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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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陸耽(? ~ 303)
삼국시대 오나라와 서진의 인물. 육항의 6남으로, 일단 사서에 알려진 육항의 자손들 중 제일 막내이다. 참고로 자는 불명. 몇몇 형들의 자(字)가 선비 사(士)자로 시작하기에 육탐도 예외없이 士로 시작할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봉황 3년(274년), 아버지 육항이 사망하고 다른 형제들이 군사를 나눠가질 때 유일하게 받지 못 했다.[1]천기 4년(280년), 오나라가 멸망하고 항복한 형 육기와 육운을 따라 서진에 임관해 평동좨주(平東祭酒)에 임명되었다.
태안 2년(303년), 육탐은 청렴하다는 명성이 자자했으나 형 육기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억울하게 처형당할 때 함께 연루되어 살해당했다. 사마영의 참군 손혜가 회남내사 주탄(朱誕)에게 편지로 슬픈 감정을 드러냈다.
「뜻밖에도 삼육(三陸)이 모두 하루아침에 소멸하여 도업이 타락하고, 그 독으로 인한 고통은 무척 심해 이루 말할 수 없도다. 국가가 존망을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어찌 한 사람에게만 미치겠는가!」
사람들이 육씨 자제의 죽음을 비통해 함이 이와 같았다.후에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영을 토벌하고, 각지에 격문을 뿌려 육기, 육운, 육탐 형제가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상을 씻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