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53:47

제프리 다머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프리 다머
Jeffrey Dahmer[1]
파일:제다단.jpg
<colcolor=#fff>
머그샷▼
파일:1991_mugshot.jpg
본명 제프리 라이어널 다머
Jeffrey Lionel Dahmer
이명 밀워키의 식인종
The Milwaukee Cannibal

밀워키 몬스터
The Milwaukee Monster
출생 1960년 5월 21일
위스콘신주 밀워키
사망 1994년 11월 28일 (향년 34세)
위스콘신주 포르티지 콜럼비아 교도소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처벌 징역 937년 (사실상 무기징역)
범행 기간 1978년 6월 18일 ~ 1991년 7월 19일
죄목 아동 성폭행
성기노출
연쇄살인
시체오욕·손괴
체포 1991년 7월 22일
피해자 17명
최종 수감처 콜럼비아 교도소
신체 185cm, 82kg, O형
가족관계 라이어널 허버트 다머
Lionel Herbert Dahmer (1936 ~ 2023)
조이스 애넷 다머
Joyce Annette Dahmer (1936 ~ 2000)
의붓 어머니 셰리 다머
Shari Dahmer (1941 ~ 2023)
데이비드 다머 (1966 ~ )
학력 리비어 고등학교 (졸업)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경영학 / 중퇴[2])
종교 사탄주의 ( 무신론) 개신교[3] #
병역 미합중국 육군 의무병 (명예전역)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배경2.2. 청소년기 시절2.3. 첫 살인과 청년기2.4. 살해 행각2.5. 체포2.6. 재판과 수감 생활2.7. 최후2.8. 사후
3. 여담4. 대중매체에서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연쇄살인범. 밀워키 식인종(The Milwaukee Cannibal) 또는 밀워키의 괴물(Milwaukee Monster)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주로 어린이, 여성, 노인 등 약자를 타깃으로 삼는 다른 연쇄살인범과 달리, 대부분의 피해자가 젊고 건장한 흑인 남성이라는 점, 약물을 이용한 악랄한 살해 수법, 피해자들의 사체를 가지고 벌인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반인륜적 행태들로 인해 밀워키 지역사회는 물론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많은 범죄자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다.

2. 생애

관련 다큐멘터리

2.1. 출생과 성장 배경

파일:jeffrey-dahmer-18.jpg
제프리 다머의 어린 시절 사진.

제프리 라이어널 다머[4]는 1960년 5월 21일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 시에서 아버지 라이어널 허버트 다머(Lionel Herbert Dahmer, 1936 ~ 2023)와 어머니 조이스 애넷 다머(Joyce Annette Dahmer, 혼전 성 플린트(Flint), 1936 ~ 2000) 부부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머 일가는 위스콘신의 중산층 가정이었다.

독일[5] 웨일스[6] 가계인 아버지 라이어널 다머는 마케트 대학교에서 분석화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후에 분석화학 박사가 된다.[7] 라이어널은 10대 시절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10대였을 때 열등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살인·방화·폭파 충동을 느꼈으며 이러한 자신의 성향이 장남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머니 조이스 다머는 웨일스[8] 노르웨이[9] 아일랜드 가계이며 주부였다가 나중에 심리사회 상담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라이어널에 따르면 조이스는 임신 발작을 일으켰고 의사로부터 정서 불안으로 진단받아 약물을 상용하고 있었는데 임신 중에도 우울증 입덧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모르핀이나 바르비투르산 알약을 하루 26개나 먹었다.[10] 라이어널은 이러한 약물이 기형을 유발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11] 더욱이 이 시절엔 제프리 다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의 사례처럼 무분별한 약물 복용이 판을 치던 시대였기에 이 정도나 많은 약을 처방받거나 사먹는 경우가 흔하긴 했다. 조이스는 남편의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고 "그런 주장은 단지 나를 아들의 범죄에 가담하게 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출산 후 조이스는 산후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시달렸으며 그 중 일부는 장기간 침대에서 보내게 됐고 약물 중독으로 이어졌다. 병균을 두려워했던 조이스는 갓난아기인 제프리를 조부모조차 만지지 못하게 했고, 본인도 오직 사진을 찍을 때나 기저귀를 갈아줄 때만 그와 접촉했다.

라이어널은 주로 자신의 경력에 ​​집중했으며 종종 일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양친 모두 아들에게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정폭력과 빈곤이 동반된 불행한 성장기를 거치는 대다수의 연쇄살인범에 비하면 제프리 다머의 생활 환경은 그나마 평범한 편이었지만, 폭행까지는 당하지 않았어도 부모의 심각한 방임/방치와 애정결핍 속에 성장하기는 했다. 학교 친구들은 그가 우울하고 어울리기 힘든 특이한 외톨이였다고 기억했다.

1962년 9월, 다머 가족은 아이오와 주 에임즈로 이사했는데 라이어널은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1964년 3월, 4살도 채 되지 않은 제프리는 양쪽의 탈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경험 이후 평온하고 활기찬 아이였던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했다.[12] 1966년 가을에 라이어널은 박사학위를 받고 오하이오주 애크런에 있는 공장의 연구 부서에서 화학자로 취직했다.

그 후 다머 가족은 인근 도일스타운(Doylestown)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제프리는 1966년 10월부터 헤이즐 하베이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교에 가기를 꺼렸고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여가 시간에 다머는 여전히 몇몇 놀이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이후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When I was a little kid I was just like anybody else.)"라 회고하며 말했다.

1966년 12월 18일, 6살 어린 그의 남동생 '데이비드 다머'[13]가 태어난 후 제프리는 1968년 오하이오주 배스에 있는 숲이 우거진 큰 집에 정착했다. 제프리와 데이비드는 딱히 공통점이 없어서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14] 제프리 다머는 베스 초등학교로 전학 갔는데 나중에 그래미상 수상자가 된 조 헨리(Joe Henry)와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때 제프리는 라이어널에게 동물의 뼈를 안전하게 표백하고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당시 "다머가 8살 때 동네 소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나중에 다머 부자 둘 모두 이를 부인했다.

2.2. 청소년기 시절

1970년, 조이스는 심한 불안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몇 주를 보냈다. 애초부터 힘들었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프리는 종종 경찰이 와야 겨우 해결되는 부모 사이의 폭력적인 논쟁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어린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결과적으로 어느 부모도 그들의 아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계속되는 건강 악화와 부모님의 결혼 생활이 파탄난 것을 자책한 그는 집 뒤에서 나뭇가지와 막대기로 집 뒤의 나무를 치는 것으로 좌절에 대응했다. 10살부터 그는 점점 더 가족과 멀어지고 숲에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해 보였고 말투가 단조롭고 단음절적이었으며, 걸음걸이와 전체적인 자세가 경직됐고 긴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장남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라이어널은 장남에게 다양한 스포츠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보이스카우트에 보냈지만, 이러한 활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결코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모님이 언쟁을 벌일 때마다 집을 뛰쳐나와 죽은 동물을 해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과학교재로 놀면서 인근의 숲에서 동물과 곤충의 사체를 수집해 표본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제프리 다머의 친구는 나중에 다머와 함께 곤충을 수집한 것을 회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좋아하던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자신이 채집한 올챙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머의 친한 친구에게 올챙이를 줘 버린 걸 알게 된 뒤 격분해 친구의 집에 몰래 들어가 올챙이가 있는 어항에 엔진오일을 넣어 올챙이를 죽였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열광했던 것은 죽은 동물의 시체[15] 내장뿐이었다. 그는 생명이 없는 곤충, , 작은 설치류를 모아 포름알데히드가 든 항아리에 담아 부모님 집 뒤에 있는 창고에 보관했다.

12살부터 그는 부모의 집 근처 길가에서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는데[16] 그는 동물 시체를 해부하기 위해 시체를 줍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학자인 아버지의 산성용액으로 사체들을 녹여 오두막이라고 불리는 곳에 뼈를 보관했으나 이를 본 라이어널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자 숲 깊숙한 곳으로 동물 시체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여느 연쇄살인범들과 달리 동물을 고문하거나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애완동물을 사랑했다고 한다.[17]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다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특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겼다. 다머는 14세 때 첫경험을 했는데 상대는 이웃집에 사는 소년이었다. 그 경험은 생각보다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산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죽은 사람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다머는 시체나 내장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환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도와 강도가 증가했으며 결국 시체에 대한 관심과 네크로필리아 행위가 싹트게 되었다. 시체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머는 몇 달 동안 집 앞을 매일 지나치는 젊은 남자를 주시했다. 쓰러진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성행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야구방망이를 들고 수풀 속에 숨어 남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자 결국 다머는 이 생각을 단념했다. 운 좋게 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8]

1974년부터 그는 나중에 만화가가 되는 더프 백더프[19]와 함께 리치필드에 있는 리비어 고등학교에 다녔다. 다머는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학교 밴드의 일원이었고 학교 팀에서 테니스를 쳤으며 학교신문사에서 일했지만,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 친구들 중에 친한 친구가 없고 괴롭힘을 당하는 외로운 괴짜로 여겨졌다. 학교 수업에는 무관심했으며 선생님에게 매우 예의 바르고 폭력적인 성향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교성이 없어 친구가 적었다.

사실 그의 학교 친구들도 그가 단순한 괴짜가 아니라 섬뜩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다머와 평범한 대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그는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단체사진에 몰래 끼어드는 장난이나 어머니의 경련과 간질 발작을 따라하는 것 같은 장난으로 동료 학생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컬트적인 '다머 팬클럽'이 생겼고 'doing a Dahmer' 같은 유행어(...)도 생기는 등 당시 학교에서 광대스럽고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전형이 되었지만 대체로 학창시절 내내 그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1976년에 그의 급우들은 그가 수업 전, 수업 중, 수업 후에 마리화나를 피우고 규칙적으로 도수가 높은 술에 취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심각한 상태였는데 이른 아침부터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고 10분 만에 맥주 6캔을 비울 정도였다. 다머는 주로 서류가방을 숨겨와서 교실에서 마셨다. 이유는 "술을 마시는 걸 가족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20] 반 친구가 그것에 대해 다머에게 물었을 때 다머는 알코올이 그의 ""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미 14세에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 결과 눈에 띄게 살이 쪘지만, 그의 부모와 교사는 제프리의 술과 약물 섭취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가 예의바른 태도와 어른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별나고 사교성이 떨어지긴 해도 뛰어난 면도 있었다. 그가 워싱턴 D.C. 수학여행을 갔을 ​​때 그는 전화 1통으로 자신과 급우들을 위해 미국 부통령 사무실을 즉석 견학하게 허가를 받아냈고 거기서 당시 홍보담당자 아트 버크월드(Art Buchwald)도 만났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부통령인 월터 먼데일도 만나기도 했다.[21]

라이어널과 조이스의 결혼 생활은 1977년 8월 마침내 끝이 났다. 조이스는 남편에 대한 법원의 접근금지령을 받았고, 이에 따라 라이어널은 인근 모텔로 이사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제프리 다머의 가정생활은 부모의 지속적인 이혼 절차와 아직 미성년자였던 남동생 데이비드 다머의 양육권 분쟁으로 엉망이 되었다. 1978년 6월 4일 다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반 친구들 대부분은 그의 음주 때문에 그를 외면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버지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위스콘신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제프리 다머는 부모님 집에서 혼자 살았다. 몇 통의 전화 통화와 드문 방문을 제외하고는 어머니와의 모든 연락이 끊겼고, 1991년 그가 체포된 후에야 연락이 재개되었다.

2.3. 첫 살인과 청년기

1978년, 라이어널[22]과 냉전 중이던 조이스가 결국 남편과 이혼했다. 조이스가 차남인 데이비드를 데리고 위스콘신으로 떠나며 그의 광기가 폭발했다. 이후 제프리는 집에 혼자 남겨져 살게 되었는데, 보통 이때부터 살인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피해자 사건일
1 스티븐 마크 힉스
Steven Mark Hicks
당시 18세
1978년 6월 18일
제프리 다머는 1978년 6월 18일[23] 오하이오주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당시 18세였던 '스티븐 마크 힉스'(Steven Mark Hicks)를 살해했다. 잘생기고 마른 체구에 머리가 길고 셔츠를 벗어 허리에 묶었던 힉스는 다머가 성적인 환상을 품어 온 이상형[24]이었다.[25] 다머는 힉스에게 맥주와 마리화나를 제안했고 힉스는 다머의 집에 가는 대신 집까지 태워 달라는 약속을 받아냈다.[26] 그리고 후에 힉스가 떠나려 하자[27] 그의 머리를 바벨로 내리쳐 기절시킨 후에 목을 졸라 살해하고 다음날 지하실에서 해부한 후 뒷마당에 매장했다. 몇 주 후에 시체를 다시 꺼내 뼈를 양손망치로 부수어 집 뒤에 흩뿌려 증거를 인멸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토막낸 시체를 차 트렁크에 싣고 쓰레기장에 유기할 계획이었지만 새벽 3시에 차를 중앙선을 넘으며 비틀비틀 운전하며 가다가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에게 걸려 범죄가 발각될 뻔했다. 트렁크에 검은색 비닐봉투에는 뭐가 들었냐는 질문에 천연덕스럽게도 "집에 가족들이 다 나가고 없는데 쓰레기차가 오는 날에 깜빡하고 쓰레기를 못 버려 쓰레기 냄새 때문에 잠이 안 와 버리러 가는 중이다" 라고 둘러댔고 경찰들은 별 의심 없이 중앙선 위반 벌금만 내게 하고 다머를 가게 했다. 겁에 질린 채 돌아온 다머는 그의 시체를 일주일이 넘게 트렁크에 처박아 뒀다. 힉스 부모는 아들이 며칠째 돌아오지 않자 실종신고와 함께 제보 포상금[28]을 걸었고 사설 탐정까지 고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이후 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매일 술을 마시고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기숙사 룸메이트의 말에 따르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비틀즈 노래나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보드카를 마셨다고 한다. 학비는 모두 아버지가 대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2주에 한 번씩 매혈을 하거나 룸메이트들이 수업을 갔을 때 그들의 물건을 몰래 훔쳐서 전당포에 팔아 돈을 챙겼다. 게다가 이유 없이 화장실 벽을 부순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다머는 한학기 마치고 중퇴했다.

대학에서 쫓겨난 후 다머는 알코울 중독이 심각해져서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라이어널은 장남에게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취직하거나 미군에 입대하라고 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술에만 빠져 살았다. 결국 이를 참다 못한 아버지에 의해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 조치되기도 하였다. 그는 육군 의무병으로 입대했고 이 때 후반기교육 과정에서 인체 해부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는 서독에 주둔하던 육군 제8보병사단 제68기갑연대 2대대에 배속되어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또 육군에서 담배를 배웠는데 이후 담배에 중독되어 하루에 한갑을 피웠다고 한다. 이 무렵 부대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몇 건 발생했는데 그의 범행이 드러난 이후 이 사건들도 그가 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의 동기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고장난 장갑차 안에서 약에 취해 다머에게 강간을 당한 뒤 인생이 망가졌다고 했다. 또한 제프리는 술에 취하면 매우 공격적으로 변했고 자신이 오하이오에서 한 남자를 죽였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와 1년 넘게 룸메이트였던 또 다른 동기는 제프리 다머가 매일 자신을 강간하고 희롱, 고문했다고 주장했다.[29]

한편 복무 중 다머는 동기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했는데 이때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 결과 고막이 파열되어 10년 넘게 지난 후에도 귀에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군생활을 하며 성격이 잠시 밝아졌으나 결국 음주벽으로 2년 만에 전역했다.[30]

제프리 다머의 알코올 중독으로 부자 관계의 불화는 갈수록 심해졌는데, 술에 취해서 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체포되어, 60달러의 벌금과 10일의 구류를 살다가 나오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라이어널이 돈을 대주는 것을 거부하자 그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한동안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그가 애정을 표한 유일한 가족으로, 제프리에게 관심을 주며 손자를 교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는 할머니한테는 공손하게 굴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후 그는 밀워키에 정착하여 아파트를 얻어 독립했고 혈장 센터에 취직했지만 술에 취해 알몸으로 공공장소를 다니는 추태를 부려 10개월 만에 해고되었다. 그러다 1985년 1월에 밀위키의 암브로시아 초콜릿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게 되었다.[31]

2.4. 살해 행각

그러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동성애자로서 게이바에서 만난 남자들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살해한 후 그 시체를 해체하고 식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피해자 중에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인 사람들도 있었다.
사건 피해자 사건일
2 스티븐 월터 투오미
Steven Walter Tuomi
당시 25세
1987년 11월 20일
3 제임스 독스테이터
James Doxtator
당시 14세
1988년 1월 16일
4 리처드 게레로
Richard Guerrero
당시 22세
1988년 3월 24일
5 앤서니 시어스
Anthony Sears
당시 24세
1989년 3월 25일
6 리키 비크스
Ricky Beeks
당시 32세
1990년 5월 20일
7 에드워드 스미스
Edward Smith
당시 27세
1990년 6월 14일
8 어니스트 밀러
Ernest Miller
당시 22세
1990년 9월 2일
9 데이비드 토머스
David Thomas
당시 22세
1990년 9월 24일
10 커티스 스트라우터
Curtis Straughter
당시 17세
1991년 2월 18일
11 에롤 린지
Errol Lindsey
당시 19세
1991년 4월 7일
12 토니 휴즈
Tony Hughes
당시 31세
1991년 5월 24일
13 코네락 신사솜폰
Konerak Sinthasomphone
당시 14세
1991년 5월 27일
14 맷 터너
Matt Turner
당시 20세
1991년 6월 30일
15 제레미아 와인버거
Jeremiah Weinberger
당시 23세
1991년 7월 5일
16 올리버 레이시
Oliver Lacy
당시 24세
1991년 7월 15일
17 조세프 브래드호트
Joseph Bradehoft
당시 25세
1991년 7월 19일
1987년 11월 20일, 밀워키에서 25세의 투오미가 친구인 프리실라 말리 시노웨스(Priscilla Marley Chynoweth)를 만난 후 실종되었다. 다머는 호텔에서 투오미를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밀워키 경찰은 증거부족으로 그를 기소하지 않았고 투오미는 다머가 기소되지 않은 유일한 피해자로 남게 되었다.

1988년 1월 16일, 다머는 14세의 아메리카 원주민 남창 제임스 독스테이터(James Doxtator)[32]에게 사진을 찍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여 할머니 집으로 데려왔고, 성관계를 가진 후 약을 먹이고 지하실로 데려가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방치했다가 두개골만 제외하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1988년 3월 24일, 다머는 한 게이바에서 22세의 멕시코 출신 양성애자 리처드 게레로(Richard Guerrero)를 할머니 집으로 데려와 수면제를 먹이고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냈다.

1989년 3월 25일, 다머는 게이바에서 만난 24세의 혼혈 모델 지망생인 앤서니 시어스(Anthony Sears)를 데려와 목을 졸라 살해했다. 시어스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다음날에 다머는 시어스의 시신을 토막내어 머리 성기를 잘라 아세톤에 넣고 보관했으며 나머지 시신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머는 1990년 5월에 밀워키의 우범지대에 있는 924 North 25th Street, Apartment 213로 이사했고 이후에는 여기서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1990년 5월 29일, 다머는 32세의 흑인 매춘부 리키 비크스(Ricky Beeks)[33]를 아파트로 유인해 수면제가 든 음료를 먹이고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시신을 해체했다.

1990년 6월, 다머는 27세의 지인인 에드워드 스미스(Edward Smith)를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해 약을 먹인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이번에는 시신을 냉동실에 보관했다.

1990년 9월 2일에는 노스 27번가 모퉁이에 있는 서점 밖에서 어니스트 밀러(Ernest Miller)라는 22세 흑인 남자를 데려왔다. 그러나 집에는 준비된 수면제가 부족했고, 다머는 칼로 밀러의 목을 베어 살해했다. 또한 시신을 절단하는 동안 잘린 머리에 대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고 한다.

1990년 9월 24일에는 한 쇼핑몰에서 22세의 데이비드 토머스(David Thomas)를 만났다. 당시 다머는 마약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토머스에게 성적 호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를 집으로 데려와 목을 졸라 살해했다.
{{{#ffffff 1990년 11월 할머니[34]손자가 어떤 사람인지 손자의 실체를 다 알고 나서야 죽은 것이다. ]와 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제프리 다머}}}
라이어널: 그럼 일요일 밤에 일하러 아파트로 돌아가는 거니?

제프리: 예.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라이어널: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아파트를 정말 깨끗하게 청소했다는데, 아파트 구경하게 해줄 수 있겠니?

제프리: 네, 아파트에 정말 오시려고요? 먼지 털기나 진공청소기 청소를 안 했는데요.
- 다머 부자의 대화 #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가족과 연락하면서 "사교적인 정상인"을 연기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영상은 1990년 11월 제프리 다머가 할머니와 부모 등 가족과 함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영상이다.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머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붙임성이 있었다. 여기서 라이어널이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아파트를 정말 깨끗하게 청소했다는데, 아파트 구경하게 해 줄 수 있겠니?(You woke up this morning at 8, you cleaned up your apartment really nicely so you could show us what it looks like?)"라고 아들에게 물어보는데 이 시점 제프리 다머가 있는 아파트는...[35]

1991년 3월 7일에는 커티스 스트라우터(Curtis Straughter)라는 17세 소년에게 사진을 찍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며 데려와 목을 졸라 살해했다.

4월 7일, 다머는 19세의 애롤 린지(Errol Lindsey)[36]를 데려와 약을 먹인 후 목을 졸라 살해하고 몇 주 동안 시신을 소금을 넣은 찬물에 담가두었다.

5월 24일, 다머는 나이트클럽에서 모델 지망생인 31세의 토니 휴즈(Tony Hughes)를 만나 사진을 찍는다는 조건으로 집으로 데려왔다. 이 과정에서 휴즈가 약을 먹고 쓰러지자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염산을 넣는 실험을 했고 휴즈는 사망했다.

의외로 그가 일찍 잡힐 뻔한 적도 있다. 1988년 4월 23일, 다머는 로널드 플라워스 주니어(Ronald Flowers Jr.)라는 청년을 집으로 데려와 수면제를 먹였는데, 그때 그의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현장을 발견할 뻔 한 것이다.하지만 할머니는 손자가 "방에 있다"고 대답하자 방문을 열어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고, 그는 플라워스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다머의 피해자 코네락 신사솜폰의 생전 사진.
1991년 5월 30일에도 기회가 있었다. 그는 동남아 라오스 출신의 코네락 신사솜폰(Konerak Sinthasomphone, 1976년 12월 1일생)이라는 14살 소년에게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면 돈을 주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신사솜폰이 수면제를 탄 콜라를 마시고 정신을 잃자 다머는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을 성추행하였다. 다머는 이후 술을 마시기 위해 외출을 했고 그 사이 소년은 가까스로 도망쳐서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당시 경찰이 오기 전에 신사솜폰은 나체 상태로 길가 에 앉아서 두 명의 흑인 소녀를 포함한 세 명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다머는 그 소년을 자신의 애인이라고 주장했고 경찰은 "어, 그래?" 하고는 소년을 도로 다머에게 내주었다. 이 세 명의 목격자들은 이 소년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머를 두려워했으며 다머가 소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증언했으나 경찰들은 그 말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제프리 다머는 이 소년이 19세라고 거짓말까지 했다.[37] 그리고 경찰관들은 일지에 애인들끼리 가볍게 다투었음이라고 기록하고 그 자리를 떠 버렸다. 이후 소년은 다머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후에 신문에 난 신사솜폰의 실종 광고를 본 한 흑인 소녀의 어머니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소년에 대해 물었지만 그들은 다머가 소년의 애인이며 그들의 성적 지향, 성적 취향은 자신들이 알 바 아니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이후 두 달간 다머의 범죄는 극에 달했고 후일 수사 과정에서 밀워키 경찰은 언론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이들의 책임을 인정했으나 소년의 죽음에 대해 대가를 치른 건 결국 살인을 저지른 제프리 다머 한 명뿐이다. 역시 소년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이 경찰관들은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해임에 대한 항소심에서 승소했으며 경찰 노조에서 직업을 되찾기 위해 정당하게 싸운 올해의 경찰관으로 선정되어서 사람들의 분노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둘 중 한 명인 데니스 윌리치는 밀워키 경찰청장으로 2005년에 승진했다. 또 다른 하나 존 발처작(John A. Balcerzak)은 2017년 예순으로 정년퇴직했다. 훗날 공개된 911 상담기록에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에요. / 정말이에요? / 그럼요. /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애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니까요. / 부인, 다시 말씀드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는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해당 내용은 녹취도 존재한다.
파일:신사솜폰 아버지 절규.jpg
장례식에서 슬퍼하는 코네락 신사솜폰의 아버지.
코네락 신사솜폰의 가족은 고작 단돈 85만 달러밖에 보상을 못 받았다. 참으로 잔혹하게도 다머는 이 사건 몇 년 전에 코네락 신사솜폰의 형을 납치해서 성추행한 죄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경찰들이 최소한 두 사람의 신원만 제대로 확인했으면 소년이 어이없이 죽어 버리는 일은 막았을 것이다. 이때 선고받은 형량은 징역 1년. 이 사건 직후 다머의 아버지조차 '자신의 아들은 정신질환자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며 정상인이 될 때까지 사회로 복귀시켜서는 안 된다'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심지어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성추행 사건 이후 연쇄살인이 본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사회로 풀려나는 대신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면 그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6월 30일, 다머는 시카고로 여행을 갔고 그 곳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맷 터너(Matt Turner)라는 20세 흑인 남자를 유인해 터너에게 약을 먹이고 목을 졸라 살해한 뒤 머리와 내장을 별도의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고에 보관했다.

5일 후인 7월 5일, 다머는 시카고 술집에서 23세의 제레미아 와인버거(Jeremiah Weinberger)를 만나 버스를 타고 함께 밀워키로 돌아와 약을 먹이고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끓는 물을 부었다. 웨인버거는 이틀 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있다.

7월 15일에는 24세의 올리버 레이시(Oliver Lacy)를 데려왔다. 레이시는 아이가 있었으며 곧 결혼할 상대도 있었다. 다머는 레이시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간하고 시체를 절단했다.

7월 19일에는 직장에서 해고되자 분노해 25세의 조세프 브래드호트(Joseph Bradehoft)를 데려와 목을 졸라 살해하고 이틀 동안 침대에 방치했으며 시신의 목을 베고 머리를 닦은 뒤 냉장고에 넣었다.

주목할 점은 그가 노린 범행 대상 18명 중 이름과 용모에서 유럽계 백인임을 알 수 있는 피해자가 3명이고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17번째 희생자) 나머지는 흑인이 다수인 소수인종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인종차별과는 상관없는 다머의 개인적 취향에 불과했다.[38] 다머의 경제적 상황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건에 맞는 저렴한 아파트에서 거주했고 그 아파트와 주변 지역은 경제력이 좋지 않은 소수인종들(특히 흑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즉, 눈에 띄는 취향에 맞는 남성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신사솜폰의 사례처럼 슬럼가에서는 실종되더라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렸을 수도 있다.

또한 그는 희생자들의 살해 직전, 또는 살해 후 시신 해체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했다. 구글에 검색하면 시신 사진이 나오니 주의.

2.5. 체포

"증오심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병이 들었거나 사악한 인간, 이 둘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둘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살인행각은 1991년 7월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1991년 7월 22일, 당시 32세 남성이었던 트레이시 에드워즈(Tracy Edwards)[39]는 다머의 유혹을 받아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프리 다머가 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마시고 정신줄을 놓아 가던 중에 다머가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고 칼을 들이대며 "네 심장을 칼로 잘라먹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가까스로 탈출하였는데, 집 근처에서 순찰하고 있는 경찰관 2명은 수갑을 차고 도망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탈주한 범인이라는 생각에 그를 잡았다. 그러자 그는 경찰에게 "웬 미친 놈이 나한테 수갑을 채우고 날 죽이려고 했다"며 그를 잡아 달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때도 안일하게 넘어가려다가 민간인이 수갑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나 그 전 소년의 일도 있고 하여 일단 다머의 집에 가게 되었다.

경찰이 집에 도착하여 다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를 묻자 이번에도 그는 죽이기는 틀렸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든 넘어가기 위해 연인들끼리의 일이었다며 수갑의 열쇠를 주며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은 그래도 집을 수색하겠다고 말한 뒤 한 명은 다머의 옆에 남고 한 명은 집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지독한 썩은내와 배설물 냄새가 났으며 경찰관은 다머가 찍었던 희생자들이 고문당하는 사진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사진들 속에는 희생자들의 인육이 들어 있는 냉장고도 찍혀 있었는데 한 경관이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가 잘린 사람의 머리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40] 바깥에 있는 동료에게 "이 개씨바새끼를 지금 당장 체포해"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때 다머는 그 동안 보였던 차분한 모습과는 180도로 다른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경관들에게 반항했으나 이런 데에는 이골이 난 경관들이 격렬하게 반항하는 다머를 제압하고는 그의 집에서 자세한 조사를 벌였는데 집안에는 그가 살해한 사람들의 해체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위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영문 위키백과에 적혀있는 내용은 조금 다르다. 집에 들어가 사진을 발견한 경찰관이 동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진짜(스너프)사진이다."라고 말하자 다머는 격렬히 저항했고, 경찰관들이 이를 제압한 후 지원을 부른 후, 조사를 할 때 냉장고에서 사람의 머리가 나왔다 한다.

경찰이 다머의 집에서 발견한 물품들은 다음과 같다.

이 사이트에는 그가 죽인 피해자들의 정보가 있다. 링크

잡힌 후에도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다머는 술이 깨고 나서야 경찰조사에서 그가 한 일들을 모두 자백했다. 그는 피해자가 오면 일단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을 먹인 후 그들의 몸을 묶었다. 이후 항문에 고문을 가하거나 눈알을 팠으며, 신체를 자르거나 드릴로 머리에 구멍을 낸 후 염산을 뿌려 뇌를 녹이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은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실험의 일환이었다고 하면서 한 번은 성공했다고 주장하였고,[47] 그는 경찰에게 6개월 후에 잡혔으면 두개골로 만든 제단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머는 이 모습들을 모두 카메라로 찍었고, 피해자의 시신을 잘라서 요리해 먹은 후 남은 시신들은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벽에 묻어 버렸다. 이에 경찰이 다머의 집 벽을 파자 시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다머는 피해자들의 머리를 염산으로 녹여 해골을 만들기도 했으며, 해골들을 모아 두고 자기위로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희생자의 내장을 자신의 자위도구로 활용했으며, 각기 다른 신체 조직을 두고도 시간을 저질러 왔다.

2.6. 재판과 수감 생활

파일:d61c68081456cce8c280b3810c67ba44ccb9f515r1-969-1104v2_hq.jpg

이후 열린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다머가 중증 정신질환자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으로 가면 어떻게든 감옥에 가더라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러나 배심원들은 그가 정상은 아니라도 법적 심신미약은 아니라고 결론지었고, 위스콘신주는 사형제도를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다머는 1992년 2월 15일 합산형으로 징역 937년, 사실상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에 다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심리학자들은 다머에게 경계선 인격장애가 있다고 진단했고 검사에서 높은 반사회성과 우울감, 낮은 자존감을 보였다. 한편 테드 번디와 같이 언론에 모습이 드러나면서 잘생긴 외모로 이목을 끌었고, 범죄자에 대한 페티시가 있는 많은 여자들에게 결혼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며 심지어 돈까지 보내는 여성들도 있었다.

수감 후 잔인한 범죄 행각과는 달리 교도소에서는 의외로 정상적인 모범수로 생활했다. 오히려 그는 동료 죄수들한테 모욕을 들은 적도 있으며 아무와도 대화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감옥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고 교도소에서 세례도 받게 되었다. 심지어 "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심지어 저의 죄까지도"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다른 살인마들과 다르게 솔직하게 인터뷰에 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비슷한 질문을 받자 퉁명스러워졌다. 다머는 인터뷰를 하는 대가로 기자에게 패스트푸드나 담배를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생전에 한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 상당히 뚱뚱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히 교도소의 흑인 죄수들은 흑인만 골라서 죽인 다머를 경멸했으며, 살의를 품게 되었기 때문에 교도관을 옆에 붙이고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교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다머에게 한 흑인 재소자가 칼을 휘둘러 목을 베었지만 칼이 부러져서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2.7. 최후

하지만 결국 1994년 11월 28일에 동료 수감자에게 살해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죽인 건 흔한 흑인 갱단이나 페도필리아 사냥꾼 등을 자처하는 자들이 아닌 이들과 무관한 한 정신병자였다.

다머의 시신이 찍힌 당시 신문. 둔기에 폭행당한 부분은 신문사에서 전부 검열처리를 했지만 일단 시신이므로 주의.
파일:scarver_011.jpg
가해자 크리스토퍼 스카버

크리스토퍼 스카버는 1969년 7월 6일생으로 1990년 6월 1일 한 백인 남성을 총으로 쏴서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다머와 인종 관련 문제로 시비가 붙었고 이 와중에 변기 뚜껑 혹은 크로우바로 머리를 난타해 죽였다...는 게 스카버의 주장.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살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어서 죽여 봐. (I don’t care if I live or die. Go ahead and kill me.)

그러나 가해자 본인의 증언인 데다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였기 때문에 100퍼센트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다. 스카버는 이후 제프리 다머와 다머 옆에 있던 또 다른 재소자 제시 앤더슨(Jesse Anderson)[48]을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서 두 건의 무기징역을 추가로 선고받고 현재도 복역 중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결말이었다. 대부분 소수인종, 그것도 힘없는 남자 혹은 소년들만 골라 죽여 온 백인 연쇄살인범을 흉폭한 재소자들 사이에 던져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49]

타국에서도 종종 그렇지만 미국 교도소에서 미성년자 강간범의 지위는 최하 중의 최하이다. 같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극도로 경멸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들은 정작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는 위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조직폭력배나 강도범 등 폭력 성향이 있는 재소자들에게는 마약사범[50]과 더불어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다. 이런 범죄자를 괴롭히는 강력 범죄자들은 자기는 어린이를 학대한 범죄자를 응징해서 정의를 구현하는 거라고 그러는 거라고 말하지만, 교도소 내에 존재하는 '존중' 문화 때문인 것도 있다. 다큐멘터리 '갱스터 파라다이스'를 보면 수많은 교도소 중에서도 공통된 문화가 '존중'인데 누군가를 방해하지도, 방해를 받지도 않는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존중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공격하여 자신을 얕보지 않고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약자인 아동 성범죄자나 마약사범을 공격하는 것이다. 다만 미국의 범죄자 유형을 보면 아동 성범죄자보다는 마약사범의 숫자가 월등히 많은데, 연약하고 숫자가 널려서 노리기 쉬운 마약사범들을 내버려두고 아동 성범죄자가 더욱 많은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보면 아동 성범죄자를 더 악질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다머의 변호사는 그를 아동 성범죄자나 살인범 등과 마찬가지로 격리하여 수용할 것을 원했고, 판사도 그쪽으로 판결하려 했지만 다머 본인이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교도소 측이 그를 강제로 격리수용하여 참사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2년 만에 제프리 다머 본인의 요구로 풀렸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2.8. 사후

제프리 다머가 죽은 후 당연히 시신은 집에 보내졌다.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정의가 실현되었다며 기뻐했으며 다머 부부는 또 고민에 빠졌는데, 조이스는 그의 뇌를 연구하게 하여 이 살인마 연구에 도움을 주자고 했지만, 라이어널은 그냥 조용히 화장해 주자고 했고 결국 그의 시체는 간단한 장례 후 바로 화장되었으며,[51] 살던 아파트는 1992년 11월에 철거되었다. 그의 남은 자산은 피해자 배상에 쓰였는데 대부분의 피해자 가족들이 태워 없앴다고 한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그리고 마침내 2022년 9월 21일에 공개된 다머 - 괴물: 제프리 다머 이야기해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며 역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에반 피터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드라마와 함께 에반 피터스의 인기 또한 급증했고 숏폼 컨텐츠에서 제프리 다머가 언급되는 케이티 페리의 'Dark Horse' 노래가 깔린 드라마 장면이 여기저기에 바이럴되었다. 다른 출연진들 연기력 또한 굉장히 출중한데 특히 피해자 가족이 법정 진술에서 다머에게 욕설을 퍼붓는 장면은 소름돋는 싱크로율을 보여주어 극찬을 받았다.
파일:해즈빈 호텔에서의 제프리 다머.jpg
파일:20240404_181840.jpg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ˈdɑːmər [2] 학교에서 술을 가져오거나 벽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퇴학 당했다. [3]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로이 래트클리프에게 영적 상담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다. [4] 제프리 다머의 미들네임 라이어널은 아버지 라이어널 허버트 다머(1936 ~ 2023)에게서 따왔고, 라이어널 다머의 미들네임 허버트는 허버트 월터 다머(Herbert Walter Dahmer)(1903 ~ 1971)에게서 따왔다. [5] 제프리 다머의 증조부 요하네스 다머(Johannes Dahmer)(1866 ~ 1905)와 증조모 로자 다머(Rosa Dahmer)(1868 ~ 1920)가 독일 헤센 주에서 건너왔다. 드라마 다머에서도 제프리 다머가 독일로 주독미군으로 독일에 간다니까 아버지 라이어널 다머가 "우리 친척들을 만날 수도 있겠구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다만 증조부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지라 독일에 사는 친척들의 경우 촌수는 가까워봐야 최소 5촌(종증조부)이다. [6] 제프리 다머의 친할머니 캐서린 휴즈 다머(Catherine Hughes)(1904 ~ 1992)의 친조부모가 웨일스 출신이다. 1992년에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휴즈는 죽기 직전에 손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7] 후일 아들의 성장 과정을 담은 <A Father's Story>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자신의 교육 방법에 대한 변명 같은 게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키웠는지 서술해 놨다. 그래도 살인자가 되어버린 장남에 대한 비애가 짤막짤막하게 표현된다. [8] 조이스의 부계 9대조인 토머스 플린트(1603 ~ 1663)가 웨일스에서 건너왔다. [9] 제프리 다머의 외할머니 릴리안 플린트(1915 ~ 1983)의 부모가 노르웨이 출신이다. [10] 다머 부부는 이 문제로 자주 다투었다. [11] 제프리 다머의 그 이상성욕이 이 약물의 영향인지 이와는 무관한지는 알 수 없다. [12] 아버지는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내성적인 아이의 마음 안에는 (한)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을 수 있으며, 부모가 깊은 대화를 통해 내성적인 아이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해서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13] 1991년 신시내티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2004년 기준 두 자녀를 두었다. [14] 남동생의 이름인 '데이비드'는 형, 즉 제프리 본인이 붙인 이름이다. 내성적인 그가 뭔가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싶던 라이어널의 결정이었다. [15] 그의 뼈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가 집안에서 동물 뼈를 제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라이어널이 한 말에 따르면 제프리 다머는 뼈들이 내는 소리에 "매우 흥분되었다"며 동물 뼈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16] 그는 로드킬 동물을 담을 쓰레기봉투를 겉옷 주머니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 [17] 그가 살아 있는 동물들을 잡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다머는 살아 있는 개를 죽일 생각으로 유인해 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 그는 그 개를 그냥 돌려보냈다고 했다. [18] 다머는 이 사건이 자신이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첫 시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19] 1959년생으로 이후에 < 내 친구 다머>라는 그래픽 노블을 쓰기도 했다. [20] 음주를 남에게 숨기는 것은 알콜중독자들의 흔한 행태이다. [21] 이 일화를 자신의 만화인 < 내 친구 다머>에 실은 만화가 더프 백더프 왈, 이런 일을 꾸밀 정도의 머리와 요령과 배짱을 지닌 다머가 훗날 가정의 불우함과 살인충동, 뒤틀린 성벽 같은 여러 요소로 인해 연쇄살인범이 됐다고 생각하니 그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22] 라이어널은 아내 조이스 다머의 요청으로 접근금지 처분을 받아 집을 나간 상태였다. [23] 조이스가 데이비드를 데리고 간 지 며칠이 안 돼서였다. [24] 두 번째 희생자인 '스티븐 월터 투오미'(Steven Walter Tuomi)는 첫 희생자 스티븐 힉스와 몹시 비슷한 분위기로, 역시 마른 체구에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진 남성이었다. 이후 마지막 희생자를 제외하고는 일관적으로 흑인, 히스패닉 등의 소수인종이 희생자가 된 것으로 보아 범행의 용이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25] 다머는 후에 "나는 차를 몰고 한없이 달리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힉스는 게이가 아니었고 둘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퍼져있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둘은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후에 다머는 힉스를 살해한 후 그의 시신을 애무하며 자위행위를 했다. [26] 1970년대 히피 문화에서는 조금도 이례적이지 않은 풍경이었다. [27] 이 날은 스티븐 마크 힉스 아버지의 생신이어서 가족들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다. [28] 현재 가치로 10,000달러. [29] 피해자는 당시 불과 17살이었고 성폭행을 군에 털어놓으면 놀림거리가 될까봐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30] 미 육군의 계약 기간은 2년부터 시작해 연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입대도 쉽고 중범죄자나 본인이 원하는 게 아닌 한 계약 기간 역시 지켜 준다. [31] 1991년에 체포되기 전까지 오후 11시부터 오전 7시까지 주6일 근무했다. [32] ' 제이미' 독스테이터(Jamie Doxtator)라고도 칭해진다. [33] 종종 레이먼드 스미스(Raymond Smith)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34] 제프리 다머의 할머니는 1904년생으로, 1992년에 88세로 사망했다. 제프리 다머가 검거된 시점이 1991년 7월이니, [35] 이 시점에 무려 9명을 살해했고, 이 이후로 8명을 더 살해하게 된다. [36] 훗날 다머가 재판을 받을 때인 1992년 그의 누나 리타 이스벨(Rita Isbell)이 "제프리!!! 네가 싫어!!! 염병할!!!(Jeffrey!!! I hate you!!! Motherfxxxxr!!!)"라고 절규하며 다머에게 달려가려다 경찰에게 제지되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다머에 대해 다루는 창작물이면 열에 아홉은 나오는 장면. [37] 이 소년은 당시 제프리 다머가 투여한 약물에 의해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했다. [38] 애초에 다머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면 흑인들을 혐오해서 기피했을 것이며, 그렇게 많은 유색인종들이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살해당했던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39]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제프리 다머를 잡은 영웅으로 불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20년 뒤에 노숙인을 다리에서 던져 죽였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유죄로 인정되어 1년 반을 복역했다고. 2022년 기사 [40] 이 경관은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비명소리를 들었는데 그게 자신이 내뱉은 소리란 걸 깨닫지 못했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41] 다머의 부엌에서 발견되었다. [42] 다머의 냉장고에서 발견되었다. [43] 다머의 냉장고에서 발견되었다. [44] 다머의 침실과 옷장에서 발견되었다. 레이몬드 스미스의 두개골은 스프레이로 칠해졌다. [45] 성기는 각각 앤서니 리 시어스, 커티스 스트라우터의 것이었다. 손 한 쌍은 스트라우터의 것이었다. [46] 3구의 몸통이 산성용액에 담겨져 녹아있었다. 각각 맷 터너와 제레미야 와인버거 그리고 조셉 브라데호프트의 시신이었다. [47] 성공했다는 진술은 어디까지나 다머의 근거없는 독자적인 주장일 뿐이다. [48] 1957년 5월 3일 백인 살인범. 병원으로 이송된 지 이틀 뒤인 1994년 11월 30일 사망했다. 이 자는 1992년 4월 21일 아내를 흉기로 찔러서 살해한 뒤 흑인 강도가 저질렀다고 뒤집어씌웠다가 발각되었고 제프리 다머처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인종 문제로 살해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인데 확실치는 않다. [49] 실제로 크리스토퍼 스카버의 아들인 '크리스 스카버'의 인터뷰에 의하면 "아버지가 다머를 죽인 것은 교도관들의 교묘한 수법이며, 교도관들은 다머를 싫어하고 크리스토퍼가 그를 증오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 둘만 있을 공간을 제공하여 그를 죽이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했다. [50] 약물 후유증으로 몸 상태가 안 좋은 데다 마약을 이용해 삥을 뜯을 수 있다. [51] 그의 장례식 추도사는 교도소에서 그에게 세례를 준 로이 랫클리프 목사가 맡았다. [52] 덤 앤 더머 할 때 그 더머다. [53] 사전적으로 게이(gay)는 동성애자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다. 여성 동성애자를 칭하는 '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게이는 남성 동성애자만을 뜻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본래 게이는 성별에 상관없이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의미변화를 거친 것으로 성씨로 쓰이는 게이(Gay)는 "명랑하다"라는 뜻의 영어 형용사 또는 프랑스 북부 지명 게(Gaye)에서 유래한 것이다. [54] 하지만 다머는 추가로 피해자들에게 고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닐슨과 케이스가 좀 다르긴 하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다머는 수감된 지 3년만에 동료 재소자에게 34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데니스 닐슨은 옥중에서 7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55] 현대 영미권에서 남성에게 쓰이는 'cute'는 잘생겼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56] 다머는 1991년쯤에 다니던 초콜릿 공장에서 무단 결근을 하다 해고되었고 체포될 때까지 무직 상태로 아버지에게 받는 돈에 의존하며 살았는데 지갑 사정도 넉넉하지 않았고 당시에 정신 상태가 한창 맛이 가 버려서 피해자들의 인육이나 과자 외에는 음식을 잘 먹지도 않아 살이 왕창 빠져 버린 것. 긁지 않은 복권? 당연히 식사를 규칙적으로 주는 교도소에 들어가자 몸이 원상복구되어 버렸다(...). 물론 그러건 말건 이 영상의 댓글창은 왜 이런 잘생긴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나부터 그를 옹호하는 여론까지 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57] 다머보다 한참 전인 1980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지 오래였지만 당시에는 오랫동안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옥중에서 다머 체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이후 1994년 제프리 다머가 죽기 몇 개월 전 사형이 집행되었다. [58] 해당 발언에 대해 "내가 연쇄살인범인건 몰라도 저놈처럼 미친 수준은 아니야!"라고 해석할수 있는데, 애초에 미국에서 연쇄살인범도 몰래 서로 디스하는 이기주의가 막연함을 생각해보면 이 해석은 딱 들어맞는다. [59] 영상 내용은 이렇다. 시대별 다머의 사진이 페이즈업 되면서 그의 범죄행각이 담긴 대사가 뜬다. 8살 때 올챙이가 담긴 그릇에 모터 오일을 부었고, 10대 때는 개의 목을 자르고 말뚝에 머리를 박았으며 20대 때는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살점을 벗기는 것을 즐겼고, 우리는 그가 30살 때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즉 동물학대를 즐기는 습관이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동물학대가 보이면 무조건 신고하자는 것.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브금도 황량하고 나레이션도 없는지라 엄청난 압박감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평가가 많은 편이다. 다만 제프리 다머의 살인행각은 부모의 심각한 방임으로 생긴 애정결핍과 집안다툼으로 인한도 상처도 큰 한몫을 한데다 그가 건든 동물들도 '죽은' 동물들 뿐이었고, 첫 살인도 18살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머의 연쇄살인의 원인이 동물학대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틀린 이야기이다. 심지어 다머는 살아있는 동물을 학대하는 것을 오히려 싫어했고 애완동물도 아끼는 편이었다. 사실 동물학대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힘들고, 대체적으로 그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대부분의 심각한 연쇄살인마들이 살인을 하게 되는 계기는 선천적인 요소가 아닌 이상 백이면 백, 불우한 가정환경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들이다. [60] 연쇄살인범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 [61] O. J. 심슨 사건당시 심슨 측 흑인 변호인. 심슨이 무죄 받게 한 결정적 변론을 했다. [62] 시즌3 15화 Mr. Hankey's Christmas Classics[66], 시즌4 9화 Do the Handicapped Go to Hell?[67], 시즌10 11화 Hell on Earth 2006[68] [63] https://youtu.be/fr4fGqhqM2I?si=yXCRcu4dbuDJL3Tl [64] 더군다나 사진속에 써있는 It'sDahmGood!은 그의 이름인 Dahmer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이름 Dahmer에서 앞의 4글자만 따온 Dahm을 철자와 발음이 비슷한 damn대신 쓴것이다.) [65] 존 '더프' 백더프 글, 그림, 강수정 번역, 미메시스


[66] 파일:시즌3 15화.jpg 왼쪽부터 그 유명한 아돌프 히틀러, 마오쩌둥, (불명), 다이애나 스펜서, 사탄, 존 F. 케네디, 존 F. 케네디 주니어(당시에는 사망한지 얼마 안되었다), (불명), 제프리 다머. 시즌 10 때의 모습이 가장 유명한데 시즌 3 때의 디자인은 조금 다르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67] 파일:시즌4 9화.jpg 실제 사진으로 짤막하게 나온다. [68] 파일:시즌10 11화.jpg 왼쪽부터 존 웨인 게이시(1994년 처형), 테드 번디(1989년 처형), 제프리 다머. 셋 다 미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범이었다. 내용은 사탄이 지옥에서 파티를 열기 위해 페라리 모양의 초대형 케이크를 주문했는데, 그걸 심부름하러 이 셋이 이승으로 보내졌는데 뻘짓만 하다가 실패하고 끝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