디다는 추방되었고,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은 모조리 처벌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다. 킬데베르트 2세는 그의 형수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또다른 프랑크 왕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국 587년 레카레드 1세와 군트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의 지휘하에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졌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2년 후, 군트람은 다른 부하였던 부손이 6만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카르카손을 공격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 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려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고,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일찍이 리우비길드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코멘티올로스 장군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코멘티올로스는 먼저 동로마 제국의 이베리아 영토 중심지인 카르타헤나 성벽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문을 건설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남부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레카레드는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에 굴복했던 바스크인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회복한 후 이웃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레카레드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평원으로 내려온 적을 격퇴했을 뿐 고산 지대로 숨은 적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바스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빅토리아를 기점으로 장벽을 세우게 했다.

레카레드는 클라우디우스 등 이베리아-로마 귀족들을 중용했고, 고트인과 로마인에 대해 통일된 법적 절차가 확립된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고트족과 이베리아-로마인은 동일한 법원에서 동일한 법규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식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채택했는데, 이후 역대 서고트 국왕들은 플라비우스를 항상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590년, 아르기문드 공작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꾀했지만 결국 발각되었다. 아르기문드는 체포된 후 오른손이 잘린 뒤 툴레도 광장에서 당나귀에 실린 채 조리돌림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601년 12월 21일 레카레드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바 2세가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603년 고트족 귀족 위테리크가 반란을 일으켜 툴레도로 진격, 세습 왕조를 거부하고 게르만 관습에 따른 선출 원칙을 선호하는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리우바 2세는 생포된 뒤 폐위된 군주를 다루는 고트족 관습에 따라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위테리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603년 여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끌어내 처형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고히 한 위테리크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우리키우스가 폐위된 후 포카스의 폭정과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이 점을 이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동로마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베티카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지브롤터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이 없었다. 반면 이 시기에 비스크인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약탈전이 수그러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리크 2세가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테우데리크 2세의 할머니 브룬힐트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오도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610년 4월, 위테리크는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암살당했다. 유해는 별다른 장례식 없이 곧바로 매장되었고,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군데마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려 했고, 에브로 및 도루 강 계곡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전을 벌이던 바스크인들을 토벌했다.

군데마르는 동로마 제국 및 바스크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네우스트리아-아우스트라시아-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을 잡아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위테리크 왕의 정책을 물려받는 한편, 종교 정책에서는 레카레드 1세의 가톨릭 진흥 정책을 이었다. 610년 10월 톨레도에 공의회를 소집해 일련의 법령을 포고했다. 이 법령에서는 톨레도를 모든 이베리아의 중심 도시로 선언했으며, 카톨릭이 비단 로마인만의 신앙이 아니라 모든 이베리아인의 종교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그는 위테리크와 갈등을 벌이다가 자신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불가르를 셉티마니아 공작으로 세우고 프랑크 왕국과의 모든 외교 업무를 일임했고,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고 보조금을 동맹국에 대거 보내서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생전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610년경에 사망한 아내 힐도아라가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612년 2월 또는 3월에 툴레도에서 자연사한 뒤 유력 귀족인 시세부트가 왕위에 올랐다. 시세부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스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퀼라 또는 티우파디 백작이 즉시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는데,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완전 제압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수인틸라 장군은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다.

612년 바스크인들이 왕국의 북쪽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시세부트는 613년 최근 창설된 서고트 함대를 친히 이끌고 칸타브리아와 오트리고니아, 바스크, 바르둘리아, 카리스티아 등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칸타브리아-바스크인과 전투를 벌였지만, 바스크인들이 지배하는 산악지대를 평정하지 못했다.

그는 공연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의 아들 아달랄트에게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했다.

612년 8월 2일 부분일식이 이베리아 반도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자 각지의 시골에서 이교 관습과 미신이 부활했다. 이에 그는 613년 칸타브리아-바스크 원정 중에 일식에 관한 시를 짓고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에게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지와 폭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614년 1월 13일, 타라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598년 우에스카 공의회에서 성직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614년과 615년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여러 번 승리했으며, 이 무렵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동로마 총독 카르사리우스가 기독교인끼리 피를 더 이상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자, 그는 이에 마음이 움직여 서로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한편, 시세부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레카레드 1세 때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법령을 관철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 노예와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며, 아프리카나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에게 그들을 팔 수 없고, 거주지 근처에서만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유대인은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해방된 노예는 국가에 귀속되며 이전 유대인 주인의 후원은 금지되었다. 거짓으로 판매한 유대인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법령은 612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 이후에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한 유대인이 발견되면 절반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기독교인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엔 공개 장소에서 채찍질을 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거나 왕이나 왕이 임명한 사람의 노예로 넘겨졌다. 또한 가톨릭인과 결혼한 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평생 추방되지만, 개종한다면 노예를 포함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615년경에는 일부 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피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세부트는 문학과 헌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61편의 라틴어 시를 집필했는데, 주요 주제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품고 천문학과 지리학에 관한 백과사전을 집필했다.

621년 시세부트 왕이 사망한 뒤, 아들 레카레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3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시세부트의 부관이었던 수인틸라가 왕위에 올랐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수인틸라가 레카레드 2세를 암살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수인틸라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했다. 2명의 동로마 총독을 사로잡는 등 맹렬한 공세를 벌인 끝에, 625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동로마 요새인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고, 발렌시아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지대가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한편, 그의 통치 초기에 바스크인들이 서고트 왕국 북쪽 지대를 습격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들을 상대로 공세를 벌인 끝에 바스크인들이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고 인질을 바치게 했다. 이후 바스크인들의 재침을 막기 위해 올리타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속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는 후계를 미리 정하기로 하고, 어린 아들 레키메르를 공동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레키메르가 요절해버리면서, 후계 구도를 굳히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귀족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한편, 그는 시세부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속했지만 강도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1년, 시세난드가 이끄는 귀족들이 수인틸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는데, 접시 자체가 수백년전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기에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그는 폐위되었고,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그라나다, 메리다 일대에서 유딜라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톨레도 교회에서도 새 정권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오간 끝에 갈라디 대주교가 인근 수도원으로 은퇴한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대주교를 밑은 유스투스는 왕의 지원을 받은 장로 게론티우스와 정쟁을 벌였다. 이렇듯 안팎으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시세난드를 지지하자, 명망높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순응하면서 교회의 분란은 잦아들었다.

633년 12월 5일,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의장을 맡고 나르본과 이베리아 전역에서 온 66명의 주교가 참여한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전 왕 수인틸라의 '악행'을 폭로하고 시세난드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으며, 수인틸라를 먼 곳으로 유배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또한 공의회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노리거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기로 결의했으며, 그에게 대적한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수도원으로 물러가야 했으며, 외국 교회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것 역시 금지되었다. 시세난드는 온건한 군주로서 정당하고 경건하게 통치할 것을 약속했으며, 세습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시세난드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직자들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

공의회는 시세부트 왕으로부터 개시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재확인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세례를 받은 유대인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받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공개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지 않는 자는 세속인이든 성직자이든 상관없이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인받은 시세난드는 636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친틸라가 귀족과 주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636년 6월 30일에 소집된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왕이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은 차기 왕이 상속자들로부터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또한 왕의 측근과 지지자, 고문 및 측근들은 왕이 죽은 뒤에도 왕이 하사한 선물을 그대로 가질 수 있었으며, 왕의 가족과 친구들의 재산을 침해한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출된 왕은 반드시 귀족 출신이어야 하며, 성직가, 노동자, 외국인 중에서 선택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엔 갈리아 나르본에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참석하지 않은 주교가 많았기에 권위가 떨어졌다. 이에 638년 1월 9일, 제6차 톨레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나르본에서 3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이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베리아 주교들도 대거 참여했다. 공의회는 교회 조직에 손을 대는 한편, 살해된 왕의 후계자는 왕을 죽인 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포고했다. 여기에 외국으로 망명한 뒤 서고트 왕국에 해를 끼치거나 특정 범죄의 피고인이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파문되었다. 아울러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비기독교인의 국내 거주를 금지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민중 앞에서 회심을 밝히는 것을 의무화했다.

공의회를 통해 왕위를 보장받은 덕분인지 3년 6개월 만인 639년 12월 20일에 자연사했고, 아들 툴가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642년, 고트족 귀족들은 79세의 친다수윈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반란은 바스크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친다수윈트는 톨레도로 진군해 툴가를 붙잡아 삭발시킨 후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고 정식으로 서고트의 왕이 되었다.

친다수윈트를 옹립한 귀족들은 그의 나이가 79세에 달하니 자기들 입맛에 따라 부려먹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뒤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먼저 이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곧바로 진압하고 'VICTOR'라고 새겨진 기념 주화를 메리다에서 주조했다. 뒤이어 귀족들을 꺾어버리기 위해 정력을 쏟아부었다.

친다수윈트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한편, 지참금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르면, 지참금은 1,000 솔리디, 노예 10명, 여노예 10명, 말 10마리를 초과해서는 안 되며, 이를 초과하는 지참금은 전원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는 귀족들이 결혼 동맹을 굳건히 다져서 자신에게 맞설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왕실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은 '법복 귀족'이 기존의 귀족들을 대체했는데, 이들은 모든 일을 할 때 왕에게 항상 감사해야 하고, 특별한 충성 서약으로 구속되었으며, 왕의 사람과 항상 동행해야 했다. 그들은 왕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반역자들의 노예와 재산을 챙길 수 있었다. 이에 기존의 귀족들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많은 이는 성직자가 되었다. 643년에는 귀족 억압 정책을 합법화하기 위해 나라와 신민에 반대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공포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자들 중에는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도 포함되었다. 이 법은 공포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었다.

이렇듯 철저한 귀족 탄압으로 왕권을 강화한 친다수윈트는 교회의 권위를 사용하여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왕권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망명에 대한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살인자는 교회에 숨어 있어도 처벌받아야 했다. 그는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톨레도 대주교 에우제니오 1세가 646년 사망하자, 그는 세비야 주교 브라올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브라올리온의 심복인 에우제니오를 수도로 올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브라올리온은 자신에게 충실한 사제를 톨레도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자신의 소원은 곧 왕명임을 분명히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다.

646년 11월 18일, 제7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처음으로 세속 계급 인사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통치 5주년을 축하하는 문서를 읽고 기록을 보관하는 공증인도 있었다. 공의회는 왕의 칙령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강화했다. 643년의 특별법을 재차 공인하고, 세속적 형벌에 교회 형벌을 추가했다. 이리하여 왕을 적대시한 자는 잡히면 사형당할 뿐만 아니라 파문되었다. 이 조치는 주교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 왕에 대한 모든 비판은 범죄로 간주하고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수도원 사제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당국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연설을 금지했으며, 톨레도와 가까운 곳의 주교들은 톨레도에서 적어도 일년 에 한 달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공의회에는 41명의 주교만이 참석했고, 타라코나 대표는 2명뿐이었으며, 셉티마니아 대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 계층 내에 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왕권을 다진 그는 법률체계의 완전한 재편을 목표로 삼고 사라고사 주교 브라올리온의 도움을 얻어 신 법전을 만들게 했다. 이 법안은 이베리아-로마인이 사용하는 알라리크 2세의 서약서와 고트족이 사용하는 리우비길드 왕의 법전을 완전하게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왕국의 모든 주민을 민족의 구별 없이 하나의 신민 집단으로 만들려 했다. 이제 하나의 법률 체계가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 전역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생전에 완료되지 않았고, 654년 아들 레케스윈트 치세 때 비로소 공포되었다.

그의 법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왕의 행동 방식과 목표를 특정지었다. 사형과 재산 몰수는 반국가 음모에 적용되었으며, 반역 계획은 행위 그 자체로 분류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비록 사면을 받더라도 의무적으로 실명형을 받아야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왕이 죽은 후에도 이 법을 준수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적은 절대로 사면받을 수 없었다. 왕의 친구와 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 왕이 제공한 선물은 향후 몰수될 수 없었다. 거짓 고발을 고의로 한 제보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그는 주인이 노예를 임의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등 하층 계급에도 신경썼다.

친다수윈트는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사라고사 주교 타이온에게 로마에서 도덕과 철학에 관한 책을 가져오게 한 뒤, 이를 토대로 신민을 가르치게 했다. 백성들에게 자선 행위를 베풀었으며, 성 로마노스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아니 레키베르가를 안장한 후 나중에 그곳에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다.

친다수윈트는 제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평의회가 왕을 선출한다'라는 조항을 폐기하고 649년 1월 20일 아들 레케스윈트를 공동 왕으로 세워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653년 9월 3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개인 재산을 빈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레케스윈트는 아버지의 탄압 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프로이아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사라고사를 포위하면서 바스크인과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수비대와 주민들이 완강한 저항을 해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레케스윈트는 진압군을 편성해 사라고사 성벽 아래에서 프로이아와 바스크 동맹군을 상대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격파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아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아버지의 강경 정책으로 인해 불온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성을 느낀 레케스윈트는 653년 12월 16일 제8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공의회에서 반란군에게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이전 공의회의 결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왕의 의무에 위배된다고 밝히며, 광범위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다만 몰수된 재산의 반환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재산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왕국의 재산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과 후손들은 친두스윈트가 즉위하기 전에 가졌던 재산만은 상속받을 수 있고, 왕이 된 후에 얻은 모든 재산은 국고에 헌하며, 왕위에 오른 자는 출신과 상관없이 이를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왕이 사망한 뒤 주교와 최고위 관료들의 동의하에 최대한 빨리 새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합 법전 편찬 작업을 지속해 654년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역대 국왕들이 제정한 법 324조항, 친두스윈트의 법 99조항,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법 87조항이 포함되었다. 로마인과 고트인의 구분 없이 동등한 조건하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노예에 대한 신체적 상해를 금지하고, 주인이나 후원자의 명령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유인 및 노예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조항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분쟁을 일으켰고, 18년간 혼란이 이어졌다. 653년 제8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했지만, 그는 교회에 더 이상 양보할 의사는 없었다. 655년 제9차 톨레도 공의회와 656년 제10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오직 교회 문제만 다뤘을 뿐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공의회는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672년 9월 1일, 레케스윈트 왕이 살라망카 인근의 게르티코스 휴양지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에겐 후계자가 없었기에, 귀족과 주교들은 왕이 사망한 날 긴급 회의를 연 뒤 왐바를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왐바는 즉시 톨레도로 이동한 뒤 9월 19일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셉티마니아의 님 백작 힐데리크가 현지 주교들의 지지를 받고 왕을 참칭한 뒤 왐바 왕에게 충실한 님의 주교 아레지우스를 체포해 족쇄로 묶어 프랑크 왕국에 보내버린 후 자신을 지지하는 사제 라니미르를 새 주교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왐바는 이베리아-로마 출신의 사령관 플라비우스 파울루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나르본에 입성한 뒤 현지 주교 아르데발트를 몰아내고 왕을 참칭하고 레카레드 1세가 지노라의 성 펠릭스 교회에 기증한 금관을 머리에 썼다. 힐데리크 역시 파울루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후 당시 궁정 관료를 맡고 있던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라노신드의 지지를 받았고, 프랑크 왕국 및 바스크인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왐바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서쪽의 왕으로 칭하고 왐바를 동쪽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는 파울루스가 왕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의미했다.

왐바는 바스크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칸타브리아에서 파울루스의 반란 소식을 접했다. 그는 7일 안에 바스크인들의 영역을 파괴하고 인질과 조공을 받아낸 채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칼라호라와 우에스카를 거쳐 나르본으로 진격했다. 바르셀로나, 지로나가 잇따라 항복한 뒤, 그는 피레네 산맥에 접근하면서 군대를 3개의 분견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카리타니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카스트룸으로 향했고, 두 번째는 아브손 시를 통해 피레네 산맥의 중앙 능선으로 이동했으며, 세 번째는 해안가를 지나가는 로마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코콜리베라(현재 콜리우르), 불투라리아, 카스트룸을 공략한 뒤, 토벌대는 칼루수라 요새를 공격해 수비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했고, 뒤이어 사르도니아 요새로 진군하여 비티미르 백작을 물리치고 요새를 장악했다. 이후 평야 지대로 내려가 전군을 규합한 뒤 나르본으로 이동하면서, 별도의 분견대에게 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파울루스는 왐바의 군대가 나르본에 접근해오자 님으로 후퇴하면서 비티미르에게 나르본을 지키게 했다. 이어진 공성 끝에 토벌대가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를 장악하고 반군을 제압했다. 비티미르는 교회로 피신한 뒤 얼마 동안 농성했다가 곧 체포되었다. 비테라(현재 베지에)와 아갈프 시가 뒤이어 항복했으며, 마갈로나 시를 사수하던 후밀트 주교는 왕의 군대가 포위 공격을 준비하는 데다 바다에서 함대가 접근해오는 걸 보고 파울루스에게 달아났다. 지도자 없이 남겨진 마갈로나 시는 곧바로 왐바에게 항복했다.

673년 8월 31일, 왐바의 군대는 파울루스 일당이 숨은 님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프랑크군이 곧 도와주러 올 거라고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음날, 왐바는 프랑크군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예비대를 공방대에 투입했다. 토벌대는 곧 성벽을 점령했고, 파울루스와 추종자들은 원형 극장으로 피신했다. 도시를 공략한 토벌대는 약탈을 자행하다가 주민들과의 충돌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원형 극장으로 피신한 반군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지역 귀족들은 파울루스와 함께 온 자들이 자신들을 덫으로 유인했다고 비난하면서, 왕의 사면을 받기 위해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파울루스는 나르본 주교 아르게바드는 보내 왐바에게 자비를 구했다.

왐바는 약탈을 중단하고 군대를 도시 밖으로 이동하여 전투 대형을 구축했고, 원형 극장에 있던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이후 파울루스 편에서 싸운 프랑크족과 색슨족을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반도로 끌고 갔다. 한편, 왐바는 파괴된 나르본의 복원을 수행하고 성벽의 틈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대신할 새로운 성문을 세웠으며, 방치되었던 시신을 묻고 약탈한 재산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게 했다.

얼마 후, 루파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비테레 일대를 침공하자, 왐바는 즉시 그들을 향해 진군하면서 적의 매복 공격을 격퇴한 뒤 프랑크군 앞에 나타났다. 루파는 그제야 파울루스가 패배했다는 걸 깨닫고 즉시 퇴각했다. 톨레도로 돌아온 왐바는 재판을 거행했다. 단순 가담자는 사면되었고, 파울루스와 52명의 추종자들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다. 왐바는 그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하기로 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도왔던 유대인들은 나르본에서 추방되어 해외로 망명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왐바는 673년 11월 1일 군 복무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군대는 온갖 범죄와 강도, 방화, 폭력을 일삼았고 많은 이들은 군 복무를 피했다. 나르본 공략 때 병사들의 무분별한 약탈을 목격했던 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발표한 법에 따르면, 군 복무는 왕국의 모든 주민에게 확대되었으며 적의 침공이 처음으로 알려졌거나 내부에서 소란이 발생할 경우 모든 주교, 공작, 백작, 교구 또는 위임받은 자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며 현지의 고위 관리와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또한 모든 주민은 자신이 속한 '당'에 관계없이 국가, 군주, 또는 상속인을 보호해야 했다. 이 조항은 반대 그룹에 속한다는 명목으로 외국과의 전쟁 또는 내전에 참여를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교와 다른 사제들도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고,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과 함께 군대에 가야 했다. 왐바의 법은 적의 침략이나 내란에 맞서 군사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심할 경우 노예로 삼았다.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경우는 오직 심한 질병에 걸렸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 경우에도 환자는 자기 비용으로 부하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다.

많은 귀족들은 노에를 군 복무에 참여시키라는 것에 반감을 품었고, 성직자들도 군 복무에 참여하라고 강요받는 걸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왐바는 반발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왐바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에르위그는 왐바 시대에 이베리아 전역에 폭동이 발발했고 거의 절반의 귀족이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하층민의 수가 너무 줄어들어 법정에서 충분한 수의 증인을 유지한느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왐바의 '악행'을 강조하게 위한 수사적 표현이겠지만, 귀족들이 왐바 시대에 큰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왐바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로부터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렸다.

왐바는 674년 수도인 톨레도를 개조하여 웅장하고 정교한 건물과 구조물로 장식했고, 이때 세워진 탑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졌으며, 이에 상응한는 비문들도 나란히 세워졌다. 또한 그는 화폐 발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반란의 온상지였던 나르본의 주조소를 폐쇄하는 등 화폐 주조소를 대폭 줄이고, 오직 톨레도를 포함한 각 지방의 수도에서만 화폐를 주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주화에 십자가를 새기고 자신의 초상화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체제 개편에 열을 올리던 왐바는 675년 제11차 톨레도 공의회와 제12차 브라가 공의회를 잇따라 소집해 왕국의 질서 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직을 사고파는 관행을 금지하고 주교의 재산 청구권을 제한했으며, 타락했다고 간주된 주교들을 파문하기로 했다. 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675년 12월, 왐바는 자유민과 교회에 소속된 사제 또느 수녀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고, 주교와 관련된 자들이 시골 교회와 수도원을 점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680년 가을, 왐바의 일련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에르위그 등 귀족들이 왕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자들이 탄 독이 든 술을 마신 왐바는 의식을 잃었고, 주변인들은 왕이 곧 죽을 거라고 여기고 관습에 따라 수도자의 옷을 입혔다. 왐바는 몇 시간 후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미 수도자의 의복을 입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걸 깨닫고 왕위 포기서에 서명한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에르위그는 왕위에 오른 직후인 681년 1월 9일 제 12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타라코나 주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왐바 왕이 그 지역 교회를 박해한 여파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왐바의 퇴위 문서와 에르위그의 왕위 계승 문서를 공인하고 그의 즉위가 정당함을 확인했다. 또한 전 군주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에르위그와 위원회의 결의서에는 왐바의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왐바가 창설한 새 주교직을 없애기로 했다. 다만 실제로 왐바에게 임명된 주교들은 직위를 박탈하지 않고 공석인 곳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왕위를 공인받은 그는 법률 제정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왐바의 병역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고 681년 10월 21일 병역법을 포함한 84개의 법률을 수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병역 기피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었으며, 주교 역시 병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28개 조항이 신설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인에게 그런 자리를 맡긴 귀족은 720 솔리디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하면서, 개종을 거절하는 자는 노역 및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더욱 부드러웠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신했다.

683년 11월 4일, 에르위그는 제13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각 지방의 주교와 재판소의 고위 관리 26명이 소집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 왕 왐바의 탄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등 왐바에게 맞서다 처벌받은 정치범들을 완전히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재산을 돌려주는 것은 반대하고, 왐바에게 맞선 자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친다수윈트 왕때까지 왕권에 의해 박해받은 모든 이들을 사면하기로 결의했다. 에르위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법원과 교회의 최고 관리들을 재판 없이 존엄, 생명,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법령 역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기 1년 전부터 체납된 모든 세금을 면제했다. 공의회는 이에 더해 친다수윈트 왕이 도입한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궁정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에르위그는 앞으로 왕의 모든 후손의 생명과 재산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왕실의 과부에게 새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684년 11월, 톨레도 대주교 율리안이 자발적으로 제14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공식적으로는 왕의 명령없이 열린 공의회였지만, 왕국의 모든 대도시 대표가 참석했다. 공의회 소집 이유는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한 결정을 따라달라는 교황 레오 2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교황의 요청에 따라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했다. 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교회의 권력이 왕권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해졌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에르위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이 끔찍한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유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자유민을 지키기 위해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것을 제한했으며, 자유 여성이 노예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노예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간섭없이 자유민으로 30년을 살았다면 자유민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편 에르위그는 군대를 어떻게든 강화하려 했다. 그는 귀족들이 노예의 20분의 1도 병사로 보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적어도 10분의 1은 군대에 보내고 장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에르위그 왕은 생전에 리우비고토와 결혼하여 딸 시실로를 낳았다. 시실로는 왐바의 친척인 에기카와 결혼했다. 687년 11월 15일 중병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왕권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시킨 뒤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에기카는 688년 5월 11일 제1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에르위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에르위그가 몰수한 재산이 왕과 가족에게 들어간 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에르위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아무도 황태후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간음을 범할 수 없다는 특별법을 마련했다. 겉보기에는 왕비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 왕의 미망인과의 교제를 통해 왕위에 오르려는 경쟁자들의 희망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691년, 사라고사에서 지방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왕의 미망인은 수도원에 즉시 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 인해 에르위그의 왕비 리우비고토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한편, 사라고사 공의회에서는 특정 지역 주교의 결정에 따라 해방된 이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주교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막아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에르위그의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이 커졌다.

693년 봄, 톨레도에서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툴레도의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수니프레드를 왕으로 내세우고 에기카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에기카는 시시베르트를 해임하고 세비야의 주교 펠릭스를 톨레도 대주교에 선임했으며, 시시베르트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 주교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이같은 간섭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693년 5월 제16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했다. 공의회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거나 스페인 내에서 반란을 일읔킨 사람은 존엄과 지위에 관계없이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자신과 모든 후손이 결코 궁정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결의서를 반포했다. 여기에 귀족과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했던 친다수윈트와 왐바의 반역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유효하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주교들의 잠식으로부터 지방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694년 11월, 에르위그는 제17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시실로 왕비가 자손을 낳은 채 미망인이 될 경우, 아무도 그녀의 자녀가 수도자가 되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방문하고 기독교인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세례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은 유대인 공동체가 분담해야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유대인들이 아랍 세력과 내통해 왕국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내통한 것이 드러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유대인들이 공직에 참가할 권리 자체를 박탈했으며,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7세 때까지 부모와 헤어진 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했다. 한편, 제17차 공의회는 에기카의 왕비이자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를 "영광스러운 여인"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기카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녀와 이혼해버렸다. 이는 전 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자신만의 왕조를 창건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결정이었다.

698년과 701년 사이, 동로마 함대가 스페인 동부 해안가에 상륙했다가 알리산테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서고트 귀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비슷한 시기, 에기카는 셉티마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프랑크군과 3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 반란을 구실로 삼아 벌금, 몰수 및 해임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금화에 은이 갈수록 많이 첨가되었으며, 몇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많은 이가 굶어죽거나 나라를 등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693~694년 페스트가 침투하여 각지에 전염병이 횡행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셉티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심했기에, 셉티마니아 공작은 어떻게든 인력을 모으기 위해 에기카의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이렇듯 인력이 줄어들면서 노예의 도피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욕망이 커지자, 에기카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도주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에기카는 친다수윈트 왕의 아들 테오도프레드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여 눈을 멀게 한 후 왕실에서 추방된 테오도프레드는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리킬로와 결혼하여 아들 로데리크를 낳았다. 에기카는 세습을 이뤄내기 위해 아들 위티자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701년 11월 15일 아들을 톨레도로 불러들여 왕으로 즉위하게 한 뒤, 702년 말에 자연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위티자는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

다만 반대 시선에서 본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왕위 계승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2.3. 멸망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을 칭하자, 위티자의 아들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수도를 탈출해 스페인 북동부로 이동했다. 이후 레퀴잔드, 바야진드를 포함한 일부 고트 귀족들이 위티자의 장남 아길라 2세를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 역시 아길라 2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로데리크를 지지하는 남부 세력과 아길라 2세를 지지하는 북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로데리크는 위티자 2세와 손을 잡고 왕국의 북쪽 경계를 침범한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고자 진군하여 팜플로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야 했다. 아랍군이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평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우타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의 총독 율리아누스가 돌연 아랍 세력에 귀순했다. 율리아누스는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기에 로데리크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데리크를 타도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자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넌 타리크는 병사들이 탈영하는 걸 막기 위해 상륙하자 마자 배를 불태웠다. 이후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뒤이어 무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디스 해협을 건너 15개월 동안 히스파니아에 머무르며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고, 로데리크는 이에 맞서 남하하면서 왕국 전역의 귀족들에게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리크는 카르타헤나에서 코르도바로 진군하던 중 과달레테 강 인근에서 로데리크의 군대와 마주쳤다.

과달레테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서고트군은 완패했고 로데리크는 전사했다. 그 후 타리크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711년 톨레도를 공략하고 각지로 분견대를 보내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성주들을 회유해서 항복시키거나 타리크가 도저히 점령하지 못하는 철벽 요새에 기독교 지원군으로 위장해서 잠입 후 차지했다. 714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도 무슬림군에게 잡혀 죽었다.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무슬림군은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고, 그나마 레네 산맥 북족의 카탈로니아와 남부 갈리아의 셉티마니아에서는 아르도라는 인물이 서고트 왕을 자처했다. 그는 나르본을 근거지로 삼아 716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셉티마니아까지 쳐들어오는 아랍군에 맞섰으나, 721년에 아랍군이 나르보넨시스를 초토화시키면서 망국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3. 레콩키스타의 시작
한편 718년 일단의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 펠라요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는 서고트 전 국왕 에기카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의 아들로, 아스투리아스 칸가스 데 오니스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본거지를 세우고 봉기를 선동했다.

이에 720년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투입되어 아스투리아스 산맥을 장악하였고, 펠라요는 여러 차례 패배한 뒤 산 속 깊숙이 숨었다.펠라요는 300 정도로 추정되는 병력만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침략군이 세운 숙영지를 종종 습격하고, 보급물자를 싣고 가던 마차를 탈취하고, 고급 장교를 암살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때마침 이슬람 지배자들이 지즈야를 2배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신자들이 호응하였고, 아스투리아스 일대를 다스리던 무슬림 관리는 안전을 위해 피신해야 했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엔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군을 파견한 왈리(wali: 아랍인 주(州) 장관) 움바사 이븐 수하임 알 카르비는 패배로 인해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722년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코바동가 마을 근처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마야드 왕조군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을 기습 섬멸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약 800년 가까이 진행되는 레콩키스타의 문을 열게 되었다.

고바동가에서의 승리후 아스투리아스 산맥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그들은 즉시 호응하여 펠라요의 군대에 가담하였고, 펠라요는 증가한 병력을 이끌고 또다른 병력을 조직하여 진군하고 있던 무누자의 부대를 습격해 무누자를 전사시켰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변변치 않는 세력임에도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탈출한 기독교 신자들의 은신처 역할을 맡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는데 펠라요는 이웃하고 있던 같은 반 무어인 세력이자 칸타브리아(Cantabria)를 통치하고 있던 페드로(Pedro)와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그는 딸인 에르메신다(Ermesinda)를 페드로의 아들인 알폰수와 결혼시켰다. 737년 펠라요가 죽고 그의 외아들인 파빌라가 왕위를 이었다. 허나 즉위 2년만에 곰사냥을 하다가 곰에게 죽게 되었고[2],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매부였던 알폰수가 알폰수 1세로 즉위한다.

알폰수 1세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무어인들과 평생 전쟁을 치렀다. 740년 갈리시아를 수복했고, 754년에는 레온 지방을 수복하는 등 이슬람 세력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또한 라리오하(La Rioja)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이슬람 세력과의 접경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대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 이주정책으로 두에로강(El Duero)과 칸타브리아산맥 사이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그 지역은 ‘두에로의 사막(Desierto del Duero)’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757년 알폰수 1세가 죽고 장남인 프루엘라 1세가 왕위를 승계했다. 이미 750년에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에게 멸망된 뒤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Abd ar-Rahman I)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 756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우마이야 왕조를 다시 일으켰다.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아들인 오마르(Omar)를 보내 갈리시아 지방을 공격해왔으나 프루엘라 1세는 이를 물리치고 오마르를 포로로 붙잡은 뒤에 죽였다. 그리고 남서쪽의 미뉴강(Río Miño) 유역까지 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그 뒤 프루엘라 1세는 알라바(Álava) 지방의 바스크인들이 칸타브리아(Cantabria) 지방을 공격해오자 원정에 나서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가스코뉴(Gascogne)를 다스리던 바스크인 귀족의 딸인 무니아와 결혼해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766년에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재위기간에 오늘날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주도인 오비에도(Oviedo)를 건설했으며, 그곳에 산 살바도르 성당(Cathedral of San Salvador)을 세웠다. 프루엘라 1세는 아버지 알폰수 1세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건립을 지원했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얻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프루엘라 1세는 동생인 비모라노(Vimorano)가 귀족들에게 신망을 얻자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비모라노의 아들인 베르무두(Bermudo)를 맡아서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다. 하지만 이 일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768년에 프루엘라 1세를 암살하고, 그의 사촌인 아우렐리우를 왕으로 세웠다.

아우렐리우의 치세는 외적으로는 온건해 후우마이야 왕조와 화평 조약을 맺었으나 내적으로는 정소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농노의 반란이 일어나 아우렐리우가 이를 진압하는 등 그리 좋지 않았고, 774년에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왕위는 알폰수 1세의 딸인 아도신다(Adosinda)의 남편 실로(Silo)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실로는 수도를 캉가스데오니스(Cangas de Onís)에서 나론 강(Río Nalón) 유역에 위치한 프라비아(Pravia)로 옮겼다. 그곳이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Asturica Augusta, 지금의 아스토르가)로 가는 로마 가도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재위기간에 갈리시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로는 몬테쿠베이로(Montecubeiro) 전투에서 승리하며 반란을 진압했다.

실로의 재위기에 아스투리아스왕국은 이슬람 세력과의 화평을 유지했다. 연대기는 이를 실로의 생모가 무슬림이었던 것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에 후우마이야왕조와 카롤루스 대제가 통치하는 프랑크왕국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778년 카롤루스의 통치기의 프랑크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부상으로 자치권을 누리고 있던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우에스카, 지로나 등 동북부 지역의 친아바스계 지사들은 알-안달루스조의 세력팽창을 저지할 수단으로 한참 기세등등하던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였는데, 이에 응한 프랑크 왕국으로 오히려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병합할 기회로 보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했지만 먼저 선제 공격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대응과 예상 밖의 프랑크 대군을 본 친 아바스계 자치도시들이 협력을 취소하면서 결국 병합에 실패되었다.

783년 실루가 프라비아에서 사망하자 그의 후계를 정해야 했는데 실루는 프루엘라 1세의 아들인 알폰수 2세(Alfonso II)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실로가 죽은 뒤 귀족들의 반발로 알폰수 2세는 알라바(Álava) 지방으로 피신했고, 알폰수 1세와 무슬림 노예인 시살다(Sisalda) 사이에서 태어난 마우레가투(Mauregato)가 왕위에 올랐다.

마우레가투의 재위기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재위기에는 '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뒤에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설(養子説, Adoptionism)이 확산되어, 카롤루스 대제와 톨레도(Toledo)의 주교인 엘리판두스(Elipandus), 칸타브리아(Cantabria)의 대공인 리에바나의 베아투스(Beatus de Liébana) 등이 논쟁에 개입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리고 이슬람 후우마이야왕조의 군주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 ar-Rahman I)와 화의를 맺으면서 ‘처녀 100인의 조공(Tributo de las cien doncellas)’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789년 마우레가투가 죽은 뒤에는 제5대 왕인 아우렐리우의 동생으로 사제로 살고 있던 베르무두 1세(Bermudo I)가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평화도 끝이 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의 뒤를 이어 새로 이슬람 군주로 즉위한 히샴 1세(Hisham I)는 장군 유수프 이븐 부흐트(Yusuf ibn Bujt)을 보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라바(Álava)와 갈리시아(Galicia) 지방을 공격해왔다.

791년 부르비아 강의 전투(Battle of Río Burbia)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하자 베르무두 1세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제4대 왕인 프루엘라 1세의 아들로 알비아에 피신 중이었던 알폰수 2세(Alfonso II)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알폰수 2세는 수도를 프라비아(Pravia)에서 오비에도로 옮겨졌다. 그는 오비에도에 궁전과 교회 등을 세웠다. 794년 아브드 알카림(Abd al-Karim)과 아브드 알말릭(Abd al-Malik)이 이끄는 이슬람군이 아스투리아스왕국의 동쪽 변경을 공격해왔다. 이에 알폰수 2세는 796년, 797년, 798년 3차례에 걸쳐 카롤루스 대제에게 사신을 보내 프랑크왕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프랑크왕국의 지원을 받아 798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리스본을 공격했으며, 825년에는 나론(Narón)과 안세오(Anceo)에서 이슬람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알폰수 2세는 801년부터 808년까지 귀족들의 강요로 아블라냐 수도원(monasterio de Ablaña)에 유폐되는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테우다노(Teudano)라는 귀족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뒤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고트 시대의 유산들을 폭넓게 수용했다.

842년 알폰수 2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일족인 네포시아누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얼마 안가 베르무두 1세의 아들인 라미루 1세가 갈리시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오비에도로 진격해왔다. 네포시아누는 아스투리아스인과 바스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코르넬라나(Cornellana)에서 라미루 1세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나르세아 강(Río Narcea) 유역에서 벌어진 코르넬라나 다리의 전투(Battle of the Bridge of Cornellana)에서 패해 라미루 1세에게 붙잡혀 폐위된다.

왕위에 오른 라미루 1세는 서고트 왕국에서부터 시행되어왔던, 귀족들의 선거로 왕가의 일족 중에서 왕을 선출하던 제도를 폐지했다. 그의 재위기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바이킹과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았다. 844년 바이킹이 칸타브리아의 해안지역으로 침공해왔으나 라미루 1세는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834년에는 아브드 알라흐만 2세(Abd ar-Rahman II)가 보낸 이슬람 군대를 클라비호 전투(Battle of Clavijo)에서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무어인 학살자’라고 불리는 대 야고보가 흰 말을 타고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스페인어로는 ‘ 산티아고(Santiago)’라고 불리는 대 야고보 성인에 대한 공경 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기도 했다. 846년에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은 레온의 기독교도 주민들이 대거 아스투리아스왕국으로 피신해 왔다.

850년 라미루 1세가 죽자 장남인 오르도뉴 1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왕이 귀족들의 선거로 왕을 선출하던 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오르도뉴 1세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선거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왕이었으나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네포시아누를 지지했던 바스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르도뉴 1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 반란을 진압했으며, 귀환하던 도중에 에브로(Ebro) 강 유역에서 바르둘리아 공격에 나선 이슬람 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오르도뉴 1세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 맞서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벌인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톨레도(Toledo)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854년 과달라세테(Guadalacete)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에 패했다.

그 뒤 오르도뉴 1세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어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과거 알폰수 1세 때 버려지면서 생긴‘두에로의 사막에 정착촌을 건설해 주민들을 이주시켜 레온(León)과 탈라망카(Talamanka)·아스토르가(Astorga)·투이(Tui)·아마야(Amaya) 등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성벽을 정비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더불어 오르도뉴 1세는 859년에는 알벨다(Albelda)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벨다(지금의 Albelda de Iregua)를 점령했다. 그리고 나바라(Navarre)와 바스크 지방 교통의 요지인 투델라(Tudela)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마란다(Miranda)와 알라바(Álava)를 공격해왔고, 부레바(Bureba) 인근에서 벌어진 모르쿠에라(Morcuera)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군대는 크게 패했다. 이 패배로 여러 해 동안 레콘키스타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866년 오르도뉴 1세가 죽고, 그의 맏아들인 알폰수 3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듬해인 867년에는 바스크인이 일으키자 알폰수 3세는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오르도뉴 1세와 마찬가지로 ‘두에로의 사막'에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특히 알폰수 3세는 이 지역에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정착해서 살 수 있게 했다.

알폰수 3세는 878년 레온(León)과 아스토르가(Astorga) 일대를 공격해온 이슬람 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발데모라(Valdemora)에서도 반격을 가해온 이슬람 군의 공격을 다시 물리쳤다. 이 전투 이후 알폰수 3세는 이슬람 세력과 3년 동안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 뒤 알폰수 3세는 879년 포르투갈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 포르투(Portu)와 코임브라(Coimbra) 등을 점령했다. 때문에 알폰수 3세의 재위기간에 아스투리아스왕국의 영토는 몬데고 강(río Mondego)과 두에로 강을 경계로 한 지역까지 크게 넓어졌다. 이에 알폰수 3세는 한때 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폰수 3세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이 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맏아들인 가르시아 1세는 레온을 가지게 되었고, 둘째인 오르도뉴 2세는 갈리시아(Galicia)를 가져갔고, 그리고 프루엘라 2세가 아스투리아스의 왕위를 이었다.

레온의 왕으로 즉위한 가르시아 1세는 부왕 알폰수 3세가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두에로의 사막'에 기독교도들을 이주시켜 국방을 강화한 것처럼, 그 지역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로아(Roa), 오스마(Osma), 클루니아(Clunia),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San Esteban de Gormaz) 등의 도시를 세웠다.

가르시아 1세는 914년에 자식이 없이 사모라에서 죽었다. 때문에 레온의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르도뉴 2세가 병합했다. 오르도뉴 2세는 형제들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했으므로 그의 재위기에 레온왕국의 수도인 레온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인 오비에도(Oviedo)를 대신해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또한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통치하던 코르도바(Córdoba)의 이슬람 세력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알폰수 3세 때부터 영향력이 커졌던 카스티야의 귀족들과 대립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던 메리다(Mérida)와 에보라(Évora)를 공격했으며, 나바라 왕국의 산초 1세(Sancho I)와 동맹을 맺고 두에로 강 유역을 공격해온 이슬람 세력에 맞섰다. 917년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San Esteban de Gormaz)를 공격해온 아브드 알라흐만 3세를 물리쳤으며, 918년에는 바누 카시 왕가로부터 아르네도(Arnedo)와 칼라오라(Calahorra)를 빼앗았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920년 군대를 보내 두에로 강 유역의 오스마(Osma)와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를 공격해오자, 오르도뉴 2세는 나바라 왕국과 연합해 이에 맞섰다. 하지만 발데훙쿠에라(Valdejunquera) 전투에서 패해 투이(Tui)와 살라망카(Salamanca)의 주교가 이슬람 군에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카스티야의 귀족들이 호응하지 않아 패했다고 생각한 오르도뉴 2세는 타하레스(Tejares)로 카스티야의 백작들을 소집한 뒤에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반격을 시작해 라리오하(La Rioja)를 점령했으며, 나헤라(Nájera)와 비구에라(Viguera)를 빼앗았다.

오르도뉴 2세는 924년에 레온에서 죽었으며, 그의 아들들을 대신해 동생인 프루엘라 2세가 갈리시아-레온 왕국을 병합했다. 프루엘라 2세는 오르도뉴 2세와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924년 오르도뉴 2세가 죽자 뒤를 이어 레온 왕국의 왕위에도 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스투리아 왕국이란 국명 대신 레온 왕국이란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서고트 왕국 위티자 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올문도(Olmundo)의 아들 게불도(Gebuldo)와 아레신도(Aresindo)를 살해하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레온의 주교 프루니미오(Frunimio)를 추방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레온 왕국의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인 925년에 죽고, 아들인 알폰수 프루엘라스가 즉위한다.

하지만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인 산추 오르도녜스(Sancho Ordóñez), 알폰수 4세(Alfonso IV), 라미루 2세(Ramiro II) 등은 팜플로나(Pamplona)의 왕인 세메노 가르체이츠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926년 알폰소 프루엘라스는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에게 패해 아스투리아스왕국의 동쪽 변경으로 쫓겨났다. 그 뒤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산추 오르도녜스는 갈리시아 왕국을, 알폰수4세는 레온 왕국을, 라미루 2세는 포르투를 통치했다.

산추 오르도녜스는 926년부터 929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원 복구 외에는 별다른 치적 없이 갈리시아를 통치하다가 죽고 그 영토는 알폰수 4세가 합병했다. 알폰수 4세는 레온을 통치하다가 929년 형 산추 오르도녜스가 후계 없이 죽으면서 갈리시아를 합병했지만 931년 왕비인 오네카가 죽자 동생인 라미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아군(Sahagún)의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알폰수 4세는 권력욕을 쉽게 놓지 못하여 동생에게 나라를 넘기고 수도원에 은거한 것을 후회해 932년 봄에 수도원에서 나와 라미로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변경 밖으로 추방되었던 알폰수 프루엘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폰수 4세와 연합했다. 그리고 이복동생들인 라미루 프루엘라스(Ramiro Froilaz), 오르도뉴 프루엘라스(Ordoño Froilaz) 등과 함께 레온을 공격했다. 당시 라미루 2세의 군대는 이슬람 세력에게 포위된 톨레도를 구원하려고 사모라(Zamora)에 집결해 있었다. 라미로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톨레도 구원을 위해 파병했던 군대를 서둘러 철수시켰고, 결국 알폰수 프루엘라스 등은 라미로 2세에게 패해 사로잡혔다.

알폰수 프루엘라스와 알폰수 4세 등 4인은 실명형을 선고받고 루이포르코(Ruiforco)의 산훌리안이산타바실리사(San Julián y Santa Basilisa) 수도원에 갇혔다. 알폰수 4세의 반란을 진압한 라미루 2세는 곧바로 지금의 마드리드인 마게리트(Magerit) 공격에 나서고, 톨레도를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게 했다. 939년에는 나바라 왕국의 군대와 연합해 시망카스 전투(the Battle of Simancas)에서 아브드 알라흐만 3세의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왕국의 영토를 두에로(Duero) 강과 토르메스(Tormes) 강 유역까지 넓혔다.

하지만 재위기간 말기에는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와 대립하면서 점차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과 연합해 이슬람 세력에 맞섰으나, 변경 지역에 레온 왕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라미루 2세는 944년에 페르난 곤살레스를 붙잡아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어 있던 페르난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풀려난 뒤에도 그는 레온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꾀했다.

라미루 2세는 950년에 다시 원정에 나서 탈라베라(Talavera)에서 이슬람 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병이 들어 죽었다. 라미루 2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 산추 1세가 왕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결국 오르도뉴 3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즉위할 당시 이미 카스티야 등이 레온왕국에 반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통치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나바라와 카스티야는 그의 이복동생인 산추 1세를 지지하며 그와 대립했다.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가 산추 1세와 동맹을 맺자 오르도뉴 3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딸인 우라카 페르난데스와 이혼했다.

오르도뉴 3세는 안팎의 반대 세력과 맞서야 했다. 갈리시아(Galicia)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며, 알안달루스(Al-Ándalus)의 이슬람 세력의 공격도 잇달았다. 오르도뉴 3세는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955년 리스본까지 원정군을 보냈으며, 그 뒤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Abd ar-Rahman III)와 화의조약을 맺었다.

오르도뉴 3세는 956년 사모라(Zamora)에서 죽었으며, 이혼한 우라카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만 있었기에 동생인 산추 1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산추 1세는 958년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 등에 의해 지나치게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페르난 곤살레스를 비롯한 귀족들은 알폰소 4세(Alfonso IV)의 아들인 오르도뉴 4세(Ordoño IV)를 새로 왕으로 추대했고, 산추 1세는 팜플로나로 피신했다.

오르도뉴 4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산추 1세는 나바라와 이슬람 세력인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Abd ar-Rahman III)의 지원을 받아 959년에 사모라(Zamora)를 공격해 왔다. 페르난 곤살레스의 군대도 연합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오르도뉴 4세는 산추 1세의 군대가 레온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스투리아스(Asturias)로 도망쳤고, 산추 1세가 다시 복위했다.

산추 1세는 도주한 오르도뉴 4세를 끝까지 추격했다. 오르도뉴 4세는 961년에는 다시 부르고스(Burgos)로 피신했다. 오르도뉴 4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자 메디나셀리(Medinaceli)에 주둔하던 이슬람 군의 장군인 갈리브 알나시리(Ghalib al-Nasiri)에 투항했다.

레온 왕국의 왕위을 되찾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왕권은 쇠약해진 상태였으므로 카스티야와 갈리시아(Galicia)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966년에 포르투갈의 백작인 곤살로 메넨데스(Gonzalo Menéndez)에게 독살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라미루 3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당시 5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왕비인 테레사 안수레스와 산추 1세의 누이인 엘비라 라미레스(Elvira Ramírez)가 섭정으로 대신 왕국을 통치했다.

라미루 3세 즉위 초 당시였던 레온 왕국은 내부적으로 왕위 분쟁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어 카스티야(Castilla)와 갈리시아(Galicia)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라미루 3세의 재위기간 초기에 레온왕국은 알안달루스(Al-Ándalus)를 통치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인 후우마이야왕조의 알하캄 2세(Al-Hakam II)와 평화교섭을 진행했다. 그리고 968년에는 갈리시아를 침공해온 바이킹을 물리쳤다.

976년 알 하캄 2세가 죽고 히샴 2세가 즉위한 뒤 새로 재상이 된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970년대 후반부터 980년대 초까지 레온 왕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왔고, 연이은 패배로 라미루 3세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981년 루에다 전투(Battle of Rueda)에서 레온왕국과 나라바왕국·카스티야 등이 연합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에 크게 패했고, 사모라(Zamora)·루에다(Rueda)·아티엔사(Atienza)·세풀베다(Sepúlveda) 등을 빼앗겼다.

그러자 곤살로 메넨데스를 비롯한 갈리시아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오르도뉴 3세의 아들인 베르무두 2세(Bermudo II)를 왕으로 세웠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에서 여름까지 갈리시아를 장악한 뒤에 그해 가을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리하여 왕국은 둘로 갈라졌다.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의 귀족들은 베르무두 2세를 지지했고, 레온과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라미루 3세를 지지했다. 두 세력은 983년 안타스데울라(Antas de Ulla)에서 격돌했지만, 어느 세력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 뒤 베르무두 2세는 갈리시아를 통치하고, 라미루 3세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는 것에 주력했다.

라미루 3세는 985년에 데스트리아나(Destriana)에서 죽었다. 그러자 베르무두 2세가 레온 왕국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스티야 등지의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르무두 2세의 지배에 저항했으므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991년부터 992년까지 베르무두 2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슬람 세력에 점령되어 있던 사모라(Zamora)를 탈환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반격을 받아 코임브라(Coimbra)와 레온이 파괴되었다. 이슬람군은 996년에는 아스토르가(Astorga)를 침공했고, 997년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공격해왔다. 당시 베르무두 2세는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말을 탈 수 없어 들것에 올라타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통풍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르무두 2세는 999년에 빌라누에바델비에르소(Villanueva del Bierzo)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인 알폰소 5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5세도 되지 않았으므로 베르무두 2세의 왕비인 엘비라 가르시아가 섭정을 하였다.

동부의 경우 앞서 상술한 대로 7세기 말, 현재의 바스크 지방으로 진출한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이 번갈아 가며 바스크 공작령을 세우나 719년 이슬람 세력에게 수도인 팜플로나를 점령당했다. 이후 778년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사라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진출했다. 하지만 철군 과정에서 팜플로나가 카롤루스의 군대가 진입하는 것을 막자 분노한 카롤루스는 바스크족이 이슬람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여겼으며 팜플로나를 함락시키고 파괴해 버린 후 철수하였다. 이에 바스크족은 철수하는 프랑크 군대의 후미를 론세스바예스(롱스보) 고개에서 공격하였고, 브르타뉴 변경백 흐로들란드가 지휘하던 프랑크 후위부대를 전멸시키면서 프랑크 왕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가스코뉴 백작이 투항한 이래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있다고 간주된 지역이었으나 카롤루스가 팜플로나를 공격, 함락시킨 시점에서 더는 그렇지 않았다. 바스크족은 프랑크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 양쪽 모두에 대해 투쟁하기 시작했고 작센족과 피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입장에선 무척 난감한 상대가 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 왕국을 세운다. 이 왕국은 아키텐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프랑크 왕국에 종속된 왕국이었으나, 이찌되었든 자체적으로 군사 활동이 가능한 종속 국가였다. 최초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루이 1세로 . 카롤루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인구를 보유한 아키텐 지역은 오로지 바스크족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하는 데에 전담시켰다.

바스크족과의 분쟁은 788년, 툴루즈 백작이 알라릭이라 불리는 지역 지도자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확대된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자신의 봉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고,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였던 젤노르의 윌리엄을 새로운 툴루즈 백작으로 내려보내 대응하게 한다. 그는 790년 알라릭을 제거했고, 뒤이어 바스크족을 압박해 들어갔다.

거기다 피레네 산맥 너머 현재의 카탈루냐 지방을 합병한 후 설치된 에스파냐 변경백령과 아라곤 백작령이 서쪽으로 확대되면서 바스크족은 이쪽 방향으로도 압박을 받았다. 이 지역의 프랑크 왕국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북진 당시에도 고집스럽게 기독교를 고수한 바스크족이야말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는 것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고 바스크족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안으로 넣고자 압박하였다.

결국 812년, 카롤루스 왕조는 피레네 산맥을 온전히 점유했고, 바스크족은 굴복하고 말았다. 바스크 공작령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814년 카롤루스가 사망한 후 바스크인들은 다시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고, 이때 바스코 공작령은 친프랑크계였던 벨라스코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816년 이슬람 군에 패해 전사했고, 그 뒤 에네코 아리차가 벨라스코를 대신해 팜플로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어서 820년 아라곤 백작령을 종속시켰다.

824년 프랑크 왕국의 가스코뉴 공작 아스나르 산체스(Aznar Sánchez)가 팜플로나를 공격해왔으나 이니고 아리스타는 오레아가(Orreaga)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독립한 바스코 공작령은 에네코 아리차를 초대 국왕으로 하는 팜플로나 왕국으로 독립 국가가 되었다.

840년 에네코 아리차의 사위 무사 이븐 무사(Musa ibn Musa)가 팜플로나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슬람 후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2세(Abd ar-Rahman II)는 사라고사 태수 아브드 알라 이븐 쿨라이브(Abd Allah ibn Kulayb)을 보내 공격해왔다. 에네코는 아들인 가르치아를 보내 무사 이븐 무사, 오르티 에네코이츠(Orti Enekoitz) 등과 연합해 이슬람 세력에 맞섰다. 하지만 843년 전투에서 크게 패해 아들 갈린도를 코르도바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

842년 에네코는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거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인 가르치아 에네코이츠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대신했다. 그는 850년에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나바라 공작으로 봉해져 팜플로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나, 851년 말에서 852년 초에 사망했고, 왕위는 장남인 가르치아 에네코이츠가 물려받는다.

하지만 매부였던 무사 이븐 무사는 가르치아에게 등을 돌리고 후 우마이야 왕조의 무함마드 1세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859년 팜플로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가르치아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오르도뉴 1세와 동맹을 맺었다. 가르치아의 군대는 알벨다(Albelda) 전투에서 바누 카시의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무함마드 1세는 가르치아의 맏아들인 오르티 가르세이츠를 코르도바에 구금하였다. 870년 가르치아는 우에스카에서 무사 이븐 갈린도(Mūsā ibn Galindo)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암루스 이븐 유수프(Amrus ibn Yusuf)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다시 후 우마이야 왕조와 적대관계로 돌아선 무사 이븐 무사의 아들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사라고사의 태수인 무함마드 이븐 로프(Muhammad ibn Lop)의 공격으로 아이바르(Aibar) 성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가르치아 에네코이츠가 죽었으며, 그 뒤 코르도바에 구금되어 있던 그의 아들 오르티 가르체이츠가 팜플로나로 돌아와 882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오르티는 바누 카시 왕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해 팜플로나의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때문에 레이레 수도원으로 칩거하기도 했다. 결국 905년 팜플로나의 귀족들은 오르티 가르체이츠를 대신해 안초 1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켜 몰아냈다.

안초 1세는 위한 뒤에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오르도뉴 2세와 동맹을 맺고 이슬람 세력과 빈번히 전투를 벌여 영토를 나헤라(Nájera)와 프랑스의 바스나바르(Basse-Navarre)까지 크게 넓혔다. 그래서 나헤라를 수도로 삼은 나바라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때까지 팜플로나 왕국은 유럽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유럽 제어권 민족의 나라였기에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고작해야 바스크 농사꾼들이 세운 나라라고 멸시당했으나 안초 1세는 925년 12월 10일 레사(Resa)에서 죽었고, 자식들이 모두 어렸으므로 아라곤 백작이었던 동생인 세메노 가르체이츠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후우마이야 왕조와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세메노는 931년 5월 29일에 죽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안초 1세의 맏아들인 가르시아 산체스 1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렸으므로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에네코 가르치아와 생모인 토타 아세아리츠가 섭정을 하였다.

토타 아스나레스가 섭정을 하는 동안 팜플로나 왕국은 이슬람의 후 우마이야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섭정을 끝내고 직접 통치에 나선 가르체아 1세는 누이인 우라카 산체스(Urraca Sánchez)의 남편 레온 왕국의 라미로 2세, 또 다른 누이인 산차 산체스(Sancha Sánchez)의 남편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 사라고사의 통치자인 무함마드 이븐 하심(Muhammad ibn Hashim) 등과 동맹을 맺고 후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했다. 그는 939년 라미로 2세 등과 함께 시망카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951년 레온 왕국의 라미로 2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들인 오르도뉴 3세와 산초 1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가르시아 산체스 1세는 누이인 우라카 산체스의 아들 산초 1세를 지원했다. 산초 1세는 956년 오르도뉴 3세가 죽은 뒤에 레온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958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 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산초 1세가 팜플로나로 피신해오자 가르시아 산체스 1세는 이슬람 세력과 연합해 960년 레온 왕국을 점령하고 산초 1세를 다시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카스티야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누이인 산차 산체스와 사별한 페르난 곤살레스에게 자신의 딸인 우라카 가르세스를 시집보냈다.

970년 가르체아 1세가 죽자 왕위는 아들인 안초 2세가 물려받았다. 즉위 당시 알 만수르가 이끈 후 우마이야 왕조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어린 나이에 칼리프로 즉위한 히샴 2세를 보좌했던 알 만수르는 970년대 후반부터 980년대 초까지 기독교 세력이 차지했던 지역들을 공격해왔고, 잇달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안초 2세는 975년 이복동생인 라미로 가르체스가 왕으로 있던 비게라 왕국(Reino de Viguera) 지원에 나섰다가 이슬람 군에게 패했으며,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981년에는 레온 왕국의 라미로 3세 등과 연합해 알 만수르의 공격에 맞섰으나 루에다(Rue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안초 2세는 코르도바로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했고, 982년에는 딸 우라카를 알 만수르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슬람군은 989년과 991년, 992년에도 공격해왔고, 산초 가르세스 2세는 아들인 곤살로를 코르도바로 보내 다시 화의를 청했다.

994년 안초 2세가 죽자 맏아들인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가 왕위를 이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팜플로나 왕국은 이슬람 후 우마이야 왕조의 재상이던 알 만수르(al-Hajib al-Mansur)의 공격을 받아 잇달아 패했으며, 그에게 화의를 요청하며 굴복했다. 그러나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는 왕위에 오른 뒤에 카스티야 백작인 산초 가르시아, 살다냐 백작인 가르시아 고메스 등과 연합해 후우마이야 왕조에 맞서려 했다.

997년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는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고 있던 사라고사의 칼라타유드(Calatayud)를 침공해 그곳 태수의 동생을 죽였다. 알 만수르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도 50명을 참수했다.

카스티야의 경우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무슬림 세력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 지역에 많은 성채를 짓고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그러다가 850년 로드리고라는 인물이 카스티야 최초의 백작으로 등장하면서 카스티야 백작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로드리고는 에브로 강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고대 칸타브리아의 언덕 마을인 아마야를 거점으로 삼고 요새화했다. 이후 이 지역은 세분화되어 알라바, 부르고스, 세레소, 란타론, 축소된 카스티야로 명명되었으며, 각각 별도의 백작들이 신설되었다.

930년경,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카스티야 전역을 통합했다. 그는 주군으로 섬기는 레온 왕국의 국왕에 대해 한편으로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기를 드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레온 국왕 라미루 2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944년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무슬림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뒤 레오내의 지하감옥에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었던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석방 후에도 라미루 2세에게 대한 반감을 간직한 그는 카스티야 동부로 피신한 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슬림들은 그런 그를 지원했고, 947년 사모라를 공격했다가 패퇴했으며 948년 갈리시아의 큰 도시인 오르티게이라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들이 갈리시아 등 레온 왕국의 서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느라 카스티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이 때를 틈타 잃어버린 카스티야 영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결국 라미루 2세는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카스티야 백작으로 복위했고, 산초 1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과 레온 왕국을 상대로 충성 대상을 바꿔가면서 자치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노력하면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영토를 차츰 늘렸다.

포르투갈의 경우 아스투리아스와 레온 왕국의 봉신국으로 868년에 늦게 성립되었다. 868년, 갈리시아 귀족 비마라 페레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알폰수 3세의 지시에 따라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초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랍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871년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

873년 비마라 페레스가 사망한 후, 비마라의 아들로 추정되는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알폰수 3세에 의해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878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오포르토와 코임브라를 공격해오자, 갈리시아 귀족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와 함께 물리쳤다.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는 갈리시아인들을 브라가, 비세우, 라멩고 등지에 이주시켰다. 이후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코임브라 백작을 칭했다. 루시디오 비마라네스는 910년 루고 일부를 영지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두메의 감독관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서 887년에서 917년 사이에 아스투리아스 헌장에 여러 번 이름을 실었다.

922년경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사망한 뒤, 레온 왕국의 귀족 데자 백작 곤살로 베토테스의 아들인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943년까지 포르투갈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루시디오는 생전에 카스티야 백작령에서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이주한 귀족 디오고 페르난데스의 딸 무마도나 디아스와 결혼했는데, 무마도나가 남편 사후 여백작으로 취임하여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하다가 950년 후반에 여섯 자식에게 영지를 골고루 양도하면서 장남 곤살루 멘데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했다.

곤살루 멘데스는 964년 아내 일두아나 파이스와 함께 모레이라 데 코네고스 와 카스타 네이라 마을을 어머니 무마도나가 세운 기마랑이스 수도원에 기부했다. 한편 레온 왕국에서 오르도뉴 4세 산추 1세의 내전이 한창 벌어졌을 때 오르도뉴 4세를 지원했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내전에서 승리한 산추 1세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966년, 산추 1세는 그의 영지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19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삼피로의 연대기에 따르면, 신추 1세는 곤살루가 바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독살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뜬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968년 갈리시아의 귀족 로드리고 벨라스케스의 친척이자 산 마르티뇨 데 파소의 수녀원장인 군트로다가 산타 콤바 수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 수녀원의 본 주인이던 오도리노가 도움을 요청하자, 무마도나는 아들 곤살루와 라미루를 통해 군트로다에게 "volens nolens(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도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군트로다가 이에 불응하고 로드리고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두 가문의 전쟁이 벌어졌고, 곤살루가 로드리고를 아귀온차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종결되었다. 982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2세는 로드리고의 아들이자 이리아 프라비아 교구의 주교인 펠라요 로드리게스를 해임했는데, 그가 이 일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81년, 라미루 3세가 루에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사령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게 참패했다. 만수르는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982년에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알 만수르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곤살루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해 982년경 오르도뉴 3세 사생아 베르무두 2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옹립하며 반기를 들었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과 여름에 갈리시아 전역을 공략하며 위세를 떨쳤다. 라미루 3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출진했고, 983년 초 양자는 갈리시아의 안타스 데 울라 근처 포르텔라 데 아레나스에서 격돌했지만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후에도 갈리시아 왕을 자처하다가 985년 라미루 3세가 사망하자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국왕에 선임되었다.

997년,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레온 왕국의 서부 영토를 관통하여 포르투갈과 갈리시아를 파괴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진입한 뒤 그곳의 대성당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성당 대문을 가지고 가서 코르도바 모스크에 내걸었다. 곤살루는 이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만수르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는지 병에 걸려 사망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 백작에 서임된 멘도 곤살베스는 999년부터 레온 왕실 헌장에 포르투갈 백작으로 언급되며, 그 해에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폰수 5세의 가정교사를 맡는 동시에 알폰수 5세의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함께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1] 스페인 북서부의 산맥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2] 중세 초기에 귀족 청년들에게는 곰과의 결투가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의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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