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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통합 조지아 왕국 8대 군주 카르틀리 왕국 초대 군주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 | 콘스탄틴 2세 |
||
제호 | 한국어 | 콘스탄틴 2세 |
조지아어 |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 | |
라틴어 | Constantine II | |
가족 |
알렉산드레 1세(할아버지) 디미트리오스(아버지) 타마르(아내) 다비트 10세(장남) 기오르기 9세(차남) 바그라트 1세(삼남) 디미트리오스(사남) 알렉산드레(오남) 멜키제데크 2세(육남) 타르가모스(칠남) 굴샤르(장녀) 아스타다르(차녀) |
|
종교 | 정교회 ( 조지아 정교회) | |
생몰 년도 | 1447년 ~ 1505년 4월 27일 | |
재위 기간 |
1478년 ~ 1489년(조지아 왕국) 1489년 ~ 1505년(카르틀리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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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8대 군주, 카르틀리 왕국 초대 군주.2. 생애
알렉산드레 1세의 차남이며 이메레티의 통치자인 디미트리오스의 아들이다.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아버지가 사냥 사고로 사망한 뒤, 기오르기 8세의 보호를 받았다. 1465년 기오르기 8세가 삼츠헤를 정벌하러 출정할 때 동행했으나, 파라바니 호수에서 벌어진 전투 때 기오르기 8세와 함께 생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쿠타이시 요새로 피신했다. 그 사이에 기오르기 8세와 맞서 싸우던 바그라트 6세가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자신을 조지아 전역의 왕으로 칭했다. 그는 카르틀리로 이동한 뒤 계속 버티다가 바그라트 6세와 협약을 맺고 귀순했다.1478년, 카라 코윤루의 군대가 조지아로 쳐들어와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이때 그는 적의 소규모 별동대를 격파했다.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은 그의 용맹을 높이 평가해 조지아 전체를 그의 수중에 배속시켜 줄 테니 귀순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에 혹해 트빌리시 요새를 적에게 넘겨주고 항복했다. 이후 우준 하산이 병에 걸려 물러나자, 그는 카르틀리에서 세력을 규합했다. 이 시기 바그라트 6세가 사망하고 아들 알렉산드레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케브수레티와 투체티의 산악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트빌리시를 재빨리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 전역의 많은 요새를 손아귀에 넣은 뒤 조지아 왕을 칭했다.
알렉산드레 2세가 이메레티로 피신하자, 그는 즉시 추격에 나섰다. 이메레티 귀족들이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잇따라 귀순했기에 , 그는1479년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략했다.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의 충성을 받아낸 뒤, 그는 쿠타이시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삼츠헤를 정버하러 떠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레 2세는 산악 주민들과 동맹을 맺고 그의 군대를 상대로 수년간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1년, 그는 밍그렐리아의 바마크 2세와 연합하여 삼츠헤를 공격했다. 삼츠헤의 지도자 마누차르는 급히 피신했고, 그는 삼츠헤를 순조롭게 점령했다. 그러나 마누차르가 이듬해 반격하여 삼츠헤를 탈환하자, 그는 1483년 재차 원정을 떠났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게다가 1484년 자신을 지지하며 이메레티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이 때를 틈타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 탈환 작전을 개시해 순식간에 이메레티 각지를 장악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1485년 이메레티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치코리 전투에서 알렉산드레 2세와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게다가 1486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야쿠브가 카르틀리로 쳐들어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야쿠브를 몰아낸 직후인 1487년, 새 망그렐리아 공작으로 취임한 라파리트 2세 디디아니가 그에게 이메레티로 원정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장정들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산악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알렉산드레 2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는 요새를 순조롭게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의 지배를 굳히려 했다.
그런데 1488년 야쿠브가 또다시 쳐들어왔다. 그는 자기가 돌아가면 알렉산드레 2세가 또다시 산에서 내려와 이메레티를 장악할 걸 우려해 귀환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해 야쿠브를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야쿠브는 그들을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1489년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랏차, 레흐쿠미 및 스바네티 산악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메레티의 여러 전략적 요새를 공략하고 쿠타이시를 탈환했다.
이에 진노한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한 뒤 카헤티, 이메레티, 삼츠헤 재정복을 위한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거듭되는 내전에 신물이 났고 그의 권력이 증가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지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평의회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 및 카헤티의 알렉산드레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약이 1491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서, 조지아는 3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1490년, 카라 코윤루의 군대가 카르틀리를 향해 진군하자 삼츠헤 지배자 쿠바르쿠바레 2세와 카헤티의 왕 알렉산드레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카라 코윤루군은 오르베티 요새에 접근했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코즈호르 요새로 이동했다. 코즈호리 요새의 수비병들은 밤에 그곳을 떠났고, 적군은 요새를 파괴한 뒤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윽고 트빌리시를 포위한 그들은 1,500명의 기병과 보병대로 구성된 분견대를 각지로 보내 오르베티 주변을 황폐화시켰다. 카르틀리 장군 술칸 바라타슈빌리가 이 분견대를 추격해 기습 공격을 가하여 섬멸하고 카라 코윤루 샤의 친척을 사로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 코윤루군은 트빌리시의 포위를 푼 뒤 철수했다. 그는 적이 물러가는 걸 확인하고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유목민들을 섬멸하고 아그자칼라 요새와 카오지아니 요새 등을 파괴했다.
1495년 이메레티 왕 알렉산드레 2세와 "귀족을 토벌할 때 서로 돕는다"라는 내용의 새로운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렇지만 내심 3개로 분열된 나라를 재통합하고 싶은 마음에 교황과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1505년 4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타마르라는 조지아 귀족 여인과 결혼하여 7남 2녀를 낳았다. 장남 다비트 10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차남 기오르기 9세 역시 나중에 카르틀리 왕위에 올랐고, 삼남 바그라트는 카르틀리의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무흐라니 가문의 창시자가 되었다. 사남 드미트리오스는 1488년에서 1490년까지 그의 공동 통치자로 활동했으며, 오남 알렉산드레는 고차슈빌리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육남 멜키제데크 2세는 조지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7남 타르가모스는 언급만 될 뿐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장녀 굴샤르는 조지아의 명문 귀족 가문인 치자바제 가문의 공작 카하베르와 결혼했고, 차녀 아스탄다르는 마누하르 공작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