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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21:53:15

가르치아 1세 에네코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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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가르체아 에네코이츠.jpg
Gartzia Enekoitz
가문 에네코 왕조
생몰년도 810년경 ~ 882년
출생지 후우마이야 왕조 팜플로나
사망지 팜플로나 왕국 팜플로나
재위
기간
팜플로나 왕국 국왕 852년 - 882년경
아버지 에네코 아리차
어머니 오네카(또는 토타) 베라스코이츠
형제 아소나 에네코이츠, 가린도 에네코이츠, 누닐라 에네코이츠
배우자 우라카 세메노이츠
자녀 오르티 가르체이츠, 안초 가르체이츠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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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팜플로나 왕국 2대 국왕.

2. 생애

810년경 에네코 아리차와 오네카(또는 토타) 베라스코이츠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찍이 코르도바의 에미르 궁정에서 인질로 지내면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843년, 에네코 아리차는 이복 형제이자 에브로 계곡 상류에 정착한 아랍 가문인 무왈리드 바누 카시 일족의 지도자인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موسى بن موسى القسوي)와 함께 후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에게 참패했다. 이때 가르체아는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 섰다가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 844년 에네코와 알 카사위는 후우마이야 왕조에 귀순했고, 에네코의 아들 가르체아와 알 카사위의 아들 루브 이븐 무사는 코르도바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수 년안에 팜플로나로 돌아갔다.

850년 알 카사위가 코르도바를 상대로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담했다. 이번에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쉽사리 진압하지 못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결국 852년 9월 아브드 알 라흐만 2세는 알 카사위와 팜플로나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사망했고, 뒤를 이어 아미르에 오른 무함마드 1세는 팜플로나 왕국과 알 카사위로부터 명목상의 충성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이 자기네 영토를 알아서 통치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때 팜플로나 왕국의 군주로 에네코가 아니라 아들 가르체아 에네코이츠가 언급되는 것을 볼 때, 에네코는 852년경에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르체아는 초기엔 바누 카시 일족과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859년 뵤른 야른시다(Bjǫrn Járnsíða)와 하스테인(Hásteinn)이 이끄는 69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바이킹 함대가 바스크로 쳐들어왔다. 이때 알 카사위는 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 팜플로나를 공격하도록 허락했다. 이로 인해 바이킹들이 팜플로나로 쳐들어오자, 가르체아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참패하고 사로잡혔다. 이후 70,000 디나르의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석방된 그는 바누 카시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접근했다. 859년 알 카사위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속한 알베이다 시를 빼앗고 그곳을 요새화하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아스투리아 국왕 오르도뉴 1세와 동맹을 맺고 2차 알베다 전투에서 알 카사위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아브로 강 계곡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랍 군주였던 알 카사위는 이 패전의 여파로 쇠락했다.

그러나 860년 무함마드 1세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의 공세를 막지 못해 팜플로나가 함락되었고, 아들 오르티 가르체이츠는 생포되어 코르도바로 끌려간 뒤 20년간 그곳에 억류되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은 후우마이야 왕조에 조공을 매년 바쳐야 했다. 870년 우에스카의 군주이자 형제 안초 가르체이츠의 아들인 무사 이븐 갈린도를 살해하고 집권한 아무르 이븐 우마르 이븐 아무르와 동맹을 맺었고, 871년에는 코르도바에 반기를 일으킨 무사 이븐 갈린도의 아들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었으나,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가르체아의 통치 말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가르체아가 871년경에 사망했고, 가르체아 세메노이츠(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 세메노 가르체이츠의 아버지)가 오르티가 팜플로나로 돌아오는 880년까지 왕국을 섭정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인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스페인 역사가이자 정치가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스는 882년 가르체아가 동맹인 우마르 이븐 하프신과 함께 후우마이야 왕조군에 맞서 알리바르 전투를 치른 후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대체로 가르체아가 882년경까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르체아는 아라곤 백작부인 우라카 세메노이츠를 아내로 삼아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오르티 가르체이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이 되었다. 차남 안초 가르체이츠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아들 무사 이븐 갈린도는 우에스카의 군주를 맡다가 우마르 이븐 아무르에게 피살당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