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表, ruby=おもて)][ruby(日本, ruby=にほん)]と[ruby(裏, ruby=うら)][ruby(日本, ruby=にほん)]일본의 지역 구분 방법의 하나. 혼슈섬의 서쪽 해역인 일본해( 동해)[1]에 면한 쪽을 우라니혼(뒷일본), 세토내해(서일본 한정) 및 태평양(혼슈 기준 동쪽 해역)에 면한 쪽을 오모테니혼(앞일본)이라 부른다.
1900년 즈음부터 사용되었을 정도로 유서깊은 용어이다. 본래 학술적인 지역 구분으로 사용되던 용어였으나, 점차 대중들에게 퍼져나가면서 상대적으로 발전한 '오모테니혼'에 비해 발전이 뒤떨어지고 소외된 '우라니혼'이 비하의 뉘앙스를 띄게 됨으로써 차별용어로 인식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일본의 방송이나 공식석상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오늘날 방송에서는 각 지역이 면한 바다의 명칭을 따서 오모테니혼이 '타이헤이요가와'(太平洋側, 태평양 측), 우라니혼이 '니혼카이가와'(日本海側, 일본해 측)란 표현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나 사적으로는 종종 '우라니혼' 표현이 사용된다.
오모테니혼의 발전된 공업 지대는 태평양 벨트(太平洋ベルト)라고도 하며 이 표현은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우라니혼을 일본해 벨트(日本海ベルト)라고 부르는 예도 태평양 벨트에 비해서는 적으나[2] 간간히 나오긴 한다.
2. 개발 불평등
한국의 경부축 중심 개발과 비슷한 집중 개발의 결과로, 일본에서도 지역 균형 개발이 거론되면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 오모테-우라니혼 문제이다.2.1. 역사
사실 우라니혼 지역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륙이나 한반도와의 교역 창구로 번성하던 곳이었다. 한반도와 가깝게 위치한 시마네현에는 한반도에서 넘어오는 도래인과 직접적인 관련을 시사하는 신화나 지명, 신사가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3]이후로도 우라니혼은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을 보였다. 에도 시대에는 우라니혼의 해안가 항로를 따라 키타마에부네(北前船)가 도호쿠, 호쿠리쿠, 산인 지역의 물산을 교토와 오사카로 실어날랐다.[4] 호쿠리쿠의 카가 번은 인구와 고쿠다카가 많기로 유명해 번의 중심지 카나자와는 에도 시대 당시 일본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오모테니혼-우라니혼의 개발 불평등이 본격화된 것은 메이지 시대부터이다. 근대화정책을 시작한 일본 정부가 산업, 철도, 항만에 대한 투자를 오모테니혼 지역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일본의 물류 운송은 세토내해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데다가 도쿄, 오사카 등의 대도시도 오모테니혼에 있었고 또한 쿠로시오 해류를 통해 이동하던 당대의 항로와의 연계 역시 편했다. 그리고 오모테니혼 지역은 해안선이 복잡해 대형 선박을 들일 수 있는 항만을 만들기 적합했다. 온난하고 눈이 잘 오지 않는 환경도 항만을 만들기 유리한 요소였다.[5][6]
니가타의 경우 19세기 후반에는 일시적이나마 도쿄부(오늘날 도쿄도)의 인구를 앞지른 리즈 시절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개발과 투자는 오모테니혼 지역에 집중되었고,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큰 차이가 없었던 두 지역은 점차 발전상에 큰 격차가 나게 된다.
니가타 등지에서는 조선 및 만주, 시베리아 진출 등을 통해 뒤쳐진 상황을 극복하려 시도했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한 부흥 정책은 조에츠선 개통과 만주국 성립으로 어느 정도는 힘을 얻었지만 근본적인 수요가 크지는 않았다. # 2차대전 패배와 제국주의 체제 붕괴, 이어지는 냉전으로 인해 우라니혼 지역의 경제적 가치는 더욱 축소되어 현재에 이른다.
2.2. 현황
히로시마, 고베,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도쿄, 센다이 등 일본 혼슈의 어지간한 주요 도시는 모두 태평양에 면한 '오모테니혼'에 속한 지역이다.[7] 오늘날 일본 굴지의 대도시들이 위치한 오모테니혼에 비해 우라니혼 지역에서 주요 도시라 할 수 있는 곳( 정령지정도시)은 니가타 하나뿐이며[8], 인구 30만을 넘는 도시도 이시카와현의 가나자와, 도야마현의 도야마, 아키타현의 아키타 세 곳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키타는 이미 30만 선이 붕괴되었고, 나머지 두 곳도 아직은 40만이 넘는다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다.산인(山陰) 지방의 경우 가장 발전한 마츠에가 20만 명에 불과하며, 그 밑에서 그나마 도시라 할 만한 곳은 돗토리(19만), 이즈모(17만), 요나고(15만) 정도가 전부다.[9] 한편 인구 약 540만 명의 효고현의 북부도 산인 지방에 포함되나, 이쪽은 인구 10만이 넘는 시조차 없는 등 고베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가 밀집된 남부와는 매우 큰 격차를 보여주며 다른 산인 지방에 비해서도 발전도 및 인구수가 뒤쳐져 있다.
철도 교통의 경우에도 신칸센의 노선망에서 우라니혼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니가타와 수도권을 잇는 조에츠 신칸센, 조에츠 신칸센 타카사키역에서 분기하여 나가노를 거쳐 토야마와 카나자와를 잇는 호쿠리쿠 신칸센, 모리오카와 아키타를 잇는 아키타 신칸센[10]이 우라니혼 지역에 존재하는 신칸센 노선의 전부다. 그나마 이것도 수도권 혹은 대도시권에서의 출퇴근 및 지역 연결을 위한 거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토야마 이서 지역을 제외하면 우라니혼'만을' 연결하는 신칸센 노선은 없다.
우라니혼 지역에서도 가장 열악한 산인 지역의 경우 일단 철도부터 단선구간이 널려있고 그린샤 없이 1량은 자유석, 1량은 지정석으로 운행되는 특급열차가 존재한다. 산요 지방의 교통 중심지인 오카야마와 산인 지방의 주요 도시인 돗토리를 오가는 열차인 슈퍼 이나바조차 이렇게 운행 중이다.[11]
오늘날 우라니혼으로 분류되는 지역들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등 수자원이 풍부해 벼농사가 발달해 있다.[12] 산업개발 초기에는 포장수력을 이용한 중화학공업의 발전이 있었으나 에너지의 주류가 석탄과 수력에서 석유로 바뀌고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면서 머지 않아 쇠퇴하였다.
다만 호쿠리쿠에 해당하는 4개 현[13]은 현 주민의 소득이 전국 평균을 넘는 등 산인이나 도호쿠에 비하면 사정이 낫다. 이들 지역에는 도야마현의 금속기계나 이시카와현의 전자산업 등 산업 집적지가 있으며, 오모테니혼 지역 노선의 자연재해 타격 대비 및 수요 충족을 위해 호쿠리쿠 신칸센 노선이 지어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이현은 현재 일본에서 이온몰이 없는 유일한 도도부현이며, 그 옆의 이시카와현은 2010년대 후반에야 첫 매장이 들어오는 등 이들 지역은 프랜차이즈 대기업들의 입점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14]
3. 미해당 지역
혼슈섬 외 나머지 본토 3섬(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는 오모테니혼-우라니혼의 분류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규슈는 동해에 면한 후쿠오카현이 가장 발전한 지역이다.
- 시코쿠는 남·북부 간 격차가 큰데, 여기서는 오히려 태평양이 낙후된 쪽이다. 세토내해를 낀 북쪽 카가와현, 에히메현은 세토내해를 같이 낀 주고쿠의 오모테니혼 지역(산요), 간사이 지역의 공업단지 및 대도시권과 교류하며 공생하고 있다. 반대로 태평양과 세토내해를 같이 낀 도쿠시마현은 도시 규모 및 인구수는 이 두 현에 크게 뒤지지 않지만 현재는 쇠퇴한 지역이다.[15] 태평양만 낀 고치현의 낙후도는 다른 3개 현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 홋카이도의 삿포로는 수백 미터 차이로 직접 닿은 바다가 없는 내륙 도시이다. 삿포로와 맞닿은 길쭉한 해안과 그 서쪽 만에 위치한 오타루가 삿포로의 항구로 기능하는데, 오타루는 동해에 면해있다. 한편 20세기 후반부터 발달한 삿포로 남쪽의 토마코마이는 태평양에 면해있다. 오타루는 차로 한 30~40분,[16] 토마코마이는 1시간 10분 정도로 둘 다 삿포로에서 그리 멀지는 않다. 이는 삿포로 자체가 홋카이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도내 최대의 계획도시로 만든 곳이라서 생긴 일이다.
우리니혼과 오모테니혼은 해안 지역을 기준으로 한 용어이기 때문에 내륙지역은 완전히 논외로 친다. 일본은 국토의 형상이 좁고 길쭉한데다 여러 섬으로 분리돼 있어서 대부분의 국토가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에 사실 완전히 내륙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 적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험한 산지이기에[17] 일본 열도의 내륙은 한국에 비해서도 두드러지게 대도시가 적은 편이다. 삿포로가 그나마 해안에 직접 접하지 않는 도시로는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인구 197만)이나 상술했듯이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교토, 사이타마(각각 145만, 133만)도 행정구역상으로만 보면 직접적으로 해안에 접해 있지는 않지만 이들 도시가 속해있는 도시권인 케이한신, 수도권 전체로 보면 해안지역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내륙현은 시가현, 기후현, 나가노현, 야마나시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정도뿐인데 사실상 도쿄권인 사이타마를 제외하면 정밀공업 등이 발달한 나가노현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고 군마현 같은 곳은 미개의 땅 군마 같은 깡촌 지역드립까지 있을 정도이다.
한편 혼슈에서 후쿠오카현과 맞닿아있는 야마구치현은 일본해( 산인)와 세토내해( 산요)를 모두 끼고 있어 양쪽으로 다 불러지지만 보통은 후자로 많이 분류되는 편이다.[18]
4. 일화
- 일본의 야구인 노무라 카츠야(일본해 연안의 교토부 교탄고시 출신)는 현역 시절 나가시마 시게오 등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는 본인의 신세를 일컬어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가 해바라기라면, 나는 쥐죽은 듯이 '일본해'에 피는 달맞이꽃이다"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 우라니혼에 포함되는 니가타현 출신의 거물정치가로 '일본열도개조론'이라고 불리는 국토균형발전계획을 제시한 인물이 다나카 가쿠에이다. 다나카가 일본열도개조계획을 추진한 배경에는 우라니혼의 오모테니혼에 대한 반발 의식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5. 여담
-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 대해서도 함경도, 강원도 동해안 일대( 영동)를 우라니혼에 대응시켜 우라조센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은 최대도시 서울은 황해 쪽에, 제2의 도시 부산은 동해에 면해있어서 한쪽 해안의 쏠림은 일본보다는 좀 덜한 편이다. 다만 지형 자체는 서쪽 황해가 압도적으로 평야가 많으며 동쪽은 태백산맥이 내려와 주로 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서쪽 지역의 경제력이 우세했다. 일제강점기 시기만 해도 전라도 쪽에 지주가 많았고 대구는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사실 교역의 측면에서도 구시대엔 주된 교역국은 중국과 일본 둘뿐이었는데 중국과 면한 황해에 비해 동해는 전근대에 교역량이 중국만큼은 아니었던 일본과 면해있고, 풍랑도 매우 거친 편이라 항구로서의 입지는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19] 동해를 통한 해상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20] 즉 동해안은 오늘날 중국의 중요도가 비교적 줄어들고 미국, 말라카 해협[21] 같은 전세계 초장거리 교역이 가능해지면서야 중요도가 올라간 케이스.
- 이 표현 외에도 일본어에는 오모테( 表)-우라( 裏)를 맞대응시키는 표현이 꽤 있다. 앞산- 뒷산도 일본어로는 '오모테야마', '우라야마'라고 하고, 야구의 ○회 초/말도 일본에선 '~카이 오모테', '~카이 우라'라고 한다. 고문헌의 페이지 수를 가리키는 장차(張次)도 <숫자>a/b (한국에선 종종 <숫자>ㄱ/ㄴ) 로 표시하는 것을 일본에선 '오모테/우라'의 앞글자를 따서 <숫자>オ(오)/ウ(우)라고 한다.
[1]
일본 내 다른 지역에서도
'동해'(도카이) 명칭을 사용하는 관계로 이 문서에서는 혼동을 막기 위해 일본 영토 시점에서는 일본해, 한국 영토 시점에서는 동해로 서술한다.
[2]
보통 '벨트'는 집중 공업 지대를 가리키는 데 쓰이는데, 사실 우라니혼에는 공업 집중 지대가 거의 없다.
[3]
스사노오 문서 참조.
[4]
오사카로는
칸몬 해협을 넘어
세토 내해를 통해 직접 들어갔고 교토 방면으로는 오사카나
츠루가,
오바마 등을 통해 육로이동을 하였다.
[5]
역설적으로 현대에는 수심이 얕은 태평양 연안 항만이 수에즈맥스 규격의 대형 화물선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의 선사들은 화물 간선을 한국이나 중국으로 운항한 다음 일본의 항만은
부산,
상하이,
홍콩 등의 허브 항만에서 지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6]
19세기 당시에는 동해 연안은 해류가 들쭉날쭉해 항로로 적합하지 않았다. 수에즈맥스 화물선의 일반화에 앞서, 해운에서 해류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츠가루 해협이
GHQ에 의해 공해로 지정되고,
고베 대지진으로 고베항의 파이가 작아지며 현재처럼 동해 위주 항로가 활성화되었다. 부산과 한국 입장에서는 이득을 본 셈이다.
[7]
단,
교토는 현 행정구역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내륙 도시이다.
교토부의 북부 해안 지역은 우라니혼이지만 교토의 본 시가지에는 속하지 않는다.
[8]
그나마
니가타도 근대까지는 도쿄와 인구 1위를 다툴 정도로 꽤 큰 도시였지만 현대에는 개발에서 소외되어 지금 정도 중간급 도시로 위상이 떨어진 것이다.
[9]
그나마 마츠에/사카이미나토(3만)/요나고는 차로 30분 만에 오갈 수 있는
도시권이기는 하다. 이즈모도 요나고에서 1시간 정도이다. 그래서 돗토리 현에서 시 인구는 요나고가 돗토리시보다 더 적지만 도시 규모 자체는 요나고가 더 크다.
[10]
아키타 신칸센은 기존선을 신칸센이 달릴 수 있도록 개궤만 한
미니 신칸센이라 외부 요인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11]
산인 신칸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매번 공사 난이도 및 수요의 문제로 인해 기각된다. 당장 연계 가능한 대도시들이 있는데다가 시설 기반도 어느 정도 갖춰진
시코쿠 신칸센조차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된다.
[12]
니가타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고시히카리는 한때 한국에서 판매하는
즉석밥 브랜드로도 쓰였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13]
후쿠이, 이시카와, 도야마, 니가타
[14]
이온몰은 인구가 적은 지역에도 매장을 곧잘 낸다. 대표적으로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는 용인시 정도 되는 크기의 구석진 곳에 약 13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온몰이 2곳이나 있다.
[15]
도쿠시마역 앞 상가 거리 중 대다수 가게가 항상 닫혀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의 1인당
GDP는 오히려 두 현을 상회한다. 또
JR 시코쿠의 역 이용객 또한
타카마츠역에 이어 2등에 해당하며 에히메현의
마츠야마역과는 2배에 가까운 차이가 난다. 즉, 돈도 잘 벌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인데 그 여파가 지역에 돌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통계와 현실의 괴리에 당황해하는 경우도 적잖다.
[16]
실제로 삿포로 여행객들은 오타루를
당일치기로 갔다올 때가 많다.
[17]
한반도는
만주와의 경계에 있는
백두산 쯤 되어야 2750m이지만 일본은 간토 해안가의
후지산이 3770m에 달하며 나가노~기후의 중부 산맥엔 3000m의 고봉들이 즐비해있다. 한국은 1500m면 굉장히 높은 산이니 일본 내륙이 한국보다 2배는 더 해발 고도가 높은 셈이다.
[18]
지역 자체는 많이 낙후되었지만 인접한 산요 지방인 히로시마현, 시코쿠 북부의 에히메현과 교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현 내 최대도시인
시모노세키는 일본해에 접하고 있으며 지리적 이점을 통해 과거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곳이었지만, 세토내해에도 접하고 있고 같은 현보다 오히려 옆동네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와 연계해 성장한 지역이니 논외이다.
[19]
황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갑문 없이는 항구의 정상적인 운용이 어렵다.
[20]
그래서 전근대에 한국-일본의 해상 루트는 주로
쓰시마섬을 통해
규슈로 이동한 뒤
세토내해를 따라 일본 열도 중심부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조선 통신사 역시 그 루트로 갔다.
[21]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 서쪽 어디를 가도 이곳을 거친다.