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0:24:25

다비트 3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cfaa1, #bdfcc9 20%, #bdfcc9 80%, #8cfaa1);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바그라티온 왕조
다비트 1세 구르겐 1세 아다르나세 3세 아쇼트 2세
바그라티온 왕조
구르겐 2세 바그라트 1세 아쇼트 3세 아다르나세 4세
바그라티온 왕조
바그라트 2세 다비트 3세 바그라트 3세 }}}
}}}}}}

타오 공국 10대 공작
დავით | 다비트 3세
파일:다비트 3세.jpg
제호 한국어 다비트 3세
조지아어 დავით
라틴어 David III
칭호 쿠로팔라테스(Kuropalates)
생몰 년도 미상 ~ 1001년
재위 기간 968년 ~ 1001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타오 공국 10대 공작.

2. 생애

타오 제8대 공작 아다르나세 4세와 제2대 클라제티 공작 다비트 1세의 딸의 아들이다. 형제로 바그라트 2세가 있었다. 961년 바그라트 2세와 함께 아버지를 강제 은퇴시키고 수도원에 유폐했다. 이후 타오 공작에 취임한 바그라트 2세가 968년에 사망하면서 그가 새 타오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타오 공국을 확장하여 조지아를 통합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타론과 만지케르트 공국을 합병하여 조지아 전역에 경제,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이 조지아의 통합을 좌시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독립할 때를 노렸다.

그러던 976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바실리오스 2세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토르니키오스가 이끄는 12,000명의 분견대를 파견해 바르다스 포카스가 이끄는 토벌대에 가담시켰다. 979년 3월 24일, 바르다스 포카스는 판칼리아 전투에서 바르다스 스킬리로스를 격파했고, 스킬리로스는 소수의 추종자만 이끌고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그는 반란 진압에 도움을 준 공적을 인정받아 상당한 영토를 받았다. 이리하여 유프라테스 강 북서쪽에서 에르주름 지방을 거쳐 남동쪽의 무라드-수 상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980년, 그는 반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마나즈케르트 토후국을 공략했다. 또한 아르메니아 왕 숨바트 2세와 카르스 왕 무첼의 영토 분쟁을 중재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다. 987년 8월, 바르다스 포카스가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포카스에게 2,000명의 기병을 보내주는 한편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테스가 이끄는 바실리오스 2세 지지파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989년 4월 13일 포카스가 다르다넬스의 아비도스 전투에서 바실리오스 2세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반란군과 손잡은 것에 분노하여 칼데아의 요안니스 휘하의 강력한 군대를 조지아로 파견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990년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사망 시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줄 것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용서받고 쿠로팔라테스(Kuropalates) 칭호를 수여받았다.

당시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이베리아 왕국의 어린 왕자 바그라트 3세를 입양했다. 바그라트 3세는 978년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압하지야의 왕위에 올랐다. 990년 라티 공작이 자신의 권위를 계속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자, 바그라트 3세는 라티 공작을 토벌하고자 군대를 동원했다. 당시 바실리오스 2세에게 굴복하여 자신이 죽으면 영지를 제국에 바치겠다고 서약한 일로 마음이 상했던 그는 양아들이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의심했다. 그는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이자 역시 이베리아의 왕자인 구르겐 1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해 섬멸해버렸다. 이에 바그라트 3세는 홀로 다비트 3세에게 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리며, 자신은 복종을 거부한 라티 공국을 징벌하려 했을 뿐이지 그를 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다비트 3세는 오해를 풀고 그를 돌려보냈다.

한편, 그가 마나즈케르트 토후국을 공략하고 아제르바이잔에 습격을 일삼는 것에 분노한 아제르바이잔의 라바디드 통치자 맘란은 주변의 여러 에미르들을 설득하여 그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이에 맞서 아르메니아와 연합했고, 998년 맘란을 상대로 2차례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001년 초 성목요일 때 성찬식에 참석했다가 귀족들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즉사했다. 사후 그의 영지는 바그라트 3세에게 양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