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i radical de gauche | 좌익급진당 | |
<colcolor=#f1c506,#ddd> 창당일 | <colbgcolor=#fff,#1f2023> 2017년 7월 1일 |
약칭 | PRG |
설립자 | 모리스 포르 |
대표 | 기욤 라크루아 |
이념 |
사회자유주의 급진주의 ( 프랑스)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상원 |
2석 / 348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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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 |
0석 / 577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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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
0석 / 81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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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색 |
노란색 (#f1c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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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연합 | 신인민전선 -> 앙상블 |
당원 | 3,500명 (2022년) |
웹사이트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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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사회자유주의 정당.이름만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나 현재는 극좌 정당이 아니다. 프랑스 정치 맥락에서 '급진'는 극단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전적 급진주의를 의미한다. 좌익급진당은 개인 자유를 강조하며 현대 기준에서 프랑스 사회당보다도 온건한 중도좌파 정당으로 여겨진다. 과거에는 그래도 사회주의 성향이었으나 중도화되었다.
2. 역사
1971년 급진당에서 분열된 정당으로 모리스 포르, 르네 빌레르, 로베르 파브르, 자크 마로셀리 등이 참여했다. 당시 당명은 급진사회주의 연구 및 행동단체[1]였다가 1972년 급진사회좌파운동[2], 1973년 급진좌파운동[3]으로 바뀌었다.당시 대표였던 로베르 파브르는 좌파 드골주의자들을 포섭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사회당과 가까웠던 다른 당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1978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에 의해 공화국 중재관[4]으로 임명되면서 당에서 제명되었다.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셸 크레포가 입후보했으나 2.09%라는 처참한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하지만 직후 열린 총선에서는 14명의 당선자가 나왔으며 미테랑 정부와 협력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2년에는 한 차례 당의 분열이 일어나 탈당한 의원들이 프랑스 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했다.
198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중도급진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3.32%의 득표율이 나왔고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비례대표제로 열린 1986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의석이 9석으로 줄었다.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테랑을 지지했으며 직후 열린 총선에서 9명의 당선자가 나왔다. 198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사회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했고 장프랑수아 오리(Jean-François Hory)와 앙드레 생종(André Sainjon)이라는 2명의 당선자를 내기도 했다.
1993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6명의 당선자가 나왔으며 이때 대표로 베르나르 타피가 취임했다. 타피 대표는 199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13명의 당선자를 배출하여 좋은 성적표를 받았지만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물러났다. 같은 해에 당명을 급진주의로 고쳤는데 급진당이 당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당명을 좌익급진당으로 고쳤다.
1995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장프랑수아 오리가 출마를 선언하려고 했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서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1996년 장미셸 벨레가 새로운 대표로 취임하면서 당명은 다시 급진사회당이 되었다. 급진사회당은 199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14명의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리오넬 조스팽 내각에 참여하였다. 1998년 다시 당명을 좌익급진당으로 고쳤다.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랑스령 기아나 출신의 크리스티안 토비라가 출마하였으나 2.32%라는 낮은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참패했고 결선투표는 자크 시라크와 장마리 르펜의 대결이 되었다.
200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7석을 차지했다.
2017년 급진당과 합당하여 급진운동이라는 당을 출범시켰지만 급진운동이 2019년 당내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좌익급진당은 재창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