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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1:40:48

인민전선

인민 전선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각국의 인민전선
3.1. 프랑스3.2. 스페인
4. 한국에서5. 관련 문서 및 외부 링크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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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화 10년(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세계대회에서 인민전선운동방침이 채택됐을 때부터 구주 제국의 공산운동전선에서는 인민전선운동이 점차 세를 얻고 독일 서반아에서는 인민전선파가 정권을 자기의 수중에 장악하기 위해 파쇼와 대항하여 과감하게 투쟁하고 불란서에서는 이미 인민전선파가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한 상황이며 금후 세계의 공산운동은 인민전선이론을 기조로하여 인민전선의 결성에 의해 제국주의타도를 향하여 전진해나가는 추세에 있다.
이강국, 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想思部[1], 1943
그렇다면 인민전선은 과연 무엇인가? 인민전선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가장 중요하기로는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포괄하는 계급 동맹이다. 달리 말하면, 파시즘에 맞선 노동계급의 단결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는 하되, 피착취 계급을 부르주아의 일부 부문과 단결시키는 방식의 응답이다. 이때 동맹 상대인 부르주아지는 파시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진보적인 세력으로 묘사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2][3], 인민전선이 진보운동의 패배를 부르는 이유, 번역: 천경록, (마르크스21, Vol.12, 2011)

인민전선은 중도 ~ 극좌 정당들의 광범위한 연합을 일컫는 말이다. 보통 1930년대 중후반, 스탈린 코민테른의 지시하에 자유주의, 공화주의, 급진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범 좌파부터 극좌까지의 정당들이 보수주의, 파시즘 우파 내지 극우 정당 연합에 대항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인민전선이 정파 간의 연대를 넘어 독점 자본을 제외한 여러 계급 간의 연대로 발전한 것이 디미트로프가 주장한 통일전선이다. 반대쪽은 트로츠키가 주장한 사회주의 좌파-공산주의 극좌 연대인 공동전선.[4]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 각국, 특히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파시즘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뿐 아니라 스페인, 라트비아,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지까지 세력을 확산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코민테른 1935년 6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7차 세계 공산당대회에서 반파쇼 투쟁을 당면 목표로 혁신주의 정치세력들[5]과의 연계를 결정했다. 이는 곧 기존에 견지했던 노선인 계급 투쟁과 혁명 정책을 (일시적으로나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전간기 유럽에서의 인민전선, 특히 집권까지 성공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동유럽의 나치 점령지에서도 각국의 노동자당을 중심으로 반나치 인민전선이 꾸려진 바 있다. 이러한 인민전선을 바탕으로 전후에 동유럽에서 좌익이 정권을 잡게 된다.

소련 말기에도 인민전선이라는 단체가 각 공화국별로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반 공산당 성향의 정파들이 해당 공화국에서 하나의 정치체를 구성한 경우로, 1990년 소련 지방선거에서는 발트 3국 몰도바 SSR 최고 소비에트 의회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소련 해체의 첫발을 내딛었다. 다만 공화국별로 사정이 달라서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2. 배경

인민전선론이 출현한 배경에는 유럽의 정세 변화, 특히 독일 국내 정세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전까지 독일 공산당은 다른 좌파 정치 세력, 특히 사회민주주의자에 적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코민테른 독일 공산당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소위 '사회파시즘'론을 통해 사민주의 정당을 나치당이나 파시스트당과 동급으로 취급하여 투쟁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력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한데다가 혁명 이론에 맞추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빈민층으로 전락한 계층의 지지를 흡수하면 자연스레 혁명 여건이 조성될 것이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하다. 하지만 빈민층으로 전락한 계층의 지지는 상당수가 공산당이 아닌 나치당으로 향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산당은 단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독일 공산당 히틀러 나치에 맞서 독일 사민당과 협력하기를 거부하며 싸워댔고 그 결과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던 것. 그제서야 부랴부랴 공산당측에서 사민당과 연합하며 수습하려 나섰지만 이미 뒤늦은 일이었다.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독일 공산당은 불법 단체로 지정되어 탄압받았고,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노동 운동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도 히틀러 집권 이후 나치 독일은 본격적인 재무장에 착수했고 나치는 반공 이념을 내세우는 한편 노골적으로 중부 및 동부 유럽으로의 침략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집권은 소련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으로 다가왔다.

스탈린 서유럽의 민주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와 제휴하여 나치 독일을 견제하려 했고 인민전선론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3. 각국의 인민전선

여러 나라에서 인민전선이 형성되었으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인민전선이 가장 유명하다.

3.1. 프랑스

프랑스 좌파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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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분파 }}}}}}}}}}}}

Front Populaire
"노동과 자유 그리고 평화의 인민전선이라는 구상을 선전하고 급진주의자, 공화주의자 그리고 민주주의자들과 함께 공동행동을 펼칠 계획을 말하게 되어 기쁩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강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투표하십시오."
모리스 토레즈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1936년 4월 17일

1936년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인 SFIO(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6]와 좌파 자유주의[7] 정당인 급진당(Parti Radical)[8], 프랑스 공산당(PCF)이 연합하여 수립되었다. 그해 열린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했으며, SFIO의 당수인 레옹 블룸을 총리로 하는 연립 내각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차이, 급진당과 공산당의 다툼으로 1938년 인민전선은 사실상 붕괴했다.[9] 내흥을 겪는 와중에 나머지 좌파들은 우파에게 정권이 넘어가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달라디에 총리와 급진당[10]의 정권 독점을 용납했다. 결정적으로 소련이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다른 진보 좌파 세력의 통수를 후려갈겼다.[11] 프랑스 공산당 역시 조약 체결 이후 반독 반파쇼 투쟁에 모호한 입장을 내비치다가 매국노 집단으로 몰려 인민전선에서 손절 당하고 정당 지위도 박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1940년 나치 독일에게 파리가 함락되고 비시 프랑스가 들어서며 프랑스의 인민전선은 제3공화국과 함께 짧은 역사를 끝마치고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의 성립과 경험은 인민전선의 붕괴 이후로도 프랑스 국내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접적으로는 나치 독일의 점령기 중에 비시 정부 수립과 레지스탕스 간의 새로운 분열 구도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더 나아가 인민전선은 세계 대전 이후에도 프랑스의 새로운 정치 지형 뿐만 아니라 냉전 시기 프랑스의 사회 운동 및 노동자 문화의 이념적 기준으로 제시되었고, 그 방향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린 르 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의 상승세가 거세진 2024년 총선에서 신민중생태사회연합(NUPES)의 당명을 신인민전선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했다. #

3.2. 스페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인민전선(스페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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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NL계열에서도 당연히 인민전선을 내세우고 있다. NL이 내세우는 이른바 "민족민주전선", "민주대연합론", "자주적 민주정부"로 변용되어 한국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NL은 한국 사회를 예속 식민지 상태로 보아, 반제 반식민 투쟁이 당면 목표라고 본다. 이에 따라 NL은 양심적인 기업인, 노동자, 농민, 영세상인 등 착취당하는 민족 세력이 투쟁의 전선을 구성하여 반제 투쟁에 나서야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민족 세력을 구성하는 NL과, 독점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인 기존 민주당+재야 세력이 연합해야한다는 방법론이 도출된 것이다.

따라서 NL은 통념과 달리 PD에 비해 훨씬 민주당에 우호적이며, 실제 내세우는 구호나 이념 등도 PD에 비해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1987년 정국 때도 PD의 전신인 CA파는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위한 제헌의회 소집을 내세웠지만, NL은 선 민주/통일, 후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내세웠다. 또한 이 당시 NL을 구성한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의 인사들이 이후 민주당으로 영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한총련 출신이 주가 된 진보정당 내 NL 세력도 범민주/진보 단일화라는 기치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지지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내에서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은 이석기였다. 오히려 PD 출신인 진보신당에서는 통합 반대 여론이 높아 통합안이 부결되고, 심상정 등 탈당파가 독자적으로 진보당에 합류했다. 또한 2010년 지방선거 때 진보신당과 달리 민주노동당이 전국적인 야권연대에 참여한 것도 "민주대연합론"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2024년 총선거에서 진보당의 더불어민주연합 참여와도 연결된다. 국민주권당이나 촛불행동 등 일부 NL 조직은 현재 친이재명계에 가까울 정도의 극성 친민주 성향을 내세우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및 외부 링크

6. 기타



[1]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2]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장 [3]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그저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하는, 트로츠키 계열의 일파 국제사회주의 계열이다.(한국에서는 노동자연대가 대표적인 조직) 반스탈린주의에 가까운 그이기에 인민전선에 대하여 비판적 어조로 주장하고 있음을 감안할 것. [4] 사실 반자본주의 측면에서는 스탈린보다 트로츠키가 더 극단적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일단 교묘하게 파시즘을 막기 위함을 명목으로 자유주의자들과도 연대를 한 후 대중운동과 정권참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프랑스 공산당, 스페인 공산당은 모두 연립정부에서 일단은 장관직을 아예 차지하지 않거나 의미 없는 장관직을 차지했다.) 타 정파와의 공존 속에서 공산주의의 대중적 헤게모니를 잡아 연성 혁명을 통해 정권을 차지했지만( 동유럽의 경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대놓고 타 세력과의 연대 단절, 즉각적 혁명과 봉기만 부르짖었다. [5] 사민주의자, 독자적인 사회주의자 및 자유주의자 등 [6] 사회당의 전신. [7] 당시에는 사회자유주의라는 용어 대신 급진주의라는 말이 쓰였다. [8] 정식 명칭은 공화주의 급진주의 급진사회주의당 PRRRS. 프랑스 제3공화국 후반의 지배적인 정당이었다. [9] 특히 스페인 내전 개입에서 급진당이 반대한 것이 치명타였다. [10] 자유민주주의 정당이었으나 프랑스의 주요 부르주아 정당이기도 했고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 제국 확장에도 관여한 바 있다. [11] 그러나 독소 불가침 조약에 앞서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의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먼저 물먹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12] 대표적인 사례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