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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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종류 | 지난 선거 | 다음 선거 |
대통령 선거 |
제20대 2022년 3월 9일 |
제21대 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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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
제22대 2024년 4월 10일 |
제23대 2028년 4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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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동시지방선거 |
제8회 2022년 6월 1일 |
제9회 2026년 6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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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궐선거 |
2024년 하반기 2024년 10월 16일 |
2025년 2025년 4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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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 |
1960년 3월 15일 |
폐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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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
제6차 1987년 10월 27일 |
시행 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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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 |||||||||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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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7px -12px" |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
→ |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 |
→ |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선 |
}}} | |||
투표율 | 80.65% ▼ 1.24%p | ||||||||
선거 결과 | |||||||||
후보 |
[[한나라당| 한나라당 ]]이회창 |
[[새정치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
[[국민신당(1997년)| 국민신당 ]]이인제 |
||||||
득표율 | |||||||||
38.74% | 40.27% | 19.20% | |||||||
득표수 | 9,935,718 | 10,326,275 | 4,925,591 | ||||||
대통령 당선인 | |||||||||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
[clearfix]
1. 개요
|
기뻐하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
|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한겨레 기사 |
|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영상 |
40.27%를 득표한 기호 2번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38.74%를 득표한 기호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1.53%p, 390,557표의 격차로 제치고 당선되며 민주화 이후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2. 배경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8.14%p, 표차 193만 6,048표 차로 패배한 김대중 전 민주당 총재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으나, 주변 인물들의 지속적인 권유로 1995년 6월 민주당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지원하며 정계에 복귀한다.이 후 김대중은 9월 민주당 탈당 인사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야권계의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물론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47세의 나이에 도전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제13대 대통령 선거,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총 3번 실패 후 4번째 도전이었기에 논란도 있었으며 73세의 고령[1][2]이었기에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조롱도 듣게 되었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값과 그간의 정치 경력이 죽지 않아 야권의 대권 주자로 이름을 굳히기 시작했다.
반면 신한국당의 상황은 심각했다. 지지율 80%를 넘나들던 초반은 폭삭 내려앉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이후 한국통신 파업 강제진압을 비롯해 대구광역시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와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터져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썼다.1996년 야권 분열 효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로 기사회생하나 했지만 결국 하반기 크리스마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와 1997년 한보 사태, 김현철 사태, IMF 사태 등으로 문민정부는 완전히 레임덕에 빠져 국민들의 신임을 잃고 말았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6%까지 추락[3]했다. 이는 당연히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지지율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국민들은 정권 심판의 주장을 높였다. 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은 YS 화형식까지 내세우며 이미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서 탈당을 했기 때문에 거리두기를 했다.
3. 과정
3.1. 후보자 경선
3.1.1. 새정치국민회의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9A44> 기호 | 정당 | 이름 | 비고 | ||||
새정치국민회의 | 정대철 | 낙선 | ||||||
새정치국민회의 | 김대중 | 당선 | ||||||
}}}}}}}}}}}} |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 |||
<rowcolor=#373a3c,#dddddd>기호[4] | 이름 | 득표수 | 순위 |
<rowcolor=#373a3c,#dddddd>정당 | 득표율 | 비고 | |
정대철(鄭大哲) | 907 | 2위 | |
[[새정치국민회의| |
21.96% | 낙선 | |
김대중(金大中) | 3,223 | 1위 | |
[[새정치국민회의| |
78.04% | 당선 |
한편 대선 후보 경선과 같은 날, 당 총재 경선도 같이 진행했는데 여기는 김대중 전 총재와 김상현 전 의원의 맞대결이 되었다. 김상현 전 의원은 김대중 전 총재가 대선 후보까지 겸임할 경우 새정치국민회의가 김대중 사당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며 당권과 대권의 분리를 주장하였지만, 김대중 전 총재는 본인이 출마했던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복기하면서 당권과 대권이 분리될 경우 대선 선거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고 반박했다. # 결국 여기서도 김대중 전 총재가 78.04%를 득표해 승리하면서 당권과 대권을 모두 차지한 상태로 4번째이자 인생 마지막 대선 도전에 나서게 됐다.
후보 경선을 마친 뒤, 노무현 전 의원은 찬조연설에 나섰다.
3.1.2. 자유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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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1B5B40,#289020> 기호 | 정당 | 이름 | 비고 | ||||
자유민주연합 | 김종필 | 당선 | ||||||
자유민주연합 | 한영수 | 낙선 | ||||||
}}}}}}}}}}}} |
자유민주연합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 |||
<rowcolor=#373a3c,#dddddd>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rowcolor=#373a3c,#dddddd>정당 | 득표율 | 비고 | |
김종필(金鍾泌) | 2,575 | 1위 | |
[[자유민주연합| |
82.29% | 당선 | |
한영수(韓英洙) | 554 | 2위 | |
[[자유민주연합| |
17.71% | 낙선 |
처음에는 어차피 단일화도 예정되어있는만큼 김종필 전 총재를 경선 없이 후보로 추대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신민당 출신 비주류 의원들이 박철언 전 의원이나 한영수 전 부총재를 내세워 당내 존재감을 키우자고 나섰고 결국 김종필 전 총재와 한영수 전 부총재가 경선을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6월 24일, 경선을 통해 득표율 82.29%로 한영수 전 부총재를 이기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3.1.3. 신한국당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3990,#0070BB> 기호 | 정당 | 이름 | 비고 | ||||
1 | 신한국당 | 김덕룡 | ||||||
|
|
|
사퇴 | |||||
3 | 신한국당 | 이한동 | ||||||
4 | 신한국당 | 최병렬 | ||||||
5 | 신한국당 | 이회창 |
결선 당선 |
|||||
6 | 신한국당 | 이수성 | ||||||
7 | 신한국당 | 이인제 | 결선 | |||||
}}}}}}}}}}}} |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5] | |||||
1차 투표 | 결선 투표 | ||||
<rowcolor=#373a3c,#dddddd>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득표수 | 순위 |
<rowcolor=#373a3c,#dddddd>정당 | 득표율 | 비고 | 득표율 | 비고 | |
1 | 김덕룡(金德龍) | 1,673 | 4위 | 탈락 | |
[[신한국당| |
13.89% | 낙선 | |||
|
|
사퇴 | |||
[[신한국당| |
|||||
3 | 이한동(李漢東) | 1,766 | 3위 | 탈락 | |
[[신한국당| |
14.66% | 낙선 | |||
4 | 최병렬(崔秉烈) | 236 | 6위 | 탈락 | |
[[신한국당| |
1.96% | 낙선 | |||
5 | 이회창(李會昌) | 4,955 | 1위 | 6,922 | 1위 |
[[신한국당| |
41.12% | 결선 | 59.96% | 당선 | |
6 | 이수성(李壽成) | 1,645 | 5위 | 탈락 | |
[[신한국당| |
13.65% | 낙선 | |||
7 | 이인제(李仁濟) | 1,774 | 2위 | 4,622 | 2위 |
[[신한국당| [[국민신당(1997년)| |
14.72% | 결선 | 40.04% |
낙선 → 신당 창당 |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1995년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하는 등 실력자로 통했던 최형우가 1997년 3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경선에 나서지 못했고, 김윤환도 차기 대통령은 TK가 아니어야 한다고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대신 민정계 중진인 최병렬과 김종호가 경선 참여 선언을 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후보 줄세우기 등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박찬종, 이홍구가 중도 사퇴했고, 김종호도 사퇴해 최종적으로는 6인이 경선을 치렀다.
여튼 저 9(-3)명의 각축전 때문인지 경선 열기만큼은 대체로 김대중으로 대동단결하는 분위기로 정리 가능한(하지만 하술할 DJP연합의 파장이 컸다.) 새정치국민회의보다 높았던 듯 하다. 신문 만평에서도 마침 히트 사극인 용의 눈물을 패러디한 경선 상황을 풍자한 만평들이 날마다 실릴 정도였다.[7]
당대표를 맡고 있던 이회창이 대세론을 등에 업고 유력 후보로 떠오른 가운데, 6월 25일 反이회창파 6인 경선 주자 및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 대표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이회창 대표 사퇴를 촉구했다. 이회창은 2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7월 1일 대표직을 사퇴했다.
7월 21일 실시된 경선 결과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인제가 2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진출하는[8] 파란을 일으켰으나,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김윤환의 나라회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가 단합하여 이회창을 지지한 반면[9] 민주계는 이회창,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분열한 것이 이회창 승리의 배경으로 분석되었다. 그리고 이회창의 지지율은 컨벤션 효과를 타고 김대중을 넉넉하게 따돌렸었다.
3.2.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
그런데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된 후, 이회창의 아들 두 명이 모두 체중 미달 사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회창은 부정하게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없다고 항변했으나,[10] 둘째 아들의 병적 기록표에 부모가 아닌 백부, 백모가 기재되어 있는 등 석연찮은 정황이 계속 발견되자 국민 여론은 차갑게 돌아섰고 급기야 이회창의 지지율은 10%대로 폭락한다. 이에 이인제는 공개적으로 후보 교체를 주장했으나, 결국 바뀌지 않았다. 이는 이인제가 경선결과에 불복하는 명분이 되었다. 되었다. 후에 이 병역비리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진다.3.3. 이인제의 경선 불복 독자 출마
이인제는 병풍 의혹이 볼거지자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한다고 선언한다. 이 때 이인제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대선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가 뒤에서 김영삼이 은근히 지원 사격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이회창 캠프에서는 이인제 배후에 김영삼이 있다거나, 김영삼이 이인제 신당을 지원한다는 공세를 퍼부으며 反 YS 감정을 자극했다. 이러한 가설은 < 중앙일보>가 재생산해 파문을 일으켰다.[11]그 후 김영삼의 최측근이었던 서석재를 포함해 이인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속속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10월 20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 시점의 지지율은 김대중 32.3%, 이회창 16.6%[12], 이인제 24.9%, 조순 4.7%, 김종필 2.9%였다.
1992년 대선에서 6.4%를 받은 박찬종도 이인제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YS가 이인제를 밀어준다는 소문으로 YS의 지지기반인 부산/경남에서 이인제가 강세를 띄게 된다.
3.4. DJ 비자금 의혹 사건
9룡의 대결이라며 비등비등한 후보들이 난립하던 신한국당 경선 1차 투표에서 이회창이 41.12%를 얻은 가운데 이인제가 14.72%를 얻어 다른 후보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이어 결선투표에서 이회창은 59.96%, 이인제는 40.0%로, 이회창이 후보로 결정되긴 했지만 경선과정에서 이인제가 급부상해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이회창은 여권내 지지율은 올라가지 않았고, 여당내 비토세력들은 이인제로 후보를 교체하라고 계속 압력을 가해오는 난감한 상황이었다.이에 이회창은 비장의 카드인 'DJ 비자금' 폭로를 강삼재 의원을 시켜 감행 한다. 액수는 처음에는 670억이라고 하였고 이후 어느정도의 금액의 변동이 있었다. 이에대해 DJ는 노태우에게 받은 20억원과 + α가 전부라고 하였다. 그런데 강삼재 의원이 10월 9일 DJ의 20억원의 입출금 계좌와 수표 번호를 공개해버린 것이다.
이런 빼박증거에 수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런데... "야권인사로 맨날 콩밥 먹거나 안기부로 끌려가던 DJ가 20억원 + α를 받았으면 여권의 김영삼-이회창은 대체 얼마를 받았다는 건가?"하는 의문을 국민은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정치권에서는 비자금 문제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서슬퍼렇던 박정희-전두환도 야권 인사를 비자금 문제로 탄압하지는 않았다. 우선 선거공영제가 없던 시대라서, 선거비를 국고로 보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던데다가,[13] 야당을 정치자금으로 공격해봐야 소정의 용돈과 물품을 유권자들에게 제공해주거나, 아예 공무원까지 동원해서 관권선거를 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승자박에 가까웠고, 야당에서 정치자금을 모금해본다고 해봐야 몇백억 수준이었는데, 당시 물가로 수천억은 기본에 수조 단위까지 찍던 여당에 비해서는 조죽지혈인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몇푼 안되는 야권의 비자금이라는 것도 박정희-전두환이 뇌물조로 준 하사금이 대부분일 지경이다. 그런데 정치 초보인 이회창이 이 문제를 꺼내들고 오는 바람에 자기까지 잡으려고 한다며 김영삼이 분노를 하였다. 반면 이회창측은 자신들이 받은 비자금은 어차피 이회창이 당선될 것이니 문제 없다고 보았다.
또한 김태정 검찰총장은 비공개 고등검사장회의를 가졌는데, 공연히 정치적싸움에 말려들어 자신들만 피볼 것 같으니 차라리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하자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이에 김태경 총장은 YS를 만나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하였고 그의 내락을 받아[14] 10월 21일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한다.'라는 기자회견을 하였다.[15]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이회창은 측은 YS와 DJ가 야합했다고 생각하여 "검찰총장 사퇴하라", "김대중을 봐주는 김영삼 대통령은 당을 떠나라"라며 극단적인 반응을 쏟아 낸다. 그럴수록 YS는 이인제쪽으로 기울 뿐이었다.[16] 결국 DJ 비자금 문제를 설 건드린 이회창은 YS의 지지만 잃어 버렸고, 한나라당 YS 지지세력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후보교체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10월 26일 MBC와 갤럽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16.1%까지 추락 하였다. 반면 1위 DJ는 34.3%, 2위 이인제는 26.8%(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 창당)으로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다.
한편 같은 조사에서 조순은 5.5%, JP는 3.3%까지 떨어진 상태라 독자적으로는 대선을 치를 능력이 없어서 그들로서는 뭔가 변화를 모색해야할 상황이 조성되어갔다. 결국 JP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조순은 이회창을 지지하며 선거는 양자대결로 흘러갔으나 그 와중에도 그 둘보다 세가 약한 이인제는 사퇴하지 않아 끝까지 대선에 완주했다. 결국 12월 18일 개표결과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98년 2월 19일, 검찰은 김대중 비자금 의혹에 대해 혐의가 없다고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으나,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규모의 김대중 비자금 의혹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당시 검찰은 김대중 당선자가 기업인으로부터 받은 돈은 처벌할 수없는 정치자금이라고 결론지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김대중 당선자의 비자금의혹을 고발한 한나라당의 강삼재, 정형근 의원과 기업인 등, 100여명을 조사했으며, 김 당선자 본인과 부인 이희호 여사도 서면조사하고 조사결과 수십억 원대의 돈이 92년 대선을 전후해 국민회의 권노갑 前의원등 측근들을 통해 김대중 당선자에게 전달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관계자는 김대중 당선자의 비자금을 밝히기 위해 동아건설을 비롯해 삼성, 대우 등 10여개 기업의 총수나 임원을 조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동아그룹의 경우, 김 당선자에게 62억 원을 건 낸 것으로 고발장에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일부만 전달되고 나머지는 회사자체 비자금으로 운영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관계자는 조사를 받은 기업인들은 당시 관행적으로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선거자금을 줬으며 여당에는 훨씬 많은 돈을 건 낸 것으로 진술했다고 전했다. 또, 고발장에 적시된 356개의 계좌 등, 천 여 개 계좌를 추적한 결과, 거의 모두 친인척의 사업자금 등 김 당선자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검찰은 기업인들이 준 돈의 성격에 대해 당시 여야모두 관행적으로 오간 정치자금이어서 처벌하기 어렵고, 공소시효도 이미 지나 무혐의나 공소원 없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의 이 같은 무혐의 결론은 진상이나 위법성에 대한 규명보다는 처음부터 취임을 앞둔 김 당선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해명성 수사가 아니었느냐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17]
3.5. DJP연합과 이회창-조순 연합
10월 26일, 자유민주연합 총재 김종필이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손을 잡는다.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내각을 구성하는 등 공동 정부를 운영한다는 데 합의한 것. 그 후 민주자유당 시절 민정계의 수장이었던 박태준도 여기에 합류한다. 이로써 김대중은 충청도 지역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김종필, 박태준을 통해 '빨갱이가 아님'을 보장받아 보수 세력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반면, 대선 국면에서 입지가 어려워진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8월 8일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에게 대통령 후보 및 총재직을 제안했고, 조 시장이 이에 화답하자 민주당은 조순을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초기 기세와는 달리 10월 들어 4.7%로
이회창-조순, DJ-JP 단일화 직후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11월 10일 한겨레신문에서 김대중 35.3%, 이인제 28.1%, 이회창 21% 순이었고, 11월 25일 한국일보에선 김대중 32.1%, 이회창 31.5%, 이인제 19.9% 순이었다.
3.6. 본선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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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 정당 | 이름 | 비고 |
1 | 한나라당 | 이회창 | ||
2 | 새정치국민회의 | 김대중 | 당선 | |
3 | 국민신당 | 이인제 | ||
4 | 건설국민승리21 | 권영길 | ||
5 | 공화당 | 허경영 | ||
6 | 바른나라정치연합 | 김한식 | ||
7 | 통일한국당 | 신정일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인으로 최종 후보가 압축됨으로써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되었으며, 기본 쟁점은 정권 교체/3김 청산, 세대교체로 압축됐다. 김대중 후보는 전부터 내걸었던 '수평적 정권 교체론'과 자민련의 '내각제를 위한 정권 교체론'을 접목해 '정권 교체'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았고, 이회창은 내각제를 "3김 시대 연장을 위한 야합의 도구"로 간주해 '3김 청산'을, 이인제는 "한나라당도 3김 정치 유산에 따른 수구 정당이며 내각제에 동조할 세력"이라 하여 '세대교체'를 각각 내걸었다. 여기에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 문제, 1992년 대선 때 YS 대선자금 및 DJ 비자금, 그리고 1997년 11월 외환위기 문제가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군 공방거리였다.
더군다나 8월 15일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밀입북 사건으로 김대중 후보의 색깔론 시비가 터졌으며, 북한 김병식 - 김장수 등 편지 사건으로 '북풍 조작' 논란도 나왔다. 더군다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한동안 갈등을 빚어 여당 프리미엄을 행사하지 못했고, 9월 30일 이회창이 김영삼 대신 신한국당 총재가 됐으나, 그 뒷편에는 갈등이 많았다. 한동안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1위, 이인제 2위, 이회창 3위로 나왔으나, 보수 표심이 차차 결집되면서 이회창이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 때 나온 말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라는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구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선일보 류근일 논설실장이 '정주영 변수'라는 칼럼으로 ' 정주영을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논리를 펼친 적 있다. 그래놓고는 이 선거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IMF가 왔다라는 칼럼을 써서 자기 반성도 없는 기레기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TV 토론에서 이인제는 이 말을 언급하면서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 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이인제 선거 운동에 동참하던 코미디언 김형곤은 지원 연설에서 "(카메라로) 이인제를 찍었는데 TV에 이회창이 나오는 것 봤느냐?"고 코믹 문구를 시전하기도 했다.
이회창 후보는 강삼재 사무총장 등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터뜨리려 했으나 제14대 대통령 선거 비자금 문제도 함께 건드리는 바람에 10월 21일 검찰이 선거 중립을 고려해 수사를 유보했다. 후일담 이회창 후보는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비자금 수사 유보가 YS-DJ 사이의 밀약 때문이었다고 판단해 DJ 비자금 수사를 요청했다.
이러한 갈등은 11월 6일 포항 신한국당 경상북도 지역 필승 결의대회에서 김영삼을 상징하는 'YS 마스코트'를 몽둥이로 내리쳐 파문이 일었고, 하루 뒤 김영삼이 신한국당을 탈당하면서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누가 되든 공정한 선거 관리를 하겠다고 밝히며 암묵적으로 이회창과 결별, 평생의 동지이자 라이벌인 양김의 김대중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며 실제로 대선 후보를 한 명씩 독대하는 과정에서 이회창보다 김대중을 먼저 만나 이회창을 한 방 먹였다.
그 와중에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고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했고, 12월 3일 IMF 협상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구제금융 신청을 해 그 여파는 매우 컸다. 일각에서는 김영삼이 이회창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김대중으로 정권교체를 하기 위해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외환위기 및 경제 파탄 책임문제를 두고 대선 후보들 사이에 열띤 공방전이 벌어져 이 같은 음모론은 묻혔다. 김대중 후보의 IMF 재협상론이 나옴으로써 공방전이 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국가경제 파탄 원인은 김영삼 정부와 이에 관여해 혜택받은 이회창과 한나라당이었다."고 하며 집권 뒤 경제 청문회를 열겠다고 했다. 이에 이회창이 "김 후보가 IMF 재협상을 주장해서 외환위기가 더 심화됐다"고 물고 늘어졌다. 이인제도 이에 맞서 처음엔 재협상론을 주장하다 다단계 협상론으로 바꾸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진 후로는 한 동안 김대중이 유리한 형국이었으나, 막판에 김대중의 지지세가 이완되고, 영남권에서는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호소가 먹히면서 결집이 이루어지며, 이회창의 지지율이 김대중에게 오차범위내 수준으로까지 좁혀졌으며, 예측 조사에서는 이회창이 조금 뒤쳐지는 것으로 나왔지만 경북 포항부터 개표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상과 다르게 이회창이 김대중 후보를 70%:10%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는데, 수도권 지역과 호남 지역의 개표율이 올라가고 나서는 득표율 격차가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고 저녁 8시 반부터 10시까지 격차가 좁혀지며 1, 2위가 바뀌는 경합 양상을 보였다. 밤 10시를 기해 개표율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의 1.5~2.0%p차의 우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개표율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표 차이도 커지면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최종 결과는 불과 390,557표 차로 김대중의 아슬아슬한 승리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11년 뒤, 이회창과 이인제는 자유선진당이라는 한 지붕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총선 패배 후 다시 이합집산해 새누리당에서 또 만나게 된다.
4. 투표율
세대별 투표율 | |||
종합 연령별 | |||
20대 전반 | 66.4% | 20대 후반 | 69.9% |
30대 전반 | 80.4% | 30대 후반 | 84.9% |
40대 | 87.5% | 50대 | 89.9% |
60대 이상 | 81.9% |
5. 예측조사
MBC-한국갤럽 1997년 대선 예측조사 | |||||
출처(PDF) | 이회창 | 김대중 | 이인제 | 기타 후보 | |
전체 | 38.9% | 39.9% | 19.7% | 1.5% | |
실제 결과 | -0.2%p | +0.4%p | -0.5%p | - | |
세대별 | 20대 | 27.9% | 43.2% | 24.6% | 4.3% |
30대 | 34.8% | 43.7% | 20.7% | 0.9% | |
40대 | 44.1% | 37.2% | 17.8% | 1.0% | |
50대 이상 | 51.0% | 34.2% | 14.8% | - | |
성별 | 남성 | 34.1% | 39.8% | 23.9% | 2.2% |
여성 | 43.5% | 40.0% | 15.5% | 1.1% | |
권역별 | 서울 | 38.8% | 46.8% | 12.4% | 2.0% |
인천/경기 | 36.3% | 40.2% | 21.8% | 1.7% | |
강원 | 43.7% | 23.8% | 29.7% | 2.8% | |
대전/충청 | 30.2% | 39.0% | 28.8% | 2.0% | |
광주/전라 | 3.2% | 94.9% | 1.6% | 0.3% | |
대구/경북 | 71.2% | 10.1% | 17.8% | 0.9% | |
부산/경남 | 50.9% | 14.4% | 32.7% | 1.9% | |
제주 | 40.8% | 39.5% | 19.7% | - | |
학력별 | 초졸 이하 | 43.1% | 38.0% | 18.8% | 0.1% |
중졸 | 36.5% | 45.4% | 17.4% | 0.8% | |
고졸 | 37.1% | 40.3% | 21.1% | 1.4% | |
대재 이상 | 39.6% | 38.4% | 19.0% | 2.9% | |
직업별 | 농/임/어업 | 30.9% | 46.3% | 22.6% | 0.2% |
자영업 | 36.4% | 41.5% | 20.7% | 1.3% | |
블루칼라 | 30.6% | 42.5% | 24.9% | 2.0% | |
화이트칼라 | 40.2% | 37.5% | 19.9% | 2.3% | |
가정주부 | 46.1% | 38.3% | 14.5% | 1.0% | |
학생 | 29.0% | 46.7% | 18.9% | 5.4% | |
무직/기타 | 47.0% | 30.7% | 22.0% | 0.3% | |
92대선투표별 | 김영삼 | 55.7% | 19.3% | 24.4% | 0.7% |
김대중 | 7.2% | 87.5% | 4.2% | 1.2% | |
정주영 | 50.1% | 21.2% | 26.1% | 2.6% | |
박찬종 | 47.9% | 19.3% | 27.1% | 5.8% |
성별 구도에서는, 남성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김대중이, 여성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이회창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이후의 남녀 대립 구도에 익숙한 현재의 청년층은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민주당계는 남성에, 보수 정당은 여성에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러한 구도는 본격적으로 투표자 조사가 진행됐던 13대 대선부터 18대 대선의 출구조사까지 줄곧 이어져 온 추세이다. 다만 이는 100% 성별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권자 연령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길기 때문에 노년층 중에서도 고연령층의 경우 여성 인구가 더 많고, 노년층은 대체로 보수 정당의 강한 지지자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할머니들이 보수 정당을 더 찍어 주는 것은 여자라서가 아니라 노년층이라서"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18]
다만 당시에는 동일 연령대 기준으로 봐도 여자가 보수정당 지지율이 조금 더 높았는데 이는 당시 남자가 여자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접근하기 쉬었다는 점, 여자가 남자보다 2~4년 정도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2~4세 남성과 정치 성향이 동조화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 1990년대 당시엔 여성의 사회참여율이 낮았기 때문에, 기혼 여성의 많은 수가 가정 주부였다. 가정주부는 2020년대인 현재도 보수정당의 핵심 지지층이다.
지역별로 볼 경우, 경상도와 강원도는 보수 정당, 수도권과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는 민주당계가 우세한 동서구도가 나타났다. 서울은 전통적으로 친야 성향이고, 경기도는 전국평균과 유사하여 대선의 승리자인 김대중이 우세했고, 충청도의 경우에는 DJP 연합 때문에 김종필의 충청도 지지기반 상당부분이 김대중 지지층에 포함되었다. 김영삼의 기반인 PK에서 이인제 지지율이 높게 나온 것도 주목할만한데, 이는 여당 후보인 이회창이 현직 대통령 김영삼과 단절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 김영삼의 코어 지지층이 이인제 지지로 상당수 돌아섰던 것으로 파악된다.
학력별로 볼 경우, 초졸과 대재 이상은 이회창이 우세했지만, 그 사이에 있는 중졸과 고졸은 김대중이 우세했다. 물론 학생층에서는 김대중이 우세했다. 이회창은 30대 이상 대졸 이상에서 우세했던 것. 이회창이 초졸에서 우세한 것은 상단에서 언급한 고연령대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와 맞물린 것으로 파악된다. 즉 노인세대는 교육혜택을 잘 못받아 보통 학력이 낮기 때문이다. 직업별로 볼 경우, 김대중은 블루칼라 노동자 계층, 이회창의 경우 화이트칼라 및 전문직과 중산층 사이에서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대졸 이상에서 이회창이, 중졸과 고졸에서 김대중이 우세한 것과 긴밀히 연결돼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통적인 보수층인 가정주부들은 이번에도 이회창이 우세했으며, 이것이 이회창의 전체 여성 지지율을 끌어올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또 하나의 전통적인 보수 우위 계층 농어민들은 김대중이 우세했는데, 이는 DJP연합으로 충청권 농민들이 대거 김대중으로 결집한 결과로 해석된다.
6. 선거 운동
6.1. 후보별 선거 광고
7.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 |||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1 | 이회창(李會昌) | 9,935,718 | 2위 |
|
38.74% | 낙선 | |
2 | 김대중(金大中) | 10,326,275 | 1위 |
[[새정치국민회의| |
40.27% | 당선 | |
3 | 이인제(李仁濟) | 4,925,591 | 3위 |
[[국민신당(1997년)| |
19.20% | 낙선 | |
4 | 권영길(權永吉) | 306,026 | 4위 |
[[건설국민승리21| |
1.19% | 낙선 | |
5 | 허경영(許京寧) | 39,055 | 7위 |
[[민주공화당(1997년)|]] |
0.15% | 낙선 | |
6 | 김한식(金漢植) | 48,717 | 6위 |
|
0.18% | 낙선 | |
7 | 신정일(申正一) | 61,056 | 5위 |
|
0.23% | 낙선 | |
계 | 선거인 수 | 32,290,416 |
투표율 80.65% |
투표 수 | 26,042,633 | ||
무효표 수 | 400,195 |
7.1. 지역별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 |||
|
|||
<colbgcolor=#eeeeee,#26282c> 정당 |
|
[[새정치국민회의| |
[[국민신당(1997년)| |
후보 | 이회창 | 김대중 | 이인제 |
전국 |
9,935,718 (38.74%) |
10,326,275 (40.27%) |
4,925,591 (19.20%) |
서울 |
2,394,309 (40.89%) |
2,627,308 (44.87%) |
747,856 (12.77%) |
부산 |
1,117,069 (53.33%) |
320,178 (15.28%) |
623,756 (29.78%) |
대구 |
965,907 (72.65%) |
166,576 (12.53%) |
173,649 (13.06%) |
인천 |
470,560 (36.40%) |
497,839 (38.51%) |
297,739 (23.03%) |
광주 |
13,294 (1.71%) |
754,159 (97.28%) |
5,181 (0.66%) |
대전 |
199,266 (29.17%) |
307,493 (45.02%) |
164,374 (24.07%) |
울산 |
268,998 (51.35%) |
80,751 (15.41%) |
139,824 (26.69%) |
경기 |
1,612,108 (35.54%) |
1,781,577 (39.28%) |
1,071,704 (23.62%) |
강원 |
358,921 (43.19%) |
197,438 (23.76%) |
257,140 (30.94%) |
충북 |
243,210 (30.79%) |
295,666 (37.43%) |
232,254 (29.40%) |
충남 |
235,457 (23.51%) |
483,093 (48.25%) |
261,802 (26.14%) |
전북 |
53,124 (4.54%) |
1,078,957 (92.28%) |
25,037 (2.14%) |
전남 |
41,534 (3.19%) |
1,231,726 (94.61%) |
18,305 (1.40%) |
경북 |
953,360 (61.92%) |
210,403 (13.66%) |
335,087 (21.76%) |
경남 |
908,808 (55.14%) |
182,102 (11.04%) |
515,869 (31.30%) |
제주 |
100,103 (36.59%) |
111,009 (40.57%) |
56,104 (20.47%) |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고향이자 전통적인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호남 외에도 수도권, 충청권, 제주도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충청권의 지지를 얻은 대표적인 이유는 DJP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지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 수도권에서의 승리도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매번 서울특별시에서만 신승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경기도, 인천광역시에서도 승리하면서 수도권, 충청권에서의 승리를 통해 영호남의 인구 차이로 인한 보수 정당 후보의 우위를 꺾을 수 있었다.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전통적인 보수 정당 지지 기반인 영남권과 강원도에서만 1위를 얻는 데 그쳤다. 심지어 본인이 본적지로 둔 충청남도에서는 2위도 아니고 3위를 하는 굴욕을 맛봤다.[19] 한편 보수 정당의 심장부이자 강경 보수가 강한 TK에서는 몰표를 받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온건 보수가 강한 강원도와 PK 쪽에서는 이인제 쪽으로 분산된 표가 꽤 커서 손해를 많이 봤다.[20] 이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계 정당의 부울경 득표율은 10%대 정도밖에 안되어서 보수 정당이 인구가 많은 부울경에서 벌리는 표차가 컸는데 이 선거에서는 이인제로 인해 표차가 줄어들게 되었다.
제3후보였던 이인제 후보는 TK에서는 이회창 쪽으로 표가 쏠리면서 부진했지만 강원도, 부울경에서 30% 안팎의 득표율을 올리며 선전했으며,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던 경기도에서도 자신의 평균 득표율을 상회하는 20%대 득표율을 기록했다.[21]
다만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 표차를 합치면 수도권과 충청권에서도 보수 진영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지만, 표가 분열돼 김대중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7.2. 격전지역
비록 지역주의가 강하게 자리잡혀 있었지만 그래도 1.6%p 차 초박빙 접전이었던 만큼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적게 나서 치열했던 접전 지역이 매우 많았다. 시, 군, 구 단위로 살폈을 때 1, 2위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은 다음과 같다. 이인제가 1위나 2위인 지역의 경우 따로 각주 표시하였다.- 제주도 제주시 - 101표 차 김대중 승
- 경기도 의정부시 - 117표 차 이회창 승
- 강원도 평창군 - 133표 차 이회창 승[22]
- 충청북도 영동군 - 196표 차 이회창 승[23]
- 경기도 이천시 - 215표 차 이회창 승[24]
- 경기도 광주군 - 299표 차 김대중 승[25]
- 경상남도 거제시 - 308표 차 이인제 승[26][27]
- 강원도 화천군 - 326표 차 이인제 승[철화양인][29]
- 강원도 인제군 - 427표 차 이인제 승[철화양인][31]
- 서울특별시 강서구 을 - 455표 차 김대중 승[3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549표 차 김대중 승[33][34]
- 서울특별시 용산구 - 564표 차 이회창 승
- 충청남도 예산군 - 565표 차 이회창 승
- 경기도 화성군 - 617표 김대중 승[35]
- 충청북도 제천시 - 694표 차 이회창 승[36]
- 강원도 양구군 - 763표 차 이인제 승[철화양인][38]
- 경기도 연천군 - 799표 차 이회창 승[39]
- 인천광역시 남구 갑 - 821표 차 이회창 승
-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 893표 차 김대중 승[40]
- 부산광역시 강서구 - 970표 차 이회창 승[41]
이상 20곳이 이번 대선 격전지였다.
8. 평가
이 문단은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운 김대중의 중도 안정 전략의 승리였다. 처음 실시된 대선 TV 토론[42] 역시 DJ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한몫 했다. 반면, 이회창 측은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 "3김 정치 해소" 등 아무리 봐도 야당에게나 어울릴 법한 구호를 내세웠고, 1988년 당시의 조지 H. W. 부시의 선거전처럼 강력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저서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 "관권 시비 및 금품 살포 시비가 없어 비교적 깨끗이 치러졌다"고 평했으며, 대선 후보 TV 토론 본격화로 종전의 세몰이식 군중 집회에서 정책 대결 및 후보자들의 면면에 대한 국민 스스로의 판단을 중시하는 풍토로 바꿨다고도 했다.
이 정권 교체는 1961년 이후 36년만의 여야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1961년의 정권 교체는 5.16 군사정변의 결과였고 1960년의 정권 교체는 전국적인 시위로 사상자까지 나온 4.19 혁명의 결과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정권교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경우도 있으며, 임영태처럼 "김대중 당선은 국민 전체의 영광이며, 한국 민주주의가 본 궤도에 들어선 커다란 진전이었다"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49년, 근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또한 199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3김시대의 끝물을 장식한 대선으로, 이후 대선부터는 포스트 3김을 자처하는 새로운 유력 정치인들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이 선거 결과에 대하여 이인제의 독자 출마로 인한 보수표의 분열이 김대중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주장과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양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8.1. 보수 표 분산으로 김대중이 승리한 것
이런 관점을 취하는 보수 우파 진영에서는 해당 선거를 매우 안타까운 선거라고 보며, 이런 관점을 취하는 진보 민주당계 진영[43]에서는 해당 선거를 고마워요 이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김대중이 39만표 차이로 이겼지만, 이것은 이인제 독자 출마로 인한 경상도 표가 분열된 반면 DJP연합으로 인해 충청도 표가 김대중으로 심히 휩쓸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때 자민련과 신한국당 같은 보수 진영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처럼 합쳤으면, 제 아무리 정치 10단인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화 진영이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갈라져 노태우가 승리했다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보수 진영이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열됨으로써 김대중 당선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야권후보 단일화 실패 과정에 대해서는 항목을 참조할 것.8.2. 이인제가 보수 표만 흡수하지 않았을 것
15대 대선에서 보수정당 패배의 원인이 보수 후보 분열에만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반론 역시 적지 않다. 일단 이 주장의 가장 기본적인 논점은 이인제가 이회창 표를 갈라먹어서 이회창이 패배했다는 데 있는데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이인제가 이회창 표를 주로 잠식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오히려 이인제 또한 민주계 출신이라는 특성 상 김대중의 대통령병 이미지와 DJP연합에 실망을 느낀 민주계 지지자들의 표가 오히려 제3의 인물인 이인제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이 가능한 것. 6공 초기 정치 세력의 세력 구도가 형성된 13대 대선 당시의 구도와 비교해 보면 김대중, 김종필은 그대로고 노태우가 차지하던 위치를 대체한 것이 민정계의 지지를 받던 이회창이고, 김영삼이 차지한 위치를 이어받은 것이 민주계가 지지한 이인제라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같은 기반의 표를 갈라먹는다는 분석은 김대중-이인제 사이에서나 성립 가능하지, 이인제-이회창 사이에서 나올 분석이 아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여촌야도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고 영남, 호남, 충청에 이르는 지방에서는 세대별로 정치 성향이 동조화되면서 별로 주목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상 당대의 청년층인 1960년대와 1970년대생 사이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고, 반대로 이회창은 장노년층들인 1950년대 중반 이전 태생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이때의 정치구도가 1950년대 태생자들이 노무현 정부 후반기때에 보수성향으로 기울어지고 반대로 1960년대생~1980년대 전반생들이 2010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민주당 골수 지지층으로 굳어진것을 빼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여론조사를 살펴볼 때 김대중이 청년층에게 생각보다 많은 표를 얻지 못한 반면에 이인제가 중장년층보다 청년층에게 인기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인물이었고, 이회창은 청년층에게 인기가 적었고 장노년층으로 갈수록 인기가 많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DJ 표도 어느 정도 잠식했다는 점도 일리는 있는 것이다.[44]
8.3. 보수 후보 단일화가 불가능했을 것
그렇다면 반대로 이인제가 신한국당 후보로 단독 출마했다고 가정한다면? 이 경우 이인제가 보수표+민주계 중도 유권자 표 일부를 독식하여 여유있게 승리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는데, 이게 바로 보수 정당에서 중도 후보를 내놓으면 이탈할 다른 정당이 없는 보수표 전체+중도 후보를 통해 흡수한 중도 유동층표를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소위 '보수 정당 중도 후보 필승론' 의 한 전형이다.물론 보수정당에서만 중도필승론이 나온 것은 아니고, 민주당계 정당에서도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두개의 수권정당이 정치적 스팩트럼의 양측을 차지하고 있는 양당 대결 구도의 특성상 다른 정당으로 빠져나가기 힘든 코어 지지층은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간주하고, 중도 유동층을 우선시하면 승산이 높아진다는 계산이다.하지만 이런 중도후보는 당 내에서는 비주류이기에 당내 주도권을 확보하고 후보의 입지를 차지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은 양 당 모두 마찬가지였던 것. 게다가 (15대 대선에서는 해당 없는 이야기지만) 민주당계의 경우 이후 민주노동당 이래의 진보좌파정당이 나름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보수계 정당에 비해 '반대쪽으로의 표 유출'을 좀 더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수십년간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정치 공학 모델이긴 한데... 정작 대선급의 큰 선거에서 이 모델을 통해 승리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45] 대선 등 주요 선거 때마다 비주류 중도 후보는 중도 후보 필승론을 내세워 자신의 경쟁력을 어필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중도 후보들은 경선 등 당내 후보 결정 절차조차 뚫지 못했다. 그런데 이인제의 경우에만 중도 후보 필승론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리라고 여길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당장 15대 대선 당시 보수 후보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하는 보수층에서도 대부분 '이인제가 나와서 이회창이 졌다'고 말하지 '이회창이 나와서 이인제가 졌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
2022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이 당선된 것이 굳이 따지자면 그나마 저 모델에 들어맞기는 하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은 이도 적절한 해석은 아니다. 20대 대선 국민의힘 경선에서 양대 후보였던 윤석열-홍준표 중 세대론적으로 당의 고정 지지기반인 고연령층의 지지를 받은 것은 윤석열이고 중도 유동층인 남성 청년층의 지지를 받은 것은 홍준표이기 때문이다. 경선 결과를 보더라도 당원 경선에서 우세했던 것이 윤석열, 국민 경선에서 우세했던 것이 홍준표였으므로 '중도 후보 필승론'의 구도상 중도후보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홍준표, 고정 지지층의 지지를 받는 후보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윤석열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다른 두 주요 경선 후보인 유승민, 원희룡이 이전까지 보수정당의 중도개혁성향 정치인으로 꼽히던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2017~2020년의 처참한 암흑기를 거치면서 보수정당 내에서도 격렬한 내부의 인적 쇄신이 일어났고, 그 결과 기존의 유력 주류 보수 정치인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그 자리를 새로 등장한 인물들이 대체했으며, 그중에서도 윤석열이 가장 새로운 얼굴인 만큼 "새로 등장한 인물=비주류 정치인=주류 지지층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아닐 것이다"라는 착시의 결과이다. 오히려 경선 결과 자체는 국민경선(=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홍준표의 표 확장성이 높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한데도 당원경선 지지율(=코어 지지층을 통한 당내 주도권)이 높은 윤석열이 경선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중도후보 경선통과 불과론'의 전형에 더 가깝다.
비슷하게 17대 대선의 이명박 역시 경선 상대인 박근혜에 비해 당내 지지율이 밀린 것은 맞으나 그는 엄연히 당내 주요 계파인 민주계의 명확한 지지를 받던 후보였다. 즉 이명박근혜 경선의 사례는 주류 계파의 지지를 받는 유력 후보가 두 명 있는 상태에서 그 중 상대적으로 온건·중도성향을 보이던 후보가 경선 및 본선에서 차례로 승리한 사례이지 아예 당의 주요 지지층이 가지는 정치성향과는 거리감이 있는 비주류 중도 후보를 내세우면 승산이 커진다는 '중도 후보 필승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한나라당 내 '비주류 중도후보'의 포지션을 차지했던 것은 손학규이다. (당시에는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를 한나라당 차기 대권주자 빅3라고 불렀다.) 그리고 해당 경선에서는 주류 계파의 지지를 확보하여 당선가능성이 있는 주류후보가 두 명 등장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당내 비주류 세력들도 (하다못해 더 싫은 후보를 비토하기 위해서라도) 그 둘 중 하나로 집결함으로써 극명한 양강 구도가 나타났고,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부족한 당내 지지기반이 더욱 위축된 손학규는 민주당으로 비상탈출했던 것이다. 결국 해당 경선의 사례를 '중도 후보 필승론'과 연관짓는다면 주류 후보중 상대적으로 온건중도 성향을 보이는 후보가 명확할 경우 중도 후보 필승론은 아예 성립조차 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만 하다. 그 외에는 '온건-중도층에서 인기있는 후보는 확장성이 좋고, 확장성이 좋은 후보는 본선에서 승산이 크다' 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정도의 공통점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굳이 '무슨 론' 이라 이름붙여 주장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이다. '중도 후보 필승론' 이라고 굳이 이름까지 붙여가며 주장하는 논리라는 것은 본선에서 이기기 위해 해당 정당의 주류 핵심 지지층이 더 선호화는 후보를 놔두고 비주류 후보를 전략적으로 선택하여 내세우자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보수 단일 후보의 등장이 가능했는지 자체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자민련과 신한국당이 힘을 합쳤으면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데, 자민련이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대오에서 이탈한 이유는 김영삼의 대선 승리 이후 민주계가 민자당(신한국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민정계와 공화계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즉, '공화계가 민자당을 이탈하지 않는다'가 성립하려면 김영삼 집권기 신한국당(민자당)의 정치적 기조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해, 김영삼 당선 이후 범 민자계 최대의 정치적 거물이 된 김종필의 지분을 인정하여 그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거나, 하다못해 김종필이 그렇게 원하던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정도의 양보는 했어야 할 가능성도 있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공화계의 정치적 지분을 보장함으로써 여당 내의 정치적 지형이 실제 역사와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결국 자민련으로 이탈한 공화계가 신한국당에 잔류했을 경우 신한국당(구 민자당)의 정치적 정체성이 전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맥락을 모두 무시하고 신한국당의 정체성은 그대로인데 자민련(공화계)가 신한국당 대선 후보를 그대로 지지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은 크게 의미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측면에서 보면 이회창-이인제의 분열 역시 당시 사회의 맥락상 어느 정도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민자당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인 만큼 당시까지도 당 내에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정파들이 상당한 갈등 요소들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었던 것. 결국 민정계의 지지를 받은 이회창과 민주계의 대표 주자 중 하나였던 이인제의 분열은 상당부분 이러한 정파간 갈등에 기반한 것이고, 따라서 한 후보가 이 양대 정파 모두의 지지를 받는 상황을 가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민정계와 민주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지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15대 대선 당시 범 민자당계 보수가 모두 힘을 합쳤으면 아무리 김대중이라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가정은 서로 상이한 입장과 이해관계를 가진 최소 3개의 정파를 어떻게 모두 납득시켜 아우를 것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는 현실적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김대중이 절대 못 이기는 상황을 가정하면 김대중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식의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다. 19대 대선에 비유해 보자면,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힘을 합쳐 한 명의 대선 후보를 밀어주었다면 문재인이라도 그 후보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런 후보가 있었다면 문재인 후보를 꺾을 가능성이 실제 19대 대선보다는 훨씬 높았겠지만 그런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후보나, 그 세 당이 연합할만한 매개가 없었기에 세 당은 각각 자신의 후보를 내세워 선거에 임했다.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과 이인제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라는 것, 즉 현실을 도외시한 무의미한 가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수 분열로 인한 김대중 어부지리 당선설'은 상당 부분 '여당이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상황에 당황한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점 역시 생각해야 한다. 사실 15대 대선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패배하여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라는 것. 따라서 그 당시에는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야당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6공화국이 수립된 이래로 13대 총선과 14대 총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여 세가 위축된 적은 있으나 이때에도 어쨌든 1당은 유지했고, 대통령을 내주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46]. 이런 이들이 '여당의 선거 패배'라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던 끝에 '특별한 이유(후보 분열)가 있었기에 패배한 것'이라는 나름의 대답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당시 이회창은 경선을 불복하고 나선 이인제와 매우 심한 갈등을 빚었다. 당시 대선토론회에서도 김대중과 이회창보다 이인제와 이회창이 훨씬 날선 갈등을 빚었는데[47] 이런 그의 실책으로 대선에서 패하고 만다. 경선에서 패한 이인제와 갈등을 빚어 독자 출마를 막는 데 실패함과 더불어 3김 정치 청산 주장으로[48] JP와 자민련을 자극했고 이는 DJP연합이 이루어지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 이인제후보 캠프 내부에서는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차라리 DJ가 낫다, 잘됐다는 반응까지 나올정도로 이회창과 매우 격한 갈등을 빚었다.[49][50]
9.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 논평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 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51][52]10. 선거 관련 논란
10.1. 되풀이된 지역감정, 편파보도
선거 때마다 전가의 보도였던 지역감정은 해당 대선에도 되풀이됐는데, 김윤환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이 경남지역 필승대회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하며 범 영남권 단결을 주창해 파문이 일었고, 한나라당도 '이인제 지지 = 김대중 당선'이란 등식을 주장하며 부경지역에 反호남 감정을 선동했다. 심지어 언론 편파보도 중에서 중앙일보의 보도가 문제가 됐는데, 11월 초 'YS 신당설'과 '청와대 창당자금 지원설' 등을 보도하면서 이인제 네거티브 보도를 하여 지난 대선 때 조선일보의 정주영 공격처럼 '이회창 vs 김대중' 양자 대결 구도를 부각시켰다. 이에 대해 이인제 측은 강력히 항의했으나, 언론의 네거티브 보도는 목적을 달성했다.10.2. 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주장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 합의하여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했다.이에 관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먼저 건의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면은 어디까지나 김영삼 정부에 의한 것이었고 당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가 거의 경쟁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사면 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위키백과 15대 대통령 선거 문단 참고
결국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당시의 여야 모두 전노 사면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53][54][55]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56]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57]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58]
이에 있어서 김영삼의 회고록에선 어느정도 이면이 밝혀졌는데, 김영삼은 이미 누구에게 정권이 넘어가든간에 대선 후와 자신의 임기 사이에 사면을 진행할 수 있도록 판을 짜고 추징금을 환수하도록 계획했으며 이를 발설하지 말라 했다고 밝혔었다. 의외로 김대중은 대통령의 권한이라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으나, 이회창은 이인제에게 밀리면서 후보교체론까지 거론되자 압박을 받았는지 오는 9월 4일에 있을 주례보고때 사면을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하면서 국민적인 관심사로 올라오게 되었다.
11. 기타
- 1, 2위간 전국 표차가 불과 39만여 표(1.53%p차) 정도인 초박빙 선거였다. 이는 34년 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15만 표차(1.55%p) 다음으로 근소한 차이이다. 이는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단 24만 표, 0.73%p 차이로 이긴 제20대 대통령 선거 전까지 1위와 2위 사이의 득표율 차이가 가장 작은 대통령 선거였다.
-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사상 최초로 1천만표 이상 득표로 당선됐으나, 이회창 후보도 993만표로 거의 1천만에 근접했다. 민주계 입장에서는 DJP연합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표는 다 긁어모은 상태에다 이인제 후보로 인한 보수 진영의 대분열이 있었음에도 40만 표 정도의 차이에 그치면서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김대중도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을 5% 이상의 차이로 넉넉하게 앞선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실제 결과에서 영남권 결집으로 신승을 거두면서 실망하는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보수 입장에서도 아까운 석패였다. 반대로 민주 진영 입장에서는 여당이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음에도 보수 진영의 후보 분열이 아니었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1.53%p, 구(區) 하나 차이로 겨우 신승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그래서 보수 편향적인 한국의 정치 지형을 설명할 때 이 선거 결과가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15대 대선에서 민주 진영의 아슬아슬한 승리가 이후 민주 진영의 성장에 도움이 된 것이다.
- 물론 이 당시는 민주 진영이 보수 진영을 상대로 거의 대등하게 싸웠던 18대 대선과 민주 진영이 대통령 탄핵으로 지리멸렬해진 보수 진영을 압도한 19대 대선이 나온 2010년대보다 더 보수 우위였던 것도 있긴 하지만, 홍준표가 24.03%로 패배한 걸 보면서 김대중을 거의 따라 잡던 이회창이 정말 강력한 보수 후보였구나라며 재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대중은 호남 지방의 95% 이상의 지지율 때문에 한국 헌정 역사상 정치인 개인의 팬덤이 가장 두텁고, 열성적인 정치인이라 할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남에서의 득표율을 보면 알겠지만, 보수표와 진보표가 경합인 수도권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영남에서 호남 출신인 김대중과 민주당 비토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영남에서의 저 득표율도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만들고 민주정의당 당대표로 활동 했던 박태준이 DJP연합에 들어가고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김대중을 대놓고 빨갱이 정도로 여긴 영남 보수층의 반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고 反신한국당 표심을 조금이나마 김대중으로 돌리면서 13, 14대보다 더 올라간 것이었다.
- DJ의 눈물겨운 이미지 개선 노력이 돋보인 선거였다.[60] 가장 유명한 CM송 광고로는 DJ DOC의 " DOC와 춤을"을 패러디한 "DJ와 춤을"이 있다. 지금까지도 명작 선거 광고로 평가받는 # 당시의 광고에서 김대중은 정권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준비된 자신에게 꼭 한번 기회를 달라는 식으로 접근했다. 이른바 '프레임의 연성화'. 또 DJP연합 강조를 위해 김종필과 박태준 등 자민련의 인물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웃집 할아버지 이미지나 신세대적 감각의 원곡, 당 소속 연예인( 정한용)[61]의 등장 등. 가히 가장 모범적이고 집약적인 선거 광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2] 자세히 보면 "행복한 가정, 안정된 사회, 강력한 국가!"라는 보수 여당에나 어울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금도 노무현의 상록수 기타 광고, 이명박의 국밥 광고와 함께 성공적인 대선 광고의 예로 꼽히는 역사를 바꾼 선거 광고이다.[63][64]
- 투표 직전의 마지막 3차 TV 토론 때, 당시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마무리 발언 차례에서 "여기 두 분 후보는 다음에라도 대통령을 할 기회가 있겠지만, 내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말까지 하면서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알다시피 당시 선거에서 김대중과 경쟁했던 이회창, 이인제는 대통령이 되지 못한채 정계를 떠났다.[65]
- 1987년 이래 무소속 후보와 사퇴한 후보가 없는 선거였다.
- 대통령 선거에 계수기가 처음으로 도입된 선거이긴 했으나 투표지 분류기를 통한 개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표방송을 밤새 자정을 넘기면서 했다. 계수기가 선거에 최초로 도입된 것은 1993년 4·23 재보궐 선거이다. 전국 단위 선거로는 1995년 6.27 지방선거에 처음 도입되었다. 당시 기사
- 문화방송의 개표방송 오프닝 부분인데, 투표 종료 다음날인 12월 19일 새벽 3시의 현황이다. 개표율은 90%를 넘은 상태. MBC 기준으로 김대중의 당선 확정 공표는 새벽 4시 12분에 나왔고, 새벽 5시 29분 강남을 선거구 개표가 마무리되면서 모든 개표가 끝났다.
- MBC 개표방송에서 오후 6시가 되자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7%로 오차 범위 내로 맞춰 선거가 끝난 직후 출구조사 결과를 방송하는 걸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 그런데 정작 득표율 수치를 유효투표수가 아닌 무효표가 포함된 전체투표수로 계산했다. 그리고는 당선 확정 순간의 득표율이 예상 수치와 0.1%p밖에 차이가 안 났다고 뻥카를 날렸다. 참고로 KBS와 SBS에서도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 있었지만, 선거 막판 김대중과 이회창의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로 좁혀지면서 15대 총선의 악몽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진 방송국들은 출구조사는 하되 발표는 안 하기로 협약을 했는데 MBC에서 이 협약을 깼다. 이 때문에 KBS는 선거 당일 출구조사를 발표하지 않고는 개표 시작 무려 6시간만인 다음날 자정 예측 결과를 공개한 게 가장 정확했다는 식의 정신승리급 보도를 내놓는 등의 분풀이를 했다.
- KBS에서는 주유 미터기를 연상케 하는 그래픽을 선보였는데, 당시 1-2위 득표자의 득표 수를 실시간으로 집계하여 큰 인기를 끌었었다. 그 덕에 KBS에서 했던 15대 대선 개표 방송은 무려 4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 제1당이 아닌 당에서 배출한 후보가 당선된 첫 대선이다.[67]
-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 중 유일하게 대선 3위의 경력을 가졌던 사람이 당선된 대선이다.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김영삼에 밀려 3위를 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각각 박정희와 김영삼에 밀려 2위를 했다.
- 북한은 선거 3일 후인 1997년 12월 21일 평양방송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지난 18일 남조선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여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였다"고 짧게 보도했다. 사실 북한이 김대중을 호평하기 시작한 것은 햇볕정책이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맺게 된 1999년 이후부터였고, 그 이전에는 역대 남한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주구" 식으로 맹비난했다.[69]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같은 대남도발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1]
독재 체제가 종식된
1987년 체제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은 55세,
김영삼
전 대통령은 63세,
노무현
전 대통령은 56세,
이명박
전 대통령은 66세,
박근혜
전 대통령은 60세,
문재인
전 대통령은 64세,
윤석열
대통령은 61세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석패한
이회창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72세의 나이로 세 번째 도전을 했으나
이명박과
정동영에게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
[2]
게다가 당시 한국의 남성 기대수명은 70세를 간신히 넘긴 수준이어서, 80세 가량인 2020년대에 비해 10년 정도 짧았다. 당연히 그만큼 우려도 더 많았다.
[3]
후일
박근혜가
5%로 최저 지지율 기록을 경신했다.
[4]
경선 후보 간 합의로 기호는 사용하지 않고 정대철 후보를 위칸에, 김대중 후보를 아래칸에 기재하기로 함.
#
[5]
경선 당시에는 당명이
신한국당이었으나, 4개월 뒤에
민주당과 합당하며 당명이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6]
1992년 민주자유당이 14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실시하였으나,
이종찬 후보가 중도 사퇴하면서 제대로 된 경선이 이뤄지지 못했다.
[7]
당시
경향신문에 있던
김상택이 주로 이런 풍자 구도를 써먹었다.
[8]
3위인 이한동과의 표차는 불과 8표였다.
[9]
김영삼 치하에서 축출당하거나 비주류로 밀려난 민정계가 다시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귀환하는 계기가 됐다.
[10]
실제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징병기준이 많이 널널했었기 때문에 평발이면 면제, 안경쓰면 방위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었다.
[11]
이 때문에 훗날 한나라당이 일명 "이인제 방지법"을 상정하여, 경선에서 탈락한 예비후보들의 독자 출마가 막히게 되었다.
[12]
7월까지는 지지율 45%로 압도적이었지만 아들의 병역 의혹으로 8월에는 30%까지 수직 하락하고[70], 10월에는 김대중 비자금 의혹과 경제실정 기업 도산 부도의 와중에 야당을 잘못 건드려 지지율이 또 떨어졌다.
[13]
한 예로 나중에 제이유 사태로 이름을 날리는 주수도도 1980년대에는 신흥 부촌인 강남에서 학원 운영으로 떼돈을 벌던 지역유지급 인사였는데도, 13대 대선때 신민주공화당 지구당을 운영하다가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파산, 감옥에 몇달간 갔어야 했을 정도였다. 지역유지급 인사도 이런데 타 야당이나 군소후보야 말할것도 없었다.
[14]
김영삼의 회고록에는 “10월19일 일요일 아침 9시, 나는 청와대 관저로 김태정 검찰총장을 불렀다. 집무실로 부르면 당장 신문에 보도되기 때문에 일요일 아침을 택해 관저로 부른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태정 총장에게 (대통령 선거 이후로 비자금 수사를 미룰 것을) 지시했다.”라고 되어 있다.
[15]
김대중 자서전에 따르면 “그런데 참으로 의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김태정 검찰총장의 결단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용기가 있었다. 10월21일 김 총장은 나에 대한 비자금 의혹 고발 사건 수사를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이라며 김태정 총장에게만 감사를 효하고 있다.
[16]
이회창 회고록을 보면 “디제이 비자금 수사 중단 지시는 이 수사가 여론의 향배에 따라 1992년에 있었던 김영삼 대통령 자신의 대선자금 조사로까지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라며 YS가 왜 분노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겉으로만 YS가 DJ와 야합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17]
검찰, 김대중 비자금 의혹사건 무혐의 결정 1998.2.19 MBC
[18]
이런 효과가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였다.
[19]
이건 충청남도가 본적지를 넘어 고향인 이인제의 영향이 컸다.
[20]
대통령 선거 중반 이회창이 지지도 만회 및 보수표 결집을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거리두기에 적극 나섰는데, 이게 당시 IMF로 인기가 최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있던 PK 유권자들의 반감을 자극해 역효과를 일으켰다.
[21]
같은 수도권인 인천광역시, 경기도에서는 20% 넘는 득표율을 올렸지만 서울특별시에서는 12.77%로 저조했는데, 이는 당시에는 서울특별시의 진보세가 경기도, 인천광역시 지역보다 강했고 이인제가 경기도는 경기도지사 경력의 영향, 인천광역시는 충청권 출신 인구의 영향이 있었지만 서울특별시와는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것이 크다. 또한 같은 수도권에서도 강남구, 서초구, 분당구, 과천시와 같은 부촌 보수 텃밭에서는 보수 표심이 상대적으로 이회창에게 쏠리면서 이인제의 득표율이 10%대 초반에 그쳤다.
[22]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23]
득표율 각 32.8%, 32.2%. 참고로 3위 이인제 역시 31.9%를 득표하여 1, 2, 3위가 정말 간발의 차로 갈렸다.
[24]
2위는 이인제 후보이다.
[25]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26]
2위는 이회창 후보였다.
[27]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영남권에서 이기지 못한 지역이다.
[철화양인]
[29]
2위는 이회창 후보였다.
[철화양인]
[31]
2위는 이회창 후보였다.
[32]
강서구 전체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33]
강동구 갑 선거구에서 5,125표차로 이회창 후보가 승리했고 반면
강동구 을 선거구에서 5,674표차로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34]
갑 선거구와 을 선거구을 합산하여 강동구 전체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35]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36]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철화양인]
[38]
2위는 이회창 후보였다.
[39]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40]
노원구 전체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41]
2위는 이인제 후보였다.
[42]
한국선거 역사상 최초로 TV 토론이 도입된 선거는 1995년 실시된 1회 지방선거.
[43]
대표적으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44]
한국갤럽의 15대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김대중은 20대와 30대 층에서 각각 43%를 획득하는 것으로 나왔고, 40대에서 37%, 50대 이상에서 34%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앞선 13대 대선과
14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박찬종, 정주영과 청년층 지지를 나눠먹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지지를 확보했을지언정 특출나게 높은 득표를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청년층들의 지지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45]
지선이나 총선의 개별 선거구에서는 이런 사례를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단 한명의 후보에 몰빵해야 하는 대선과는 달리 지선이나 총선에서는 다수의 선거구에 다수의 후보를 출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 차원의 전략 공천도 가능하고, 또 애초부터 경우의 수 자체가 많으니 지역 선거구에 따라서는 오히려 당 주류 지지층보다 중도 유동층의 입장에 가까운 이들이 다수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양대 정당이 전국을 무대로 단 한명의 후보에 전력을 집중해서 대결해야 하는 대선이기에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46]
이 때문에 15대 대선이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로써 민주화의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47]
1997.12.14 mbc
[48]
그러나 그 당시
이인제후보도 3김 청산을 주장하였다.
[49]
1997.12.19 동아일보
[50]
1997.12.19 경향신문
[51]
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
[52]
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
[53]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54]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국민들도 이해·용서할 것 1997 mbc
[55]
동아일보 1997.12.23
[56]
옥중 전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세지
[57]
李(이)대표-全(전)씨 비밀 메시지 오갔다 사면 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58]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59]
1927~1997
[60]
그는
이경규가 간다의 전격 방문으로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한 꼭지의 등장으로 DJ는 30년 가까이 계속 된(혹은 조장된) 부정적 이미지, 굳은 얼굴을 모두 벗게 되었다.
# 그런 컨셉의 선거 광고도 있었는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그야말로 역대급
#.
최종원,
백일섭,
윤석화,
손창민,
이선희,
노영심,
오정해,
이봉원,
최양락&
팽현숙 부부,
코리아나,
김수미가 출연했다. 이후 최종원은 2010년, 민주당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광재가
강원도지사에 출마한 뒤 공석이 된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
지역구), 백일섭은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다.
[61]
정한용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추미애 전 의원이다.
손숙이나
김수미 등은 별도 CF에 등장해 역할을 했다.
[62]
또한 이 광고에서는
노무현 전 의원이
2002 한일 월드컵을 포함한 장면과 함께 나오기에 "
5년 후를 예언한 광고"라는 드립도 있다. 게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오는 장면은 공교롭게도 16초째다.
[63]
이 광고를 기획한 사람은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스포츠서울 사장을 지냈던 윤흥렬인데, 독립운동가
윤경빈의 장남이자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의 처남, 차남
김홍업의 친구이다. 이밖에도 김대중 캠프 안팎에는 쟁쟁한 선거 전략가들
이해찬, 이영작,
김한길이 포진해 있었다.
[64]
사실 1971년 제7대 대선 당시
김상희의 "여덟 시 통근 길에 대머리 총각"을 "신민당 강연장에 김대중 후보"로 개사하고, 1996년 제15대 총선 당시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 막혀를
YS가 기가 막혀로 바꿔 쓰는 등 김대중과 노래 개사는 역사가 깊다.
[65]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었던 다음 선거(2002년의 16대 대선)에서는 둘 다 노무현에게 고배를 마셨다. 이인제는 민주당 내부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은 본선에서 차례로 노무현에게 졌던 것이다.
[66]
허경영은 이 선거 전에도
1991년 지방선거의 은평구의원 선거(갈현1동선거구)와 서울시의원 선거(은평1선거구)에도 출마한 적이 있었으나, 은평구의원 선거는 3위로, 서울시의원 선거는 4위로
낙선하였다.
1991년 지방선거는 3월에 기초의원 선거가 먼저 치러진 후 6월에 광역의원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에 두 선거에 모두 출마할 수 있었다.
[67]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의석이 79석 밖에 되지 않았다.
[68]
이름의 ‘중’자를
仲에서
中로 개명했다.
[69]
2000년대 초 전방에 뿌려진 김대중 비방
삐라의 대목이 바로 "다리 저는 병신이 우리의 통일대오의 발걸음에 발맞출 수 있겠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