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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0:19:26

장 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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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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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카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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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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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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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노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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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Jean_Jaurès,_1904,_by_Nadar.jpg
이름 오귀스트 마리 조제프 장 레옹 조레스(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
출생 1859년 9월 3일
프랑스 제2제국 카스트르
사망 1914년 7월 31일 (향년 54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1. 개요2. 생애3. 사상4. 저작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정치인, 사회주의자.

2. 생애

프랑스 남부의 부르주아 계층 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매상인이자 영주였고, 사촌은 해군 장교이자 후일 해군부 장관이 될 뱅자맹 조레스였다. 카스트르, 루이 르 그랑 명문 고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1878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학교 동기로는 그 유명한 에밀 뒤르켐. 1880년에 철학 교수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883년에 툴루즈 대학의 철학 부교수가 1889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892년에 칸트, 피히테, 헤겔에 대해 연구한 독일 사회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1885년에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자본가의 손에 농민,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모습을 보고 사회주의로 전향한다. 이후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도입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완화/개량시킬 것을 주장한다. 1887년부터 툴루즈 통신문(La Dépêche de Toulouse)이라는 신문의 기자가 되고, 1898년에는 사회당 정향의 신문 "작은 공화국"(Petite République)의 국장이 된다. "현대 프랑스 사회주의 역사"(Histoire socialiste de la France contemporaine)이라는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1893년에 사회당으로 이적하고 카르모 광부들의 지지를 받아 의원으로 당선된다. 드레퓌스 사건 시절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레옹 블룸, 뤼시앵 헤르 등 지식인들과 함께 드레퓌스를 지지한다. 1904년에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익 언론인 뤼마니테[1]를 창간했고, 1905년 현 사회당의 모체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을 같은 성향의 정치인들과 같이 설립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전 유럽 사회의 호전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샤를 모라스 보불전쟁 때 프랑스가 겪은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보복 전쟁을 해야한다는 우파 정치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통해 전쟁을 막을 것을 호소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틀 전에 극우파 라울 발랭의 손에 암살당했다. 1924년에 프랑스 국가 영웅들의 묘소인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3. 사상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사상가였으나, 프랑스의 의회주의가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고 폭력을 수반한 공산혁명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다. 나아가 조레스는 폭력을 수반한 공산혁명으로 만들어지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독재에서 그 주체만 바뀌는 것이라 보았다. 조레스는 투표를 통한 의회활동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사회민주주의가 불러온 수정주의 논쟁에 참여하여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혁명을 배격한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전환에는 공감하면서도, 공산주의가 도달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하였다. 장 조레스는 공산주의가 베른슈타인의 주장과 달리 도달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며 점진적 의회주의적 개량을 통해 충분히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반전주의자로서 무의미한 전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희생당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4. 저작


[1] 사실 훨씬 뒤에 창간 된 르몽드나 리베라시옹에게 밀려서 현재는 몇 만부 정도 팔리는 수준이고 1920년대 이후로는 공산당의 기관지가 되면서 장 조레스의 성향과 다른 신문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레지스탕스 활동과 프랑스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주었다는 의의는 있긴 했지만. [2] 장 조레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출판을 한 적은 없으나 그의 사설 등을 하나로 취합하여 국내에 출판된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