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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08:27:02

왕육(전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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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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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王育
생몰연도 불명

서진 전조의 인물. 자는 백춘(伯春). 옹주 경조군(京兆郡) 출신.

2. 생애

왕육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빈곤하게 살았다. 그는 양치기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매일 일하러 나가면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에 왕육도 부들을 꺾어 붓으로 삼고 틈만 나면 글자를 써서 공부하였다. 어느 날, 공부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양을 잃어버리고 이내 양 주인에게 책망당하자, 왕육은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배상금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때 경조군의 명사 허자장(許子章)이 그 소식을 전해듣고는 어린 왕육을 기특히 여기고 대신 주인에게 손해를 변상하였다. 그리고 왕육을 거두어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또래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니, 왕육은 마침내 경서와 역사에 통달할 수 있었다.

장성한 왕육은 키가 8척에 달했고, 수염은 3척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으며, 용모와 목소리 모두 보통 사람보다 매력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었다. 허자장은 자신의 조카를 왕육에게 시집보낸 뒤, 그를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자신의 재산도 나눠주었는데, 왕육은 이를 모두 받고도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자유분방한 성품 탓에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내가 사망하여 상을 치를 때도 조문객으로 온 이들은 지역에서 이름난 선비 너덧명뿐이었다고 한다.

경조태수 두선(杜宣)의 명을 받고 주부로 임관하였다. 이후 두선이 만년(萬年)의 현령으로 좌천되자, 두현(杜縣)의 현령 왕유(王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상사였던 두선을 놀리기 위해 찾아왔다. 왕유는 두선이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노하여,
"경이 과거 2천 석 벼슬에 있었을 때는 내가 경의를 표하였소. 이제 그대와 나는 같은 벼슬일진대,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 것이오? 혹시 작은 참새 같은 벼슬로 나를 만나려니 무서워 죽겠소?"
라며 두선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에 왕육은 칼을 움켜쥐고 왕유를 향해 꾸짖었다.
"임금이 능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예로부터 변함이 없었다. 부군(府君)께서는 죄로써 강등당하신 것이 아니라, 마치 일식과 월식처럼 그늘이 드리워졌을 뿐이다. 한데, 감히 작은 현의 현령 따위가 나의 부군을 업신여기고 모욕하느냐! 너는 내 칼이 무디다 하였는데, 감히 이와 같으랴!"
그러고는 왕유에게 달려들었다. 두선은 놀란 나머지 맨발로 뛰쳐나와 왕육을 잡고 겨우 뜯어말리니, 나중에 이 일이 알려지면서 왕육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사도 왕혼의 부름을 받고 그의 속관으로 일하다가, 남무양(南武陽)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왕육이 청렴하고 검소한 정치를 펼치니, 그 지역의 도적들은 모두 다른 군으로 도망쳤다. 이후 병주독호로 옮겨졌다가,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로 배속되어 진무장군을 지냈다.

영안 원년(304년) 7월, 유주를 장악하고 선비족과 연합한 채 힘을 키우는 왕준의 존재가 껄끄러웠던 사마영은 화연(和演)을 보내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왕준이 병주자사 사마등과 힘을 합쳐 사마영 토벌을 명목으로 거병하고, 100,000 대군을 일으켜 업성으로 진격해왔다. 그때 유연이 사마영에게 "흉노5부(部)를 발동해 이를 막을 것"을 청하니, 사마영은 기뻐하며 유연을 북선우, 참승상군사로 삼고, 그를 좌국성(左國城)으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이에 왕육이 간했다.
"지금 원해(元海: 유연의 자)를 보낸다면 이 왕육이 따라가 전하를 위해 그를 재촉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적기에 이르지 못 할까 두렵습니다."
사마영은 왕육의 말이 타당하다 여겨 그를 파로장군으로 삼고, 유연을 따라 좌국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영안 원년(304년) 10월, 본래 사마영을 배반할 뜻을 품고 있던 유연은 좌국성에 도착하여 우현왕 유선의 무리에 의해 대선우로 추대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왕(漢王)을 자칭하고 진나라로부터 독립하였다. 유연을 따라갔던 왕육은 꼼짝없이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유연에게 항복하고, 한나라가 사마등, 유곤과 세력을 다툴 때 유연을 위해 여러 조언을 바쳤다.

광흥 원년(310년) 7월, 상서우복야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광문제 유연이 병사하고 태자 유화가 황위를 이었으나, 초왕 유총이 정변을 일으켜 유화를 제거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소무제 유총은 왕육의 재능을 아껴 그를 사공으로 승진시켰다.

가평 2년(312년) 10월, 태보에 임명되었다.

가평 4년(314년) 정월, 태부로 옮겨졌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