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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2 17:13:54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이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영어: Bardas Skleros, 그리스어: Βάρδας Σκληρός)
출생 미상
사망 991년 4월 2일
직위 동방 제국군 사령관
반란 대상 바실리오스 2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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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바실리오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2. 행적

소아시아에 거대한 사유지를 소유한 스클레로이 가문의 일원으로, 어머니 그레고리아는 바실리오스 1세의 형 바르다스의 후손이었다. 970년,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5만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스클리로스는 요안니스 1세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1만 2천 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했다.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키예프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키예프군은 정신없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그만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키예프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키예프 루스군 2만 명이 살해되는 동안 제국군은 겨우 25명만 전사했다고 한다.

그 후 스클리로스는 요안니스 황제의 심복이 되었고, 황제의 원정에 언제나 함께하며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던 976년 봄 요안니스가 사망하자, 그는 제위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다. 이후 카이사레아로 진격하여 977년 가을 페트루스 포카스와 두 번 맞붙어 모조리 승리했고, 페트루스는 두 번째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탈레이아에 근거지를 둔 제국 남부 함대는 스클리로스에게 충성을 바쳤고, 몇달 뒤 니케아도 스클리로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는 군대를 보스포루스의 아시아쪽 해안에 집결시키고 수도를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마히알 쿠르티키오스가 이끄는 반란측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려다 테오도로스 카란테노스가 이끄는 정부측 해군에게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바실리오스 2세의 섭정을 맡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 시종장은 키오스 섬에 7년간 유배되어 있던 바르다스 포카스를 복권시켜서 스클리로스와 맞서게 했다. 바르다스는 곧바로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이사레아로 잠입한 뒤, 스클리로스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일으켰다. 스클리로스는 후방이 위협받자 어쩔 수 없이 철수하여 바르다스와 격돌했다. 바르다스와 스클리로스의 전쟁은 3년간 이어졌다. 스클리로스는 여러 차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르다스는 질서정연하게 퇴각한 뒤 증원병을 모아 다시 응전했다.

그러던 979년 봄, 양측은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바르다스는 전투 도중에 반란군에 단독 대결로 승부를 판가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스클리로스가 이에 응했고, 두 사람은 양측 병사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모인 한가운데에서 격투를 벌였다. 둘은 말을 타고 달려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포카스는 스클리로스의 검을 피했지만, 그 검은 그가 탄 말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포카스가 내지른 검은 스클리로스의 머리를 스쳤다. 스클리로스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고,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스클리로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스클리로스는 6년간 바드라드 궁정에 지내며 동로마 제국으로 복귀할 날을 꿈꿨다. 그러던 987년 8월, 그는 시리아에 잠입한 뒤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또 다시 황제를 칭했다. 이때 비슷한 시기에 역시 황제를 칭한 바르다스 포카스가 협상을 제안했다. 바르다스는 유럽 지역을 맡고 스클리로스는 마르마리 해에서 동방 속주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맡자는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세력이 바르다스보다 열세하다는 걸 잘 알았던 스클리로스는 이에 동의하여 구체적인 협의를 위해 바르다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바르다스는 경호원도 없이 온 스클리로스를 곧장 체포하여 티로포이온 요새에 감금했다.

그 후 2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989년 4월 13일 바르다스가 아비도스 전투에서 전사한 뒤 바르다스의 아내에 의해 풀려나 반란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너무 늙은데다 두 눈은 백내장에 걸려 있어서 대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스클리로스에게 황제의 호칭과 상징물을 포기한다면 그를 쿠로팔라테스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의 부하들은 서열과 직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더 이상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며, 일반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스클리로스는 이에 동의하여 991년경 비티니아에 있는 황제의 영지에서 바실리오스에게 투항했다. 바실리오스가 앞으로 이와 같은 내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자, 스클리로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오만해진 총독들을 처단하십시오. 원정에 나선 장군에게 너무 많은 자원을 내주지는 마십시오. 부당한 요구로써 그들을 지치게 하고, 늘 자신의 일에 몰두하게 만드십시오. 여자를 황궁 회의에 참가시켜서는 안 됩니다. 폐하의 내밀한 계획은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털어놓으십시오."

또한 그는 귀족들을 엄중하게 감시하고, 세금을 최대한 올리고, 괴롭히고, 귀찮게 하고, 재정적으로 탄압할 뿐 아니라 일부러 부당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렇게 하면 각자 제 앞가림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야망을 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 그대로 집행하였고, 그 결과 귀족들은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 동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스클리로스는 며칠 후인 991년 4월 2일에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