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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14:20:16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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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연방
Fédération indochinoise
프랑스 제국 식민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문장.svg
국기 문장
파일:French_Indochina_1900-1945-fr.svg.png
1887 ~ 1953 / 1954[1]
위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 지역
수도 사이공 (1887~1902)
하노이 (1902~1945)
사이공 (1945~1954)
공용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라오어, 크메르어, 중국어
종교 기독교, 불교
도교, 유교
정치체제 연방제, 프랑스의 식민지
정부수반 총독
통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터
면적 749,998 km2
구성국 파일:프랑스령 코친차이나 기.svg 코친차이나
파일:프랑스령 라오스 기.svg 라오스 왕국
파일:프랑스령 캄보디아 국기.svg 캄보디아 왕국
파일:프랑스령 안남 기.svg 안남 보호령
파일:프랑스령 안남 기.svg 통킹 보호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광저우만 조차지

1. 개요2. 역사
2.1. 식민화 과정 (1858년-1897년)2.2. 제도와 정치2.3. 교육2.4. 경제2.5.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2.5.1. 껀브엉 운동 (1885년-1888년)2.5.2.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2.5.3. 1920년 이후 세대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자들
2.6. 베트남 국민당 결성2.7. 제2차 세계 대전2.8. 몰락
3. 구성4. 출처

[clearfix]

1. 개요

청프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된 대남과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를 합쳐서 만든 프랑스령 식민지 연방 지역이다.

조선 총독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은 문관도 부임했고, 무관이 올 경우도 역시 일본 육군 장군( 대장)이 대세인 조선 총독에 비해 이쪽은 프랑스 해군 제독들이 많이 취임한 것이 특징이다.

좀 예전 문헌엔 '불령 인도지나(佛領印度支那)'라는 음역어로 나온다.

2. 역사

2.1. 식민화 과정 (1858년-1897년)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중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편전쟁으로 돈맛을 본 프랑스 기업인들은 로비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하라고 정부에 어필하고 있었다. 당시 대남 측은, 프랑스 가톨릭 신부 피노 드베엔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한 자롱 황제의 아들 민망 황제이 거추장스러워진 가톨릭 신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30만명에 이이를 명분 삼은 나폴레옹은 1858년에 해군 장교 리고 드즈누이이에게 전함 14척과 해군 3천명을 붙여주어 다낭과 사이공을 침략하게 한다. 드즈누이이는 1862년에 대남 남부에 코친차이나를 창설하고, 얼마 뒤 캄보디아를 점령했지만 멕시코 전쟁, 보불전쟁, 파리 코뮌 등 위급한 문제들로 잠시 팽창을 멈추게 된다.

1878년 즈음 본국의 문제들이 해소되자, 프랑스는 다시 정복 전쟁에 착수해서 중부에 위치한 수도 후에와 북부 항구 하이퐁을 공격한다. 청나라는 이에 태평천국 진압에 앞장섰던 남부의 군벌부대 흑기군과 관군을 보냈고, 프랑스 측 가르니에 장군을 죽이며 잠시 선전하지만 결국 패배한다. 1884년 대남은 차례로 통킹과 안남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아르망 조약과 파뜨노트르 조약을 조인한다. 후술하겠지만, 조정의 일부 대신이 항복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껀브엉이라 부르는 저항군의 잔당은 1897년까지도 지역적으로 독립적인 행정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암의 조공국이었던 루앙 프라방 왕국(라오스)은 1886년에 정복되었다. 이걸 인정치 않은 시암은 영국의 지원을 받고 1893년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영토를 추가로 할양해야 했다. 이것은 후술할 프랑스-태국 전쟁의 원인이 된다.

2.2. 제도와 정치

초대 베트남 총독인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간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1887년에 인도차이나 연방이 제도화되고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설치되고 전까지 인도차이나의 통치 양식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하나의 정치체가 아닌 말 그대로 연방이었다. 캄보디아, 라오스,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는 재정적으로만 통합되어 있었고, 코친차이나를 제외한 4국은 모두 형식적으로는 보호령임에도, 실질적인 통치방식은 각각 달랐다. 우선 재정적으로, 프랑스 본국은 국민들이 식민정책에 반대할 것과 지지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인도차이나로 경제적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가장 부유한 코친차이나는 가난한 라오스의 세수까지 부담해야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도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2]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2.3. 교육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 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3],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4]라는 피진 프랑스어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일부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불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폴 두메르는 강력한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기존 과거 제도는 1909년에 중단되었고, 서당을 포함한 전통 교육기관들은 1918년에 강제 폐관되었다. 폴 보 총독과 두메르는 프랑스인과 소수 엘리트들을 위한 프랑스 교육을 시행했고, 알베르 사로 총독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늘리는 정책을 펼쳤지만 보편적인 교육을 실행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교육을 마친 인도차이나인은 연간 20만 명 가량에 불과했고, 대학 과정을 마친 베트남인 수는 600-1200명 사이였다. 베트남인들 상황은 그나마 나은 것이, 캄보디아, 라오스 출신 대학 진학자는 각각 연간 5명에서 20명 정도밖에 안 됐다. 중/고등학교 교육은 토착민과 프랑스인들이 분리했으며, 토착민이 프랑스인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려면 연줄을 이용하거나 별도의 시험을 봐야했다.

2.4. 경제

프랑스인들의 매판[5]은 친불 베트남인과 중국인들로 이루어졌다. 과거부터 쩌런에 정착해 상공업을 담당하던 화교들은 (Hoa족) 응우옌 왕조와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민망 황제 시절 쌀 수출 금지령을 무시하고 암거래하고 징벌받기도 했고, 다른 소수민족/종교인들과 폭동에 자주 가담하며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식민시기가 시작되자 이들은 재빠르게 새로운 지배자들과 발맞춰 부유한 도매상, 중간관리층, 지주가 된다. 10%의 프랑스-중국 엘리트 계층은 전체 토지와 부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느 식민경제가 그러하듯이 지배자들이 가져온 근대화는 소수의 도시인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수력발전소, 북부와 남부를 잇는 철도 트랑스앙도시노아(Transindochinois) 건설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상당한 인명피해를 수반해야 했다. 인도차이나의 경제는 주로 농업, 수산업, 전통 수공업, 광업 위주로 돌아가고 있어서, 인도차이나 총생산량의 4분의 3을 형성했고, 이중에도 농업은 경제활동인구의 90%를 차지했다. 총독부 행정가들은 정복 사업에 들인 비용만큼 수익을 끌어내기 위해 농업용 수로를 개발해 쌀 생산성을 상당히 끌여올렸으나, 이렇게 생산된 농산물을 대거 수출해서[6] 인도차이나인들은 혜택을 보지 못했다. 이주용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달리 본국과 거리가 먼 인도차이나는 경제적 식민지였던만큼 인도차이나 거주 프랑스인들은 3-4만 명에 불과했고, 이중 절반 이상은 군인과 가족이었다. 금융업은 1875년에 설립된 인도차이나 은행이 거의 독점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은행은 피아스터 (piastre)를 조폐하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유일한 대형 상업은행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수적 성격을 보여, 총독부가 간혹 제안했던 미온적인 개혁정책에도 반대하고 발목잡았다.

폴 두메르는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이 지역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확산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는 걸 극히 죄악시하던 베트남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바로 다음 시기 총독부 역시 토지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 +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마구 식민지인들을 쥐어짜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 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베트남의 토지를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결과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런 악조건은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조치로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였다.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폭망했다.

2.5. 베트남 독립운동의 발아

2.5.1. 껀브엉 운동 (1885년-1888년)

1885~1888년까지는 [7] '껀브엉(勤王) 운동'[8]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서 국토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식민침략 열풍이 거셌던 터라 '그들만의 리그' 취급받았다. 베트남 국민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왕조가 야만적인 프랑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분노심도 한 몫했다.

1885년 7월 4일에 루셀 드쿠르씨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후에에 당도하자, 총리대신이자 황제의 섭정자였던 똔 텃 투이엣이 응전했다가 하루만에 패배한다. 투이엣은 12살배기 황제 함응이를 데리고 피신하고, 베트남인들에게 봉기하도록 호소한다. 입궁한 프랑스군은 황궁의 30톤이 넘는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북부 경략사인 응우옌흐우도를 포함한 고위 관료 몇 명을 승진과 뇌물로 매수, 동카인을 황제로 내세운다. 투이엣의 호소에 응한 판딘풍, 호앙호아탐, 마이쑤언트엉 등 조정 또는 지방 관료들은 농민 군대를 동원해 꽝찌성, 타인호아성, 바딘성, 빈투언성, 타이응우옌성 등 전국 (주로 북중부)에 거점을 두고 저항한다. 때마침 캄보디아 노로돔 왕의 정적 시 보타가 1884년에 맺은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캄보디아 전역에 퍼뜨리고 있어, 프랑스는 양쪽 전선에서 싸워야했다. 껀브엉 지도자들은 장악한 도시 주변에 토성, 대나무 울타리 등을 쌓고 조세, 경제활동 일반적인 행정제도를 유지했다. 이들의 적은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앞잡이라고 인식한 기독교인들이었다. 1887년에 투이엣은 청나라로 피신하고, 캄보디아 반군이 진압당하고, 1888년에는 함응이까지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당하지만, 껀브엉 운동은 판딘풍 휘하에 북부 꽝닌 성의 산과 밀림을 위주로 1897년까지도 유의미한 반군 세력으로 활동한다.

2.5.2.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였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 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쩌우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보이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의 힘, 특히 일본 제국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하고, 오쿠마 시게노부 등 일본 지식인들과 만나며 저항운동을 계획했다. [9]. 동유운동에 이어,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면서 캉유웨이 옌푸 등 청 지식인들과 접촉하고, 베트남 유신회 (Duy Tân hội)와 광복회를 조직해 프랑스 식민주의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판보이쩌우는 결국 중국과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평생 풀로 콘도르 [10]에 구금당하게 된다.

판보이쩌우가 외부에서 활동한 무장 강경파라면 판쩌우찐은 내부 평화개혁파로, 외세에 의존한 독립에 반대했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전통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제자 르엉반깐과 응우옌뀐과 함께 동경의숙(Đông Kinh Nghĩa Thục)과 같은 무료 농민 교육기관을 창설해 저항의식을 지닌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1908년 농민 폭동이 일어나자 주동자로 지목되어 판보이쩌우와 마찬가지로 풀로 콘도르에 3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그의 추종자들의 압박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프랑스를 여행하며 호찌민과 만나 "베트남 애국회"라는 모임을 창설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남애국청원"을 발표한다.

그 외에 판반찌와 응우옌딘찌우 등 꾸옥응으 문학을 통해 식민 사회의 폐해를 비판하는 문화적 저항도 있었고, 옛날 유교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세력들도 있었다.

2.5.3. 1920년 이후 세대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자들

1920년대부터 샤스루-로바 고교, 알베르 사로 고교 등 베트남의 몇 안 되는 프랑스 초,중,고등학교들이 첫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프랑스 영향을 받은 젊은 지식인 계층이 반식민운동과 신관료들의 주축이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유럽으로 9만명이 넘는 군인을 파견하면서 더 포괄적인 참정권을 요구할 명분이 생기기도 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주로 전통 관료와[11] 엘리트층의 자녀들이었으며, 극소수는 (700명가량) 프랑스 본토에서 대학 교육을 수료했다. 프랑스인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참정권, 시민권, 요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상황에 이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식민주의를 부정하고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독립운동 세력이 있는가 하면, 제도에 협력하면서 내부로부터 점진적으로 개선해가자는 파가 존재했다.

전자의 주요 인물로는 판반동, 응우옌티민카이, 보응우옌잡같은 공산주의자들 외에도 질베르 쩐짠찌에우, 응우옌타이혹, 녓린 등 민족주의자들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소르본 대학교를 졸업한 기자 출신 응우옌안닌은 "안남청년의 이상"과 "금간 종" (La Cloche Fêlée)이라는 신문을 출판했고, 유교 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족독립을 제창했다. 또 반목하던 트로츠키파와 친인터네셔널파를 포함한 독립운동 계파들을 규합하면서, 30년대 독립 운동의 정신적,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활개치는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인도차이나 공안부가 1917년에 창설되었다.

후자 친불파들은 헌법주의당(Constitutionalist party)과 응우옌푸카이, 부이꽝찌우 등을 위시해 제도와 협력해서 식민지의 민주화를 얻어내고자 했다. 부유한 사이공-쩌런에 주로 거주하는 지주, 기업인, 의사, 변호사, 관료 등 토착 중,상류층을 주 지지층으로 하고, 진심으로든 사회적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든 식민주의자들의 선의에 어필해 식민지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보다 많은 권리와 자율성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트리뷴 앙디젠" (토착민 논단), "에코 안나미뜨" (안남의 메아리)등 프랑스어 언론을 개설하는 등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수단으로 이용해, 사법개혁과 민주주의 도입, 실권을 지닌 식민지민의 정치기관 도입과 같은 주제를 논의했다. 급진당 출신 온건개혁파 총독인 알베르 사로와 사회당 출신 알렉산드르 바렌느가 부임한 점도 이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인들의 호의를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개혁에 태생적으로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이들의 요구로 신설된 중기인민대표원은 자문 역할밖에 갖지 못했다. 게다가 후술할 옌 바이 운동을 계기로 총독부는 더 강경하게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친불파의 개혁 목소리 또한 억눌렸다. 환멸을 느낀 친불파들은 독립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으며 불명예스럽게 정치를 떠나거나, 소극적으로 식민정치를 비판하는 소소한 이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2.6. 베트남 국민당 결성

이렇게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타이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타이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개혁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친구들과 남 동 서사를 설립해서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한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이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상황을 타개 하기 위하여 1930년 옌 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이 결과 몇천명의 당원이 체포되고, 응우옌타이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최고의 영웅 호찌민의 지휘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 속으로 규합된다.

2.7. 제2차 세계 대전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쇼와 덴노의 반응, 1941년 6월 25일.[12]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대다수가 유럽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일본은 쿠데타로 새로 정권을 잡은 태국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과 동맹을 맺어 인도차이나를 졸라오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으로 가는 세 물자 보급로 중 가장 효율적인 보급로는 북베트남으로 통해 윈난성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보급로를 끊고 북쪽에 일본 국경 통제관을 도입하라고 프랑스를 압박했고 총독부는 승낙했다. 이는 인도차이나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치안 유지군에 불과했고,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역량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이 인도양을 봉쇄하고, 미국이 일본군과의 교전을 거부하여 군수물품 거래를 거절하고, 본국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인도차이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 상태에 놓인다. 일본은 다시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특권과 군사적 이점을 보장하도록 비시 프랑스를 압박했고, 반강제로 허락을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국 영국, 미국 등의 잔재를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 실시 후 괴뢰국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시스템을 인정하는 식으로 간접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는 비시 프랑스도 따지자면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마음대로 빼앗아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고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독일 눈치도 조금 봐 줘야 했기 때문이다.

한편 태국은 프랑스가 약화된 틈을 타 일본과 동맹을 맺은 뒤 인도차이나를 침공해 1893년에 빼앗긴 실지를 수복하자 했고, 우월한 공군력으로 1941년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서부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태국군은 코 창 해전에서 막힌다. 더 이상 지역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위험하다 판단한 일본은 중재자를 자처하고, 태국이 점령한 영토의 일부를 태국으로 편입시키는 국경 변경을 승인해주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 왕은 강화 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지만, 무력한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불만은 일축하고, 라오스에게 직할령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달래는 방향을 택했다. 한편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결정해서 태국-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지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태국을 무단 점령하고 2차세계대전 참전을 강요한다.

1941년 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며, 자원 채굴권, 수력 발전소 이용권과 농수산물 수탈권을 양도받게 되었다. 공납을 프랑스 따로 일본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것이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황인들의 연대로 백인들의 지배를 몰아낸다는 대동아공영권의 약속을 믿고 있었고, 일본 지배의 현실에 실망해 자주적인 독립운동밖에 없다는 신념을 강화한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권력이 생긴 셈이다. 이런 긴장된 동거 상황에서, 일본과 프랑스는 넓히기 위해 서로와 경쟁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 민족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은 대중국 상황이 안정되자 다시 인도차이나에 일본의 영향을 넓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일본군과 마쓰이 이와네는 황제 베트남 복국동맹회(Việt Nam Phục quốc Đồng minh Hội)의 황자 끄엉데를 추존하고, 친일 독립운동가들이나 종교단체들(호아하오교, 까오다이교, 캄보디아 불교)과 접촉을 늘린다. 프랑스 총독 장 드쿠는 전략적, 군사적 열세에서 대중적 지지로 식민지를 존속할 수밖에 없었고, 더 적극적으로 프로파간다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로 인해 친불파 인도차이나인들에게 행정/참정권을 소폭 늘리고, 프랑스와 베트남의 불가분한 관계를 강조하며 페탱을 우상화한다. 드쿠는 일본이 지원하는 끄엉데에 대응해 바오다이 황제와 자신의 파시스트 성향에 동조한 왕정주의자 지식인 팜뀐을 이부상서로 앞세운다. 또 총독부가 베트남 역사, 문학, 민족을 찬양한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물론 이는 목전의 위협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공안부는 협력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잡기 위해 어느 때보다 활발히 활동했으며, 일례로 랑썬에서 공산당 반란이 일어났을때 군사법정에서 주동자들을 대거 사형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았다.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여 1943년쯤 가면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된다.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식량 수탈을 당하면서 1945년 초 인구의 10%에 가까운 200만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제의 쌀 수탈로 200만명 넘게 아사한 1945년의 베트남

2.8. 몰락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제국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가 자유 프랑스 쪽에 붙을 것을 염려했고, 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1945년 3월 9일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까지 장악한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괴뢰국들( 베트남 제국, 라오스 왕국, 캄보디아 왕국)이 성립된다. 이에 자유 프랑스 샤를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질려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13]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14] 바오다이와 총리 쩐쫑낌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가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하였다.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8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한 달만에 베트남 전역의 정권을 장악한다. 호찌민은 바오다이로부터 전권을 받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국민혁명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찌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치달았다가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눈속임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요량이였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지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 패망 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 일본군 잔당 처리를 위해 남베트남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다시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바오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국으로 형식적으로 독립시켰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몰아붙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그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한편, 일본이 패망하자 라오스에서는 독립할지 프랑스 식민지로 돌아갈지를 둔 갈등이 있었는데, 독립파가 라오 이싸라(자유라오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연대하였으나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재개되자 지도부는 태국 등으로 망명갔다. 라오스-베트남 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쑤파누웡 주석이 이끄는 빠텟 라오당(파테트라오) 등이 게릴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후 1949년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고, 1953년에는 독립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군이 완전 철수했다.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하려던 작전이 실패한 후로도 꾸준히 독립 운동을 벌였고, 1949년에 다시금 독립을 선언하였다. 프랑스로부터 온전한 독립을 보장받게 된 건 1953년. 그리하여 캄보디아의 독립을 승인하여 모든 구성국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해체된 것은 제네바 합의 직후인 1954년 7월 21일이다.

독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영향력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민간 등에선 심리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두려움 등이 꽤 오래 남아 있었다.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이 대사관 내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화 자체는 사실이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을 무서워해서 시비를 걸지 않은게 아니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한 후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 중립을 지켜 공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굳이 따지면 남베트남과 우호적이었지만 남베트남 측에 파병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하자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3.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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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처



[1] 모든 구성국이 독립한 것은 1953년이지만 1954년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2] 물론 현대 라오스의 농업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프랑스 치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진 편이다. [3]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따르면 이는 베트남인들의 결속을 강화시켰으나 한편으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는 인도차이나인(캄보디아인, 라오스인)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이 주로 베트남인들을 관리로 기용하면서 인도차이나 내부에 베트남인과 라오스인, 캄보디아인 간의 격차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인도차이나라는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든 반면에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전혀 공감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가 그대로 독립한 반면에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각각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독립하게 되었다. [4] 굴절이 존재하는 프랑스어와는 달리, 동사원형과 명사 위주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5] 포르투갈어로는 콤프라도르. 식민 지배층에 협조하는 제3의 사회적 그룹을 의미한다 [6] 쌀의 경우는 총생산량의 6분의 1 [7] 엄밀하게는 1888년에 끝났지만, 지역적 저항군은 1913년까지도 항전했었다 [8] 한국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는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그대로 읽어 '근왕 운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조타'를 ' 찌에우다'라고 베트남식으로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 물론 '근왕'은 말 그대로 왕을 근면히 섬긴다는 의미의 일반 명사이니, '찌에우다' 같은 고유 명사와 달리 원음을 살려 쓸 유인이 좀 적긴 하다. [9] 판보이쩌우는 러일전쟁 시기만 해도 일본에 대해 호의적으로 봤으나, 이후 일본이 프랑스와 결탁해 일본에 있던 판보이쩌우를 추방하는 등 제국주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철저한 반일주의자로 굳혔다. [10] 꼰다오 섬에 위치한 반식민주의자들을 수감하는 교도소. 1861년에 건설되었으며, 1.4 평방미터의 "호랑이 감옥"을 120개 보유해 악명이 높다 [11] 코친차이나의 해직당한 관료들 외에도, 보호령의 꺼멋과 (Viện Cơ mật, 기밀원) 같은 유명무실한 기존 행정기관에 복무하는 관료들도 있었다 [12] 태평양 전쟁에 대한 쇼와 덴노의 반응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원본은 인도차이나 진격이다. [13] 이들 사이에서는 프랑스에게 핍박을 당하느니 차라리 같은 동양인 일본에게 투항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한다. [14] 이것을 일본에서는 명호작전(明号作戦)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