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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샴 1세의 디르함 은화
هشام بن عبد الرحمن الداخل
히샴 이븐 아브드 알 라흐만 알 다클
재위 788년 10월 6일 ~ 796년 4월 16일
생몰 757년 4월 26일 ~ 796년 4월 16일
후우마이야 왕조의 2번째 아미르. 동명의 우마이야 칼리파 히샴의 증손자로, 부왕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안달루스를 장악한 후 얻은 첫 아들이었다. 이후 후계자로 지정되었는데, 아브드 알 라흐만이 과거의 도피 도중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들 술레이만이 나타나며 문제가 발생하였다. 비록 788년, 아브드 알 라흐만이 사망하자 예정대로 히샴이 제위를 계승하였지만 톨레도 총독이던 이복형 술레이만은 동생 압둘라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히샴은 이를 진압하고, 술레이만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후 내치에 집중하여 정권을 안정시킨 히샴은 프랑크 왕국의 남하에 맞서 793년,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비록 나르본과 지로나[1]에 대한 공격은 실패하였으나 사령관 압둘 말리크 이븐 압둘 와히드는 카르카손에서 프랑크군을 격파하고 많은 약탈물 및 노예를 대동하고 개선하였다. 신실했던 히샴은 이를 코르도바 대사원의 확장[2] 및 여러 모스크 건립에 사용하였다.
794년에 압둘 말리크 동생 압둘 카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 원정에 나섰다. 그 수도인 오비에도가 함락되었고, 국왕 알폰소 2세는 험지로 도주한 후 샤를마뉴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비록 아스투리아스를 멸망시키지는 못하고 회군하였지만 8세기 중반의 혼란을 틈타 축소되었던 알 안달루스는 바스크 접경 지역까지 회복되었다. 업적을 이어가던 히샴은 796년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본보기로 삼았던 선대 칼리파 우마르 2세와 비견될 정도로 경건하고 공명정대한 통치에 임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마찬가지로 오래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재차 내전과 반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후우마이야 조에게 있어 불행이라 할 수 있겠다. 사후 15세 때에 얻은 아들 알 하캄 1세가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