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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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談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양주 오흥군(吳興郡) 오정현(烏程縣) 출신.
2. 생애
1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이웃 사람 두도(竇度)에게 살해당했다. 왕담은 은밀히 복수할 뜻을 품고 밤낮으로 두도를 감시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 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왕담은 마침내 복수를 하기 위해 은밀히 시장에서 삽과 호미를 구했다. 두도는 배를 타고 드나들면서 항상 다리 아래를 지났기에, 왕담은 풀숲에 숨어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두도의 배가 나타나 다리 아래를 지날 무렵, 왕담은 삽을 들고 다리 위에서 뛰어올라 두도를 습격했다. 두도는 응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왕담에게 죽임을 당했다.복수에 성공한 왕담은 그 길로 즉시 관청에 찾아가 자신의 죄를 자수했다. 오흥태수 공엄(孔嚴)은 사건의 전말을 듣고 왕담의 효심과 용기에 감탄하여 그 죄를 사면해주었다.
손은의 난이 일어나고 공엄의 모든 아들들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하여 공엄의 후사가 끊기고 말았다. 왕담은 회계(會稽)로 이사해, 온 힘을 다해 공엄 부자의 분묘를 수리하여 그에게 받은 은혜를 갚았다.
원흥 3년(404년), 태수 공흠(孔廞)이 왕담의 의로운 행적을 전해듣고 그를 효렴에 천거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공흠의 결정을 칭송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왕담은 부름에 응하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