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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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태국 전쟁 กรณีพิพาทอินโดจีน Guerre franco-thaïlandaise Franco-Thai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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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40년 12월 8일[1] ~ 1941년 1월 28일 | |
원인 | |
장소 |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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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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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
일본 제국의 중재로 인한 전쟁 종결 | |
영향 | |
태국: 프랑스국 측에 600만 피아스터[3] 지급함, 일본에게 중재의 대가로 이후
남방작전 참여 및 추축국 가입을 약속함 프랑스국: 다음 영토를 태국에 할양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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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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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0년 10월부터 1941년 1월 28일까지 태국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으로 벌어진 태국과 프랑스국 간의 전쟁이다.2. 배경
영국,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이름으로 영국, 프랑스 양쪽에게 조금씩 떼어주는 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서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불평등조약들은 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이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완전한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대놓고 친일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4] 이를 계기로 둘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점찍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5][6]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대놓고 친일로 기울었고,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기권표를 던졌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된다.[7] 이에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뜯겼던 땅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땅은 모두 태국에 속해야 한다는 대태국주의 등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개판 5분 전으로 흐르게 된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남아있던 치외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했으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의 육군 원수 쁠랙 피분송크람(이하 ‘피분’)이 대중의 지지를 업고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를 모방한 ‘랏타니욤’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했고,[8]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피분은 태국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9] 미운털이 두 배로 박혔다. 피분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대인 비슷한 포지션에 놓아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당시 군대에 약 7만여 명이 자원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정신나간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웬만한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나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피분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골조로 한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3. 프랑스 침공의 여파
강력한 열강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 국민 가릴 것 없이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0]를 공격해서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분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거세져서 1940년 10월쯤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때려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벌이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이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11]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4. 국경분쟁과 전쟁의 시작
사실 낫질 작전의 성공으로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M.S.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군과 교전했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406 2대와 폭격기 F.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송크람은 프랑스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12],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13]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서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4:1 수준으로 태국 쪽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파일럿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 차이는 급강하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파일럿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얻어맞아야 했으며, 기껏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말 그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군이 1차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숫자로만 따져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데다가 프랑스군의 전차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였다. 사실 태국의 기갑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전차였다.[14]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가 낮은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 마자 무너져내렸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방면으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한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방면의 공세는 라오스 방면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5. 코 창 해전
5.1. 배경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해군 전력을 싹싹 긁어모아 결정적인 한타를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버틸 수 있으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15]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16]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군의 뒤게-트루앵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함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급 통보함 Dumont d'Urville과 Amiral Charner은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함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함이었는데, 이는 부겐빌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명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17]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속사포 3문으로 상당한 고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18]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Marne와 Tahure는 1차 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외에 가까웠다.
그 외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외의 물건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리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19]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20]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급 경순양함 두 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도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이닥쳤을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급 두 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따나꼬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챠누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에 함선 체급에 비해 고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작전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작전능력에 집중한 통보함(아비소)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따나꼬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즉,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5.2. 전개
1월 17일 오전 5시 30분, 프랑스 함대는 태국 해군이 정박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암 만(灣) 인근에 집결하였다. 이어서 5시 45분에 세 그룹으로 나누어 진입하였다. 그리고 6시 5분 경, 부겐빌급 통보함에서 발진한 르와르 130 수상기가 항구에 정박한 태국 어뢰정 두 척을 포착하였다. 이는 곧 기함인 라모트-피케로 전달되었고, 라모트 피케의 함포사격으로 태국 어뢰정 두 척은 허무하게 침몰당한다.[21] 이어 라모트 피케는 포격을 가해 태국의 해안 관측소를 파괴시켰고, 이를 통해 태국 공군으로의 정보 전달을 지연시켰다.
6시 38분, 라모트 피케는 대략 10km 떨어진 거리에서 북서쪽으로 항진하고 있는 태국 해군의 기함 톤부리를 포착했다. 라모트 피케는 즉각 포격을 가했고, 양측 함대는 포격전을 시작하게 된다. 중간에 섬을 끼고 벌이는 포격전임에도 불구하고 라모트 피케는 무려 초탄부터 명중탄을 냈는데, 이것이 톤부리의 함장이자 태국 함대사령관인 루앙 프롬 비라판 제독을 전사시켰다. 7시 15분 경 톤부리는 포격을 계속 얻어맞아 심한 화재가 발생했고, 이어 7시 50분에는 우현으로 심하게 기울어 연안에 좌초되었다. 포격전은 8시 40분까지 이어졌으며, 도중에 태국의 포함 돔부리 또한 격침당했다. 한편 초탄에 지휘관이 죽어버린 것은 태국 함대의 지휘계통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고, 이것의 영향을 받아 태국 측의 포격은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단 한 발의 명중탄도 내지 못했다.
8시 40분, 프랑스의 함대사령관 베렌저는 후퇴를 명령했다. 그리고 이는 작전계획에서 예측된 태국 공군의 공습 시작시간이었다. 뒤늦게 정보를 전달받은 태국 공군은 3개의 편대를 구성하여 각각 다른 방향으로 보내 프랑스 해군을 추격하였다. 이중 한 개 편대가 프랑스 해군을 발견하였으며, 급강하폭격기들이 라모트 피케를 목표로 공습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습은 9시 40분까지 이어졌다. 폭탄 한 발이 지근탄으로 폭발해 라모트 피케에 경미한 피해를 주었으나 사망자는 없었고, 태국 공군은 맹렬한 대공포화에 부딪혀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5.3. 해전의 결과
프랑스 측의 완벽한 승리였다. 태국은 이 해전으로 해방함 1척, 건보트 1척, 어뢰정 2척이 침몰당하고[22] 함대사령관 비라판 제독을 포함한 3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23] 반면 프랑스 측은 라모트 피케가 약간의 피해를 입고 승조원 2명이 부상당한 것 외에는 피해가 전무했다.한편 톤부리는 대파된 채 침몰되었지만 기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연안으로 예인되었다. 1941년 9월 26일 견인되어 대대적인 수리를 준비했으나 피해 정도가 너무 심해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스크랩 되었다. 상징성이 높은 배들은 정치적인 의미 때문에 수리비용이 새로 건조하는 비용보다 높더라도 수리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24] 톤부리가 바로 그런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수리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태국 측은 톤부리의 포탑과 관제탑을 뜯어내어 사뭇프라칸 주에 톤부리 기념관을 설립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작전 계획에서 의도한 전술적,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었다. 해전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의 깔끔한 승리였는데, 프랑스의 전쟁사학자 자크 모달은 이를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중 프랑스 해군이 전적으로 프랑스의 계획과 수단에 따라 싸워 승리한 유일한 해전"[25]이라고 평가했다.
6. 일본 제국의 개입
코 창 해전의 완승을 통해 프랑스 측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해안 포격을 통해 캄보디아 방면의 태국측 공세를 완전히 막아서는데 성공했다. 한편 베트남 방면 또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사실상 공세가 불가능 했다. 이에 전선은 사실상 교착 상태에 빠졌다. 태국 측은 여전히 압도하고 있던 제공권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했고, 반대로 프랑스 측은 해군을 동원해 밤마다 태국 해안도시에 포격을 가했다.프랑스가 해안 도시에 가하는 포격은 태국 측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또한 전선이 교착되면서 태국 사령부는 슬슬 프랑스 본국의 개입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에 1월 21일, 태국은 주태국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 제국에 중재 의뢰를 전달하였다.
7. 할양
태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일본 제국의 중재로 끝난 후 1941년 5월 9일 양국의 평화조약이 맺어짐과 동시에 일정 부분의 영토가 태국의 것으로 합의되었다. 해당 지역은 오늘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이루고 있는 지역 일부분에 해당한다.
이 때 획득한 지역은 1946년 10월 프랑스 제4공화국과의 조약을 통해 반환이 이뤄진다.
8. 여담
코 창 해전에서 태국군이 대패한 직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났으므로 프랑스의 승리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태국은 이 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여기는 듯하다. 방콕에는 전승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1]
태국측 주장 11월 28일
[2]
Aviso(아비소), 식민지 초계함으로도 번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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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공식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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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로 이탈리아와 독일이 가까워진 계기랑 비슷하다. 이탈리아랑 독일이 가까워진 계기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독일만이 국제연맹에서 기권표를 던져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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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태국은 19세기에 웬만한 근대화를 끝내놓은 만큼 진작에 현대식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1932년 쿠데타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보자.
# 육군에서는 수백대의 전차를 갖추고 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공군을 창설하였으나, 해군 측면에서는 근대화가 많이 미진했다. 특히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기술력을 쪽쪽 빨아먹은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담으로 일본 해군이 이로 인해 친영 정서가 강했던 것 처럼, 태국 해군도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인해 친일 정서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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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의 물적 측면에서의 근대화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 낼 수 있었으나, 운용방식 등 해군 교리 측면의 미진함은 결국 극복할 수 없었고, 이는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코 창 해전에서 굴욕적인 대패를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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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천황제 파시즘이 아닌 민족주의와 대중운동이 포함된 진또배기 파시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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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금지된 옷, 오른쪽이 허용되는 옷이다. [9] 중일전쟁 때문이다. [10] 기존에 프랑스에게 할양해주었던 태국의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던, 태국의 오른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식민지. 당시엔 비시 프랑스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1] 명목상으로는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 상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항복이었다. [12]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본국의 항복으로 인해 프랑스 식민당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던 데다가, 비시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군사력에 대한 매우 많은 제약을 받았다. [13] 이 때문에 태국 측에서는 개전일 또한 나콘파놈 폭격이 가해진 1940년 11월 28일이라고 주장한다(...) 추축국 대다수의 선제공격이 그렇듯 당연히 말도 안되는 명분이다. 애초에 11월 내내 양쪽은 폭격을 주고받았으며, 피해 또한 프랑스측이 훨씬 컸다. [14] 1940년에 일제 95식 경전차 50대를 주문하긴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야 배송되어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15] 덤으로 태국 해안도시쪽에 포격을 가해 피해를 강요하기 위함도 있었다. [16] 식민지로의 화력 투사를 목적으로 한 함선으로, 긴 항속거리를 대가로 한 빈약한 무장이 특징이다. 배수량도 거의 건보트 수준부터 구축함 수준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대충 해방함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해도 된다. [17] 딱 2,000톤부터 경순양함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1,955톤으로 건조되었다. [18] 이 역시 해군 군축조약에서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대한 제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 여기서 소국은 유럽의 소국들을 말하는 것으로, 당대 북유럽, 저지대 국가들의 해군이 이런 식으로 함대를 꾸렸다. [20] 일본이 자국 해군 현대화에 쓰고 남은 중순양함 함포였다. [21] 촌부리급 어뢰정 촌부리, 송클라가 침몰당했다. [22] 톤부리급 해방함 톤부리, 촌부리급 어뢰정 촌부리, 송클라, 라따나꼬신드라급 포함 돔부리 [23] 일본 측 사상자도 여러 명이나 있는데, 일본의 해군 고문단이 태국 함선들에 함께 승선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 측 사상자는 전원 장교로 이루어져 있다. [24] 대표적인 경우가 진주만 공습 당시 좌초된 미국 전함들인데, 매우 구형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하여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재사용했다. [25] 출처, 자국을 까는 것 맞다(...) 때문에 출처인 프랑스 위키백과에도 아니라고 츳코미가 달려있다.
왼쪽이 금지된 옷, 오른쪽이 허용되는 옷이다. [9] 중일전쟁 때문이다. [10] 기존에 프랑스에게 할양해주었던 태국의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던, 태국의 오른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식민지. 당시엔 비시 프랑스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1] 명목상으로는 독일과 프랑스는 휴전 상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항복이었다. [12]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본국의 항복으로 인해 프랑스 식민당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던 데다가, 비시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군사력에 대한 매우 많은 제약을 받았다. [13] 이 때문에 태국 측에서는 개전일 또한 나콘파놈 폭격이 가해진 1940년 11월 28일이라고 주장한다(...) 추축국 대다수의 선제공격이 그렇듯 당연히 말도 안되는 명분이다. 애초에 11월 내내 양쪽은 폭격을 주고받았으며, 피해 또한 프랑스측이 훨씬 컸다. [14] 1940년에 일제 95식 경전차 50대를 주문하긴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야 배송되어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15] 덤으로 태국 해안도시쪽에 포격을 가해 피해를 강요하기 위함도 있었다. [16] 식민지로의 화력 투사를 목적으로 한 함선으로, 긴 항속거리를 대가로 한 빈약한 무장이 특징이다. 배수량도 거의 건보트 수준부터 구축함 수준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대충 해방함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해도 된다. [17] 딱 2,000톤부터 경순양함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1,955톤으로 건조되었다. [18] 이 역시 해군 군축조약에서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대한 제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 여기서 소국은 유럽의 소국들을 말하는 것으로, 당대 북유럽, 저지대 국가들의 해군이 이런 식으로 함대를 꾸렸다. [20] 일본이 자국 해군 현대화에 쓰고 남은 중순양함 함포였다. [21] 촌부리급 어뢰정 촌부리, 송클라가 침몰당했다. [22] 톤부리급 해방함 톤부리, 촌부리급 어뢰정 촌부리, 송클라, 라따나꼬신드라급 포함 돔부리 [23] 일본 측 사상자도 여러 명이나 있는데, 일본의 해군 고문단이 태국 함선들에 함께 승선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 측 사상자는 전원 장교로 이루어져 있다. [24] 대표적인 경우가 진주만 공습 당시 좌초된 미국 전함들인데, 매우 구형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하여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재사용했다. [25] 출처, 자국을 까는 것 맞다(...) 때문에 출처인 프랑스 위키백과에도 아니라고 츳코미가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