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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3:34:04

신대철

<rowcolor=#fff>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

시나위 (Sinawe)
역대 참여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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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나위 활동 중 군에 입대, 군 복무 중 사고로 사망했다. [2] AC/DC의 브라이언 존슨 스타일의 보컬리스트로, 헤비메탈에 최적화된 보컬이었다고 한다. [3] A.F.A.의 리더이며 2013 ~ 2015년까지 시나위 10집 미러뷰 앨범의 작사에 참여 했고 투어기타를 맡았다. [4] 달파란 [5] 신대철과 자유에서도 활동했다. 간경화로 사망. [6] 칵스의 보컬 & 기타 [7] 칵스의 멤버이며 2012 ~ 2014년까지 키보드 세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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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신대철
申大澈
파일:신대철.jpg
출생 1967년 2월 16일 ([age(1967-02-16)]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평산 신씨 (平山 申氏)[1]
신체 O형
가족 아버지 신중현, 어머니 명정강
남동생 신윤철, 신석철
배우자 김준희(1970년생)[2], 자녀[3]
학력 서울고등학교 (졸업)[4]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 / 전문학사)
소속 에코브리드 대표이사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학부장)
한국가온예술종합학교(학부장)
소속 그룹 시나위(리더, 기타리스트)

1. 개요2. 연주력3. 가족4. 활동
4.1. 음악 활동
4.1.1. 데뷔4.1.2. 참여4.1.3. 교직4.1.4. 방송 활동
5. 논란
5.1. 나훈아 공연 비판 논란5.2. 바른음원협동조합 페이퍼 컴퍼니 논란
6. 여담
6.1. 성격과 음악적 성향6.2. 발언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프로듀서. 밴드 시나위의 리더이다.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장남이며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등이 활동했던 시나위의 리더이다. 신중현의 생모가 일본인이라서 일본계 혼혈이다. 기타도 아버지에게서 직접 배웠다. 신중현이 대마초 파동과 더불어 대다수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등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했던 때가 신대철이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 즈음이었는데 항상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집에 계속 계시길래 "아버지, 기타 좀 가르쳐 주세요" 라고 부탁하고 석 달 간 매일 개인 레슨을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후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기타로는 국내에 적수가 없었다고. 고2 때인 1983년에 시나위를 결성하고 1986년에 데뷔했지만, 그 전부터 인지도는 상당했다.[5] 이후의 행적은 시나위 문서 참고.

2. 연주력

일단 신대철의 연주력중에 최고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속주이다. 속주로서는 꿀릴 부분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렇다고해서 속주에만 국한된 기타리스트는 아니다. 시나위 1집의 1월(Inst)과 유튜브에 나오는 게리 무어의 Sunset 커버 등만 들어봐도 뛰어난 표현력과 감정이 실린 연주를 보여준다. 또 시나위 앨범들을 들어보면 톤 메이킹에 있어서도 각 곡에 스타일에 맞게 잘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록 장르로서의 연주는 시나위에서 헤비 메탈, 얼터너티브 록의 연주를 보여주었고, 블루스 연주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대철은 정통 록을 추구하는 음악가이기 때문에 현대의 기타리스트 기준 하에 평가를 하자면 잘 치는 기타리스트이긴 하지만 스타일 자체는 옛날 스타일로 치는 기타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3. 가족

아버지가 '한국 록의 대부'인 신중현, 동생이 신윤철, 신석철이다.

신해철이 이름이 비슷해 친형제인 줄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또한 사촌형제도 아니다.[6][7]

동생 신윤철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기타리스트이며, 막내 신석철도 한국의 대표적인 탈 장르 드러머다.

어머니 명정강은 1960년대 초반,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9인조 여성 재즈 밴드인 '블루 리본' 출신으로서, 한국 최초의 여성 드러머였다. 부모와 삼형제, 즉 가족 모두가 대단한 음악가인 셈.

신대철 본인은 아버지에게 직접 맨투맨으로 처음부터 기타를 배웠지만, 동생 신윤철은 신대철에게 처음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8] 이를 두고 신대철은 본인의 책에서 "그러고 보면 동생들은 천재인 것 같아. 그냥 어깨 너머로 배웠으니까."라며, 동생들은 설렁설렁 배우고도 고수가 되었다고 놀라워 했다.

가족이 모두 조용하고 과묵하다. 신대철이 그나마도 방송에 많이 나오는 사례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나마'이다. 신대철도 보통의 기준으로 보면 무척 조용한 사람이다. 학교에서 그에게 배웠던 제자들은 "워낙 조용해서 어찌 처신할지를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형제들은 더 과묵해서, 삼형제가 모여 인터뷰를 할 때 보면 신대철 혼자 아웃사이더급 속사포 랩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김도균, 김태원과는 다르게 예능 활동이 적다. 그만큼 신대철이 과묵하고 말 수가 적어서 "예", "아니오"로만 답을 하기 때문(...)

4. 활동

4.1. 음악 활동

4.1.1. 데뷔

1986년 시나위 1집 앨범 Heavy Metal Sinawe

4.1.2. 참여

4.1.3. 교직

4.1.4. 방송 활동

5. 논란

5.1. 나훈아 공연 비판 논란

2021년 7월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나훈아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코로나19로 전국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후배들은 몇 십명 오는 공연도 취소하는 상황에서 공연을 강행하는 점을 들며 그를 비판하였는데,[출처] 신청곡으로 '백만송이 장미'를 불러달라길 원하며 곡이 똑같으니 따로 연습할 필요도 없단 말을 거론하면서 테스형!이 심수봉이 부른 '백만송이 장미'와 인트로가 비슷하단 점을 들며 비난하였다. 대중은 신대철을 지지하는 쪽과 비판하는 쪽으로 갈렸는데, 지지하는 쪽은 "비상 시국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콘서트를 열어서 되겠냐?"며 의견을 표한 반면 비판하는 쪽은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서 이승환의 공연엔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사태 키운 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애먼 나훈아를 비판한다."는 의견으로 갈리었다.

크로커다일 남자훈련소 측에서는 나훈아 콘서트는 적법한 절차를 준수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지하철이나 버스 따위의 대중교통에서도 몇 만 명이 밀집하는데 아무도 감염되지 않는다며 콘서트만 막을 이유도 없고, 후배들이 전부 굶어죽어가는데 합법적인 콘서트 진행을 비판한다는 것은 문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역 상황에 대놓고 정치를 대입한 시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5.2. 바른음원협동조합 페이퍼 컴퍼니 논란

신대철이 나훈아가 코로나 4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콘서트를 진행하는 상황을 크로커다일 남자훈련소의 최일환이 바른음악협동조합은 이권을 타내기 위한 사실상 페이퍼 컴퍼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고, 신대철 측은 법적인 조치를 예고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른음원협동조합 참고.

6. 여담

6.1. 성격과 음악적 성향

리더십이 강하고 음악 고집이 세다. 스스로도 젊을 때 그런 꼰대 기질이 매우 심했음을 인정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젊을 때에 비하면 많이 유순하다고 한다. 그래서 시나위의 보컬 김종서 임재범보다 동생이면서도 시나위의 리더를 맡았다.[10] 더불어 시나위에 있었던 서태지도 신대철을 많이 무서워 했다고 한다.[11]

3대 기타리스트 가운데 김태원과 김도균은 나름 감성적인 면이 있으나 신대철은 다소 냉철한 편이다. 과거 공감토크쇼 놀러와 3대 기타리스트 특집으로 나왔을 때 김태원과 서로 편지를 읽으며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을 때 혼자 오글거려 하며 빵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기타 연주에서 보여주는 감성은 김태원, 김도균보다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블루스와 메탈을 기반으로 한 1980년대 뮤지션임에도 의외로 음악적 성향이 진보적이다. 나는 가수다 2와 <Mirrorview>에서 보여준 일렉트로닉 사운드나 <슬픔의 이유> 등에서 사용된 우쿨렐레 등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임에도 스스로 배워서 수준급 연주를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만든 하이엔드 기타를 메인 기타로 사용 중이다.

그리고 역시 한국의 명 기타리스트들인 김도균, 김목경과 함께 Fender에서 커스텀 기타를 헌정받았다. # 아버지 신중현에 이어 부자가 Fender사에서 기타를 헌정받았다.

신대철의 음악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크게 라디오를 켜고인듯 하지만, 실상은 91년도에 했던 밴드 '자유'에서 작사 작곡 그리고 직접 부르기까지한 ' 멀어져간 사람아'가 더 알려져 있다. 물론 박상민의 리메이크로 잘 알려지게 된 것이지만. 신대철을 아는 사람이라면 몰래 아는 명곡이다. 박상민 판보다 화려한 기타 연주와[12], 기교없이 수수하지만 진솔한 목소리에 팬들이 좋아한다.

서태지를 향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서태지가 시나위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신대철과 서태지, 김종서 셋은 음악관으로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신대철은 레드 제플린 등을 들려주며 올드 메탈을 하길 주장한 반면, 서태지는 옛날 음악을 듣길 거부하고 새로운 음악을 해보고 싶어 하였다. 김종서는 대중적인 곡을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서태지는 시나위를 탈퇴하게 된다. 서태지는 훗날 이동연 교수와 한 인터뷰에서 "공연 사기를 당해 신대철은 해당 공연을 기획한 기획자와 대판 싸우고 술을 마시러 나가는 바람에 팬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다 만들지도 않은 엉성한 무대에서 김종서와 둘이 공연을 한 후 시나위가 해체되어 실직해 탈퇴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반면, 신대철은 이이제이에 출연해 "당시 미성년자였던 서태지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에 반발한 서태지가 담배사러 나갔다가 그 길로 도망가 탈퇴했다."고 밝혔다. 정황상 둘 사이에 깊은 갈등이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때부터 남은 앙금 탓인지 1997년에 발표한 <은퇴선언>이란 곡은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가요계를 은퇴한 서태지를 향한 디스곡으로 추정되었는데, 발매 당시에는 부정했지만 누가 봐도 서태지를 저격하는 노래였기에 훗날 본인이 누군가를 디스하는 노래라고 인정하였다. 이후 이이제이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 난 알아요>는 자신이 이 곡의 기타 녹음을 도와주러 갔는데 밀리 바닐리의 곡을 표절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신대철이 기타 녹음을 도와줬다는 곡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 수록된 <Rock'n Roll Dance>여서 서태지 팬들에게 크나큰 반감을 샀다.[13]

6.2. 발언

신중현과 더불어 과묵한 성격 때문에, 한 기자가 시나위 데뷔 후 부자 로커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거의 "예.", "아니오."로 대답을 하여 인터뷰 진행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말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한다. 사실 말수가 적은 성격은 동생들도 마찬가지라서 이 네 부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은 매우 힘들다고 한다.

그나마 가족 중에 신대철이 제일 말수도 많고 말도 잘하는 편이다.[14] 아버지 다음으로 대중에게 많이 노출됐을 뿐만 아니라 2010년대 들어 방송출연도 많아졌기 때문인지 자기 소신을 조리있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느덧 여기에 적응이 됐는지 이젠 할 말은 다 하는 달변가가 됐을 정도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기타가 펜더면 뭐하나. 손가락이 펜더여야지"라는 명언으로 유명하다. 이 명언은 기타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연주자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TOP밴드 시즌1 코치 결정전에서 "후회하지 말고 저한테 오시면 됩니다."라는 명언을 남겨 시청자에게 감명을 남겼다. 코치 결정전에서 게이트 플라워즈와 리카밴드 둘을 선택한 상황에서 후반부에 갈 길 잃은 밴드를 포섭하기 위한 말이었다.

지인의 꼬임에 힘입어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매일 자신의 장비 사진을 올리거나 개인적인 감상 등을 적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며, 팔로워가 10,000명이 넘은 상황이다.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 이야기나 이철호의 사랑과 평화 상표권 등록 문제를 거론하며 음악계를 향해 문제 제기를 하거나 송포유를 비판하며 진보 성향이 드러나는 정치글을 게시하는 등 페이스북을 시사 용도로도 쓰고 있다.

게다가 지적인 수준이 상당하다. 한번 읽어보자. #[15] 본인 말처럼 지속적으로 알고자 노력하는 듯하다.

그런데 가끔 '해장국에 들깨를 넣으면 술이 들(덜)깨' 같은 아재개그를 하거나 '넘을 수 없는 벽이라면 부숴버리겠다!' 같은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등[16] 어째 개그 캐릭터가 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한 박사모의 집회에서 아버지 신중현의 곡 ' 아름다운 강산'을 부른 것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을 남겼다. 해당 글의 말미에 촛불집회에서 본인을 섭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집회 측도 이를 받아들여 12월 31일에 보컬 전인권과 함께 공연을 성사시켰다. 인터뷰 링크

2017년 2월 16일에 쇼파르뮤직의 소속사 대표가 식당에서 만취된 채로 쇼파르뮤직의 한 매니저와 함께 찾아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했는데, 해당 아르바이트생들은 신대철이 교수로 재직 중인 호원대학교 실용음악과 출신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신대철이 SNS상에서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링크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에서 윤미향의 편을 들고, 이용수 할머니에 대해 "나이 90을 넘으면 판단력이 논리력에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이 할머니는 잘못이 없고, 남들이 부추기니 폭로를 한 것이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1] 평산 신씨 34세손 철(澈) 항렬이다. [2] 3살 연하 뮤지션이라고 밝혔다. [3] 자녀가 있다고는 한 적이 있지만 성별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4] 막내동생 신석철과 동문이다. [5] 기타에 손을 대지 않고 소리를 낼 수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6] 대신 이름이 비슷해서 서로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냈다고 한다. 사실 이 둘은 평산 신씨 34세손 '澈'자 항렬을 쓴다. 족보와 문중을 제대로 따진다면 종형제뻘인 관계다. [7] 실제로 신해철이 데뷔 초 한 방송에 출연했을 때 PD가 “아버지 잘 계시냐?”라고 물어봤을 정도라고 한다. 이 때 신해철은 PD가 말하는 아버지가 신중현이라는 걸 알아채고 ”우리 아버지 아닙니다.“ 라고 대답하며 웃고 넘겼다고 한다. [8] 물론 나중에는 신윤철도 아버지에게 틈틈이 기타 레슨을 받았다고. [출처] 신대철, 나훈아 콘서트 작심비판 “후배들은 몇십명 공연도 취소” [10] 신대철과 임재범은 실제로 서울고 동창이다. 신대철은 빠른 년생이라 1966년생들과 같은 학년이었고, 임재범은 1962년생인데 가정사 때문에 4년 늦게 학교를 들어갔다고 본인이 주장한다. [11] 막상 김바다가 처음 영입되었을 때는 신대철이 김바다를 무서워 했다고 한다. [12] 박상민 판에서의 기타연주도 신대철이 직접 했다. [13] 더구나 <Rock'n Roll Dance>는 AC/DC의 <Back in Black>을 커버한 곡이였는데, 누구보다 록으로 확고한 입지를 잡은 기타리스트가 AC/DC를 모르는 게 말이 되냐며 댄스, 힙합 장르에 관해 잘 모르면서 서태지를 향해 악의 있는 날조를 한단 비판을 받았다. [14] 김창완의 라라라에 서울전자음악단이 출연했을 당시 신대철의 형제들이 얼마나 말이 없던지 김창완도 많이 힘들어했다. 원체 김창완과 신대철 일가가 서로 친하지만 실제로 신대철은 아버지나 형제에 비하면 말이 많은 편이다. [15] 일반인으로는 남다르게 라플라스의 악마와 불확정성 정리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 교양을 지향해도 나이 먹을수록 과학에 대한 관심은 어려워서 기피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훌륭한 수준이다. [16] 나중에 신곡 가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