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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2:28

위충(전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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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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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韋忠
생몰년도 미상

고대 중세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시대 서진, 전조의 인물. 자는 자절(子節). 사례 평양군 사람.

2. 생애

어릴 적부터 불의를 보면 참하는 성정을 가졌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만큼 확고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공부를 좋아하여 학문에 통달했으나, 집 안에 틀어박혀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남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또, 집안의 길흉을 알고 친인척들이 주는 지원품마저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12세 때 아버지가 죽자 상을 치렀는데, 슬퍼해서 초췌하고 지팡이를 이용해야 겨우 설 정도였다. 사공 배수가 빈소를 찾아오면서 위충이 성장하면 반드시 좋은 그릇이 될 것이라 했으며, 배수가 아들 배외를 시켜 위충이 상을 지내는 암자에 묘소를 조성하게 했다. 배외는 위충을 사모해 원조했지만 위충은 면회를 사절했으며, 위충의 집은 가난하고 변변찮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사람들은 위충을 걱정했어도 위충은 복상의 방식을 고치지 않았다. 훗날 배외가 상서좌복야에 오르자 위충에 대한 이야기를 사공 장화에게 알려주니, 장화는 위충을 벽소하였다. 그러나 장화와 배외가 가남풍에게 빌붙은 것이 싫었던 위충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평양태수 진초가 위충을 협박하여 강제로 공조에 임명했다. 산강족(山羌)이 군을 습격해 진초가 아들과 함께 도망치다가 몸에 적의 화살이 3발 박히면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위충은 칼을 빼들고 진초를 감싸며 몸소 적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는 울면서 주변에 이르길,
"내 몸으로 주군을 대신할 터이니, 그대들은 나를 위해 애도해주길 바라오."
라 하였다. 위충이 화살을 다섯 대나 맞아도 꼼짝하지 않자 적들은 "의사(義士)로다!"라 감탄하고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갔다. 적들이 모두 물러난 것을 확인한 위충은 부상당한 몸으로 진초를 업고 복귀하였다.

한나라의 소무제 유총에게 항복하여 진서대장군, 평강교위를 지냈다. 위충은 강족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던 중 패배하여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자, 활을 쏘아 적군을 죽이며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내 화살이 다 떨어졌고, 결국 강족에게 사로잡혀 항복하길 거부하다가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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